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지런히 읽고 흔적을 남깁니다
글로 남기는 나만의 기록장책을 읽기 전에 작가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다가, 과거 온갖 기상천외한 리뷰를 올려 유명세를 탔던 김리뷰와 동일인임을 알았다.
김리뷰가 작가와 동일인이란 사실을 알고 소설에 더 흥미가 생겼다.
활동 당시 여러모로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인물이니 말이다.
김리뷰로 검색하면 나오는 내용이 워낙 많으니 여기서 각설한다.
소설은 김리뷰 시절의 약 빤 리뷰와 결이 완전히 달랐다.
작가의 첫 장편소설이란 사실이 놀라울 정도로 문장에 걸리는 게 없었고, 매우 즐겁게 읽혔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명문대 수학과 출신으로 만날 도서관에서 수학문제만 푸는 너드다.
이런 아들을 걱정하는 엄마는 사촌누나를 아들의 연애 코치로 곁에 두는 초강수를 두고, 사촌누나는 주인공이 여자들과 자주 마주칠 수 있게 카페 아르바이트 자리를 제안한다.
처음에는 시큰둥했던 주인공은 아르바이트하는 동안 카페에서 자주 눈에 띄는 한 여자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다.
이를 시작으로 작가는 수학 문제처럼 모든 답이 정확하게 나오는 관계를 꿈꾸는 주인공이 답이 나오지 않는 사랑과 이별을 통해 성장해나가는 모습을 그린다.
20대 초반인 주인공이 누군가를 만나 어설프게 사랑하고, 이별하고 갈등하는 과정과 심리가 생생하면서도 섬세하게 묘사된다.
MZ세대의 모습을 엿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226년 전, 저자가 불법으로 결투를 벌인 죄로 42일간 가택 연금을 당한 뒤 무료한 마음을 이기려고 쓴 기행문(이라고 해야 하나?)이다.
여행이 귀해진 시대에 저자는 어떻게 방구석을 여행했는지 궁금해 앉은 자리에서 책을 모두 읽었다.
두 세기 전에 쓰인 책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내용과 문장이 현대적이어서 놀랐다.
저자는 내 방을 여행하는 데에는 돈이 들지 않는다는 너스레로 시작해 침대, 의자, 그림, 판화 등 주변의 사물을 소재로 삼아 미술, 음악, 철학, 과학 등으로 이야기의 주제를 확장한다.
이야기를 풀어내는 저자의 허세가 웃기면서도 유쾌하다.
가택연금에서 벗어나 세상으로 나오는 날이 오히려 철창 안으로 들어가는 날이라니. 정신승리가 쩐다.
여자에 관심 없는 척 하는데, 실은 그 지역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소문이 난 여자에게 수시로 관심을 보이고.
저자가 요즘 세상에 태어났다면 좋게 말하면 논객, 낮춰 말하면 네임드 어그로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이 기행문을 읽고 나니 내 방안에 보이는 사물이 새삼 다르게 보인다.
적게는 며칠, 많게는 20년 넘게 나와 함께 한 물건들이다.
그 물건들에 관한 이야기만 풀어내도 족히 단행본 한 권을 채울 듯싶었다.
여행을 가지 못해 답답하다면, 일독을 권한다.
분량도 적어 읽기에 부담스럽지 않다.


마음이 따뜻해지는 소설이었다.
읽는 내내 미소가 입가에서 떠나지 않았고, 때로는 주책 맞게 눈물도 흘렸다.
특히 죽은 사람들이 가족에게 남기고 간 꿈을 다룬 마지막 부분에선 읽는 내내 울컥했다.
며칠 전 나는 꿈에서 돌아가신 어머니를 만나 함께 밥을 먹었는데, 꿈속에서 이 상황이 꿈이란 걸 알아차린 나는 어머니를 붙잡고 오열하다가 꿈에서 깬 일이 있다.
