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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라지면 암흑이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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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고은 소설집 『부루마불에 평양이 있다면』(문학동네)

작가가 풀어놓는 이야기는 기발하되 허황하지 않다. 작가가 2000년대 말에 발표한 단편소설 ‘1인용 식탁’은 ‘혼밥’ 문화를 예고했다. 장편소설 ‘밤의 여행자들’은 재난 현장을 여행하는 ‘다크 투어리즘’이란 단어가 유행하기도 전에 재난 여행 기획사를 다뤘다. 작가는 한발 앞서 미래를 엿보고 이를 무겁지 않게 풀어내는 데 탁월함을 보여왔다.


이 소설집의 표제작 ‘부루마불에 평양이 있다면’은 결혼을 앞둔 남녀가 평양 아파트 분양권을 청약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작가는 통일이 현실처럼 다가오고, 결혼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아이러니를 재기발랄한 필체로 엮어낸다.


오해는 아이러니와 더불어 이야기를 이끄는 힘이다. 주인공이 사망자의 영혼인 ‘양말들’에서 주인공 언니는 오해 때문에 빈소를 찾은 한 남자에게 주인공이 그를 좋아했다고 말한다. 주인공은 경악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감정을 재확인한다. ‘평범해진 처제’는 헤어진 남자와 재회한 주인공이 자신이 생각하는 자신과 타인이 생각하는 자신이 달랐음을 오해로 깨닫는 과정을 그린다. 


현재를 통찰하는 감각도 돋보인다. ‘오믈렛이 달리는 밤’에 등장하는 ‘로맨스 푸어’라는 표현은 결혼도 연애도 쉽지 않은 세태를 요약한다. ‘우리의 공진’에서 통근버스 메모장을 통해 모르는 여성과 소통하다가 가까워지기 전에 멈추는 주인공의 태도는 SNS상의 느슨한 인간관계를 연상케 한다. 소설 전반에 흐르는 정서가 불안하지만 따뜻하게 느껴진다는 점도 아이러니다.

부루마불에 평양이 있다면
부루마불에 평양이 있다면
단편선, 하박국, 김민규 저 『DIY 뮤직 가이드북』(소소북스)

음악을 하고 싶고 공연도 하고 싶고 앨범도 내보고 싶은데 어디서부터 접근해야 할지 막막하다면 이 책은 상당히 친절한 가이드가 돼 줄 것이다.

 

이 책은 뮤지션을 꿈꾸는 가상의 인물 ‘김인디’를 내세워 실무적으로 필요한 부분이 무엇인지를 친절하게 짚어준다. 이 책은 데모를 녹음하는 방법, 공연을 기획하는 방법, 음원을 제작하고 발표하는 방법, 마케팅과 프로모션을 하는 방법 등을 상세하면서도 쉽게 설명한다. 설명 중간에 뮤지션, 엔지니어, 제작자의 인터뷰가 들어가 있어 이해를 더욱 돕는다. 

 

내 경험상 이미 앨범 몇 장을 낸 프로 중에도 음악 외의 부분에 관해 잘 모르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이 때문에 레이블에 소속돼 있다가 나와서 완전히 혼자가 됐을 때 헤매는 뮤지션들을 꽤 봤다. 음악을 시작하려고 준비하는 예비 뮤지션뿐만 아니라 프로들도 일독할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다. 나도 4년 전 앨범을 낼 때 이런 책이 있었다면, 훨씬 도움이 됐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대중음악 쪽을 취재하는 기자들도 꼭 한 번 읽어볼 만한 책이다. 인상 깊게 봤던 웹툰인 ‘혼자를 기르는 법’을 그린 김정연 작가의 일러스트도 좋았다.

 

p.s. 책 후반부에 프로모션을 설명하는 부분에 내 이름이 갑자기 튀어나와서 좀 놀랐다. 책을 내기 전에 이 부분에 관해 내게 먼저 물어봤다면 자세한 설명을 더 보탰을 텐데 아쉽다.

