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매일을 일요일처럼 사는 남자 크눌프
2026-04-14 12:15:27
열네살에 첫사랑이자 짝사랑이었던 여인의 배신으로 인간의 말을 믿을 수 없어서 피상적인 관계맺음 밖에 못하는 크눌프가 있습니다. 고양이처럼 간섭하지 않고 간섭당하길 원치 않지만 존재만으로도 우아하고 매력있는 존재라서 누구나 그와 함께 어울리기를 원하는 방랑자입니다. 영혼은 흙에 뿌리를 내린 꽃과 같아서 결코 다른 영혼과 섞일 수 없습니다. 그저 향기나 씨앗을 전해주는데 그 마저도 바람에 의존해야 하는 의지대로 될 수 없다는 것이 크눌프가 생각하는 인간관계입니다. 그래서 자신도 몰랐던 자신의 아이에게도 가까이 갈 수 없고 그저 휘파람이나 불어줄 수 밖에 없었다 봅니다. 마지막 흰눈의 들판에서 죽어갈때 신과의 대화로 자신의 쓸모를 인정받은 크눌프는 평화롭게 마지막을 맞습니다. 길지 않은 소설이지만 찾아보면 구석구석 생각을 하게 만드는 구절들이 이어져 있기도 합니다. 그에게는 불꽃놀이가 지속되지 않기에 아름다운 것이고 모자에 꽂을 목서초가 금세 시들어도 상관없는 헛된의 미학이 있었나 봅니다. 그런 그도 죽음 앞에서 신을 만나 자신의 삶이 쓸모없었다며 탄식을 합니다. 열네 살에 자신을 죽게 내버려두지 않았던 신을 원망하기도 하죠. 크눌프 자신일 수도 있고 작가 헤세일 수도 있는 이 신은 크눌프의 인생을 신인 자신이 모든 순간 함께 했노라며 (마치 도깨비의 모든 날이 아름다웠다는 말처럼) 그의 인생에 의미를 부여합니다.
솔직히 말해 크눌프가 얼굴 덕을 꽤 봤다고 생각합니다만(lol), 그렇게 꾸준히 외모를 가꾸고 다시 태어나도 어린 '잘생긴' 소년으로 태어나고 싶어하는 그이지만 구세군, 성인(saint)이 되고 싶어하기도 합니다. 진리를 추구할 것 같은 그이지만 실은 그렇게 말할 때 뿐입니다. 사색하는 성향이지만 끝까지 진리를 추구하는 힘은 아마 부족한 듯합니다. 그가 추구한 자유로움은 육체적 혹은 사회적으로 얽매이지 않은 정도의 자유로움이었다고 봅니다. 진리추구의 실천력이 부족했듯이 그는 정신의 완전한 자유로움을 추구하지는 않습니다. 그랬다면 그가 그렇게 편력수첩에 집착하지 않았을테죠. 그는 여전히 사회의 테두리 안에서 필요조건인 편력수첩을 완벽하게 만들어 지니고 다닙니다. 그것이 그에게 경관들과의 마찰을 줄이고 숙식을 구걸하지 않고 제공해달라는 일정정도의 정당성을 부여하니까요. 저는 그가 비겁한 겁쟁이 혹은 기질적으로 엮임을 원치 않는 사람이라고 보는데, 그런 노력들을 하는게 위선적이라기 보다 오히려 인간적으로 느껴졌습니다. 크눌프는 영원한 일요일을 사는 사람이 아니라, 언제든 월요일이 올 수 있음을 알면서도 끝내 일요일을 선택해 살아가는 사람, 그렇게 매일매일을 일요일 처럼 사는 사람. 그렇게 느껴져서 저는 크눌프를 애정하나 봅니다.
헤세가 1935년 독자에게 쓴 편지 중 일부는 이렇게 말합니다. "만약 크눌프같이 재능 잇고 생기 가득한 사람들이 우리의 세계 안에서 자리를 찾지 못한다면, 이 세계는 크눌프와 마찬가지로 그에 대해 책임이 있습니다. 또한 제가 독자들에게 충고하고 싶은게 있다면, 그것은 사람들을 사랑하라는 것, 연악한 사람들, 쓸모없는 사람들까지도 사랑하되, 그들을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물론 삐딱한 저는 그럼 재능 없는 사람들은? 이라고 반박하고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역자 이노은님이 작품해설에서 공감되고 마음에 드는 문장으로 끝을 내셨는데 그를 인용해봅니다.
"시민의 직업윤리와 기준으로 볼 때 크눌프의 삶은 무가치하고, 아무 쓸모 없는 것일 수도 있으나, 그런 그를 받아들이고 그만의 재주를 뽐낼 기회를 줄 수 있는 사회라면 좀 더 다채롭고 평화로운 사회일 것이다. 크눌프는 선망의 대상도, 동정의 대상도 아니다. 어떤 길을 더 즐겨 걷느냐고, 어디까지 포용할 수 있느냐고, 삶이 개인과 사회를 던지는 질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