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지런히 읽고 흔적을 남깁니다
글로 남기는 나만의 기록장녹지 않는 눈으로 뒤덮인 세상.
이 독특한 설정만으로도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강렬한 이미지를 펼쳐낸다.
방부제처럼 수분을 흡수하면서 살갗에 닿으면 발진을 일으키는 녹지 않는 눈.
소설 속 재난의 모습이 코로나 펜데믹과 겹쳐 보여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소각하거나 묻어야 사라지는 눈이 내린 지 7년이 넘었지만, 세상은 그럭저럭 굴러가고 있다.
재난 이전부터 쓰레기 매립지를 가지고 있었던 도시로 녹지 않는 눈이 몰려들었고, 가난한 청춘들은 눈을 처리하는 작업에 소모품처럼 쓰인다.
이 소설은 눈 소각장에서 재회한 중학교 동창 '모루'와 '이월'의 시선을 교차해 환경문제, 자연재해, 노동인권, 동물권, 님비현상 등 다양한 사회적 이슈로 이야기의 가지를 뻗는다.
실종된 '모루'의 이모를 추적하는 과정이 소설의 중심에 놓여있지만, 그 과정이 뚜렷하지 않아서 미스터리 스릴러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이 소설은 갑작스러운 재난을 맞은 세상에서 인간성을 유지하는 방법은 무엇인지 묻는 휴먼드라마에 가깝다.
배경도 성격도 모두 다른 두 주인공의 선택은 연대다.
마지막에 둘은 소재는커녕 생존 여부조차 알 수 없는 '모루'의 이모를 찾아 목적지 없는 방랑을 감행한다.
희망을 찾기 어려운 세상에서 희망을 찾아 떠나는 여정은 무모하지만, 둘의 뒷모습은 따뜻해 보였다.
소설은 녹지 않는 눈을 녹게 만드는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온기가 아니냐고 묻는다.
이미 우리는 코로나 펜데믹을 통해 깨달았지 않았는가.
내 이웃의 안전이 보장되지 않으면, 내 안전도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을.
일상을 회복하는 힘은 연대의 따뜻함에서 나온다는 것을.


참담한 장면의 연속이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탄식했다.
동시에 뿌리내릴 곳이라면 어디에서든 삶을 이어가는 인간의 완강한 생명력이 눈물겨웠다.
이 작품은 1937년 소련에서 벌어진 고려인 강제 이주를 다룬다.
소련은 연해주 일대 일본의 간첩 활동을 막는다는 명목으로 수많은 고려인을 중앙아시아로 내몰았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이 가족으로부터 흩어지거나 비참하게 목숨을 잃었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사막처럼 척박한 땅을 개척하며 겨우 생존했다.
여기까지가 내가 대강 알고 있는 고려인 강제 이주에 관한 역사다.
작가는 고려인들을 싣고 시베리아를 횡단하는 화물열차 한 칸이라는 제한된 공간을 배경으로,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비참한 역사를 생생하게 복원한다.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며 마치 끝없이 이어지는 긴 노래를 듣는 기분을 느꼈다.
이 소설은 독특하게도 등장인물 저마다의 목소리가 설명이나 묘사를 대신한다.
누구인지 분명한 목소리와 누구인지 파악하기 어려운 목소리가 좁은 공간에서 뒤섞여 돌림노래처럼 울린다.
저마다 다른 사연을 담은 목소리들이 뭉쳐 19세기 말부터 시작된 고려인의 이주 역사가 한 덩어리를 이룬다.
기본적인 생리 현상조차 해결할 수 없는 좁은 공간에 갇혀 영문도 모른 채 낯선 동토를 떠돌며 벌이는 슬픈 굿판.
지금까지 접해본 적 없는 독특한 연출에 전율했다.
마지막 장에 배경으로 등장하는 황무지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어떻게든 그곳에 뿌리를 내리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 속에서 생과 사가 이어지는 모습이 무심한 시선으로 교차하는데, 독자는 결코 무심해질 수 없다.
비참한 역사를 특정 이념에 기대는 대신,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보편적인 질문으로 풀어낸 연출이 소설에 울림과 깊이를 더한다.
꼭 한 번 읽어볼 만한 소설이다.


