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기가 고기로 태어난 것처럼 넌 어부로 태어났으니까
2026-04-28 11:33:02
<<“하기야 저 고기도 내 친구이긴 하지.” 그가 큰 소리로 말했다. “저런 고기는 여태껏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어. 하지만 나는 저놈을 죽여야만 해. 하지만 별들은 죽이지 않아도 되니 다행이지 뭐야.”
날마다 사람이 달을 죽이려 해야 한다고 상상해 봐, 하고 노인은 생각했다. 아마 달은 달아나 버리고 말 거야. 하지만 인간이 날마다 해를 죽이려 해야 한다고 상상해 봐. 우리는 운 좋게 태어난 거야, 그는 생각했다>>
별들은 죽이지 않아도 되다니라니 이 문장을 읽을 때 이 무슨 생뚱 맞은 말인가 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가슴 한쪽이 따뜻해지는 느낌이었다. 노인은 어부로 태어났고 물고기는 물고기로 태어났기에 죽이고 죽임을 당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노인은 자존심때문에 그리고 어부이기 때문에 청새치를 죽일 수 밖에 없었다. 물고기를 사랑해서 죽일 수 밖에 없었다.
그 타고난 소명 (calling)을 다하는 그였기에 별을 죽이지 않아도 되는 소명, 달이나 해를 죽이지 않아도 되게 태어난 것에 감사를 한다. 이것이 이 촌부가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감사하는 태도이다.
<<"난 죄가 뭔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데다 죄를 믿고 있는지도 확실하지 않아. 고기를 죽이는 건 어쩌면 죄가 될지도 몰라. 설령 내가 먹고살아 가기 위해, 또 많은 사람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한 짓이라도 죄가 될 거야. 하지만 그렇게 되면 죄 아닌 게 없겠지. 죄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말기로 하자. 그런 것을 생각하기에는 이미 때가 너무 늦었고, 또 죄에 대해 생각하는 일로 벌어먹고 사는 사람도 있으니까 말이야. 죄에 대해선 그런 사람들에게나 맡기면 돼. 고기가 고기로 태어난 것처럼 넌 어부로 태어났으니까.">>
여기서 또 한번 이 촌부의 무지를 가장한 지혜가 담겨있다. 어부가 물고기를 잡는 것이 무슨 죄가 될까 그럼에도 그는 이유가 무엇이 되었든 물고기라도 생명을 죽이는 것이 혹시 죄가 되지는 않을지 걱정이 된다. 그러나 곧 그것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맡겨놓자고 한다. 그런 우주적 질서와 생명에 대한 거대한 담론을 이야기 하는 학자들이 알아서 할 것이라고 짐을 덜어내버린다. 현명하다.
하지만 노인이 인간은 파멸할 지언정 패배하지 않는다라는 니체적 결기의 세련된 아포리즘을 입에서 내뱉을때 이제껏 공감하던 이 늙고 뚝심있는 촌부의 말이 아니라 헤밍웨이가 이 소설의 주제는 이거지라고 선언하는 느낌이 들면서 읽는 리듬이 깨져버리고 말한다. 차라리 누군가의 말이 기억에 남아 있다가 무심코 튀어나왔다는 설정이었다면 노인의 거칠고 상처입은 손과 어울리지 않았을까.
소년 마놀린의 노인에 대한 연민과 사랑도 이 소설이 표명하는 불굴의 의지, 꺽이지 않는 인간의 존엄 같은 다소 클리셰같은 거대 주제들과 별개로 그저 사람다운 온기를 느끼게 해주어서 좋았다. 이제 노인과 소년이 같이 바다로 나갈 터이니 나는 좀 더 편안함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