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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하루치의 낙담
2026-03-30 14:34:27“<그저 하루치의 낙담>, 박선영 作
정말 아무것도 아니야. 나는 절망하지도 않았고, 비관하지도 않았고, 체념하지도 않았다. 그저 하루치의 낙담을 하고, 다음 날이면 다시 하루치의 작은 기대를 품으며 사소하고 한심한 일들을 계속한다. 내가 하는 이 작고 한심한 일들이 언젠가는 쓰일 데가 있을 거라고 믿는다. 뭐, 꼭 쓸모가 없어도 괜찮다. 내 유리병의 돌멩이들이 덜그덕거리지 않도록,거친 돌들의 격돌에 유리병이 깨지지 않도로고 그 작고 고운 모래들이 완충해줄테니까. p15
어떤 직업은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것이 죄악이 된다는 걸 새삼 절감했다. p20
이 배는 침몰하고 있다. 현명한 사람들은 하나둘 도망치는 중이다. 몇 년에 한 번꼴로 엑소더스도 일어난다. 동료들이 떼를 지어 떠난 휑한 편집국에서 어렸던 나는 얼마나 서럽고 외로웠던가. 월급을 훨씬 많이 주는 회사로, 더 힘이 세고 위세가 있는 곳으로, 아예 다른 직업의 세계로 사람들이 대거 떠나갔다. 나는 어쩌지? 막막한 기분으로, 때로는 열패감에 시달리며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그러나 가고 싶은 곳이 없다. 지금 여기가 최선이다. 나에게는 편이 없었으므로 이곳이 최적의 서식지다. 침몰할 것 같지만, 떠날 수가 없다. 떠나본들 행복할 것 같지도 않다. 그렇다면 이곳에서 침몰하자. 우직하게 그냥 가라앉는 것도 해볼 만한 생의 경험이다. p25
스스로가 미워지는 순간들. 일은 많고, 힘은 달리고, 그렇다고 억만금을 버는 것도 아니고, 집에서는 새끼들이 악악거리고. 보람이고 나발이고 다 때려치우고 싶은 그런 순간들. 그러나 나는 또한 알고 있다. 그런 자신이 미워 울 줄 아는 사람이라면 다시 돌아가게 된다는 걸. 완전히 처음으로는 아니더라도, 몇 걸음 정도는 되돌아갈 수 있으리라는 걸. 그렇게 몇 걸음씩 되돌아 걷다 보면 그렇게까지 나쁜 사람은 될 수가 없다는 걸. p42
이것은 내가 그토록 품에 안고 싶은 아기를 떼어놓고 울려가면서까지 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인가? 그 물음이 판단의 최종심급이 되어 매번 내 안에서 메아리쳤다. p50,51
아, 진짜. 세련되고자 온 생애를 분투했는데, 결국 끌어안고 만 것은 순정, 우직, 신의, 성실, 권선징악, 인과응보 같은 촌스럽기 그지없는 것들뿐이다.
