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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라지면 암흑이 찾아온다"

부지런히 읽고 흔적을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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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거일 저 『제4차 공생』(무블)

이 책의 성격을 뭐라고 정의해야 할까.

대중적인 교양서라고 부르기엔 내용이 꽤 어렵고(참고 문헌 목록의 압박!!), 학술서라고 부르기엔 분량이 애매하고... 이 책은 그 둘 사이 어딘가의 지점에 놓여 있다.

읽는 동안 컴퓨터 자격증 수험서의 이론 부분을 복기하는 기분이 들 때도 있었다.

개론서라고 정의하면 되지 않을까 싶다.

팔순에 가까운 저자의 나이를 의식하고 읽으니 글이 젊다고 느껴져 놀랐다.

저자는 AI가 등장한 역사적 배경을 비롯해 최신 기술 동향을 진화생물학, 컴퓨터과학, 천체물리학, 철학 등 다양한 학문과 엮어 꼼꼼하게 분석한다.

분야를 넘나들며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대목에선 '한국 SF의 거장'이라는 저자의 짬밥을 새삼 실감했다.


저자는 원핵생물이 동·식물로 진화하는 시기를 1차 공생, 동·식물이 미생물과 함께 널리 퍼지는 시기를 2차 공생, 인류가 동·식물을 길들이는 시기를 3차 공생, 인류가 스스로 만들어낸 AI와 함께 진화하는 시기를 '4차 공생'으로 정의한다.

저자의 생각은 '제4차 공생'이라는 제목에 이미 나와 있다.

저자는 AI와 인류의 공존은 피할 수 없는 미래이며 그 미래를 '공생'이라고 긍정적으로 바라본다.

AGI(인공 일반 지능)는 시기가 언제이든 간에 등장할 텐데, 막연하게 두려움을 갖고 미래를 바라보는 건 근거 없는 낙관만큼 위험하다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나 또한 저자의 생각에 대체로 동의한다.

인류의 기술은 지금까지 계속 발전해 왔다.

그런 가운데 부작용도 있었지만, 큰 흐름을 보면 대체로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갔다.

피할 수 없다면 즐기는 게 낫지 않겠는가.

AI의 발전을 맞이하는 인류의 미래도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고 믿는다. 

인간의 가장 강력한 의지는 생(生)을 향한 의지 아닌가.

이보다 맹목적인 의지는 없기 때문에, 인류는 AI가 폭주하는 세상이 오게 내버려두지 않을 테다.

제4차 공생 - 초지능 시대의 인류
제4차 공생 - 초지능 시대의 인류
최유안 산문집 『카프카의 프라하』(소전서가)

제목으로 짐작할 수 있듯이 이 산문집은 프란츠 카프카가 평생 살았던 프라하를 꼼꼼하게 살펴보며 그의 인생과 문학의 흔적을 더듬는다.

소설가이면서 직장인인 작가는 카프카 또한 평생 소설가이면서 직장인인 동년배였다는 사실에 유대감을 느끼며 프라하에 남겨진 카프카의 발자취를 따라간다.

이 과정에서 작가로서의 카프카는 물론 어린 시절의 카프카, 대학생 시절의 카프카, 법원 수습 직원 시절의 카프카, 보험 회사 직원 시절의 카프카를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다.

페이지 곳곳에 담진 프라하의 사진은 텍스트만으로 느끼기 어려운 현장감을 살려주며 읽는 맛을 더한다.


챕터마다 카프카의 흔적이 남은 공간을 표시한 지도가 담겨 있어, 여행 가이드북 역할도 기대할 수 있다.

여기에 작가의 상상력과 개인사가 포개져 이야기는 여러 갈래로 가지를 뻗고 풍성해진다.

문학에 온전히 헌신하는 삶을 꿈꿨지만, 밥벌이를 포기하진 못했고, 나름대로 일까지 잘하고 선량했던 사람이 카프카라니.

나 또한 직장인의 삶과 소설을 쓰는 작가의 삶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던 세월이 꽤 길었기에 공감하는 부분이 많았다.


이 산문집을 읽으면 어디서 카프카에 관한 썰을 풀며 아는 척하긴 딱 좋을 듯싶다.

제대로 읽어 본 카프카의 작품이라고는 「변신」 정도밖에 없는 나도 그런 자신감이 드는 걸 보니 말이다.