신경숙. 마주하면 기분이 복잡해지는 이름이다.
작가 특유의 섬세한 문장과 감성 속에서 허우적거렸던 시절이 있었다.
나는 여전히 신경숙 작가가 이문열, 김훈 작가와 더불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탁월한 문장을 쓰는 소설가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더불어 누가 봐도 명백한 표절 앞에서 변명하던 작가의 모습도 내 기억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말 같지도 않은 논리로 작가를 옹호하느라 바빴던 문단의 실망스러운 모습도 똑똑히 기억한다.
그런데도 신경숙의 신작 장편소설은 거부하기 힘든 유혹이다.
출간되자마자 샀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손에 쥔 책은 3쇄 본이었다.
여전히 신경숙의 신작을 기대하는 사람이 많다는 방증일 테다.
작가의 가장 성공적인 작품인 <엄마를 부탁해>를 작가의 최고작으로 꼽는 독자는 드물지 않을까 싶다.
고백하자면 나는 <엄마를 부탁해>를 읽고 많이 울었다.
공교롭게도 작품이 출간된 해가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듬해였던 터라.
하지만 <엄마를 부탁해>가 <외딴방>이나 <깊은 슬픔>보다 훌륭한 작품이라는 말은 못 하겠다.
<아버지에게 갔었어>는 안타깝지만 <엄마를 부탁해>에도 미치지 못하는 작품이란 게 내 의견이다.
<아버지에게 갔었어>는 <엄마를 부탁해>와 비교해 많은 부분이 데칼코마니처럼 겹친다.
<엄마를 부탁해>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약간 수정해 가져왔다고 말해도 무방할 정도로 말이다.
작가 특유의 섬세한 문장은 여전했지만, 곳곳에서 기시감이 많이 느껴졌다.
문장 곳곳에서 감정에 큰 진폭을 일으켰던 <엄마를 부탁해>와 비교해 <아버지에게 갔었어>는 잔잔한 편이다.
게다가 분량도 적지 않은 편이어서 집중해 읽기가 쉽지 않았다.
지나치게 올드한 느낌도 아쉬운 점이다.
작가를 둘러싼 논란이 컸던 만큼, 가장 성공적이었던 작품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으로 복귀하는 게 안전하다고 여긴 걸까.
조금 다른 걸 보여줄 수 있지는 않았을까.


티를 내지는 않아도 기자들은 서로를 매우 궁금하게 여긴다.
기자가 현장에서 가장 자주 마주치는 사람은 타사 기자다.
타사 기자는 경쟁자이지만, 동시에 서로를 가장 잘 이해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논조가 다른 언론사 소속 기자들이 서로 반목할 것 같지만, 사실 논조는 기자들의 친소관계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자사 소속 기자보다 더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내고, 같은 일을 하며, 같이 고생하는데 동료 의식이 생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현직 기자가 썼고 드라마로도 만들어진다는 소설.
취재 현장을 떠났지만, 매우 호기심을 일으키는 소설이었다.
공교롭게도 내 지난 행보와 겹치는 부분이 많아 소설이 더 궁금했다.
이 소설은 내가 지금까지 접한 한국 기자를 다룬 작품 중에서 가장 현실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준다.
다양한 에피소드에 담긴 취재 현장과 과정을 따라 읽으며 마치 다시 현장으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받았다.
에피소드 대부분이 실제 기사화 된 사건을 바탕에 두고 있어서 생생함을 더했다.
기대했던 대로 가독성도 매우 훌륭했다.
담백한 문장과 절묘하게 맞물린 팩트의 힘이 페이지를 넘기는 속도를 더한다.
작품 곳곳에서 느껴지는 온기 때문에 읽으면서 자주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 온기 속에서 사람과 사건을 다각도로 바라보며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으려고 애쓰는 시선이 엿보인다.
그 때문에 에피소드마다 여운이 짙었다.
특히 여운이 깊었던 건 북한 여공을 다룬 에피소드였다.
머리를 한 대 세게 맞은 듯한 기분을 느꼈는데, 스포일러는 안 하겠다.
편견과 오해가 얼마나 무서운지 잘 보여주는 에피소드였다.
궁금하면 책을 사서 읽어보자.
