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지런히 읽고 흔적을 남깁니다
글로 남기는 나만의 기록장국내외(대부분 외서이긴 하지만) 금서 서른 권에 관한 이야기와 작가의 생각을 풀어낸 독서 산문집이다.
이 책이 마지막에 다룬 조지 오웰의 <1984>를 제외하면 읽어 본 책이 한 권도 없다.
일부는 한국에 번역 출간된 일이 없어서 원서로밖에 접할 수 없는 책이다.
그렇지만 읽는 데 별 지장이 없다.
내용이 무척 흥미진진하고 재미있으니 말이다.
다양한 금서를 통해 당대의 정치, 사회, 종교 문제를 현재로 끌어와 어떤 의미가 있는지 돌아보는 분석이 대단하다.
몇몇 책은 찾아서 꼭 읽어보고 싶어졌다.
무엇보다도 필력이 엄청나서 읽는 맛이 장난 아니다.
특히 '안전한 책들의 칵테일파티'라고는 이름을 붙인 서문(이라기에는 장대한)이 압권이다.
현재 출판 시장에 누구의 마음도 긁지 않는 '안전한 책'만 가득한 게 아니냐며, 그런 책이 과연 '좋은 책'인지를 묻는 태도가 날카롭고 도발적이다.
김훈 작가의 장편소설 <칼의 노래> 서문 이후 가장 인상적인 서문이었다.
김훈 작가를 언급해서 하는 말인데, 이 책을 읽고 결은 다르지만 김훈·박래부의 <문학기행>이 떠올랐다.
작가가 기자 출신이라는 공통점을 가진 데다, 결은 달라도 문학을 심층적으로 들여다보고 의미를 찾는 글이니 말이다.
그리고 이 책은 <문학기행>과 비교해도 부족할 게 없는 '좋은 책'이다.
p.s. 다음 쇄에는 149 페이지의 '롤리타'가 '어둠 속의 웃음소리'로 수정되기를. 이 책 아마도 여러 쇄를 찍을 듯하다.


새 장편소설을 출간하고 왠지 모를 현타와 자괴감에 사로잡혀 그 감정을 극대화해 보려고 간만에 이 만화를 다시 읽었다.
곽경수, 신득녕, 천종섭...
아...
이 나 잇값 못하고 찌질하기 짝이 없는 예술가 아재들을 어찌할꼬.
그래, 나만 못난 게 아냐.
그들에게서 내 모습을 확인하니 웃음이 났다.
명작은 역시 결말을 알고 봐도 재미있다.


매년 새해 첫날을 맞으면 습관처럼 포털사이트에서 신춘문예 당선작 소설을 검색해 살핀다.
신춘문예 경쟁률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과 비교될 만큼 치열하지만, 이후 의미 있는 작품 활동을 벌이고 단행본까지 내는 당선자는 그리 많지 않다.
당선작을 훑어보며 나중에 어떤 작가가 살아남을지 예상해 보곤 하는데, 정말로 살아남아 단행본을 내면 반가운 기분이 든다.
2년 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인 '무겁고 높은'은 지금도 기억에 남는 단편이다.
탄광 폐쇄로 쇠락한 강원도의 소도시에서 역도 선수를 꿈꾸다가 포기하는 여고생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인데, 바벨을 드는 일보다 버리는 데 의미를 두는 주인공의 모습이 인상 깊었다.
앞으로 오래 보겠구나 싶었는데 내 예상을 넘어 젊은작가상, 이상문학상 우수상 등 굵직한 상을 휩쓸어서 깜짝 놀랐다.
불과 등단 2년 만에 말이다.
게다가 한국 문학에서 씨가 말라가는 남성 작가라는 점 때문에 더 눈이 갔다.
첫 소설집 출간 소식을 접한 뒤 바로 주문을 넣고 책을 기다렸다.
역시나 좋았다.
'세상 모든 바다' 등 몇몇 작품은 문예지를 비롯해 이런저런 경로로 접한 구면인데 다시 읽으니 새로웠다.
소설집에 실린 9개의 단편이 다루는 소재는 예능, OTT, 팬덤, 아이돌, 대중음악 등 무척 다채롭다.
