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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라지면 암흑이 찾아온다"

부지런히 읽고 흔적을 남깁니다

글로 남기는 나만의 기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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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하신 소설집 『여기까지 한 시절이라 부르자』(문학수첩)

이 소설집은 청년세대와 주변인 사이의 관계에 주목해 때로는 지적으로, 때로는 집요하게 파고든다.

소설집의 전반적인 톤은 우울하고 권태롭다.

산업재해로 고통받는 청년 근로자가 고통에서 벗어기 위해 펜타닐에 손댔다가 더 큰 고통을 받기도 하고(우리는 깊어서), 엿 같은 근무 환경에서 벗어나고자 선택해서 도달한 곳도 별다를 것 없다(빌어먹는 사람들을 위한 시선집). 차라리 극적인 사건이라도 일어나면 좋을 것 같은데 오늘은 어제와 같고 아무도 박수 쳐주지 않는다(끝없이 이어지는 긴 담배와 하얗게 내려앉은 밤).

가끔은 자기 목표를 위해 남을 도구 취급하는 제정신이 아닌 사람도 있다(문학의 정수). 


그런 가운데에서도 현실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조짐은 있다.

항공우주센터 소속 계약직 청년과 불법체류 외국인 근로자가 벌이는 캐치볼의 포물선 운동은 우주왕복선의 포물선 운동으로 확장돼 삶의 목표를 어디에 둬야 하는지 고민하게 한다(포물선).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현상을 과학적으로 이해하려다가 고립된 청년은 사랑 앞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고집스러운 기준이 흔들리고(천체물리학 궤도상의 사랑 좌표), 큰누나의 죽음 때문에 소원해진 작은누나와의 관계는 시소 타기로 변주돼 데면데면하면서도 애틋한 풍경을 자아낸다(시소). 

불완전하지만 이젠 다시 볼 수 없는 사람과 화해도 하고, 작지만 소박한 희망도 가슴에 품는다(포튈랑).


교육통계서비스에 따르면 2018년 기준 인서울 4년제 종합대학 전체 정원은 전국 대학 정원의 12%에 불과하다.

KDI 보고서에 따르면 대한민국 대기업(300인 이상) 일자리 비율은 2021년 기준 고작 13.9%다.

뉴스를 보면 대한민국에 서울과 대기업만 존재하는 것 같고, SNS는 인서울 주요대학을 나와 대기업에 다녀야 평균인 것처럼 착시효과를 불러일으킨다.

이 때문에 '평균 올려치기' 바깥에 있는 청년세대 다수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고, 그들의 삶도 잘 보이지 않는다. 


이 소설집을 통해 소외된 다수에 속하는 요즘 청년들의 우울과 불안을 다각도로 엿볼 수 있었다.

앉아서 머리로 만든 이야기가 아니어서 세대는 달라도 충분히 와닿았다.

좋은 소설집이다.

여기까지 한 시절이라 부르자
여기까지 한 시절이라 부르자
김이설 장편소설 『우리가 안도하는 사이』(자음과모음)

이 작품은 94학번 동기 셋이 오랜만에 함께 모여 떠난 여행지인 강릉에서 벌어지는 사건과 등장인물의 심리를 섬세하게 따라간다.

누군가는 20대 중반에 결혼해 장성한 두 아들을 뒀지만 마음은 공허하고, 누군가는 가정이 화목해 보이지만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손에 물이 마를 날이 없고, 누군가는 화려한 싱글처럼 보이지만 끝이 보이지 않는 어머니 간병에 시달리고 있다.

대학 동기 사이가 대개 그렇듯이 셋의 사이는 뜨뜻미지근한 편이고, 서로의 속사정에 대해서도 자세히는 모른다.

이 같은 등장인물 사이의 적당한 거리감은 작품이 끝날 때까지 긴장감을 유지하며 서사를 끌어가는 동력이 된다.


마흔아홉 살은 젊다고 말하긴 어렵지만 늙었다고 말하기는 애매한 나이다.

등장인물의 나이가 나이인 만큼 산전수전을 다 겪어봤을 테니 솔직할 거라고 예상은 했는데, 예상보다 훨씬 솔직한 이야기들이 오고가서 민망하면서도 흥미로웠다.