작가가 오랫동안 몸담고 있는 한겨레의 조직 문화를 간접적으로 엿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나는 장돌뱅이처럼 돌아다니며 지역지, 경제지, 종합지를 모두 경험했다.
조간에서도 일했고, 석간에서도 일했으며, 편집에서도 일했고, 취재에서도 일했다.
이는 딱히 전문성을 쌓지는 못했다는 말과 동의어다.
이것저것 다 살짝 맛만 본 터라 썰을 푸는 능력만 늘었다.
그 과정에서 나는 조직 문화가 서로 크게 다르다는 느낌을 받지는 못했다.
어느 조직이든 돌아가는 꼴은 서로 비슷했다.
소설은 조금 정제된 이야기를 담고 있겠지만, 한겨레는 꽤 괜찮은 조직 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글은 어떤 식으로든 쓴 사람의 성격을 반영하기 마련이다.
직접 만난 일은 없지만, 글을 통해 만난 작가는 기자로서도 자연인으로서도 괜찮은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어서 좋았다.
끊임없이 자기 일의 옳고 그름을 고민하고, 사람에 실망하면서도 사람을 향한 믿음을 끝내 버리지 않는 사람이 괜찮은 사람이 아니기는 쉽지 않을 테니 말이다.
이 소설을 읽은 시간은, 내가 괜찮은 사람이었는지 돌아보는 시간이기도 했다.


오랜만에 이 책을 꺼내 다시 페이지를 펼쳤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어머니를 갑작스럽게 떠나보낸 데 이어, 오랜 첫사랑마저 내 곁을 떠나고, 아무것도 이룰 가능성이 보이지 않았던 20대 말의 내 모습이 떠올라 가슴이 아렸다.
당시 나는 왜 내게 견디기 힘든 시련이 연이어 찾아오는지 그 이유를 논리적으로 파악하고 싶었다.
휴학을 밥 먹듯이 해 나이 서른을 앞두고도 대학에 적을 두고 있었던 나는 졸업 학기 수업을 대부분 인문대에서 수강했다.
그때 수강한 과목 중 하나가 불교와 관련 교양 수업이었고, 이 책은 그때 만난 책이다.
<아함경>은 가장 오래된 불교 경전이다.
저자는 동명의 불교 경전의 교리를 알기 쉽게 풀이해 독자의 이해를 보탠다.
이 책에 등장하는 붓다는 대단히 논리적이면서도 명쾌한 인물이다.
초기 불교의 모습을 생생하게 담고 있는 이 책 안의 붓다는 극락을 이야기하지 않으며, 내세를 확신하지도 않는다.
그저 현실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보편적인 논리만을 보여줄 뿐이다.
이 책의 핵심은 연기론에 관한 설명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반드시 소멸하므로 일체는 무상하다.
무상한 것을 향한 집착이 분노와 무지, 어리석음을 불러오고 삶에 고통을 준다.
그렇다고 붓다의 가르침을 모든 것은 결국 사라지므로 아등바등 살 필요가 없다는 허무주의로 오해하면 안 된다.
오히려 삶을 더 치열하게 살아야 한다는 채찍질에 가까운 가르침이다.
연기론에 따르면 모든 존재와 현상에는 원인이 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서로 복잡하게 얽혀 있다.
그러므로 세상에 저 홀로 독립한 존재란 없다.
삶의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집착에서 벗어나고자 마음을 다스리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인과의 법칙을 다루는 연기론의 가르침은 '아궁이에 불을 때면 굴뚝에 연기가 피어오른다'는 말처럼 지극히 당연하게 들린다.
그 당연한 가르침이 그때 내게 큰 위로가 됐다.
지난 일에 대한 집착을 줄이고 현재에 최선을 다하면 조금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는 확신을 줬기 때문이다.
이 책은 내 인생의 방향을 결정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 책은 '일단 내가 지금 하고 싶은 일에 최선을 다하자'고 마음을 다잡게 했고, 그때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소설을 쓰는 일이었다.
그때 쓴 소설이 '아함경'을 내가 소화한 대로 풀어낸 『도화촌기행』이다.
이 소설은 그로부터 몇 년 후 조선일보 판타지 문학상을 받으며 내 데뷔작이 됐다.
몇 년 전 출간한 새 장편소설 『젠가』의 반응이 내 기대보다 많이 미지근해 의기소침했다.
