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지런히 읽고 흔적을 남깁니다
글로 남기는 나만의 기록장표제작에서 소설집의 제목을 따오는 경우가 많은데, 이 소설집은 따로 지은 제목을 달고 있어서 신선했다.
『조금 망한 사랑』보다는 『조금 망한 인생』이라는 제목이 더 낫지 않았을까.
뒤늦게 다시 펼쳐 끝까지 읽고 난 뒤 떠오른 생각이다.
하지만 『조금 망한 인생』이었다면 이 소설집의 인상이 꽤 달라졌겠지.
그래. 『조금 망한 사랑』이 낫겠다.
수록작 중 「반려빚」이 가장 기억에 많이 남는다.
이 소설집 속 등장인물은 대체로 돈 때문에 곤란한 상황에 놓여 있다.
산재에 교통사고에 전세사기에 자연재해까지...
그중에서도 「반려빚」이 가장 노골적이다.
가깝고 친밀한 사이에서 벌어지는 금전 문제와 여기에 얽히고설킨 감정 문제를 엮어서 풀어내는 방식이 능청스럽다.
제목부터 '반려'에 '빚'을 더한 조어다.
어울리지 않는 단어의 조합이 뿜어내는 힘이 대단하다.
사실 나는 이 소설집을 다 읽지 않고 보이지 않는 곳에 꽤 오래 처박아뒀었다.
두 번째 수록작인 「경기 지역 밖에서 사망」을 읽고, 젠더 문제에 관해 편파적이며 불공정한 시각을 가진 소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냥 통계로 의견을 말하겠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대한민국은 세계적인 자살대국이다.
'2023년 성별&연령대별 자살현황'을 살펴보면 남성 자살자가 여성보다 압도적으로 많다.
20대의 경우 인구 10만 명당 남성은 26.4명, 여성은 17.6명이다.
30대의 경우 남성은 33.7명, 여성은 18.6명으로 남성이 거의 2배다.
20~30대는 그나마 나은 편이다.
그 이상 연령대로 가면 비교 불가다.
젠더 문제 해결은 각 성별이 겪는 어려움을 균형잡힌 시각에서 진지하게 고민할 때 비로소 돌파구가 마련된다고 생각한다.
이런 시각에서 벗어나면 어떤 명분을 들이대도 그저 개싸움으로 끝날 뿐이다.
이번 대선에서 이준석 후보를 가장 많이 지지한 유권자가 왜 20대 남성이었는지 곱씹어 봐야 할 터다.
인정하고 싶든, 싶지 않든 간에 그들이 미래의 대한민국 허리다.


표지처럼 따뜻하면서도 몽환적이다.
서사보다는 이미지가 강렬하다.
작가의 전작과 비교해 난해해서 페이지가 넘어가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
작가의 모든 작품을 통틀 어 가독성이 가장 떨어진다.
그러다 보니 처지는 기분이 들어 후반부에는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대신 이미지만 느끼며 스쳐 지나갔다.
그래도 보물은 있다.
염장이 안드로이드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뼈의 기록」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인간이 아닌 존재가 인간보다 더 인간다워 보이는 연출은 흔하긴 해도 가슴을 치는 무언가가 있다.
안드로이드가 생전에 친분을 나눴던 장례식장 청소부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염을 치르는 모습을 볼 때 나도 모르게 울컥했다.
사람은 저마다 살아온 삶을 통해 다른 뼈 모양을 가지게 되며, 인간이 생을 다할 때까지 성장하고 변형된다는 메시지가 뒤통수를 쳤다.
이 단편 하나로 소설집을 읽으며 느꼈던 지루함과 아쉬움을 보상받는 기분이 들었다.
작가의 대표작인 장편소설 『천 개의 파랑』이 보여줬던 장점이 잘 드러나는 단편이었다.


소설집을 읽는 날이 오기를 기다렸던 작가다.
중앙지 신춘문예 2관왕(조선일보, 한국일보)이라는 화려한 등단, 등단작이 보여줬던 익숙한 일상에 뒤틀려 녹아있는 불안한 정서가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이 소설집에도 등단작이 보여줬던 개성이 잘 드러나 있다.
