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45
"우리가 사라지면 암흑이 찾아온다"

부지런히 읽고 흔적을 남깁니다

글로 남기는 나만의 기록장
전체보기(334)
심필 장편소설 『어제 만나자』(서랍의날씨)

장편소설이 장편답지 않게 점점 짧아지는 세상에서, 어지간한 장편소설 두 권 이상 분량의 작품이라니.

그런데 경장편소설보다 빨리 읽히고, 순식간에 페이지가 넘어간다.

600페이지가 넘어가는 두께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주인공은 50대 퇴물 건달로 마약 범죄에 얽혀 동생을 잃은 채 산채로 관에 갇혀 죽음만 기다리는 처지에 놓여 있다.

어이없게도 정신을 잃었다가 눈을 뜨니 전날 아침에 깨어나고, 다시 잠에 들었다가 눈을 뜨니 이틀 전 아침이다.

한번 잠이 들 때마다 주인공은 하루씩 과거로 역행한다.

미래를 아는 주인공은 과거로 돌아가 동생을 죽인 원수와 자신에게 엿을 먹인 놈들에게 복수를 시도하려 하나 문제가 있다.

아직 동생을 죽이지 않은 과거의 원수를 미리 죽이는 게 과연 옳은 일인가?

어떤 명분을 만들어야 원수를 죽일 수 있을지를 두고 주인공은 나름 치열한 두뇌 게임을 벌인다.


설정이 이러하니 판타지나 타임슬립물이 아닌가 싶겠지만, 그렇다고 보기에는 애매하고 서글프다(왜 그런지는 읽어야만 이해할 수 있다).

이 설정에 관한 설명은 스포일러여서 생략하겠는데, 무척 신선하고 동시에 무척 허무하다.

이런 복수가 과연 무슨 의미일까.

과연 복수이기나 한 걸까.

 

읽는 내내 땀 냄새와 피 냄새가 진동하는 피카레스크였다.

정을 줄 만한 등장인물이 하나도 없다.

폭력이나 마약을 미화하지도 않는다.

그저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비정한 모습만 보여줄 뿐이다.

영화에 비유하자면 샘 패킨파의 「와일드 번치」나 쿠엔틴 타란티노의 「저수지의 개들」을 봤을 때와 비슷한 기분을 느꼈다.

더럽고 찝찝한데 흥미롭다.

어제 만나자
어제 만나자
박산호 산문집 『긍정의 말들』(유유)

17년 전 봄, 고향에서 어머니 장례식을 치르고 서울에 있는 고시원으로 돌아온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청소였다.

20대 전부를 함께 했던 연인에게서 이별 통보를 받은 날에도 나는 반지하 원룸을 청소했다.


이 산문집에 담긴 문장 "어떻게 '여자들'은 항상 더러워진 것을 바꿀 힘이 있을까(마이아 에켈뢰브 『수없이 많은 바닥을 닦으며』)와 이에 얽힌 작가의 이야기를 읽으며 방바닥을 빗자루로 쓸고 물걸레로 닦으며 괴로움을 삭이던 순간들을 떠올렸다.


나는 괴로운 일이 있으면 청소를 하곤 했다.

생활 공간이 어지러워지면 마음도 어지러워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청소는 내가 부정적인 감정에 매몰되지 않게 해준 일종의 의식이었다.


부정적인 감정보다는 긍정적인 감정이 여러모로 사는 데 도움이 된다.

이 산문집은 고전, 애니메이션, 문학, 산문집, 드라마 등에서 발췌한 100가지 문장을 재료로 삼아 작가가 삶을 통해 깨달은 긍정적 사고의 힘을 진솔하게 풀어낸다. 

때로는 자학하고, 때로는 자부심을 드러내기도 하면서.

긍정적 사고가 작가의 삶에 어떤 변화를 줬는지 엿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특히 창작 활동을 하는 독자라면 공감이 가는 부분이 많을 터다.


편집자가 굳이 출판사로 작가를 불러 망신에 가까운 피드백을 전할 때 작가는 "인생에서 성공하는 한 가지 비결은 좋아하는 음식을 먹고 힘내서 싸우는 것"이라는 마크 트웨인의 말을 새기며 와신상담하고, 언제나 상상 그 이하를 보여주는 인세 앞에서 "체념이란 하루하루 자살하는 것과 같다"는 오노레 드 발자크의 말을 새기며 전의를 다진다. 


