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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라지면 암흑이 찾아온다"

부지런히 읽고 흔적을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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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노니카 드 쾨니그스워터 『재즈 거장들의 세 가지 소원』(안목)

저자는 로스차일드 가문의 상속녀로 젊었을 땐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일원으로 나치에 저항했고, 이후 뉴욕에서 살며 재즈 뮤지션들의 든든한 후원자로 활동했다.

이 책에는 저자가 폴라로이드로 촬영한 많은 재즈 뮤지션의 모습이 담겨 있다.

그 어떤 연출도 없이 자연스러운, 그래서 더 희귀한 전설적인 재즈 뮤지션의 일상이 설명하기 어려운 감동을 선사한다.

저자가 사진으로 담은 뮤지션들에게 세 가지 소원을 묻는다.

대답 또한 날것 그대로다.

그야말로 전설 그 자체인 뮤지션들의 대답이 이렇게 속되고도 성스럽다니.

그래서 더 감동적이었다.



* 존 콜트레인

1. 고갈되지 않는 신선한 음악을 갖는 것...난 지금 진부함.

2. 질병이나 건강 악화를 방지해 줄 면역력

3. 정력이 지금보다 세 배 강해지는 것


* 빌 에번스

소원을 들어주는 반지. 그걸 얻게 되면 나머지는 필요 없다.


* 스탠 게츠

1. 정의

2. 진실

3. 아름다움


* 루이 암스트롱

1. 일 년 동안 나팔을 내려놓고 나의 녹음테이프 전부를 들으며 분류하고 색인을 붙이는 것... 그렇게 하면 원가를 쓸 수 있을 텐데... 그러면 남은 인생이 좋을 것 같아요!

2. 그다음에는 세상으로 다시 돌아가 팬들을 만나고 그들을 위해 연주하는 것.

3. 백 년쯤 사는 것! 그래서 다음 세대들이 연주하는 것을 즐기고 나도 그 음악을 해보는 것.


* 마일스 데이비스

백인이 되는 것!


저자가 내게 같은 질문을 했다고 가정해 봤다.

내 대답이다.


1. 모든 가족의 건강과 행복

2. 누군가에게 아쉬운 소리하지 않을 만큼의 주머니 사정

3. 나보다 훨씬 오래 살아남을 장편소설 쓰기


재즈 거장들의 세 가지 소원
재즈 거장들의 세 가지 소원
남무성 음악 만화 산문집 『스윙라이프』(부커스)

작가의 전작인 『Paint It Rock』, 『Jazz It Up!』처럼 방대한 음악 지식과 뒷이야기를 흥미로우면서도 어렵지 않게 풀어낸다.


다루는 내용이 재즈처럼 즉흥적인 부분이 많다.

일반적인 칼럼처럼 글로 썰을 풀다가, 느닷없이 만화가 글을 대신한다.

때로는 "이런 것까지 굳이?" 싶을 정도로 깊이를 보여줄 때도 있다.

재즈와 추상화를 비교하며 긴장과 이완이라는 공통점을 발견하고, "관측하는 순간 변화한다"는 양자물리학을 호출해 재즈 역시 감상하는 순간 바뀐다고 썰을 푼다.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 위에 베토벤의 「전원 교향곡」이 겹치고, 죽음을 이야기하며 모차르트와 가브리엘 포레의 「레퀴엠」을 언급하다가 자연스럽게 루이 암스트롱의 레퀴엠 「St. James Infirmary」, 찰스 밍거스의 「Goodbye Pork Pie Hat」으로 넘어가기도 한다.

짙은 재즈와 어울리는 술로 위스키 '아드벡'을 추천할 땐 순간 피트 향이 확 느껴져서 흠칫했다.


작가 개인사를 재즈와 엮어 풀어내는 부분이 좋았다.

자기를 양평까지 데려다준 대리기사가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뒷모습을 보며 팻 매스니와 찰리 헤이든의 연주를 떠올리고, 고우영 화백의 『삼국지』에서도 재즈를 읽는다.