p53
대한민국 유자녀 여성에게 일이란 누군가는 반드시 상처받는 삼각게임이다. 스스로 2급 트랙으로 후퇴하며 커리어를 만신창이로 만든 엄마가 상처받거나, 엄마 없이 외롭게 시간을 보내며 돌봄공백에 시달리는 아이가 상처받거나, 언제가 생의 최후일지 모르는 노년의 부모가 양육이라는 감옥에 갇혀 무너져내리거나, 셋 중 하나 혹은 둘이다. 희생에 가까운 외부 조력 없이 아이를 키우면서 아이도 행복하고 엄마도 승승장구하는 그림은 대체로 가능하지가 않다. 슬프게도 어딘가에는 상처받은 사람이 있는 것이다. p73
멀어진다고 해서 좋아하는 마음을 그냥 내버려두면 안된다. 늘 청결한 욕실을 원한다면 청소라는 노력이 부단히 필요한 것처럼, 멀어지는 마음에도 곰팡이가 피지 않도록 햇볕을 자주 쐐줘야 한다. p89
더 슬프고 더 현명한 사람(A sadder and a wise man).깨달음이란 기쁨과 함께 오지 않고 슬픔과 함께 온다는 것. 사람을 더 현명해지도록 만드는 것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이라는 것. (중략)
삶의 폭력을 현명하게 잘 헤쳐나가고 싶다. 그러려면 슬퍼야 한다. 슬픔에 귀 기울여야 한다. 슬픔만이 나를 그 길로 안내할 수 있다. p106
자기연민은 어떤 경우에든 대체로 추하다. 지독한 자기애의 발로이기 때문이다. p119
지기연민이 들이닥칠 때 나는 이제 생각한다. 애거서 크리스티 같은 어린 시절을 갖지 못한 덕분에 나는 훨씬 더 좋은 사람이 되었다. 내가 떨치지 못한 무산계급의 감각이 그나마 나를 기자답게 만들어주었다. 슬픈 사람들 곁으로 가게 해주었다. 그들의 목소리에 이끌리고, 우렁차게 "여기를 좀 보시오! 여기에 세계의 비참이 있소!" 외치도록 만들었다. 나는 결핍이 빚어내는 삶의 깊이를 사랑하고, 세상을 향한 내 인류애는 그 결핍의 경험으로부터 솟아난다. 결핍은 때때로 우리 인생의 축복이다. 나는 애거서 크리스티의 어린 시절을 질시하지만, 그것을 원하지는 않는다. 나의 결핍은 나의 자산이 되었다. 결핍의 효용으로부터 나는 많은 것을 얻었다. p120
행복한 유년기를 보내는 내 자식들을 보면서 어렸던 내가 유령처럼 출몰할 때, 아이들을 향한 지독한 사랑과 자기연민으로 인한 기묘한 질투가 동시에 솟구칠 때, 나는 자꾸 분열됐다. 자식을 키우며 불거져버린 이 지긋지긋한 연민의 감정을 이젠 끝장내고 싶었다. (중략) 앞으로 나가라고. 여기서 계속 질척대지 말고 제발 앞으로 나가라고. p122
나는 나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내가 가엾다. 이 감정을 소거할 수 있는 방법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연민의 에너지를 다른 방식으로 사용할 수는 있을것이다.p123
모종의 감동에 젖어 나는 아아들에게 말했다. "아마 너희들 곁에도 옛날의 엄마처럼 슬픈 아이가 있을 거야. 그 친구들의 얼굴에 슬픈 기색이 스치면 그걸 놓치지 마. 그 친구가 어린 시절의 엄마라고 생각하고 배려하는 사람이 되어주면 좋겠어." p125
가난하면 숙련을 축적할 기회가 없고, 숙련이 없으니 성취도 없는 삶. 수십 가지 일들에 기웃거려본 후 포기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을 때. 그때의 자기혐오를 나는 제법 잘 안다. p143
나는 중증 의미병 환자였다. 모든 것에서 의미를 찾으려 했다. 나의 감각기관이 접촉하는 거의 모든 것에서 의미를 추출해왔다. 시작도 하기 전에, 하고 있는 와중에도, 끊임없이 그것의 이미에 대해서만 생각했다. 그래서 자주 끝까지 가지 못했다. 그렇게 골똘히 생각해보면 결론은 온통 무의미뿐이니까. p148
자꾸 의미를 찾으려는 병증은 내 가난한 마음의 소산이었다. 손해 보지 않으려는, 최종적인 무의미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으려는 너무도 성급한 조바심이었다. p149
의미란 사후적으로 추출되는 것이다. 지금 하는 이 일의 의미는 이 일을 다 한 이후에야 파악할 수 있다. 다 할 때까지는 그냥 하는 것이다. p149
의미는 때때로 무의미의 축적들로부터 생성되기도 한다. (중략) 그것이 쌓이고 쌓인 후에야 너는 나에게 하나의 의미가 된다. p152”
『그저 하루치의 낙담』 박선영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