작가는 이런 소재들을 교육, 노동, 차별 등 여러 사회 문제와 엮어 전방위로 다루는데 등장인물은 대체로 평범하고 우리 주위에 있을 것 같은 사람이다.
전 세계 여러 도시를 배경으로 다룬 '팍스 아토미카' 같은 단편을 제외하면 거대한 서사도 없다.
이래서 소설이 될까 싶은데 이 모든 요소가 빌드업해 기가 막히게 소설이 된다.
분명히 '지금' '여기'를 핍진하게 다루는 소설인데 질감이 기존의 '지금' '여기'를 다큐처럼 다룬 소설과 다르다.
현실을 비관이나 낙관으로 일관하지 않는 줄타기가 절묘하다.
사려 깊은데 연약하지 않다.
거대한 콘크리트 빌딩을 지탱하는 H빔처럼 단단하고 힘이 있다.
소설집에 으레 달리는 해설은 진부했지만, '작가의 말'이 없어서 신선했다.
작품으로 말하면 충분하다는 태도일 테다.
앞으로 작가를 정말 오래 보게 될 것 같다.
좋은 소설집이었다.


80년대 말 장마가 내리던 어느 날, 나는 밥그릇을 엎었다.
며칠째 장맛비가 추적추적 내려서 밖으로 나가서 놀지 못하는데, 밥상에는 반찬 하나 없이 매끼 간장과 밥만 올라왔다.
처음에는 어머니께서 마가린을 밥에 같이 비벼주셔서 잘 먹었는데, 이틀쯤 지나자 마가린이 떨어졌는지 간장만 밥상에 올라왔다.
나는 반찬 투정을 부리다가 밥그릇을 엎었고, 어머니는 나를 모질게 때렸다.
그날 이후 밥상에 반찬으로 간장만 상에 오르는 일은 없었다.
간장을 보면 문득 떠오르는 오래된 일이다.
바나나킥과 양파깡을 보면 어린 시절 잠결에 봤던 어머니의 뒷모습이 떠오른다.
밤중에 나는 뭔가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깼다.
어머니는 나와 동생의 머리맡에 바나나킥과 양파깡을 두고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잠에서 깨어난 나와 동생은 눈치 없이 좋다고 과자 봉지를 뜯었다.
이후 며칠 동안 어머니는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나중에 들어보니 어머니는 아주 안 들어올 작정이었다더라.
잡곡밥에 섞인 좁쌀을 보면, 시장에서 파는 좁쌀베개를 슬픈 눈으로 바라보던 어머니가 생각난다.
어머니는 어린 나를 먹여야 하는데 집에 먹을 게 아무 것도 없어서 베개를 뜯어 좁쌀을 꺼내 불려 나를 먹였다고 담담히 말했다.
나는 지금도 우는 아들을 달래려고 좁쌀베개를 뜯는 어머니의 마음을 도저히 헤아릴 수가 없다.
이 산문집에 담긴 여러 이야기는 그동안 세월에 묻어두고 살았던 많은 기억을 되살려준다.
작가는 다양한 음식을 매개로 음식에 관한 해박한 지식을 친절하게 풀어놓으며 자신의 오래된 기억을 소환한다.
대체로 가난하고 서글픈 기억이다.
화려한 요리를 만들면서 정작 제대로 끼니를 때우지 못하는 요리사들의 모습, 케첩에 물을 타서 핫도그에 뿌려주던 어린 시절 노점상의 박한 인심, 맛있는 성게알을 먹기 위해 들어가는 해녀의 수고로움, 중식 요리사와 양식 요리사의 서로 다른 흉터, 먹고살기 위해 다른 생명을 빼앗을 수밖에 없는 운명에 관해 고민했던 순간 등.
여기에 "구도심은 힘이 없다. 해소 기침하는 노인 같다" 같은 시를 닮은 아름다운 문장이 덤으로 올라가 읽는 맛을 더한다.
그 위에 내 기억도 포개져 가슴이 울렁거린다.