어지간한 스릴러보다 내겐 더 긴장감이 넘치는 이야기의 연속이었다.
폭력도 없고, 피 한 방울도 튀지 않는데,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망설이게 된다.
겉보기엔 평화롭고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인데, 그 안에서 펼쳐지는 이야기가 뿜어내는 정서가 대단히 찝찝하고 불편하다.
학폭 피해자인 딸을 데리고 낯선 섬으로 도망치듯 떠나왔더니 그 섬에서 학폭을 저지른 학생의 어머니와 엮이는 불편한 상황으로 이어지고(말의 눈), 군대라는 폐쇄적인 사회의 위계질서는 부조리한 상황에도 침묵하게 만든다(쥐).
법의 허점을 파고드는 일을 불편해하다가 어느새 의존하게 되고(맹점), 가족을 지키기 위한 행동이라고 여겼는데 반대로 파국으로 치닫기도 한다(난간에 부딪힌 비가 집 안으로 들이쳤지만).
이 소설집에 실린 작품 중에 '사이다'는 없다.
그런데 작품 속 화자의 태도는 태연하기 이를 데 없어서 기묘함이 더해진다.
그래서 더 찝찝하고 불편하다.
이 소설집을 기분 좋게 읽을 독자는 단언컨대 없으리라고 본다.
하지만 기억에는 대단히 오래 남을 거라고 장담한다.
살아간다는 것은 끝없는 모순이라고
그런데도 이 세상은 아무렇지 않게 잘 돌아가고 있다고.
섬뜩한 소설집이었다.
출간되자 마자 산 소설집인데 뒤늦게 펼쳤다.
그런 책이 아직도 많아 걱정이다.
구입한 순서대로 읽는 습관이 강박에 가깝다 보니, 이러다간 신간을 사고도 제때 읽지 못하는 일이 잦아질 듯하다.


맷돌, 서까래, 선글라스, 소금 항아리, 피아노...
이 작품 속 모든 사물은 영혼을 가지고 있고, 마치 인간처럼 사고한다.
마치 범신론을 소설로 읽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다고 이 작품 속 사물이 애니메이션 '토이스토리' 속 장난감처럼 사람이 보지 않을 때 움직이는 존재는 아니다.
이 작품 속 사물은 움직일 수 없고, 일부 특별한 인간만 사물과 소통할 수 있을 뿐이다.
겉보기엔 우리가 사는 세상과 다를 게 없다.
다만 한 가지 중요한 규칙이 있다.
사물은 결코 인간사에 개입해선 안 된다.
이를 어기면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될지 모른다.
불탄 집에서 겨우 형태를 유지한 채 발견된 목재가 있다.
기억을 잃은 채 발견된 목재는 새로운 집의 기둥으로 만들어지는데, 그곳에서 자신의 과거를 아는 맷돌을 만나 자기가 여기까지 오게 된 이유를 듣게 된다.
이 지점에서 이야기는 급박하게 전환해 한 가족의 비극으로 이어지고, 이를 집안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여러 사물은 괴로워하다가 중요한 규칙을 깨는 선택을 한다.
그와 동시에 이야기는 가족이라는 좁은 범위를 넘어 사회, 역사, 종교로 영역을 확장한다.
대단히 다채로우면서도 신비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작품이다.
이야기의 가지를 뻗어나가는 방식이 독특하고 흥미로웠다.
SF나 판타지와는 성격이 다르다.
특히 맷돌의 구도 과정을 그린 2부를 읽을 땐 임권택 감독의 영화 '만다라'를 감상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깊은 문답을 주고받는 철학 강의를 연상케 하는 묵직한 장편소설이다.


이 소설집을 읽고 이런저런 문장을 주저리주저리 쓰다가 모두 지웠다.
그 어떤 해설도 사족인 소설집이다.
읽는 내내 고용노동부 출입 기자 시절로 돌아간 듯한 기분을 느꼈다.
오랜만에 기자 흉내를 내보겠다.
대한민국 보통 청년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기획 기사 작성 때문에 통계에 익숙한 편이다.