몰래 다량의 LP를 훔쳐 간 후배를 다룬 이야기에선 키득키득 웃음이 자동으로 새어 나왔다. 작가에게 못된 짓을 하면 이렇게 작품으로 박제된다.

음악 기자들(이니셜로 언급했지만 누구인지 다 알겠더라)을 디스하는 이야기도.

작가가 운영했던 재즈바 '가우초'(나도 한 번 가본 곳이다)에 얽힌 이야기도.


문장이나 단어가 낯설고 어려워진다 싶어질 때 어떻게든 쉽게 풀어내려는 태도가 엿보여서 좋았다.

괜히 있어 보이고 싶을 때 종종 쓰는 인용도 거의 보이지 않아 읽기 편했다.

나처럼 재즈를 잘 모르는 사람이 읽어도 재미있는 책이니, 아는 사람이 읽으면 더 재미있을 테다.


P.S. 『호밀밭의 파수꾼』은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이긴 해도 노벨문학상 수상작은 아닌데...

스윙 라이프 - 남무성의 음악 만화 에세이
스윙 라이프 - 남무성의 음악 만화 에세이
이성수 그림 산문집 『아이 해브 어 캣』(이은북)

공적으로든 사적으로든 지금까지 여러 뮤지션을 만나왔는데, 꽤 흥미로운 점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부드러운 음악을 들려주는 뮤지션들은 대체로 성격이 세고, 강한 음악을 들려주는 뮤지션들은 대체로 순했다.

후자의 상당수는 고양이를 키우는 '집사'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무대 위의 모습과 바깥 모습의 차이가 보여주는 '갭모에'가 재미있으면서도 매력적이었다.


이제 먼 옛날이야기처럼 느껴지는 코로나 펜데믹 시절에 뮤지션들은 그야말로 괴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오를 수 있는 무대가 몽땅 사라졌는데, 그 기간이 무려 몇 년 동안 이어졌다.

무대를 잃은 록밴드 프런트맨이자 집사인 저자는 SNS에 자기가 오랫동안 키워 온 고양이를 그려 자주 SNS에 올렸다.

펜데믹이 본격화했던 2020년부터 3년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점점 무기력해지는 일상에서 벗어나려는 시도였던 그림 그리기는 많은 집사의 호응을 얻었다.

펜데믹으로 무대를 잃은 펜데믹 덕분에 어렸을 때의 꿈이었던 화가라는 꿈을 되새길 수 있었고, 그때 그린 그림이 모여 책 한 권으로 엮였다.

전화위복의 좋은 사례다.


페이지를 넘기며 둥긍둥글하게 그려진 그림 하나하나를 살피다 보면 입가에 절로 미소가 새겨진다.

집사의 마음이란 이런 거구나 싶다.

책을 덮으며 오래전에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키웠던 반려동물인 거북이 세 마리의 얼굴을 떠올렸다.

멍청이, 까불이, 순둥이...

아이 해브 어 캣 - I HAVE A CAT
아이 해브 어 캣 - I HAVE A CAT
김사월, 이훤 산문집 『고상하고 천박하게』(열린책들)

싱어송라이터 김사월, 시인이자 사진작가인 이훤이 서로에게 1년 동안 쓴 편지를 모은 책이다.

책을 펼친 계기는 김사월 때문이다.

데뷔 시절부터 모든 앨범을 챙겨 들어왔을 정도로 좋아하는 싱어송라이터이니까.


놀라웠다.

여사친과 남사친(그것도 유부남인)이 이렇게 내밀하면서도 아름답고 다정한 글을 교환할 수 있다니.

서로 오래 알고 지낸 사이라지만 그런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니.

새삼 예술을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감수성이 짙고 예민한지 여러 문장으로 실감했다.

예술 하는 사람 중에 유독 우울증을 앓는 이가 많은 이유도 알겠고.

낯설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고... 책을 덮은 뒤의 감정이 묘했다.

