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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예쁜 것 - 그리운 작가의 마지막 산문집
2026-02-01 20:42:54“박완서의 '세상에 예쁜 것'을 읽고
나는 내가 아직도 충분히 젊다고 생각하는 데 그것도 이야기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젊다는 건 체력이나 용모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것을 좋다고 느낄 수 있는 감수성과
옳고 그름을 분별할 줄 알고
옳지 못한 일에 분노하고 부조리에 고뇌할 수 있는 정신의 능력을 말한다
이런 정신의 탄력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은 나의 경우는 글쓰기가 아닌가 한다
소설 한 꼭지 쓰고 나면 몸에서 진액이 다 빠져나간 것처럼 무력해진다
쥐어짜고 나면 반드시 풀어줘야 하기 때문에
집중과 이완의 적절한 반복이 결국은 정신의 탄력을 유지시켜주는 비결이 된다고 여기고 있다
좋은 이야기는 상상력을 길러주고, 옳은 것을 알아보게 하고, 사람과 사물에 대한 사랑의 능력을 키워주고, 보다 나은 세상을 꿈꾸게 한다
달을 말할 때 쟁반같이 둥근 달 같은 상투적인 말을 쓰고 싶지 않다면
사물을 보았을 때 자신의 심상에 떠오르는 솔직하고 아름다운 말을 찾아내야 한다
그림도 마찬가지로 단순 묘사로 똑같이 그린 것도 감동을 주지만
이를 일그러뜨려 내면에 내재된 것을 그린 추상화가 오히려 진실에 가깝고 더 감동적일 때도 있습니다
적절한 한마디 말을 찾아 온종일 헤맬 때도 있다는 겁니다
다 된 것 같지만 작은 빈자리라도 있으면 거기에 딱 들어 맞는 게 제자리에 안 들어가면 완성이 안 되잖아요
날개가 들어갈 자리에 꽃잎이 들어가면 안 되지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 많은 말들 중에서 그 자리에 꼭 있어야 할 한마디를 찾아내기는 정말 어렵습니다
그래도 찾아내야 하는 것은 그게 있어야 작품이 비로소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딱 한마디를 찾아 헤매는 과정은 예전에 감동받은 작품을 읽기도 하고 새로 나온 시집을 읽기도 합니다
나의 막혔던 언어 감각이 소생하라고 읽는 것입니다
좋은 문장을 읽으면 침체된 감각에 생기가 나고, 막혔던 언어들이 터져 나옵니다
좋은 문장, 정제된 언어가 좋다는 것입니다
한 단어를 찾기 위해 며칠이 걸린 적도 있습니다
세월이 연마한 고통에는 광채가 따르는 법이다
상상력은 사랑이지 증오가 아니다
복수심과 증오는 세월의 다독거림으로 위무받을 수 있을 뿐, 섣불리 표현되어선 안 된다는 걸 차차 알게 되었다
그 때의 치 떨리는 경험이 원경으로 물러나면서 증오가 연민으로
복수심이 참고 이해하는 마음으로 바뀌면서 비로소 소설을 쓸 수 있다
내가 인간이기에 인간 같지 않은 인간과 그런 인간을 만들어낸 시대상에 대해 말하고 싶은 욕구
내가 살아온 분단 시대, 산업화, 정보화 시대가 어떻게 인간성을 속물화, 황폐화시켜가나를 증언하는 걸로 일관되게 유지돼왔다
1931년 생인 작가가 2010년 당시 나이까지 꾸준히 소설을 써온 건,
이야기가 지닌 살아낼 수 있는 힘과 위안의 능력을 믿기 때문이다
글을 쓸 때 늙었다고 하는 것은 속도가 느려졌다는 것이 아니라
감수성이 경직되고 진부해졌다는 것입니다
내 감수성이 진부해지지 않도록 노력을 많이 합니다
좋은 글을 많이 읽는 것
문학 외의 예술 분야에도 애정을 갖고 자주 접하고 느낌으로써 내 감수성이 녹슬지 않고 젊음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것
좋은 것을 보면 감동할 수 있는 것
이 세상에 감동이 없다면 무슨 재미로 삽니까?
