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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라지면 암흑이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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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더 장편소설 『시간도둑』(한끼)

시간이 지나치게 빨리 흐른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나이가 들수록 그런 기분을 느낄 때가 점점 많아지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달력을 살펴보며 깜짝 놀랐다.

벌써 5월 말이라고?

벌써 1년의 절반 가까이가 지나가 버렸다고?

제대로 한 일도 없는데 벌써?

혹시 내 시간을 도둑질하는 놈이 있는 건 아닐까?

이 작품은 그런 발칙한 상상에서 시작한다.


이 작품은 기발한 설정 위에 서 있다.

인간은 평행우주 일곱 곳에서 각각 살아가고 있고 200년의 시간을 공유한다. 

누군가가 의미 없이 쓴 시간을 회수해 보관했다가 죽음 이후에 쓸 수 있게 하는 '균형자'라는 존재가 있다.

더불어 누군가를 죽여서 그가 가진 시간을 회수하는 '처리자'라는 존재도 있는데, 이들은 '균형자'와 별개로 움직인다.

이 작품은 '처리자'에게 죽임을 당할 위기에 처한 주인공을 구하려고 애쓰는 '균형자'들의 개고생을 그린다.

내용과 결은 다르지만, 문목하 작가의 장편소설 『돌이킬 수 있는』이 떠올랐다.


분량이 상당한 작품인데, 주인공을 둘러싼 '균형자'와 '처리자'의 꼬리를 무는 추적이 긴장감 있게 펼쳐져 지루하지 않다.

죽은 자들이 삶이 끝난 뒤에 자기에 주어진 시간을 자기가 아닌 누군가의 행복을 위해 쓰는 모습도 감동적이다.


기억에 오래 남는 문장이 있다. 

"바쁘게 일한다고 의미 있는 시간은 아냐. 널 위해 쓰는 시간인지가 중요한 거지."

올해 들어와 내게 가장 의미 있었던 시간이 언제인지 헤아려봤다.

마당에 혼자 지은 원두막에 누워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던 순간이 먼저 떠올랐다.

삶이 풍성해지려면 그런 기억이 많아져야겠구나.

책을 덮으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시간 도둑 - 사라진 시간의 비밀
시간 도둑 - 사라진 시간의 비밀
김유진 장편소설 『평균율 연습』(문학동네)

소설 제목을 보면 어떤 이야기를 담은 작품인지 대충 짐작할 수 있는데, 이 작품 앞에선 짐작이 모두 빗나갔다.

나는 이 작품이 피아노 연주자를 주인공으로 세우고,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을 소재로 다룬 장편소설일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주인공의 직업이 편집자여서 짜게 식었다.

작품의 주인공이 작가이거나, 출판사 관계자이거나, 대학 관계자면 한숨부터 나오는 건 어쩔 수 없다.

한국 작가들의 경험치와 시야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 같아서 말이다.

기대감을 완전히 내려놓고 페이지를 넘기기 시작했는데, 짜게 식었던 마음이 슬슬 사라졌다.

피아노 조율사로 전직을 준비하는 편집자에 관한 이야기였고, 직업 묘사가 대단히 디테일해 놀랐다.


나는 피아노는 몰라도 기타는 오랫동안 만져왔기에, 이 작품을 읽으며 자연스럽게 기타 조율 과정을 떠올렸다.

기타를 조율하는 방법으로는 레귤러 튜닝, 하모닉스 튜닝이 있다.

가장 많이 쓰이는 조율 방법은 이름으로 알 수 있듯이 레귤러 튜닝이다.

먼저 기타의 5번 줄 개방현을 A(라)음으로 맞춘다.

6번 줄 5프렛과 5번 줄 개방현, 5번 줄 5프렛과 4번 줄 개방현, 4번 줄 5프렛과 3번 줄 개방현, 3번 줄 4프렛과 2번 줄 개방현, 2번 줄 5프렛과 1번 줄 개방현의 음정을 맞추면 조율이 끝난다.

여기에 하모닉스 튜닝을 더하면 조금 더 정확하게 조율할 수 있다.

