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지런히 읽고 흔적을 남깁니다
글로 남기는 나만의 기록장읽는 내내 내가 주인공이 된 듯 숨이 막혔다.
반지하부터 창 없는 고시원을 전전하던 시절, 홀로 부동산 이곳저곳을 돌며 전세를 알아보던 시절, 전세 보증금 반환을 놓고 집주인과 싸웠던 사건, 하자를 놓고 부동산 중개인과 시비를 벌였던 일 등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이 작품은 대한민국 사회에서 가장 첨예한 이슈인 부동산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룬 장편소설이다.
이 작품은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며 아르바이트를 하는 20대 후반 여성을 중심으로 내 집 마련을 하지 못한 채 IMF 외환위기와 2008년 금융위기를 거치며 자식에게 가난을 물려준 베이비부머 세대 부모, 열심히 일하며 저축하면 좋은 날이 온다는 부모의 말을 믿은 청년 세대가 겪는 답답한 현실을 정밀하게 들여다본다.
내가 최근에 읽은 소설 중에서 부동산 문제를 이렇게 실감 나게 다룬 소설은 처음이다.
주인공의 소망은 대단한 게 아니다. 안정된 직장에서 때 되면 월급을 받고 싶고, 추울 땐 따뜻한 곳에서 더울 땐 시원한 곳에서 지내고 싶고, 친구들과 만날 때 지갑을 여는 일이 두렵지 않았으면 좋겠고, 가끔 맛있는 외식을 하고 싶다. 그게 전부다.
이 작품은 그 작은 소망이 어떻게 현실에서 배반당하는지 핍진하게 보여준다.
여기에 더해지는 갭투자, 주택청약, 가점 계산 등 다양한 부동산 관련 용어와 구체적인 현금의 흐름 묘사가 작품에 현실감을 더한다.
부자가 부를 대물림하는 방식을 죄악처럼 다루지 않은 것도 이 작품의 미덕이다.
자식들에게 그저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가르쳐 주는 것보다 돈을 바라보는 거시적인 시각을 가르쳐 주는 게 더 현명한 부모 아닌가.
사실 이 문제는 작가들이 진즉 다뤘어야 했는데 오히려 늦은 감이 있다.
젊은 작가들의 현주소를 확인할 수 있는 문학동네 젊은작가상 수상작들의 면면을 보면 헛웃음만 나온다.
올해 이효석문학상 대상 수상작인 이서수 작가의 단편 <미조의 시대>를 제외하면 현실에 제대로 조응한 소설이 얼마나 있었나?
치열하게 생활전선에서 밥벌이해 본 사람들이 작가로 많이 진입해야 할 이유다.
나도 써야겠다는 생각만 하고 미뤄뒀던 문제인데, 이 작품을 읽고 내년에 발표할 단편에 바로 다뤄야겠다고 결정했다.


이 작품은 올해 목일신아동문학상 동화 부문 당선작으로 열두 살 아이가 경험하는 다양한 인간관계를 다룬다.
출판사의 작품 소개에는 어린이들의 사랑과 우정과 비밀에 관한 이야기라고 언급돼 있는데, 소개 이상으로 다루는 감정의 깊이가 상당하다.
여기에 정상가족 이데올로기, 다문화 가정 문제 등 민감한 사회적 이슈도 판타지 서사와 어우러져 부드럽게 서사를 이끈다.
작품을 읽으면서 내 어린 시절을 떠올려봤다.
돌이켜 보면 어리다고 고민이 없지 않았고, 그 고민이 그리 유치하지도 않았다.
어린 시절의 나와 지금의 내가 하는 고민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 시절의 인간관계도 치열했다.
어떤 면에선 더 잔인했고.
작품 속 주인공처럼 나도 학교에서 무리에 끼는 일이나 또래와 친하게 지내는 일을 어색해하고 겉돌았다.
그러다 보니 나는 학창시절 친구가 거의 없다.
지금도 그 성격이 어디 가지 않아서 일행과 함께 걸을 일이 있으면 알아서 맨 뒤에서 홀로 걷는다.
겉보기에는 꽤 사교적인데 실제로는 누군가와 깊이 친해지는데 무척 어려움을 겪는 편이다.