동네에서 친하게 지냈던 또래 아이가 푸세식 화장실에 빠져 똥독으로 죽었다는 말을 듣던 일, 달동네에서 지금 살고 있는 집보다 더 좁은 집으로 이사를 가며 리어카로 이삿짐을 나르던 일, 장마철에 잠을 자다가 다급하게 깨어나 쓰레받기로 방까지 밀려 들어온 빗물을 바깥으로 퍼내던 일, 달동네에 산다고 아랫동네 아이들이 던진 돌을 맞아 코가 내려앉았던 일 등.
기쁜 기억보다 슬픈 기억으로 더 많이 채워져 있는 삶이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글쎄다.
굳이 의미를 찾을 필요가 있을까?
누구도 자신의 선택으로 태어날 수 없다.
살아야 할 이유를 찾는 건 불가능해 보이니 그 시간에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하는 게 낫지 않을까?
그래야 조금이라도 더 행복해지지 않을까?
이 산문집을 덮으며 들었던 생각이다.


술집 옆 테이블에서 들려오는 직장인들의 회사 이야기, 찜질방에서 들려오는 할머니들의 며느리 뒷담화, 지하철에서 들려오는 누군가의 시시콜콜한 통화소리…. 우리가 일상에서 우연히 듣는 이야기는 특별한 내용도 아닌데 귀를 세우게 한다.
이 소설집은 그런 이야기를 닮았다. 작가는 우리가 일상에서 외면해 온 진실을 끄집어내 흔한 이야기를 흔치 않게 들려주는 데 탁월하다. 그 이야기에 누군가는 고개를 끄덕이고, 누군가는 불편해할지도 모르겠다. 어느 쪽이든 소설을 읽으면 작가가 탁월한 이야기꾼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소설 속 등장 인물들은 모두 자기 말을 하느라 바쁘다. 표제작 ‘말 좀 끊지 말아줄래?’에 등장하는 장례식장 풍경은 그야말로 ‘아사리판’이다. 상대가 고인과 어떤 사이인지도 모른 채 위로를 건네는 건 예사다. 아무 말이나 나오는 대로 떠들다가 냉장고에 보관된 술을 빼돌려 사업을 벌이겠다고 진지하게 의논하는 인물들의 모습에 실소가 절로 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이 시끄럽고 어지러운 말들이 어느 순간 묘하게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간다. 동시에 불편한 감정의 근원이 드러난다. 싫어도 아닌 척, 몰라도 아는 척….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진짜 모습이다.
작가는 수많은 말을 통해 우리가 가장 친밀하다고 여기는 가족, 친구의 관계가 실은 허상이 아닌가 묻는다. ‘전에도 봐놓고 그래’에선 시아버지 생일에 모인 가족들이 섞이지 않는 불편한 대화를 이어가며 긴장감을 조성한다. ‘사적 하루’ 속 인물은 희소병에 걸린 친구를 위로하기 위해 온천을 찾지만, 친구의 행복한 모습을 질투한다. ‘한밤의 손님들’의 주인공은 ‘엄마는 늘 꽥꽥대고, 동생은 늘 꿀꿀댄다’며 둘을 ‘오리’와 ‘돼지’라고 부른다. 소설 속엔 온통 염치없고 무례한 사람들뿐이라 불편한데 이상하게 낯설지 않다.


이 작품의 배경은 한 거대 기업이 파산한 지방자치단체를 인수해 만든 도시국가 ‘타운’과 그 내부에 자리 잡은 낡은 거주지 ‘사하맨션’이다. ‘타운’은 자본·기술·전문지식을 가진 사람들만 국민으로 받아들이며, 그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은 ‘L2’라고 불리며 2년 기한으로 체류 자격을 인정받아 노동력을 착취당할 뿐이다.
‘타운’의 국민이나 ‘L2’로도 인정받지 못하고 밀려난 이들은 ‘사하’로 불리며 ‘사하맨션’으로 숨어든다. 부유하지만 자유와 언로를 철저하게 통제하는 ‘타운’과 달리, ‘사하맨션’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따뜻한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다. 극단적으로 비교되는 두 공간은 우리 사회의 양극화 문제를 선명하게 드러내는 장치다.