나는 『젠가』가 어떤 독자가 읽어도 후회하지 않을 소설이라고 자신했었다.
쑥스럽지만 내가 읽어도 재미있는 내 소설은 『젠가』가 처음이었다.
독자 리뷰를 살펴봐도 대부분 호불호가 없는 호평인데, 판매 속도는 그에 미치지 못해 몹시 당황스러웠다.
이 책을 오랜만에 다시 펼치니 심란한 마음이 조금 풀렸고, 다음 작품 집필에 집중하는 게 최선이라는 생각을 하며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혹시 지금 하는 일이 잘 풀리지 않거나, 미래에 고민이 많다면 『아함경』을 꼭 읽어보라고 추천해주고 싶다.
절대 후회하지 않을 책이다.


애린 왕자가 이바구해따. "내』 친구들을 찾는다카이. '질들인다' 카는 기 먼 뜻이냐꼬?"
"그기는 마카다 까묵고 있는 긴데." 미구가 이바구해따. "그긴 '관계를 맺는다' 카는 뜻인데." "관계를 맺는다꼬?"
"하모." 미구가 이바구했다. "니는 여즉 내한테는 흔한 여러 얼라들하고 다를 기 없는 한 얼라일 뿌인기라. 그래가 나는 니가 필요없데이. 니도 역시 내가 필요없제. 나도 마 시상에 흔해빠진 다른 미구하고 다를끼 하나도 없능기라. 군데 니가 나를 질들이모 우리사서로 필요하게 안되나. 니는 내한테 이 시상에 하나뿌인기라. 내도 니한테 시상에 하나뿌인 존재가 될 끼고……"
이 책의 일부분을 발췌했다.
읽으면 머릿속에 생생하게 경상도 사투리가 재생된다.
오랜만에 눈이 아닌 입으로 읽으며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던 책이었다.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소설일 테니 내용 설명은 생략한다
하지만 다 아는 소설이라고 해서 읽는 즐거움이 떨어지지는 않는다.
경상도 사투리를 타지역 사람이 온전히 이해하긴 어렵다.
하지만 이 작품은 대중에 잘 알려진 소설이기 때문에 사투리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유명한 작품을 사투리로 번역한 건 매우 훌륭한 전략이라고 본다.
이 책을 출간한 출판사는 포항 지역 출판사다.
지역 출판사가 출간한 책 중에서 최근에 이렇게 화제에 오른 책이 있었던가.
이 책은 소규모 지역 출판사의 색깔 있는 생존 전략을 아주 잘 보여준 사례가 아닌가 싶다.


내가 기자로 일하던 시절에 따로 찾아 읽었던 유일한 칼럼은 서울신문에 연재된 '이소영의 도시식물 탐색'이다.
나도 몇 년 전 신문 지면에 2년간 매주 '식물왕'이란 타이틀로 꽃을 주제로 다룬 칼럼을 연재했던 터라 이 칼럼을 관심 있게 읽었었다.
책이 출간된 지 1년이 넘었는데, 게으르게도 이제야 펼쳤다.
이 책은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보여 잘 안다고 여겨왔지만, 실은 잘 알지는 못하는 식물을 다룬다.
이 책의 매력은 당연한 말이지만 페이지 곳곳에 실린 다양한 식물세밀화다.
처음에 나는 굳이 식물을 세밀화로 그릴 필요가 있는지 의문을 품었었다.
나는 오랫동안 들꽃 사진을 찍어왔다.
그림보다 사진이 더 생생하게 식물을 담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 생각은 착각이었다.
일례로 이 책은 향나무 여러 종을 세밀화로 하나하나 구별해 보여주는데, 만약 사진으로 이 나무들을 봤다면 다른 점을 구별하기가 몹시 어려웠을 테다.
야생에는 서로 비슷하게 생긴 식물이 많다.
씀바귀와 고들빼기 꽃 사진을 동시에 봐도 이를 구별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난이도를 좀 올려서 양지꽃과 뱀딸기꽃을 직접 눈앞에서 봐도 구별할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그런데 세밀화는 이를 구별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사진보다 훨씬 생생하다.
이 책을 통해 그동안 몰랐던 사실도 많이 알게 됐다.
