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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번의 삶
2026-03-30 14:33:54“김영하 <단 한 번의 삶>
인생이 일회용인 것도 힘든데, 그 인생은 애초에 공평치 않게, 아니 최소한의 공평의 시늉조차 없이 주어졌다. 생이 그렇다는 것은 비밀이 아니었다. 문제는 그럼에도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육신과 정신으로. 의술의 발전 속도와 범위를 감안한다 해도 내 생은 아마 반환점을 돌았을 것인데 여전히 내 앞에는 1968년에 받은 일회용 인생이 그대로 남아 있다.
p11
그러나 영어반 시절에서 가장 많이 떠올리는 장면은 역시 유인물을 넘겨주며 내게 상냥하게 말을 건네던, 전교 학생회장의 '부드러운 적대'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어서 환대보다 적대를, 다정함보다 공격성을 더 오래 마음에 두고 기억한다. 어떤 환대는 무뚝뚝하고, 어떤 적대는 상냥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그게 환대였는지 적대였는지 누구나 알게 된다.
p29
그 시절의 나는, 부모에게 해를 가하지 않고, 부모의 지시를 따르면서, 동시에 스스로를 보호해야 하는 참으로 어려운 과제를 수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부모에 의해 창조되었고 부모의 통제하에 있었다는 점에서 나와 로봇은 별로 다르지 않았다.
p32
나는 정반대의 편향을 갖게 되었다. 부탁을 해도 될 만한 일도 부탁하지 않게 되었고 아는 사람이 있는 곳이면 피해 다니는 사람이 되었다. 엄마의 바람대로 살지 않으려면 나 자신이 아예 다른 종류의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p37
의료계에 VIP증후군이라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반가웠다. 이 증후군은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사람이나 의사 자신에게 특별한 사람, 특히 본인의 가족을 수술해야 할 때 의사들이 긴장하고 부담감을 느껴 도리어 기대에 못비치는 결과를 내는 현상을 말한다. 부담감도 부담감이지만, 환자가 불편해한다는 이유로 꼭 해야 할 검사를 누락하기도 한다고 한다. p39
아버지가 사회에 나와서 배운 유일한 삶의 방식은 군율이었다. 그럼에도 오랜만에 만난 아버지와의 즐거운 목욕탕 나들이를 아버지 자신이 망쳤고, 그때 나와 동생이 빼앗긴 기쁨은 신발 한 켤레보다는 더 중한 것이었다. 아버지의 행동을 용서하지 못해서가 아니라(그걸 왜 못하겠는가? 나도 그랬을 수 있다), 모든 부모가 언젠가는 아이를 실망시키고, 그 실망은 도둑맞은 신발 같은 사소한 사건 때문에도 비롯된다는 것, 그 누구도 그걸 피할 수 없고, 나처럼 어떤 아이는 오랜 세월이 지나서도 그 사소한 에피소드를 기억하고, 기억하면서 충분히 이해하고, 이해하면서도 아쉬워한다, 그렇지만 그게 부모를 증오하거나 무시한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가 언젠가는 누군가를 실망시킨다는 것은 마치 우주의 모든 물체가 중력에 이끌리는 것만큼이나 자명하여, 그걸 받아들인다고 세상이 끝나지도 않는다. p61
'테세우스의 배'는 조금씩 변했지만, 법과 권위, 대중의 동의가 그 배가 테세우스의 배임을 인증해주었기에 계속 테세우스의 배로 남을 수 있었다. 인간은 평생에 걸쳐 테세우스의 배보다도 더 큰 변화를 겪는다. 아십대의 나는 길에서 마주쳐도 지금의 나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지금의 나 역시 십대의 나를 그냥 지나칠 것이다. 그래도 우리는 그 사람이 과거의 그 사람과같은 존재라고 애써 믿으며 살아간다. 변하지 않은 어떤 것들을 애써 찾아내,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세포 차원에서, 호르몬의 차원에서, 엔트로피의 차원에서 나는 시시각각 달라지고 있다. p77
요가는 신체 운동이라기보다 마음과 생각의 연습에 가까운 것 같다. 요가를 한다는 것은 날마다 자신에게 이렇게 일깨우는 일과 같다. 고통은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익숙해질 수는 있다. 그리고 모든 고통에는 끝이 있다. p 104”
『단 한 번의 삶』 김영하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