책이 팔리지 않는 시대에 좌절하지 않는 대신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간 다음 뒤로 한 발 물러서는 것은 재앙이 아니라 차차차를 추는 것"(로버트 브롤트)이라는 문장을 떠올리며 끊임없이 쓰겠다고 다짐한다.


다른 사람의 평가에 휘둘려 스트레스를 받기보다 "때로는 다른 사람이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는 게 건강에 좋다"(앨라니스 모리셋)는 말도 쉽게 넘기기 어렵다


자기 확신이 부족할 땐 "긍정은 길을 찾는다"(UCLA 모토)와 "괴물은 실재한다. 유령 또한 실재한다. 그것들은 우리 안에 살고 있고 때로 우리를 이긴다"(스티븐 킹) 같은 문장과 작가의 경험이 꽤 힘이 퇼 테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는 위안과 함께.


가장 마음속에 깊이 들어왔던 문장은 "성공의 전략은 간단하다. 최대한 집적거려라"(나심 니콜라스 탈레브 『블랙 스완』)였다.

공저를 빼고 내 이름으로 낸 단행본이 10권인데, 대놓고 베스트셀러라고 말할 작품이 솔직히 하나도 없다.

초쇄나 소화하면 감사할 일이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스러운 결과가 나오면 의기소침해지는데, 이 산문집을 읽고 할 수 있는 데까지 집적거려봐야겠다는 생각을 다졌다.

더불어 진심으로 다른 사람의 행복을 응원해 그 복을 나눠 받아야겠다는 생각도 함께.

긍정의 말들
긍정의 말들
정은경·이동은·오세연 『여름을 달려 너에게 점프!』(안전가옥)



영화계 출신 소설가들이 많아졌다.

장편소설 『고래』를 쓴 천명관 작가, 『아몬드』를 쓴 손원평 작가, 『불편한 편의점』을 쓴 김호연 작가, 『급류』를 쓴 정대건 작가, 『미러볼 아래서』를 쓴 강진아 작가 등 당장 떠오르는 이름만 헤아려 봐도 손가락이 모자란다.

서사가 분명하게 드러나고 영상이 눈앞에 바로 떠오른다는 점에서 영화계 출신 소설가들이 쓴 작품을 좋아한다.


이 앤솔로지는 참여 작가 모두가 영화감독 출신이라는 점에서 독특하다.

영화감독 출신 작가의 작품만을 모은 앤솔로지는 아마도 이 책이 처음이 아닌가 싶다.


정은경 감독이 쓴 「두근두근 꾸륵꾸륵」은 90년대를 배경으로 10대 고등학생 소녀 탁구 선수들을 등장인물로로 내세워 그 시절 사랑의 복잡미묘한 감정을 섬세하게 다룬다. 88올림픽, 드라마 「질투」, 가수 강수지, 탁구선수 현정화 등 그 시절의 아이콘을 매개로 제대로 추억 여행을 했다. '급똥'이 꽤 중요한 소재인데 전혀 더럽지 않다. 몹시 귀엽다.


이동은 감독이 쓴 「여름을 찾아서」는 가상현실 체험이라는 소재를 통해 주인공의 불완전한 기억을 복원하고 상처에서 벗어나는 과정을 그린 SF다. 우라사와 나오키의 「21세기 소년」 후반부에 등장하는 가상현실 체험을 연상케 하는 연출이었는데, 그보다 훨씬 아름답고 애절한 묘사가 돋보였다. 


오세연 감독이 쓴 「매실과 짝피구」는 첫사랑의 열병을 앓는 10대의 마음을 간지럽게 표현한 로맨스다. 주인공의 일기장을 몰래 엿보는 기분을 느끼게 하는 구성, 체육 선생님과 짝꿍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주인공의 심리를 따라가다 보면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영화감독들이 쓴 소설인 만큼 작품 하나하나의 질감이 기존 앤솔로지와 꽤 다르다.

마치 하이틴 로맨스 영화 세 편을 옴니버스로 감상한 기분이 들었다(영상화를 염두에 두고 소설을 썼음이 확실하다).