도시의 개나리가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이유, 상수리나무의 유래, 주목이 암꽃과 수꽃을 따로 피운다는 사실, 동백꽃 수분을 곤충이 아닌 동박새가 한다는 사실 등은 이 책을 통해 내가 새로 얻은 지식이다.
봄이면 지천에 널리 솟아나는 쑥도 꽃을 피운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 꽃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이 책에 실린 세밀화를 통해서야 비로소 알게 됐다.
부끄럽게도 포도꽃은 이번에 세밀화를 통해 처음으로 접했다.
언젠가 내가 꼭 쓰고 싶은 책이 들꽃에 관한 책인데, 이 책은 내가 '식물왕'이라고 뻐기려면 아직 갈 길이 멀음을 일깨워줬다.
이 책에도 언급돼 있듯이, 열강들은 오래전부터 다양한 식물을 세밀화로 기록해왔다.
자국에서 자라는 식물이 얼마나 중요한 자원인지 일찍 깨달았기 때문이다.
봄이면 거리를 향으로 채우는 미스킴라일락, 전 세계 크리스마스 트리를 장악한 구상나무 등 우리 땅이 원산지인데도 우리 것이라고 큰소리치지 못하는 식물이 적지 않다.
우리 주변에 있는 식물들을 들여다보는 일은 곧 우리의 현재를 들여다보는 일이라는 메시지가 페이지 곳곳에서 느껴진다.
작가의 사려 깊은 따뜻한 이야기 속에 스며들어 있는 메시지가 묵직하다.


전 세계 코로나19 확진자가 10만 명이 되지 않았던 시절에 쓰였지만, 지금도 곱씹어 읽어야 할 부분이 많은 책이었다.
어려운 비유 없이 심각한 사안을 설명해주고, 이와 동시에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는 게 이 책의 장점이다.
일례로 저자는 75억 인류를 구슬에 빗대 확진자가 어느 순간 급증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구슬 하나가 안정적으로 모여 있는 75억 개 구슬 중 하나와 전속력으로 부딪힌다.
부딪힌 구슬이 다른 두 구슬에 부딪히면, 두 구슬은 튕겨 나가 각각 다른 두 구슬과 거듭 부딪힌다.
이 같은 현상이 걷잡을 수 없이 반복되면서 75억 개 구슬 전체가 흔들리는 건 금방이다.
이미 다양한 뉴스를 접해 아는 내용인데도 사태의 심각성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나는 문득 숫자 2가 몇 번 거듭제곱해야 인류의 숫자를 넘기는지 궁금해졌다.
2가 33번 거듭제곱하자(85억8993만4592) 인류의 숫자를 넘겼다.
최악의 가정이지만, 1명의 감염자가 전 세계 인류를 감염시키는 데 걸리는 시간이 한 달여밖에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저자는 코로나19 감염자가 평균 2.5명의 추가 감염자를 만들어낸다고 설명한다.
우리가 왜 이동을 최소화해야 하는지 마음에 확 와닿았다.
저자는 펜데믹 시대에 연대감 부재는 상상력의 결여에서 온다고 지적한다.
75억 인류 각자의 행위가 어떤 과정을 거쳐 전체 결과로 이어지는지 상상하기는 어려우니 말이다.
이 책은 인류가 하나의 공동체라는 사실을 막연하게나마 상상할 수 있게 도움을 주는 책이다.
분량이 작아 가벼워 보이지만, 개인적인 선택을 할 때도 타인을 고려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화두를 던진다는 점에서 내용까지 가벼운 책은 아니다.


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조금 색다른 시선으로 다루는 소설이다.
내가 그동안 접한 5.18을 다룬 작품은 영화 <화려한 휴가> <26년>, 드라마 <제5공화국>처럼 당시에 벌어진 상황을 적나라하게 다룬 게 대부분이었다.
이 소설은 5.18의 격랑에 휩쓸렸던 평범한 광주 사람들의 시선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작품이다.
5.18의 한가운데에 놓여 있었지만 주체는 아니었던 사람들.
소설은 역사가 남긴 상처 주변에서 유령처럼 배회하며 겨우 삶을 살아가는 그들의 서글픈 군상을 담담하게 풀어낸다.
