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45
"우리가 사라지면 암흑이 찾아온다"

부지런히 읽고 흔적을 남깁니다

글로 남기는 나만의 기록장
전체보기(366)
이유리 소설집 『비눗방울 퐁』(민음사)

작가의 대표작이자 데뷔작인 소설집 『브로콜리 펀치』를 읽고 느꼈던 기분이 지금도 생생하다.

현실적이면서 비현실적이고, 익숙한데 낯설며, 웃기면서도 슬프고, 경쾌하나 우울한...

어렵지만 형용사 하나로 그때 느낀 기분을 요약하자면 '명랑하다' 정도 되겠다.

돌아서서 생각해 보면 심각한 이야기인데도, 읽고 나면 괜히 기분이 좋아지는 작품의 모음이었다.

경험하지 못하면 제대로 쓰지 못하는 나로서는 다채로운 상상력이 정말 부러운 작가다.

국내 작가 중에서 이 정도로 다채로운 상상력을 읽기 쉬운 문장으로 풀어내는 작가가 더 있을까 싶다.


이 소설집을 읽고 느낀 감정은 데뷔작과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슬픔과 우울함의 농도가 조금 짙어졌다고 해야 하나.

이 소설집에 담긴 여덟 작품 대부분이 이별이나 죽음을 다루고 있기 때문일 테다.

하지만 절망적인 상황을 절망적이지 않게 보여주는 데 탁월하다 보니, 그런 기분에 깊게 빠져들 새도 없이 웃어넘기게 하는 매력이 있다.

지독한 상황인데도 지독한 문장이 하나도 없다.

그래서 종종 낭만적으로 느껴질 때도 많았다.

당황스럽지만 말이다.


이별과 죽음을 다룬 이야기와 '명랑하다'는 형용사는 내겐 양립하기 어려운 단어인데, 이 소설집에선 어처구니없이 부드럽게 가능해진다.

가볍지만 무겁다는 표현도 이 소설집에선 가능하다.

SF나 판타지 요소가 자주 쓰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현실도피나 정신 승리는 아니다.

억지스러운 해피엔딩은 없다.

오히려 사태를 똑바로 파악하고 자기 객관화를 하는 메타인지에 가깝다.

이별 뒤에 남는 존재는 나뿐임을 깨닫고, 그 자리에서 다시 운동화 끈을 고쳐 맨 뒤 일상을 다시 시작하는 방식이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고 말하는 스칼렛 오하라처럼.


담백하면서도 아름답게 반짝이는 무언가가 참 좋았던 소설집이다.

비눗방울 퐁
비눗방울 퐁
단요 장편소설 『피와 기름』(래빗홀)

제동 장치가 작동하지 않는 기차가 선로 위를 달리고 있다.

선로 위에는 다섯 사람이 있다.

선로를 바꾸지 않으면 그들은 죽는다.

선로를 바꾸면 그들은 살지만, 바뀐 선로에 있는 사람 한 명은 죽는다.

당신 앞에 선로를 바꾸는 손잡이가 있다.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 텐가?

소수를 위한 다수의 희생과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을 윤리 관점에서 바라본 '트롤리 딜레마'다.


비슷한 문제를 내보겠다.

눈앞에 보이는 소수를 살리기 위해 전 인류를 지옥에 살도록 내버려두는 게 옳은 일인가.

당신에게 세상을 끝낼 수 있는 권능이 있다면 그 권능을 어떻게 사용할 텐가.

이 문제를 신학이라는 관점에서 풀어내면 어떤 결론을 낼 수 있을까.

이 작품의 중요한 질문이다.

나는 이 질문에 "버리는 놈 따로 있고 치우는 놈 따로 있어서 굴러가는 게 세상"이라고 대답했다.

다른 독자의 대답이 궁금하다.

정답은 없다.


대단히 지적이고 도발적이다.

읽는 내내 압도당하는 기분을 느끼긴 오랜만이었다.

신학을 비롯해 철학, 역사 등 다양한 학문 분야의 깊은 지식을 무기로 쉽게 답할 수 없는(하지만 필요한) 여러 무거운 질문을 쏟아내며 독자를 코너로 몬다.

동시에 서사는 액션 영화 못지않게 흥미진진하다.

