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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라지면 암흑이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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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탁환 장편소설 『살아야겠다』(북스피어)

믿음이 무너진 사회에서 우리가 기댈 곳은 어디란 말인가.

 

‘살아야겠다’의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가슴이 답답해졌다.

나는 뉴스를 다루고 또 가까이에서 수많은 뉴스를 접하는 직업에 종사하고 있다.

나는 메르스를 다룬 뉴스를 지겨울 정도로 접했고, 또 메르스를 꽤 알고 있다고 생각해왔다.

이 장편소설은 그런 내 생각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나는 아는 게 별로 없었다.

특히 메르스 사태 종료 후 벌어진 일들에 대해 나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이 소설은 메르스 사태 이후 벌어진 일들을 환자와 그 가족의 시선으로 따라가며 보여준다.

돌이켜보니 나는 수많은 메르스 관련 뉴스를 접했으면서도, 정작 환자와 가족의 목소리를 제대로 들은 기억이 없었다.

소설 모두 읽은 뒤에야 나는 왜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는지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여전히 지옥 속에서 살고 있었다.

고통을 피하는 태도는 본능이다.

굳이 지옥을 들여다보는 사람은 없다.

김탁환 작가는 굳이 그 지옥을 들여다봤고, ‘살아야겠다’는 그 보고서다.

 

이 소설의 주된 줄기는 치과의사 김석주, 출판사 물류창고 직원 길동화, 방송사 수습기자 이첫꽃송이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이야기들이다.

 

메르스 사태 당시 마지막으로 숨진 치과의사 출신 환자를 연상케 하는 김석주는 악성 림프종 재발을 의심해 검사를 받으러 병원에 왔다가 메르스에 걸렸다. 길동화는 아픈 동생을 데리고 병원에 왔다가 메르스에 걸렸다. 이첫꽃송이는 사경을 헤매는 아버지를 모시고 병원에 왔다가 메르스에 걸렸다. 하필 그 병원을 찾은 게 죄라면 죄인데, 대가는 너무 잔혹했다.

 

김석주의 메르스 검사 결과는 음성과 양성을 오간다. 의료진은 아직 메르스가 완치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림프종 검사를 미룬다. 의료진은 그에게 전염성이 없다는 사실을 알지만, 대책 없이 그를 격리병동에 가둬둔다. 새로운 격리 해제 기준이 나오지 않았다는 게 이유인데, 정부는 기준을 만들려는 의지조차 보여주지 않는다. 그 사이 그는 병세 악화로 병원에서 죽음을 맞았다. 그는 메르스 환자로 격리됐는데, 의료진이 인정한 사인은 악성 림프종이다. 그의 죽음은 누구의 책임이란 말인가.

 

완치 판정 후 가장 먼저 병원을 나선 길동화 앞에도 가혹한 일들만 가득했다. 후유증으로 폐 기능이 약화해 예전보다 숨을 쉬기가 어려웠지만, 그가 더욱 숨을 쉬기 어려운 이유는 주변의 냉대와 외면 때문이었다. 그는 더러운 바이러스 덩어리 취급을 받으며 오랜 세월 일해온 직장에서 사실상 해고된다. 그는 이미 업계에 메르스 환자라고 소문이 나 새로운 일자리를 구하는 일조차 어려운 처지에 놓인다. 생계를 위협받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그는 몇 차례 자살 시도까지 벌이지만 책임을 지는 이는 아무도 없다.

 

완치 후 현업에 복귀한 이첫꽃송이의 처지는 김석주, 길동화보다 나아 보이지만 뜯어서 살펴보면 역시 만만치 않다. 어머니에 이어 아버지까지 저 세상으로 떠나보낸 그가 심적으로 의지할 곳은 친척뿐이다. 친척들은 하필 아버지와 사이가 아주 좋았던 탓에 앞다퉈 병원에 왔다가 메르스에 걸렸고, 일부는 그로 인해 죽음을 맞았다. 아버지를 하필 그 병원으로 옮긴 이첫꽃송이는 후회하며 자책했고, 아버지 생전에 각별했던 친척들의 사이는 앞으로 다시 회복하기 어렵게 됐다.