DIY 뮤직 가이드북
DIY 뮤직 가이드북
마크 쿨란스키 『대구』(알에이치코리아)

사상, 종교, 경제, 인종 등의 갈등은 혁명과 전쟁 등 인류 역사의 중요한 고비마다 막대한 영향력을 끼쳤다. 거대 담론부터 떠오르는 인류의 역사에서 인간 혹은 인간에게서 나온 것 외의 존재가 역사의 물줄기를 바꿨다고 생각하긴 쉽지 않다. 그것도 우리의 밥상 위에 오르는 물고기가 인류의 역사와 지도에 변화를 줬다고 상상력을 발휘하긴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대구’의 저자 마크 쿨란스키는 그런 일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바이킹의 대이동 시기인 8세기부터 최근까지 1000여년 동안 대구(cod)를 둘러싸고 벌어진 역사를 연대기 형식으로 풀어낸다. 어부 집안 출신으로, 대구잡이 저인망 어선에 승선한 경험이 있는 저자는 자신의 경험을 십분 발휘해 대구의 역할ㆍ생태ㆍ요리법 등을 7년간 밀착 취재해 고증하고 집대성했다. 이를 통해 저자는 ‘세계의 역사와 지도가 대구 어장을 따라 변화해왔다’는 획기적 시각으로 새롭게 세계사를 펼쳐 보인다.


우선 저자는 대구의 생태적 특징부터 밝힌다. 대구는 몸집이 크고 개체 수가 많으며 맛도 담백해 많은 사람이 선호하는 어종이다. 또한 대구는 얕은 물을 좋아해 포획하기 쉽다. 이 때문에 대구는 오래전부터 상업적으로 유용한 생선이었다.


역사상 대구는 유럽인의 주요 식량이자 부를 쌓는 수단이었다. 바이킹은 먼 거리를 항해하는 동안 말린 대구를 주식으로 삼아 콜럼버스보다 훨씬 먼저 신대륙인 미국 북동부의 뉴잉글랜드에 도착했다. 바스크족은 북아메리카 해안의 숨겨둔 황금어장에서 대량의 대구를 낚아올려 유럽인들에게 팔았다. 1620년에 종교 박해를 피해 대서양을 건넌 영국의 신교도들은 대구가 풍부한 매사추세츠주 플리머스에 정착했다. 


18세기에 들어서 대구 무역의 중심지였던 뉴잉글랜드는 국제적인 상 업세력으로 부상했다. 이들은 소금에 절인 대구를 지중해 시장에 판매해 큰 이익을 챙겼으며, 저급한 물건을 서인도제도의 설탕 플랜테이션(식민지에서 값싸게 착취한 노동력으로 일군 산업형 농장)에 팔았다. 그곳의 노예들은 질 낮은 절인 대구로 하루 16시간의 중노동을 버텼다. 결과적으로 대구는 노예무역을 더욱 활성화시켰다.


민족 이동과 노예무역에 영향을 미친 대구는 국가 간 어획을 둘러싼 경쟁과 갈등도 부추겼다. 18세기 영국은 식민지인 뉴잉글랜드의 당밀과 차에 세금을 매기고 대구 무역을 제한하는 법을 만들었다. 식민지인들의 반발은 미국 독립혁명으로 이어졌다. 1782년 영국과 미국의 평화 협상에서 가장 해결하기 어려웠던 문제 역시 미국의 대구잡이 권리였다. 아이슬란드는 영국과 1958~1975년 대구 어업권을 둘러싸고 세 차례에 걸쳐 ‘대구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이 전쟁은 아이슬란드의 200마일 영해 요구가 받아들여지면서 끝났고, 국제 해양법상 경제수역이 200마일로 결정되는 계기를 가져왔다.


이 책의 또 다른 묘미는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 에스파냐 브라질 자메이카 등 다양한 나라의 대구 요리법 소개다. 이 책에 소개된 ‘입술을 제거한 대구머리 튀김’ ‘바스크식 대구혀 요리’ ‘대구부레 구이’ ‘소금절임 대구 크로켓’ 등 맛을 짐작하기 어려운 신기한 요리들은 역사 이야기 이상으로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어업의 현대화는 대구 개체 수의 가파른 감소를 불러왔다. 1950년대 들어서 저인망으로 물고기를 쓸어담아 즉시 냉동 처리하는 작업이 가능해지자 대구 어획량은 전 세계적으로 매년 늘어나 생선 가격을 주기적으로 폭락시켰다. 1992년 캐나다 정부는 대구의 상업적 멸종이 자명해지자 뉴펀들랜드 근해, 그랜드뱅크스, 세인트로렌스만 해저 어업을 무기한 금지했다. 이로써 3만여명의 어민이 일자리를 잃었다.