고상하고 천박하게
고상하고 천박하게
문진영 장편소설 『미래의 자리』(창비)

독서도 중독되는 기분이 들어서 당분간 하지 않으려 했는데, 무심코 집어 들었다가 결국 다 읽었다.

이 작품은 갑작스러운 친구의 죽음이라는 마음의 상처를 공유하는 20대 끄트머리 여성 셋의 일상을 따라간다.

제목이 의미심장하다.

제목에 '미래'라는 단어가 있는데, 죽은 친구의 이름도 '미래'다.

'미래'가 세상에 없다는 슬픔을 느끼면서도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남은 이들의 모습이 안쓰럽고 애틋했다.


욕망, 죄책감, 자의식, 좌절감, 그리고 사랑.

청춘 하면 떠오르는 다양한 단어가 페이지를 넘기는 내내 스쳐 지나갔다.

작가는 여기에 세월호 침몰 사고, 이태원 압사 사고 등 등장인물들이 청소년기에 겪었을 집단 트라우마를 엮으며 기억으로 연결하는 따뜻한 연대의 힘을 엷게 보여준다. 

거기에 우리의 '미래'가 있을 거라면서.


책을 덮은 뒤 들었던 감정은 어이없지만 '사랑스러움'이었다.

나만 그런 감정을 느끼진 않을 것 같다.

작품을 읽는 내내 머릿속에 반복 재생된 노래 한 곡이 있었다.



하비누아주 '청춘'


기억이 나지 않아

내 의지와 다르게

모든 게 멈춰 버린 것 같아

앞이 보이지 않고

땅은 내 머리를 향해 오네


이 목적 없는 청춘엔

냉기가 흐르지

도망치는 청춘은

눈물도 차가워


큰 다리를 건너는 그림자를 봤어

그 언젠가 어둡고 황량한 길에서

이 적막을 지나면 어디든 닿을까

달리던 커다랗고 짙은

나의 슬픔을


목적 없는 청춘엔

냉기가 흐르지

도망치는 청춘은

눈물도 차가워


큰 다리를 건너는 그림자를 봤어

그 언젠가 어둡고 황량한 길에서

이 적막을 지나면 어디든 닿을까

달리던 커다랗고 거친

나의 슬픔을


기억해 줘


기억해 줘


이 적막을 지나면 어디든 닿을까

아무런 대답 없는 물음 속을

달리는 커다랗고 짙은

나의 슬픔을

미래의 자리
미래의 자리
서유미 소설집 『밤이 영원할 것처럼』(문학동네)

감정을 울렁이게 만드는 책이 있고, 감정을 차분하게 정리해 주는 책이 있는데, 이 책은 후자에 가까웠다.

오래전 습작 시절에 읽은 작가의 장편에서 느껴졌던 톡톡 튀는 발랄함은 이제 찾아보기 어렵다.

대신 작은 것을 다룰지라도 다각도로 들여다보는 깊은 시선이 있다.

그게 작가의 짬밥인가 보다.


이 소설집에는 일곱 개 단편이 실려 있는데, 이들을 하나로 엮는 키워드는 '밤'이다.

그중 두 편은 동인지와 문예지로 먼저 읽은 구면이어서 반가웠고, 다섯 편은 새로 읽는 단편이어서 반가웠다.

소설집이라는 게 재미있다.

소설집에 실리는 단편은 저마다 작가가 다른 때에 쓴 서로 별 관련 없는 작품인데, 특정 키워드를 매개로 엮이면 마치 완성된 퍼즐 조각처럼 새로운 그림을 보여주니 말이다.


밤은 고요하지만, 예상치 못한 사건과 사고가 자주 일어나고, 숨어서 내밀한 이야기를 하기에도 좋은 시간이다.

누군가에게는 지친 노동에서 겨우 벗어나는 짧은 휴식 시간이고(밤의 벤치), 누군가에게는 조금씩 무너지는 가족 관계를 지켜봐야 하는 괴로운 시간이다(그것으로 충분한 밤).


