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45
"우리가 사라지면 암흑이 찾아온다"

부지런히 읽고 흔적을 남깁니다

글로 남기는 나만의 기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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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본 소설집 『라디오 스타가 사라진 다음에는』(문학동네)

읽은 지 두 달이 넘은 소설집인데, 뭐라도 한 줄 끼적이지 않으면 읽었다는 기억 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 같았다.

역시나 읽었다는 기억 외엔 남아 있는 게 별로 없다.


그래도 한 가지 감각만은 확실하게 남아 있다.

우리 가족이 1990년부터 1995년까지 살았던 대전직할시 대덕구 오정동의 반지하 빌라.

당시 우리 가족은 신축이었던 그 반지하 빌라로 이사 오며 오랜 셋방살이에서 벗어났다.

내 평생 가장 걱정 없이 편안하게 하루하루를 보냈던 시절이었다.

사실 그 정도로 걱정 없고 편안했던 시절은 아닐 텐데, 반지하 빌라를 떠난 뒤 집이 폭삭 망해버려서 상대적으로 그렇게 느끼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 반지하 빌라는 오랫동안 아버지의 소유였다가 2023년에 팔렸다.

1990년에 3000만 원에 산 집이 33년 후 3000만 원에 팔렸다.

이 소설집은 그 반지하 빌라를 닮았다.

라디오 스타가 사라진 다음에는
라디오 스타가 사라진 다음에는
정해연 장편소설 『매듭의 끝』(현대문학)

작가의 베스트셀러 『홍학의 자리』만큼 빨리 페이지가 넘어갔다.

예상할 수 있는 반전이었고, 결말 또한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래도 일그러진 모성애와 또 다른 모성애, 반전에 반전이 겹겹이 쌓이다가 터지는 과정이 흥미로웠다.

어머니란 자식에게 어떤 존재이고, 그 모성의 빛나는 조명 아래에 얼마나 짙은 그림자가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그려낸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마더」가 자연스럽게 오버랩되는 지점이 많았다.

모성이 깊어질수록 자식을 올바른 길로 이끌기란 쉽지 않은 걸까.

한편으로는 씁쓸했다.

매듭의 끝
매듭의 끝
성해나 소설집 『혼모노』(창비)

지난해 봄에 산 책을 이제야 읽었다.

2025년 한국 문학에서 최고의 화제작이었는데도 이상하게 손이 가질 않았다.

너도나도 읽으니 유행에 편승하고 싶지 않은 청개구리 같은 심리 때문이었다.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해가 바뀐 요즘에도 이 책은 여전히 베스트셀러이고 앞으로도 당분간 그 위치에서 내려올 일은 없어 보인다.

그래서 펼쳤다.


내가 장편소설을 선호하는 이유는 재미 때문이다.

단편으로만 채워진 소설집을 읽고 "잘 썼네"라는 기분은 많이 느껴봤지만, "재미있네"라는 기분을 느껴본 적은 드물다.

단편을 그리 선호하지도 않는 편이기도 하고.


이 소설집은 잘 썼을 뿐만 아니라 대단히 재미있었다.

소재도 매우 다채롭고 가독성까지 좋은데 얄팍하지 않았다.

한국 문학에 으레 등장하는 소재(페미, 퀴어 등)가 전면에 등장하지 않는 점도 이채로웠다.

「구의 집:갈월동 98번지」이나 「메탈」 같은 소설을 어떻게 쓸 생각을 했을까.

이 모든 걸 다 경험해 본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묘사가 생생하면서도 집요한데, 완급 조절까지 좋아 지루할 틈이 없었다.


특히 표제작 「혼모노」 앞에선 완전히 패배한 기분을 느꼈다.

기술이고 뭐고 다 필요 없고 순수하게 피지컬로 찍어누르는 압도적인 기분이랄까.

어떻게 이런 소재를 이렇게 밀어붙여 이런 결론을 내지?

진짜와 가짜를 나누는 이분법 앞에서 패배할 걸 알면서도 진정한 진짜가 무엇인지 온몸으로 보여주려 무아지경에 빠져드는 주인공 앞에서 전율했다.

마치 영화 「위플래쉬」의 마지막 부분을 감상했을 때처럼.


이 소설집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건 "넷플릭스 왜 보냐. 성해나 책 보면 되는데"라던 박정민 배우의 추천사다.

대한민국 출판 역사상 이보다 영향력 있는 추천사가 또 있었나 싶다.

이 추천사 덕분에 이 소설집이 더 큰 화제를 모았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고, 추천사를 쓴 박정민 배우 또한 한국 문학을 흔드는 큰 손이 됐다.

