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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기술>을 읽고: 우상화와 자기다움, 누구의 기대를 따라 살 것인가

by 10월의하늘2025-12-23 20:04:03
사랑의 기술사랑의 기술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을 스타트업에서 일해본 경험이 있는 친구들과 읽었다. 창업과 일에 대한 태도, 사람을 믿는다는 것,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치를 창출한다는 것의 의미를 되짚는 시간이었다. 참석자는 나를 포함해 세 명. 한 명은 현재 컨설팅 펌에 있고, 다른 한 명은 스타트업에서 신사업 기획과 영업을 담당하고 있다.


1. 창조적 작업: "내 작업의 결과를 볼 수 있는가"

프롬은 창조적 활동을 통한 합일을 말하지만 조건을 단다. "이것은 생산적인 일, 곧 '내'가 계획하고 만들어내고 내 작업의 결과를 볼 수 있는 일에만 해당된다."

컨설팅 펌에 있는 친구의 관점이 흥미로웠다. "전략 컨설팅은 5년, 10년, 20년짜리 장기 플랜을 세우기 때문에 작업 결과를 못 봐. 오퍼레이션 컨설팅은 결과가 바로 보여서 좋아하는 사람이 꽤 있어."

먼 미래를 내다보는 신사업과 지금 당장 고객의 문제를 해결하는 신사업의 차이도 비슷하다. 미래 지향적 프로젝트는 '왜 그 미래가 오는가'에 대한 다소 추상적인 담론의 힘을 빌려야 한다. 반면 당면 과제를 해결하는 프로덕트는 고객이 실제로 사용하고, "이거 편하네요"라는 피드백을 직접 듣는다.

하지만 스타트업에 있는 친구가 지적했다. "고객이 나와 비슷하지 않으면 크게 와닿지 않는 경우도 있어. 고객이 해외에 있을 수도 있고. 결국 상상력이 필요해."

창조의 기쁨은 피드백 루프의 길이와 고객과의 심리적 거리에 따라 달라진다.


2. 합리적 신앙: Divide and Conquer, 그리고 그 너머

프롬은 합리적 신앙을 "자기 자신의 사고나 감정상의 경험에 뿌리박고 있는 확신"이라고 정의한다. 과학자의 "합리적 비전"은 "이전의 상당한 연구, 반성적 사고 및 관찰의 소산"이다.

대부분의 스타트업은 망한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 일로 도약하려 할까?

컨설팅 펌에 있는 친구의 답: "Divide and Conquer. 작게 쪼개서 실제로 된다는 걸 확인해야 신앙이 생길 것 같아."

하지만 모든 것을 작게 쪼갤 수는 없다. 항만 물류에 컨테이너 시스템을 도입하는 혁신을 생각해보라. 물류 밸류체인의 수많은 이해관계자를 모두 설득해야 시작할 수 있다. 이럴 때는 직접 실행해보지 않고도 논리적 추론만으로 자료를 만들고 사람들을 설득해야 한다.

나는 경제학을 주전공했다. 경제학은 사회에 직접 실험해보는 루트가 제한적이라 논문 결론이 '추정' 정도로 그치는 것이 아쉬워, 더 확실한 하드 스킬을 기르기 위해 전기정보공학을 복수전공했다. 그런데 일을 하고 삶을 살다 보니 결국 경제학적 접근이 필요한 순간이 계속 찾아왔다.

해보기 전에는 모르지만, 그럼에도 그 불확실함 속에서 좋은 의사결정을 내리는 데 필요한 합리적 추론. 이것이 어쩌면 경영자나 전략기획실, 리더십이 해야 할 일 아닐까.


3. 우상숭배적 사랑과 창업가 신화

가장 뜨거웠던 주제는 우상화였다. 프롬은 "우상숭배적 사랑"을 지적한다. 자아를 인식하지 못하면 사랑하는 사람을 우상화하기 쉽다. "대체로 자신을 우상시하는 자의 기대에 따라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에 결국은 실망하기 마련이고 따라서 보상으로서 새로운 우상을 찾게 된다."

나는 이것을 창업가 신화에 대입해봤다. 우리는 실리콘밸리의 거장들을 우상화하며 그때그때 우상을 바꿔가고 있지 않은가? 그들의 방식을 모방하려는 것이 자기 발견인가, 자기 상실인가?

친구들은 답했다.

"인간은 진짜 게으른 존재야. 그래서 우상화하고 복종하는 건 쉬워."

"포유류를 관찰해보면 우두머리를 따르잖아. 생물학적으로 내재된 인간의 본능인 것 같아."

"내가 만약 14세기 유럽에서 태어났으면 왕이나 공작이 되고 싶었을 거야. 지금 태어났으니까 실리콘밸리 창업가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는 거지."

완전히 독자적인 비전을 가진다는 것은 환상일 수 있다. 우리는 모두 시대의 산물이고, 그 시대가 제시하는 롤모델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4. 마조히즘적 복종과 거대 서사

프롬은 마조히즘적 복종에 대해 말한다. "마조히즘적 인간은 결정을 내릴 필요가 없고 모험을 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그는 독립하지는 못한다. 그는 통합성을 갖지 못한다."

어떤 거대 서사의 배우가 되는 것에 집착하는 것도 마조히즘 아닐까? "세상이 혼란스러워지고 있고, 창업가가 되어 거대한 가치를 창출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운명에 나를 맡기는 것. 이것은 자신의 통합성을 포기하고 나를 거대 서사의 도구로 만드는 것 아닌가.

물론 반론도 있다. 그 서사가 유행하는 건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CUDA 생태계를 만들어 AI 산업을 일으킨 젠슨 황처럼, 집단 지성이 작동하여 만들어진 우상은 실제로 세상에 큰 기여를 했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다. 사회가 만들어낸 우상을 나의 것으로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면, 나는 그 우상의 노예가 된다.