통계를 살피면 디테일한 부분은 놓칠지 몰라도. 대략적인 윤곽 정도는 그릴 순 있다.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을 이해하기 위한 좋은 방법의 하나는 돈의 흐름을 살피는 거다.
대한민국 보통 청년의 모습을 살피려면 그들이 어떻게 먹고사는지 통계를 살피면 된다.
2024년 기준 대한민국 전체 기업 중 99%가 중소기업이다.
300인 미만 중소기업 취업자는 전체 취업자의 89.0%를 차지하고, 그들의 월 평균소득은 약 298만 원이다.
즉 근로자 10명 중 9명이 월 300만 원을 못 번다.
이는 어디까지나 '평균' 소득이다.
여기엔 최저임금 수준을 받는 젊은 근로자, 대기업에 못지않은 임금 수준을 자랑하는 중견기업 근로자, 호봉이 쌓인 중장년 근로자의 소득이 혼재돼 있다.
대한민국 국민 총가구의 월 세전 소득을 조사해 오름차순으로 배열한 뒤 정확히 중앙에 놓이는 값을 중위소득이라고 한다.
중위소득을 살펴야 '평균의 오류'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다.
지난해 1인 가구 기준 중위소득은 약 223만 원이다.
2025년 기준 최저임금 월급(209만6270원)보다 조금 많다.
2023년 기준 청년(15~39세) 가구 중 1인 가구의 비중은 56.9%다.
2022년 기준 청년가구 중 전·월세 등 임차 비중은 82.5%이다.
원룸이나 투룸에 전·월세로 살며 최저임금보다 조금 더 많은 수준의 월급을 받는 중소기업 근로자.
이것이 통계로 파악할 수 있는 보통 대한민국 청년의 대략적인 모습이다.
대학은 '인서울' 4년제는 나와야 하고, 대기업이나 공기업에 취직해야 하며, 결혼할 때 집은 수도권 자가 정도는 마련해야 평균이라는 '평균 올려치기'가 얼마나 허황한지 통계만으로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지금 대한민국 청년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고 싶으면 이 소설집을 읽으면 된다.
새 정부에서 노동 정책을 이끌어 갈 공직자들에게 강력하게 추천하고 싶다.
사족을 더 달지 않겠다.


학창 시절에 경험한 왕따나 학폭은 그 시절을 넘어 인생 전반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친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에 왕따라고 부르기엔 애매하고, 그렇다고 학폭이라고 부르기에도 애매한 경험을 했다.
거의 30년 전의 일이다.
고2 때 나는 반에서 일진(이라기에도 어설픈) 무리 중 하나와 시비가 붙었다.
이유는 확실치 않지만, 아마도 별거 없어 보이는데 뻣뻣한 내 태도가 그 녀석에게 거슬렸던 듯하다.
그냥 말다툼으로 끝날 줄 알았는데, 내가 자리에 앉자 그 녀석이 보온밥통으로 내 뒤통수를 세게 쳤다.
눈앞에 별이 보였다.
눈이 뒤짚힌 나는 의자를 들어 그 녀석에게 던졌고 동시에 몸싸움이 크게 벌어졌다.
그날 이후 고달픈 날이 이어졌다.
내가 거칠게 대응하는 모습을 본 일진 무리는 물리적인 폭력 대신 비아냥거림이나 뒷담화로 괴롭혔다.
대놓고 싸움을 걸면 두드려 맞더라도 맞대응할 텐데, 여러 명이 돌아가며 정신적으로 은근슬쩍 괴롭히니 대응할 방법이 없었다.
눈치를 보느라 내 편을 들어주는 같은 반 학생은 한 명도 없었다.
내가 대응하는 모습을 보고 속이 시원했다고 몰래 고백한 녀석도 몇몇 있었지만, 대놓고 내 편을 들진 않았다.
그렇게 나는 고립돼 갔다.
너무 괴로워서 담임 선생에게 이 같은 사정을 털어놓았는데, 돌아온 대답이 가관이었다.
"네가 잘못한 거다. 너처럼 모난 녀석이 결국 사고 치고 자살하는 거다."
이게 자신이 맡은 제자에게 할 말인가...