이 소설집을 읽기 전에는 추천사에 살짝 오버가 섞인 건 아닐지 의심했는데, 다 읽고 나니 충분히 '익스큐즈'할 만한 추천사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에 읽은 모든 소설집을 통틀어 가장 강렬했던 소설집이었다.

나는 이런 소설집을 쓰고 내놓을 자신이 없다.

혼모노
혼모노
조예은 소설집 『치즈 이야기』(문학동네)

20년 전쯤의 일이다.

대형마트에서 호기심에 이끌려 고르곤졸라 치즈를 샀다.

『맛의 달인』 『아빠는 요리사』 등 음식 만화에 빠져 있던 시절이어서, 돈은 없어도 낯선 식재료에 많은 관심을 보였던 시절이었다.

고시원에서 처음 맛본 고르곤졸라의 맛은... 썼다.

다른 치즈보다 꽤 비싼 편이어서 기대했는데 크게 실망했다.

고르곤졸라 피자가 맛있다는 소문은 헛소문이었다는 말인가... 

비싼 물건이어서 차마 버리진 못하고 냉장고에 방치했다.


출출했던 어느 날, 문득 남은 고르곤졸라로 야마 고르곤졸라 피자를 만들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동네 슈퍼에서 만두피를 사 온 뒤 그 위에 고르곤졸라를 조금 올리고 전자레인지로 데워봤다.

고시원 주방에 고릿고릿한 냄새가 퍼졌다.

조리를 마친 야매 고르곤졸라 피자의 맛은?

쿰쿰하면서도 짭짤한 맛, 꽤 훌륭했다.

조리 전과 비교해 완전히 다른 맛이었다.

나는 남은 고르곤졸라를 그날 모두 맛있게 먹어 치웠다.


이 소설집을 읽으며 들었던 기분이 딱 오래전에 먹었던 고르곤졸라 같았다.


몇 년 전에 작가의 출세작 『칵테일, 러브, 좀비』를 읽었다.

베스트셀러를 넘어 이제 스테디셀러로 향하는 작품이지만, 내 취향은 아니었다.

읽는 내내 난해하고 기괴한 단편 독립 영화 몇 편을 연달아 감상하는 기분이 들었다.

이게 베스트셀러와 이 시대 독자의 감성이라면 내 작품이 베스트셀러가 될 가능성은 없겠다는 암울함도 느꼈고.

이 소설집을 산 게 지난해 여름인데, 그때 들었던 기분 때문에 펼치는 데 꽤 오랜 시간이 들었다.


이 소설집에는 단편 7개가 실려 있는데, 전반부와 후반부의 톤이 많이 다르다.

전반부 네 편은 작가의 전작을 변주한 형태여서 익숙하면서도 여전히 낯설었다.

대단히 자극적인, 그로테스크라는 단어가 찰떡인 단편의 연속이다.

대놓고 구멍이 숭숭 뚫인 에멘탈 치즈를 닮은 표지 때문인지 맨 처음 고르곤졸라 치즈를 먹었을 때 들었던 기분이 재생됐다.


막혔던 숨통은 후반부를 읽을 때 조금 트였다.

현실과 환상의 어딘가를 유영하는 전반부와 달리 후반부는 SF로 채워져 있다.

그로테스크한 감성의 톤을 대폭 줄인 자리에 설명하기 어려운 따뜻한 감성이 스며들어 있다. 

눈물까지 찔끔 나올 정도로 말이다.


작가의 팬이라면 아마도 전반부에 훨씬 높은 점수를 주지 않을까 싶은데, 나는 이 후반부의 감성이 참 좋았다.

마치 고시원 냉장고에 처박아뒀던 고르곤졸라를 만두피에 올려 야매 피자로 만들어 맛있게 먹었던 시간처럼.

끈적거리고, 서늘하고, 축축했지만... 그래도 끝까지 읽기 잘했다.

치즈 이야기
치즈 이야기
손원평 장편소설 『젊음의 나라』(다즐링)

작가의 전작인 『튜브』를 읽고 고개를 갸우뚱했던 터라, 이 작품을 사다 놓은 지 꽤 됐는데도 펼치는 데 시간이 꽤 걸렸다.

새해 첫날에 사다 놓고 아직 읽지 않은 책을 뒤적거리다가 이 작품을 펼쳤다.

첫 목차가 1월, 마지막 목차가 12월이란 점이 눈에 띄었다.

1월 1일부터 일기장 형식으로 구성된 작품의 형식이 흥미로워 페이지를 넘기다 보니, 올해 처음으로 완독한 책이 됐다.