기타 줄 위 특정 지점에 가볍게 손가락을 댄 채 줄을 튕기면서 바로 손가락을 떼면, 프렛을 눌렀을 때와 다른 종소리와 비슷한 소리를 낼 수 있다.

쓰다 보니 길어져서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튜너(비싸지도 않다)를 쓰면 간단히 순정률에 맞춰 조율할 수 있는데, 그렇게 조율한 뒤 코드를 잡고 기타 줄을 쓸어내리면 미묘하게 음정이 맞지 않아 귀에 거슬릴 때가 있다(주로 싸구려 기타가 그렇다).

그럴 때는 하모닉스 튜닝으로 조율하면 음정이 맞춰지곤 한다.

각각의 줄이 들려주는 음정은 정확한 음정에서 미세하게 벗어나 있는데, 희한하게도 정확하게 순정률에 따라 조율했을 때보다 조화를 이룬다.


이 작품의 주인공을 비롯해 주변 인물 모두 적당히 망한 사람이다.

자살을 생각할 만큼 벼랑 끝에 내몰린 게 아니라, 절망하지 않을 만큼만 무너진.

이 작품은 누구나 한 번쯤 경험해 봤을 만큼의 수준만 무너진 사람들이 일상을 회복하는 과정과 심리를 피아노 조율에 빗대 섬세하게 그린다.

등장인물 모두 내 주변 어딘가에 존재할 법해서 친근하면서도 때로는 가여웠다.


우리는 원하든 원치 않든 주어진 환경에서 지금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삶이란 결국 불완전함을 받아들이는 과정일 테다.

당연하면서도 어려운, 그러면서도 필요한 이야기를 이 작품을 통해 읽었다.

평균율 연습
평균율 연습
앤솔러지 『우리의 연애는 모두의 관심사』(마름모)

'불륜'을 주제로 다룬 앤솔러지라는 소문 때문에 끌려서 읽었는데, 폭싹은 아니고 살짝 속았수다.

책 뒷표지 상단에 "나는 그녀에게 살아 있는 딜도조차 아니었다"는 문장이 떡 하니 박혀 있고, 그 아래에 "사랑에 관해 은폐된 것들/불륜 혹은 금기의 앤솔러지"라는 문장이 달려있으니, 소싯적에 몰래 야설을 돌려 읽었을 때처럼 설렜을 수밖에.

사실 이 앤솔러지의 주제는 '불륜'보다는 '금기'에 방점이 찍혀 있다.

'불륜'을 주제로 다뤘다는 소문은 마케팅을 위한 귀여운 어그로로 이해하자.

물론 '불륜'을 다룬 작품도 있으니 100% 어그로는 아니다.


원래 순애보보다 막장극이 보는 맛이 나지 않던가.

이 앤솔러지에 실린 네 작품 모두 화려한 '내로남불'의 향연이다.

작가 이름을 가리고 읽어도 어떤 작가의 작품인지 쉽게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네 작품 모두 개성이 강해 읽는 재미가 있다.


장강명 작가의 「투란도트의 집」은 자코모 푸치니의 오페라 「투란도트」를 모티브로 섹스 파트너(과연 파트너인지 의문이지만) 관계를 다룬다.

철저하게 마음의 벽을 세우고 몸만 오가는 엉망진창 섹스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다가도, 매일 밤 대한민국 어딘가에서 충분히 벌어지고 있을 사건 같아서 현실감이 느껴졌다.

오페라 주인공과 소설 주인공의 심리를 엮은 다양한 층위의 이야기가 사랑이란 무엇이고 섹스란 무엇인지 생각할 거리를 계속 남긴다.


차무진 작가의 「빛 너머로」는 소재 하나하나가 모두 금기인데(심지어 수녀까지 등장한다!), 선을 넘지 않으면서도 처절하게 사랑이 무엇인지 들여다본다.

범죄인 듯한데 범죄는 아닌 연출이 쫄깃해 선을 넘는 게 아닌가 하며 우려했는데(솔직히 기대도 조금 했다), 역시 기우였다.

오히려 오컬트라는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내는 전개가 더 처절하게 다가왔다.