세상 사는 게 가끔 참 더럽고 치사하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갑자기 건강에 이상이 생겨 인생 경로를 수정해야 하고(토요일 밤의 로건), 남부럽지 않게 살다가 친구에게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할 상황에 놓이기도 한다(지나가는 사람).

정말 하기 싫어 미치겠는데, 오랜만에 전 남편에게 연락해 위자료를 내놓으라고 요구할 일도 생긴다(기다리는 동안).

누구나 한 번쯤 겪을 수 있는 더럽고 치사한 상황이다.


그런 상황에서도 졸음은 찾아오는데, 한숨 자고 일어나면 기분이 조금 나아지지 않던가.

파도로 뛰어들어 몸을 적시면 옷이 젖어 난감해질지라도 잠시나마 후련함을 느낄 수 있고(다른 미래), 치료를 받고 충분히 쉬며 여러 밤을 견디면 몸과 마음도 나아지듯이(밤이 영원할 것처럼) 말이다.


작가는 소설집을 통해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나 보다.

밤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며, 밝음이 어둠을 밀어내듯이 늘 나쁘기만 한 삶은 없다고.

밤이 영원할 것처럼
밤이 영원할 것처럼
김탁환 장편소설 『참 좋았더라』(남해의봄날)

그림을 잘 모르는 나는 이중섭 하면 그의 비극적인 삶부터 떠올리게 된다.

여러 명작을 남겼으나 당대에 제대로 평가받지 못해 좌절했고, 일본에 두고 온 가족을 그리워하다가 말년에 정신병원을 전전하며 무연고자로 요절한 비운의 천재 화가.

대표작인 '소' 시리즈를 제외하면 이중섭의 다른 작품은 그의 비극적인 삶에 가려진 감이 없지 않다.


이 작품은 바로 이 맹점을 찌른다.

삶이 비극으로 점철된 화가가 과연 여러 명작을 남길 수 있었을까?

작가가 이중섭의 생애에서 주목한 부분은 통영에서 보낸 반년이다.

이중섭은 그 짦았던 시절에 <달과 까마귀> <도원> <흰소> <황소> 등 대표작을 그렸고 통영 곳곳의 모습을 담은 풍경화도 여럿 남겼다.

그 시절이 이중섭이 창작에 집중할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평화로운 시절이 아니었을까?


전후 문화예술인들의 이야기를 그린 EBS 드라마 「명동백작」의 무대를 통영으로 옮겨 소설로 읽는 기분을 느꼈다.

통영은 여행은 물론 준면 씨가 드라마 「슈룹」을 촬영 때도 동행해 여러 차례 들른 곳이어서 작품에 몰입하기가 더 쉬웠다.

작품 속에서 충렬사, 세병관, 동피랑, 강구항, 해저터널, 욕지도 등 익숙한 공간이 등장할 때마다 나도 50년대 통영의 어딘가를 함께 경험하는 듯했다.

더불어 활판 인쇄물을 닮은 폰트는 마치 그 시절로 시간여행을 하는 듯한 착각을 느끼게 한다.


이 작품의 매력은 사실과 허구를 재구성하는 사이에 이중섭이 남긴 여러 작품을 절묘하게 엮는다는 점이다.

이 작품의 독자는 <달과 까마귀>를 감상하면 전쟁과 분단 속에서 죽어간 수많은 사람을 되짚게 될 테고, <춤추는 가족>을 감상하면 나체로 춤을 추는 네 가족의 모습 앞에서 미소를 지으며 눈을 붉히게 될 테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그저 그림이구나 하고 넘겼던 이중섭의 작품이 생생하게 다가오고, 그 시절에 붓을 들었던 이중섭의 시간이 눈부시다.

이 작품은 장편소설임과 동시에 이중섭의 그림을 이해하는 가이드이기도 하다.


여기에 유강렬, 유치환, 김춘수 등 통영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당대 예술가들의 모습이 동북 방언과 동남 방언에 실려 생생하게 되살아나 현장감을 더한다.