무섭고 잔인한 장면은 하나도 없는데 섬뜩했다.

고령화와 저출생 때문에 활력을 잃은 대한민국 사회의 풍경, 급격한 기술의 진보에 따른 AI의 일상화, 노인을 향한 극단적인 혐오, 다문화 가정을 향한 차별, 존엄사 등 현재 벌어지고 있고 앞으로 벌어질지 모를 온갖 사회 문제의 종합 선물 세트다.

그중에서도 이 작품이 가장 아프게 파고드는 문제는 '선택사'로 불리는 존엄사 혹은 안락사 문제가.

이 작품은 '선택사'가 자의에 따른 선택이 아니라 타의에 따른 의무가 될 가능성에 주목하고, 죽음은 모두에게 공평하지만 죽음에 이르는 길은 그렇지 않다는 점을 주시한다.

이 고요한 살풍경을 주인공인 29세 여성이 써 내려간 일기를 통해 깊이 들여다보는 경험은 고통스럽고 생생했다.


지금 사는 동네에 몇 년 전 문을 닫은 어린이집이 있다.

그 건물 앞을 지날 때 무심코 "여기에 노인요양시설이 들어오는 거 아냐?"라고 혼잣말을 했다.

아파트 단지에 노인이 많이 눈에 띄어서 그런 혼잣말을 했나 보다.

그런데 얼마 후 폐원한 어린이집이 노인요양시설로 바뀌는 사례가 늘고 있다는 뉴스를 접해 흠칫했다.


노인이 다수를 차지하고 청년이 소수가 되는 세상은 곧 다가올 현실이다

국가데이터처의 '장래인구추계'에 따르면 2025년 기준 한국의 중위연령은 46.7세다.

2031년에는 50세(50.3세), 2056년에는 환갑을 넘긴다(60.2세)다.

막연히 그렇게 될 거라고만 짐작했는데, 통계를 보고 식겁했다.

불과 한 세대 전인 2000년에 불과 31.8세였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심각한 고령화였다.

통계만으로 다가올 미래를 상상할 수 없다면 이 작품을 읽어보자.

마치 예언서를 읽는 듯한 기분이 들 테니 말이다.

앞으로 손원평 작가의 작품을 계속 읽게 될 것 같다.

젊음의 나라
젊음의 나라
김홍 장편소설 『말뚝들』(한겨레출판)

시도해 보진 않았지만, 전국의 희석식 소주를 모아놓고 블라인드 테스트를 하면 보해 '잎새주' 하나는 맞출 수 있을 것 같다.

위스키로 테스트하면 다른 건 몰라도 피트 위스키는 걸러내 '탈리스커' 아니냐고 아는 척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만약 소설로 테스트한다면 어떨까?

여성 작가 중에선 아리까리하지만 최정나 작가를, 남성 작가 중에선 확실하게 김홍 작가를 걸러낼 수 있을 것 같다.

이 작품의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김홍은 김홍'이라고 감탄했다.


작품의 소재는 사람이 죽어서 바다에 꽂혀 있는 말뚝인데, 왜 말뚝이고 왜 거기에 꽂혀 있는지 아무도 모르고 설명도 없다.

느닷없이 말뚝들이 바다에서 나와 거리에 등장하고, 광장에 등장하고, 회사에 등장하고, 주인공의 집에도 등장하는데, 말뚝을 목격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유도 모르고 울어대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이 작품 속에선 그런 비현실적인 설정이 그렇게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이 작품은 세월호 침몰 사고, 12.3 비상계엄 등 최근 10여 년 사이의 굵직한 사건을 비롯해 불법 하도급, 산업재해, 외국인 근로자의 낮은 처우 등 대한민국 사회의 뿌리 깊은 문제를 망라해 작가만의 독특한 '구라'를 펼쳐내는데, 이 '구라'가 더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슬픈 상황에선 우습고, 우스운 상황에선 슬픈 전개가 수시로 반복돼 읽는 사람을 쥐락펴락한다.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말뚝에 담긴 사연과 이를 은폐하려 드는 권력의 살풍경이 '심야괴담회'보다 더 공포스러우니 말뚝이 이길 도리가 없다.


줄거리를 요약하기 쉬운 작품은 아니다.

술술 읽혔으나 내가 전부 이해하고 읽었는지는 자신 없다.

하지만 책을 덮을 때는 뭔가 벅차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우리 모두 서로에게 빚지고 살고 있으니 슬픔을 외면하면 안 된다는 메시지 하나만큼은 선명하게 남았다.