이 책은 지금 우리에게도 적지 않은 시사점을 준다. 과거 서민의 식탁 위에 흔하게 올랐던 명태는 현재 연근해에서 사라진 지 오래다. 일부 지역에서 열리는 명태 축제는 국산 명태가 없어 러시아산 수입 명태를 동원해야 했다. 그러나 명태의 새끼인 노가리는 여전히 주점에서 저렴한 마른안주로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명태는 대구목 대구과에 속하는 한류성 바닷물고기다. 대구를 둘러싼 흥미로운 이야기가 즐겁게만 다가오지 않는 이유다.

대구 - 세계의 역사와 지도를 바꾼 물고기의 일대기
대구 - 세계의 역사와 지도를 바꾼 물고기의 일대기
김숨 소설집 『국수』(창비)

이 소설집은 ‘가족’이라는 관계를 주목한다.

표제작인 ‘국수’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주인공이 역시 아이를 낳지 못해 쫓겨나 자신의 집에 재취로 들어온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계모에게 국수를 끓여주며 계모의 삶을 이해하고 화해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작가는 밀가루 반죽으로 한 그릇의 국수를 만드는 과정에서 변화하는 주인공의 심경을 서정적인 필치로 밀도 있게 그려내며 감동을 이끌어내고 있다.


“손님처럼 마루 한쪽에 옹송그리고 앉아 밀가루 반죽을 이겨대던 당신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손바닥 안의 손금이 다 닳아지지나 않을까 염려될 만큼 반족을 꾹꾹 눌러대던 꾹꾹…. 당신이 반죽에 몰래 섞어 넣어 그렇게 꾹 누르고 눌러야만 했던 것…. 그것은 무엇이었을까요.”(53쪽)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식도암으로 혀에 통증을 느끼는 계모를 위해 국수의 면발을 숟가락으로 툭툭 끊는 주인공의 모습은 깊은 여운을 남긴다.

또한 작가는 자칫 진부할 수 있는 ‘가족’이란 주제를 끊임없이 새롭게 바라보고 집요하게 파고들어 진실과 마주하려 노력한다.


‘옥천 가는 날’은 응급차에서 어머니의 주검을 어루만지며 과거를 회상하는 자매를, ‘아무도 돌아오지 않는 밤’은 함께 사는 시아버지와 식사하는 일을 끔찍하게 여기면서도 시아버지가 남편이 날려버린 재산을 돌려달라고 할까봐 불안해하는 며느리를, ‘막차’는 오랜 시간 함께 살아온 남편에 대한 경멸과 멸시를 숨기지 않는 아내를, ‘구덩이’는 하루가 멀다고 어머니와 이혼하라며 전화로 윽박지르는 아들을, ‘명당을 찾아서’는 명당이라는 허상을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소유하려는 부부를 등장시켜 서로에게 짐이 되기도 하고 도피처가 되기도 하는 가족 관계의 심연을 들춰낸다.


작가는 가족의 의미를 진중하게 천착하면서도 현대인이 앓고 있는 분열적 심리를 성찰함으로써 깊은 울림을 선사한다.

국수
국수
금정연 일기 『매일 쓸 것, 뭐라도 쓸 것』(북트리거)

자신의 일기를 소재로 쓴 산문집일 줄 알고 펼쳤는데, 정말로 일기 그 자체였다.

2021년 겨울부터 2023년 가을까지 쓴 일기를 엮었는데, 여기에 국내외 여러 작가가 쓴 일기를 짧게 발췌해 절묘하게 곁들이는 구성이 신선했다.

일기 곳곳에 스며들어 있는 다양한 작품의 흔적에서 작가의 어마어마한 독서량이 느껴져 혀를 내두르게 한다.

하지만 나는 그런 일기보다는 작가가 딸에 관해 쓴 일기가 훨씬 좋았다.

문학, 음악, 오디오 등을 다룬 일기보다 훨씬 솔직하고 따뜻해서 마음에 와닿았다.


나는 일기를 쓰지 않는다.

대신 오랫동안 디지털카메라로 찍어온 사진이 일기 역할을 하고 있다.

내가 처음 디카를 구입했던 2002년 10월부터 지금까지 촬영한 모든 사진이 연도별, 월별, 일자별로 분류돼 외장하드에 저장돼 있다.