소설의 등장 인물은 어머니의 추락사를 자살로 위장한 사장을 죽인 도경과 그 누나 진경, 태어날 때부터 오른쪽 눈이 없이 태어난 사라, ‘타운’에서 의료 실험 대상으로 전락한 우미 등 소외되거나 배제된 사람들이다. 총 12장으로 구성된 소설엔 장마다 다른 주인공이 등장해 개별적인 이야기를 이끌며 이들이 ‘사하맨션’으로 숨을 수밖에 없었던 배경을 설명한다. ‘타운’이 끌어안길 거부한 ‘사하’의 모습은 취업절벽에 매달린 청년, 실패한 영세 자영업자 등 우리 사회에서 각자도생의 길로 내몰린 ‘경제 난민’의 모습과 겹친다.
“우리는 누굴까. 본국 사람도 아니고 타운 사람도 아닌 우리는 누굴까. 우리가 이렇게 열심히 성실히 하루하루를 살아가면 뭐가 달라지지? 누가 알지? 누가, 나를, 용서해 주지?”(51페이지)
각 장 위로 최근 대한민국 사회를 뒤흔들었던 여러 사건이 포개져 강력한 기시감을 형성한다. 30년 전 ‘사하맨션’으로 흘러들어온 아이 ‘만’의 이야기를 다룬 장에 등장하는 사라진 배는 ‘세월호 사건’, ‘타운’의 무력 진압은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연상케 한다. 또한 30년 전 ‘사하맨션’에서 살다가 ‘타운’에서 신종 호흡기 전염병으로 사망한 보육원 직원 ‘은진’을 다룬 장에선 지난 2015년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사태 당시 정부의 부실한 대응이 떠오른다. 소설은 변화하기 위해 투쟁하지 않으면 패배의식이 내면화돼 미래로 나아가야 할 동력을 잃는 다고 경고한다.
소설 마지막 장에서 진경은 주변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혈혈단신으로 ‘타운’의 총리관으로 침입하지만, 그곳에서 마주친 진실은 허상이었다. ‘타운’을 다스리는 총리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고, 총리실 총비서란 정체를 알 수 없는 자만 존재할 뿐이다. 총리실 총비서는 진경에게 주변 사람들의 안위가 걱정된다면 ‘사하맨션’으로 돌아가라고 협박한다. 과거 총리관을 침입했던 이들의 선택도 같았다면서. 진경의 선택은 투쟁을 통한 연대의 복원이다. 파편처럼 흩어져 있던 이야기들은 진경의 선택으로 마침내 하나로 모인다.
“당신 틀렸어. 사람들은 원래 자리로 돌아가지 않았어. 그리고 나는 우미와 도경이와 끝까지 같이 살 거고.”(368페이지)
‘사하맨션’은 ‘82년생 김지영’만큼이나 주제의식이 큰 부피를 차지하는 작품이다. 읽는 재미보다 주제의식이 앞선다는 인상이 짙은데, 주제의식의 선명도는 ‘82년생 김지영’보다 옅은 편이다. ‘82년생 김지영’의 그림자를 벗어나면서도 그 영향력을 놓치지 않겠다는, 절충적인 선택이 아닐까.


우리는 늘 주어진 여건 아래에서 가능한 한 기회비용을 최소화하고 편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선택을 찾는다. 이 같은 선택을 우리는 합리적 선택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선택은 대개 합리적 선택과 거리가 멀다. 장애 때문에 버려진 아이를 입양하는 부부, 매년 어려운 이웃을 위해 익명으로 거금을 투척하는 독지가, 어린이 백혈병 환자를 위해 기꺼이 골수를 기증하는 간호사 등의 사례처럼 말이다.
우리는 그런 비합리적 선택에 ‘인간답다’는 수식어를 붙이곤 한다. ‘인간답다’는 그런 선택을 결정하는 인간의 자유의지와 동의어일지도 모르겠다. 이 작품은 죽음 앞에 선 인간의 자유의지에 따른 선택에 주목해 무엇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지 탐색한다.