요즘에 마음이 많이 뾰족해졌는데 이 작품을 읽고 최소한의 측은지심(惻隱之心), 수오지심(羞惡之心), 사양지심(辭讓之心), 시비지심(是非之心)은 갖추고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예전에 문득 이런 예감을 한 적 있다.

이 바닥에 김홍 작가보다 책을 잘 파는 작가는 많을지 몰라도, 김홍 작가보다 깊게 이름을 새길 작가는 많지 않겠다는 예감.

아무래도 예감은 현실이 될 것 같다.


p.s. 마지막에 드러나는 주인공의 이름이 '장석원'인 걸 보고 살짝 웃었다. 아는 사람은 웃은 이유를 알겠지.

말뚝들 - 제30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말뚝들 - 제30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강화길 장편소설 『치유의 빛』(은행나무)

많은 인물과 많은 이야기가 어지럽게 뒤엉켜 있어 따라가기 어려웠다.

작가의 생각을 알고 싶어 수시로 지나간 페이지를 살피다가 포기했다.

이야기보다는 이미지가 강렬하게 남았다.


몸으로 겪는 고통과 수치심은 누구와도 나눌 수 없으며, 아무리 발버둥 쳐도 벗어날 수 없다는 절망감.

고통의 원인을 찾아내면 고통, 수치심, 절망감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걸까.

제목의 뉘앙스와 달리 이 작품 속 주인공들은 딱히 치유받지 못한 것 같다.

'해리'가 '지수'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사람들은…… 다…… 자기만 아프다고 생각해."(368p)라는 말이 이 작품을 잘 요약한 한 줄 아닌가 싶다.

읽는 내내 불편했다.

치유의 빛
치유의 빛
이묵돌 장편소설 『초월』(김영사)

몇 년 전, 이묵돌 작가의 장편소설 『어떤 사랑의 확률』을 무척 재미있게 읽었다.

하이퍼 리얼리즘 로맨스라고 불러야 할까.

다크 초콜릿 같은 질감의 시니컬한 이야기가 마음에 들었다.

그 기억 때문에 지난 여름 이 작품을 샀는데, 이제야 읽었다.

어지간한 장편소설 2권 이상의 분량(700페이지가 넘는다)의 압박도 있었지만, 무언가를 쓸 땐 무언가를 읽지 못하는 비효율적이고 부족한 내 역량 탓이다.


전반부와 후반부의 감상을 나눠야겠다.

전반부를 읽을 때는 "걸작이 나왔구나!"하며 흥분했다.

읽는 동안 다른 인생을 몇 차례나 살아보는 듯한 그야말로 '초월적인' 기분을 느꼈다.

오래전에 보고 꽤 충격을 받았던 만화 「5억 년 버튼」이 떠오르는 순간도 있었고, 신경정신과 의사 김영우가 한 청년을 진료하며 관찰한 전생 퇴행의 기록을 담은 『전생여행』이 떠오르는 순간도 있었다.

에드거 케이시의 '아카식 레코드' 개념, 생 제르맹 백작, 영화 「맨 프럼 어스」가 떠오를 때도 있었다.

떄로는 박상륭 작가의 작품을 읽는 듯한 기분도 느꼈다.

작가가 무아지경에 빠져 신들린 듯 소설을 써내려가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였다.


후반부는 아쉬웠다.

결국 사랑에 관한 이야기(참으로 지독한)인데, 전반부보다 집중하기 힘들었다.

후반부를 읽는 동안 문목하 작가의 장편소설 『돌이킬 수 있는』이 오버랩됐는데 아...

독자마다 감상이 다르겠지만, 나는 주인공의 사랑이 사랑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돌이킬 수 있는』이 정말 대단한 작품이었음을 새삼 느꼈다.


하지만 재미있는 장편소설이란 점은 부정할 수 없다.

분량이 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가독성도 훌륭하다.

한국 문학에서 보기 힘든 전 세계를 넘나드는 거대한 스케일도 읽는 재미를 더했다.

최근 한국 문학에서 이 정도 스케일을 보여준 장편소설이 있었나?


소싯적에 게임 '대항해시대2'를 밤새우며 즐겼던 시절이 문득 떠올랐다.

게임에 등장하는 여섯 캐릭터로 여러 차례 엔딩을 본 것도 모자라, 세이브 파일 에디터를 조작해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온갖 플레이하며 게임을 씹고 뜯고 맛보고 즐겼었다.

이 게임으로 내가 어디까지 닿을 수 있는지 알고 싶은 욕심 때문에.

책을 덮은 뒤 그 시절의 기분을 오랜만에 다시 느꼈다.

