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건넨 액자
2026-06-02 10:22:24
액자는 벽에도 속하지 않고 그림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것은 안쪽의 것이 예술이고 바깥의 것은 예술이 아니라고, 혹은 적어도 같은 종류의 예술은 아니라고, 혹은 적어도 가만히 앉아서 보여지기로 합의한 예술은 아니라고 선언하는 경계선이다. 홍상수는 사반세기 동안 이 액자를 조직적으로 헐거워뜨려 왔다. 연인인 배우를 법정에서 소추 가능한 딱 그 지점만 빼고 모든 면에서 홍상수를 닮은 감독과 사랑에 빠진 인물로 캐스팅하고, 주정뱅이를 주정뱅이로, 영화감독을 홍상수가 영화를 만드는 방식과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영화를 만드는 영화감독으로(시나리오 없이, 아침 후회, 오후 소주, 저녁 모텔) 캐스팅해왔다. 《소설가의 영화》(2022)에 이르러 그의 영화와 그의 삶 사이의 경계는 젖은 화장지 수준의 구조적 무결성에 도달해 있었고, 관객은 특정 장면이 자전적인지 묻기를 오래전에 그만두었다. 그 질문이 답할 수 없는 것이라기보다 무관한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두 가지 가능한 답("예"와 "아니오") 모두 같은 해석적 목적지로 이끌리므로. 대부분의 액자는, 공정하게 말해서, 침묵을 지킬 만큼의 예의는 갖추고 있다. 그림을 잡아주고, 가장자리를 보호하며, 그림에게 말을 걸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제72회 베를린 국제영화제 은곰상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한 이 영화에서(그 이유가 있었으리라 짐작되는 심사위원단에 의해), 뤼시앵 델렌바흐의 mise en abîme 유형론에도, 그 밖의 누구의 이론에도 편안한 선례가 없는 일이 액자에게 벌어진다. 액자가 역전된다. 영화 속 영화(소설가 준희가 만든 단편, 이혜영 분)가 그것을 담고 있는 영화보다 입증 가능하고 검증 가능할 정도로 더 많은 물리적 현실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내부 작품은 외부 작품의 반영도, 논평도, 축소모형도 아니다. 사진적 매체로서 영화가 항상 자신의 타고난 권리로 주장해온 바로 그 하나의 범주, 즉 세계가 실제로 어떻게 생겼는지의 충실한 기록이라는 범주에서 내부 작품이 우위에 있다. 이것은 위상학적 파괴 행위이며, 들꽃을 꺾는 여자의 고요한 침착함으로 수행된다.
이 역전의 힘을 이해하려면, 먼저 그것에 선행하는 시각적 체제에 복종해야 한다. 92분 동안(혹은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그중 약 80분 동안, 역전 자체가 마지막 구간을 차지하므로), 홍상수는 등장인물과 관객을 비상한 가혹함의 모노크롬 안에 가두어 둔다. 이것은 고전적 흑백 영화의 부드럽고 은빛 나는 입자가 아니다. 잉그리드 버그먼의 얼굴이 《카사블랑카》에서 달빛으로 조각된 후 유능한 조명 기사의 눈물로 살짝 가루를 뿌린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던 그런 종류 말이다. 홍상수의 흑백은 잔혹하다. 디지털 노출이 의도적으로 열려 있어 창문은 순수한 백색 소멸의 직사각형이 되고, 얼굴은 투명한 가면으로 납작하게 눌리며, 컬러 사진이 통상적으로 예의상 제공하는 피하의 온기가 배수되어 있다. 물리적 세계는 일련의 삭막한 그래픽적 명제로 환원된다. 벽은 톤이 되고, 얼굴은 형태가 되고, 나무는 실루엣이 된다. 이 체제의 한 시간 후, 색채 정보에 굶주린 관객의 망막은 적응한다. 기대치를 하향 조정하고, 신경 역치를 재보정하며, 결국 색이란 것이 단순히 부재하는 것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상상조차 불가능한 것, 한때 방문했지만 더 이상 지도에서 찾을 수 없는 나라에서 온 소문이 되는 상태에 도달한다. 이것은 스필버그가 《쉰들러 리스트》를 흑백으로 촬영하기로 한 것이 미학적 선택이었던 것과 같은 의미의 미학적 선택이 아니다(즉, 진지함과 역사적 무게감, 그리고 아카데미 투표자들이 거부할 수 없다고 여기는 종류의 도덕적 중량을 신호하기 위한 선택). 홍상수의 모노크롬은 관객의 신경 체계에 부과된 규율적 체제이며, 모든 효과적인 감옥 건축이 그러하듯, 그 목적은 감금 자체가 아니라 석방의 순간을 너무도 압도적으로 설계하여 죄수가, 나온 후에, 자기 자신의 감각의 증거를 더 이상 신뢰할 수 없게 만드는 데 있다.