통영이 '예술의 도시'라는 수식어를 많이 들었지만, 이렇게 많은 예술인이 활동하며 지금까지 큰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이 작품은 이중섭의 안타까운 죽음까지 다루지는 않는다.

부제인 '이중섭의 화양연화'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예술혼을 불태웠던 시절의 이중섭에 집중할 뿐이다.

그래서 더 강렬하고 아름다웠다.

작품으로 다뤄지지 않은 이중섭의 마지막을 알고 있으니까.

활짝 핀 벚꽃이 아름다워 보이는 이유는 곧 진다는 걸 알기 때문 아니던가.


그림을 그리든, 글을 쓰든, 음악을 만들든 무언가를 창작하는 사람이라면 이 작품이 남다르게 다가오지 않을까 싶다.

자기 삶의 화양연화는 언제였는지, 지나갔는지, 아직 다가오지 않은 건 아닌지 되짚어보게 될 테니까.

부디 내 화양연화는 아직 지나가지 않았기를 빈다.

참 좋았더라 - 이중섭의 화양연화
참 좋았더라 - 이중섭의 화양연화
조해진 장편소설 『빛과 멜로디』(문학동네)

5년 전에 읽었던 작가의 장편소설 『단순한 진심』은 지금도 내게 감동적인 기억으로 남아있다.

대한민국 사회의 소외된 곳과 그곳에 속한 사람들을 그저 작품 소재로 다루지 않는 사려 깊은 마음이 느껴졌고, 인간을 향한 신뢰와 희망을 잃지 않는 작가의 시선이 따뜻해서 좋았다.


작가는 이번 작품에선 시선을 대한민국 바깥으로 넓힌다.

지금도 분쟁이 끊이지 않는 시리아, 우크라이나, 팔레스타인으로.

그리고 이들 국가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이 향하는 영국으로.


소설로 다루는 공간이 광범위해진 만큼 등장인물들의 마음과 마음이 이어지는 스케일도 커졌다.

같은 반 아이가 굶을까 봐 돈이 될 것으로 보이는 카메라를 집에서 몰래 가져와 건네는 아이의 간절한 마음이 시작이다.

그 마음이 카메라를 들고 전장을 오가며 끔찍한 현장을 기록해 전달하는 행동으로 이어지고, 그 행동으로 맺은 인연은 전장에서 목숨을 위협받는 이들의 생명을 구하며, 그렇게 구원을 받은 이들은 절망에 빠진 또 다른 이들에게 손을 내미는 나비효과.

이들의 마음은 시공간의 한계를 넘어 연결돼 새로운 삶을 이어갈 힘을 주는 빛으로, 그리고 멜로디로 공명한다.


작품 속 등장인물 모두 국가, 사회, 가족 등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하고 버려진 채 절망한 경험이 있지만, 이 그 어떤 보답을 바라지 않고 선의를 보여주고 연대한다.

이들의 행동은 『단순한 진심』 속 등장인물보다 훨씬 적극적이고, 국적과 문화를 초월하는 보편적인 감동을 자아낸다.

동시에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평화로운 일상은 언제든지 깨질 수 있으며, 삶과 죽음의 차이가 종이 한 장 차이에 불과하다는 점도 경고한다.

현재 전 세계에서 실제로 벌어지는 분쟁을 소설과 엮어서 설득력 있게.

작품을 읽다 보면 마치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기분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억만금을 들여도 꺼진 생명을 되살릴 수는 없다.

그렇다면 사람 살리는 일보다 중한 일이 뭐가 있겠는가.

그 당연한 이치를 소설로 다시 한번 배웠다.

빛과 멜로디
빛과 멜로디
정유정 장편소설 『영원한 천국』(은행나무)

데이터로 만든 기억과 정신을 온라인 세계로 옮겨 육신 없이 영생하는 세상.

여러 드라마, 영화, 소설 등에 쓰인 매력적인 소재다.

나 역시 「시간을 되돌리면」이라는 단편소설로 다뤘던 소재이기도 하고.

이 작품은 이 같은 SF소재에 작가의 주특기인 스릴러를 엮은 하이브리드다.