셋은 오래전에 함께 여행했지만 공유하지 못한 기억을 남겨둔 강릉에서 다시 만나 서로의 심연을 들여다보며 이해하는 시간을 가지고 다시 각자의 위치로 돌아간다.


아마도 셋이 다시 만나 함께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나는 일은 없을 테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됐는데, 서로에게 너무 많이 보여줬다.

그래도 언제든지 서로에게 전화 정도는 걸어 안부를 묻고 고민을 토로할 수 있는 사이임을 확인했다.

20대 청춘도 아니고 그 정도가 딱 적당하다.


작품을 읽는 내내 모르는 누님들의 여행을 몰래 따라다니며 흥신소 직원이라도 된 듯한 기분을 느꼈다.

내가 지금 겪고 있는, 그리고 앞으로 겪게 될 미래를 미리 엿봤다.

쌉싸름한 카카오 99% 다크 초콜릿을 녹여 먹은 기분이 든다.

우리가 안도하는 사이
우리가 안도하는 사이
이철 희곡집 『산재일기』(아를)

약 30년 전쯤 일이다.

학교에서 반지하방 집으로 돌아와 보니 아버지가 오른손에 붕대를 감은 채 괴로운 표정으로 식탁에 앉아 있었고, 그 옆에서 어머니가 울고 있었다.

그날 아버지는 일을 하다가 원형톱에 검지 끝이 잘리는 사고를 당했다.

다급히 봉합수술을 시도했지만 잘린 부위의 오염이 심해 실패했다.

그때 아버지는 내게 침통한 목소리로 이런 말을 했다.

"공부 열심히 해라. 안 그러면 이렇게 된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아버지가 당시 당한 사고는 엄연히 산재였다.

하지만 아버지는 사고 책임을 본인에게 돌릴 뿐, 일터에 묻지 않았다.

당시 분위기가 그랬다.

근무 환경이 어떻든 간에 사고는 본인 책임이라고.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빈소에 들러 영정 앞에서 절하는 아버지 친구분 중에 손가락 10개가 모두 성한 분이 드물었다.

그분들이 일터에 책임을 물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야만의 시대였다.


그때와 비교해 지금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나는 몇 년 전 고용노동부 출입기자로 일하며 기획 기사 아이템을 찾으려고 각종 통계를 뒤졌는데, 산재 발생 건수 및 사망률이 너무 높아서 깜짝 놀랐다.

매년 낮아지는 추세이긴 했지만, OECD 국가와 비교하면 여전히 압도적으로 높았다.

산재를 당했지만 신청할 수 없어서 통계에 잡히지 않은 건수까지 합치면 훨씬 많을 것이다.


이 작품은 산재와 직간접적으로 엮인 17명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구성한 희곡이다.

이 작품의 '작가 노트'는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의 말을 인용하며 시작한다.

"한 명의 죽음은 비극이지만, 백만 명의 죽음은 통계다."

통계는 아무리 자릿수가 많아도 잘 와닿지 않는다.

그런 통계를 인용하는 기사 역시 잘 와닿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통장에 숫자로만 찍혀 있는 1000만 원보다 내 주머니에 있는 10만 원이 더 크게 느껴지는 법이니 말이다.


이 작품은 증언, 재판, 청문회 속기록 등 실제 인터뷰이의 목소리를 그대로 편집해 엮어서 드러내기 때문에 희곡이지만 희곡이 아닌 실제 상황 같은 연출이 인상적이었다.

배우는 인터뷰이를 역할을 하지만 인터뷰이와 거리를 둬서 연기이되 연기가 아닌 듯한 느낌을 준다.

이를 통해 그동안 통계에 가려져 있었던 생생한 현장의 목소리를 접할 수 있었다.


특히 마지막 부분이 충격적이었다.

실제 인터뷰이의 녹취 음성이 재생되는 가운데 2023년 3월에 일어난 산재 사망 기록이 자막으로 길게 이어진다.

직접 세어보니 무려 66건이다.