그렇게라도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랑이라니.


소향 작가의 「포틀랜드 오피스텔」은 이 앤솔러지에서 가장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불륜, 치정, 복수 등 기시감이 강하게 드는 이야기를 낯선 공간에서 대단히 매혹적으로(이 단어 외엔 마땅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풀어냈다.

'불륜 혹은 금기의 앤솔러지'와 가장 잘 어울리는 이야기였다.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작업도 중요하지만, 익숙한 주제를 어떤 방식으로 풀어내느냐가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닫게 했다.


정명섭 작가의 「침대와 거짓말」은 말 그대로 정명섭 작가다운 작품이다.

실제 치정 살인 사건을 모티브로 살인 사건과 그 방식을 쫓는 추리소설로 풀어낸다.

여기에 남북의 공조 수사와 밀실 트릭까지, 짧은 분량에 다양한 재미를 담아낸 백화점 같은 단편이다.

페이지를 넘겨 마지막 부분에 이르면, "아까 그게 그거였다고?"하면서 다시 페이지를 뒤로 넘기는 재미가 있다.


여기엔 없지만 앤솔러지 기획에 함께했었다는 정아은 작가가 세상을 떠나지 않았다면 어떤 작품을 실었을까.

그 궁금증을 독자에게 맡긴 채 정아은 작가의 빈 자리를 따로 채우지 않은 구성도 마음에 들었다.

우리의 연애는 모두의 관심사
우리의 연애는 모두의 관심사
도선우 장편소설 『도깨비 복덕방』(나무옆의자)

다음 행보가 정말 궁금했던 작가다.

국내 굴지의 장편소설 공모인 세계문학상과 문학동네 소설상을 동시에 받아 화제를 모았던 작가이니 말이다.

단편소설로 응모하는 신춘문예에선 다관왕이 가끔 등장하지만, 장편소설 공모 다관왕은 그야말로 천운에 가깝다.

장편소설 집필은 단편소설 집필보다 훨씬 품과 많은 시간이 드는 작업이다.

장편소설 공모 경쟁률은 신춘문예보다 낮은 편이지만, 못해도 100대 1은 넘어간다.

단편소설 집필보다 물리적인 진입 장벽이 높아서 허수도 적다.

천운은 물론 실력까지 따라줘야 한다.

21세기 들어와 장편소설 공모에서 이 정도 임팩트를 보여준 작가는 서유미, 장강명뿐이다.

그런 작가의 신작 소식이 지나치게 뜸해서 의아했다.

단편을 전혀 안 쓰는지 문예지나 앤설러지에서도 이름을 볼 수 없었다.

지난해 말에 신간을 살피다가 작가의 이름을 보고 반가워서 바로 작품을 장바구니에 담았다.

읽기까진 반년 넘게 걸렸지만.


이 작품은 작가의 전작 『모조사회』 이후 5년 만의 신작이다.

표지와 제목을 보고 동명이인 작가가 쓴 작품인 줄 알았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유행한 가게를 배경으로 다룬 힐링소설임이 분명했으니까.

작가의 전작과 비교해 결이 많이 다른 작품이다.


이 작품은 주인공이 다른 세 가지 이야기로 이뤄져 있다.

벼랑 끝에 몰린 주인공 앞에 느닷없이 복덕방이 등장하고, 그 복덕방에서 매력적인 제안을 받은 주인공은 낯선 공간에서 '한달살기'와 비슷한 체험을 한다.

깊은 절망 속에서 죽음을 생각하던 주인공들은 그곳에서 삶을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깨닫고 새로운 기회를 만들어나간다.

형식만 보면 연작소설과 비슷한데, 다른 연작소설보다 연결 강도는 강한 편이다.

연작소설과 장편소설 사이의 어딘가에 놓인 형식이 독특했다.


신선한 이야기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술술 읽히고 재미도 있다.

그리고 교훈도 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은 주인공 저마다 마음속에 품은 오해에 관한 이야기였다.

서로 말 한마디만 제대로 나눴어도 풀렸을 오해인데, 그걸 못해서 파국으로 치닫는 모습을 보며 가슴이 답답했다.