 

메르스 사태에 대처하는 정부의 태도를 보면 탄식이 절로 흘러나온다. 정부는 메르스 발생 병원 명단 공개를 미루고, ‘2미터 이내 1시간 이상 메르스 환자와 머문 사람’이란 엉성한 밀집접촉자 기준을 고집했다. 이 과정에서 정부는 환자 접촉경로를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했고 일부 의심환자가 통제선을 벗어나기도 했다. 그 사이에 메르스는 전국적으로 퍼져나간다.

 

초동대응에 실패했다면 사후대응이라고 제대로 해야 했는데, 정부의 대응은 그야말로 후진 모습을 보여준다. 환자들에 대한 사후 관리가 잘 이뤄지지 않아, 많은 환자가 완치 후에도 심리적 외상으로 인한 스트레스 장애를 겪는다. 심지어 김석주가 입원한 병원이 질병관리본부에 보낸 ‘메르스 특별 사례팀 구성에 대한 회신’은 김석주 사망 후 닷새 후에 도착한다. 기가 막힐 일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그 사이에 메르스에 걸린 환자들은 오히려 타인을 감염시킨 가해자로 비난받는다. 길동화에게 전화를 걸어 욕하며 협박하는 한 남자의 모습은 낯설지 않았다. 이미 메르스 관련 뉴스 댓글란을 채웠던 환자를 향한 온갖 비난을 본 경험이 있으니 말이다. 환자뿐만이 아니다. 김석주의 아들 우람이는 단지 메르스 환자의 자녀란 이유만으로 어린이집으로부터 거부당한다. 정부와 병원과 공동체에 대한 믿음이 깨진 허약한 세상에서 선택할 수 있는 길은 ‘각자도생’뿐이다.

 

이첫꽃송이는 김석주를 격리병실에 가둬 내버려두고 있는 건 메르스도 림프종도 아니고, 우리의 두려움과 무관심이라고 말한다. 김탁환 작가가 책 마지막에 남긴 작가의 말이 아프게 읽히는 이유일 테다.

 

"삶과 죽음을 재수나 운에 맡겨선 안 된다. 그 전염병에 안 걸렸기 때문에, 그 배를 타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아직 살아 있다는 ‘행운’은 얼마나 허약하고 어리석은가. 게다가 도탄에 빠진 사람을 구하지 않고 오히려 배제하려 든다면, 그것은 공동체가 아니다.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나 ‘마션’의 감동은 공동체가 그 한 사람을 포기하지 않는, 경제적 손실이나 성공 가능성 따위로 바꿔치기하지 않는 원칙으로부터 온다."

 

이 소설의 분량은 600페이지가 넘는다.

양장본이어서 더욱 두껍게 느껴질 테지만, 지레 겁을 먹지 않아도 된다. 건조하면서도 속도감 있는 문체가 분량을 느끼지 못하게 만들 테니 말이다.

 

장편소설을 쓰는 일이 정말 가성비가 떨어지는 일이라고 생각해왔다. 들이는 품에 비해 돌아오는 게 너무 없고, 소설을 완성했더라도 출간으로 이어지는 일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1쇄를 모두 팔아도 돌아오는 인세가 월급 수준도 안 되니 이 얼마나 가성비가 좋지 않은 일인가.

장편소설의 효용성에 관해 최근 의문이 많이 들었는데, ‘살아야겠다’를 읽은 후 충실한 취재와 문제의식을 담은 소설은 훌륭한 저널리즘의 수단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몰랐던 많은 이야기를 알게 해준 이 소설에 정말 감사하다.

살아야겠다
살아야겠다
윤고은 소설집 『부루마불에 평양이 있다면』(문학동네)

작가가 풀어놓는 이야기는 기발하되 허황하지 않다. 작가가 2000년대 말에 발표한 단편소설 ‘1인용 식탁’은 ‘혼밥’ 문화를 예고했다. 장편소설 ‘밤의 여행자들’은 재난 현장을 여행하는 ‘다크 투어리즘’이란 단어가 유행하기도 전에 재난 여행 기획사를 다뤘다. 작가는 한발 앞서 미래를 엿보고 이를 무겁지 않게 풀어내는 데 탁월함을 보여왔다.


