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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라지면 암흑이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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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설로지 산문집 『작가의 루틴』(앤드)

이 책에는 김중혁, 박솔뫼, 범유진, 조예은, 조해진, 천선란, 최진영 등 현재 활발하게 소설을 창작하는 작가 7명이 자신만의 글쓰기 습관을 풀어낸 산문이 담겨 있다.

직간접적으로 여러 독자를 만나며 깨달은 사실인데, 독자는 작가의 작품만큼이나 작가의 사생활에 관심이 많다.

출판사가 그런 독자의 수요를 간파하고 기획한 책이 아닌가 싶다.


원고지를 집어 던지거나 줄담배를 피우며 얼굴을 구기는 등의 극적인 모습은 없다.

꾸준히 하루를 1초 영상으로 기록하거나(김중혁), 책상 앞에 앉아 서로 다른 종류의 아로마 오일을 바르며 잠을 쫓거나(박솔뫼), 건강 유지를 위해 이런저런 운동을 하거나(범유진), 여행을 떠나거나(조예은), 고양이를 돌보거나(조해진), 카페나 작업실로 가기 전에 5000보 이상 걷거나(천선란), 청소를 마친 후 세수하고 머리를 감거나(최진영).

신해철의 노래 '일상으로의 초대'의 가사를 빌어 말하자면 "산책을 하고 차를 마시고 책을 보고 생각에 잠기는" 모습이 대부분이다.

고요하고 또 고요하다.


내가 장담하는데, 소설가의 일상을 쫓아다니며 영상을 촬영하면 정말 재미없는 모습만 담길 거다.

당장 내 모습만 봐도 그렇다.

누군가가 소설을 쓰는 내 모습을 몰래 지켜본다면, 30분도 지나지 않아 하품을 쏟아낼 테다.

하루 종일 노트북에 앉아 뭔가 끼적이다가 졸리면 자고 배고프면 먹는 게 전부이니까.

내가 아는 한 소설가의 일상은 큰 틀에서 대부분 비슷하다.

나는 어느날 갑자기 영감이 왔느니 어쩌니 하는 소설가를 본 일이 없다.

소설을 쓰는 일은 끝이 보이지 않는 지루한 노동에 가깝다. 

소설가를 주인공으로 다룬 영화와 드라마가 보이지 않는 데엔 다 이유가 있다.

하지만 작품 하나를 완성하는 가장 큰 힘은 결국 그런 지루한 일상을 버티는 데에서 나온다.

넥스트의 노래 '나는 남들과 다르다'의 가사를 빌어 말하자면 "현재도 그만큼 중요"하고 "순간과 순간이 모이는 것이 삶"이니 말이다.


소설가 지망생이 뭔가 창작의 아이디어를 얻고자 읽을 만한 산문집은 아니다.

다만 소설가라는 직업인의 삶은 어떤지 슬쩍 엿보기에는 괜찮은 책이다.

작가의 루틴 : 소설 쓰는 하루
작가의 루틴 : 소설 쓰는 하루
장강명 산문집 『아무튼 현수동』(위고)

이 산문집에 등장하는 현수동에는 가상의 공간과 현실에 존재하는 공간이 뒤섞여있다.

작가는 광흥창 일대라는 도화지 위에 붓을 들이댄다.

어떤 공간은 그대로 도화지에 남고, 어떤 공간은 새롭게 그려진다.

그 과정에서 작가는 밥 로스가 그림을 그리며 다양한 썰을 풀듯이 현수동에 살아온 이름 없는 인물들의 삶, 그에 얽힌 다양한 전설(혹은 전설을 향한 태클)과 사건을 따라가며 독자에게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묻는다.

그렇게 작가는 자신이 살고 싶은 동네인 현수동이라는 동네를 만들어 나간다.

현수동은 어딘가에 있을 것 같은데 없는, 사랑스러운 공간이다.


내겐 어떤 동네가 현수동을 닮은 공간일까.

이 산문집의 독자라면 자연스럽게 그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나는 대전에서 태어났다.

이후 나는 대학에 진학할 때까지 20년 넘게 대전에서 살았고, 대전에서 공익근무요원으로 복무했으며, 대전에서 첫 직장을 잡아 2년 남짓 다녔다.

내가 대전에서 보내는 세월을 합치면 26년가량이다. 

내 나이가 현재 만 41살이므로, 인생의 3분의 2는 대전 사람으로 살았다고 할 수 있다.