오래전에 『김훈·박래부 기자의 문학기행』을 읽었을 때 느꼈던 즐거움과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카프카의 프라하
카프카의 프라하
시몬 스톨렌하그 그래픽노블 『일렉트릭 스테이트』(황금가지)

'어벤저스' 시리즈를 제작한 루소 형제가 연출한 동명의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원작이다.

이 작품은 SF이면서 동시에 1997년 미국을 배경으로 한 대체역사물이기도 하다.

7년 넘게 이어진 전쟁에서 드론과 조종사 간 지연 없는 데이터 처리를 위해 뇌를 연속적으로 연결하는 뉴로 기술이 발전한다.

레이더 장비 기술이 전자레인지 개발에 적용됐듯이 전쟁은 발명을 낳는다.

뉴로 기술은 현재 VR 기기와 유사한 '뉴로캐스터'라는 기술 개발로 이어진다.


하지만 '뉴로캐스터'의 대규모 업데이트 이후 이용자들이 온종일 여기에 연결돼 머무르는 어처구니없는 결과가 일어난다.

이용자들은 먹고 자는 일도 잊은 채 뉴로캐스터에 열중하다가 하나둘 죽어가고, 뉴로캐스터의 서버만이 황폐한 도시의 밤을 밝힌다.

이 작품은 디스토피아에 홀로 던져진 소녀가 작은 로봇과 함께 동생을 찾아 나서는 여정을 그린다.


사랑하는 단 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애쓰는 이야기는 얼마나 따뜻하던가.

그럴 줄 알았거늘... 마지막 반전이 충격적이어서 힘이 빠졌다.

그래...

그런 결말이 아니었다면 이 작품의 힘이 빠졌겠지.


내용을 떠나서 일러스트 감상만으로도 뭔가 새로운 체험을 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자멸한 인류의 모습을 담아낸 수십여 일러스트만으로 압도 당하는 기분을 느꼈다.

사진보다 생생하고 섬뜩하면서도 동시에 매혹적이었다.

멸망한 세상이 눈앞에 있다면 바로 이런 풍경이지 않을까 싶었다.

일렉트릭 스테이트
일렉트릭 스테이트
최석규 장편소설 『검은 곳을 입은 자들』(문학수첩)

범죄스릴러에 철학, 오컬트, 음모론, 첨단 기술(?)을 버무린 종합 선물 세트다.

흡인력이 장난 아니다.

뒤 내용이 너무 궁금해서 페이지를 넘기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결국 앉은 자리에서 다 읽었다.


이야기는 건실한 기업의 탈을 쓴 범죄 조직의 간부가 기괴한 방식으로 자살하는 데서 시작한다.

이 밖에도 곳곳에서 이해할 수 없는 방식의 자살이 속출하는데, 공교롭게도 그들 모두 천인공노할 죄를 지은 범죄자들이고 지금 뻔뻔하게 잘살고 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뻔한 설정이지만, 이 설정만으로도 흥미롭지 않은가?


찌라시에 가까운 자극적인 기사로 연명하는 한 언론사의 기자가 계속되는 의문의 죽음을 파헤치기 시작하고, 이 죽음에 얽힌 범죄 조직은 경쟁 조직을 의심하며 진상 조사에 나선다.

이들은 마침내 공통점을 발견한다.

자살자들 모두 죽기 전에 검은 옷을 입은 남자를 만났고, 그 남자는 자살자들에게 "피해자에게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고 참회하라"는 말을 남겼다는 사실이다.

기자와 범죄 조직이 검은 옷을 입은 남자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그가 강력 범죄 피해자들의 자조 모임과 관련이 있음이 드러난다.

특이하게도 그는 묵자의 사상을 따르고 있고, 믿기 어렵지만 귀신을 부려 사람을 죽인다는 정황이 드러난다.

하지만 역시 무서운 건 귀신보다 사람이었다.

이쯤 되면 이 작품의 결말이 궁금해 미칠 것 같지 않은가?


물론 불만인 부분도 있다.

언론사 묘사가 현실과 거리가 멀다.

마치 강의를 하는 듯 지나치게 설명이 긴 부분에선 "굳이?"라는 의문이 들었다.