지금도 나는 학교와 교사를 그리 신뢰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내겐 학창 시절 친구가 거의 없고, 그 시절은 괴로운 기억으로 남아있다.
이 작품을 읽으며 기억하기 싫었던 그 시절을 오래 되새김질했다.
내 경험과 이 작품 속 이야기에는 공통점이 별로 없다(이 정도로 미친 싸이코패스 빌런은 다행히 만나 보지 못했다).
그런데도 감정이입하는 부분이 많았다.
특히 방관하거나 동조하는 같은 반 학생들의 모습에서 말이다.
오랜 세월이 흘러서 그 시절의 기억이 흐려진 줄 알았는데 착각이었다.
내 머릿속에 수많은 장면이 이토록 생생하게 남아있을 줄은 몰랐다.
이 작품 속 주인공의 선택은 측면 돌파다.
정면 돌파처럼 멋있진 않지만, 꽤 용기 있는 선택이다.
열린 결말이어서 좋았다.
그게 답답하다고 느낄 독자도 있겠지만 말이다.
작품을 읽은 뒤 오래전 내게 이런 말을 해주고 싶었다.
지금 당장은 학교가 세상의 전부인 것 같지만, 사실 별거 없다고.
자퇴하고 나가서 혼자 공부해도 충분하다고.
그 시절에 남들보다 1~2년 늦어져도 인생에 아무 지장 없다고.
굳이 혼자 괴로워하지 말라고.
오래 전의 내가 이 작품을 읽었더라면, 다른 선택을 하는데 많은 용기를 줬을 테다.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키운 반려동물은 언젠가부터 생태계 교란종으로 취급받는 붉은귀거북 세 마리였다.
내 의지로 키우기 시작한 거북은 아니었다.
1995년 초쯤 동생이 어머니를 졸라 시내에 있는 수족관에서 거북이를 샀다.
내 기억으로 마리당 2000원이었고, 작은 플라스틱 어항은 5000원, 사료는 한 봉지에 1000원이었다.
동생은 거북이에게 관심은 쏟은 기간은 처음 며칠뿐이었다.
어항은 곧 거북이의 똥과 사료 찌꺼기 때문에 지저분해졌는데, 동생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이러다간 거북이들이 다 죽겠다 싶었다.
나는 동생에게 그럴 거면 거북이를 내게 넘기라고 말했다.
동생은 미련 없이 내게 어항을 통째로 넘겼다.
그게 거북이 키우기의 시작이었다.
키우는 동안 거북이들이 개체별로 성격이 모두 다를 뿐만 아니라, 얼굴의 생김새도 다름을 알 수 있었다.
주인을 알아보는 듯한 행동(그거 먹이를 주는 사람을 알아볼 뿐이었지만)을 할 때면 참 행복했다.
거북이들은 자주 눈병이나 피부병을 앓았다.
그럴 때면 나는 거북이들을 건조한 장소에 격리해 안약을 투여하고, 후시딘이나 항생제를 발라주곤 했다.
그러다 보면 금방 나았다.
거북이는 자주 어항에서 탈출해 사라지곤 했는데, 그중 한 녀석을 한 달 만에 장롱 바닥 틈새에서 찾은 극적인 순간도 기억난다.
20년도 훌쩍 넘은 기억이지만, 그때 거북이들과 함께 쌓은 추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반려동물을 키워본 경험이 있다면, 그중에서도 마이너한 종을 키워본 경험이 있다면, 이 작품은 쉽게 몰입할 수 있는 장편소설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무려 17년 동안 타란툴라 '두희'를 키웠다.
다른 반려동물도 아니고 거미, 그것도 커다랗고 털이 많은 거미다.
도저히 친해지기 어려운 비주얼을 자랑하는 동물이다.
주인공에게 오랜 세월에 걸쳐 어떤 핍박이 이어졌을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을 테다.
이 작품은 주인공이 가족은 물론 연인에게도 인정받지 못하고 '두희' 때문에 주변 사람과 소원해지는 과정을 상세하게 묘사한다.
'두희'가 교감이 가능한 동물이라면 그나마 나을 텐데,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두희'는 절지동물이라는 특성상 개나 고양이와 달리 주인과 교감하기가 어렵다.