그 정도면 대전 토박이라고 불러도 무방하겠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대전을 향한 애착은 별로 없다.

오히려 내게 고향처럼 뭔가 애틋한 기분을 느끼게 하는 공간은 고작 4년을 살았던 서울 용산구 후암동이다.

후암동은 서울의 중심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고즈넉했고, 오래된 동네라는 인상을 풍기는 공간이었다.좁은 골목을 통해 동네가 거미줄처럼 이어졌고, 누가 봐도 동네에 오래 살아온 사람들이 그 골목을 오갔다.

계절마다 골목에 늘어선 화분에서 다양한 꽃이 피어났고, 특색 있는 가게가 발길을 붙잡았다.

공교롭게도 두 번째로 다녔던 직장이 후암동으로 사옥을 옮겨, 나는 걸어서 3분 만에 출퇴근하는 호사를 누렸다.

나는 후암동에 살던 시절에 준면 씨를 만나 결혼했고, 신혼집도 후암동에 잡았다.

하루 종일 후암동에서 지내도 심심하지 않았다.

나는 그런 후암동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언젠가 돈을 많이 벌어 인서울할 기회가 오면 꼭 다시 살아보고 싶은 그리운 공간이다.


나는 실제 후암동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내 머릿속에 이상적으로 편집된 후암동을 사랑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2년 전 여름에 입주작가로  프린스호텔에 머물 때 후암동을 찾은 일이 있는데, 내 기억에 미묘하게 다른 공간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후암동을 소재로 그런 내 생각과 경험을 정리해봐야겠다는 생각을 막연하게 했었다.

그런데 이 산문집이 선수를 쳐서 김이 샜다.

뭐든 먼저 찜하는 놈이 임자다.

아깝다.


아무튼, 현수동 - 내가 살고 싶은 동네를 상상하고, 빠져들고, 마침내 사랑한다
아무튼, 현수동 - 내가 살고 싶은 동네를 상상하고, 빠져들고, 마침내 사랑한다
최정나 장편소설 『월』(문학동네)

최근 몇 년 사이에 읽은 한국 문학 소설집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을 내게 묻는다면, 최정나 작가의 <말 좀 끊지 말아 줄래?>를 첫손으로 꼽겠다.

최 작가의 단편은 마치 소란스러운 술집 옆 테이블에서 들려오는 쓸데없지만 흥미로운 대화 같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시끄러웠고,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아듣기 어려웠는데, 이상하게 끌려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는.

단편보다 장편을 지나치게 편애하는 내게 <말 좀 끊지 말아 줄래?>는 깊은 인상을 준 몇 안 되는 소설집이었다.

신작이 나오길 기다린 작가인데, 반갑게도 소설집이 아닌 장편소설로 돌아왔다.


작가 특유의 맛깔나는 수다가 여전한데, 이야기를 장편으로 확장하니 수다가 매력적인 장광설로 변신한다.

주인공 없이 다양한 인물들이 느닷없이 끼어들어 저마다 자기 이야기를 쏟아내는데, 계통 없이 떠돌던 이야기들이 끊어질 듯 이어지다가 뒤틀린 시공간 속에서 하나로 뭉쳐 거대한 구조물을 형성한다.

마지막에는 마치 거대한 거미줄을 마주한 듯 압도당했다. 


이 작품은 기술의 첨단에 있는 '미디어 월'을 기술과 대척점에 놓인 환상을 부각하는 요소로 활용한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미디어 월'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기술로 재현해 영상으로 보여주지만, 영상으로 재현한 상상은 결코 현실로 넘어올 수 없다.

아무리 현실보다 더 현실 같아 보일지라도 말이다.

코엑스 SM타운 외벽에 설치된 대형 LED 스크린 속 파도가 아무리 실감 나도 거리를 적실 수 없듯이.

마찬가지로 현실 또한 '미디어 월' 내부로 넘어갈 수 없다.

SF를 닮은 설정이지만, SF라고 부를 순 없다.

현실을 다루고 있지만, 리얼리즘 소설이라고도 부르기 곤란하다.


작가는 현실과 상상을 뒤섞어 구분할 수 없도록 넘나들다가, 마지막에 이르러 '미디어 월'의 너머에 존재하는 건 벽뿐이라는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독자에게 묻는다.

당신이 알고 있는 자신이 정말 자신이 맞는지 확신할 수 있느냐고.

책을 덮을 때 무언가에 깊게 홀렸다가 깨어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대단히 스타일리시한 장편소설이다.

