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끄적] 절벽에 서있네
2025-10-28 12:51:57유방암 투병 3년차,
항암치료를 했던 기억도
방사선 치료나 수술을 했던 기억도
저 먼 기억 서랍에 넣어두었지만
잊을 때 즈음 주사를 맞기 위해 병원에서 연락올 때마다,
혹은 약을 먹을 때 마다 불쑥 떠오르곤 해.
사실 내가 무너졌던 때는,
유방암 투병이 아니었어.
유방암 표준치료를 다 받고
부작용으로 이름도 생소한 병명을 진단받을 때도 아니었어.
아빠,
우리 아빠가 갑자기 쓰러졌을 때였어.
내가 막 표준치료를 끝내고 조금씩 암에서 회복되어갈 때 즈음이었어.
엄마한테 아빠가 119에 실려갔다는 이야기와
중환자실에 입원해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지.
돌이켜보면
유방암으로 진단 받거나,
치료받았을 때에도 한번도 울지 않았었던 것 같은데
아빠가 쓰러졌다는 연락을 받고, 처음으로 눈물이 나더라.
아빠가 나와 남은 생을 함께할 수 있지 않을 수도 있을거란 생각에
혹은 지금의 나와 눈빛으로 깊은 교감을 하는 아빠가 아니라,
다른 아빠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평생을 통틀어 모르는 사람과 하루 이틀 대화한 양보다도
아빠와 대화한 절대적인 양이 적지만
그저 나에게 아빠는 묵묵하게 소중한 나무같은 사람이었나봐.
아빠 옆에서 아빠가 일어나길 빌며,
어떤 아빠든 소중히 여기겠다는 다짐을 수없이 하며
아빠의 병을 공부해가며
아빠 곁에 일년동안 있었고
다행히 우리 아빤 일어났어.
약간의 후유증은 있지만
나를 전혀 알아보지 못하며, 그 어떤 신체부위도 다루지 못하는
중환자실에 있던 아빠를 생각해보면
이건 정말 하늘의 뜻이다 싶더라.
문제는
아픔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는거야.
그리고 오늘의 나는,
마지막이라 여기고 싶은 이 아픔 가운데
헤쳐나갈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이 상황 속에서,
그저 가슴으로 느낄 수 있는 절대 신에게 빌며
내 마음이 평안해지길 간절히 바라는 중이야.
힘듦으로 가득했던 나의 20대 후반들을 넘어,
절망이 깃들고 있는 나의 30대 초반을
어떻게 지나갈지 나도 모르겠어.
그저 오늘도 절벽 끝에 서있네.
이 절벽이 마지막 절벽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상상하고 싶지도 않아.
이보다 바닥이 있을까. 싶을 때,
그믐을 만났고,
책 선물을 받았어.
그리고 오늘은,
이런 나도 괜찮다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위안을 얻는 중이야.
다시 일어나고 싶은데
일어날 수 있을까 모르겠지만,
예상치 못한 책 선물에
하루를 잘 채워보자 또 한번 마음 먹고 있어.
이런 마음을 갖게 해준 그믐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