박상륭 작가의 소설을 읽기 쉽게 쓰면(그래도 어렵다)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싶었다.

나는 절대로 쓰지 못할 내공을 가진 소설이다.


고백하자면 작품의 절반도 이해하지 못했다.

나중에는 이해하길 포기하고 이야기의 흐름만 따라갔다.

어쩌면 내가 훗날에 천재 소리를 들을지도 모를 작가를 마주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전율이 일었다.

특정 종교 신자는 이 작품에 불쾌감을 느낄지 모르겠지만, 이 작품은 어디까지나 소설이다.

올해 읽게 될 소설 중에 이런 기분을 느끼게 할 소설이 더 있을지 모르겠다.

그만큼 대단했다.

피와 기름
피와 기름
정명섭 소설 『조종자』(꿈꾸는섬)

핵전쟁으로 자멸한 인류는 지구 대신 갈아탈 새로운 행성을 찾는 데 성공하지만, 도망친 곳에는 천국도 낙원도 없다지 않은가.

안에서 새는 바가지가 밖에서도 새듯 새로운 세계에서도 인류는 서로 반목하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미지의 괴물들이 살아남은 인류를 공격해 위기에 빠트린다.

그런데 일부 괴물이 인류를 보호하고 괴물을 공격하는 희한한 일이 벌어진다.

도대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거고, 인류의 미래는 어떻게 되는 걸까.


필립 와일리의 SF 소설 『지구의 마지막 날(When Worlds Collide)』이 더 보여주지 않은 미래 세계(다만 비관적인)에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속 주인공이 더해지면 이런 이야기가 만들어지지 않을까 싶었다.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 극단적인 기후 변화, 그로 인한 환경 파괴 등 지금도인류를 위협하는 여러 문제를 낯선 환경에서 흥미롭게 펼쳐낸다.


이 작품을 읽고 엉뚱하게도 나는 오래전 훈련소 시절을 떠올렸다.

나는 고도 근시 때문에 신체 검사에서 4급을 받아 공익근무요원으로 복무했다.

그런데 훈련소에서 만난 훈련병 중에 나처럼 신체 문제로 4급을 받은 경우는 거의 없었다.

당장 내가 속한 내무반의 훈련병 20명 중에서 신체 문제로 4급을 받은 사람은 나뿐이었고, 

19명은 학력 미달로 4급을 받았고, 신체가 현역보다 훨씬 건장한 녀석이 많았다.

그리고 그들 중 상당수는 '생활'(조폭 조직원)을 하다가 끌려온 녀석이었다.

극단적으로 자유가 제한된 공간에 맹수들이 모였다.

나는 살면서 그때만큼 약육강식의 긴장감을 강하게 피부로 느낀 적이 없다.

법과 규칙이 없는 세상이 얼마나 야만적으로 돌아갈 수 있는지 간접 경험했다.

더불어 인간이 이렇게 밑바닥일 수도 있다는 사실에 경악했었다.


인간성의 밑바닥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때는 극한 상황에 처해있을 때 아니던가.

이런 상황에서 당신은 어떻게 하겠느냐는 질문이 묵직하다.

끝이 안 보이는데 남은 페이지가 많지 않아서 의아했는데, 다음 편도 나오는 모양이다.

주인공의 선택은 무엇일지 궁금하다.

조종자
조종자
전민식 장편소설 『길 너머의 세계』(은행나무)

'수목장'이라는 흔치 않은 공간을 다룬 작품이다.

이 작품의 세 주인공은 저마다 드러나지 않은 사연을 가진 채 '수목장'이라는 직장에 모여 인연을 맺는다.

같은 직장에서 월급을 받는 사람 사이의 관계는 대체로 가깝고도 멀다.

서로가 서로를 궁금하게 여기는데, 굳이 깊이 들어가려 하지 않고,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는.

하지만 가족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하는 관계여서 어려운 일을 함께 치르면 누구보다 끈끈해지기도 한다.

이 작품은 그저 그런 관계로 시작한 세 주인공이 서로가 서로에게 비빌 언덕을 만들어주면서 깊은 유대 관계를 쌓는 과정을 따뜻하고 섬세하게 보여준다.


끝까지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 수목장 사장, 늦은 밤에 종종 벌어지는 암장, 비극적이면서도 의문이 가득한 죽음...