시원한 색감의 표지만큼 상큼하고 동시에 애틋하다.

기분 좋게 책을 덮었다.

간질간질한 기분을 오랜만에 느껴봤다.

여름을 달려 너에게 점프!
여름을 달려 너에게 점프!
김설아 외 4인 『환상의 댄스 배틀』(책담)

춤에는 젬병이다.

내 기억 속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췄던 춤은 대학교 신입생 시절에 뭣도 모르고 운동권 선배들 손에 이끌려 꽃다지의 노래 '바위처럼'에 맞춰 따라 했던 율동이다.

율동을 따라 할 때 무척 부끄러웠던 기억이 난다.

그 시절에 오락실에서 DDR이나 펌프가 대단한 인기를 끌었는데, 쳐다보지도 않았음은 물론이다.

최근에 '스우파'가 화제를 모았을 때도 별 감흥이 없었다.

그래도 궁금하긴 했다.

도대체 무슨 매력 때문에 춤에 열광하는 사람이 많은지 말이다.


이 앤솔로지는 춤 좀 춰봤다는 작가 다섯 명이 쓴 단편소설을 모았다.

다섯 단편 모두 현재의 고민과 결핍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춤을 내세운다는 점은 같지만, 저마다 다른 배경을 가진 작가들이 쓴 작품인 만큼 이야기가 다채롭다.


피아노 연주자를 꿈꾸다가 기연을 만나 댄서를 꿈꾸며 행복을 찾기도 하고(춤추는 동전), 쌍둥이 동생 대신 꿈꾸던 무대에 올라 아슬아슬한 상황을 겪기도 한다(꿈을 꾸며).

발레리나로서 가지지 못한 장점에 좌절하는 대신 자신만의 장점을 살려 한 발 나아가기도 하고(비 플러스), 누군가에겐 평범함에서 벗어나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걸 파이터).

그중에서도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어린 시절과 딸이 탭 댄스를 매개로 조우하는 「유성우가 내리는 날」이 인상적이었다. 유성우라는 배경 아래에서 과거와 현재를 교차시키는 연출이 환상적이었다.


읽는 내내 풋풋한 성장 드라마를 보는 기분이 들어서 상큼했다.

작가들이 왜 춤을 추고 왜 소설을 썼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환상의 댄스 배틀
환상의 댄스 배틀
박재영 산문집 『K를 팝니다』(난다)

송나라 사신 서긍이 쓴 『고려도경』은 당대 고려의 모습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사료이지만, 왕실 계보 서술이 엉망이고 고구려와 고려의 역사가 뒤섞여있는 등 오류가 적지 않다.

외국인이 외국인의 시각으로 쓴 책의 한계다.

오류 없이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전달할 가장 좋은 방법은, 우리가 직접 외국의 언어로 우리를 설명하는 방법일 테다.


몰랐다.

외국인을 대상으로 출판된 한국 여행 관련 서적 중에 한국인이 쓴 책이 지금까지 단 한 권도 없었다는 사실을.

이 산문집은 '네이티브 코리안'이 외국인 독자를 대상으로 두고 영어로 쓴 첫 번째 한국 여행 서적이다.


어처구니없긴 한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왜 그런지 조금은 이해가 된다.

한국 작가 중에 유창한 영어 문장으로 책을 쓸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한국의 출판사 중에서 영어로 쓰인 책을 출간할 곳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저자는 여러 책을 써서 출간한 작가임과 동시에, 여러 책을 번역한 경력을 가진 번역가이기도 하다.

하지만 외국어를 한국어로 번역하는 작업과 한국어를 외국어로 번역하는 일은 다르지 않은가.

놀랍게도 이 책에는 역자의 이름이 따로 없다.

작가는 번역가를 찾는 대신 딥엘(DeepL)과 챗GPT 등 인공지능의 도움을 받는 새로운 길을 택했다.

기획부터 집필, 번역 과정까지 모두 기념비적인 책이다.


이 책은 꽤 두꺼운 편이어서(647페이지) 집어 들면 무기로 쓰기에 좋을 정도로 묵직한데, 막상 펼치면 읽기에 그리 부담스럽지 않다.