이 소설집의 표제작 ‘부루마불에 평양이 있다면’은 결혼을 앞둔 남녀가 평양 아파트 분양권을 청약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작가는 통일이 현실처럼 다가오고, 결혼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아이러니를 재기발랄한 필체로 엮어낸다.


오해는 아이러니와 더불어 이야기를 이끄는 힘이다. 주인공이 사망자의 영혼인 ‘양말들’에서 주인공 언니는 오해 때문에 빈소를 찾은 한 남자에게 주인공이 그를 좋아했다고 말한다. 주인공은 경악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감정을 재확인한다. ‘평범해진 처제’는 헤어진 남자와 재회한 주인공이 자신이 생각하는 자신과 타인이 생각하는 자신이 달랐음을 오해로 깨닫는 과정을 그린다. 


현재를 통찰하는 감각도 돋보인다. ‘오믈렛이 달리는 밤’에 등장하는 ‘로맨스 푸어’라는 표현은 결혼도 연애도 쉽지 않은 세태를 요약한다. ‘우리의 공진’에서 통근버스 메모장을 통해 모르는 여성과 소통하다가 가까워지기 전에 멈추는 주인공의 태도는 SNS상의 느슨한 인간관계를 연상케 한다. 소설 전반에 흐르는 정서가 불안하지만 따뜻하게 느껴진다는 점도 아이러니다.

부루마불에 평양이 있다면
부루마불에 평양이 있다면
단편선, 하박국, 김민규 저 『DIY 뮤직 가이드북』(소소북스)

음악을 하고 싶고 공연도 하고 싶고 앨범도 내보고 싶은데 어디서부터 접근해야 할지 막막하다면 이 책은 상당히 친절한 가이드가 돼 줄 것이다.

 

이 책은 뮤지션을 꿈꾸는 가상의 인물 ‘김인디’를 내세워 실무적으로 필요한 부분이 무엇인지를 친절하게 짚어준다. 이 책은 데모를 녹음하는 방법, 공연을 기획하는 방법, 음원을 제작하고 발표하는 방법, 마케팅과 프로모션을 하는 방법 등을 상세하면서도 쉽게 설명한다. 설명 중간에 뮤지션, 엔지니어, 제작자의 인터뷰가 들어가 있어 이해를 더욱 돕는다. 

 

내 경험상 이미 앨범 몇 장을 낸 프로 중에도 음악 외의 부분에 관해 잘 모르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이 때문에 레이블에 소속돼 있다가 나와서 완전히 혼자가 됐을 때 헤매는 뮤지션들을 꽤 봤다. 음악을 시작하려고 준비하는 예비 뮤지션뿐만 아니라 프로들도 일독할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다. 나도 4년 전 앨범을 낼 때 이런 책이 있었다면, 훨씬 도움이 됐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대중음악 쪽을 취재하는 기자들도 꼭 한 번 읽어볼 만한 책이다. 인상 깊게 봤던 웹툰인 ‘혼자를 기르는 법’을 그린 김정연 작가의 일러스트도 좋았다.

 

p.s. 책 후반부에 프로모션을 설명하는 부분에 내 이름이 갑자기 튀어나와서 좀 놀랐다. 책을 내기 전에 이 부분에 관해 내게 먼저 물어봤다면 자세한 설명을 더 보탰을 텐데 아쉽다.

DIY 뮤직 가이드북
DIY 뮤직 가이드북
마크 쿨란스키 『대구』(알에이치코리아)

사상, 종교, 경제, 인종 등의 갈등은 혁명과 전쟁 등 인류 역사의 중요한 고비마다 막대한 영향력을 끼쳤다. 거대 담론부터 떠오르는 인류의 역사에서 인간 혹은 인간에게서 나온 것 외의 존재가 역사의 물줄기를 바꿨다고 생각하긴 쉽지 않다. 그것도 우리의 밥상 위에 오르는 물고기가 인류의 역사와 지도에 변화를 줬다고 상상력을 발휘하긴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대구’의 저자 마크 쿨란스키는 그런 일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바이킹의 대이동 시기인 8세기부터 최근까지 1000여년 동안 대구(cod)를 둘러싸고 벌어진 역사를 연대기 형식으로 풀어낸다. 어부 집안 출신으로, 대구잡이 저인망 어선에 승선한 경험이 있는 저자는 자신의 경험을 십분 발휘해 대구의 역할ㆍ생태ㆍ요리법 등을 7년간 밀착 취재해 고증하고 집대성했다. 이를 통해 저자는 ‘세계의 역사와 지도가 대구 어장을 따라 변화해왔다’는 획기적 시각으로 새롭게 세계사를 펼쳐 보인다.