이렇게 말하니 무슨 범죄 소설 같은데, 그렇게 보였다면 오해다.

내용이나 결은 다르지만 김훈 작가의 장편소설 『내 젊은 날의 숲』을 읽을 때 느꼈던 감정과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작품 전반에서 느껴지는 감정선의 기복이 잔잔한데, 그 잔잔함이 쌓여 만들어지는 무게감이 상당하다.

페이지를 넘기는 내내 나무 냄새와 풀냄새가 느껴졌고, 안타까운 죽음을 다루는 깊은 시선 앞에서 숙연해지기도 했다.

여러 죽음을 앞에서 사연 많은 세 주인공이 각자의 상처를 극복하고 삶의 희망을 찾는 과정이 감동적이다. 


하지만 이렇게 끝내는 게 최선이었을까.

주인공과 등장인물 모두 희망을 찾고 행복해지긴 했지만. 이런 식의 해피엔딩을 기대하진 않았는데.

초중반과 후반은 서로 다른 장르의 소설 같았다.

독자마다 취향이 다르니 이런 엔딩을 좋아할 독자도 있겠지만, 나는 영화 「파묘」의 후반부를 보고 느꼈던 허탈함과 비슷한 기분을 느꼈다.

초중반의 분위기가 끝까지 이어졌다면, 훨씬 큰 작품이 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쉬움이 컸다.

길 너머의 세계
길 너머의 세계
손더 장편소설 『시간도둑』(한끼)

시간이 지나치게 빨리 흐른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나이가 들수록 그런 기분을 느낄 때가 점점 많아지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달력을 살펴보며 깜짝 놀랐다.

벌써 5월 말이라고?

벌써 1년의 절반 가까이가 지나가 버렸다고?

제대로 한 일도 없는데 벌써?

혹시 내 시간을 도둑질하는 놈이 있는 건 아닐까?

이 작품은 그런 발칙한 상상에서 시작한다.


이 작품은 기발한 설정 위에 서 있다.

인간은 평행우주 일곱 곳에서 각각 살아가고 있고 200년의 시간을 공유한다. 

누군가가 의미 없이 쓴 시간을 회수해 보관했다가 죽음 이후에 쓸 수 있게 하는 '균형자'라는 존재가 있다.

더불어 누군가를 죽여서 그가 가진 시간을 회수하는 '처리자'라는 존재도 있는데, 이들은 '균형자'와 별개로 움직인다.

이 작품은 '처리자'에게 죽임을 당할 위기에 처한 주인공을 구하려고 애쓰는 '균형자'들의 개고생을 그린다.

내용과 결은 다르지만, 문목하 작가의 장편소설 『돌이킬 수 있는』이 떠올랐다.


분량이 상당한 작품인데, 주인공을 둘러싼 '균형자'와 '처리자'의 꼬리를 무는 추적이 긴장감 있게 펼쳐져 지루하지 않다.

죽은 자들이 삶이 끝난 뒤에 자기에 주어진 시간을 자기가 아닌 누군가의 행복을 위해 쓰는 모습도 감동적이다.


기억에 오래 남는 문장이 있다. 

"바쁘게 일한다고 의미 있는 시간은 아냐. 널 위해 쓰는 시간인지가 중요한 거지."

올해 들어와 내게 가장 의미 있었던 시간이 언제인지 헤아려봤다.

마당에 혼자 지은 원두막에 누워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던 순간이 먼저 떠올랐다.

삶이 풍성해지려면 그런 기억이 많아져야겠구나.

책을 덮으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시간 도둑 - 사라진 시간의 비밀
시간 도둑 - 사라진 시간의 비밀
김유진 장편소설 『평균율 연습』(문학동네)

소설 제목을 보면 어떤 이야기를 담은 작품인지 대충 짐작할 수 있는데, 이 작품 앞에선 짐작이 모두 빗나갔다.

나는 이 작품이 피아노 연주자를 주인공으로 세우고,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을 소재로 다룬 장편소설일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주인공의 직업이 편집자여서 짜게 식었다.

작품의 주인공이 작가이거나, 출판사 관계자이거나, 대학 관계자면 한숨부터 나오는 건 어쩔 수 없다.

