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45
"우리가 사라지면 암흑이 찾아온다"

부지런히 읽고 흔적을 남깁니다

글로 남기는 나만의 기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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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소윤 장편소설 『꽤 낙천적인 아이』(민음사)

별것 없는 이야기인데 사정없이 빨려 들어간다.

재미가 없는 것 같은데 이상하게 재미있다.

슬그머니 밑밥을 깔아뒀다가 헛웃음(다시 말하지만 웃음이 아니다)을 터트리게 하는 기술이 기가 막힌다.

자기 이야기를 남 말하듯 풀어내는 말발이 장난 아니다


헛웃음 사이에서 짙은 서글픔도 함께 느껴져 가슴이 아렸다.

교차하는 희극과 비극 속에서 짙은 화장을 한채 표정으로는 웃고 눈으로는 우는 광대를 마주한 기분이다.


대단히 솔직하고 그 솔직함이 거북하지 않다.

끝없는 자학하는 가운데에서도 은근슬쩍 자부심이 엿보이기 때문이리라.

시종일관 강약강약을 조절하며 이야기를 끌고 가는 내공이 장난 아니다.

책을 덮을 때 찰리 채플린이 남겼다는 "인생은 멀리서 보면 비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희극"이라는 명언과 로베르토 베니니의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의 주요 장면이 동시에 머릿속을 스쳤다.


스탠드업 코미디언이 첫 작품으로 이런 장편을 쓰면 나 같은 놈은 어떻게 버티라는 말인가.

올해로 31년차 배우인 아내에게서 코미디언만큼 똑똑한 사람이 드물다는 말을 들은 일이 있다.

이 작품을 읽고 그 말이 사실임을 새삼 깨달았다.

최근에 읽은 모든 소설을 통틀어 가장 뻔하지 않고 신선했던 작품이다.

'신박하다'는 표현이 잘 어울리는 장편소설이다.

작가가 차기작으로 어떤 작품을 써낼지 정말 기대된다.

꽤 낙천적인 아이
꽤 낙천적인 아이
조영주 장편소설 『쌈리의 뼈』(빚은책들)

처음에는 미스터리 범죄물로 읽히지만, 결국 가족과 진실에 관한 이야기다.

사실은 실제 벌어진 일 그 자체를, 진실은 사실 속에서 끄집어낼 수 있는 본질을 의미한다.

사실은 눈에 보이지만 진실은 잘 보이지 않는다.

대체로 숨겨진 사실에 진실이 숨어 있다.


주인공은 누가 살인범인지 사실을 좇고 주위를 끊임없이 의심한다.

주인공은 끝내 자기의 정체성을 뒤흔드는 사실을 발견하고 혼란해 빠지지만, 동시에 그런 사실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누군가의 소중한 존재라는 진실을 깨닫는다.

지킬 게 있는 사람이 지킬 게 없는 사람보다 더 강해질 수밖에 없음을 페이지를 넘기며 실감했다.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넘기면서 퍼즐을 맞추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끝을 미리 알아맞히고 싶은데, 도대체 이야기가 어떻게 끝을 맺을지 감이 잡히지 않아 오기가 생기더라.

눈 밝고 머리 회전이 빠른 사람은 어떨지 모르겠는데, 나는 이 작품이 이런 반전이 있고 이런 식으로 끝날 줄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다.

오기를 가지고 덤벼든 게임에서 철저하게 졌지만, 마지막까지 끝을 예상하지 못하고 게임에 참여했으니 그 또한 큰 재미였다.

쌈리의 뼈
쌈리의 뼈
서수진 장편소설 『엄마가 아니어도』(문학동네)

전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저출산 시대를 겪고 있는 대한민국.

그런 나라에서 누군가는 절실하게 아이를 원하는 아이러니한 상황.

김의경 작가의 장편소설 『헬로 베이비』의 무대를 해외로 넓히고, 여기에 천재지변이나 다름없는 사태까지 더해지면 이런 느낌일 것 같다.