우선 저자는 대구의 생태적 특징부터 밝힌다. 대구는 몸집이 크고 개체 수가 많으며 맛도 담백해 많은 사람이 선호하는 어종이다. 또한 대구는 얕은 물을 좋아해 포획하기 쉽다. 이 때문에 대구는 오래전부터 상업적으로 유용한 생선이었다.


역사상 대구는 유럽인의 주요 식량이자 부를 쌓는 수단이었다. 바이킹은 먼 거리를 항해하는 동안 말린 대구를 주식으로 삼아 콜럼버스보다 훨씬 먼저 신대륙인 미국 북동부의 뉴잉글랜드에 도착했다. 바스크족은 북아메리카 해안의 숨겨둔 황금어장에서 대량의 대구를 낚아올려 유럽인들에게 팔았다. 1620년에 종교 박해를 피해 대서양을 건넌 영국의 신교도들은 대구가 풍부한 매사추세츠주 플리머스에 정착했다. 


18세기에 들어서 대구 무역의 중심지였던 뉴잉글랜드는 국제적인 상 업세력으로 부상했다. 이들은 소금에 절인 대구를 지중해 시장에 판매해 큰 이익을 챙겼으며, 저급한 물건을 서인도제도의 설탕 플랜테이션(식민지에서 값싸게 착취한 노동력으로 일군 산업형 농장)에 팔았다. 그곳의 노예들은 질 낮은 절인 대구로 하루 16시간의 중노동을 버텼다. 결과적으로 대구는 노예무역을 더욱 활성화시켰다.


민족 이동과 노예무역에 영향을 미친 대구는 국가 간 어획을 둘러싼 경쟁과 갈등도 부추겼다. 18세기 영국은 식민지인 뉴잉글랜드의 당밀과 차에 세금을 매기고 대구 무역을 제한하는 법을 만들었다. 식민지인들의 반발은 미국 독립혁명으로 이어졌다. 1782년 영국과 미국의 평화 협상에서 가장 해결하기 어려웠던 문제 역시 미국의 대구잡이 권리였다. 아이슬란드는 영국과 1958~1975년 대구 어업권을 둘러싸고 세 차례에 걸쳐 ‘대구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이 전쟁은 아이슬란드의 200마일 영해 요구가 받아들여지면서 끝났고, 국제 해양법상 경제수역이 200마일로 결정되는 계기를 가져왔다.


이 책의 또 다른 묘미는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 에스파냐 브라질 자메이카 등 다양한 나라의 대구 요리법 소개다. 이 책에 소개된 ‘입술을 제거한 대구머리 튀김’ ‘바스크식 대구혀 요리’ ‘대구부레 구이’ ‘소금절임 대구 크로켓’ 등 맛을 짐작하기 어려운 신기한 요리들은 역사 이야기 이상으로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어업의 현대화는 대구 개체 수의 가파른 감소를 불러왔다. 1950년대 들어서 저인망으로 물고기를 쓸어담아 즉시 냉동 처리하는 작업이 가능해지자 대구 어획량은 전 세계적으로 매년 늘어나 생선 가격을 주기적으로 폭락시켰다. 1992년 캐나다 정부는 대구의 상업적 멸종이 자명해지자 뉴펀들랜드 근해, 그랜드뱅크스, 세인트로렌스만 해저 어업을 무기한 금지했다. 이로써 3만여명의 어민이 일자리를 잃었다.