솔직히 뻔하고 흔한 소재다.

뻔하고 흔하다는 건 그만큼 매력적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문제는 어떻게 다루느냐에 달려있다.


작품을 들여다보자.

생전의 모든 기억과 정신을 온전히 유지하면서도 육신으로 느낄 수 있었던 모든 감각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가상 세계 '롤라'의 등장이 임박하고, '롤라' 행 티켓이 유심 형태로 무작위로 뿌려진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뻔하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티켓을 찾으려는 자, 거래하려는 자, 빼앗으려는 자들이 물밑에서 발 빠르게 움직이며 아수라장이 벌어질 것이다.


그런데 살아생전의 모든 기억과 정신을 가지고 영생하는 세상이 과연 천국일까?

글쎄, 지루하지 않을까?

그래서 작가는 여기에 변화구를 던진다.

가상 세계에서 그저 영생하는 데 그치지 않고, 다양한 삶을 살 수 있게 만들어 보도록 말이다.

마치 시뮬레이션 게임 「대항해시대」처럼 한 캐릭터로 엔딩을 본 뒤 다른 캐릭터로 플레이하면서 엔딩을 보며 다채롭게 게임을 즐길 수 있게 말이다.

영원한 삶에 다양한 서사를 더하는 구조, 과연 소설가다운 발상이다.


제목과 달리 영원한 천국은 없다는 게 작가의 생각으로 읽힌다.

'롤라' 같은 세상에서 산다고 해도, 인간은 끝까지 자기 욕망을 끌어안고 버티며 괴로워할 존재라고.

인간은 설계된 안락한 삶 속에서도 끝끝내 설계도 밖을 벗어나야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존재라고.

그런 '야성'이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요소가 아니냐고 작가는 묻는다.

동시에 우리가 '야성'이 점점 희미해지고 있는 세상을 살고 있는 게 아니냐고 반문한다.

작가의 생각에 동의한다.


마냥 쉽게 읽히는 작품은 아니다.

전작들과 비교하면 구조가 다소 복잡한 데다, 정신없이 페이지를 넘기다가도 놓친 부분이 있는 것 같아 다시 수십 페이지 전으로 돌아가는 일도 잦았다.

하지만 전작들이 그래왔듯이 이 작품 또한 두껍긴 해도 그 두꺼움을 잊어버릴 만큼 잘 읽히고, 결말이 미칠 듯이 궁금할 정도로 흥미롭다는 건 여전하다.


간만에 거장이 거장답게 쓴 장편소설을 만났다.

리스펙!!!

영원한 천국
영원한 천국
유은지 장편소설 『귀매』(문학동네)

읽으면서 영화 「파묘」를 보는 기분이 들었다.

「파묘」의 소재는 일본 요괴인 '오니'이고, 이 작품의 소재 역시 요괴의 일종으로 우리에겐 낯선 '귀매'다.

또한 이 작품도 「파묘」처럼 무속 신앙뿐만 아니라 일제강점기와 친일파 등을 다루기 때문에 기시감이 많이 들었다.

이 작품은 2002년에 출간된 원작의 개정판이니, 「파묘」가 이 작품을 닮았다고 말하는 게 옳겠다.


이 작품은 우연히(알고 보면 철저한 계획에 따라) 마을 제의 연구를 위해 부산 다대포를 찾았다가 초자연적인 사건에 얽힌 대학생들의 개고생을 그린다.

이 과정에서 일제강점기 당시 다대포에서 벌어진 비극과 누군가의 거대한 탐욕이 드러나고, 이에 따라 마을에 쌓인 원한이 넘쳐흘러 위험수위에 다다른다.

등장인물들은 각자의 영능력과 문화인류학이라는 전공지식(전통문화, 민속, 무속 등)을 살려 난관을 헤쳐 나간다.

작품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공포스럽기보다 축축하고 음산하다.

더운 날 밤에 홀로 조용히 방에 앉아서 이 작품을 읽으니 등골이 서늘해졌다.