한국 작가들의 경험치와 시야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 같아서 말이다.

기대감을 완전히 내려놓고 페이지를 넘기기 시작했는데, 짜게 식었던 마음이 슬슬 사라졌다.

피아노 조율사로 전직을 준비하는 편집자에 관한 이야기였고, 직업 묘사가 대단히 디테일해 놀랐다.


나는 피아노는 몰라도 기타는 오랫동안 만져왔기에, 이 작품을 읽으며 자연스럽게 기타 조율 과정을 떠올렸다.

기타를 조율하는 방법으로는 레귤러 튜닝, 하모닉스 튜닝이 있다.

가장 많이 쓰이는 조율 방법은 이름으로 알 수 있듯이 레귤러 튜닝이다.

먼저 기타의 5번 줄 개방현을 A(라)음으로 맞춘다.

6번 줄 5프렛과 5번 줄 개방현, 5번 줄 5프렛과 4번 줄 개방현, 4번 줄 5프렛과 3번 줄 개방현, 3번 줄 4프렛과 2번 줄 개방현, 2번 줄 5프렛과 1번 줄 개방현의 음정을 맞추면 조율이 끝난다.

여기에 하모닉스 튜닝을 더하면 조금 더 정확하게 조율할 수 있다.

기타 줄 위 특정 지점에 가볍게 손가락을 댄 채 줄을 튕기면서 바로 손가락을 떼면, 프렛을 눌렀을 때와 다른 종소리와 비슷한 소리를 낼 수 있다.

쓰다 보니 길어져서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튜너(비싸지도 않다)를 쓰면 간단히 순정률에 맞춰 조율할 수 있는데, 그렇게 조율한 뒤 코드를 잡고 기타 줄을 쓸어내리면 미묘하게 음정이 맞지 않아 귀에 거슬릴 때가 있다(주로 싸구려 기타가 그렇다).

그럴 때는 하모닉스 튜닝으로 조율하면 음정이 맞춰지곤 한다.

각각의 줄이 들려주는 음정은 정확한 음정에서 미세하게 벗어나 있는데, 희한하게도 정확하게 순정률에 따라 조율했을 때보다 조화를 이룬다.


이 작품의 주인공을 비롯해 주변 인물 모두 적당히 망한 사람이다.

자살을 생각할 만큼 벼랑 끝에 내몰린 게 아니라, 절망하지 않을 만큼만 무너진.

이 작품은 누구나 한 번쯤 경험해 봤을 만큼의 수준만 무너진 사람들이 일상을 회복하는 과정과 심리를 피아노 조율에 빗대 섬세하게 그린다.

등장인물 모두 내 주변 어딘가에 존재할 법해서 친근하면서도 때로는 가여웠다.


우리는 원하든 원치 않든 주어진 환경에서 지금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삶이란 결국 불완전함을 받아들이는 과정일 테다.

당연하면서도 어려운, 그러면서도 필요한 이야기를 이 작품을 통해 읽었다.

평균율 연습
평균율 연습
앤솔러지 『우리의 연애는 모두의 관심사』(마름모)

'불륜'을 주제로 다룬 앤솔러지라는 소문 때문에 끌려서 읽었는데, 폭싹은 아니고 살짝 속았수다.

책 뒷표지 상단에 "나는 그녀에게 살아 있는 딜도조차 아니었다"는 문장이 떡 하니 박혀 있고, 그 아래에 "사랑에 관해 은폐된 것들/불륜 혹은 금기의 앤솔러지"라는 문장이 달려있으니, 소싯적에 몰래 야설을 돌려 읽었을 때처럼 설렜을 수밖에.

사실 이 앤솔러지의 주제는 '불륜'보다는 '금기'에 방점이 찍혀 있다.

'불륜'을 주제로 다뤘다는 소문은 마케팅을 위한 귀여운 어그로로 이해하자.

물론 '불륜'을 다룬 작품도 있으니 100% 어그로는 아니다.


원래 순애보보다 막장극이 보는 맛이 나지 않던가.

이 앤솔러지에 실린 네 작품 모두 화려한 '내로남불'의 향연이다.

작가 이름을 가리고 읽어도 어떤 작가의 작품인지 쉽게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네 작품 모두 개성이 강해 읽는 재미가 있다.