이 책은 지금 우리에게도 적지 않은 시사점을 준다. 과거 서민의 식탁 위에 흔하게 올랐던 명태는 현재 연근해에서 사라진 지 오래다. 일부 지역에서 열리는 명태 축제는 국산 명태가 없어 러시아산 수입 명태를 동원해야 했다. 그러나 명태의 새끼인 노가리는 여전히 주점에서 저렴한 마른안주로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명태는 대구목 대구과에 속하는 한류성 바닷물고기다. 대구를 둘러싼 흥미로운 이야기가 즐겁게만 다가오지 않는 이유다.

대구 - 세계의 역사와 지도를 바꾼 물고기의 일대기
대구 - 세계의 역사와 지도를 바꾼 물고기의 일대기
김숨 소설집 『국수』(창비)

이 소설집은 ‘가족’이라는 관계를 주목한다.

표제작인 ‘국수’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주인공이 역시 아이를 낳지 못해 쫓겨나 자신의 집에 재취로 들어온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계모에게 국수를 끓여주며 계모의 삶을 이해하고 화해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작가는 밀가루 반죽으로 한 그릇의 국수를 만드는 과정에서 변화하는 주인공의 심경을 서정적인 필치로 밀도 있게 그려내며 감동을 이끌어내고 있다.


“손님처럼 마루 한쪽에 옹송그리고 앉아 밀가루 반죽을 이겨대던 당신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손바닥 안의 손금이 다 닳아지지나 않을까 염려될 만큼 반족을 꾹꾹 눌러대던 꾹꾹…. 당신이 반죽에 몰래 섞어 넣어 그렇게 꾹 누르고 눌러야만 했던 것…. 그것은 무엇이었을까요.”(53쪽)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식도암으로 혀에 통증을 느끼는 계모를 위해 국수의 면발을 숟가락으로 툭툭 끊는 주인공의 모습은 깊은 여운을 남긴다.

또한 작가는 자칫 진부할 수 있는 ‘가족’이란 주제를 끊임없이 새롭게 바라보고 집요하게 파고들어 진실과 마주하려 노력한다.


‘옥천 가는 날’은 응급차에서 어머니의 주검을 어루만지며 과거를 회상하는 자매를, ‘아무도 돌아오지 않는 밤’은 함께 사는 시아버지와 식사하는 일을 끔찍하게 여기면서도 시아버지가 남편이 날려버린 재산을 돌려달라고 할까봐 불안해하는 며느리를, ‘막차’는 오랜 시간 함께 살아온 남편에 대한 경멸과 멸시를 숨기지 않는 아내를, ‘구덩이’는 하루가 멀다고 어머니와 이혼하라며 전화로 윽박지르는 아들을, ‘명당을 찾아서’는 명당이라는 허상을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소유하려는 부부를 등장시켜 서로에게 짐이 되기도 하고 도피처가 되기도 하는 가족 관계의 심연을 들춰낸다.


작가는 가족의 의미를 진중하게 천착하면서도 현대인이 앓고 있는 분열적 심리를 성찰함으로써 깊은 울림을 선사한다.

국수
국수
금정연 일기 『매일 쓸 것, 뭐라도 쓸 것』(북트리거)

자신의 일기를 소재로 쓴 산문집일 줄 알고 펼쳤는데, 정말로 일기 그 자체였다.

2021년 겨울부터 2023년 가을까지 쓴 일기를 엮었는데, 여기에 국내외 여러 작가가 쓴 일기를 짧게 발췌해 절묘하게 곁들이는 구성이 신선했다.

일기 곳곳에 스며들어 있는 다양한 작품의 흔적에서 작가의 어마어마한 독서량이 느껴져 혀를 내두르게 한다.

하지만 나는 그런 일기보다는 작가가 딸에 관해 쓴 일기가 훨씬 좋았다.

문학, 음악, 오디오 등을 다룬 일기보다 훨씬 솔직하고 따뜻해서 마음에 와닿았다.


나는 일기를 쓰지 않는다.

대신 오랫동안 디지털카메라로 찍어온 사진이 일기 역할을 하고 있다.

내가 처음 디카를 구입했던 2002년 10월부터 지금까지 촬영한 모든 사진이 연도별, 월별, 일자별로 분류돼 외장하드에 저장돼 있다.

폴더에는 담긴 사진이 어떤 사진인지 관한 짧은 제목이 적혀 있다.