계속 가면을 쓴 채 살아가는 일이 피곤해서 집이 혼자 있을 때 가장 마음이 편안하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주인공이 "너도 그러니?"라고 묻는 것 같아서 위로를 받았다.
책을 덮은 뒤 다가오는 여운 속에서 차차차기작으로 동화를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문득 했다.
가끔 어른에게도 동화가 필요한 시간이 있다.


작품 속 주인공은 답답한 인물이다.
문제가 생기면 침묵하고 회피하는 성격인 데다, 누군가와 처음으로 만나면 자기도 모르게 거짓으로 자신을 소개하는 버릇을 가지고 있다.
이 같은 성격과 습관은 오해를 부르고 주인공을 외톨이로 만든다.
누군가에게 쉽게 마음을 내보이지 못하는 주인공이 오로지 진실하게 대할 수 있는 대상은 키우는 고양이뿐이다.
그런데 그 고양이가 사라졌다.
주인공이 사라진 고양이를 찾으며 좌충우돌하며 그동안 인연을 맺었던 이들과의 관계를 돌아보는 계기를 갖는다.
상처만 입은 줄 알았던 자신이 자신도 모르게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존재였을 수도 있다는 점을 깨닫고, 오해로 얼룩졌던 인간관계를 조금씩 회복하는 과정이 설득력 있게 그려진다.
주인공은 비록 소중한 존재를 잃었지만, 새로운 존재를 받아들임으로써 과거와 다른 긍정적인 사람으로 조금 성장한다.
책장을 덮을 때 잔잔한 장편 독립영화 한 편을 감상한 기분을 느꼈다.
최근 들어 신간을 읽으며 느끼는 문학계의 변화 중 하나는 영화계 출신 작가의 증가다.
영화계 출신 작가가 없지는 않았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천명관이라는 걸출한 작가가 있었고, 꾸준히 활발하게 작품을 내놓으며 베스트작가 반열에 오른 김호연 작가도 있다.
<아몬드>로 영어덜트의 지평을 연 손원평 작가, 지난해 한경신춘문예 장편소설 부문에 당선된 정대건 작가는 연출자 출신이다.
정지돈 작가나 서이제 작가처럼 대학에서 영화를 전공한 작가도 보인다.
이 작품을 쓴 강진아 작가도 단편과 장편 영화 다수를 연출한 영화계 출신이다.
나는 영화계 출신 작가가 늘어나는 원인을 크게 두 가지로 본다.
첫 번째, 일단 영화를 만들기가 너무 어렵다.
투자를 받기가 어렵고, 어렵게 투자를 받아도 중간에 엎어지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영화 하나에 매달리다가 10년 세월이 금방 흘러가고, 지나간 세월을 누가 보상해주지도 않는다.
시간을 투자해서 영화를 만들었다고 해서 흥행이 보장되지도 않는다.
두 번째, 연출자들은 대부분 각본 집필을 겸하는 이야기꾼들이다.
시나리오는 각색하면 충분히 소설이 될 수도 있다.
각색은 영화 촬영처럼 큰돈이 들어가는 작업도 아니다.
영화계 출신 작가가 쓴 소설은 문학이나 문예창작을 전공한 작가의 소설과 결이 다르다.
읽으면 쉽게 영상이 눈앞에 그려지고,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드물다.
무엇보다 이들 작가의 큰 장점은 대체로 잘 읽히고 재미있는 작품을 쓴다는 점이다.
어쩌다 보니 작품보다는 작품 이외의 이야기를 더 많이 했다.
나는 영화계 출신이든 누구든 다른 분야 출신 작가가 많아졌으면 좋겠다.
최소한 알아먹을 소설을 쓰니 말이다.
종종 작가가 자신이 무엇을 쓰는지 알고 쓰는지 의문이 드는 작품을 접할 때면 한숨이 나온다.
작품 마지막에 평론을 더하는 자들은 과연 그 작품에 정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서 의미를 부여하는 걸까.
소설을 쓴다는 작가 중에서 나보다 많이 신간을 챙겨 읽는 작가는 드물 거라고 본다.
신간을 챙겨 읽으면 읽을수록 한국문학이 지금 이 사회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의문만 늘어나고 있다.
점점 게토화되고 있다는 기분이 나만의 기분일까.