'두희'에겐 자기가 아닌 존재는 그 자체로 스트레스 요인이고, 주인도 예외가 아니다.
주인공이 '두희'를 제대로 만져보고 느끼는 유일한 순간이 죽은 뒤라니.
소통할 수 없는 존재와 함께 살아간다는 게 무슨 의미일까.
이 작품은 가능한 한 반려동물을 의인화하는 시선을 피해서 그 의미를 살핀다.
이를 통해 주인공은 그런 존재와 산다는 건 서로를 영원히 이해할 수 없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과정임을 깨달아나간다.
펫로스 증후군을 극복하는 과정을 다룬 치유물임과 동시에 반려동물을 향한 복잡한 윤리 문제를 생각해 보게 하고, 더 나아가 사람사이의 소통은 어떤 의미인지도 돌아보게 하는 작품이다.
훌륭한 장편소설이다.


나는 누구인가?
정말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우리는 어떤 형태이든 조직에 속해 살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 질문에 더욱 대답하기가 어렵다.
개인이란 존재가 무력하게 느껴질 때가 많으니 말이다.
특히 퇴사를 경험해 본 사람이라면 다들 알고 있지 않은가.
나 하나 사라진다고 작동이 멈추는 조직은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 작품 속 주인공도 그렇다.
안정된 직장을 찾기가 어렵고, 그러다 보니 주거 환경 역시 불안정하고, 겨우 자리 잡은 직장에서도 알게 모르게 차별이 벌어지고, 꿈과 열정으로 포장한 노동 착취가 만연하고, 원하는 삶은 있는데 그게 정말 원하는 삶인지 모르겠고...
그렇게 서서히 나를 잃어가던 주인공은 갑작스러운 사고로 폭발해 자기에게 묻는다.
나는 도대체 누구지?
이 작품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기' 정도 되겠다.
숲을 바라보려면 숲 밖으로 나가야 하듯, 나를 바라보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낯선 공간에 나를 두기다.
이 작품 속에서 주인공은 한국과 포르투갈을 오가며 나는 누구인가를 끊임없이 생각한다.
정답이 나올 수 없는 질문이다.
하지만 그런 질문을 자기에게 던져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같은 길을 걸어도 다른 곳에 도달할 테다.
이 작품의 대답은 타인과의 연결이다.
타인은 나와 다른 위치에 서 있지만, 그곳에 타인이 서 있기 때문에 내가 나임을 알 수 있다.
나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타인을 통해 존재를 확인하고, 타인에 의해 막대한 영향을 받는다.
그렇다고 타인에 순응하거나, 눈치를 보며 질질 끌려다녀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나는 수많은 타인과의 연결을 통해 만들어지는 존재이지만, 그 연결을 만드는 주체는 결국 나라고.
그러므로 나를 만드는 존재는 결국 나일수밖에 없고, 나여야 한다고.
하나 마나 한 이야기로 들릴 수도 있지만, 소설이라는 매개를 통해 닿았을 때의 여운은 길고 또 깊었다.
"기도는 어떨 때 일어나는 걸까요?"
"어딘가에, 누군가에게 가닿고 싶을 때인 것 같아요."
"영원히 과거이기만 한 채로 사라지는 건 없단다. 너에게 닿은 것들은 모두 현재의 일이야. 그 모든 것을 현재로 만드는 건 너란다. 그걸 잊지 마."
뜬금없지만, 이 작품을 읽으며 마로니에의 히트곡 '칵테일 사랑'의 마지막 가사가 귓가에 맴돌았다.
"이 세상은 나로 인해 아름다운데."


작가의 대표작이자 데뷔작인 소설집 『브로콜리 펀치』를 읽고 느꼈던 기분이 지금도 생생하다.
현실적이면서 비현실적이고, 익숙한데 낯설며, 웃기면서도 슬프고, 경쾌하나 우울한...
어렵지만 형용사 하나로 그때 느낀 기분을 요약하자면 '명랑하다' 정도 되겠다.