장강명 작가의 「투란도트의 집」은 자코모 푸치니의 오페라 「투란도트」를 모티브로 섹스 파트너(과연 파트너인지 의문이지만) 관계를 다룬다.

철저하게 마음의 벽을 세우고 몸만 오가는 엉망진창 섹스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다가도, 매일 밤 대한민국 어딘가에서 충분히 벌어지고 있을 사건 같아서 현실감이 느껴졌다.

오페라 주인공과 소설 주인공의 심리를 엮은 다양한 층위의 이야기가 사랑이란 무엇이고 섹스란 무엇인지 생각할 거리를 계속 남긴다.


차무진 작가의 「빛 너머로」는 소재 하나하나가 모두 금기인데(심지어 수녀까지 등장한다!), 선을 넘지 않으면서도 처절하게 사랑이 무엇인지 들여다본다.

범죄인 듯한데 범죄는 아닌 연출이 쫄깃해 선을 넘는 게 아닌가 하며 우려했는데(솔직히 기대도 조금 했다), 역시 기우였다.

오히려 오컬트라는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내는 전개가 더 처절하게 다가왔다.

그렇게라도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랑이라니.


소향 작가의 「포틀랜드 오피스텔」은 이 앤솔러지에서 가장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불륜, 치정, 복수 등 기시감이 강하게 드는 이야기를 낯선 공간에서 대단히 매혹적으로(이 단어 외엔 마땅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풀어냈다.

'불륜 혹은 금기의 앤솔러지'와 가장 잘 어울리는 이야기였다.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작업도 중요하지만, 익숙한 주제를 어떤 방식으로 풀어내느냐가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닫게 했다.


정명섭 작가의 「침대와 거짓말」은 말 그대로 정명섭 작가다운 작품이다.

실제 치정 살인 사건을 모티브로 살인 사건과 그 방식을 쫓는 추리소설로 풀어낸다.

여기에 남북의 공조 수사와 밀실 트릭까지, 짧은 분량에 다양한 재미를 담아낸 백화점 같은 단편이다.

페이지를 넘겨 마지막 부분에 이르면, "아까 그게 그거였다고?"하면서 다시 페이지를 뒤로 넘기는 재미가 있다.


여기엔 없지만 앤솔러지 기획에 함께했었다는 정아은 작가가 세상을 떠나지 않았다면 어떤 작품을 실었을까.

그 궁금증을 독자에게 맡긴 채 정아은 작가의 빈 자리를 따로 채우지 않은 구성도 마음에 들었다.

우리의 연애는 모두의 관심사
우리의 연애는 모두의 관심사
도선우 장편소설 『도깨비 복덕방』(나무옆의자)

다음 행보가 정말 궁금했던 작가다.

국내 굴지의 장편소설 공모인 세계문학상과 문학동네 소설상을 동시에 받아 화제를 모았던 작가이니 말이다.

단편소설로 응모하는 신춘문예에선 다관왕이 가끔 등장하지만, 장편소설 공모 다관왕은 그야말로 천운에 가깝다.

장편소설 집필은 단편소설 집필보다 훨씬 품과 많은 시간이 드는 작업이다.

장편소설 공모 경쟁률은 신춘문예보다 낮은 편이지만, 못해도 100대 1은 넘어간다.

단편소설 집필보다 물리적인 진입 장벽이 높아서 허수도 적다.

천운은 물론 실력까지 따라줘야 한다.

21세기 들어와 장편소설 공모에서 이 정도 임팩트를 보여준 작가는 서유미, 장강명뿐이다.

그런 작가의 신작 소식이 지나치게 뜸해서 의아했다.

단편을 전혀 안 쓰는지 문예지나 앤설러지에서도 이름을 볼 수 없었다.

지난해 말에 신간을 살피다가 작가의 이름을 보고 반가워서 바로 작품을 장바구니에 담았다.

읽기까진 반년 넘게 걸렸지만.


이 작품은 작가의 전작 『모조사회』 이후 5년 만의 신작이다.

표지와 제목을 보고 동명이인 작가가 쓴 작품인 줄 알았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유행한 가게를 배경으로 다룬 힐링소설임이 분명했으니까.

작가의 전작과 비교해 결이 많이 다른 작품이다.