마지막 부분에 드러나는 음모론에선 "아아..."하며 고개를 젓기도 했다.


그런데도 작품을 읽으며 만족했던 부분이 훨씬 많았던 이유는 끊임없이 질문하게 했기 때문이다.

인간쓰레기라는 말로도 모자란 범죄자들을 제대로 단죄하지 못하는 현실이 분통을 터트리게 하지만, 그런 자들을 사적 제재로 처리하는 게 과연 정의로운 일인가?

선과 악의 경계는 어디쯤일까?

작가는 현재진행형인 이 오래된 질문을 통해 세상의 모든 악이 사라지면 더 나은 세상이 오는 게 가능한지 묻는다.

여기에 고대 사상과 철학까지 끌어오다니.

덕분에 공부 많이 했다.


그렇다고 머리 아픈 소설 아니니 피하지 않아도 된다.

순수하게 읽는 재미, 그 자체만으로도 훌륭한 작품이니까.

다른 건 몰라도 재미 하나는 확실하게 보장한다.

검은 옷을 입은 자들
검은 옷을 입은 자들
이석원 산문집 『슬픔의 모양』(김영사)

내 취향은 아니지만 정말 글을 잘 쓴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는 작가가 몇 명 있다.

이석원 작가도 그런 작가 중 하나다.

그러다 보니 스토커도 아닌데 꼬박꼬박 작가의 책을 챙겨 읽고 있고, 그럴 때마다 "참 잘 쓰는데 내 취향은 아냐"라고 투덜거리며 책을 덮곤 한다.

그런데 이 산문집은 잘 쓴 책을 넘어 심지어 내 취향이기까지 했다.

저마다 의견이 다르겠지만, 작가가 지금까지 쓴 모든 단행본 중 최고작이라는 게 내 의견이다.


이 산문집은 작가의 아버지가 코로나 펜데믹 당시 쓰러져 병원에서 사경을 헤매는 급박한 장면으로 시작한다.

아버지는 이제 가족을 돌보는 대상이 아니라, 온 가족이 돌봐야 하는 존재로 바뀐다.

그날부터 작가뿐만 아니라 어머니, 두 명의 누나의 일상도 급격한 지형 변화를 겪는다.


가족이란 관계가 그렇지 않던가.

누구보다 가까우면서도 어쩔 땐 누구보다 먼.

마음만큼 가까워지거나 멀어질 수도 없는 존재.

이 산문집 속 "내게 가족이란 늘 행복한 지옥이거나 지옥 같은 천국 둘 중 하나였다. 내가 아는 한 한 번도 중간은 없었다”라는 문장은 가족이란 존재를 설명하는 훌륭한 문장이다.

어머니와 동생의 죽음 이후 벌어진 모든 자질구레한 일을 처리하며 느꼈던 감정이 이 산문집을 읽으며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작가의 아버지는 지금 기준은 물론 오래전 기준으로 봐도 좋은 아버지라고 부르긴 어렵다.

밖에선 호인이지만 안에선 고집불통이고, 작가에게 평생 다정한 말 한마디는커녕 스킨십조차 없던 사람이다.

작가는 그런 아버지가 생사의 고비를 오갈 때마다 가슴 아파하며 애절한 마음을 드러내면서도, 상태가 좋아진 아버지가 예전 같은 모습을 보여주면 견디지 못하고 원망한다.

그야말로 애증 그 자체인 관계다.

"부모는 언제나 우리에게 두 가지 방식으로 교훈을 준다. 나는 저렇게 살아야지. 나는 저렇게 살지 말아야지."라는 문장을 읽고 사무쳤다.


남은 가족은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병간호 때문에 점점 예민해져 서로를 물어뜯다가도, 급박한 상황이 벌어지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일사불란하게 뭉쳐 일을 해결한다.

그런 작가의 가족을 지켜보며, 저런 상황에서 과연 어떻게 행동했겠느냐는 질문을 내게 수시로 던졌다.

이 산문집을 읽는다고 해서 가족을 바라보는 시선이나 마음이 크게 바뀌진 않을 테다.

기타노 다케시 감독이 "가족이란 아무도 보지 않는다면 내다 버리고 싶은 존재"라는 명언(?)을 남기지 않았던가.