읽는 내내 숨이 턱턱 막혔다.

누가 누구를 죽이려고 쫓아다니는 이야기는 아닌데도, 그 어떤 범죄물이나 스릴러보다 아찔해서 숨고 싶었다.

대리모를 통해서라도 아이를 얻고 싶은 간절한 모성이 윤리와 부딪히는 상황이 반복되는데, 그 누구에게도 함부로 돌을 던질 수가 없다.

아... 이를 어찌해야 한다는 말인가.


무엇보다도 실감 나는 묘사가 일품이다.

태국과 인도의 대리모 산업이 어떻게 이뤄지고 있는지 꽤 구체적으로 살필 수 있어 충격을 받았다.

전혀 몰랐던 이야기였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태국과 캄보디아의 접고 끈적한 공기가 느껴지고 속도감과 흡인력이 장난이 아니다.

얼마나 많이 취재하고 고민했는지 곳곳에서 드러난다.


이야기를 어떻게 끝맺을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는데, 반전에 반전이 뒤통수를 때린다.

마지막 장을 넘길 때 소설 제목이 얼마나 탁월한지 깨달을 수 있었다.

참으로 여러 의미가 있는 제목이었구나...


결말이 썩 마음에 들진 않았다.

하지만 그런 결말이어서 마지막엔 안심하고 빠져나올 수 있었다.

올해 읽은 모든 장편소설을 통틀어 손꼽을 작품이다.

엄마가 아니어도
엄마가 아니어도
정보라 장편소설 『아이들의 집』(열림원)

나는 2017년 3월부터 2019년 4월까지 정부세종청사에 드나들며 고용노동부, 환경부 출입 기자로 일했다.

2년 동안 세종에서 거주했는데, 그곳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풍경은 어딜 가든 많이 눈에 띄는 아이들이었다.

세종시는 전국에서 가장 출산율이 높은 지역이다.


내가 보기에 높은 출산율의 이유는 간단했다.

세종은 공무원이 굉장히 많이 사는 도시다.

많은 공무원이 특별분양공급으로 아파트를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에 분양받았다.

어린이집도 정말 잘 돼 있고, 아이를 키우는 데 해로운 환경이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어차피 서울로 올라가지 못하는 현실, 공무원들은 자기들이 살기 좋은 도시를 만드는 데 최선을 다했다.

세종시로 파견될 때 격렬하게 저항했던 선배 기자들 상당수도 세종에 정착해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고 키울 정도였으니 말이다.

다른 지역에선 볼 수 없는 세종만의 독특한 풍경이다.

먹고살 만한 환경이 주어지면 연애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사는 게 사람의 본성이라는 걸 그곳에서 목도했다.


나는 출산율 하락의 부작용을 다루는 뉴스를 볼 때마다 이런저런 의심이 든다.

정부는 진심으로 국민이 결혼해 아이를 낳고 행복하게 사는 국가를 원하는 걸까?

출산 장려 정책이 사실은 국가 유지를 위한 인력 확보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는 건 아닐까?

정부는 그저 아이를 통계로 적히는 숫자로만 바라보는 게 아닐까?

그런 정책의 가장 큰 피해자는 결국 아이들 아닐까?

이 작품을 읽은 뒤 그런 의심이 더 강해졌다.


서사가 굉장히 산만한 작품이어서 집중하기 쉽지 않았다.

하지만 담긴 메시지는 강렬했다.


그렇지...

사람을 죽이는 건 귀신이 아니라 사람이지...


#정보라 #아이들의집 #열림원

아이들의 집
아이들의 집
박재영 산문집 『아무튼, 맛집』(제철소)

누구나 대체로 듣기 싫어하면서도 자기 입으로 내뱉기 좋아하는 말은 자랑이다.

특히 해준 것도 없는 사람이 앞에서 늘어놓는 자랑만큼 꼴불견은 없다. 