이 모노크롬 감옥 안에서 소설가 준희(이혜영)는 통상적인 주인공이 아니라 하나의 지각적 도구, 의견을 지닌 카메라로 작동한다. 그녀는 한동안 글을 쓰지 않은 작가이며, 이 사실을 연습된 무관심의 태연함으로 언급한다. 무관심을 진짜와 거의 구별 불가능해질 때까지 리허설한 사람의 태연함이다. 그녀의 하루는 일련의 우연한 만남으로 구성된다(이것이 홍상수 영화이므로, 만남은 조수가 "우연"인 것과 같은 의미에서 "우연"이다. 즉, 메트로놈 같은 규칙성으로 도착하며 등장인물 외에는 아무도 놀라지 않는다). 그녀는 서점을 방문하고, 효진(권해효)이라는 영화감독을 만나고, 공원 벤치에서 배우 길수(김민희)를 만난다. 바로 이 마지막 만남에서 준희는 이 영화에서, 아마도 홍상수 후기 필모그래피 전체에서 가장 정밀하게 조준된 대사 한 줄을 발사한다. 상업 영화 감독 효진이 길수가 주류 영화를 떠난 것이 "아깝다"고 막 말했을 때의 일이다. 새총에서 겨냥된 자갈의 수정 같은 타격적 명료함으로 전달되는 준희의 응답: "뭐가 아깝다는 건지 모르겠네. 자기 인생을 갖고 자기가 판단하면서 사는 거죠. 이분이 무슨 초등학생이에요?" 이것은 대화가 아니다. 통제된 철학적 폭파이다. 수년 동안 옆에 서 있는 여자를 향해 겨냥되어 온 공적 연민과 가부장적 평가라는 장치 전체를 조직적으로 거부하는 것이다. 이 대사는 길수를 방어하는 것이라기보다 방어가 필요해 보이게 만들었던 개념적 건축물을 해체하는 것이며, 열네 개의 한국어 음절로 그 일을 해낸다. 대부분의 통제 해체가 달성하는 것보다 더 나은 음절 대 파괴의 비율이다.
준희가 거부하는 방어 대신 제안하는 것은 영화다. 다큐멘터리가 아니다(그녀는 이 점에 대해 단호하며, 자기가 범할 수 없는 단 하나의 실수를 식별한 사람의 고집으로 되돌아온다). "다큐가 아닙니다. 이야기를 쓸 거예요. 그렇다고 실제적인 것이 나타나는 걸 막지는 않을 거예요." 철학 저작의 거의 전부를 가명으로 출간한 쇠렌 키르케고르(요하네스 클리마쿠스, 안티-클리마쿠스, 콘스탄틴 콘스탄티우스, 그리고 매우 고급스러운 덴마크 요양원의 환자 명부처럼 들리는 대여섯 개의 다른 이름들)라면 이 기동을 즉시 알아보았을 것이다. 그것은 간접 전달이다. 직접 말하기를 거부하는 것이 진실을 가능하게 하는 형식적 조건인 것이다. 홍상수는 자신의 사랑에 대한 영화를 만들지 않는다. 소설가가 배우에 대한 영화를 만드는 것에 대한 영화를 만들고, 사랑은 두 번째 영화 안에 소설가의 이름을 가장으로 입고 도착한다. 키르케고르의 신학이 요하네스 클리마쿠스의 고백 안에 도착했던 것처럼. 거부는 회피가 아니다. 그것은 진정성의 구조적 전제 조건이다. 액자(소설가의 저자권, 허구적 장치, 준희가 쓰겠다고 주장하는 "이야기") 없이는, 뒤따르는 컬러 시퀀스는 다큐멘터리, 고백, 혹은 사적 일기였을 것이며, 그 어떤 형태에서도 현재의 형태에서 달성하는 것을 달성할 수 없었을 것이다. 현재의 형태에서 그것이 달성하는 것은 계시에 더 가까운 무엇이다. 소스 텍스트의 정식화는 정확하다: "이 부정이 능동이다." 액자는 진실을 가두지 않는다. 진실을 허락한다. 그리고 액자에 의해 허락된 진실의 이름은, 하나의 합성 명사를 찾는다면, "액자된 진실"이다. 액자에도 불구하고의 진실이 아니라 액자 덕분의 진실, 그것이 안전하게 나타날 수 있게 해준 바로 그 한 겹의 허구적 보호 없이는 도착할 수 없었을 진실.