나는 이 소설집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며 칡을 떠올렸다.
첫맛은 쓰지만, 씹을수록 혀 위에 은은한 단맛이 감도는 칡.
온갖 기상천외한 이야기가 난무하는 이 소설집에는 이런 뜬금없는 감상을 남기는 게 어울려 보인다.
오른손이 브로콜리로 변한 남자친구, 사람 말을 할 줄 아는 이구아나, 말하는 돌멩이, 화분이 된 아버지, 반투명인간이 된 자신 등...
이 소설집에는 밑도 끝도 없이 황당한 설정이 뻔뻔하게 등장하는데, 등장인물 모두 이를 당연하다는 듯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어서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모호하게 한다.
웃기고 허무맹랑한데 묘하게 현실적이다.
그런데 이 소설집이 그저 웃픈 이야기 모음으로 끝나지 않는 이유는 문장 곳곳에 깃든 온기 때문이다.
이 소설집의 등장인물은 모두 마음에 깊은 상처를 가지고 있다.
읽을 때는 황당한 설정에 홀려 무심코 지나칠지 모르지만, 등장 인물을 자세히 뜯어보면 모두 우울증을 피하기 어려워 보일 정도로 힘겨운 현실에 직면해 있다.
황당한 설정은 독자가 힘겨운 현실을 힘겹게 바라보지 않도록 완충재 역할을 하고 소설에 온기를 불어넣는다.
당의정과 비슷한 역할이랄까?
소설집을 읽는 내내 왠지 모르게 위로를 받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지난해 등단한 작가가 벌써 단행본을 냈다는 건 그만큼 이 바닥에서 주목을 받는다는 증거다.
이 소설집이 최근에 읽은 신인 작가의 작품 중 가장 좋았다는 말은 못 하겠다.
하지만 가장 개성적인 작품이었다.
다들 대놓고 말을 안 해도 알지 않나?
문학과지성사 스타일의 작품 중에 재미있는 작품이 드물다는 걸 말이다.
문학동네, 창비와 비교해 사세가 많이 약해진 이유도 그 때문이고.
이 소설집은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온 소설집답지 않게 재미있어서 흥미로웠다.


작가의 두 번째 소설집을 손꼽아 기다렸다.
첫 번째 소설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이 보여준 서정적인 상상의 세계(언젠가 나는 이를 '심장을 가진 SF'라고 표현했다)에 매료된 독자라면 다들 비슷한 마음이 아니었을까.
독자 뿐만이 아니다.
문학동네, 문학과사회 등 각 단편이 실렸던 지면을 밝힌 마지막 페이지를 보면 작가가 기성 문단에서도 얼마나 환영받는 존재인지 알 수 있다.
이번 소설집은 전작처럼 다채로운 이야기를 담고 있으면서도 주제 의식에 통일감을 갖춘 게 특징이다.
작가는 지금까지 장애를 작품 전반에 걸쳐 다양하게 변주해 다뤄왔다.
언어 대신 후각으로 소통하고, 기술로 감각을 느끼는 영역을 확장하는 등 작품 속에서 작가는 장애를 결함이 아니라 세상을 다르게 감각하는 방식으로 바라본다.
신체 일부의 장애는 다른 신체의 감각을 더욱 민감하게 만들어 세상을 평면적이 아니라 입체적으로 바라보게 하는 열쇠가 되고, 나아가 신체의 한계를 넘어서는 계기로 작용한다.
이 같은 시선이 신선하면서도 묵직하게 느껴졌다.
<지구 끝의 온실>의 소재였던 환경 오염도 작품 곳곳에서 주제 의식을 환기하는 중요한 요소로 쓰인다.
작가는 작품 속에 등장하는 여러 장애가 대부분 환경오염으로부터 비롯됐다고 묘사한다.
이미 수많은 뉴스를 통해 환경 오염이 부른 장애를 접했지만, 소설로 묘사한 장애는 뉴스보다 훨씬 실감이 난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은 이 행성의 시간을 잠시 빌려온 것에 불과하다고 역설하는 '오래된 협약'의 메시지가 강렬하게 다가온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보다 사회 문제를 다루는 태도가 구체적이어서 작가 특유의 서정적인 묘사를 기대했다면 당황할지도 모르겠다.
