트러스트 Trust by 에르난 디아스
2025-11-04 14:46:04
네 가지 상이한 서사를 직조하여 금융 자본의 신화가 어떻게 구축되고 해체되는지를 탐구하는 수작입니다. 이 소설은 진실과 허구, 윤리와 야망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들며 독자를 지적인 미로 속으로 이끌고 있습니다.
독서모임에서 어느 회원이 밀드레드의 천재성을 금융과 어우러져 마치 윤리관이 무색한 자연과 같은 초월적 경지에 이른 신의 존재로 해석하신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저는 그럴 경우 밀드레드가 앤드류를 범죄자라고 부르며 2년간 말도 안한 것이 그것과 맞지 않는 것 같다 라는 생각이 계속 남아있었는데 좀 더 생각해 본 결과 자신의 지적 탐구, 유희가 노골적인 범죄 행위로 오염되는 것에 대한 분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대공황때 밀드레드의 공매도 설계가 이해가 가더군요. 인간적인 선악의 영역을 넘어선 자연 법칙의 구현자와 같은 위치에 놓는 해석이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는 것이지요.
이 소설의 구조적으로 제목과 각 섹션의 명명에서 우아함을 보입니다. 처음과 마지막을 『채권』 (Bonds)과 『선물』 (Futures)이라는 명확한 경제 용어로 수미쌍관의 형태로 묶어내고 있지만 소설의 제목인 트러스트(Trust) 에서도 드러나듯이 이 모든 경제 용어가 이중적인 의미를 포함합니다.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것은 신뢰 trust의 배반입니다.
앤드류 베블은 아이다 파르텐자에게 기밀 유지 서약(신뢰에 대한 법적 구속)을 강요하고, 아이다의 연인 잭은 특종을 위해 원고를 훔치려 했으며, 심지어 아이다의 아버지마저 딸의 원고를 훔치는 배신을 저질렀습니다. 베블은 아내 밀드레드의 진정한 모습을 숨기고 안전한 여성상으로 대체하여 그녀의 실체를 배반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아이다 역시 어쩌면 밀드레드의 미래 futures 를 훔쳐서 자신의 마지막 역작을 남기는 것이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행위는 밀드레드의 목소리를 되살려내는 서사의 복원이겠지만 동시에 베블이 감추려 했던 진실을 드러내기에 결국 기밀 유지에 대한 또 다른 형태의 배신이겠죠?
아이다의 아버지는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로서 돈을 상품 중의 신이라 칭하며 월스트리트를 그 신성한 도시라고 비유했으며, 자본가의 왕 앤드류 베블은 자신의 부가 미덕의 증거이며, 금융 행위가 공익과 일치한다고 주장합니다. 결국 두 인물은 서로 다른 이념의 극단에 서 있지만 돈을 통해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을 드러내며 자본의 종교화라는 신념 구조를 공유하는 동전의 양면 같은 존재입니다. 또한 어떤 이념, 사회의 배경을 가졌든 '자신의 여자'들이 있어야 할 자리가 있다고 믿는 당시의 가부장적 질서를 당연시 하는 존재들이기도 하죠.
책을 읽은 후에 에르난 디아스가 확실히 남성 작가가 맞는지 새삼 그의 사진을 찾아보았는데요. 그는 아이다를 통해 여성 서사를 감정의 과잉이나 희생의 낭만화 없이, 여성이 겪는 일상의 미세한 억압과 균열을 미묘하게 드러냅니다. 남성 작가들이 흔히 범하는 ‘남성성의 시선으로 가두어진 여성상’의 전형을 벗어난 드문 사례로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의 다른 작품들도 기회가 되면 읽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던 좋은 독서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