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을 쫓는 아이
2026-07-03 21:17:22
마지막 장을 덮으니, 입 안에서부터 노랫가락이 우물거리며 흐른다. 아버지의 인생이 나의 인생에 이어지고, 나의 인생이 아들에게 전해지는 삶의 사이클이 떠오른다. 계절이 바뀌어 잎새가 돋아나고, 꽃이 피고 지고 겨울을 보내듯, 매 순간을 구성하는 잎사귀며 꽃이며 낙엽은 다를 지라도, 결국엔 돌고도는 반복처럼 말이다.
https://youtu.be/fIZeK3CY6xg?is=u7sxvthrRfUEVHYy
어느 독서모임 멤버의 한마디가 떠오른다. 나는 전인권의 '돌고 돌고 돌고'를 들었던 것에 비해, 자신은 윤도현 밴드의 '돌고 돌고 돌고'를 듣고 자랐다고.... 언뜻 삶의 순환을 이렇게 또 경험한다.
'결국, 그 주체는 다르더라도 같은 것을 경험하는 인간들의 삶이 이어지는 것 아닌가!' 하면서...
아미르는 창 밖의 두 개의 연을 보며 하산을 기억하는 것으로 대장정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어린 시절, 연을 쫓는 아이는 누구였던가? 긴 이야기의 끝은 하산의 아들 소랍을 위해 연을 쫓는 아미르를 보여준다. 600 여페이지에 달하는 길다면 긴 분량이지만, 작가의 일기장을 읽어 가듯 장벽없이 술술 넘어간다고 할까? 단지, 소련의 침공, 내전상황, 그리고 탈레반 정권으로 이어지는 변화무쌍했던 아프가니스탄의 정치상황을 조금만 research하고 본다면, 실제 카불의 모습을 표현한 장면이 실감있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Youtube로 잠시만 찾아보더라도 도시의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으리라.
앞서 언급했던 '연'이라는 대상물은 이 작품에서 담고있는 이야기의 전반적인 흐름을 모두 갖고 있다. 그것을 통해 행복했던 유년시절을 보고, 승리의 쾌감도 보며, 그것으로 배반의 순간을 갖게 되고, 마지막에는 소랍과의 교감을 이어가는 중요한 소재로 활용되고 있다. 마치, 우리가 어떤 대상물을 보면 그 때의 기억이 샘솟듯이, 또는 그 때의 그 사람이 생각나듯이 말이다.
공정한 건 아니다만, 며칠 동안, 아니 단 하루에 있었던 일이 인생의 행로를 바꿔놓을 수도 있단다.
아미르는 바바와 함께 아프가니스탄을 탈출하고, 파키스탄을 거쳐 미국에서 정착하는 난민의 신분이 된다. 소위, 포드 머스탱을 몰던 바바가 이제 페인트도 벗겨진 구닥다리 포드 버스를 몰며, 길거리의 가판대에서 온갖 잡동사니를 팔야야 하는 신세가 되었으니 말이다. 미국에서의 이민 1세대로 살아 온 내게 그의 모습이 어떠했을 지, 피부로 느끼면서...
비단, 작가는 이런 정치적 상황으로 어쩔 수 없이 난민으로 살아가야 하는 아프가니스탄인만을 담아 내려고 한 건 아니다. 바바와 알리와의 관계와 같이, 이어진 아미르와 하산의 관계... 그리고 주인으로서 하인에게 범한 배반의 행위, 그것이 바바에서 아미르에게도 비슷하게 이어지는 구조... 하산을 내쫓기 위해 했던 아미르의 행위를 즉, 메트리스에 돈을 넣어 놓았던 행동을 파리드의 형 집에서 똑같이 반복하나, 정반대의 다른 의미였다는 점... 등을 곱씹어 보면 작가가 담아놓은 삶의 연속성 내지 반복성의 모습이 보이리라.