이 책은 한국어로 서술한 부분과 같은 내용을 영어로 서술한 부분을 20여 챕터에 걸쳐 번갈아 배치하는 구성을 취하고 있다.

한국어 부분만 읽으면 분량이 딱 절반으로 줄어드는 데다, 가독성도 매우 훌륭하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방대하고 자세한 여러 음식 설명이다.

작가가 도입부에 삼겹살을 가장 먼처 추천하는 이유와 한국인이 소주를 많이 마시는 이유에 관한 챕터를 배치했다는 것만으로도 이 책의 성격을 알만 하다.

맛집 설명도 구체적이어서 필동면옥, 우래옥, 나리의 집, 연타발, 화해당 등의 상호가 대놓고 나온다.

홍어, 낙지, 깻잎, 골뱅이 등 외국인에게 낯선 음식에 관한 서술 분량도 상당하다.

작가는 음식을 바탕으로 한국의 문화와 한국인의 모습을 입체적으로 설명한다.

예를 들어 치맥과 한국의 야구 응원 문화를 연결해 설명하다가, IMF 외환위기와 한일 월드컵을 엮는 식이다.

물론 한국 최고의 야구 명문 구단은 두산 베어스라고 대놓고 팬심을 드러내는 부분은 그냥 '스킵'하면 된다.


아쉬운 부분이 없진 않다.

서울 바깥 지역에 관한 서술이 많이 부족하다.

심지어 몇몇 광역자치단체는 아예 서술조차 되지 않는다.

지나치게 음식 서술이 많다.

여행보다는 음식 가이드 같다는 인상을 줄 정도로 말이다.


그런데도 이 책을 추천하는 이유를 단 하나만 꼽자면 재미다.

이 책은 대단히 재미있다.

한국인이라면 모두 알만 한 내용인데도 이를 재미있게 서술해 새롭게 바라보게 하는 작가의 유머 감각이 탁월하다.

게다가 한국인이 읽어도 재미있고 새로운 내용이 많다.

한국인이 줄을 설 때 가깝게 붙는 이유를 좁은 국토와 연결 지어 설명하는 부분, 교도소에서 출소한 사람에게 두부를 먹이는 이유에 관한 부분은 읽으며 무릎을 치게 만든 탁월한 분석이었다.

한국인 독자도 외국인 독자도 모두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강력 추천한다.

K를 팝니다 - 다 아는데 왜 재밌을까 싶은 대한민국 영어 설명서
K를 팝니다 - 다 아는데 왜 재밌을까 싶은 대한민국 영어 설명서
박서련 장편소설 『폐월; 초선전』(은행나무)

『삼국지연의』에 등장하는 여러 캐릭터 중 분량에 비해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캐릭터는 '초선' 아닐까.

초선이 동탁과 여포 사이를 이간질하는 판짜기가 없었다면, 『삼국지연의』는 꽤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 테다.

초선은 남성 호르몬으로 가득 찬 『삼국지연의』의 초반을 주도하는 여성 캐릭터이지만, 이후 행적은 캐릭터의 존재감에 맞지 않게 묘연하다.


박서련 작가는 한국 문학계에서 가장 부지런한 작가다.

등단한 지 10년이 안 됐는데, 그사이에 내놓은 단행본 수가 10개가 넘는다.

무시무시한 생산력이다.

그만큼 쓸 이야기도 많고, 관심사도 다양하다는 방증이다.

작가가 메가 임팩트만 남기고 빠르게 『삼국지연의』에서 퇴장한 초선에 주목한 건 우연이 아닐 테다. 


『삼국지연의』에서 초선은 사도 왕윤의 명을 받아 연환계를 펼쳤다고 나온다.

초선이 직접 동탁과 여포 사이를 이간질하긴 해도, 어디까지나 이 계책은 왕윤의 것이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초선이라는 캐릭터를 시대적 한계 속에서도 온전히 자신의 의지로 살기 위해 능동적으로 움직이는 새로운 캐릭터로 새롭게 연출한다.

사극인데도 한반도에 존재했던 왕조가 아닌 중국의 삼국시대를 배경으로 다뤘다는 점도 매우 신선하다.

이런 시도는 학창 시절에 즐겨 읽었던 무협지 이후로 처음 본다.