그 꿈이 생각나서 페이지를 쉽게 넘길 수 없었다.
신선한 소설이라고 말하지는 못하겠다.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을 읽는 듯한 기시감이 든 부분이 없지 않았다.
잠들어야만 입장할 수 있는 비밀 상점이라는 설정도 감탄사를 토해낼 만한 설정이라고 생각되진 않는다.
에피소드 대부분이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을 법한 이야기들이다.
그런데도 이 소설이 왜 수많은 독자를 사로잡았다는 사실은, 그만큼 이런 이야기를 원하는 잠재 독자가 많기 때문이 아닐까.
짧지만 문학 담당 기자를 해본 경험을 비춰 보면, 이런 이야기를 다룬 소설은 국내에선 희귀종이다.
흔할 것 같은데 안 보인다. 정말로!
작가는 이른 바 문단에 정식으로 등단한 작가가 아니다.
아무리 많이 팔려도 문단이나 평단은 이 작가와 작품을 주목하지 않을 것이다.
언론 또한 이 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과정에서 아무 역할을 하지 못했다.
저자 인터뷰 기사도 하나 보이지 않고(저자가 원하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진지하게 이 책을 리뷰한 기사나 현상을 분석하는 기사도 보이지 않는다.
베스트셀러 순위와 출판, 문학을 다룬 기사의 온도 차가 너무 크다.
어차피 기사 몇 개 더 나간다고 책이 팔리는 시대도 지났지만, 언론은 독자보다 늦어도 너무 늦다.
어쩌면 이 소설이 지난해 SF의 대두에 이어 출판, 문학 시장에 변곡점이 왔음을 알리는 중요한 신호일지도 모르겠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에는 없던 대중소설이란 시장이 가까운 미래에 열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달러구트 꿈 백화점』도 e북으로 먼저 공개된 뒤 종이책으로 출간돼 서점을 장악한 작품이다.
최근에 이 책뿐만 아니라 여러 국내 소설을 e북으로 읽었다.
요즘 들어 e북에 관한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지금까지 나는 책은 내용 뿐만 아니라 물성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해왔다.
책만이 주는 특유의 물성을 무시할 수 없으니 말이다.
읽지 않고 들고만 있어도 무언가 마음을 채워주는 듯한 느낌 말이다.
하지만 e북은 물성은 없어도 종이책보다 훨씬 자주, 그리고 더 많이 글을 읽게 해줬다.
버스 안에서, 지하철 안에서, 잠들기 직전에, 화장실에서 잠시 볼일을 보는 동안에 짬을 내 책을 읽기에는 e북이 종이책보다 훨씬 편했다.
e북 때문에 내 독서량은 과거보다 더 많아졌다.
나는 몇 년 전 모 장편소설 초고를 가명으로 한 웹소설 플랫폼에 먼저 연재했었다.
플랫폼이 급속도로 변하는 세상인데, 그 플랫폼을 무시하고는 생존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다.
물론 별 인기를 끌지는 못했다. 막판에는 꾸준히 읽는 독자도 생기고 댓글도 꽤 달리긴 했지만.
하지만 연재는 웹소설이 어떤 구조로 돌아가는지 이해하는 계기가 됐다.
좋든 싫든 이제 온라인을 무시하고 살 수 없는 세상이다.
이 작품은 달라진 세상에 관해 많은 걸 생각하게 해줬다.


앉은 자리에서 책장을 모두 넘겼다.
옷이라는 흔하지만 소설에서 잘 안 보이는 소재를 역동적인 듯 하나 어두웠던 80년대 현대사와 엮은 이야기가 신선했다.
어떻게 이야기가 끝날지 알 수 없는 전개가 책장을 덮기 전까지 긴장하게 했다.
등장인물의 섬세한 심리 묘사도 긴장감을 더해줬다.
어지간한 스릴러 이상으로 흥미진진했다.
거두절미하고 재미있는 소설이었다.
소설은 역시 재미가 있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