폴더에는 담긴 사진이 어떤 사진인지 관한 짧은 제목이 적혀 있다.

'준면과 횟집', '영산포 홍어' 등등.

제목과 사진을 보면 까맣게 잊고 살았던 그날 일과 기분이 꽤 많이 복구된다.

이 일기를 읽은 후, 한가해지는 날이 오면 지금까지 찍은 사진을 활용한 '사진 일기' 같은 책을 만들면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생각만이다.

지금 하는 일도 벅찬데 무슨.

매일 쓸 것, 뭐라도 쓸 것 - 마치 세상이 나를 좋아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매일 쓸 것, 뭐라도 쓸 것 - 마치 세상이 나를 좋아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서정주 시집 『귀촉도』(은행나무)

시를 잘 모르는 사람의 입까지 벌어지게 하는 시를 쓴다는 건 도대체 무슨 재능일까.

힙합에 전혀 감흥을 못 느꼈던 내가 이센스의 첫 정규앨범 [The Anecdote]를 듣고 뻑갔던 것처럼, 서정주의 시집은 읽을 때마다 이런 게 '악마의 재능'이구나 싶다.


우리들의 사랑을 위하여서는/이별이, 이별이 있어야 하네.(견우의 노래)


이, 우물물같이 고이는 푸름 속에/다수굿이 젖어 있는 붉고 흰 목화꽃은,/누님/누님이 피우셨지요?(목화)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푸르른 날)


뭐라 하느냐/너무 앞에서/아- 미치게/짙푸른 하늘.(소곡)

귀촉도 - 서정주 시집
귀촉도 - 서정주 시집
이서수 장편소설 『마은의 가게』(문학과지성사)

이런저런 자리에서 여성이 일상에서 겪는 위협에 관해 들을 때가 있다.

그때마다 적잖이 놀라곤 한다.

나는 한 번도 겪어보지 않았고 겪을 일도 없는 위협인데, 한국의 치안이 타국보다 훌륭하다는 통계만 보고 무시하기에는 사례가 구체적이고 들으면 빡친다.

남자라면 시비 걸리는 상황이 올 때 맞다이까자는 마인드로 달려드는 사람이 많겠지만, 여자가 그렇게 행동하긴 쉽지 않다.

특히 상대방이 자신보다 완력이 센 남자라면.


기자 시절에 경제, 산업, 노동 분야를 취재하고 다양한 사람을 만나면서 직간접적으로 자영업자의 현실에 관해 많이 주워들었다.

이미 많은 사람이 알고 있듯이, 자영업자 상당수는 마땅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어쩔 수 없이 개업한다.

인생은 그렇게 공평하지 않다.

아무리 달려도 평생 비포장도로만 뛰는 사람도 있고, 죽어라 달렸는데 그 끝이 낭떠러지인 사람도 있다.


일자리가 없는 건 아니다.

지금도 전국 곳곳의 공단은 인력난으로 시달리고 있다.

문제는 그 일로 벌어들일 수 있는 돈이 많지 않고, 제대로 경력을 쌓을 수 없다는 거다.

그런 일이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은 무책임하다.

그 돈을 받으면 살아는 진다.

그런데 여가 활동, 연애, 자기 계발 등 많은 걸 포기해야 살아진다.

더럽고 치사해서 자영업에 뛰어드는 것이다.


다수의 손님은 평범한데, 미꾸라지 한 마리가 물을 흐리듯 소수의 진상이 문제다.

자영업자는 돈을 지불하면 내가 왕이라는 마인드를 탑재한 진상을 절대 피할 수가 없다. 

그리고 진상은 대체로 집요하다.


만약 철저한 준비 없이 자영업에 뛰어든 여성이 진상 손님을 만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궁금하다면 이 작품을 읽으면 된다.

처절한 환장의 콜라보다.

읽는 내내 밤고구마 몇 개를 연속으로 물 없이 삼키는 기분이 들 것이다.


작가는 조금 희망적인 톤으로 소설을 마무리하는데, 그 마무리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작가의 말을 보니 원래 결말은 꿈도 희망도 없었나 보다.

편집 과정에서 바뀐 모양이다.

작가가 처음에 쓴 대로 마무리를 지었으면 더 일관성 있는 아포칼립스 같은 작품이 나오지 않았을까 싶다.


