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탄탱고』를 읽고
2025-12-19 16:07:53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자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의『사탄탱고』를 읽은지도 한달이 넘는데 소설 속 문장이 문득문득 떠올라 나를 괴롭힌다. 이 소설을 읽을 때 여기 날씨도 비와 눈이 흩날리는 침울한 날씨였다. 『사탄탱고』는 1985년에 발표된 작품인데 소설은 주인공 후터키로 시작하여 마을 의사의 기록속에 다시 등장하는 후터키로 끝난다. (나도 후터키처럼 익숙한 곳을 떠나지 못하고 허송세월을 보낸다.)
-- “후터키는 자신이 돈을 손에 쥐기도 전에 잃어버렸음을 깨달았고, 오래전부터 예감한 일이 사실이 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건 바로, 이곳을 떠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실은 그는 떠나려고 해본 적도 없었다. 적어도 이곳에선 익숙한 풍경의 그늘 속으로 숨을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저 바깥, 마음 외부에서 그를 기다리는 것은 몹시 낯설고 불확실한 무엇일 따름이었다. ”
--크라네르 부인이 요란하게 말했다. "...이리미아시가 뭔가 보여줄 거예요. 곧 보게 될 거라고요. 페트리너와 함께요..."
결국 슈미트가 앞장서 가기 시작했고 후터키도 비틀거리며 그의 뒤를 쫓아 걸었다.(...) 사나운 빗줄기 속에서 슈미트의 욕설과 후터키의 기대에 부푼, 기운을 북돋아주려는 말이 뒤섞였다. 후터키는 말하고 또 말했다. "짜증 내지 말라고. 보란 듯이 잘살 수 있게 될 테니까! 흥청망청 마음껏 즐기며 살 거야!"
-<1부 그들이 온다는 소식>에서
대위는 이리미아시와 페트리너에게 사회안전을 위협하는, 일하지 않은 죄가 있다며 소환하고 둘에게 농부들을 감시하고 보고 하라고 강요한다.
--대위가 짜증 난 얼굴로 담배 연기를 내뿜는다. 잠깐이지만 피로한 기색이 스친다. “권리라고!” 그가 으르렁댄다. “권리를 주장해? 너희 같은 놈들에게 법이란 이용해먹으라고 있는 거지! 뭔가 문제가 생기면 비빌 구석이 없을까 하고 말이야! 하지만 이제부터 그럴 일은 없다고 보면 돼. 너희들과 토론을 할 생각은 없어, 알아들어? 충고를 해주지. 이제부터는 철저히 법에 따라 사는 데 익숙해져야 할 거야.” 이리미아시가 땀에 젖은 손을 무릎에 비빈다. “어떤 법이냐고?” 대위의 얼굴이 음울하게 변한다. “강한 자의 법이지.”
---이리미아시가 그만하라는 손짓을 한다. “이봐. 우린 똥구덩이에 빠졌어. 한동안은 저 대위란 놈에게서 벗어나기가 어려울 거야.” 페트리너가 두 팔을 벌렸다. “대장!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내 심장이 졸아드네!” “바지에 오줌 지리지나 말라고. 농장에서 사람들 돈을 빼돌려서 사라질 계획이야.” 둘은 계속 걷는다.
--<2부 우리는 부활한다>에서
소설속 꼬마 사기꾼인 소년은 돈씨앗을 심으면 돈나무가 자란다고 동생 에슈티케를 속여 용돈을 빼앗고 에슈티케는 절망하여 자살한다. 그러자 큰 사기꾼인 이리미아시는 에슈티케의 죽음으로 감정적 타격을 받은 농부들의 죄책감을 이용하여 농부들의 돈을 사기친다.