돌아서서 생각해 보면 심각한 이야기인데도, 읽고 나면 괜히 기분이 좋아지는 작품의 모음이었다.
경험하지 못하면 제대로 쓰지 못하는 나로서는 다채로운 상상력이 정말 부러운 작가다.
국내 작가 중에서 이 정도로 다채로운 상상력을 읽기 쉬운 문장으로 풀어내는 작가가 더 있을까 싶다.
이 소설집을 읽고 느낀 감정은 데뷔작과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슬픔과 우울함의 농도가 조금 짙어졌다고 해야 하나.
이 소설집에 담긴 여덟 작품 대부분이 이별이나 죽음을 다루고 있기 때문일 테다.
하지만 절망적인 상황을 절망적이지 않게 보여주는 데 탁월하다 보니, 그런 기분에 깊게 빠져들 새도 없이 웃어넘기게 하는 매력이 있다.
지독한 상황인데도 지독한 문장이 하나도 없다.
그래서 종종 낭만적으로 느껴질 때도 많았다.
당황스럽지만 말이다.
이별과 죽음을 다룬 이야기와 '명랑하다'는 형용사는 내겐 양립하기 어려운 단어인데, 이 소설집에선 어처구니없이 부드럽게 가능해진다.
가볍지만 무겁다는 표현도 이 소설집에선 가능하다.
SF나 판타지 요소가 자주 쓰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현실도피나 정신 승리는 아니다.
억지스러운 해피엔딩은 없다.
오히려 사태를 똑바로 파악하고 자기 객관화를 하는 메타인지에 가깝다.
이별 뒤에 남는 존재는 나뿐임을 깨닫고, 그 자리에서 다시 운동화 끈을 고쳐 맨 뒤 일상을 다시 시작하는 방식이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고 말하는 스칼렛 오하라처럼.
담백하면서도 아름답게 반짝이는 무언가가 참 좋았던 소설집이다.


제동 장치가 작동하지 않는 기차가 선로 위를 달리고 있다.
선로 위에는 다섯 사람이 있다.
선로를 바꾸지 않으면 그들은 죽는다.
선로를 바꾸면 그들은 살지만, 바뀐 선로에 있는 사람 한 명은 죽는다.
당신 앞에 선로를 바꾸는 손잡이가 있다.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 텐가?
소수를 위한 다수의 희생과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을 윤리 관점에서 바라본 '트롤리 딜레마'다.
비슷한 문제를 내보겠다.
눈앞에 보이는 소수를 살리기 위해 전 인류를 지옥에 살도록 내버려두는 게 옳은 일인가.
당신에게 세상을 끝낼 수 있는 권능이 있다면 그 권능을 어떻게 사용할 텐가.
이 문제를 신학이라는 관점에서 풀어내면 어떤 결론을 낼 수 있을까.
이 작품의 중요한 질문이다.
나는 이 질문에 "버리는 놈 따로 있고 치우는 놈 따로 있어서 굴러가는 게 세상"이라고 대답했다.
다른 독자의 대답이 궁금하다.
정답은 없다.
대단히 지적이고 도발적이다.
읽는 내내 압도당하는 기분을 느끼긴 오랜만이었다.
신학을 비롯해 철학, 역사 등 다양한 학문 분야의 깊은 지식을 무기로 쉽게 답할 수 없는(하지만 필요한) 여러 무거운 질문을 쏟아내며 독자를 코너로 몬다.
동시에 서사는 액션 영화 못지않게 흥미진진하다.
박상륭 작가의 소설을 읽기 쉽게 쓰면(그래도 어렵다)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싶었다.
나는 절대로 쓰지 못할 내공을 가진 소설이다.
고백하자면 작품의 절반도 이해하지 못했다.
나중에는 이해하길 포기하고 이야기의 흐름만 따라갔다.
어쩌면 내가 훗날에 천재 소리를 들을지도 모를 작가를 마주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전율이 일었다.
특정 종교 신자는 이 작품에 불쾌감을 느낄지 모르겠지만, 이 작품은 어디까지나 소설이다.
올해 읽게 될 소설 중에 이런 기분을 느끼게 할 소설이 더 있을지 모르겠다.
그만큼 대단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