그래도 이 산문집을 읽으면 가족을 미워하는 마음에 살짝 균열이 생길 거라고 확신한다.

무엇보다도 재미있고(내용은 다급한데 참..) 페이지가 넘어갈 때마다 흥미진진하다.


P.S. 이 산문집의 결말이 첫 페이지를 펼쳤을 땐 전혀 예상치 못했던 형태여서 놀랐다. 기분이 복잡했다. 가족이란 늘 행복한 지옥이거나 지옥 같은 천국이로구나.

슬픔의 모양
슬픔의 모양
고다 아야 산문집 『나무』(책사람집)

이 산문집은 작가가 말년에 일본 곳곳의 나무를 찾아다니며 배우고 느낀 감정을 섬세하게 담고 있다.

문장만 읽는데도 이끼 냄새, 죽은 나무가 삭는 냄새, 흙냄새가 생생하다. 

식물을 다룬 다른 산문집처럼 특정 종(種)의 나무가 아니라 특정 장소에 있는 나무를 다룬다는 점이 독특하다.

홋카이도 자연림에서 쓰러져 죽은 나무 위로 새롭게 자라난 가문비나무를 통해 생사와 윤회의 질서를 실감하고, 도쿄 근방의 등나무를 보며 딸을 향한 미안함을 되새기고, 혹독한 환경인 야쿠섬에 자라는 삼나무를 가난한 삶을 이기는 강인함을 엿보는 식이다. 


작가의 시선은 자기 앞에 서 있는 나무를 넘어 그 나무를 지탱하는 자연과 인간으로 향한다.

작가가 바라본 나무의 삶은 인간 이상으로 치열하고 복잡하다.

조금 더 햇볕을 받기 위해 치열하게 싸우고, 권력의 공백을 놓치지 않는다.

동시에 홀로 우뚝 설 수는 없고 함께 있어야 비바람을 버틸 수 있다.

뒤틀린 나무가 톱날에 반항하다가 끝내 폭발하듯 부서지는 걸 보며, 순탄치 않은 삶을 살아온 인간의 고집을 읽는다.

작가는 업혀서라도 나무를 보려는 등 지나치게 고집을 부리는데, 그 고집에서 남은 생이 길지 않아 살아있을 때 나무를 느끼려는 조바심과 간절함이 느껴져 애절하다. 

 

지난 2003년 봄에 길을 걷다가 우연히 한 들꽃을 만났다.

겨우내 삭은 낙엽을 뚫고 올라온 작은 들꽃 한 송이의 하늘색 꽃잎.

그 들꽃의 이름을 알고 싶어 서점에 들러 식물도감을 뒤졌다.

쌍떡잎식물 용담목 용담과의 두해살이풀, 이름은 구슬봉이. 

다시 그 꽃을 보고 싶어 찾아갔을 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구슬봉이 주위에 피어 있던 냉이꽃, 꽃다지, 봄맞이꽃, 꽃마리 등 다양한 들꽃을 발견한 것이다.

그 순간 무채색의 세상이 총천연색으로 바뀌었다.

들꽃은 내게 계절과 시간을 가늠하는 기준이며, 동시에 이 세상이 살만하다는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 매개이기도 하다.

구슬봉이는 내 들꽃 사랑의 시작이었다.


이 산문집을 읽으며 그때의 감정을 다시 느낄 수 있었다.

언젠가는 이런 산문집 한 권을 써보고 싶다.

나무
나무
조영주 장편소설 『은달이 뜨는 밤, 죽기로 했다』(마티스블루)

소설을 읽는다기보다는 작가의 과거와 현재를 들여다보는 기분이 들었다.

시간 여행을 다룬 판타지이지만, 마냥 판타지로 느껴지진 않았다.

무심코 읽으면 동화 같지만, 한 꺼풀 들춰 보면 참으로 냉혹한 세상이다.

작가가 힘든 세월을 꽤 많이 겪어왔음을 간접적으로 경험했고, 그 세월 속에서 소설 쓰기는 천형이면서 동시에 구원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름다운 추억의 첫 페이지에는 항상 힘든 기억이 놓여있는데, 그 추억이 현실이 고단함을 잠시 잊고 앞으로 나아갈 힘이 되어주지 않던가.