-- “왜냐하면 에슈티케의 죽음은 우리를 향한 벌이자 경고였으며, 그 아이는 우리를 위한 희생자였으니까요. 현재보다 합당한 여러분의 미래를 위한 희생자였으니까요!...어려움이 뭐냐고요? … 네, 돈에 관한 겁니다, 여러분. 화약이 없으면 총을 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지요. 임차료, 계약금, 수리비,투자금…. 생산을 하려면, 아시다시피, 자본금이 있어야 합니다...뭐라고요? 돈이 있다고요? 양을 친 대가로 받은 돈이요. 참 잘된 일입니다!”
사람들은 흥분했다. 후터키는 벌떡 일어나 의자 하나를 낚아채 이리미아시앞에 가져다 놓고 앉더니, 주머니를 뒤져 자기가 받은 몫의 돈을 꺼내 대강 세어보인 뒤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다른 이들도 그를 따라서, 우선은 크라네르 부부가, 그다음엔 나머지 사람들이 돈을 꺼내 후터키가 내놓은 돈 위에다 올려놓았다...
--<6부 이리미아시가 연설을 하다>에서
그리고 이 사기꾼들은 지은 죄가 있어서 농장을 떠나는 길에 공포에 떠는 광경을 목격한다. 이 부분을 영화로 어떻게 표현했나 찾아봤다. 영화에선 공포에 질린 이리미아시의 얼굴을 클로즈업하고 그가 무릎 꿇는 장면을 보여준다.
-- “저거 보여?” 돌처럼 굳은 이리미아시가 페트리너의 팔뚝을 피가 통하지 않아 하얗게 될 정도로 꽉 붙잡고서 물었다. 주위에 바람이 일자, 눈이 멀어버릴 것같이 하얀 시신이 허공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참나무 꼭대기쯤에 이르러 옆으로 움직이는가 싶더니, 주춤주춤 땅으로 내려와 다시 빈터에 내려앉았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몸 없는 목소리가 성난 원망의 소리로 터져 나왔다. 그것은 죄 없는 불운에 체념하는, 불만에 가득한 합창이었다. 페트리너가 헐떡거렸다. “저게 믿겨져?” “믿기 어렵군.” 이리미아시가 분필처럼 하얗게 질려 대답했다. “언제부터 저러고 있는 거지? 저 아이는 이틀 전에 죽었는데.” “페트리너, 내가 태어나서 무섭다고 느낀 건 지금이 처음이야.” “뭐 좀 물어봐도 되겠나?” “어서 말해봐!” “자네 생각엔….” “응?” “지옥이 있을까?” 이리미아시가 침을 삼켰다. “누가 알겠나. 어쩌면 있겠지.” 갑자기 조용해지더니 윙윙거리는 소리만이 조금 더 커진 듯했다. 시신이 다시 떠오르기 시작했고 빈터 상공 2미터쯤 되는 곳에서 둥실거리다가, 다음 순간 믿을 수 없는 속도로 하늘 높이 떠올라선 꿈쩍도 않는 우중충한 구름 속으로 사라져버렸다...그들은 몇 분 동안 꼼짝도 못하고 빈터만 바라보다가 더 이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서서히 정신을 차렸다. “지나갔나 보네.” 이리미아시가 중얼거렸다. “그러길 바라네.” 페트리너가 속삭였다. “기절한 것 같은데, 쟤 좀 깨우세!”
--<4부. 천국의 비전인가, 환각인가>에서
이리미아시는 농부들의 돈을 사기쳤을 뿐만 아니라 한술 더 떠 다른 목표를 꿈꾼다. 그것은 마을 사람들을 자신의 사설 스파이로 개조하여 ‘거대한 거미줄(그물)조직’을 만듦으로써 당국에 깊은 인상을 심어주는 것이다. 이 소설에서 ‘종소리’처럼 기이한 느낌을 주는 ‘거미줄’의 의미 한 겹이 얼핏 드러나 보이는 듯하다... 이리미아시는 자신을 믿는 이들을 배반하여 더욱 깊은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트린다. 일단 흩어져 “서로 활발히 연락을 취하면서 주변을 관찰”하다가 다시 만나자고 한다. 그러고는 마을 사람들 각각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담은 보고서를 당국에 제출한다. 그 보고서는 자신에게 마음을 준 사람들에 대한 조롱과 멸시로 가득한데, 당국의 서기들 눈에는 이리미아시 자신도 그다지 다를 게 없는 인물이다.