월 - wall, 최정나 장편소설
월 - wall, 최정나 장편소설
류근 산문집 『진지하면 반칙이다』(해냄)

제목과 달리 진지한 내용이 많다.

힙해 보이고 싶은 아재의 향기를 물씬 풍긴다.

좋아할 사람은 무척 좋아하겠지만, 내 취향은 아니었다.

호불호가 갈릴 표현이 많이 나온다.

다만 곳곳에 등장하는 어머니에 관한 추억은 짠했다.

예술가의 쓸쓸한 장례식 풍경에 관한 이야기는 내 미래를 미리 엿본 것 같아 섬뜩했고.

진지하면 반칙이다 - 나보다 더 외로운 나에게
진지하면 반칙이다 - 나보다 더 외로운 나에게
앤설로지 『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게요』(자이언트북스)

앤솔로지를 읽고 만족한 기억이 별로 없다.

불만족의 가장 큰 이유는 고르지 못한 수록 작품의 질 때문이다.

수록 작품 모두가 마음에 들 순 없겠지만, 가끔 함정 같은 작품이 튀어나오면 읽다가 김이 샌다.

이미 밀리의 서재를 통해 읽은 김초엽 작가의 '수브다니의 여름 휴가', 천선란 작가의 '뼈의 기록' 정도만 읽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머지 작품은 기발한 소재에 비해 지나치게 가벼웠다.

다양성을 강조하는 것도 좋지만, 전체적으로 작품의 톤과 리듬을 맞췄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다.

그래도 고민 없이 스낵처럼 즐기기엔 부담 없는 앤솔로지다.

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게요
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게요
김홍 장편소설 『엉엉』(민음사)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을 흘리는 남자가 이 작품의 주인공이다.

문제는 주인공이 무지개 연못에 사는 개구리 소년도 아닌데, 울기만 하면 전국에 폭우가 내리는 희한한 일이 벌어진다는 점이다.

여기에 금속 내골격과 액체 금속 외피가 별개의 개체로 움직이는 터미네이터 Rev-9처럼 주인공의 본체는 따로 존재하고, 백종원으로 추정되는 이는 홍길동처럼 전국 곳곳에서 동시에 모습을 드러내다가 대통령에 당선되며, 고양이는 말을 할 줄 아는 쿠팡맨이다.

얌체공이 인조 대리석 바닥에서 튀듯, 예상하기 어려운 방향으로 뻗어나가는 이야기를 쫓아가는 재미가 쏠쏠하다.


가끔 뭔가 잃어버린 것 같긴 한데 무엇을 잃어버린지 몰라 혼란스럽고 슬퍼질 때가 있다.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아가는 자신이 껍데기 같고.

그렇다면 진짜 나는 어디에 있는 걸까.

문득 그런 답 없는 센치한 질문을 머릿속에 떠올리는 날이 있다.

운다고 현실이 달라지진 않지만, 그래도 엉엉 울면 기분은 좀 개운해지지 않던가.

우는데 무슨 거창한 이유가 필요한가.

읽다가 중간에 "이게 뭔 시추에이션?"하며 갸우뚱하는 부분도 있겠지만 그냥 넘어가자.

어렵게 생각하면 한없이 어렵고, 쉽게 생각하면 한없이 쉽게 느껴지는 작품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러하듯, 나 또한 내게 없는 능력을 갖춘 사람을 부러워 해왔다.

똑똑하고 공부를 잘하는 녀석, 잘 생기고 키가 커서 주변에 여자가 끊이지 않는 녀석, 돈 많은 녀석, 집안 좋은 녀석, 일 잘하는 녀석, 기가 막히게 운 좋은 녀석...

세상에 왜 이렇게 부러운 녀석이 많지?


소설가로 사는 지금의 내가 가장 부러워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은 성석제, 박상처럼 유머와 페이소스를 잘 표현하는 작가다.

미문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는데, 웃픈 문장은 이상하게 볼 때마다 부럽더라.

이건 따라 하고 싶다고 해서 따라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여러 차례 웃픈 소설을 쓰려고 시도했는데 모두 실패했다.

내가 자전거를 다룬 장편소설 <되면 한다>(가제) 집필을 중단한 이유 중 하나도 그 때문이다.


작년에 읽었던 작가의 전작 <우리가 당신을 찾아갈 것이다>는 내가 한 번쯤은 구사해보고 싶었던 문장을 가득 담은 소설집이었다.