이 작품 속 초선은 냉정해야 할 땐 망설이지 않고, 어떤 상황에서도 쉽게 마음을 드러내지 않으며, 손에 넣기 어려운 높은 지위를 욕망하고, 성적인 욕망(그게 여자든 남자든)도 숨기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생존 그 자체에 특화된 캐릭터다.

주변인 모두가 추풍낙엽처럼 쓰러지고 사라져도 초선만큼은 끝까지 살아남아 뒷이야기를 전한다.


초선과 더불어 '중국 4대 미녀'로 불리는 서시, 왕소군, 양귀비의 삶은 모두 비극으로 끝났다.

그런데 초선은 나머지 셋과 달리 정사에는 등장하지 않는 가공인물이다.

마침 『삼국지연의』에는 연환계 이후 초선의 삶은 나오지 않으니 작가가 상상력을 더할 여지가 많았을 테다.

작품 마지막에 뒷이야기를 전하는 초선은 예상치 못한 모습이어서 파격적이었다.

그래서 대단히 인간적이었다.

스타일리시한 장편소설이다.


폐월; 초선전
폐월; 초선전
전건우 장편소설 『어두운 물』(앤드)

평소 유튜브에서 온갖 괴담을 택시기사가 라디오 청취하듯이 듣는 편이서 공포, 무속, 오컬트 요소에 넓고 얕게 익숙한 편이다.

지금까지 들은 괴담을 종합해 보면 가장 무서운 귀신은 셋으로 압축된다.

바로 물귀신, 웃는 귀신, 무당 귀신이다.

그런데! 이 세 가지 귀신이 몽땅 합쳐진 귀신이 등장하면 얼마나 무서울까.

이 작품 속 귀신이 그런 귀신이다.

무당 귀신이며 물귀신이고, 자주 소름 끼치게 웃는다.


오랜만에 웹툰, 드라마, 영화가 아닌 소설로 공포물을 접했다.

뜬금없는 설정도 있었고, 무리한 설정도 있었고, 갑작스러운 설정도 있었고, 이건 아닌데 싶은 설정도 있었다.

하지만 긴장감과 재미는 확실했다.

영화 <파묘>보다 훨씬 재미있었다.

여름밤에 그거면 충분한 것 아닌가?

일부러 자정이 넘은 고요한 밤에 이 작품을 읽었는데. 정말 등골이 서늘하고 오싹했다. 

시각 효과가 아닌 글만 읽고 상상했을 때 느껴지는 순수한 공포를 간만에 경험했다.

소설이 묘사하는 여러 기괴한 상황을 상상하면서 읽으니 어우...


납량특집 영화나 드라마를 보고 싶은데 마땅한 게 없다면 이 작품을 읽어 보자.

한동안 물가에 가까이 가기 싫어질 것이다.

비가 오는 날도 싫어질 것이다.

모르는 사람이 문을 두드리면 더 싫어질 것이다.

어두운 물
어두운 물
김화진 장편소설 『동경』(문학동네)

오래전에 여자 후배와 술을 마시다가 낯설지만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다.

서로 친구인 여자 세 명이 모였을 때 생기는 미묘한 관계에 관한 이야기였다.

셋이 자주 함께 모여도, 그중 둘이 따로 만나는 경우가 많아서 나머지 하나가 소외감을 느끼는 일이 많다더라.

셋이 만나는 자리인데도 둘이 같이 만나 함께 오고, 둘만 아는 이야기를 웃으며 나누고, 식당에서도 둘이 나란히 앉아 나머지 하나와 마주 보고.

나머지 하나는 따를 당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썩 좋지는 않지만 내색하진 못하고, 그런 상황이 반복되면 서먹서먹해져 멀어지는 일이 많다더라.

나는 주변 사람에 관해 별로 관심이 없고(소설가 자격이 없다), 관계에도 크게 연연하지 않아서 가볍게 흘려들었는데, 그런 미묘한 관계가 여자들 사이에선 대단히 중요하다는 말을 들으니 신기했다.


이 작품을 읽는 동안 오래전에 여자 후배가 해줬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이 작품은 서로 다른 구석이 많은 서른 언저리의 여성 셋이 꼭짓점을 이루는 삼각형이 1년 동안 이등변삼각형, 직각삼각형으로 변형되다가 마침내 정삼각형 모양을 찾아가는 과정을 다룬다.