--그가 후터키 항목을 읽기 시작했다. “유일하게 위험한 인물이지만 걱정할 건 없습니다. 반항심보다는 겁이 더 많기 때문이지요. 뭔가를 할 수도 있지만 자신의 고정관념에서 통 벗어날 줄을 모르는 그를 보면 매우 흥미로운데, 아마도 그를 통해 앞으로의 일을 진척시킬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쓰지.” 서기는 받아쓰기할 것을 불러주듯이 말했다. “위험하지만 이용 가치가 있음. 다른 자들보다 지능이 뛰어나고 다리를 젊.” “끝인가?” 그 가 한숨을 쉬며 묻자 다른 서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을 쓰라고. 제일 밑에다. 음… 뭐였지…. 이리미아시.” “뭐?” “말했잖나. 이—리—미—아—시. 귀가 먹 었나?” “소리 나는 대로 쓰면 돼?” “그럼! 갑자기 왜 그래?” 그들은 서류를 파일에 꽂고 파일을 서류함에 집어넣은 다음 서류함을 열쇠로 조심스럽게 잠갔다.
--<2부 그저 일과 걱정 뿐 >에서
마을 의사는 강박적으로 기록에 집착하는, 스스로를 소외시킨 인물이다. 그는 피할 수 없는 세계의 몰락에 직면하여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한가지밖에 없음을 깨닫는데, 그것은 바로 “음험한 몰락에 자신의 기억으로 맞서는” 일이다. 그래서 그는 “모든 것을 면밀하게 관찰하고 기록하기로” 결심한다... 그는 몽상가 또는 소설가로 될 수도 있다. 그런데 언어적 전능감에 도취한 그의 글쓰기는 서두에서 후터키가 들은 것과 같은 종소리에 의해 중단된다. 그는 종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찾아 나선다.
-- 노인은 의사를 잠깐 동안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종으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괴상한 고음으로 “비—잉, 비—잉!” 하 고 소리를 지르며 쇠막대기로 종을 치기 시작했다. 의사는 낯빛이 창백해져 계단 벽에 기댄 채 소리쳤다. “그만해! 멈춰!” 하지만 작은 노인은 “비—잉, 비—잉!” 하는 날카로운 소리를 계속 질렀고 절망적으로 계속 종을 쳐댔다. “지옥으로 꺼져, 이 미친놈아!” 의사는 소리를 치고는 남은 힘을 끌어모아 계단을 내려왔다...의사는 비통한 심정으로 종이를 노려보다가 이렇게 써나갔다. “용서할 수 없는 실수다. 나는 죽음의 종소리를 우렁찬 천국의 종소리와 혼동했다. 비천한 떠돌이! 어디선가 도망 온 미친 늙은이! 그리고 나는 바보였다!” 그는 담요로 몸을 감싸고 뒤로 기대며 밖을 바라보 았다.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는 서서히 침착을 되찾았다. 그는 종이가 찢어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글을 쓰기 시작했다.
“어느 시월의 아침 끝없이 내릴 가을비의 첫 방울이...후터키는 종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결단을 내려야 해. 여기서는 더 살 수가 없어.’... 돌연 주위의 말 없는 물건들이 신경을 건드리는 대화를 시작했다...” (이부분은 소설의 첫부분 내용과 똑같음)
--<1부 원이 닫히다> 에서
(ps: 김유태 기자는 < 전염병·폐쇄도시·가짜 메시아··· 소녀가 떠난 마을에 무슨 일이 - 매일경제 > 이 글에서 “후터키 등 마을 사람 모두의 '보고서'를 일일이 만든 마을 의사는 상부에 이를 제출합니다”고 했는데 저는 이리미아시가 보고서를 상부에 제출했다고 읽었습니다. 오히려 소설속의 마을 의사가 소설가의 분신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읽었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