자랑하고 뒷말을 듣지 않으려면 지갑을 열어야 한다.

그렇다고 해도 뒷말만 겨우 듣지 않을 뿐이지 진심 어린 축하를 듣긴 쉽지 않다.


막상 내 지난 시간을 돌아보니 꼴불견 짓을 참으로 많이 저질렀다.

그래서 요즘에는 되도록 사람 만날 기회를 잡지 않는다.

나이 들어 정신적으로 성숙해져 생긴 변화라기 보다는, 입을 열면 내 바닥이 드러난다는 걸 알고 알아서 숨는 거다.

생존 전략으로서 말이다.


그런데 아무리 떠들어도 욕을 많이 먹기는커녕 오히려 관심을 집중시키는 자랑이 있다.

바로 맛집 자랑이다.

맛집 찾기는 본능적으로 즐겁고, 어딜 여행하더라도 추억은 대부분 맛집에서 먹은 음식에서 나온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맛집을 자랑했을 때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을 거의 보지 못했다.

이 산문집을 읽고 그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순수하게 맛집 소개를 원한다면 다른 책을 찾자.

이 책은 일단 산문집이다.

곳곳에서 맛집을 소개하지만, '생생정보통' 같은 걸 기대하면 곤란하다.

미식가로 유명한 이탈리의 작곡가 로시니 이야기를 꺼내며 자연스럽게 작가 본인의 오랜 맛집인 이탈리안 레스토랑 '로씨니'와 얽힌 추억을 언급하는 식이니, 글맛을 즐기는 방향으로 읽는 게 옳다.


아재스러움(아재이니 당연하지만)이 물씬 풍기는 문장이지만, 곳곳에서 개그감이 넘쳐나서 지루하지 않다.

좋은 게 좋은 거라는 태도가 없다는 점도 솔직해서 좋다.

하얏트 호텔과 신라 호텔의 레스토랑을 비교해 손님 접대와 서비스도 국격에 맞게 개선돼야 한다고 꼬집으며 한 곳을 대놓고 '디스'할 땐 속이 시원했다.

음식을 두고 벌이는 갈등은 맛집에 진심인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고, 남의 맛집을 탓하면 안 된다는 통찰도 공감이 가면서도 날카롭다.

'맛집'이란 단어가 국립국어원이 만드는 표준국어대사전에 등재돼 있지 않다는 식의 깨알 정보도 유익하다.

'필동면옥'과 '우래옥'처럼 내 맛집과 겹치는 곳이 나오면 반가워서 군침을 흘렸다(나는 '진미냉면'을 훨씬 사랑하지만 뭐).

해외 맛집을 예약하겠다고 국제전화를 120통이나 걸었다는 대목에선 '미저리' 같은 집착을 느껴서 조금 공포스럽긴 했다.


지금까지 꽤 많은 '아무튼' 시리즈를 읽었다.

이 시리즈는 책마다 기복이 좀 있어서 뽑기를 하는 기분이다.

'아무튼, 장국영'처럼 가슴이 먹먹해지는 책도 있었고, '아무튼, 인기가요'처럼 "고작?"이라는 의문이 든 책도 있었다.

이번에는 뽑기를 잘했다.

누가 읽든 미워하기 어려운 산문집이다.

아무튼, 맛집 - 맛집을 가기 위해 무슨 짓까지 해봤냐면
아무튼, 맛집 - 맛집을 가기 위해 무슨 짓까지 해봤냐면
복거일 장편소설 『미추홀, 제물포, 인천』(무블)

작품을 펼쳐 초반부를 읽으며 들었던 감정은 당혹감이었다.

차라리 대중교양서라고 부르는 게 옳지 않을까 싶었다.

더불어 "이걸 과연 소설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라는 질문도 따라왔다.

기시감이 들어 곰곰이 이유를 생각해 봤는데, 문득 조남주 작가의 장편소설 『82년생 김지영』이 떠올랐다.