그날 아침 일찍, 나는 아무도 보지 않을 때, 25년 전에 했던 행동을 했다. 나는 매트리스 밑에 구겨진 돈을 한 움큼 집어넣은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아미르가 하산을 위해 한 마디 못하고 숨죽여 있던 비겁함에 있던 그들이 이제 성인이 되어 다시 카불을 찾은 아미르에게 그때의 비겁함앞에 우뚝 설 장면이 주어진다. 아세프, 아미르, 그리고 죽은 하산을 대신하여 소랍이 있는 상태로... 마침내 아미르 자신은 거의 죽도록 맞지만, 하산을 대신한 소랍의 새총으로, 하산이 얘기했었던 것과 같이, 아세프의 눈을 외눈박이로 만든다. 과거와 현재의 이어짐을 치밀하게 계산한 작가의 의도를 여기서도 확인한다.
결국, 비겁함이라는 죄책감으로 살아왔던 아미르가 하산을 대신한 소랍앞에서 우뚝 선다. 그리고 앞으로는 미국에서 죽은 하산을 대신한 소랍의 아빠로 살아갈 것 같다. 자신의 죄를 속죄하려 선한 일을 행했던 바바를 보았듯이, 이제 자신의 비겁함을 선으로 회복하는 하산을 보며 이야기는 마친다. 소랍을 위해 연을 쫓는 아미르가 되어서... 작가는 이렇게 어린 시절의 아미르와 하산의 관계를 어른이 된 아미르와 하산의 아들 소랍으로 연결시킨다. 이렇듯 연결되어 순환하는 우리네 삶의 이야기를 아프가니스탄인이라는 자신의 경험치와 함께 독자들에게 알리고 싶었던 건 아닐까?
내 생각에는 그게 진짜 구원이다. 죄책감이 선으로 이어지는 것 말이다.
"다시 착해질 수 있는 길이 있어."
"너를 위해서라면 천 번이라도."
항상 그렇듯, 하이라이트해 놓은 문장들을 간략하게나마 정리하며 글을 마친다. 이 글을 읽게 된 여러분도 즐거운 독서의 시간을 갖기를 진심으로 바라면서...
나는 1975년의 어느 춥고 흐린 겨울날, 지금의 내가 되었다.
하산과 나는 같은 젖을 먹고 자랐다. 우리는 똑같은 뜰에 있는 똑같은 잔디에 첫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같은 지붕 밑에서 첫말을 했다. 내게는 '바바'가 첫말이었다. 그(하산)에게는 '아미르'가 첫말이었다. 그건 내 이름이었다.
바바는 알리를 자신의 친구라고 한 적이 없었다. 흥미로운 건 나도 하산을 친구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역사를 극복하는 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종교도 마찬가지다. 결국 나는 파슈툰인이었고 그는 하자라인이었다. 나는 수니파였고 그는 시아파였다. 그걸 바꿀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정말로 아무것도 없었다.
자신이 말하는 모든 것에 진심을 담는 사람들은 늘 그렇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도 그럴 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입을 벌렸다. 하마터면 무슨 말인가를 할 뻔했다. 하마터면 말이다. 만약 그랬다면 내 인생은 달라졌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그냥 바라보기만 했다. 마비된 채.
내게 미국은 내 기억들을 묻게 될 곳이었다. 바바에게는 그의 기억들을 해도할 곳이었다.
그리고 25년이 흐른 지금, 그때 했던 선택이 나를 이 땅으로 돌아오게 했다.
결국 바바와 나는 내가 알았던 것보다 더 닮아 있었다. 우리 두 사람은 우리를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을 배반했다.
아프가니스탄에는 많은 아이들이 있지만 그들에게는 유년 시절이 없다.
아프간 사람들은 '젠다기 미그자라'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한다. 인생은 계속된다는 것이다. 시작과 끝, 캄야브(행복)와 나캄(불행), 위기 혹은 카타르시스에 상관없이 인생은 계속된다는 것이다.
용서는 화려한 깨달음이 아니라 고통이 자기 물건들을 챙기고 짐을 꾸려 한밤중에 예고 없이 빠져나가는 것과 함께 시작되는 것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소랍이 조용했다고 말하는 건 잘못된 표현일 것이다. 조용하다는 건 평화를 의미한다. 평온함을 의미한다. 조용하다는 것은 삶의 볼륨을 내리는 것이다. 침묵은 '오프' 버튼을 누르는 것이다. 모든 걸 꺼버리는 것이다. -중략- 그의 침묵은 어두운 곳에 꽁꽁 숨어 몸을 오그리고 있는 사람의 침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