이 작품은 인간의 자유의지가 어떻게 죽음의 두려움을 삶의 희망으로 치환하는지를 따뜻하면서도 섬세한 시선으로 따라간다. 이야기를 이끄는 두 가지 축은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유인원의 한 종류인 보노보의 몸속으로 영혼이 빨려 들어간 유인원 사육사 ‘진이’와 취업에 실패한 뒤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노숙자로 전락한 ‘민주’의 선택이다. 진이는 자신의 몸을 되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사흘 동안 보노보 ‘지니’의 감정과 기억을 공유하며 과거 자신의 선택이 지니의 평화로운 삶을 빼앗았음을 알게 된다.
진이는 지니의 삶을 되찾아 줄 선택의 갈림길에 서지만, 치러야 할 대가는 자신의 생명이다. 민주는 공익근무요원으로 근무하던 10년 전 자신을 귀찮게 하는 노인을 외면했다가 죽음에 이르게 한 기억을 트라우마로 가지고 있다. 민주는 절박한 상황에 빠진 진이를 도울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지만, 자칫 경찰로부터 쓸데없는 의심을 받는 처지에 놓일 수도 있다. 작가는 둘의 선택 과정을 좇으며 인간은 자유의지를 통해 죽음이란 절박한 상황 앞에서도 성장할 수 있는 존재라고 웅변한다.
보노보 지니는 삶과 죽음의 의미를 넘어 모든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매개다. 지니가 느끼는 희로애락은 인간의 감정보다 직설적이고 순수하다. 지니가 이제 막 태어난 자신의 동생을 바라보며 느꼈던 사랑과 기쁨, 쇼를 위해 춤추기를 강요당하며 느끼는 고통과 슬픔 등은 여과 없이 진이에게 전달돼 가슴을 아리게 한다. 진이는 지니를 통해 모든 생명에 저마다의 삶이 존재하고, 그 삶 또한 인간의 삶만큼 소중하다는 깨달음을 얻는다.
작품 후반에 진이가 지니를 가리키는 주어가 ‘나’로 전환하는 순간은 이 같은 깨달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 같은 전환은 진이가 지니의 모습으로 연장하는 삶은 자신의 모습으로 맞이하는 죽음보다 무의미하다는 깨달음과 지니를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돌려보내야 한다는 깨달음으로 이어지며 이야기를 절정으로 이끈다.


투명성은 정치나 경제 영역을 포함한 우리 삶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강조되고 있다. 사람들은 투명함이 서로를 신뢰할 수 있는 사회로 이끌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재독 사회학자 한병철 베를린예술대학 교수는 긍정적인 가치로 여겨져온 투명성 개념에 의문을 제시한다. 그는 이 책을 투명사회를 만인이 만인을 감시하는 새로운 통제사회라는 전복적인 해석을 내놓는다.
저자는 전작 ‘피로사회’를 통해 자유가 오히려 자기 착취를 낳고 스스로를 고갈시키는 현대인의 모순을 파헤쳐 독일에서 큰 논란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현대인들이 자신의 모든 것을 자발적으로 전시해 스스로 디지털 통제사회를 완성해나간다는 내용을 담은 ‘투명사회’는 지난 2012년 독일에서 출간 당시 ‘피로사회’ 이상의 충격을 안겼다.
당시 독일에선 크리스티안 볼프 대통령이 부정 의혹에 휘말려 사임하게 된 상황이어서 정치ㆍ경제 권력의 투명성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컸기 때문이다.
저자는 “신뢰 위에 세워진 사회에서는 투명성에 대한 집요한 요구가 생겨나지 않는다. 투명성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진 것은 사회의 도덕적 기반이 취약해졌다는 것, 진실성이나 정직성과 같은 도덕적 가치가 점점 더 의미를 잃어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며 “믿지 못하는 사회이기 때문에 투명성을 요구하고 있을 뿐이다. 투명성에 대한 요구는 궁극적으로 자발적 노예가 넘쳐나는 통제사회를 만들어낼 것”이라고 주장한다.
저자가 투명성을 넘어서는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저자는 끊임없이 이 사회가 어떤 곳인지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 같은 저자의 태도는 독일을 비롯한 선진국을 무조건적으로 배우려는 태도에 제동을 걸고 한 발짝 물러서서 생각해보게 만든다.