그리고 그 위로 자막 하나가 오버랩돼 무거움을 더한다


2,223/130,348


2022년도 산업재해 사망자 수와 재해자 수다.

'작가 노트'의 서두에 적혀 있던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의 말이 다시 무겁게 울린다.


"한 명의 죽음은 비극이지만, 백만 명의 죽음은 통계다."

산재일기
산재일기
최유안 장편소설 『새벽의 그림자』(은행나무)

작가는 지금까지 소설로 다뤄졌을 법한데 다뤄지지 않은 소재로 자기 영역을 개척해 왔다.

여성 직장인의 시점을 교차시키며 일과 직장의 의미를 물었던 장편소설 『백 오피스』, 사회적으로 자리 잡은 전문직 여성의 고뇌를 담은 연작소설 『먼 빛들』이 대표적이다.


작가는 이번 작품을 통해 최근에는 소설로 거의 다뤄지지 않았던 통일과 탈북자 문제에 주목했다.

시베리아 벌목장을 배경으로 다룬 장마리 작가의 장편소설 『시베리아의 이방인들』 외에는 같은 주제를 다룬 최근작이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최근 한국 문학에선 낯선 주제다.

아무래도 청년세대에게 잘 와닿지 않는 문제라는 게 소설로 다뤄지지 않았던 이유일 테다.


남북이 갈라져 사실상 다른 나라로 자리잡은 지 70년이 넘었다.

청년세대는 북한을 가끔 미사일을 쏘거나 오물풍선을 날리며 도발하는 귀찮은 존재로 여기고 있고, 심지어 통일을 당위로 여기는 사람을 '틀딱'으로 취급한다.

작가가 이 문제에 핀 조명을 비추기 위한 선택은 낯선 곳에서 바라보기다.


작가는 독일에 정착한 탈북 여성의 의문사를 추적하는 전직 경찰 출신인 주인공의 시선을 통해 통일과 탈북자 문제를 파고든다.

주인공은 마치 수사를 하듯 의문사의 배경을 추적하고, 자연스럽게 분단 문제가 현재 우리에게 어떤 흔적을 남겼고 또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반추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과거 파독 광부와 간호사로 일했던 남한 출신 교민이 경험했던 경계인의 삶, 어디에도 발을 붙이지 못하는 탈북자의 아슬아슬한 삶이 자연스럽게 딸려 나온다.


작가는 한반도에 발붙이고 사는 한민족의 문제를 이방인이라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보편적인 문제로 확장해 보여준다.

그 끝에서 나는 누군가의 삶이 어디에서 태어나고 자랐느냐로 불행해져선 안 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물론 다른 독자는 다른 결론에 도달할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이 작품을 읽는 동안 구름이 잔뜩 회색빛 하늘을 올려다본 기분이 들었다.

가본 적도 없는 독일의 하늘이 이런 모습이 아닐까 싶었다.

그래도 책을 덮을 땐 두꺼운 구름을 뚫고 가느다란 빛이 땅에 닿는 풍경이 떠올랐다.

새벽의 그림자
새벽의 그림자
임택수 장편소설 『김섬과 박혜람』(나무옆의자)

지난해 가장 감동적으로 읽었던 장편소설 중 하나는 문미순 작가의 『우리가 겨울을 지나온 방식』이다.

세계문학상 수상작을 매년 챙겨보긴 하면서도 최근 당선작은 조금 아쉬웠는데, 『우리가 겨울을 지나온 방식』은 그런 아쉬움을 확 털어낸 훌륭한 작품이었다.

그래서 올해 수상작은 어떤 작품일지 꽤 많은 기대를 했다.

세계문학상 수상자는 생짜 신인이 아닌 경우가 많은데, 이번에도 그랬다.


이야기의 겹이 많고, 등장인물의 심리를 다루는 필치가 섬세하다.

익숙한 공간인 한국과 낯선 공간인 프랑스를 오가는 배경 속에서, 보편적이라고 말하긴 어려운 사랑이 펼쳐지다가 접히더니, 마침내 맑은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반짝 빛난다.

이 모든 과정이 정적인 것 같으면서도 다채롭다.