사랑하고, 서운해하고, 멀어지고, 가까워지고, 동경하고...셋의 관계가 균형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심리 묘사가 집요할 정도로 섬세하다.

여자 후배와 비슷한 경험을 해봤던 여성 독자라면 이 작품을 읽고 "맞아! 맞아!" "그래! 그래!"를 수시로 외치지 않을까 싶다. 

작가가 첫 소설집으로 화제를 모았던 이유 역시 그런 여성 독자의 마음을 제대로 건드렸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뜬금없긴 한데, 이 작품을 읽고 최근에 읽은 김이설 작가의 장편소설 『우리가 안도하는 사이』를 떠올렸다.

『동경』의 주인공이 마흔아홉 살까지 나이를 먹으면 『우리가 안도하는 사이』 속 세 주인공과 비슷한 사이가 되지 않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해봤다.


작가의 첫 장편소설이란 점을 고려해야겠지만, 쉽게 읽히는 작품은 아니었다.

세심한 묘사가 길어서 자주 읽는 흐름이 끊겨 전에 무엇을 읽었는지 수시로 확인해야 했다.

비유하자면 숲을 봐야 하는데 특정 나무의 껍질까지 하나하나 살피다 보니 숲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상황이라고나 할까.

중편 정도로 압축했다면 훨씬 나았을 장편이다.

동경
동경
이미예 소설 『탕비실』(한끼)

소설 단행본 1만 부가 팔리면 한국 문학의 기대주, 10만 부가 팔리면 올해의 한국 문학, 100만 부가 팔리면 '역사'로 취급받는다.

김훈 장편소설 『칼의 노래』, 신경숙 장편소설 『엄마를 부탁해』, 조남주 장편소설 『82년생 김지영』, 김호연 장편소설 『불편한 편의점』, 손원평 장편소설 『아몬드』 등 21세기 들어 100만 부 이상 팔린 한국 소설을 헤아리는 데에는 열 손가락으로도 남는다.


이미예 작가의 장편소설 『달러구트 꿈 백화점』은 대한민국 출판시장에서 몇 안 되는 '역사' 중 하나다.

그만큼 작가의 후속작에 관한 대중의 관심이 그 어떤 작가의 후속작보다 클 수밖에 없고, 작가 역시 부담이 컸을 테다.

전략은 둘 중 하나일 테다.

히트작의 장점과 강점을 살려 기조를 이어가느냐, 아니면 전작과 다른 새로운 걸 보여주느냐.

작가의 선택은 후자다.


이 작품은 직장에서 함께 탕비실을 쓰기 싫은 사람으로 선정된 이들이 모여 일주일 동안 합숙해 누가 술래인지 찾아내는 리얼리티 쇼를 그린다.

등장인물 모두 직장을 오래 다녔다면 탕비실에서 한 번쯤 마주친 경험이 있을 법한 진상들이다.

공용 얼음 틀에 커피나 콜라를 얼리는 사람, 인기 커피믹스만 몽땅 챙기는 사람, 사용한 종이컵을 그대로 두는 사람, 탕비실에서 혼잣말로 떠드는 사람 등.

호감인 등장인물이 하나도 없다.

작가의 전작을 기대하고 읽는다면 꽤 당황스러울 소재와 설정이다. 


등장인물 누구도 자기를 진상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뿐만 아니라 그런 행동을 하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분명히 술술 읽히고 재미는 있는데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마음에 찝찝함이 쌓인다.

그리고 마침내 한 가지 물음에 다다른다.

"나도 누군가에게 진상이 아니었을까?"

다른 사람의 눈에 비친 자기 모습과 자기가 생각하는 자기 모습 사이의 괴리가 남의 일 같지 않다.

직장인 독자라면 읽으며 뜨끔할 만한 구석이 한두 곳이 아닐 테다.


내겐 이 작품이 독자의 반응을 살피는 리트머스 시험지처럼 느껴졌다.

전작처럼 장편이 아니라 중편 분량의 작품이니 말이다.