포대기 끝으로 나온 아기 발바닥의 열 발가락이
세상에 예쁜 것
탄성이 나올 만큼, 아니 뭐라고 형성할 수 없을 만큼 예뻤다
아기의 생명력은 임종의 자리에도 희망을 불어넣고 있었다
흐르는 강가에서 바람을 쐬면서 어린 손자가 뛰노는 모습과 젊은 아들과 사위가 강물에 물수제비를 뜨는 걸 구경했다
그때는 보이는 모든 것이 왜 그리도 아름다웠던지
젊은 내 새끼들의 옷깃과 검은 머리칼을 나부끼게 하는 바람조차도 어디 멀고 신비한 곳으로부터 그 애들이 특별히 아름답게 보이라고 불어온 특별한 바람처럼 느꼈으니까
아마도 나는 그때 곧 세상을 하직할 남편의 눈으로 그 모든 것을 보았을 것이다
박경리 선생님은 밖에서 육체노동을 많이 하셨습니다
선생님이 하신 말씀 중에
나는 이것을 글을 쓰는 정신노동의 휴식으로 삼는다
또 육체노동의 고됨을 달래주는 것이 정신노동이다
혼자 있을 때도 화장을 하거나 예쁜 옷을 입기도 합니다
지금 나가지 않는데
우리 집이 작업실이고, 내가 서재로 가는 것은 출근하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그래도 된다고 나에게 들려줍니다
집에서 일하는 사람에건 출근하는 기분은 신선감을 줍니다
아무리 기발한 상상력도 작가의 경험이 전혀 섞이지 않은 상상력은 없는 법이다
다행히 인간은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도 타인과 똑같은 체험을 할 수가 없다
얼굴이 다른 것처럼 감수성이 다르니까
작가마다 다를 것이다
나는 내 방에 혼자 있을 때만 쓸 수 있지만
메모는 아무 데서나 한다
신인일 적에는 남들이 안 알아주면 불안했는데 지금은 안 그렇다
자기만족의 기쁨이 더 크다
타인의 생각을 존중하고 관심을 가질 것. 사물에 대한 호기심을 잃지 말 것
저는 남의 소설을 보면서는 안 그러는데
시를 보면서 이것도 시라고 썼나?
말만 짧게 썼다고 시가 아닌데
그런 혹평을 할 때가 있습니다
창작 시간에 고등학교 국어 선생님이
포도주를 만들 때
너희들 뭐가 필요한지 아니?
선생님은 포도주는 포도를 버린 것이 땅에 고여 시간이 지나 발효하여 술이 된 것을 발견한 것이라고 하면서, 포도주가 되기 위해선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에 감동을 해서 쓰고 싶은 것이 생기면 속에서 삭혀서 그것이 발효가 되면 쓰지 않을 수 없는 시기가 온다
폭발이 일어난다
그것이 안 되고 잊혔다면 그 소재는 포도가 아니었을 것이다
뭐가 될 것은 반드시 속에서 폭발이 일어난다고 하셨습니다
경험의 무게가 실리지 않은 허황하고 감상적인 미사여구를 싫어하셨습니다
너희 경험에서 나온 것을 써라
그 옛날 남편이 그랬던 것처럼 달게 먹었다
그리고 남편을 떠나보낸 고통이 순하게 치유된 자신을 느꼈다
시간이 나를 치유해준 것이다
이 나이까지 살아오면서 깨달은 소중한 체험이 있다면 시간이 해결 못할 악운도 재앙도 없다는 것이다
시간은 신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시간은 신이었을까
마음이 튼튼해졌다는 건 누군가 나를 얕봐도 상처받지 않을 수 있다는 자존심이 생겼다는 뜻이다
남의 허물을 덮지 못하고 힘든 일에 몸을 사리고 몸보다 말로 때우기를 좋아하는 건 도시에서 배운 거라는 걸 알 수 있다
그때 법정 스님의 태도는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워
중년 부인도 섭섭하지 않게 나도 무안하지 않게 했다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이었고 약과 맛도 잊었지만
그때의 물 흐르듯이 유연했던 넌즈시는 오랫동안 잊히지 않는다
나는 박애보다 편애를 좋아하는데 아마 피천득 선생님이 그러실걸, 내 멋대로 생각하고 즐거워하고 있다
선생님의 생활이 담백하고 무욕하고 깨끗하고, 마음 가는 대로 자유롭게 사셨기 때문일 것이다
박경리 선생님께
그 사람들은 선생님을 좋아하고 존경해서 뵙고 싶었을 텐데 얼마나 놀랐겠어요?
내가 그렇지 않았다면 그 긴긴 세월 글을 쓸 수 있었겠어?
저들이 나를 보려고 하는 것은 호기심이지만 나는 금쪽같은 내 시간을 지켜야 하니 어쩌겠어?
선생님은 자기 문학에 대해서는 그렇게 도도하고 당당한 분이 농사를 지을 때 흙에 대해서는 한없이 겸손하셨습니다
그분은 당신 문학에 대해 누구보다도 도도한 자존심을 가지셨고, 또 가지실 만하셨습니다
나는 왜 소설가인가
이야기의 힘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이야기
나의 경험 나의 문학
시간은 신이었을까
나는 누구일까
책 갈증
믿을 수 없는 사진, 믿을 수 없는 기억
세상을 지탱하는 힘
투명하고 정직하게
고마운 착한 힘들
자연으로부터 받은 기는 오래간다
깊은 산속 옹달샘
담백하고 자유롭게
그늘이 전혀 없이
이제 달콤한 잠 누리소서
문학에 대한 자존심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자연 질서 안에서”
『세상에 예쁜 것 - 그리운 작가의 마지막 산문집』 박완서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