이 장편소설 역시 낯설고 흥미로운 작품이었다.

엉엉
엉엉
정지향 소설집 『토요일의 특별활동』(문학동네)

사놓고 깜빡한 채 읽지 않았던 책을 꺼내 읽었다.

이 소설집에 실린 단편의 주인공은 대부분 예술을 전공한 10대 후반부터 20대 초중반에 걸쳐 있는 여성이고, 위태로워 보이는 연애 이야기가 서사의 주를 이룬다.

20세기 말에 남학교에서 학창 시절을 보내고 예술과 먼 전공(법학, 컴퓨터공학)을 한 40대 중년 남자인 나는, 멋쩍게 낯선 세계를 몰래 엿본 기분이 들었다.


그 나이대는 성별과 상관 없이 인간적인 호감과 이성으로서의 끌림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지 않던가.

이 소설집은 그 시절에는 몰랐지만, 세월이 흐른 뒤에야 깨닫는 감정을 섬세하게 다룬다.

특히 플러팅과 가스라이팅에 관한 묘사가 상당히 적나라하다.

'베이비 그루피' 같은 단편이 그랬다.

몇 년 동안 음악기자로 일하며 홍대 앞을 자주 드나들었고, 클럽이나 술자리에서 팬과 사귀는 아티스트를 꽤 많이 목격했다. 

갑과 을이 명확한(갑은 늘 아티스트다) 그리 아름답진 않은 관계가 많았는데, 내가 봤던 풍경이 소설에 실감 나게 묘사돼 있어 꽤 놀랐다.


아무래도 나는 학생 신분인 주인공이 등장하는 전반부보다는 사회에서 밥벌이하는 청년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후반부를 더 공감하며 읽었다.

발랄한 느낌을 주는 표지만 보고 달려들면 꽤 무거운 내용에 당황할지도 모르겠다.

토요일의 특별활동
토요일의 특별활동
니콜로 마키아벨리 『군주론』(현대지성, 김운찬 옮김)

학창 시절에 무턱대고 읽다가 버티지 못하고 포기한 고전이다.

고전을 공부한다는 마음으로 오디오북으로 며칠 동안 들었는데 와...

이렇게 좋은 책이었다니.


성우가 존댓말로 내용을 읽어주고 각 챕터마다 중세풍의 BGM이 울리니, 마치 내가 당대 이탈리아의 메디치가 귀족이 돼 신하의 조언을 듣는 듯한 기분이 들더라.

만약 이 책을 종이책으로 읽었다면 이런 감흥까진 없었을 것 같다.

내용이 대단히 현대적이어서 500년 전 책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이 책의 내용을 참고해 오늘날 정치에 그대로 적용해도 전혀 위화감이 없지 않을까 싶었다.


이 책이 유명한 이유는 필요에 따라 잔혹하고 비열한 수단과 방법을 사용해도 된다는 파격적인 주장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수단과 방법은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정적을 대상으로만 써야 하며, 그 결과는 반드시 국민의 행복과 안전을 보장해야 하고, 절대 지속해 행사해선 안 된다는 점을 학창 시절엔 배우지 못했다.

놀랍게도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국민의 지지를 받으면서 권력을 유지하는 방법에 관한 조언으로 채워져 있었다.

그 조언이 이 책의 핵심인데 말이다.

이걸 못해서 모두의 존경을 받는 정부와 대통령이 지금까지 없었구나.

보국안민이 바로 이런 거구나 싶더라.

이 책을 읽지도 않았으면서 오랫동안 했던 오해를 이제야 풀었다.


제17장 '잔인함과 자비로움에 대하여 그리고 사랑받는 것은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것보다 나은가, 아니면 그 반대인가'는 몇 번이나 돌려 들었을 정도로 압권이었다.

이왕이면 사랑을 받는 게 좋은데, 그럴 수 없다면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게 안전하고, 다만 증오의 대상이 되는 건 피해야 한다는 가르침.

평생 머릿속에 남을 가르침이었다.


군주론 (무삭제 완역본)
군주론 (무삭제 완역본)
김유담 장편소설 『커튼콜은 사양할게요』(창비)

취업 준비 과정이란 게 언제 어디서 내릴지 모른 채 2호선 순환열차를 타고 뱅뱅 도는 일과 비슷하다.

괜찮은 일자리는 적고, 그 일자리를 원하는 사람은 많으니, 전공과 적성을 살리는 취업은 언감생심이다.