'준면과 횟집', '영산포 홍어' 등등.

제목과 사진을 보면 까맣게 잊고 살았던 그날 일과 기분이 꽤 많이 복구된다.

이 일기를 읽은 후, 한가해지는 날이 오면 지금까지 찍은 사진을 활용한 '사진 일기' 같은 책을 만들면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생각만이다.

지금 하는 일도 벅찬데 무슨.

매일 쓸 것, 뭐라도 쓸 것 - 마치 세상이 나를 좋아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매일 쓸 것, 뭐라도 쓸 것 - 마치 세상이 나를 좋아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서정주 시집 『귀촉도』(은행나무)

시를 잘 모르는 사람의 입까지 벌어지게 하는 시를 쓴다는 건 도대체 무슨 재능일까.

힙합에 전혀 감흥을 못 느꼈던 내가 이센스의 첫 정규앨범 [The Anecdote]를 듣고 뻑갔던 것처럼, 서정주의 시집은 읽을 때마다 이런 게 '악마의 재능'이구나 싶다.


우리들의 사랑을 위하여서는/이별이, 이별이 있어야 하네.(견우의 노래)


이, 우물물같이 고이는 푸름 속에/다수굿이 젖어 있는 붉고 흰 목화꽃은,/누님/누님이 피우셨지요?(목화)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푸르른 날)


뭐라 하느냐/너무 앞에서/아- 미치게/짙푸른 하늘.(소곡)

귀촉도 - 서정주 시집
귀촉도 - 서정주 시집
이서수 장편소설 『마은의 가게』(문학과지성사)

이런저런 자리에서 여성이 일상에서 겪는 위협에 관해 들을 때가 있다.

그때마다 적잖이 놀라곤 한다.

나는 한 번도 겪어보지 않았고 겪을 일도 없는 위협인데, 한국의 치안이 타국보다 훌륭하다는 통계만 보고 무시하기에는 사례가 구체적이고 들으면 빡친다.

남자라면 시비 걸리는 상황이 올 때 맞다이까자는 마인드로 달려드는 사람이 많겠지만, 여자가 그렇게 행동하긴 쉽지 않다.

특히 상대방이 자신보다 완력이 센 남자라면.


기자 시절에 경제, 산업, 노동 분야를 취재하고 다양한 사람을 만나면서 직간접적으로 자영업자의 현실에 관해 많이 주워들었다.

이미 많은 사람이 알고 있듯이, 자영업자 상당수는 마땅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어쩔 수 없이 개업한다.

인생은 그렇게 공평하지 않다.

아무리 달려도 평생 비포장도로만 뛰는 사람도 있고, 죽어라 달렸는데 그 끝이 낭떠러지인 사람도 있다.


일자리가 없는 건 아니다.

지금도 전국 곳곳의 공단은 인력난으로 시달리고 있다.

문제는 그 일로 벌어들일 수 있는 돈이 많지 않고, 제대로 경력을 쌓을 수 없다는 거다.

그런 일이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은 무책임하다.

그 돈을 받으면 살아는 진다.

그런데 여가 활동, 연애, 자기 계발 등 많은 걸 포기해야 살아진다.

더럽고 치사해서 자영업에 뛰어드는 것이다.


다수의 손님은 평범한데, 미꾸라지 한 마리가 물을 흐리듯 소수의 진상이 문제다.

자영업자는 돈을 지불하면 내가 왕이라는 마인드를 탑재한 진상을 절대 피할 수가 없다. 

그리고 진상은 대체로 집요하다.


만약 철저한 준비 없이 자영업에 뛰어든 여성이 진상 손님을 만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궁금하다면 이 작품을 읽으면 된다.

처절한 환장의 콜라보다.

읽는 내내 밤고구마 몇 개를 연속으로 물 없이 삼키는 기분이 들 것이다.


작가는 조금 희망적인 톤으로 소설을 마무리하는데, 그 마무리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작가의 말을 보니 원래 결말은 꿈도 희망도 없었나 보다.

편집 과정에서 바뀐 모양이다.

작가가 처음에 쓴 대로 마무리를 지었으면 더 일관성 있는 아포칼립스 같은 작품이 나오지 않았을까 싶다.