이 작품과 내용과 결이 다른 데도 불구하고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니 희한한 일이었다.

며칠에 걸쳐 모두 읽은 뒤 내린 결론은 "그래, 이것 역시 소설이다"였다.

『82년생 김지영』은 여전히 소설인지 의문이지만, 이 작품의 2권은 부정할 수 없는(심지어 가슴 먹먹해지는) 소설이기에 소설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 작품은 수천만 년 전 황해의 탄생을 시작으로 2014년 아시안 게임까지 인천 지역에서 벌어졌던 중요한 역사적 사건을 연대기 순으로 펼쳐내며 그 안에 살았던 여러 인물의 삶을 따라간다.

요즘에는 보기 드문 분량의 장~~~편이지만, 내용만 보면 대하소설로 다뤄야 할 정도로 스케일이 장난이 아니다.

오히려 원고량을 줄이려고 많은 부분을 요약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이 작품의 중요한 뼈대는 변방의식이다.

작가는 이른바 4대 문명 중에서 시작이 가장 늦었던 중국은 변방이었고 그 변방에 한반도가 있음을 강조한다.

'국뽕'이 강한 독자에겐 반발심이 들 내용이 곳곳에 넘쳐난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부분은, 변방의식이 열등감의 표출이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가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 정확히 파악하고 사고하는 메타인지에 가깝다.

나는 이 작품이 강조하는 변방 의식이 메타인지를 통한 냉정한 현실 인식의 다른 표현이라고 받아들였다.

특히 낙랑이 우리 고대사에 미친 영향에 관한 서술이 신선하게 느껴졌다.

그렇다고 이를 식민지 근대화론과 연결해 해석하는 건 비약이라고 생각하지만 말이다. 

이 밖에도 꽤 논쟁적인 내용이 많다(특히 이승만 관련).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는 독자의 몫이다.

나 역시 작가의 조지프 매카시에 관한 인식에는 절대 동의하지 않으니까.


내 욕심인데, 5대에 걸쳐 떡장사를 하는 가족의 장대한 서사를 담은 2권만을 따로 떼어내 단행본으로 엮었다면 접근성이 훨씬 쉬운 작품이 되지 않았을까 싶었다.

이 변방 of 변방의 인물들이 제물포항 개항부터 러일전쟁, 3.1운동, 일제강점기, 해방정국, 6.25, 경인고속도로 건설, 인천아시안게임 등 여러 역사 현장에서 겪는 온갖 고초를 따라가다 보면 마치 영화 '국제시장'을 보는 듯해 울컥했다.

물론 작가는 절대 그럴 생각이 없었을 테지만.


형식과 내용에 관한 호불호가 갈릴지는 몰라도, 작가가 얼마나 많이 공부하고 치열하게 작품을 썼는지는 일독만 해도 충분히 알 수 있다.

이런 작품 요즘에 찾기 쉽지 않다.

대형 작가가 각 잡고 제대로 쓴 대형 작품이다.

[세트] 미추홀, 제물포, 인천 1~2 세트- 전2권
[세트] 미추홀, 제물포, 인천 1~2 세트- 전2권
황정은 산문집 『작은 일기』(창비)

작가가 지난해 12월 3일 윤석열의 계엄 선포 이후부터 헌법재판소가 탄핵 심판을 선고했던 4월 이후까지 쓴 일기를 모은 책이다.

그 사이에 정치권에서 벌어졌던 사건에 관한 생각, 광장에서 바라본 풍경 등을 상세하고 담고 있다.

일기라는 형식답게 직설적이고 감정을 억지로 숨기지도 않는다.

페이지 곳곳에서 조용하게 불안과 분노를 표출하고 때로는 절망하면서 동시에 그 안에서 작은 희망의 씨앗을 찾는다.