꿈과 이상만 좇다간 밥을 굶기 십상이니, 거지꼴을 면하려면 적당히 현실과 타협해야 한다.

여기서 비극이 시작된다.

회사라는 조직은 직원에게서 월급 이상을 빼먹으려고 달려드는데, 직원은 일에서 밥벌이 외엔 의미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니 말이다.

취업 빙하기인데도 매년 신입사원의 1년 내 퇴사율이 점점 높아지는 이유 중 하나가 여기에 있다.


10여 년 동안 몇몇 직장을 경험하고 깨달은 사실은, 직종과 규모에 상관없이 직원이라는 존재는 얼마든지 대체할 수 있는 부품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과연 대한민국에 직원의 개성과 자율을 반기는 조직이 있는지 의문이다.

대체할 수 없는 직원의 존재는 조직의 갑이라는 지위를 흔들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까지 몸통을 흔드는 꼬리를 곱게 바라보는 조직을 본 일이 없다.


그래.

조직이 갑이라는 걸 인정한다고 치자.

그냥 일만 시키면 마음이 편할 텐데, 일 외에도 신경을 써야 할 일이 지뢰처럼 튀어나온다.

누군가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한 쓸데없는 업무 프로세스가 많고, 그런 예쁜 쓰레기를 처리하기 위해 직원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연기를 해야 한다.

아침 일찍 일어나 콩나물시루 같은 버스와 지하철에 몸을 욱여 넣고 출근해 피곤한데, 진상들에 머리를 조아리고 온갖 갑질과 꼰대질을 참아내야 하고, 성과를 내놓으라는 압박은 기본 옵션이다.

직장이라는 조직은 화려한 조명도, 환호하는 관객도 없는 어둡고 살벌한 무대다.


“등장하자마자 퇴장하고 싶은 무대에 선 기분이다."

이 작품을 읽으며 가장 공감한 문장으로, 주인공이 직장에 출근하며 느낀 심정을 담고 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연극배우가 꿈이었지만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출판사 직원으로 취직한 20대 여성이다.

작가는 대학 시절에 연극에 매달렸던 과거의 주인공과 회사원인 현재의 주인공을 번갈아 보여주며,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는 청춘의 고단한 일상을 핍진하게 그려낸다.

"혹시 CCTV로 우리 회사를 엿본 거 아냐?", "내 뒤를 집요하게 쫓아다니며 기록한 거 아냐?"라는 반응을 보이는 독자가 적지 않을 듯하다.

주인공의 선택은 자신을 회사라는 무대에 오른 배우라고 여기며 버티는 거다.

이렇게 말을 늘어놓으니 우울한 작품 같지만, 작품의 전체적인 톤은 내용과 반대로 따뜻하고 유쾌하다.

원고량이 상당하지만 가독성이 훌륭해 페이지가 술술 넘어가는 재미있는 작품이다.


지난날을 돌이켜 보면 예측이나 희망대로 이뤄진 게 아무 것도 없었다.

어린 시절 장래희망은 문방구 주인이었고 사춘기 땐 로커를 꿈꿨는데,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졸업 후 전공과 상관없는 기자로 일했고, 급기야 마흔에 퇴사해 소설을 쓰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학창 시절에 적성 검사를 하면 늘 기술자나 농부가 나왔는데, 단 한 번도 검사 결과와 어울리는 밥벌이를 해보진 못했다.

지금까지 결과만 보자면 나는 장래 희망도 전공도 적성도 전혀 못 살린 채 여기까지 온 셈이다.

그래서 그런 걸까.

어느 곳에 속해 있든 내 머릿속엔 늘 딴생각만 가득했다.

공부에 집중해야 할 학창 시절엔 기타를 만졌고, 전공 공부를 해야 할 시간에 다른 전공 과목을 들었고, 기자로 일하던 시절엔 다른 밥벌이는 없나 늘 한눈을 팔았고, 소설을 쓰는 요즘에는 콘텐츠 사업으로 돈을 벌 방법이 없나 여기저기 기웃거리고 있다.

아무튼 지금 나는 삶이 지금과 달라지기를 기다리며 여기저기 영역 표시를 하는 중이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사무엘 베케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가 의미심장하다.

희곡의 두 주인공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고도'라는 이름의 사람을 기다리지만, 그들은 '고도'가 누구이고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른다. 

베케트 자신도 '고도'가 뭔지 모른다고 말했다지?

그런데도 노벨문학상을 탔다.