마은의 가게
마은의 가게
우다영 소설집 『그러나 누군가는 더 검은 밤을 원한다』(문학과지성사)

작가의 전작인 소설집 <앨리스 앨리스 하고 부르면>을 꽤 충격적으로 읽었다.

수록 작품 한 편 한 편을 읽을 때마다 무언가에 홀려 다른 세계를 엿보고 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결은 조금 다르지만 테드 창이 덜 하드하게 따뜻한 SF를 쓰면 이런 느낌이겠다 싶었다. 

'신비롭다' 혹은 '환상적이다'라는 수식어가 정말 잘 어울리는 단편들이었다.

특히 신비로운 분위기를 연출하는 필력은 한국 작가 중에선 독보적이지 않을까 싶다.


이 소설집을 사다 놓은 지 꽤 오래됐는데, 소설집과 장편소설 작업을 하느라 뒤늦게 펼쳤다.

내 방을 오갈 때마다 이상하게 자주 눈에 띄어 밀린 숙제를 하듯 읽었다.

시공간과 생의 한계를 초월해 펼쳐내는 환상적인 이야기들...

작가는 이를 통해 우리가 서로를 칼로 무를 베듯 구별할 수 없는 존재라고 역설한다.

어떤 선택으로 어떤 관계를 맺었든 그게 바로 지금 우리라면서.

그런 점에서 이 소설집은 '우주적'이다.

경험한 만큼 밖에 쓰지 못하는 나로서는 작가의 상상력이 어디서 비롯되는 건지 경이로웠다.

뭐라고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좋았다.


전작보다 더 SF스러웠는데, 다섯 단편이 미묘하게 연결된 느낌을 줘서 마치 연작소설을 읽는 듯한 기분도 들었다.

정규앨범을 들을 때 첫 트랙부터 마지막 트랙까지 차례대로 들어야 맛이 나듯이, 이 소설집 또한 수록 작품을 순서대로 읽어야 맛이 난다.


그러나 누군가는 더 검은 밤을 원한다
그러나 누군가는 더 검은 밤을 원한다
앤솔러지 『몸스터 (몸은 몬스터)』(스피리투스)

2001년 초겨울, 나는 대학교에서 논술시험을 치렀다.

오른손에 깁스를 한 채 왼손으로 펜을 쥐고.

오른손잡이인 나는 왼손으로 삐뚤빼뚤 천천히 글씨를 쓰며 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내 몸에 붙어있는 내 팔이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게 이렇게 답답한 일인 줄 몰랐다.


주어진 시험지를 반도 채우지 못하고 나오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내 몸도 마음대로 못 하는데, 다른 사람이 내 마음대로 움직여주길 바라는 건 과한 욕심이 아닐까?

오래전 일이지만 지금도 생생할 정도로 인상적이어서, 나는 누군가에게 별 기대를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이 앤솔로지를 읽으며 오래전 경험을 떠올렸다.

여기에 수록된 다섯 작품에는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 몸을 고민하는 청소년들이 있다.

자기가 원하는 몸을 만들고 싶어서 미친 듯이 다이어트를 하고, 헬스장에서 쐬질을 한다.

그런데 어디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는가.

먹다가 토하고, 공부하려 앉으면 졸려 죽겠고...

나이 먹어 돌이켜 보면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오는 추억이지만, 그 시절에는 그 어떤 고민보다도 무거웠던 고민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 몸에 관한 고민 아니던가.


나도 그랬었다.

키는 작은데 머리는 크고 몸은 말라서 츄파춥스 같았던 외모가 싫었다.

무협지에 미쳐있던 시절이어서 내 안에도 무언가 특별한 능력이 있을 줄 알고 지식호흡 흉내를 내며 내공을 쌓으려고 해봤는데 숨만 막히더라.

차라리 빨리 나이가 들면 나을 줄 알았는데, 키는 그대로이고 몸에 살만 덕지덕지 붙어버렸다.


그래도 어찌저찌 잘 살아간다.

그런 몸도 그런대로 잘 사용하면 재미있는 일이 생기더라.

소설 속 청소년들도 나이 들면 그렇게 되겠지.

너무 걱정하지 마시라.


몸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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