짧은 분량은 그만큼 작가가 본격적으로 후속작을 내기가 부담스럽고 조심스럽다는 의미로 읽혔다.

작가의 향후 행보가 어떨지는 새로운 장편이 나온 뒤에야 예측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전작과 다른 결의 작품도 쓸 수 있는 작가라는 걸 보여줬다는 점에선 나름대로 의미 있는 작품이 아닌가 싶다.

가볍지만 확실히 읽는 재미가 있었다.

탕비실
탕비실
고은규 장편소설 『쓰는 여자, 작희』(교유서가)

아무런 배경지식 없이 읽어도 그 자체로 흥미롭고 재미있는 장편소설이다.

일제강점기 때 믿었던 사람에게 자기 작품을 빼앗긴 채 비통하게 생을 마감하며 역사 속에 묻힌 여성 작가, 그리고 그 작가의 생애를 추적하고 진실을 밝히는 현재의 여성 작가, 이 둘을 이어주는 퇴마사라는 기묘한 존재와 시공간을 오가는 전개.

설정만으로도 반은 먹고 들어가는 작품이다. 


사실 작가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소설은 대단히 많다.

익숙하고 잘 아는 걸 쓰려는 건 작가의 본능이니, 작가가 자기 삶을 모티브로 소설을 쓰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이 작품, 읽다 보면 뭔가 다르다는 걸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다.

단순히 작가를 주인공으로 등장시키는 흔한 설정을 가진 작품이 아니다.

이 작품의 타깃 독자는 작가다.

작가가 작가를 염두에 두고 쓴 소설이라니 신선하고 도발적이지 않은가?


자기 글을 진지하게 써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작품을 읽은 뒤 가슴에 와닿는 느낌이 다른 소설을 읽었을 때와 비교해 매우 다를 테다.

이야기의 시작보다 끝이 중요하고(158페이지), 누구나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지만 끝을 쓰는 사람만이 작가가 된다(217페이지)는 말.

작가가 아니면 진심으로 쓸 수 없고, 작가가 아니면 진심을 느낄 수 없는 말이다.


작가인 독자라면 누구든 이 작품을 읽은 후 자기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게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나는 무엇 때문에 글을 쓰는가?"


이 작품을 읽고 오랜만에 퇴사 후 전업작가로 나섰던 4년 전 봄의 나로 돌아갈 수 있었다.

당시 누구도 내 새로운 작품을 원하지도 않았다.

당연히 그 어떤 청탁도 없었다.

아무런 기약도 없는데 어떻게 나는 소설을 쓰겠다고 멀쩡한 직장을 때려치울 수 있었던 걸까.


좋은 소설을 쓰고 싶었다.

오랫동안 소설을 쓰며 살고 싶었다.

그것만으로 충분할 것 같았다.


열심히 쓴 소설이라고 해서, 잘 쓴 소설이라고 해서 팔리는 세상이 아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나 독재정권 때처럼 쓰고 싶은 글을 쓴다고 목숨을 위협받는 일이 벌어지는 세상도 아니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최소한 무엇이든 쓰고 싶은 바를 쓸 수 있는 세상이다.

이 작품을 읽으며 퇴사 당시 먹었던 마음을 오랜만에 되새길 수 있었다.

가슴이 뭉클해지는 작품이었다.