작가의 의견에 전혀 동의할 수 없는 부분도 있었지만(특히 2030 남성을 바라보는 시선), 계엄에 분노하고 탄핵에 찬성했던 사람이라면 이 산문집이 남의 일기처럼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지나온 험악한 시간이 최근에 있었음을 새삼 실감했다.

작은 일기
작은 일기
성진환 산문집 『아무튼, 레코드』(위고)

1. 음악을 대하는 내 태도가 진지해진 때는 지난 1995년 봄 솔리드 2집 [The Magic of 8 Ball] 정품 테이프를 산 뒤부터다.

그 시절 내 용돈은 하루 1000원을 넘지 않았는데, 정품 테이프 가격은 3500~5500원 사이였다.

용돈을 일주일 동안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야 살 수 있는 정품 테이프를 산 이유는 부끄러움 때문이었다.

'길보드'로 부르던 불법복제 테이프를 국민학교 시절부터 가끔 사서 들었지만, 좋아하는 노래를 '길보드'로 들으면 좋아한다고 말하기가 왠지 떳떳하지 않다고 느껴졌다.

학창 시절 내내 용돈이 부족했지만, 테이프를 사서 비닐 포장을 뜯을 때 쏟아지는 도파민 때문에 부족한 용돈을 모으고 또 모았다.

공짜로 받은 비싼 물건보다 '내돈내산'한 저렴한 물건에 더 애착이 가는 법 아닌가.

신중하게 산 테이프를 듣고 또 들었고, 내 방에 하나둘 모인 테이프는 최고의 보물이 됐다.


2. 테이프로 음악을 듣는 일은 자연스럽게 앨범 전체를 듣게 하는 습관을 만든다.

테이프로 음악을 들을 때 다음 곡을 듣기 위해 워크맨의 빨리 감기 버튼이나, 이전 곡을 듣기 위해 되감기 버튼을 누르고 수십 초 동안 기다리는 일은 번거롭다.

그럴 바엔 그냥 순서대로 앨범을 듣는 게 속 편하다. 

그렇게 나는 반강제로 앨범 단위로 음악을 듣는 매력을 배웠다.

스트리밍 서비스가 대세가 되면서 클릭 한 번이면 쉽게 트랙을 바꿀 수 있는 세상이 된 지 오래됐지만, 나는 지금도 그냥 앨범을 통째로 플레이리스트에 넣고 순서대로 듣는다.

그래야 음악을 듣는 맛이 난다.

싱글과 앨범은 완전히 다른 세계다.

메탈리카의 멤버 각각은 최고의 연주자라고 부를 수 없지만, 하나로 모이면 세계 최강이 되듯 말이다.

나는 지금도 뮤지션은 싱글이 아닌 앨범(최소한 EP로라도)으로 자기를 증명해야 한다고 믿는다.


3. 영화광의 3단계가 있다지 않던가.

첫 번째 단계는 한 영화 두 번 보기, 두 번째 단계는 영화평 쓰기, 그리고 세 번째 단계는 영화 찍기.

음악도 마찬가지다.

첫 번째 단계는 한 앨범을 듣고 또 듣고, 두 번째 단계는 음악 이야기를 쏟아내고, 세 번째 단계는 음악을 직접 만든다.

나도 결국 세 번째 단계까지 왔고, 학창 시절 내내 공부는 안 하고 하찮은 사양의 데스크톱 컴퓨터로 음악을 만들었다.

음악 만들기만 해선 의미가 없다.

누군가에게 들려줘야 한다.

집에 있는 전축의 더블데크가 음반 공장 역할을 했다.

나는 컴퓨터 사운드카드의 라인 아웃을 전축의 마이크 단자(이 얼마나 무식한 발상인가)에 연결해 내 첫 앨범을 녹음했다.

조악하기 이를 데 없는 음질이어서 들었던 친구들의 평은 영 좋지 않았지만. 아무튼 나는 그렇게 내 앨범을 가진 뮤지션이 됐다는 생각에 뿌듯해했다.