마치 밤새 내린 비에 젖은 식물의 푸른 잎을 새벽에 바라보는 기분이 들었다.

작가 이름을 가리고 읽었다면, 여성 작가의 작품으로 착각할 뻔했다.


작품을 읽기 전에는 나무 아래 두 여자가 앉아 있는 표지에 실린 그림(메리 카사트의 1869년 작 'Two seated woman')이 뜬금없어 보였는데, 다 읽고 나니 왜 이 표지를 골랐는지 알 것 같다.

탁월한 선택이다.

김섬과 박혜람 - 제20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김섬과 박혜람 - 제20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정해연 장편소설 『용의자들』(위즈덤하우스)

고등학교 3학년 여학생이 목이 졸려 사망한 채로 발견된다.

사망자 주변인 모두가 용의자다.

사망자의 부모, 남자 친구, 남자 친구의 엄마, 담임선생, 베프까지.


가장 용의자와 거리가 멀 것 같은 사람이 용의선상에 차례로 오르고, 또 올라야 할 이유도 충분하다.

용의자들 중 누가 범인일지 추리하다 보면, 페이지 넘기는 속도에 미친 듯이 불이 붙는다.

재미도 재미인데 가독성이 엄청나다.

도대체 누가 범인인지 알고 싶어 미칠 지경이 되니 말이다.


사실 목차를 보면 누가 피해자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핵심 인물인지 짐작할 수 있다.

첫 목차와 마지막 목차에 실린 이름이 같았으니 말이다.

쓸데없이 눈치가 빨라 해당 목차에 실린 이름이 범인이겠거니 하며 이야기를 따라갔다.


목차가 바뀔 때마다 인간애가 쿠크다스처럼 박살 난다.

입에서 "와! C8!" 소리가 몇 차례나 나왔는지 모른다.

욕을 하며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마침내 비밀의 문이 열리는 시간이 온다.


아... 

내가 예상한 용의자가 피해자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결정적인 인물이 맞았다.

그런데 그 용의자에게 아무런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없을 줄은 몰랐다.

심지어 그 용의자를 범인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상황.

그 상황 앞에서 1g 남아 있던 인간애마저 사라진다.


내가 한때 쓰면서 집착했던 '읽을 땐 재미있지만, 읽고 나면 몹시 기분이 찝찝해지는 소설'에 200% 부합하는 작품이다.

오랜만에 읽는 재미와 더러운 기분을 동시에 느꼈다.

여름에 킬링타임용으로 딱이다.

그 어떤 호러 영화보다 소름 끼친다.

인간이 제일 무섭다.

용의자들
용의자들
고우리 산문집 『편집자의 사생활』(미디어샘)

출판 시장에 넘쳐나는 게 산문집이라지만, 늘 새롭게 다가오는 종류의 산문집이 있다.

내겐 직업을 다룬 산문집이 그렇다.

나는 최선을 다해 자기 일을 하고, 그 일로 정직하게 밥을 먹는 사람들의 모습을 사랑한다.

내겐 EBS '극한직업'이 그 어떤 영화나 드라마보다 감동적이다.

이 책은 책을 만드는 사람, 편집자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산문집의 내용보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풀어보고 싶다.

이미 많은 리뷰가 있는 산문집이어서 거기에 비슷한 칭찬을 보태는 것보다 내 경험을 이야기하는 게 더 신선할 것 같다.


나는 신문기자로 11년 일했고, 그중 2년은 편집기자 경력이다.

편집기자는 신문 지면의 레이아웃을 짜고 제목을 단다.

제목을 잘 달면 대단하지 않은 기사인데도 잘 읽히고, 잘 못 달면 좋은 기사인데도 묻힌다.

편집기자가 생각하는 좋은 제목과 취재기자가 생각하는 좋은 제목이 다를 때가 종종 있다.

취재기자와 편집기자를 모두 경험해 본 결과, 이런 경우 대체로 편집기자의 의견이 옳다.

취재기자가 기사를 쓰지만, 편집기자가 오히려 그 기사를 더 잘 이해할 때가 많다.

