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진환 산문집 『아무튼, 레코드』(위고)
2025-08-23 20:19:13
1. 음악을 대하는 내 태도가 진지해진 때는 지난 1995년 봄 솔리드 2집 [The Magic of 8 Ball] 정품 테이프를 산 뒤부터다.
그 시절 내 용돈은 하루 1000원을 넘지 않았는데, 정품 테이프 가격은 3500~5500원 사이였다.
용돈을 일주일 동안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야 살 수 있는 정품 테이프를 산 이유는 부끄러움 때문이었다.
'길보드'로 부르던 불법복제 테이프를 국민학교 시절부터 가끔 사서 들었지만, 좋아하는 노래를 '길보드'로 들으면 좋아한다고 말하기가 왠지 떳떳하지 않다고 느껴졌다.
학창 시절 내내 용돈이 부족했지만, 테이프를 사서 비닐 포장을 뜯을 때 쏟아지는 도파민 때문에 부족한 용돈을 모으고 또 모았다.
공짜로 받은 비싼 물건보다 '내돈내산'한 저렴한 물건에 더 애착이 가는 법 아닌가.
신중하게 산 테이프를 듣고 또 들었고, 내 방에 하나둘 모인 테이프는 최고의 보물이 됐다.
2. 테이프로 음악을 듣는 일은 자연스럽게 앨범 전체를 듣게 하는 습관을 만든다.
테이프로 음악을 들을 때 다음 곡을 듣기 위해 워크맨의 빨리 감기 버튼이나, 이전 곡을 듣기 위해 되감기 버튼을 누르고 수십 초 동안 기다리는 일은 번거롭다.
그럴 바엔 그냥 순서대로 앨범을 듣는 게 속 편하다.
그렇게 나는 반강제로 앨범 단위로 음악을 듣는 매력을 배웠다.
스트리밍 서비스가 대세가 되면서 클릭 한 번이면 쉽게 트랙을 바꿀 수 있는 세상이 된 지 오래됐지만, 나는 지금도 그냥 앨범을 통째로 플레이리스트에 넣고 순서대로 듣는다.
그래야 음악을 듣는 맛이 난다.
싱글과 앨범은 완전히 다른 세계다.
메탈리카의 멤버 각각은 최고의 연주자라고 부를 수 없지만, 하나로 모이면 세계 최강이 되듯 말이다.
나는 지금도 뮤지션은 싱글이 아닌 앨범(최소한 EP로라도)으로 자기를 증명해야 한다고 믿는다.
3. 영화광의 3단계가 있다지 않던가.
첫 번째 단계는 한 영화 두 번 보기, 두 번째 단계는 영화평 쓰기, 그리고 세 번째 단계는 영화 찍기.
음악도 마찬가지다.
첫 번째 단계는 한 앨범을 듣고 또 듣고, 두 번째 단계는 음악 이야기를 쏟아내고, 세 번째 단계는 음악을 직접 만든다.
나도 결국 세 번째 단계까지 왔고, 학창 시절 내내 공부는 안 하고 하찮은 사양의 데스크톱 컴퓨터로 음악을 만들었다.
음악 만들기만 해선 의미가 없다.
누군가에게 들려줘야 한다.
집에 있는 전축의 더블데크가 음반 공장 역할을 했다.
나는 컴퓨터 사운드카드의 라인 아웃을 전축의 마이크 단자(이 얼마나 무식한 발상인가)에 연결해 내 첫 앨범을 녹음했다.
조악하기 이를 데 없는 음질이어서 들었던 친구들의 평은 영 좋지 않았지만. 아무튼 나는 그렇게 내 앨범을 가진 뮤지션이 됐다는 생각에 뿌듯해했다.
지금도 그 앨범이 집 어딘가에 봉인돼 있다.
4. 이 산문집을 읽고 꽤 많은 추억을 되새겼다.
음악을 사랑했던 독자라면 이 산문집에 담긴 이야기가 모두 자기 이야기처럼 느껴질 테다.
그렇지 않은 독자여도 이런 세계가 있었구나 하며 흥미로울 테고.
특히 작가와 비슷한 또래의 독자라면 공감하는 부분이 정말 많아 읽는 즐거움이 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