삶이란 무언가를 간절하게 기다리는데, 그 무언가의 정체도 모른 채 지나쳐버리는 일상의 연속이 아닐까.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을 최선을 다해 살아내는 게 최선이 아닐까.

'고도'를 찾지 못하고 삶을 마쳐도, 지나간 시간을 후회하지 않도록 말이다.

이 작품의 마지막 장을 넘기며 그런 생각을 해봤다.

커튼콜은 사양할게요
커튼콜은 사양할게요
이경혜 산문집 『어느 날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보리)

나는 국민학교를 졸업한 이후로 일기를 쓴 일이 (거의) 없다.

내가 일기 쓰기에 흥미를 잃은 이유는 일기가 숙제였기 때문이다.

쓰지 않으면 교사에게 혼나고, 썼어도 교사 마음에 들지 않으면 혼나는 숙제.

돌이켜 보면 그 시절에 내가 겪었던 교사 중엔 인격 파탄자라고 불러도 모자라지 않을 사람이 꽤 많았다.

나는 오늘날 교권이 떨어진 이유 중 하나가 학창 시절에 개차반인 교사를 경험한 학부모들이 많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처음으로 공부에 재미를 느낀 때는 도서관에서 혼자 3수를 준비할 때였다.

학교는 희한하게 재미있는 걸 재미없게 만드는 재주를 가진 공간이었다.


그랬던 내가 일기의 가치를 느끼게 된 계기는 돌아가신 어머니의 일기장 때문이다.

16년 전 나는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일기장을 발견했다.

당시 유품 대부분을 태우거나 버렸는데, 일기장만큼은 차마 버릴 수 없었다.

어머니가 남긴 생생한 흔적이 담겨 있을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차마 읽을 용기가 나지 않아 일기장을 오랜 세월 책꽂이에 꽂아둔 채 외면했다.

어머니를 잃은 슬픔 속에서 겨우 빠져나오고 있는데, 그걸 보면 다시 슬픔 속으로 빠져들 것 같아 겁이 났기 때문이다.


제 나이 마흔이 되어서야 겨우 일기장을 펼칠 용기가 났다.

그 속에는 내가 아는 ‘어머니’가 아니라 낯선 ‘여자’가 있었다.

나는 일기장을 통해 19살부터 45살까지의 어머니를 만났다.

이제 돌아가신 어머니의 나이와 가까워진 나는 한 ‘여자’로서의 어머니와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나는 장편소설 <나보다 어렸던 엄마에게>를 썼다.

만약 어머니의 일기장을 버렸다면, 그 일기장을 읽지 않았다면, 나는 돌아가신 어머니를 죽을 때까지 오해하며 살았을 테다.


잡설이 길었는데, 이 산문집에 관한 감상으로는 이런 개인적인 이야기가 더 어울리지 않을까 싶었다.

작가는 13살부터 지금까지 50년 동안 150권이 넘는 일기장에 꾸준히 일기를 써 왔다.

이 산문집은 작가가 평생 써 온 일기에 관한 이야기다.

작가의 일기도 일부 발췌돼 담겨 있지만, 주된 내용은 작가가 경험한 일기 쓰기의 즐거움이다.

일기 속에서 작가는 온전히 주인공이다.

작가에게 일기장은 펼치면 언제든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는 타임머신이고, 어떤 힘든 상황에서도 나를 나로 살 수 있게 지탱해주는 든든한 친구다.

이 산문집을 읽는 내내 어머니의 일기장이 페이지에 겹쳐 보였다.

어머니에게도 일기장은 그런 존재였던 거다.


완독 후에 나도 일기를 꽤 오래 써왔음을 깨닫게 됐다.

작가에 따르면 아무때나 생각나는 대로 기록하면 그게 일기다.

그렇다면 내가 블로그, 페이스북, 인스타그램에 오랫동안 끼적여 온 많은 글도 일기인 셈이다.

끼적인 날짜와 시간까지 정확하게 기록돼 있으니 이보다 확실한 일기가 없다.

그곳에 내가 끼적인 글을 시간순으로 살펴보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꽤 많이 변했음을 알았다.


쓰는 데 의무감이나 부담을 가지지 말라고.

매일 써도, 몇 달에 한 번 써도 상관없으니 진실하게만 쓰라고.

진실하게 쓰는 것이 일기의 전부라고.

따뜻하고 감동적인 산문집이었다.

정말 잘 읽었다.


어느 날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 나와 오롯이 만나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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