쓰는 여자, 작희 - 교유서가 소설
쓰는 여자, 작희 - 교유서가 소설
[책나눔 이벤트] 지금 모집중!
[김영사/책증정] 내 머릿속 시한폭탄《그래서 지금 기분은 어때요?》 편집자와 함께 읽기[클레이하우스/책 증정] 『축제의 날들』편집자와 함께 읽어요~[한빛비즈/책 증정] 레이 달리오의 《빅 사이클》 함께 읽어요 (+세계 흐름 읽기) [도서 증정] 내일의 고전 <불새> 편집자와 함께 읽어요![📚수북플러스] 2. 귀하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_수림문학상 작가와 함께 읽어요
💡독서모임에 관심있는 출판사들을 위한 안내
출판사 협업 문의 관련 안내
그믐 새내기를 위한 가이드
그믐에 처음 오셨나요?[메뉴]를 알려드릴게요. [그믐레터]로 그믐 소식 받으세요
🧧 두산아트센터 뮤지컬 티켓을 드려요
[초대 이벤트] 뮤지컬 <광장시장> 티켓 드립니다.~6/21
예수와 교회가 궁금하다면...
[함께읽기] 갈증, 예수의 십자가형이 진행되기까지의 이틀간의 이야기이수호 선생님의 교육 에세이 <교사 예수> 함께 읽기[올디너리교회] 2025 수련회 - 소그룹리더
인터뷰 ; 누군가를 알게 되는 가장 좋은 방법
책 증정 [박산호 x 조영주] 인터뷰집 <다르게 걷기>를 함께 읽어요 [그믐북클럽Xsam] 24. <작가란 무엇인가> 읽고 답해요[그믐밤] 33. 나를 기록하는 인터뷰 <음악으로 자유로워지다>
[그믐클래식] 1월1일부터 꾸준히 진행중입니다. 함께 해요!
[그믐클래식 2025] 한해 동안 12권 고전 읽기에 도전해요! [그믐클래식 2025] 1월, 일리아스 [그믐클래식 2025] 2월, 소크라테스의 변명·크리톤·파이돈·향연[그믐클래식 2025] 3월, 군주론 [그믐클래식 2025] 4월, 프랑켄슈타인
6월의 그믐밤도 달밤에 낭독
[그믐밤] 36. 달밤에 낭독, 셰익스피어 2탄 <맥베스>
수북탐독을 사랑하셨던 분들은 놓치지 마세요
[📚수북플러스] 2. 귀하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_수림문학상 작가와 함께 읽어요[📚수북플러스] 1. 두리안의 맛_수림문학상 작가와 함께 읽어요
🧱🧱 벽돌책 같이 격파해요! (ft. YG)
[책걸상 '벽돌 책' 함께 읽기] #23. <냉전>[책걸상 '벽돌 책' 함께 읽기] #22. <어머니의 탄생>[책걸상 '벽돌 책' 함께 읽기] #21. <세계를 향한 의지>[책걸상 '벽돌 책' 함께 읽기] #20. <3월 1일의 밤>
앤솔로지의 매력!
[그믐앤솔러지클럽] 1. [책증정] 무모하고 맹렬한 처음 이야기, 『처음이라는 도파민』[그믐미술클럽 혹은 앤솔러지클럽_베타 버전] [책증정] 마티스와 스릴러의 결합이라니?![책나눔] 어딘가로 훌쩍 떠나고 싶을 때, 시간을 걷는 도시 《소설 목포》 함께 읽어요. [장르적 장르읽기] 5. <로맨스 도파민>으로 연애 세포 깨워보기[박소해의 장르살롱] 20. <고딕X호러X제주>로 혼저 옵서예
반가운 이 사람의 블로그 : )
소란한 세상에서 잠시 벗어나, 책과 함께 조용한 질문 하나씩[n회차 독서기록] 에리히 프롬 '건전한 사회'를 다시 펼치며, 두 번째 읽는 중간 단상
내일의 고전을 우리 손으로
[도서 증정] 내일의 고전 <불새> 편집자와 함께 읽어요![도서 증정]내일의 고전 소설 <냉담> 편집자와 함께 읽어요! [이 계절의 소설_가을] 『냉담』 함께 읽기
제발디언들 여기 주목! 제발트 같이 읽어요.
[아티초크/책증정] 구병모 강력 추천! W.G. 제발트 『기억의 유령』 번역가와 함께해요.(8) [제발트 읽기] 『이민자들』 같이 읽어요(7) [제발트 읽기] 『토성의 고리』 같이 읽어요(6) [제발트 읽기] 『전원에서 머문 날들』 같이 읽어요
🎁 여러분의 활발한 독서 생활을 응원하며 그믐이 선물을 드려요.
[인생책 5문 5답] , [싱글 챌린지] 완수자에게 선물을 드립니다
노예제가 뭐에요?
노예제, 아프리카, 흑인문화를 따라 - 02.어둠의 심장, 조지프 콘래드노예제, 아프리카, 흑인문화를 따라 - 01.노예선, 마커스 레디커[이 계절의 소설_가을] 『이름 없는 여자의 여덟 가지 인생』 함께 읽기
모집중밤하늘
내 블로그
내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