작품 속 설정이 허구가 아니라 실제 전통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마냥 미신으로만 느껴지진 않는다.


「파묘」 이전에도 이미 한국의 정서와 문화를 담은 오컬트 호러물이 있었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 작품의 의미가 있겠다.

재미있게 읽었지만, 꽤 큰 기대를 하고 읽었기 때문에 아쉬움이 없진 않다는 말은 보태야겠다.

「파묘」 이전에 이 작품이 있었지만, 이 작품 이전에 이미 『퇴마록』이 있었으니 말이다.

이 작품을 덮으며 『퇴마록』이 얼마나 대단한 작품인지 새삼 느꼈다.

한국 오컬트의 시조새가 『퇴마록』인데, 이를 능가하는 작품이 아직도 나오지 않고 있는 걸 보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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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사/책증정] 일과 나 사이에 바로 서는 법 《그대, 스스로를 고용하라》 함께 읽기[김영사/책증정] 천만 직장인의 멘토 신수정의 <커넥팅> 함께 읽어요![김영사/책증정] 구글은 어떻게 월드 클래스 조직을 만들었는가? <모닥불 타임> [김영사/책증정] 《직장인에서 직업인으로》 편집자와 함께 읽기
같이 연극 보고 원작 읽고
[그믐연뮤클럽] 7. 시대와 성별을 뛰어넘은 진정한 성장, 버지니아 울프의 "올랜도"[그믐연뮤클럽] 6. 우리 소중한 기억 속에 간직할 아름다운 청년, "태일"[그믐연뮤클럽] 5. 의심, 균열, 파국 x 추리소설과 연극무대가 함께 하는 "붉은 낙엽"[그믐연뮤클럽] 4. 다시 찾아온 도박사의 세계 x 진실한 사랑과 구원의 "백치"
같이 그믐달 찾아요 🌜
자 다시 그믐달 사냥을 시작해 볼까? <오징어 게임> x <그믐달 사냥 게임> o <전생에 그믐달>
8월에도 셰익스피어의 작품 이어 낭독합니다
[그믐밤] 38. 달밤에 낭독, 셰익스피어 4탄 <오셀로>[그믐밤] 37. 달밤에 낭독, 셰익스피어 3탄 <리어 왕> [그믐밤] 36. 달밤에 낭독, 셰익스피어 2탄 <맥베스> [그믐밤] 35. 달밤에 낭독, 셰익스피어 1탄 <햄릿>
🐷 꿀돼지님의 꿀같은 독서 기록들
은모든 장편소설 『애주가의 결심』(은행나무)최현숙 『할매의 탄생』(글항아리)조영주 소설·윤남윤 그림 『조선 궁궐 일본 요괴』(공출판사)서동원 장편소설 『눈물토끼가 떨어진 날』(한끼)
이디스 워튼의 책들, 지금 읽고 있습니다.
[그믐클래식 2025] 8월, 순수의 시대[휴머니스트 세계문학전집 읽기] 3. 석류의 씨
공 출판사의 '어떤' 시리즈
[도서 증정] 응원이 필요한 분들 모이세요. <어떤, 응원> 함께 읽어요.[꿈꾸는 책들의 특급변소] 차무진 작가와 <어떤, 클래식>을 읽어 보아요.
🎁 여러분의 활발한 독서 생활을 응원하며 그믐이 선물을 드려요.
[인생책 5문 5답] , [싱글 챌린지] 완수자에게 선물을 드립니다
이렇게 더워도 되는 건가요?
[책걸상 '벽돌 책' 함께 읽기] #25. <일인 분의 안락함>기후위기 얘기 좀 해요![책걸상 '벽돌 책' 함께 읽기] #11. <화석 자본>무룡,한여름의 책읽기ㅡ지구를 위한다는 착각
8월 7일(목) 오후 7시 30분 / 저자 배예람X클레이븐 동시 참여 라이브 채팅⭐
[텍스티] 텍스티의 히든카드🔥 『당신의 잘린, 손』같이 읽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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