소설집 전체를 감싸는 주제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노력'이다.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말은 거짓에 가깝지 않나?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는 말이 진실에 가깝지 않은가?
'로라'는 이를 잘 드러내는 작품인데, 사랑하지만 끝내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받아들이는 등장 인물의 태도가 감동적이었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이번 소설집 또한 결국 SF라는 형식으로 풀어낸 사람에 관한 이야기다.
사실 나는 작가의 전작이자 첫 장편인 <지구 끝의 온실>을 읽고 고개를 갸우뚱했었다.
가독성은 좋았지만 이보다 훨씬 분량을 줄여도 되는 이야기를 늘렸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다.
이번 소설집에서도 지나치게 설명이 많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장편보다는 단편에 장점을 많이 가지고 있는 작가라고 생각했는데, 이번 소설집을 읽은 뒤 그 생각이 굳어졌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아 보이는데, 그 이야기를 자신만의 호흡으로 정리해 풀어놓기에는 단편이 더 적절해 보인다.
p.s. 여담인데 천선란 작가는 단편보다 장편이 좋았다. 또 여담인데 최근 몇 년 사이에 읽은 SF 서사 중에선 문목하 작가의 장편소설 <돌이킬 수 있는>이 정말 압도적으로 좋았다.
![[큰글자도서] 방금 떠나온 세계](https://image.aladin.co.kr/product/28690/57/cover150/k272836364_1.jpg)
![[큰글자도서] 방금 떠나온 세계](https://image.aladin.co.kr/product/28690/57/cover150/k272836364_1.jpg)
분량이 상당하지만 쑥쑥 읽히는 페이지터너여서 분량을 느끼기 어려웠다.
페이지를 넘기는 내내 신비로운 분위기를 품은 풍경이 눈앞에 그려져 즐거웠다.
들꽃 덕후인 내게 작품 전면에 등장하는 식물 묘사는 무척 흥미로웠다.
식물이 서로 대화를 나누고, 인간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지켜보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상상은 나도 자주 해봤으니 말이다.
이 작품을 한 장르로 구분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싶다.
작가의 전공인 SF이기도 하고, 스릴러이기도 하고, 학원물이기도 하며, 성장물이기도 하다.
작가는 전작인 <천개의 파랑>에서 인간이 아닌 존재로 세상의 부조리를 들여다봤는데, 이 작품에서도 인간이 아닌 존재(핵심 내용이어서 스포하지 않겠다)로 세상의 부조리를 꼬집는다.
작가는 청소년인 여러 등장인물의 눈으로 잘못을 저지르고도 반성하지 않으며 진실을 은폐하는데 급급한 어른들의 모습을 통렬하게 비판한다.
꼬집는 강도가 전작보다 강하고 내용이 현실과 밀착해 있어서 어떤 면에서는 사회파 소설을 닮았다는 느낌을 주기도 했다.
특히 사람을 거주지로 등급을 나눠 다르게 대하고, 뭐든 돈으로 해결하려는 어른의 태도가 아이에게 대물림되는 모습은 익숙한 모습인데도 끔찍하게 느껴졌다.
그만큼 작가의 서사 전개가 설득력 있었다.
특히 후반부에 몰아붙이는 서사 전개가 압권이었다.
선한 의지를 따르고, 세상을 지키는 건 서로가 서로를 향한 믿음이라고 믿는 순수한 아이들의 모습은 감동적이면서도 사랑스러웠다.
다른 게 틀린 게 아니란 걸 잘 알고, 부조리를 차마 외면하지 못하며, 끝까지 약자의 편에 서는 아이들 앞에서 "세상은 원래 그래"라며 이런저런 일을 적당히 뭉개고 넘어갔던 내 모습이 떠올라 뜨끔해졌다.
아마 이 작품을 읽고 나와 비슷한 기분을 느끼는 독자도 많으리라고 본다.
작가에게 유명세를 가져다 준 작품은 <천개의 파랑>이지만, 나는 이 작품이 더 좋았다.


소설이라기보다는 음악을 닮았고, 음악 중에서도 전위음악에 가깝다.
멜로디가 선명하진 않은 문장이어서 소설 제목처럼 잡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