지금도 그 앨범이 집 어딘가에 봉인돼 있다.


4. 이 산문집을 읽고 꽤 많은 추억을 되새겼다.

음악을 사랑했던 독자라면 이 산문집에 담긴 이야기가 모두 자기 이야기처럼 느껴질 테다.

그렇지 않은 독자여도 이런 세계가 있었구나 하며 흥미로울 테고. 

특히 작가와 비슷한 또래의 독자라면 공감하는 부분이 정말 많아 읽는 즐거움이 클 것이다.

아무튼, 레코드
아무튼, 레코드
한로로 소설 『자몽살구클럽』(어센틱)

나는 작가가 지난 2022년 싱어송라이터로 데뷔 후 내놓은 모든 싱글과 EP를 따라 들어왔다.

매주 EP 단위 이상인 앨범을 꼬박꼬박 챙겨 듣고 있고, 그 과정에서 나름 필터링된 뮤지션은 싱글까지 챙겨 듣는데, 작가는 내가 싱글까지 챙겨 듣는 몇 안 되는 뮤지션이었다.

지금 활동하는 젊은 뮤지션 중에서 백아와 더불어 가장 좋은 가사를 쓰는 싱어송라이터다.

포크에 음유시인으로 백아가 있다면, 록에는 한로로가 있다.


이 작품은 작가가 최근 발표한 동명의 EP와 함께 나왔다.

공교롭게도 이 작품은 최근에 읽은 백은별 작가의 장편소설 『시한부』와 같은 소재(청소년 자살)를 다루고 있어 흥미로웠는데, 『시한부』보다는 경쾌하고 '딥'하진 않다.

하지만 결말은 『시한부』보다 훨씬 처참하고 급작스러워서 당황했다.

앨범을 들을 땐 이 정도 수준의 파국을 상상하진 못했는데...

아니다.

작가가 부른 노래 대부분의 끝이 씁쓸했었지...


이 작품은 내게 내용보다는 시장에 불러일으킨 현상이 훨씬 흥미롭다.

오늘 교보문고 기준, 이 작품은 베스트셀러 순위에서 소설 부문 1위이고 종합 부문 2위이다.

다른 분야에서 활동하는 아티스트가 소설을 써서 이 정도 반응을 끌어내는 걸 보긴 처음이다.

언니네이발관의 이석원처럼 성공한 뮤지션 출신 작가가 없진 않았지만, 이 정도로 시장에서 엄청난 파괴력을 보여주진 못했다.

사후 분석인데 작가가 뮤지션으로 활동하며 보여준 성과, BTS의 RM을 비롯해 여러 셀럽의 샤라웃, 작지만 열성적인 팬덤 등이 종합해 시너지를 낸 결과다.

그리고 이런 시너지로 출판 시장이 출렁일 만큼 시장이 정말 작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이 작품의 성공을 보며, 앞으로 나는 어떤 전략을 써서 살아남아야 하는가에 관한 고민이 몹시 깊어졌다.

확실한 건 소설만 잘 쓴다고 해서 작가로 살아남을 수 있는 세상이 아니란 거다.

내가 소설 외에 보여줄 수 있는 매력은 뭘까.

없네?

큰일 났다.

자몽살구클럽
자몽살구클럽
백은별 장편소설 『시한부』(바른북스)

중학생 작가가 쓴 베스트셀러라는 사실을 잊은 채 읽으려고 노력했다.

오래전에 귀여니의 소설 몇 편을 읽고 강력한 문화적 충격을 받은 일이 있어서, 10대 작가를 향한 선입견이 없다면 거짓말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귀여니의 소설과 비교하기가 미안할 정도로 괜찮은 작품이었다.

청소년 자살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다루면서도 그 무게에 짓눌리지 않고 확실하게 자기 목소리를 내고 있어서 놀랐다.

절망과 맞닥뜨리면 다양한 선택지를 따져보지 않는다는 아이들의 조용한 절규에 가슴이 먹먹했다.