나 역시 그런 일이 꽤 있었기 때문에 작품을 읽으며 공감했다.

인간관계에서 손쉽게 손절을 권하는 사회가 옳은지 묻는 대목에선 머릿속에 큰 종이 울리는 기분이 들었다.


지금까지 나는 여러 가지 이유로 많은 사람을 손절해왔다.

인간관계에 딱히 기대가 없다 보니 내 기준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난다 싶으면 바로 관계를 끊어버리곤 했다(물론 상대방은 알 턱이 없다).

그게 정신건강에 좋다고 믿어왔다.

그런데 그 이유가 내 오해였다면?

내가 모르는 다른 사정이 있었다면?

그런 질문을 하게 만든 것만으로도 이 작품을 읽는 시간이 의미 있었다.

도깨비 복덕방 - 신비한 공간을 빌려드립니다
도깨비 복덕방 - 신비한 공간을 빌려드립니다
이릉 장편소설 『쇼는 없다』(광화문글방)

80년대 말부터 90년대 초 사이에 어린 시절을 보낸 남자라면 공통으로 가진 추억의 키워드 하나가 있으니, 바로 프로레슬링이다.

그 시절 프로레슬링의 인기는 정말 대단했다.

동네 비디오 가게에 '로얄럼블', '헐크매니아', '올스타전' 등 경기 영상을 담은 비디오테이프 입고되면 아이들은 일제히 흥분했다.

VHS 비디오테이프 플레이어가 있는 집에 한데 모인 아이들은 함께 영상을 보며 환호했고, 영상이 끝난 뒤에도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아이들은 서로에게 경기 기술을 흉내 내며 놀았다.

마치 군대에서 국가대표 축구 경기를 중계 영상을 함께 보다가 운동장으로 공을 들고 뛰쳐나가는 군인들처럼.

특히 동네에 있는 방방(대전에선 트램펄린을 이렇게 불렀다)은 드롭킥, 스피어 등 레슬러 기술을 재현하기에 최적인 공간이었다. 

나는 WWF가 'World Wrestling Federation'이 아니라 'World Wildlife Fund'의 약자로 쓰인다는 게 아직도 어색하다.

빌어먹을 판다 녀석!


사설이 지나치게 길었다.

아무튼 그런 어린 시절을 보낸 남자라면 이 작품을 읽는 기분이 남다를 테다.

대략적인 내용은 이렇다.

때는 이용의 '잊혀진 계절'이 흘러나오는 10월의 마지막 밤.

주인공은 삼촌이 운영하는 이태원의 싸구려 게스트하우스에서 20년 넘게 일하는 40대 후반 알코올 중독 아재. 

이곳에 주인공의 어린 시절 우상이었던 프로레슬러 워리어가 나타난다.

마침 이태원에는 핼러윈 파티가 열리고 노란 빤쓰를 입은 헐크 호건, 톤파를 든 빅보스맨, 목에 뱀을 두른 제이크 더 스네이크, 돈 자랑하던 밀리언 달러맨 등 왕년의 스타들이 총출동한다.

그리고 뜬금없이 주인공이 링 위에 오른다.

'병맛'이 진하게 느껴지는 설정 아닌가.


실제로 웃픈 개그로 가득한 작품이다.

주인공은 외출복이 없는 워리어에게 최후의 인디언 전사 컨셉 의상을 준다며 국내 브랜드 '인디안' 옷을 주고, 워리어는 그 옷을 마음에 들어 하며 탑골공원에서 일장 연설을 늘어놓는 식이다.

유난히 각주가 많은 소설인데, 빠짐없이 읽어보자.

프로레슬링을 모르는 사람을 위한 설명이라고 보기엔 뭔가 이상하다.

진짜 정보와 관계없는 '병맛'인 각주가 한둘이 아니다.

김홍 작가 소설의 개그와 결이 상당히 비슷하다.


90년대를 관통하는 온갖 '밈'이 가득해 웃음을 자아내지만, 마냥 가볍지만은 않다.