이 작품은 주인공이 다른 세 가지 이야기로 이뤄져 있다.

벼랑 끝에 몰린 주인공 앞에 느닷없이 복덕방이 등장하고, 그 복덕방에서 매력적인 제안을 받은 주인공은 낯선 공간에서 '한달살기'와 비슷한 체험을 한다.

깊은 절망 속에서 죽음을 생각하던 주인공들은 그곳에서 삶을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깨닫고 새로운 기회를 만들어나간다.

형식만 보면 연작소설과 비슷한데, 다른 연작소설보다 연결 강도는 강한 편이다.

연작소설과 장편소설 사이의 어딘가에 놓인 형식이 독특했다.


신선한 이야기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술술 읽히고 재미도 있다.

그리고 교훈도 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은 주인공 저마다 마음속에 품은 오해에 관한 이야기였다.

서로 말 한마디만 제대로 나눴어도 풀렸을 오해인데, 그걸 못해서 파국으로 치닫는 모습을 보며 가슴이 답답했다.

나 역시 그런 일이 꽤 있었기 때문에 작품을 읽으며 공감했다.

인간관계에서 손쉽게 손절을 권하는 사회가 옳은지 묻는 대목에선 머릿속에 큰 종이 울리는 기분이 들었다.


지금까지 나는 여러 가지 이유로 많은 사람을 손절해왔다.

인간관계에 딱히 기대가 없다 보니 내 기준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난다 싶으면 바로 관계를 끊어버리곤 했다(물론 상대방은 알 턱이 없다).

그게 정신건강에 좋다고 믿어왔다.

그런데 그 이유가 내 오해였다면?

내가 모르는 다른 사정이 있었다면?

그런 질문을 하게 만든 것만으로도 이 작품을 읽는 시간이 의미 있었다.

도깨비 복덕방 - 신비한 공간을 빌려드립니다
도깨비 복덕방 - 신비한 공간을 빌려드립니다
이릉 장편소설 『쇼는 없다』(광화문글방)

80년대 말부터 90년대 초 사이에 어린 시절을 보낸 남자라면 공통으로 가진 추억의 키워드 하나가 있으니, 바로 프로레슬링이다.

그 시절 프로레슬링의 인기는 정말 대단했다.

동네 비디오 가게에 '로얄럼블', '헐크매니아', '올스타전' 등 경기 영상을 담은 비디오테이프 입고되면 아이들은 일제히 흥분했다.

VHS 비디오테이프 플레이어가 있는 집에 한데 모인 아이들은 함께 영상을 보며 환호했고, 영상이 끝난 뒤에도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아이들은 서로에게 경기 기술을 흉내 내며 놀았다.

마치 군대에서 국가대표 축구 경기를 중계 영상을 함께 보다가 운동장으로 공을 들고 뛰쳐나가는 군인들처럼.

특히 동네에 있는 방방(대전에선 트램펄린을 이렇게 불렀다)은 드롭킥, 스피어 등 레슬러 기술을 재현하기에 최적인 공간이었다. 

나는 WWF가 'World Wrestling Federation'이 아니라 'World Wildlife Fund'의 약자로 쓰인다는 게 아직도 어색하다.

빌어먹을 판다 녀석!


사설이 지나치게 길었다.

아무튼 그런 어린 시절을 보낸 남자라면 이 작품을 읽는 기분이 남다를 테다.

대략적인 내용은 이렇다.

때는 이용의 '잊혀진 계절'이 흘러나오는 10월의 마지막 밤.

주인공은 삼촌이 운영하는 이태원의 싸구려 게스트하우스에서 20년 넘게 일하는 40대 후반 알코올 중독 아재. 

이곳에 주인공의 어린 시절 우상이었던 프로레슬러 워리어가 나타난다.

마침 이태원에는 핼러윈 파티가 열리고 노란 빤쓰를 입은 헐크 호건, 톤파를 든 빅보스맨, 목에 뱀을 두른 제이크 더 스네이크, 돈 자랑하던 밀리언 달러맨 등 왕년의 스타들이 총출동한다.

그리고 뜬금없이 주인공이 링 위에 오른다.

'병맛'이 진하게 느껴지는 설정 아닌가.


실제로 웃픈 개그로 가득한 작품이다.

