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솔러지 『우리의 연애는 모두의 관심사』(마름모)
2025-05-19 13:04:41
'불륜'을 주제로 다룬 앤솔러지라는 소문 때문에 끌려서 읽었는데, 폭싹은 아니고 살짝 속았수다.
책 뒷표지 상단에 "나는 그녀에게 살아 있는 딜도조차 아니었다"는 문장이 떡 하니 박혀 있고, 그 아래에 "사랑에 관해 은폐된 것들/불륜 혹은 금기의 앤솔러지"라는 문장이 달려있으니, 소싯적에 몰래 야설을 돌려 읽었을 때처럼 설렜을 수밖에.
사실 이 앤솔러지의 주제는 '불륜'보다는 '금기'에 방점이 찍혀 있다.
'불륜'을 주제로 다뤘다는 소문은 마케팅을 위한 귀여운 어그로로 이해하자.
물론 '불륜'을 다룬 작품도 있으니 100% 어그로는 아니다.
원래 순애보보다 막장극이 보는 맛이 나지 않던가.
이 앤솔러지에 실린 네 작품 모두 화려한 '내로남불'의 향연이다.
작가 이름을 가리고 읽어도 어떤 작가의 작품인지 쉽게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네 작품 모두 개성이 강해 읽는 재미가 있다.
장강명 작가의 「투란도트의 집」은 자코모 푸치니의 오페라 「투란도트」를 모티브로 섹스 파트너(과연 파트너인지 의문이지만) 관계를 다룬다.
철저하게 마음의 벽을 세우고 몸만 오가는 엉망진창 섹스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다가도, 매일 밤 대한민국 어딘가에서 충분히 벌어지고 있을 사건 같아서 현실감이 느껴졌다.
오페라 주인공과 소설 주인공의 심리를 엮은 다양한 층위의 이야기가 사랑이란 무엇이고 섹스란 무엇인지 생각할 거리를 계속 남긴다.
차무진 작가의 「빛 너머로」는 소재 하나하나가 모두 금기인데(심지어 수녀까지 등장한다!), 선을 넘지 않으면서도 처절하게 사랑이 무엇인지 들여다본다.
범죄인 듯한데 범죄는 아닌 연출이 쫄깃해 선을 넘는 게 아닌가 하며 우려했는데(솔직히 기대도 조금 했다), 역시 기우였다.
오히려 오컬트라는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내는 전개가 더 처절하게 다가왔다.
그렇게라도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랑이라니.
소향 작가의 「포틀랜드 오피스텔」은 이 앤솔러지에서 가장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불륜, 치정, 복수 등 기시감이 강하게 드는 이야기를 낯선 공간에서 대단히 매혹적으로(이 단어 외엔 마땅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풀어냈다.
'불륜 혹은 금기의 앤솔러지'와 가장 잘 어울리는 이야기였다.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작업도 중요하지만, 익숙한 주제를 어떤 방식으로 풀어내느냐가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닫게 했다.
정명섭 작가의 「침대와 거짓말」은 말 그대로 정명섭 작가다운 작품이다.
실제 치정 살인 사건을 모티브로 살인 사건과 그 방식을 쫓는 추리소설로 풀어낸다.
여기에 남북의 공조 수사와 밀실 트릭까지, 짧은 분량에 다양한 재미를 담아낸 백화점 같은 단편이다.
페이지를 넘겨 마지막 부분에 이르면, "아까 그게 그거였다고?"하면서 다시 페이지를 뒤로 넘기는 재미가 있다.
여기엔 없지만 앤솔러지 기획에 함께했었다는 정아은 작가가 세상을 떠나지 않았다면 어떤 작품을 실었을까.
그 궁금증을 독자에게 맡긴 채 정아은 작가의 빈 자리를 따로 채우지 않은 구성도 마음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