취재기자는 해당 기사에만 매몰돼 있지만, 편집기자는 여러 기사의 맥락을 읽어낸 뒤 종합적인 판단을 통해 레이아웃을 짜고 제목을 달기 때문이다.

취재기자가 단 가제대로 제목을 다는 편집기자는 월급루팡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편집기자 경험이 나중에 취재기자로 일할 때 많은 도움이 됐다.

편집기자가 지은 제목이 마음에 안 들어도 받아들일 수 있었고, 때로는 편집기자의 마음을 읽어 나도 원하고 편집기자도 원할만한 제목을 먼저 제시할 때도 있었다.

그런 경험 때문일까?

나는 책을 만들 때 편집자에게 전권을 맡기고 편집자의 의견 대부분을 그대로 따르는 편이다.

그리고 내가 지은 가제가 실제 책의 제목이 된 경우도 꽤 많다.

장편소설 『나보다 어렸던 엄마에게』 『다시, 밸런타인데이』 『젠가』 『왓 어 원더풀 월드』, 소설집 『괴로운 밤, 우린 춤을 추네』, 산문집 『안주잡설』 등은 모두 내가 가제로 지었던 제목이 그대로 출간 때까지 이어진 사례다.

편집자를 이해하면 작가도 편하다.


작가라면 누구든 편집자와 인연을 맺게 된다.

편집자를 향한 작가의 감정은 꽤 복잡하다.

고마울 때도 있지만 미울 때도 있고, 가깝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한없이 멀게 느껴질 때도 있다.

직업 산문집은 해당 직업 종사자를 이해하는 가장 빠르고 값싼 방법이다.

편집자가 밉고 멀게 느껴지는 작가라면 이 산문집을 일독해 보기를 권한다.

그 어떤 편집자도 자기가 만드는 책과 작가가 망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누구보다 책이 대박 나기를 바라는 사람이 편집자라는 사실을 이 산문집이 알려줄 것이다.

편집자의 사생활 - 업무일지가 이렇게 솔직해도 괜찮을까?
편집자의 사생활 - 업무일지가 이렇게 솔직해도 괜찮을까?
문지혁 소설집 『고잉 홈』(문학과지성사)

한국이 아닌 어딘가(아마도 미국?)의 풍경, 배경에 깔린 어스름한 새벽의 박명, 소설집의 제목을 담은 간판.

책을 덮고 다시 표지를 보니 소설들과 잘 어울리는 표지다.

소설집을 읽기 전에는 별다른 감흥이 없었던 표지인데, 읽은 후에는 설명할 수 없는 애틋한 기분이 들었다.

올해 들어 읽은 책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표지다.

'작가의 말'을 보니 작가가 원래 의도한 제목은 이 제목이 아니었나 보다.

편집 과정에서 제목이 바뀐 건 탁월한 선택이다.


소설집에 실린 아홉 편의 단편 모두 고국을 떠나 낯선 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이의 설렘과 불안을 섬세한 시선으로 따라간다.

작가의 전작인 장편소설 『초급 한국어』와 『중급 한국어』처럼 단편 대부분이 작가의 유학 경험을 바탕으로 쓴 듯 현장감이 상당하다.

장편보다 유머(라고 쓰고 허무 개그)는 덜하지만 잔향은 길어서 오래 페이지를 붙잡게 한다.


한국 소설에서 부족한 부분을 꼽으라면 한국이 아닌 장소를 배경으로 쓴 작품이 드물다는 점인데, 작가는 꾸준히 타국을 배경으로 '디아스포라' 문학을 선보여 자기 색깔을 확실하게 만들어 나가고 있다.

고향을 떠났지만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려는 아이러니한 심리가 다양한 형태로 변주되며 독자에게 묻는다.

당신은 지금 어디에 있고 어디로 가고 있느냐고.

무엇이 성공이고 무엇이 실패냐고.

만약 소설의 배경이 한국이었다면 이런 질문이 굉장히 심심하게 다가왔을 테다.

매력적인 소설집이다.

고잉 홈
고잉 홈
김준녕 장편소설 『붐뱁, 잉글리시, 트랩』(네오픽션)

책을 열 때부터 덮을 때까지 폭주기관차에 탑승한 듯한 기분을 느꼈다.