주인공은 외출복이 없는 워리어에게 최후의 인디언 전사 컨셉 의상을 준다며 국내 브랜드 '인디안' 옷을 주고, 워리어는 그 옷을 마음에 들어 하며 탑골공원에서 일장 연설을 늘어놓는 식이다.

유난히 각주가 많은 소설인데, 빠짐없이 읽어보자.

프로레슬링을 모르는 사람을 위한 설명이라고 보기엔 뭔가 이상하다.

진짜 정보와 관계없는 '병맛'인 각주가 한둘이 아니다.

김홍 작가 소설의 개그와 결이 상당히 비슷하다.


90년대를 관통하는 온갖 '밈'이 가득해 웃음을 자아내지만, 마냥 가볍지만은 않다.

주인공은 청소년 시절에 워리어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헐크 호건을 좋아하는 선배에게 쥐어터져 몸과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다.

학폭이라는 말이 없던 시절이지만, 지금 기준으로 명백히 학폭이다.

그 자리에서 내적 성장이 멈춰버린 채 중년을 맞은 주인공에게 희망이란 게 있을까.

주인공은 워리어 대신 링 위에 올라 헐크 호건과 맞다이를 까는 선택을 한다.

그렇게 죽은 워리어도 죽지 못해 사는 주인공도 부활한다. 


당연히 판타지다.

승패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작품에 드러나지 않는 주인공의 미래는 조금 다를 거라고 확신한다.

어떤 일이든 끝까지 가서 결판을 내 본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과 다르니 말이다.

쉽게 일어서기 어려울 정도로 큰 상처를 입고 좌절했던 사람에게 추천하고 싶다.

쇼는 없다 - 제12회 수림문학상 수상작
쇼는 없다 - 제12회 수림문학상 수상작
안윤 소설집 『모린』(문학동네)

몇 년 전 작가의 데뷔작 장편소설 『남겨진 이름들』을 읽고 감탄했었다.

키르기스스탄을 배경으로 현지인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한국 소설은 상상해 보지 못했으니 말이다.

삶과 죽음을 바라보는 깊은 시선과 섬세하면서도 우아한 문장이 인상 깊은 작품이었다.


이 소설집의 분위기는 데뷔작과 다르지만, 일상적인 소재를 일상적이지 않게 다루는 방식이 좋았다.

등장인물의 심리를 묘사하는 문장 역시 데뷔작처럼 섬세하고 우아하다.

장애에 가로막혀 쉽게 소통하기 어려운 마음을 들여다보고(모린), 가장 가까운 사람에 관해 과연 얼마나 아는지 묻기도 하며(핀홀), 오랜 세월 놓지 못한 마음이 끝내 가닿지 못한 채 사라져 버리기도 한다(작은 눈덩이 하나).

소설의 분위기는 전반적으로 차분한데 그 아래에 깔린 정서는 격정적일 때가 많아서 놀랐다.

말하지 않음으로써 많은 말을 상상하게 만드는 데 탁월한 단편들이었다.


가장 압권이었던 작품은 「담담」이었다. 

이 단편은 긴 연애를 끝내고 방황하는 양성애자와 배우자와 사별한 이성애자가 서로에게 가까워지는 과정을 말 그대로 '담담'하게 그리는데, 서로를 온전하게 이해할 수 없다는 걸 이해하고 적당히 거리를 두는 등장인물의 모습이 그 어떤 연애소설보다 애틋했다.

근래 읽은 단편 중 가장 아름다우면서도 슬펐다.


책을 덮을 때 문득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서 '박동훈'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인간이 그렇게 한 겹이야?

