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 독서록 1. 이반 일리치의 죽음
2026-04-22 16:20:03![[큰글자책] 이반 일리치의 죽음 (러시아어 원전 번역본) - 죽음 관련 톨스토이 명단편 3편 모음집](https://image.aladin.co.kr/product/37188/41/cover150/k072031293_1.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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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반 일리치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사무실에 모인 사람들의 머리에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그의 죽음이 위원들 자신이나 지인들의 자리 이동과 승진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하는 것이었다
‘그래, 죽은 건 그 사람이지, 내가 아니야.’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거나 느꼈다. 동시에 이반 일리치의 가까운 지인들, 이른바 친구들은 매우 지겹지만, 예의상 어쩔 수 없이 추도식에 참석하고 미망인에게 조문해야 한다는 것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타인의 죽음으로 내게 올 이익과 손해를 먼저 가늠한다. 남일이라고 생각하는 거겠지. 하지만 죽음에 이르는 방식은 너무도 다양하고, 또 급작스럽지 않았나. 내일의 내가 지금처럼 계속 건강히 숨쉬고 살아갈 거란 보장이 없는데.
이런 생각도 든다. 겉과 속이 일치하는 애도를 바라는 것은, 죽음을 지나치게 신성시하는 걸지도 모른다. 우리 내면과 상관없이, 겉치레로라도 식에 참석하는 것이 옳은 건 아닐까? 우린 그렇게라도 죽은 이를 위해 예우를 다하는 건 아닐까?
(그러나 그는 이미 죽었다. 이 세상에 남아있지 않다. 그럼 추도가 의미가 있나? 누굴 위한 추도지?)
“이반 일리치의 진실한 벗이었다고 들었습니다….” 그가 이 말에 상응하는 행동을 취하리라고 기대하며 그녀는 바라보았다. 표트르 이바노비치는 안치실에서 성호를 긋는 일이 당연한 것처럼, 여기서는 손을 잡고 탄식하며 “물론 그랬지요” 하고 말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렇게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바라던 것이 성취됐음을 느꼈다. 즉, 그와 그녀는 감동했다.
톨스토이의 글에서 드러난, 그가 사람을 해석하는 방식에 놀랐다. 으레 그래야한다고 무의식 속에서부터 피어오르는 그 생각을 어찌 이렇게 정확히 분석했을까. 무섭다.
‘사흘 밤낮 동안 끔찍한 고통과 죽음. 그것이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어. 바로 지금, 언제라도.’ 이렇게 생각하자 잠시 두려움이 엄습했다. 그러나 그 직후 자기도 모르게 이 일이 이반 일리치에게 일어난 일이지 자기에게 일어난 일은 아니며, 자기에게는 이런 일이 일어나서도 안 되고 일어날 수도 없다는 평범한 생각이 구원처럼 그에게 찾아왔다. 그런 생각을 하면 우울한 기분에 굴복하게 되지만, 슈바르츠가 얼굴로 분명히 이야기했듯, 그래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판단한 표트르 이바노비치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죽음은 오직 이반 일리치에게 일어난 일일 뿐 자기와는 아무 상관없는 일인 양, 그의 마지막에 관해 관심을 가지고 자세히 묻기 시작했다.
언젠가 죽음은 찾아올 것이다. 외면한다고 그게 피해지는 것도 아닌데. 불확실한 미래의 죽음에 얽매여 삶을 두려움으로 소진하는 것은 무의미하겠지만, 죽음을 외면하는 것은 더욱 '산 사람의 삶'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 모든 삶, 내 의식적인 삶이 옳지 않은 것이라면?’ 전에는 이런 생각이 전혀 떠오르지 않았지만, 자신이 마땅히 살아야 했던 삶을 살지 못했으며 그것이 사실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높은 지위에 있던 자들이 좋다고 여기는 것에 맞서 싸우려고 했던 눈에 띄지 않았던 충동, 그가 즉시 억눌렀던 그런 충동이 진짜이고 나머지는 전부 거짓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의 일, 삶의 방식, 가족, 사회적 및 직업적 이해관계 역시 모두 거짓일 수도 있었다. 이 모든 것을 변호하려고 했지만, 문득 자기가 변호하는 것들의 온갖 약점이 다 보였다. 방어할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밤사이에 그에게 드러난 끔찍한 진실을 확인시켜주었다. 그는 그들에게서 자신을, 자기가 살아온 모든 것을 보았다. 이 모든 것이 옳지 않다는 것과 그리고 삶과 죽음을 모두 가려버리는 끔찍하고 거대한 기만이었음을 분명히 보았다. 이 의식은 더욱 커져서 그의 육체적 고통은 열 배나 증가했다. 그는 신음하고 뒤척이며 입고 있던 옷을 쥐어뜯었다. 걸친 옷이 자신을 질식시키고 짓누르는 것 같았다. 그 때문에 그는 그들을 증오했다.