주인공은 청소년 시절에 워리어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헐크 호건을 좋아하는 선배에게 쥐어터져 몸과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다.

학폭이라는 말이 없던 시절이지만, 지금 기준으로 명백히 학폭이다.

그 자리에서 내적 성장이 멈춰버린 채 중년을 맞은 주인공에게 희망이란 게 있을까.

주인공은 워리어 대신 링 위에 올라 헐크 호건과 맞다이를 까는 선택을 한다.

그렇게 죽은 워리어도 죽지 못해 사는 주인공도 부활한다. 


당연히 판타지다.

승패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작품에 드러나지 않는 주인공의 미래는 조금 다를 거라고 확신한다.

어떤 일이든 끝까지 가서 결판을 내 본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과 다르니 말이다.

쉽게 일어서기 어려울 정도로 큰 상처를 입고 좌절했던 사람에게 추천하고 싶다.

쇼는 없다 - 제12회 수림문학상 수상작
쇼는 없다 - 제12회 수림문학상 수상작
안윤 소설집 『모린』(문학동네)

몇 년 전 작가의 데뷔작 장편소설 『남겨진 이름들』을 읽고 감탄했었다.

키르기스스탄을 배경으로 현지인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한국 소설은 상상해 보지 못했으니 말이다.

삶과 죽음을 바라보는 깊은 시선과 섬세하면서도 우아한 문장이 인상 깊은 작품이었다.


이 소설집의 분위기는 데뷔작과 다르지만, 일상적인 소재를 일상적이지 않게 다루는 방식이 좋았다.

등장인물의 심리를 묘사하는 문장 역시 데뷔작처럼 섬세하고 우아하다.

장애에 가로막혀 쉽게 소통하기 어려운 마음을 들여다보고(모린), 가장 가까운 사람에 관해 과연 얼마나 아는지 묻기도 하며(핀홀), 오랜 세월 놓지 못한 마음이 끝내 가닿지 못한 채 사라져 버리기도 한다(작은 눈덩이 하나).

소설의 분위기는 전반적으로 차분한데 그 아래에 깔린 정서는 격정적일 때가 많아서 놀랐다.

말하지 않음으로써 많은 말을 상상하게 만드는 데 탁월한 단편들이었다.


가장 압권이었던 작품은 「담담」이었다. 

이 단편은 긴 연애를 끝내고 방황하는 양성애자와 배우자와 사별한 이성애자가 서로에게 가까워지는 과정을 말 그대로 '담담'하게 그리는데, 서로를 온전하게 이해할 수 없다는 걸 이해하고 적당히 거리를 두는 등장인물의 모습이 그 어떤 연애소설보다 애틋했다.

근래 읽은 단편 중 가장 아름다우면서도 슬펐다.


책을 덮을 때 문득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서 '박동훈'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인간이 그렇게 한 겹이야?

모린
모린
복거일 저 『제4차 공생』(무블)

이 책의 성격을 뭐라고 정의해야 할까.

대중적인 교양서라고 부르기엔 내용이 꽤 어렵고(참고 문헌 목록의 압박!!), 학술서라고 부르기엔 분량이 애매하고... 이 책은 그 둘 사이 어딘가의 지점에 놓여 있다.

읽는 동안 컴퓨터 자격증 수험서의 이론 부분을 복기하는 기분이 들 때도 있었다.

개론서라고 정의하면 되지 않을까 싶다.

팔순에 가까운 저자의 나이를 의식하고 읽으니 글이 젊다고 느껴져 놀랐다.

저자는 AI가 등장한 역사적 배경을 비롯해 최신 기술 동향을 진화생물학, 컴퓨터과학, 천체물리학, 철학 등 다양한 학문과 엮어 꼼꼼하게 분석한다.

분야를 넘나들며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대목에선 '한국 SF의 거장'이라는 저자의 짬밥을 새삼 실감했다.


저자는 원핵생물이 동·식물로 진화하는 시기를 1차 공생, 동·식물이 미생물과 함께 널리 퍼지는 시기를 2차 공생, 인류가 동·식물을 길들이는 시기를 3차 공생, 인류가 스스로 만들어낸 AI와 함께 진화하는 시기를 '4차 공생'으로 정의한다.

