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묵돌 장편소설 『초월』(김영사)
2025-12-15 22:19:26
몇 년 전, 이묵돌 작가의 장편소설 『어떤 사랑의 확률』을 무척 재미있게 읽었다.
하이퍼 리얼리즘 로맨스라고 불러야 할까.
다크 초콜릿 같은 질감의 시니컬한 이야기가 마음에 들었다.
그 기억 때문에 지난 여름 이 작품을 샀는데, 이제야 읽었다.
어지간한 장편소설 2권 이상의 분량(700페이지가 넘는다)의 압박도 있었지만, 무언가를 쓸 땐 무언가를 읽지 못하는 비효율적이고 부족한 내 역량 탓이다.
전반부와 후반부의 감상을 나눠야겠다.
전반부를 읽을 때는 "걸작이 나왔구나!"하며 흥분했다.
읽는 동안 다른 인생을 몇 차례나 살아보는 듯한 그야말로 '초월적인' 기분을 느꼈다.
오래전에 보고 꽤 충격을 받았던 만화 「5억 년 버튼」이 떠오르는 순간도 있었고, 신경정신과 의사 김영우가 한 청년을 진료하며 관찰한 전생 퇴행의 기록을 담은 『전생여행』이 떠오르는 순간도 있었다.
에드거 케이시의 '아카식 레코드' 개념, 생 제르맹 백작, 영화 「맨 프럼 어스」가 떠오를 때도 있었다.
떄로는 박상륭 작가의 작품을 읽는 듯한 기분도 느꼈다.
작가가 무아지경에 빠져 신들린 듯 소설을 써내려가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였다.
후반부는 아쉬웠다.
결국 사랑에 관한 이야기(참으로 지독한)인데, 전반부보다 집중하기 힘들었다.
후반부를 읽는 동안 문목하 작가의 장편소설 『돌이킬 수 있는』이 오버랩됐는데 아...
독자마다 감상이 다르겠지만, 나는 주인공의 사랑이 사랑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돌이킬 수 있는』이 정말 대단한 작품이었음을 새삼 느꼈다.
하지만 재미있는 장편소설이란 점은 부정할 수 없다.
분량이 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가독성도 훌륭하다.
한국 문학에서 보기 힘든 전 세계를 넘나드는 거대한 스케일도 읽는 재미를 더했다.
최근 한국 문학에서 이 정도 스케일을 보여준 장편소설이 있었나?
소싯적에 게임 '대항해시대2'를 밤새우며 즐겼던 시절이 문득 떠올랐다.
게임에 등장하는 여섯 캐릭터로 여러 차례 엔딩을 본 것도 모자라, 세이브 파일 에디터를 조작해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온갖 플레이하며 게임을 씹고 뜯고 맛보고 즐겼었다.
이 게임으로 내가 어디까지 닿을 수 있는지 알고 싶은 욕심 때문에.
책을 덮은 뒤 그 시절의 기분을 오랜만에 다시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