컬러가 도착할 때 그것은 시각적 효과가 아니다. 지각적 사건이다. 준희와 함께 단편영화를 만들고 있는 길수(김민희)가 조용히 카메라에게 컬러로 전환해 달라고 요청하고, 뒤따르는 것은 전환이 아니라 분출이다. 모노크롬의 형식적 억압에 의해 80분간 억눌려 있던 물리적 세계가, 물속에 눌려 있다가 갑자기 풀려난 것의 힘으로 봉쇄를 뚫고 솟구친다. 들꽃 꽃잎. 강아지풀. 스스로 광원을 생성하는 것처럼 보이는 발광하는 초록. 가슴이 아려오는 파란 하늘, 은유적으로가 아니라 갑작스러운 아름다움이 미주 신경을 활성화하여 경미한 심장 고통과 구별 불가능한 감각을 생산하는 그 정밀하고 물리적인 방식으로.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의 《영화 이론》(1960)은 영화의 근본적 사명이 "물리적 현실의 구원"(습관과 친숙함이 물질적 세계를 유배시킨 추상으로부터의 구출)이라고 주장했는데, 그가 이 시퀀스를 보았다면, 짐작컨대, 울었을 것이다. 이것이 이 비평가가 만난 그의 테제의 가장 문자 그대로의 실현이기 때문이다. 가공되지 않은 물질적 세계가 그것을 억압해온 형식적 구속을 뚫고 분출하며, 관객의 지성이 아니라 관객의 신체가 물리적으로 재편성되는 힘으로 도착하는 것. 역설은 컬러가 인간 시각의 기본 세팅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매일 컬러로 본다. 이 세상에서 가장 평범한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컬러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처럼 도착하게 만든다. 속성이 아니라 물질인 것처럼, 스크린이 단지 표시하는 것이 아니라 스크린 위로 쏟아지는 것처럼. 이것이 계시의 역설이다. 이미 알고 있던 것이 전대미문의 것으로 도착하는 것. 그것을 인식하는 데 신학이 필요하지는 않지만, 신학이 있으면 확실히 손해 보지는 않을 것이다.
이 컬러의 분출 안에서, 이 비평가의 지식이 닿는 한 영화사에 선례가 없는 시퀀스가 펼쳐진다. 길수가 들판에서 들꽃을 꺾는다. 혼자서, 의식도 관객도 없이, 꽃다발을 만든다. 역시 혼자서 결혼 행진곡을 흥얼거린다. 그러자 김민희 배우의 실제 어머니가 스크린 위에 나타나고, 두 여성은 함께 계단을 올라간다. 꽃. 결혼 행진곡. 어머니. 이 세 요소는, 그 자체가 또 다른 영화 안에 담긴 영화 안에 모여, 약 90초의 스크린 시간을 차지하며, 선행하는 80분의 흑백 허구 전체보다 더 많은 가공되지 않은 전기적 현실을 담고 있다. 영국의 소아과 의사이자 정신분석가 D.W. 위니콧은 진정한 자기가 안전하게 출현할 수 있는 조건을 연구하는 데 경력을 바쳤으며, 그것을 "잠재 공간"이라 불렀다. 주관적 환상과 객관적 현실 사이의 보호된 영역, 놀이와 창조와 진정한 자기가 가능해지는 곳. 준희의 영화라는 액자가 정확히 그런 공간이다. 그것이 없었다면 이 90초는 노출되었거나(다큐멘터리적 침입, 사생활 침해) 격리되었을 것이다(허구적 조작, 감정적 무게를 담기에는 너무 명백하게 연출된). 액자는 정확히 한 겹의 보호를 제공하며, 이것이 핵심이다. "보호되지 않은 자기를 보는 것은 견디기 어렵고, 너무 많이 보호된 자기는 자기가 아니다. 액자가 정확히 한 겹일 때만 자기는 자기로 보인다." 한 겹. 영이 아니다, 영이면 노출증이다. 둘이 아니다, 둘이면 회피다. 하나. 소스 텍스트의 관찰, "더 말하려 하면 이 셋은 흩어진다"는 비평의 포기가 아니다. 그것은 이 시퀀스가 분석이 가능한 문턱 아래와 분석이 손상의 형태가 되는 문턱 위에서 작동한다는 인식이다. 꽃, 행진곡, 어머니: 그것들은 거기에, 컬러 안에, 함께 있으며, 유일하게 적절한 비평적 반응은 그것들의 현존을 기록한 다음, 약간의 노력을 기울여, 멈추는 것이다.