저자의 생각은 '제4차 공생'이라는 제목에 이미 나와 있다.

저자는 AI와 인류의 공존은 피할 수 없는 미래이며 그 미래를 '공생'이라고 긍정적으로 바라본다.

AGI(인공 일반 지능)는 시기가 언제이든 간에 등장할 텐데, 막연하게 두려움을 갖고 미래를 바라보는 건 근거 없는 낙관만큼 위험하다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나 또한 저자의 생각에 대체로 동의한다.

인류의 기술은 지금까지 계속 발전해 왔다.

그런 가운데 부작용도 있었지만, 큰 흐름을 보면 대체로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갔다.

피할 수 없다면 즐기는 게 낫지 않겠는가.

AI의 발전을 맞이하는 인류의 미래도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고 믿는다. 

인간의 가장 강력한 의지는 생(生)을 향한 의지 아닌가.

이보다 맹목적인 의지는 없기 때문에, 인류는 AI가 폭주하는 세상이 오게 내버려두지 않을 테다.

제4차 공생 - 초지능 시대의 인류
제4차 공생 - 초지능 시대의 인류
최유안 산문집 『카프카의 프라하』(소전서가)

제목으로 짐작할 수 있듯이 이 산문집은 프란츠 카프카가 평생 살았던 프라하를 꼼꼼하게 살펴보며 그의 인생과 문학의 흔적을 더듬는다.

소설가이면서 직장인인 작가는 카프카 또한 평생 소설가이면서 직장인인 동년배였다는 사실에 유대감을 느끼며 프라하에 남겨진 카프카의 발자취를 따라간다.

이 과정에서 작가로서의 카프카는 물론 어린 시절의 카프카, 대학생 시절의 카프카, 법원 수습 직원 시절의 카프카, 보험 회사 직원 시절의 카프카를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다.

페이지 곳곳에 담진 프라하의 사진은 텍스트만으로 느끼기 어려운 현장감을 살려주며 읽는 맛을 더한다.


챕터마다 카프카의 흔적이 남은 공간을 표시한 지도가 담겨 있어, 여행 가이드북 역할도 기대할 수 있다.

여기에 작가의 상상력과 개인사가 포개져 이야기는 여러 갈래로 가지를 뻗고 풍성해진다.

문학에 온전히 헌신하는 삶을 꿈꿨지만, 밥벌이를 포기하진 못했고, 나름대로 일까지 잘하고 선량했던 사람이 카프카라니.

나 또한 직장인의 삶과 소설을 쓰는 작가의 삶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던 세월이 꽤 길었기에 공감하는 부분이 많았다.


이 산문집을 읽으면 어디서 카프카에 관한 썰을 풀며 아는 척하긴 딱 좋을 듯싶다.

제대로 읽어 본 카프카의 작품이라고는 「변신」 정도밖에 없는 나도 그런 자신감이 드는 걸 보니 말이다.

오래전에 『김훈·박래부 기자의 문학기행』을 읽었을 때 느꼈던 즐거움과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카프카의 프라하
카프카의 프라하
시몬 스톨렌하그 그래픽노블 『일렉트릭 스테이트』(황금가지)

'어벤저스' 시리즈를 제작한 루소 형제가 연출한 동명의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원작이다.

이 작품은 SF이면서 동시에 1997년 미국을 배경으로 한 대체역사물이기도 하다.

7년 넘게 이어진 전쟁에서 드론과 조종사 간 지연 없는 데이터 처리를 위해 뇌를 연속적으로 연결하는 뉴로 기술이 발전한다.

레이더 장비 기술이 전자레인지 개발에 적용됐듯이 전쟁은 발명을 낳는다.

뉴로 기술은 현재 VR 기기와 유사한 '뉴로캐스터'라는 기술 개발로 이어진다.


하지만 '뉴로캐스터'의 대규모 업데이트 이후 이용자들이 온종일 여기에 연결돼 머무르는 어처구니없는 결과가 일어난다.

