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영 산문집 『아무튼, 맛집』(제철소)
2025-09-18 02:27:56
누구나 대체로 듣기 싫어하면서도 자기 입으로 내뱉기 좋아하는 말은 자랑이다.
특히 해준 것도 없는 사람이 앞에서 늘어놓는 자랑만큼 꼴불견은 없다.
자랑하고 뒷말을 듣지 않으려면 지갑을 열어야 한다.
그렇다고 해도 뒷말만 겨우 듣지 않을 뿐이지 진심 어린 축하를 듣긴 쉽지 않다.
막상 내 지난 시간을 돌아보니 꼴불견 짓을 참으로 많이 저질렀다.
그래서 요즘에는 되도록 사람 만날 기회를 잡지 않는다.
나이 들어 정신적으로 성숙해져 생긴 변화라기 보다는, 입을 열면 내 바닥이 드러난다는 걸 알고 알아서 숨는 거다.
생존 전략으로서 말이다.
그런데 아무리 떠들어도 욕을 많이 먹기는커녕 오히려 관심을 집중시키는 자랑이 있다.
바로 맛집 자랑이다.
맛집 찾기는 본능적으로 즐겁고, 어딜 여행하더라도 추억은 대부분 맛집에서 먹은 음식에서 나온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맛집을 자랑했을 때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을 거의 보지 못했다.
이 산문집을 읽고 그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순수하게 맛집 소개를 원한다면 다른 책을 찾자.
이 책은 일단 산문집이다.
곳곳에서 맛집을 소개하지만, '생생정보통' 같은 걸 기대하면 곤란하다.
미식가로 유명한 이탈리의 작곡가 로시니 이야기를 꺼내며 자연스럽게 작가 본인의 오랜 맛집인 이탈리안 레스토랑 '로씨니'와 얽힌 추억을 언급하는 식이니, 글맛을 즐기는 방향으로 읽는 게 옳다.
아재스러움(아재이니 당연하지만)이 물씬 풍기는 문장이지만, 곳곳에서 개그감이 넘쳐나서 지루하지 않다.
좋은 게 좋은 거라는 태도가 없다는 점도 솔직해서 좋다.
하얏트 호텔과 신라 호텔의 레스토랑을 비교해 손님 접대와 서비스도 국격에 맞게 개선돼야 한다고 꼬집으며 한 곳을 대놓고 '디스'할 땐 속이 시원했다.
음식을 두고 벌이는 갈등은 맛집에 진심인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고, 남의 맛집을 탓하면 안 된다는 통찰도 공감이 가면서도 날카롭다.
'맛집'이란 단어가 국립국어원이 만드는 표준국어대사전에 등재돼 있지 않다는 식의 깨알 정보도 유익하다.
'필동면옥'과 '우래옥'처럼 내 맛집과 겹치는 곳이 나오면 반가워서 군침을 흘렸다(나는 '진미냉면'을 훨씬 사랑하지만 뭐).
해외 맛집을 예약하겠다고 국제전화를 120통이나 걸었다는 대목에선 '미저리' 같은 집착을 느껴서 조금 공포스럽긴 했다.
지금까지 꽤 많은 '아무튼' 시리즈를 읽었다.
이 시리즈는 책마다 기복이 좀 있어서 뽑기를 하는 기분이다.
'아무튼, 장국영'처럼 가슴이 먹먹해지는 책도 있었고, '아무튼, 인기가요'처럼 "고작?"이라는 의문이 든 책도 있었다.
이번에는 뽑기를 잘했다.
누가 읽든 미워하기 어려운 산문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