마은의 가게
마은의 가게
우다영 소설집 『그러나 누군가는 더 검은 밤을 원한다』(문학과지성사)

작가의 전작인 소설집 <앨리스 앨리스 하고 부르면>을 꽤 충격적으로 읽었다.

수록 작품 한 편 한 편을 읽을 때마다 무언가에 홀려 다른 세계를 엿보고 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결은 조금 다르지만 테드 창이 덜 하드하게 따뜻한 SF를 쓰면 이런 느낌이겠다 싶었다. 

'신비롭다' 혹은 '환상적이다'라는 수식어가 정말 잘 어울리는 단편들이었다.

특히 신비로운 분위기를 연출하는 필력은 한국 작가 중에선 독보적이지 않을까 싶다.


이 소설집을 사다 놓은 지 꽤 오래됐는데, 소설집과 장편소설 작업을 하느라 뒤늦게 펼쳤다.

내 방을 오갈 때마다 이상하게 자주 눈에 띄어 밀린 숙제를 하듯 읽었다.

시공간과 생의 한계를 초월해 펼쳐내는 환상적인 이야기들...

작가는 이를 통해 우리가 서로를 칼로 무를 베듯 구별할 수 없는 존재라고 역설한다.

어떤 선택으로 어떤 관계를 맺었든 그게 바로 지금 우리라면서.

그런 점에서 이 소설집은 '우주적'이다.

경험한 만큼 밖에 쓰지 못하는 나로서는 작가의 상상력이 어디서 비롯되는 건지 경이로웠다.

뭐라고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좋았다.


전작보다 더 SF스러웠는데, 다섯 단편이 미묘하게 연결된 느낌을 줘서 마치 연작소설을 읽는 듯한 기분도 들었다.

정규앨범을 들을 때 첫 트랙부터 마지막 트랙까지 차례대로 들어야 맛이 나듯이, 이 소설집 또한 수록 작품을 순서대로 읽어야 맛이 난다.


그러나 누군가는 더 검은 밤을 원한다
그러나 누군가는 더 검은 밤을 원한다
앤솔러지 『몸스터 (몸은 몬스터)』(스피리투스)

2001년 초겨울, 나는 대학교에서 논술시험을 치렀다.

오른손에 깁스를 한 채 왼손으로 펜을 쥐고.

오른손잡이인 나는 왼손으로 삐뚤빼뚤 천천히 글씨를 쓰며 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내 몸에 붙어있는 내 팔이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게 이렇게 답답한 일인 줄 몰랐다.


주어진 시험지를 반도 채우지 못하고 나오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내 몸도 마음대로 못 하는데, 다른 사람이 내 마음대로 움직여주길 바라는 건 과한 욕심이 아닐까?

오래전 일이지만 지금도 생생할 정도로 인상적이어서, 나는 누군가에게 별 기대를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이 앤솔로지를 읽으며 오래전 경험을 떠올렸다.

여기에 수록된 다섯 작품에는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 몸을 고민하는 청소년들이 있다.

자기가 원하는 몸을 만들고 싶어서 미친 듯이 다이어트를 하고, 헬스장에서 쐬질을 한다.

그런데 어디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는가.

먹다가 토하고, 공부하려 앉으면 졸려 죽겠고...

나이 먹어 돌이켜 보면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오는 추억이지만, 그 시절에는 그 어떤 고민보다도 무거웠던 고민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 몸에 관한 고민 아니던가.


나도 그랬었다.

키는 작은데 머리는 크고 몸은 말라서 츄파춥스 같았던 외모가 싫었다.

무협지에 미쳐있던 시절이어서 내 안에도 무언가 특별한 능력이 있을 줄 알고 지식호흡 흉내를 내며 내공을 쌓으려고 해봤는데 숨만 막히더라.

차라리 빨리 나이가 들면 나을 줄 알았는데, 키는 그대로이고 몸에 살만 덕지덕지 붙어버렸다.


그래도 어찌저찌 잘 살아간다.

그런 몸도 그런대로 잘 사용하면 재미있는 일이 생기더라.

소설 속 청소년들도 나이 들면 그렇게 되겠지.

너무 걱정하지 마시라.


몸스터
몸스터
이석원 산문집 『어떤 섬세함』(위즈덤하우스)

이석원, 참 대단한 작가다.