이용자들은 먹고 자는 일도 잊은 채 뉴로캐스터에 열중하다가 하나둘 죽어가고, 뉴로캐스터의 서버만이 황폐한 도시의 밤을 밝힌다.

이 작품은 디스토피아에 홀로 던져진 소녀가 작은 로봇과 함께 동생을 찾아 나서는 여정을 그린다.


사랑하는 단 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애쓰는 이야기는 얼마나 따뜻하던가.

그럴 줄 알았거늘... 마지막 반전이 충격적이어서 힘이 빠졌다.

그래...

그런 결말이 아니었다면 이 작품의 힘이 빠졌겠지.


내용을 떠나서 일러스트 감상만으로도 뭔가 새로운 체험을 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자멸한 인류의 모습을 담아낸 수십여 일러스트만으로 압도 당하는 기분을 느꼈다.

사진보다 생생하고 섬뜩하면서도 동시에 매혹적이었다.

멸망한 세상이 눈앞에 있다면 바로 이런 풍경이지 않을까 싶었다.

일렉트릭 스테이트
일렉트릭 스테이트
최석규 장편소설 『검은 곳을 입은 자들』(문학수첩)

범죄스릴러에 철학, 오컬트, 음모론, 첨단 기술(?)을 버무린 종합 선물 세트다.

흡인력이 장난 아니다.

뒤 내용이 너무 궁금해서 페이지를 넘기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결국 앉은 자리에서 다 읽었다.


이야기는 건실한 기업의 탈을 쓴 범죄 조직의 간부가 기괴한 방식으로 자살하는 데서 시작한다.

이 밖에도 곳곳에서 이해할 수 없는 방식의 자살이 속출하는데, 공교롭게도 그들 모두 천인공노할 죄를 지은 범죄자들이고 지금 뻔뻔하게 잘살고 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뻔한 설정이지만, 이 설정만으로도 흥미롭지 않은가?


찌라시에 가까운 자극적인 기사로 연명하는 한 언론사의 기자가 계속되는 의문의 죽음을 파헤치기 시작하고, 이 죽음에 얽힌 범죄 조직은 경쟁 조직을 의심하며 진상 조사에 나선다.

이들은 마침내 공통점을 발견한다.

자살자들 모두 죽기 전에 검은 옷을 입은 남자를 만났고, 그 남자는 자살자들에게 "피해자에게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고 참회하라"는 말을 남겼다는 사실이다.

기자와 범죄 조직이 검은 옷을 입은 남자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그가 강력 범죄 피해자들의 자조 모임과 관련이 있음이 드러난다.

특이하게도 그는 묵자의 사상을 따르고 있고, 믿기 어렵지만 귀신을 부려 사람을 죽인다는 정황이 드러난다.

하지만 역시 무서운 건 귀신보다 사람이었다.

이쯤 되면 이 작품의 결말이 궁금해 미칠 것 같지 않은가?


물론 불만인 부분도 있다.

언론사 묘사가 현실과 거리가 멀다.

마치 강의를 하는 듯 지나치게 설명이 긴 부분에선 "굳이?"라는 의문이 들었다.

마지막 부분에 드러나는 음모론에선 "아아..."하며 고개를 젓기도 했다.


그런데도 작품을 읽으며 만족했던 부분이 훨씬 많았던 이유는 끊임없이 질문하게 했기 때문이다.

인간쓰레기라는 말로도 모자란 범죄자들을 제대로 단죄하지 못하는 현실이 분통을 터트리게 하지만, 그런 자들을 사적 제재로 처리하는 게 과연 정의로운 일인가?

선과 악의 경계는 어디쯤일까?

작가는 현재진행형인 이 오래된 질문을 통해 세상의 모든 악이 사라지면 더 나은 세상이 오는 게 가능한지 묻는다.

여기에 고대 사상과 철학까지 끌어오다니.

덕분에 공부 많이 했다.


그렇다고 머리 아픈 소설 아니니 피하지 않아도 된다.

순수하게 읽는 재미, 그 자체만으로도 훌륭한 작품이니까.

다른 건 몰라도 재미 하나는 확실하게 보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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