나 역시 가족을 자살로 잃은 경험이 있다 보니, 등장인물의 심리와 행동을 따라가면서 어느새 내 이야기처럼 소설에 집중할 수 있었다.


지난 2011년부터 10대 사망원인 1위가 자살이고, 매년 청소년 자살이 급증하고 있다.

통계청의 '2023년 사망원인 통계 결과'에 따르면 지난해 10대(10~19세)의 자살률은 인구 10만 명당 7.9명이다.

참고로 2015년에는 10만 명당 4.2명이었다.

불과 10년도 안 되는 세월 동안에 두 배 가까이 늘었다.

출산율은 점점 줄어들고 있는데, 10대는 계속 죽어 나가고 있다.

이거 정말 미친 세상 아닌가.


통계로 드러나는 숫자로는 심각성이 구체적으로 와닿지 않는 경우가 많다.

숫자는 그저 숫자일 뿐 배경 설명까지 해주진 않으니 말이다.

나는 정부가 청소년 자살 예방 정책을 마련하기 전에 이 작품을 꼭 참고하길 바란다.

이 작품은 10대 청소년의 시선으로 또래의 자살 원인과 그 심각성을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어떤 보고서나 통계보다도 생생하다.

소설은 사실이 아니어도 진실을 보여주는 효과적인 수단이라는 말이 마음에 깊이 와닿았던 작품이었다.

시한부 - 백은별 장편소설
시한부 - 백은별 장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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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탐험단이 시즌 2로 돌아왔어요
스토리탐험단 시즌2 : 장르의 해부학 1. 호러스토리탐험단 10번째 여정 <내 안의 여신을 찾아서>스토리 탐험단 9번째 여정 <여자는 우주를 혼자 여행하지 않는다>스토리 탐험단 8번째 여정 <살아남는 스토리는 무엇이 다른가>
유디테의 자본주의 알아가기
지긋지긋한 자본주의왔다네 정말로 자본주의의종말
제발디언들 여기 주목! 제발트 같이 읽어요.
[아티초크/책증정] 구병모 강력 추천! W.G. 제발트 『기억의 유령』 번역가와 함께해요.(7) [제발트 읽기] 『토성의 고리』 같이 읽어요(6) [제발트 읽기] 『전원에서 머문 날들』 같이 읽어요[제발디언 참가자 모집] 이민자들부터 읽어 봅시다.
🎁 여러분의 활발한 독서 생활을 응원하며 그믐이 선물을 드려요.
[인생책 5문 5답] , [싱글 챌린지] 완수자에게 선물을 드립니다
동구권 SF 읽어보신 적 있나요?
[함께 읽는 SF소설] 10.이욘 티히의 우주 일지 - 스타니스와프 렘[함께 읽는 SF소설] 09.우주 순양함 무적호 - 스타니스와프 렘[함께 읽는 SF소설] 08.솔라리스 - 스타니스와프 렘[함께 읽는 SF소설] 11.노변의 피크닉 - 스트루가츠키 형제
그믐의 흑백요리사, 김경순
브런치와 디저트 제대로 만들어보기ㅡ샌드위치와 수프디저트와 브런치 제대로 만들어보기솥밥 제대로 만들어보기
혼자 읽어서 오히려 깊이 읽은 책들
<인간의 대지> 오랜만에 혼자 읽기 『에도로 가는 길』혼자 읽기천국의 열쇠 혼자 읽기
웰다잉 오디세이 1분기에 이 책들을 읽었어요
[웰다잉 오디세이 2026] 3. 이반 일리치의 죽음[웰다잉 오디세이 2026] 2. 죽음을 인터뷰하다 [웰다잉 오디세이 2026] 1. 죽음이란 무엇인가
독서모임에도 요령이 있나요?
도스토옙스키와 29일을[그믐밤] 7. 북클럽 사용설명서 @시홍서가
모집중밤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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