"현재 유행하는 서사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를 때 일단 채택해보는 시작점인 거지, 우리가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목표는 아닌 것 같아."


5. 자유화의 역설

우상은 주로 미디어에 의해 만들어지므로, 대화는 미디어, 그리고 그것에 영향을 주는 권력에 대한 토론으로 이어졌다.

과거의 미디어는 정부 권력의 검열을 받았다. 지금의 소셜 미디어는 그런 검열에서 자유로워졌다. 나는 이것을 진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대가가 있다. "현대의 미디어는 정부의 검열을 덜 받지만, 자본의 영향을 크게 받는 것 같아."

나는 이것을 자유화의 역설이라고 불렀다. "자유롭게 풀어놓으면 자유로운 자본에 의해 왜곡이 발생해. 정부에 의한 왜곡이 자의적 검열을 낳았다면, 자유 미디어 시대에는 자본의 왜곡을 받아들여야 해."

결혼을 예로 들었다. "과거에는 사실상 매매혼이었어. 지금은 자유화됐으니까 적어도 그런 문제는 없어졌지." 분명한 진보다. "대신 시장 논리에 의해 결혼 시장에서 소외되는 사람도 생기고, 외모 군비경쟁이 발생해 관련 산업이 번창하고... 이런 것들은 자유화의 대가야."

핵심은 비용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다. "자유화의 대가가 무엇인지를 인식하고, 그것에 대해 비판적으로 사고해서 적절히 선택하고 멀어질 수 있으면 좋은 것 같아."

우리가 스스로 비판적으로 사고하며 주변 사람과 토론하면, "이건 사회가 만들어낸 우상이구나, 자본이 만들어낸 우상이구나"를 알아챌 수 있다.


6. 가치 창출 vs 이윤 추구

"돈은 너무 좋은데, 돈이 수단이었으면 좋겠어. 돈이라는 건 매개물에 불과하니까 사실 허상인 건데, 그걸 이용해서 사람들이 협력을 더 잘 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하거든."

"고객이, 직원이, 투자자가 돈을 들여서 나한테 와줬다는 건 엄청나게 강력한 피드백이잖아.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걸려 있을 때 더 좋은 피드백을 주는 것 같아."

하지만 왜곡의 위험도 있다.

"가치를 창출하고 그 창출분의 일부를 이윤의 형태로 보유하는 게 사업인데, 후자에 유리한 사업이 따로 있는 것 같아. 가치 창출은 상대적으로 쉬운데 돈으로 만들기 어려운 사업도 있고."

"KPI가 돈이 되어버리면 결국에는 가치 창출보다 이윤 추구 그 자체가 목적이 돼. 그건 조금 결이 안 맞는 것 같아."

컨설팅 펌에 있는 친구가 반박했다. "하지만 이윤 추구가 성공적이어야 지속 가능한 사업이 되지."

정말 맞는 말이다. 하지만 나는 순서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가치 창출이 우선이고, 이윤은 그 결과로 따라와야 한다.


7. 진짜 새로운 것과 테마 장사

"스타트업 업계 들어가면 처음에는 재밌어. 근데 어느 정도 떨어져서 이 사회상의 변화를 관찰하니까 인터넷, 모바일, AI... 돌아가는 패턴이 비슷해."

"영원 회귀를 하고 있는 것 같아. 반복되는 사이클 속에서 누군가는 사기꾼이고, 누군가는 진짜 비저너리하고, 누군가는 '생산적인 버블'이라는 게 있으니까 알고서도 속아주기도 하고."

그럼에도 진짜 새로운 아이디어로 세상이 바뀌긴 한다.

"인터넷이 있는 세상과 없는 세상은 질적으로 다른 것 같아. 스마트폰도, AI도 마찬가지고. 진짜 불연속적으로 튀는 구간들이 있고, 그 튄 다음에 기술을 이용해서 세상에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건 정말 재밌는 일이야."

"단순 테마를 잡아서 hype를 끼게 하고... 이건 패턴이 비슷해. 그런 일을 하고 싶지는 않아."


8. 결론: 그래서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인간은 gene과 meme의 복합체인데, 밈을 내가 주도적으로 선택하면 되는 것 같아. 나의 성향과 기질에 맞는 밈을 선택하고, 사회가 그런 방향으로 열어주는 길을 따라가 보는 거지."

"시대에 따라서 사회가 우상을 계속 갈아 끼울 거야. 사회로부터 우상을 주입받으면, 이게 내 성향과 기질에 맞는 건가 생각을 해봐야 해."

그리고 솔직하게 말했다. "돈 많이 벌면 물론 좋지만, 돈은 따라오는 거고 그 규모는 내가 통제할 수 없어. 내가 새로운 걸 만들면서 즐겁고, 내가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걸 다른 사람도 같이 의미 있다고 생각해 줬으면 좋겠어. 협력하면서 새로운 걸 만들기 위해 치열하게 뭔가를 하는 그 분위기가 너무 좋고, 그런 순간들을 계속 늘려나가고 싶어."

프롬이 말한 성숙한 사랑은 "자신의 통합성, 곧 개성을 유지하는 상태에서의 합일"이다. 일에서도 마찬가지다. 사회가 제시하는 서사에 나를 맡기는 게 아니라, 나의 성향과 기질에 맞는 서사를 주도적으로 선택하는 것. 그것이 프롬이 말한 '합리적 신앙'의 실천이 아닐까.

같은 책을 읽고 다른 독서모임을 한 후기도 있습니다. https://blog.naver.com/vandlaw/224111104499 참고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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