책을 서재에 꽂아 넣으며 한강 작가가 던진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거대 담론이 아니어도 유효한 질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마다 인생 그릇이 다르듯이 감당할 수 있는 시련의 크기도 다른 법이다.

남에게 말 못 할 시련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 이 작품 속 이야기가 꽤 위로가 될 테다.

은달이 뜨는 밤, 죽기로 했다
은달이 뜨는 밤, 죽기로 했다
김금희 장편소설 『첫 여름, 완주』(무제)

출판사 무제를 운영하는 박정민 배우가 총괄 프로듀서를 맡아 시각장애인을 위한 오디오북으로 선공개된 작품이다.

오디오북 녹음에 준면 씨를 비롯해 고민시, 염정아, 최양락, 김도훈, 김의성, 배성우, 류현경 등 여러 배우가 재능 기부로 참여했다.

준면 씨 덕분에 이 작품을 출간 전에 읽고 들을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이 작품은 친한 언니에게 사기를 당한 주인공이 돈을 찾으려고 언니의 고향에 들렀다가 벌어지는 다채로운 이야기를 그린다.

로그라인만 보면 복장 터지는 이야기일 것 같은데 의외로 싱그럽고 상큼하다.

문장 곳곳에서 계절감이 느껴지고, 주인공의 일상이 눈앞에 수채화처럼 그려진다.

비 온 뒤 아침 공기 같은 작품이다.

어떻게 보면 뻔한 치유물인데, 그 특유의 계절감이 뻔한 이야기를 뻔하지 않게 만들어 준다.

다루는 계절과 이야기는 다르지만, 영화 「리틀 포레스트」를 감상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비 오는 여름날, 카페에 앉아 페이지를 넘기면 잘 어울릴 매력적인 '어른들을 위한 동화'다.


오디오북은 보통 도서 출간 후에 제작되는데, 이 작품은 처음부터 오디오북으로 제작을 염두에 둔 장편소설이다.

비디오 테이프나 DVD 콘셉트로 만든 표지와 케이스에도 '듣는 소설'이라는 이 작품의 성격이 드러난다.

텍스트 역시 소설과 각본 사이의 어딘가에 있다.

배우들의 캐릭터 연기 역시 생생하다.

그래서 단순히 성우가 텍스트를 읽는 다른 오디오북과 달리 오리지널 라디오 드라마를 듣는 기분이 들었다.

능청스러운 준면 씨의 연기도 일품이고.

첫 여름, 완주
첫 여름, 완주
문지혁 산문집 『소설 쓰고 앉아 있네』(해냄)

'채널예스'에 연재됐던 시절에 꼬박꼬박 챙겨 읽었던 글을 한 권의 책으로 엮었다.

당시 고정 독자 상당수는 작가와 작가 지망생이지 않았을까.

연재를 읽을 때마다 "나도 그래!"라며 로커처럼 헤드뱅잉을 했다.

웃기고 싶은데 겸연쩍어 대놓고 웃기지는 못하는 작가 특유의 유머도 좋았다.


읽으면서 꽤 많은 걸 새롭게 배웠다.

오토픽션을 비롯해 서사, 플롯, 이야기 등 희미하게 알고 있던 개념도 선명해졌다.

내가 지금까지 왜 그렇게 소설을 써왔는지, 왜 1인칭 주인공 시점에 집착하는지, 왜 그런 플롯을 쓰는지 이 산문집을 통해 알았다.

교재로 사용해도 좋을 만큼 내용이 풍성하다.

다정하면서도 사려 깊은 선생님의 수업을 닮았다.


공감하며 따로 체크해둔 부분이 적지 않다.

우리가 쓰는 이야기는 우리의 평범함이 실은 위장된 비범함이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조언을 읽고 무릎을 쳤다.

우리가 남이 잘된 이야기보다 잘못된 이야기에 흥미를 느끼는 이유를 생존과 엮어 설명한 부분에선 머리를 한 방 맞은 기분이 들었다.

누군가가 잘된 이야기는 내게 남아 있는 기회와 가능성을 줄이기 때문에 도파민 분비 안 되고, 잘못된 이야기는 생존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도파민이 분비된다니.

오랫동안 가졌던 의문이 명쾌하게 해결됐다.