모린
모린
[책나눔 이벤트] 지금 모집중!
[다산북스/책 증정] 『모든 계절의 물리학』을 저자 & 편집자와 함께 읽어요![도서 증정] <문제적 여성들의 북클럽> 번역가와 함께 읽기
💡독서모임에 관심있는 출판사들을 위한 안내
출판사 협업 문의 관련 안내[모임] 간편 독서 모임 만들기 매뉴얼 (출판사 용)
그믐 새내기를 위한 가이드
그믐에 처음 오셨나요?[메뉴]를 알려드릴게요. [그믐레터]로 그믐 소식 받으세요
송승환 시인과 함께 시를 읽습니다
[문학실험실/신간] 송승환 시집『파』(문학실험실, 2026) 출간 이벤트. 시집 완독회!송승환 시인. 문학평론가와 함께 보들레르의 『악의 꽃』 읽기.황현산 선생님의 <밤이 선생이다> 읽기 모임보들레르 산문 시집 <파리의 우울> 읽기 1
새벽엔 느낌 좋은 소설로 하루 시작해요
[느낌 좋은 소설 읽기] 1. 모나의 눈[느낌 좋은 소설 읽기] 2. 오버스토리
버지니아 울프의 다섯 가지 빛깔
[그믐밤] 28. 달밤에 낭독, <우리는 언제나 희망하고 있지 않나요>[서울외계인] 버지니아 울프, 《문학은 공유지입니다》 읽기<평론가의 인생책 > 전승민 평론가와 [댈러웨이 부인] 함께 읽기[그믐연뮤클럽] 7. 시대와 성별을 뛰어넘은 진정한 성장, 버지니아 울프의 "올랜도"[아티초크/책증정]버지니아 울프의 가장 도발적인 에세이집 『누가 제인 오스틴을 두려워하랴』
4월 16일, 체호프를 낭독합니다
[그믐밤] 46. 달밤에 낭독, 체호프 4탄 <벚꽃 동산> [그믐밤] 45. 달밤에 낭독, 체호프 3탄 <바냐 아저씨>[그믐밤] 43. 달밤에 낭독, 체호프 2탄 <세 자매>[그믐밤] 40. 달밤에 낭독, 체호프 1탄 <갈매기>
싱글챌린지로 읽었어요
아니 에르노-세월 혼자 읽기 챌린지숨결이 바람 될 때MT 법학 싱글 챌린지밀크맨 독파하기
스토리 탐험단이 시즌 2로 돌아왔어요
스토리탐험단 시즌2 : 장르의 해부학 1. 호러스토리탐험단 10번째 여정 <내 안의 여신을 찾아서>스토리 탐험단 9번째 여정 <여자는 우주를 혼자 여행하지 않는다>스토리 탐험단 8번째 여정 <살아남는 스토리는 무엇이 다른가>
유디테의 자본주의 알아가기
지긋지긋한 자본주의왔다네 정말로 자본주의의종말
제발디언들 여기 주목! 제발트 같이 읽어요.
[아티초크/책증정] 구병모 강력 추천! W.G. 제발트 『기억의 유령』 번역가와 함께해요.(7) [제발트 읽기] 『토성의 고리』 같이 읽어요(6) [제발트 읽기] 『전원에서 머문 날들』 같이 읽어요[제발디언 참가자 모집] 이민자들부터 읽어 봅시다.
🎁 여러분의 활발한 독서 생활을 응원하며 그믐이 선물을 드려요.
[인생책 5문 5답] , [싱글 챌린지] 완수자에게 선물을 드립니다
동구권 SF 읽어보신 적 있나요?
[함께 읽는 SF소설] 10.이욘 티히의 우주 일지 - 스타니스와프 렘[함께 읽는 SF소설] 09.우주 순양함 무적호 - 스타니스와프 렘[함께 읽는 SF소설] 08.솔라리스 - 스타니스와프 렘[함께 읽는 SF소설] 11.노변의 피크닉 - 스트루가츠키 형제
그믐의 흑백요리사, 김경순
브런치와 디저트 제대로 만들어보기ㅡ샌드위치와 수프디저트와 브런치 제대로 만들어보기솥밥 제대로 만들어보기
혼자 읽어서 오히려 깊이 읽은 책들
<인간의 대지> 오랜만에 혼자 읽기 『에도로 가는 길』혼자 읽기천국의 열쇠 혼자 읽기
웰다잉 오디세이 1분기에 이 책들을 읽었어요
[웰다잉 오디세이 2026] 3. 이반 일리치의 죽음[웰다잉 오디세이 2026] 2. 죽음을 인터뷰하다 [웰다잉 오디세이 2026] 1. 죽음이란 무엇인가
독서모임에도 요령이 있나요?
도스토옙스키와 29일을[그믐밤] 7. 북클럽 사용설명서 @시홍서가
모집중밤하늘
내 블로그
내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