영화의 결말 근처에서 길수가 빈 극장에 혼자 앉아 있다. 거리두기 테이프가 좌석마다 붙어 있다(이 영화는 팬데믹 기간에 만들어졌으며, 이 사실을 나무가 이산화탄소를 흡수하듯 논평 없이 흡수한다). 그녀는 자기가 출연한 단편영화를 처음으로 보고 있다. 컬러로 된 자기를 보고 있다. 꽃을 꺾고, 결혼 행진곡을 흥얼거리고, 액자 밖에서는 자기 어머니인 여자와 함께 계단을 오르는 자기를 보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 주의 깊게 보면, 첫 번째 사건 안에서 두 번째 사건이 일어나고 있다. 허구 안에서 길수가 길수를 본다. 허구 밖에서 김민희가 김민희를 본다. 두 봄(視)이 한 장면 안에 겹친다. 영화 내내 카메라 앞에 있었던 사람이 처음으로 카메라 뒤의 시선을 마주하며, 그녀 자신이 컬러로 쏟아지는 바로 그 순간, "사랑해"라는 목소리와 함께 마주한다. 존 버거의 《봄의 방식들》(1972)은 봄의 정치학과 윤리학이 논의되어 온 용어를 반세기 동안 확립했으며, 보는 자와 보이는 자 사이의 관계는 항상 비대칭적이라고 주장했다. 보는 자는 소유하고 보이는 자는 소유당하며, 서양 미술의 전체 역사(누드, 초상, 소유자의 창에서 바라본 풍경)는 이 비대칭의 기록이다. 그러나 이 작고 조용한 장면에서 비대칭이 무너진다. 보여져 왔던 사람이 자기 이미지를 소유한다. 보여지던 자가 되돌아보고, 그녀가 보는 것은 낯선 사람이 만든 자기의 재현이 아니라 정확히 한 겹의 보호로 자기를 안아주며 자기로서 나타나게 해준 액자다. 이 장면은 영화 전체를 하나의 봄의 행위로 응축하며, 너무도 조용하게 그렇게 하기 때문에, 이를테면 팝콘에 손을 뻗고 있었다면 전적으로 놓칠 수도 있다. 이것이 홍상수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에서 팝콘을 금지해야 하는 이유이며, 이 비평가는 어떤 규제 기관 앞에서든 이 정책 권고를 옹호할 준비가 되어 있다.
영화의 첫 몇 분, 모노크롬이 자신의 권위를 완전히 확립할 시간을 갖기 전에, 서점에서 짧은 장면이 있다. 준희가 현우(박미소)라는 젊은 직원에게 자기 소설의 한 문장을 수어로 옮겨달라고 부탁한다. 그 문장은 이렇다: "날은 아직 밝지만, 날은 곧 저문다. 날이 좋을 때 실컷 다녀보자." 현우가 수어로 옮긴다. 말해진 것과 몸짓으로 된 것 사이에서, 들리는 것과 보이는 것 사이에서 수년간 번역해온 사람의 숙련된 유창함으로 손이 공기를 가른다. 이 문장이 영화의 윤리적 열쇠이고, 압축된 테제이며, 사용 설명서이다. 그것은 사실(날이 저문다)을 행위(다녀보자)에 하나의 발화 안에서 묶으며, 사실도 행위도 문장을 파괴하지 않고는 서로에게서 분리될 수 없다. 폴 리쾨르의 《시간과 서사》(1983-85)는 시간이 서사를 통해 재형상화될 때에만 인간적 시간이 된다고 주장했으며, 그는 이 문장을 서사적 정체성의 가능한 한 가장 작은 단위로 인식했을 것이다. 시간의 객관적 흐름을 인정하고(저녁이 다가온다) 삶의 행위로 응답하는(다녀보자) 자기,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시간을 우리에게 일어나는 사실에서 우리가 몸으로 이야기하는 서사로 재형상화하는 자기. 이 문장이 92분으로 펼쳐진 것이 이 영화다. 그리고 그 92분의 끝에, 모노크롬이 비밀처럼 감추어 왔던 컬러 안에서, 액자로부터 한 목소리가 "사랑해"라고 말하고, 다른 목소리가 "사랑해요"라고 답한다. 누구의 목소리인가? 촬영감독의, 아마도. 감독의, 아마도. 액자의, 아마도.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림을 둘러싸기 위해 존재하지 그림에게 말하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 액자가 입을 열고 말할 수 있는 가장 작고 가장 큰 것을 말했다는 사실이다. 대부분의 액자는,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침묵을 지킬 만큼의 예의는 갖추고 있다. 이 액자는 그러지 않았다. 그리고 그림은, 날은 아직 밝지만 곧 저물 들판에서 꽃을 꺾고 있는 한 여자인 그림은, 그것을 들었고, 답했고, 날은 좋았고, 그들은 갔고, 볼 수 있는 모든 것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