희극을 만들고 싶다면 외면적 목표를 좌절시키고 내면적 목표를 성취시키라는 조언을 읽고 내가 해피엔딩을 쓰는 방식이 이거였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욕망을 가진 주인공을 따라가다 보면 이야기는 저절로 완성되며, 최고의 플롯은 작가조차 이야기를 쓰다가 발견하는 플롯이라는 조언에도 격하게 공감했다.

현역 작가라면 3부 '책상 밖으로'가 흥미로울 테다.

그중에서도 문단을 '우동 거리'에 비유한 글이.


유독 기억에 오래 남는 문장이 있다.

실패를 견딜 수 있었던 이유는 재능이 있다고 착각했기 때문이라고.

그리고 그 착각도 아주 중요한 재능이라고.

돌이켜보니 나도 그 착각 덕분에 버텼다.

소설 쓰고 앉아 있네 - 문지혁 작가의 창작 수업
소설 쓰고 앉아 있네 - 문지혁 작가의 창작 수업
김애란 外 4명 소설집 『음악소설집』(프란츠)

음악소설집이라고 말하기에는 음악의 비중이 높지 않아 고개를 갸우뚱했다.

다른 제목이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말이다.


전체적으로 따뜻하면서도 서늘하다.

'따뜻하다'와 '서늘하다'는 양립하기 어려운 단어인데, 이 소설집 위에선 그게 가능하다.

그 이유를 논리적으로 설명할 순 없다.

봄보다는 여름에 읽으면 더 좋을 소설집이다.


소설집에 실린 단편 중 가장 짧았지만 윤성희 작가의 「자장가」가 가장 음악소설다웠다.

페이지를 넘기는 동안 이제 볼 수 없는 많은 사람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내가 좋아하는 노래인 아이유의 '무릎'을 소설로 읽으니 가슴이 뭉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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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에르노-세월 혼자 읽기 챌린지숨결이 바람 될 때MT 법학 싱글 챌린지밀크맨 독파하기
스토리 탐험단이 시즌 2로 돌아왔어요
스토리탐험단 시즌2 : 장르의 해부학 1. 호러스토리탐험단 10번째 여정 <내 안의 여신을 찾아서>스토리 탐험단 9번째 여정 <여자는 우주를 혼자 여행하지 않는다>스토리 탐험단 8번째 여정 <살아남는 스토리는 무엇이 다른가>
유디테의 자본주의 알아가기
지긋지긋한 자본주의왔다네 정말로 자본주의의종말
제발디언들 여기 주목! 제발트 같이 읽어요.
[아티초크/책증정] 구병모 강력 추천! W.G. 제발트 『기억의 유령』 번역가와 함께해요.(7) [제발트 읽기] 『토성의 고리』 같이 읽어요(6) [제발트 읽기] 『전원에서 머문 날들』 같이 읽어요[제발디언 참가자 모집] 이민자들부터 읽어 봅시다.
🎁 여러분의 활발한 독서 생활을 응원하며 그믐이 선물을 드려요.
[인생책 5문 5답] , [싱글 챌린지] 완수자에게 선물을 드립니다
동구권 SF 읽어보신 적 있나요?
[함께 읽는 SF소설] 10.이욘 티히의 우주 일지 - 스타니스와프 렘[함께 읽는 SF소설] 09.우주 순양함 무적호 - 스타니스와프 렘[함께 읽는 SF소설] 08.솔라리스 - 스타니스와프 렘[함께 읽는 SF소설] 11.노변의 피크닉 - 스트루가츠키 형제
그믐의 흑백요리사, 김경순
브런치와 디저트 제대로 만들어보기ㅡ샌드위치와 수프디저트와 브런치 제대로 만들어보기솥밥 제대로 만들어보기
혼자 읽어서 오히려 깊이 읽은 책들
<인간의 대지> 오랜만에 혼자 읽기 『에도로 가는 길』혼자 읽기천국의 열쇠 혼자 읽기
웰다잉 오디세이 1분기에 이 책들을 읽었어요
[웰다잉 오디세이 2026] 3. 이반 일리치의 죽음[웰다잉 오디세이 2026] 2. 죽음을 인터뷰하다 [웰다잉 오디세이 2026] 1. 죽음이란 무엇인가
독서모임에도 요령이 있나요?
도스토옙스키와 29일을[그믐밤] 7. 북클럽 사용설명서 @시홍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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