초월
초월
정아은 추모소설집 『엔딩은 있는가요』(마름모)

책을 덮은 뒤 가장 먼저 든 감정은 후회였다.

나는 인간관계에 있어서 굉장히 소심하다.

아무리 친하고 잘 아는 사람이어도 먼저 누군가에게 안부를 묻거나 만나자고 연락하는 일이 드물다

그렇다고 그 사람을 그리워하지 않거나 생각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서로 연락을 오래 나누지 않았지만 매일 떠올리는 사람도 적지 않다.

같이 사는 가족도 내 이런 성격을 한참 후에야 알아챘다.

누가 먼저 부르면 거절 없이 잘 나가서 만나고 잘 어울리는 편이니까.

잘 사회화된 극단적인 내향인이라는 표현이 적당하겠다.


나는 정아은 작가님의 부고를 들었을 때 망설이다가 빈소를 찾지 않고 부조금만 보냈다.

작가님의 작품 몇 개를 읽었다는 것 외에는 딱히 인연의 끈이 없는 내가 빈소에 들르면 "이 사람은 누군데 여길 찾아왔지?"라고 생각할까 봐 괜히 신경 쓰였다.

살면서 별 친분도 없는데 일과 엮인 사이라는 이유로 잘 모르는 고인의 빈소를 찾은 적도 많은데(당장 올해도 몇 번 그런 자리가 있었다), 그때 왜 망설였을까.

차무진 작가님의 「그 봄의 조문」을 읽으며 후회했다.


책날개에 적힌 정아은 작가님의 작품 목록을 보니 나도 읽은 작품이 꽤 있었다.

작가님과 생전에 딱히 친분은 없었지만, 소심하게 북펀딩에만 이름을 올리지 말고 추모에 참여해도 되지 않았을까.

최유안 작가님의 「모두의 진심」을 읽으며 후회했다.


몇 편만 읽고 자려고 했는데 실패해서 새벽이 왔다.

조금 더 일찍 이 책을 읽어봐야 했다며 후회했다.


책 뒤표지에 상단에 적힌 문장에 오랫동안 눈이 갔다.

”고립된 애도가 공유된 애도로 건너서는 순간, 사람은 서로를 지탱한다“

잠이 잘 오지 않는다.

많이 아리다.

엔딩은 있는가요 - 정아은 추모소설집
엔딩은 있는가요 - 정아은 추모소설집
손보미 장편소설 『세이프 시티』(창비)

이 책을 덮고 문득 이런 의문이 들었다.

불과 5년 전쯤의 우리가 챗지피티나 제미나이가 불러일으킨 생활의 변화를 상상할 수 있었을까?

이 작품의 장르를 굳이 따지자면 SF일 텐데, 그렇다고 본격적인 SF스럽진 않다.

근미래를 배경으로 다룬 SF가 많은데, 이 작품 속에선 딱히 지금 시점과 시차를 느끼기가 어렵다.

그런 점에선 초초초근미래에 다가올 풍경을 다룬 사회 고발물이라고 불러도 되겠다.


인간의 기억을 조작할 수 있는 기술 개발이 이뤄졌다.

문제는 이를 인간을 대상으로 한 임상실험이다.

인간 복제를 두고 윤리 문제 논란이 있었듯이, 기억 조작 기술도 마찬가지다.

기술 활용을 반대하는 의견을 찬성으로 바꾸려는 은밀하면서도 치밀하고 발 빠른 움직임이 일어나는 가운데, 휴직 중인 여성 경찰이 사건의 중심에 의도치 않게 뛰어든다.

이 과정에서 안전한 곳에서 살고자 하는 욕망이 어떻게 인간의 존엄성과 충돌하고, 기술을 활용해 권력을 강화하려는 은밀한 시도가 어떻게 전방위로 이뤄지는지 추적한다.


술술 읽히고 집요한 심리 묘사가 인상적이다.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더라도 기술을 활용해 사회 안전을 도모하는 게 옳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누군가의 기억을 조작하는 행위에 과연 정당성이 있는지(그 대상이 비록 범죄자일지라도) 수시로 고민하게 만든다.


나는 이 작품을 읽으며 대한민국 곳곳을 비추는 CCTV를 떠올렸다.

CCTV가 각종 범죄 발생 비율을 과거보다 떨어뜨렸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정치 지형이 바뀌어 독재에 가까운 권위주의 정부가 나타난다면 CCTV가 과연 국민의 안전을 지키는 도구로 기능할까?

국민을 감시하는 도구로 기능하지 않을까?

기우가 아니다.

당장 옆 나라 중국에서 CCTV가 어떻게 기능하고 있는지 보면 말이다.

세이프 시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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