영어를 배우려고 한국에 있는 영어마을로 유학을 온 청년들이 등장인물이라는 설정부터 어처구니없지 않은가.

영어로 말하지 않으면 굶어야 하고, 반항하면 선생이 단소로 공격하는 모습쯤은 뒤로 넘어가면 아무것도 아니다.

난데없이 스파이를 찾기 위한 미션을 해결해야 하고, 카지노에서 총격전이 벌어지며, 북한에 불시착해 '미제 앞잡이'라는 욕을 듣는 등 시종일관 황당하기 짝이 없는 활극이 펼쳐진다.

이야기가 어디로 튈지 가늠할 수 없고, 온갖 드립이 난무해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실소를 자아내게 한다.


무슨 의미를 찾겠다고 진지하게 페이지를 넘기면 함정에 빠지기 딱 좋은 소설이다.

굳이 의미를 찾자면 대한민국의 영어지상주의를 풍자하는 소설일 테고, 더 넓게 보자면 우리 사회에서 권력화된 모든 것에 태클을 거는 소설일 테다.  

어떻게 읽든 자유지만, 내 생각에는 아무 생각도 없이 청순한 뇌를 유지한 채 다가오는 이미지를 받아들이는 게 편하다.

최근에 읽은 소설 중 가장 시끄럽고 어수선한 장편이었다.

붐뱁, 잉글리시, 트랩
붐뱁, 잉글리시, 트랩
차도하 시집 『미래의 손』(봄날의책)

미리 밝히는데, 이 글은 시집 바깥 이야기가 더 많은 잡설이다.

그리고 나는 시를 잘 모르니 너무 진지하게 읽진 마시라.


시간은 2020년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나는 문학 담당 기자로 신춘문예와 관련한 크고 작은 업무를 맡고 있었다.

다른 신문사의 새해 첫 지면에 실린 당선작을 살피는 건 당연한 일이었고, 그중 한국일보 지면에서 시인의 이름을 처음 봤다.


그땐 그냥 지나쳤던 이름인데, 얼마 후 그 이름이 여러 뉴스에 실려 주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시인은 매년 신춘문예 당선작을 모아 펴내는 『신춘문예 당선시집』에 작품 싣기를 거부했다.

그 모습을 보고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나라면 절대 그렇게 못 했을 테다

당선작을 모아 내는 출판사 측 인사가 미투와 엮여있든 말든 일단 지면에 당선작을 실어 이름을 알리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을 테니까.


나중에 시인은 원고료를 밝히지 않은 원고 청탁도 거절해 화제를 모았다.

자칫하면 까다로운 신인으로 찍혀서 청탁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유명 문학 출판사에서 시집을 출간하기가 어려울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런 용기를 냈던 걸까.

닳고 닳은 나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용기다.


그 이후엔 내 코가 석자여서 시인의 이름을 잊고 살았다.

솔직히 시에는 별 관심이 없기도 했고.

그러다가 지난해 느닷없는 부고로 그 이름을 다시 들었다.

부고라니...

고작 20대 중반인데 세상을 떠나다니.

재능있는 청년이 꽃을 제대로 피워보지도 지는 건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때뿐이었다.

내 코가 석 자인데 무슨.

 

그러다가 또 느닷없이 시인의 이름을 다시 접했다.

시인의 첫 시집이자 유작이 나온다는 소식으로.

그 소식을 듣고 떠올린 건 뜬금없지만 싱어송라이터 유재하의 첫 앨범이자 유작인 <사랑하기 때문에>였다.

시인의 첫 시집도 유재하의 첫 앨범처럼 대단한 작품이 아닐까 하는 기대를 하며 바로 온라인 서점 장바구니에 시집을 넣었다.


이 시집에 관해 평가할 말은 별로 없다.

시도 모르는 놈이 무슨 말을 하겠는가.

