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 장편소설 『말뚝들』(한겨레출판)
2025-12-31 15:42:46
시도해 보진 않았지만, 전국의 희석식 소주를 모아놓고 블라인드 테스트를 하면 보해 '잎새주' 하나는 맞출 수 있을 것 같다.
위스키로 테스트하면 다른 건 몰라도 피트 위스키는 걸러내 '탈리스커' 아니냐고 아는 척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만약 소설로 테스트한다면 어떨까?
여성 작가 중에선 아리까리하지만 최정나 작가를, 남성 작가 중에선 확실하게 김홍 작가를 걸러낼 수 있을 것 같다.
이 작품의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김홍은 김홍'이라고 감탄했다.
작품의 소재는 사람이 죽어서 바다에 꽂혀 있는 말뚝인데, 왜 말뚝이고 왜 거기에 꽂혀 있는지 아무도 모르고 설명도 없다.
느닷없이 말뚝들이 바다에서 나와 거리에 등장하고, 광장에 등장하고, 회사에 등장하고, 주인공의 집에도 등장하는데, 말뚝을 목격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유도 모르고 울어대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이 작품 속에선 그런 비현실적인 설정이 그렇게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이 작품은 세월호 침몰 사고, 12.3 비상계엄 등 최근 10여 년 사이의 굵직한 사건을 비롯해 불법 하도급, 산업재해, 외국인 근로자의 낮은 처우 등 대한민국 사회의 뿌리 깊은 문제를 망라해 작가만의 독특한 '구라'를 펼쳐내는데, 이 '구라'가 더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슬픈 상황에선 우습고, 우스운 상황에선 슬픈 전개가 수시로 반복돼 읽는 사람을 쥐락펴락한다.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말뚝에 담긴 사연과 이를 은폐하려 드는 권력의 살풍경이 '심야괴담회'보다 더 공포스러우니 말뚝이 이길 도리가 없다.
줄거리를 요약하기 쉬운 작품은 아니다.
술술 읽혔으나 내가 전부 이해하고 읽었는지는 자신 없다.
하지만 책을 덮을 때는 뭔가 벅차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우리 모두 서로에게 빚지고 살고 있으니 슬픔을 외면하면 안 된다는 메시지 하나만큼은 선명하게 남았다.
요즘에 마음이 많이 뾰족해졌는데 이 작품을 읽고 최소한의 측은지심(惻隱之心), 수오지심(羞惡之心), 사양지심(辭讓之心), 시비지심(是非之心)은 갖추고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예전에 문득 이런 예감을 한 적 있다.
이 바닥에 김홍 작가보다 책을 잘 파는 작가는 많을지 몰라도, 김홍 작가보다 깊게 이름을 새길 작가는 많지 않겠다는 예감.
아무래도 예감은 현실이 될 것 같다.
p.s. 마지막에 드러나는 주인공의 이름이 '장석원'인 걸 보고 살짝 웃었다. 아는 사람은 웃은 이유를 알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