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의 멜랑콜리 1
2025-12-30 13:44:52
이작품은 올해 노벨상 수상자인 헝가리 작가 크라스너호르카이 라슬로의 부커상 수상작이기도 합니다. 1987년에 출판되었으니 당시의 공산체제하에 있던 헝가리의 사회를 빗대 작품이라는 전제가 그리 빗나간 것은 아닐 것입니다. 특유의 종말론, 묵시록적 성향과 엄청난 만연체로 읽기 힘들다라는 평이 있는 작가입니다.
기차가 무한히 연착되어 일등석 표의 의미가 없어진 비상용 열차를 탄 중년의 플라우프 부인의 경악스러운 경험으로 소설은 시작됩니다. 치욕스런 눈길과 더 수치스러운 오해로 인한 상스러운 욕을 먹는 일화, 시끄럽다는 이유로 노파를 때려서 기절시키는 남자와 그에 무관심한 주위 사람들은 "모든 정상적인 기대는 무용지물이 되었고, 일상적인 삶의 기능은 예상을 못 할 정도로 난장판"의 전형같은 모습을 보입니다. 마을에 도착해서도 계속되는 기이한 공포는 독자로 하여금 무질서한 이 사회의 아노미 상태를 더욱 확신케 합니다. 자신의 아파트에 돌아온 플라우프 부인은 아기자기 꾸며진 자신의 안전한 보금자리를 떠나지 않겠다 다짐합니다. 그 평화를 깨치며 세속적 권력욕의 화신인 에스테르 부인의 침입같은 방문이 있게 됩니다.
에스테르 부인은 마을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남편과 별거 중이고 이 경찰서장과 연인관계입니다. 이 인물은 물리적으로 정신적으로도 거칠고 권력욕과 야망이 강합니다. 모두가 느끼는 세기말적 불안이 에스테르 부인에게는 자신이 쥐어잡아야할 새시대의 기회로 보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기꺼이 타인을 이용해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성취하려 하죠. 자신을 냉정하게 내쫓은 남편이 자신이 하려는 청결사업, 정치적 입지에 필요하기에 남편의 수발을 들어주는 우체부 벌러스커와 그의 어머니인 플라우프의 도움이 필요했던 것이죠. 서른 다섯의 벌러스커는 사람들이 백치라고 뒤에서 수근대는 사람이지마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관을 가진 인물입니다. 우주의 신비를 느끼며 하늘만 바라보거나 걸을 때는 갈림길을 살피느라 땅만 보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실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를 판단하는게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이런 마을에 세상에서 가장 큰 고래의 사체를 구경거리로 선전하는 서커스단이 오게됩니다. 20미터가 넘는 트럭에 실려있지요. 사람들은 고래가 세기말적인 불길한 징조라고 느끼지만 벌러스커는 그 거수(巨獸)를 보고 제왕이라고 말하고는 큰 생각끼리는 연결되어 있다고 느낍니다. 그 거대한 영물의 사체를 보고 자신이 올려다 보던 우주의 신비로운 한 조각과 같은 경이로움으로 다가온 것이지요. 이 작고 절름거리는 걸음을 한 우체부가 에스테르 부인의 꾀임에 넘어가 에스테르에게도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하며 그 전직 음악학교장을 찾아가는 것으로 챕터가 끝이 납니다.
기계공학적인 치밀한 묘사때문에 흥미진진 했다는 분도 계셨고 같은 이유로 지루하거나 산만한 글이었다는 평도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공산주의 몰락의 전조같은 현실적인 풍경에 초현실적인 거수 고래 같은 마술적 리얼리즘 같기도 하고 부조리적 블랙 코메디 같기도 했습니다. 쥐 세마리가 정찰나와서 빵을 먹는 장면은 라슬로의 묘사가 어느 순간 정밀한 카메라가 되어 애니매이션을 영사하는 느낌이었습니다. 그 후로는 시각적으로 읽히는 경험을 했습니다. 이제 라슬로의 문체도 좀 익숙해져서 다음 장이 더 기대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