다만 "나를 펼쳐주세요 나는 줄줄 흐르고 싶어요 강이 될래요 바다가 될래요 마그마가 될래요"(독서유예), "지옥에는 풀이 없다던데/지옥에는 햇빛이 없으니까/지옥에는 초록이 없으니까/그렇다면 내 방은 이미 지옥이구나"(그러나 풍경은 아름답다) 같은 문장을 읽었을 때 눈물이 머리를 거치지 않고 바로 바깥으로 흘러나왔다는 감상 정도는 남기고 싶다.

김기태 작가의 첫 소설집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과 더불어 올해 계속 여러 독자의 입에 오르내릴 책이 되지 않을까 예언한다.

미래의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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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증정 [박산호 x 조영주] 인터뷰집 <다르게 걷기>를 함께 읽어요 [그믐북클럽Xsam] 24. <작가란 무엇인가> 읽고 답해요[그믐밤] 33. 나를 기록하는 인터뷰 <음악으로 자유로워지다>
[그믐클래식] 1월1일부터 꾸준히 진행중입니다. 함께 해요!
[그믐클래식 2025] 한해 동안 12권 고전 읽기에 도전해요! [그믐클래식 2025] 1월, 일리아스 [그믐클래식 2025] 2월, 소크라테스의 변명·크리톤·파이돈·향연[그믐클래식 2025] 3월, 군주론 [그믐클래식 2025] 4월, 프랑켄슈타인
6월의 그믐밤도 달밤에 낭독
[그믐밤] 36. 달밤에 낭독, 셰익스피어 2탄 <맥베스>
수북탐독을 사랑하셨던 분들은 놓치지 마세요
[📚수북플러스] 2. 귀하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_수림문학상 작가와 함께 읽어요[📚수북플러스] 1. 두리안의 맛_수림문학상 작가와 함께 읽어요
🧱🧱 벽돌책 같이 격파해요! (ft. YG)
[책걸상 '벽돌 책' 함께 읽기] #23. <냉전>[책걸상 '벽돌 책' 함께 읽기] #22. <어머니의 탄생>[책걸상 '벽돌 책' 함께 읽기] #21. <세계를 향한 의지>[책걸상 '벽돌 책' 함께 읽기] #20. <3월 1일의 밤>
앤솔로지의 매력!
[그믐앤솔러지클럽] 1. [책증정] 무모하고 맹렬한 처음 이야기, 『처음이라는 도파민』[그믐미술클럽 혹은 앤솔러지클럽_베타 버전] [책증정] 마티스와 스릴러의 결합이라니?![책나눔] 어딘가로 훌쩍 떠나고 싶을 때, 시간을 걷는 도시 《소설 목포》 함께 읽어요. [장르적 장르읽기] 5. <로맨스 도파민>으로 연애 세포 깨워보기[박소해의 장르살롱] 20. <고딕X호러X제주>로 혼저 옵서예
반가운 이 사람의 블로그 : )
소란한 세상에서 잠시 벗어나, 책과 함께 조용한 질문 하나씩[n회차 독서기록] 에리히 프롬 '건전한 사회'를 다시 펼치며, 두 번째 읽는 중간 단상
내일의 고전을 우리 손으로
[도서 증정] 내일의 고전 <불새> 편집자와 함께 읽어요![도서 증정]내일의 고전 소설 <냉담> 편집자와 함께 읽어요! [이 계절의 소설_가을] 『냉담』 함께 읽기
제발디언들 여기 주목! 제발트 같이 읽어요.
[아티초크/책증정] 구병모 강력 추천! W.G. 제발트 『기억의 유령』 번역가와 함께해요.(8) [제발트 읽기] 『이민자들』 같이 읽어요(7) [제발트 읽기] 『토성의 고리』 같이 읽어요(6) [제발트 읽기] 『전원에서 머문 날들』 같이 읽어요
🎁 여러분의 활발한 독서 생활을 응원하며 그믐이 선물을 드려요.
[인생책 5문 5답] , [싱글 챌린지] 완수자에게 선물을 드립니다
노예제가 뭐에요?
노예제, 아프리카, 흑인문화를 따라 - 02.어둠의 심장, 조지프 콘래드노예제, 아프리카, 흑인문화를 따라 - 01.노예선, 마커스 레디커[이 계절의 소설_가을] 『이름 없는 여자의 여덟 가지 인생』 함께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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