그가 소설가로서 좋은 작가인지는 의문이지만, 에세이스트로서 좋은 작가라는 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음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음악으로 경지에 오르고, 산문으로도 경지에 오른 사람이 소설까지 잘 쓰면 반칙이지.

감상문을 쓰다가 허접해서 지우고 대신 읽다가 좋았던 문장을 발췌해(일부는 적당히 수정해서) 옮긴다


- 살면서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어쩌면 더 중요하다.


- 나 빼고 다른 사람들은 다 잘 사는 것 같아서. 그게 착각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해서. 그래서 우리는 늘 서로가 서로를 부러워하며 사는 일이 가능하다.


- 왜 어른들이 모든 것에는 다 때가 있느니, 그러니까 젊어서 많은 것들을 경험해 보는 게 좋다느니 하는 지를 알 것 같다. 스무 살의 나와 서른 살의 나는, 또 마흔 살의 나와 쉰 살의 나는 그 모든 순간이 다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흡수하는 감각도, 원하는 종류의 자극도, 그간 쌓아왔던 경험의 종류도 다 달랐으니 말이다.


- 진심이라고 해서 무조건 누구에게나 통하는 건 아니다.


- 아무리 오랜 세월 동안 축적해 온 삶의 경험으로부터 얻은 지혜라도 지키지 않으면 소용이 없는 것이다.


- 관계에 있어서 솔직함이란 결코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그 사실을 모른 채 솔직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아무 때나 내 마음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버리면, 관계는 오히려 종말을 고할 수 있다.


- 누군가와의 관계를 영영 끊어낸다는 의미의 그 '손절'이라는 카드를 너무 간편하게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면 어느 순간, 당신 주위에는 정말로 아무도 남지 않게 되는 사태가 올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 카드를 신중하게 잘 쓰기만 한다면, 인생에서 불필요하게 상처받는 일도 줄이면서 나를 지키고 사랑하는 방식의 하나로 활용할 수 있는 것 아닐까.


- 사람이 세상을 살면서 남을 손가락질하기는 정말 쉽거든? 그런데 중요한 건 내가 그 손가락질을 받는 당사자의 입장이 되었을 때도 같은 태도를 유지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란다.


어떤 섬세함 - 이석원 에세이
어떤 섬세함 - 이석원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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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다시 그믐달 사냥을 시작해 볼까? <오징어 게임> x <그믐달 사냥 게임> o <전생에 그믐달>
8월에도 셰익스피어의 작품 이어 낭독합니다
[그믐밤] 38. 달밤에 낭독, 셰익스피어 4탄 <오셀로>[그믐밤] 37. 달밤에 낭독, 셰익스피어 3탄 <리어 왕> [그믐밤] 36. 달밤에 낭독, 셰익스피어 2탄 <맥베스> [그믐밤] 35. 달밤에 낭독, 셰익스피어 1탄 <햄릿>
🐷 꿀돼지님의 꿀같은 독서 기록들
은모든 장편소설 『애주가의 결심』(은행나무)최현숙 『할매의 탄생』(글항아리)조영주 소설·윤남윤 그림 『조선 궁궐 일본 요괴』(공출판사)서동원 장편소설 『눈물토끼가 떨어진 날』(한끼)
이디스 워튼의 책들, 지금 읽고 있습니다.
[그믐클래식 2025] 8월, 순수의 시대[휴머니스트 세계문학전집 읽기] 3. 석류의 씨
공 출판사의 '어떤' 시리즈
[도서 증정] 응원이 필요한 분들 모이세요. <어떤, 응원> 함께 읽어요.[꿈꾸는 책들의 특급변소] 차무진 작가와 <어떤, 클래식>을 읽어 보아요.
🎁 여러분의 활발한 독서 생활을 응원하며 그믐이 선물을 드려요.
[인생책 5문 5답] , [싱글 챌린지] 완수자에게 선물을 드립니다
이렇게 더워도 되는 건가요?
[책걸상 '벽돌 책' 함께 읽기] #25. <일인 분의 안락함>기후위기 얘기 좀 해요![책걸상 '벽돌 책' 함께 읽기] #11. <화석 자본>무룡,한여름의 책읽기ㅡ지구를 위한다는 착각
8월 7일(목) 오후 7시 30분 / 저자 배예람X클레이븐 동시 참여 라이브 채팅⭐
[텍스티] 텍스티의 히든카드🔥 『당신의 잘린, 손』같이 읽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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