아울러 등장인물들이 사용하는 호남 방언이 소설에 생생함을 더한다.
역사의 큰 물줄기와 합류하는 지류에 주목한 점도 좋았지만, 그 지류가 결코 가벼운 흐름이 아니었음을 조명하는 시선이 더 좋았던 작품이다.


내게 1992년은 휴거로 기억되는 해다.
당시 다미선교회라는 종교단체가 세계가 멸망한다고 하도 시끄럽게 떠드는 바람에 대한민국이 꽤 시끄러웠다.
다미선교회는 구체적으로 10월 28일이라는 휴거 일자까지 제시하는 바람에 더 주목을 받았다.
당시 12살 소년이었던 내가 사는 대전의 변두리 동네까지 휴거 관련 책자가 뿌려졌다.
주말마다 간식을 먹으러 교회에 다녔던 나는 세상이 멸망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사로잡혀 벌벌 떨며 혼자 열심히 하나님께 기도했었다.
마침내 휴거일자가 다가왔고, 내 공포는 극에 달했다.
하지만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20세기의 마지막 해인 1999년에는 세상에 온갖 종말론이 판을 쳤다.
대부분 웃어넘길 이야기였지만, Y2K만큼은 꽤나 신빙성 있게 들렸다.
나는 코딩에 꽤 능숙한 청소년이었기 때문에 이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당시 컴퓨터의 날짜 표기 방식은 월-일-년이었고, 년은 네 자리 중 뒷부분 두 자리의 수만 입력했다.
저장장치의 용량이 턱없이 적어 1바이트라도 줄이려고 했던 과거의 흔적이 그때까지 남은 거다.
이 경우 1900년과 2000년은 똑같이 00으로 처리된다.
컴퓨터의 오작동을 충분히 우려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군사 및 우주용 컴퓨터의 스펙은 안정성 문제 때문에 개인용 컴퓨터보다 낮은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전 세계의 금융망이 마비되고, 원자력 발전소의 컴퓨터가 오작동해 방사능이 누출되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가 적지 않았다.
심지어 핵폭탄이 갑자기 발사될지도 모른다는 괴담도 퍼졌었다.
나는 1999년 12월 31일 밤에 창밖을 주시하고 있었다.
정말로 도시 전체에 정전이 발생하고, 핵폭탄이 날아다니는 사태가 발생할지 걱정하면서.
마침내 2000년 1월 1일 0시가 됐다.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개인적인 이야기가 길었다.
이 책이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은 내가 앞서 이야기를 풀어낸 방식과 비슷하다.
이 책은 종말에 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종말이라는 자극적이고도 궁금한 소재를 바탕으로 우주와 지구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현상을 흥미롭게 전하는 교양 과학 서적이라고 말하는 게 옳다.
저자는 지금까지 지구가 겪은 대격변들을 돌아보고, 앞으로 어떤 대격변이 다가올지 과학적인 근거로 예측하고 설명한다.
그중에는 일식이나 토성과 목성의 만남처럼 근거가 없는 종말론 시나리오도 있고, 태양의 거대화 등 언젠가는 반드시 벌어질 종말론 시나리오도 있다.
하지만 이 책에 언급된 종말론 시나리오 대부분은 우리가 생전에 경험할 일이 없는 그야말로 '우주적인' 사건이다.
빅뱅, 초신성, 대멸종, 은하의 충돌을 우리 생에 겪을 일은 없지 않은가.
꽤 신빙성 있게 받아들여졌던 석유 고갈로 인한 대혼란 우려도 쑥 들어간 지 오래다.
돌이 사라져서 석기시대가 끝난 건 아니니 말이다.
우주 기준으로는 10만 년, 100만 년도 찰나의 시간인데 고작 100년도 살지 못하는 인간이 그런 우주적인 사건을 두려워하는 건 코미디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우리의 생이 우주에서 하루살이 만큼의 존재감도 없는 무의미한 생일까.
이 책을 읽으니 오히려 종말에 관한 두려움보다는, 그동안 제대로 보지 못하고 지나쳤던 세계에 관한 경이로움과 호기심이 더 커진다.
끊임없이 세상을 궁금해 하는 게 언제 다가올지도 모를 종말을 걱정하는 일보다 훨씬 즐거운 일 아니겠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