그는 죽음에 대한 오랜 습관적인 두려움을 찾았으나 찾지 못했다. 그것은 어디 있지? 무슨 죽음? 더 이상 죽음이 없었기 때문에 어떤 두려움도 없었다. 죽음 대신에 빛이 있었다.
옳다고 여기며 좇았던 세속적 가치들은 헛된 것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훌륭한 인생을 꾸려나가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재판관이었던 이반 일리치. 그는 죽음 앞에서, 자신의 삶이 재판대에 올려지고, 마침내 모든 것이 거짓이요 자기기만에 불과한 것이었다는 결론을 마주한다. 그 사실을 직면하고, 다른 이들을 불쌍히 여긴다. 그의 마지막 순간, '죽음 대신에 빛이 있었다'는 문장은 해석하기가 어렵다. 빛이 있었다? 어떠한 구원적 체험을 한 건가?
두 번째 단편인 주인과 일꾼에서는, 자기중심적이고 타산적인 인물이, 죽음 직전에 올바른 가치란 사랑과 희생임을 깨닫고, 일꾼을 살리기 위해 자신이 희생함으로써 구원을 받는 명시적인 장면이 등장한다. 그것과 연관지어 본다면, 다소 종교적인 의미로 '구원'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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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 사람들이 모두 이반 일리치가 곧 나을 것처럼 거짓말을 할 때, 게라심만은 죽음을 삶의 자연스러운 일부로 받아들입니다. “우리 모두 언젠가는 죽습니다. 그러니 이런 수고 좀 하는 게 무슨 대수겠습니까?” 라고 말하며 이반의 더러워진 몸을 닦고, 그의 무거운 다리를 자신의 어깨에 기꺼이 올리는 게라심의 모습은 숭고하기까지 합니다. 타인의 고통을 '기술'로 대하는 의사와 '의무'로 대하는 가족 사이에서, 게라심의 '공감'이 이반에게 어떤 구원이 되었는지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높은 지위와 체면을 중시하던 이반 일리치는 죽음의 문턱에서 뜻밖의 고백을 합니다. 누군가 자기를 아픈 아이처럼 가엾게 여겨주고, 어루만져 주고, 함께 울어주길 바란 것이죠. 사회적으로 성공한 성인 남성이 죽음 앞에서 토로하는 이 '어린아이 같은 마음'은 저에게도 꽤 다가오는 측면이 있었어요. 우리는 모두 겉으로는 강한 척하지만, 사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누군가의 따뜻한 돌봄을 갈구하는 연약한 존재가 아닐까요?
-김새섬 작가님의 댓글-
영화 '에브리띵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에서, 다른 사람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 따뜻하게 대해주는 것을 자신의 '무기'라고 표현하는 장면이 있다. 호의 없는 '의무'와 감정 없는 '기술'로 해결할 수 없는, 공감이라는 무기만이 힘을 발휘하는 영역이 존재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봄에 대한 말씀에서는 다른 모임에서 '필연적 혼자의 시대' 책을 읽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나 역시 평생 오롯이 혼자 살 수는 없다. 지금도 누군가의 따뜻한 돌봄을 원하면서 살고 있지 않은가. '난 혼자 살 거야' 입버릇하던 나에게 고민을 안겨줬다.
이순영 역자의 작품해설에 따르면, 톨스토이는 인간이 삶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깨닫는 것은 죽음을 맞는 순간의 자기반성을 통해서라고 믿었다고 합니다.
이반 일리치의 부고소식으로 시작되는 이반일리치의 삶과 죽음의 여정(=생로병사의 여정)을 함께 하면서 삶과 죽음의 진실을 생생하게 마주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이반 일리치가 삶과 죽음의 진실을 <받아들인> 후, 본인이 살아온 과거 삶의 옳고 그름에 대한 의혹과 판단을 <놓아버린> 후, 현재 아직 바로잡을 수 있는 '올바른 것은 무엇인가'에 집중한 이후에서야, (투병기간 내내 증오하던 가족에게 용서를 구하며) 비로소 '죽음에 대한 공포'와 '정신적인 고통'을 떨쳐내면서 '죽음'을 온전히 맞이하게 되는 '끝'이 가장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믐30님의 댓글-
흐름을 깔끔하게 잘 정리해주셔서 감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