저자는 “투명성을 요구하다 보면 커뮤니케이션의 공간은 획일화된다”며 “모든 것을 만인이 보는 앞에서 즉각 공개하게 되면 사유의 공간이 없어지고, 정치는 호흡이 짧아져 길게 내다보고 계획을 할 수가 없어진다”고 지적했다.
최근까지만 해도 북유럽의 복지 모델을 배우자는 목소리가 거셌다. 그러나 높은 조세로 실현하는 북유럽의 복지 모델은 사실상 한국의 현실에선 이상에 가깝다는 인식이 확산됨에 따라 북유럽 배우기 열풍은 다소 수그러들었다. 저자의 남다른 인식은 빛이 밝을수록 그림자도 짙다는 사실을 깨달으라는 일종의 경고처럼 들린다.


눈치도 일머리도 없는 중년 남자, 초등학생 시절에 그림으로 받은 상이 자랑의 전부인 화가, 평생 제대로 가족을 돌보지 않은 떠돌이, 사업이 망해 도망치듯 도시를 떠나온 남자, 절에 버려져 자라는 아이들, 일자리를 잃고 고시원에서 포커로 소일하는 시간 강사, 원정 성매매를 하다가 코로나 때문에 밥벌이가 막힌 여자...
이 소설집에 등장하는 인물은 하나 같이 어디에도 쉽게 발을 붙이지 못하는 낙오자다.
이들이 겪어 온 세상은 차갑고 가차 없다.
이들에게선 오랫동안 찌든 패배의 냄새가 난다.
하지만 딱히 선량하다는 인상을 주지도 않는다.
오늘 당장 사라져도 아쉬워할 사람 하나 없을 것 같다.
어쩌면 그냥 사라지길 바라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쓸데없이 밥이나 축낸다는 이유로.
이 소설집의 가장 큰 특징은 뚜렷한 지역성이다.
이들을 품어주는 공간은 남도다.
남도는 낯선 이들를 은근슬쩍 받아들이고 가진 것을 츤데레처럼 슬그머니 내준다.
작가는 걸쭉한 지역 방언과 음식 등을 곁들여 남도를 생동하는 공간으로 묘사한다.
'잉여인간' 취급받으며 주변으로 밀려났던 이들은 남도의 품 안에서 다시 일어설 힘을 찾거나 적어도 위안을 얻는다.
영화나 드라마는 물론 소설에서조차 지역성을 찾아보기 어려운 현실 속에서 이 소설집에 담긴 단편은 유니크하다.
조선희 전 씨네21 편집장은 이창동 감독의 영화 속 등장인물들을 가리켜 "다들 주민등록번호와 주소가 정확히 찍힌 주민등록증 하나씩 지갑 안에 넣고 우리 주위에 섞여서 살아가고 있다는 느낌"이라고 평가했다.
나는 이 소설집을 읽고 조 전 편집장의 평가를 떠올렸다.
이 소설집에 담긴 단편을 아무 작품이나 영화로 만들면 이창동 감독의 작품과 비슷한 느낌을 주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봤다.


작가의 소설에 으레 등장하는 술이 보이지 않아 당황스러울지도 모르겠다. 술 대신 고단한 일상을 견디며 흘린 땀과 눈물이 그 자리에 고여 있다. 맛깔나는 술자리 묘사가 보이지 않는다고 실망할 필요는 없다. 소주의 비릿한 단내만큼이나 체취가 어린 짠내도 매력적이니 말이다.
소설집의 문을 여는 ‘모르는 영역’은 아내를 잃은 중년 남성과 딸의 서먹한 관계를 통해 섞이지 못한 채 부유하는 인간관계의 단면을 포착한다. 권 작가는 살갑진 않아도 서로에게 다가가려는 부녀의 모습을 그리며 한 걸음 더 관계를 발전시키는 길은 솔직함에서 출발하는 게 아니냐고 묻는다.
빚에 허덕이면서 모아야 할 돈을 백 원 단위까지 계산할 수밖에 없는 ‘손톱’의 주인공인 스물한 살 여성에게 할머니는 그저 조심하라고 말할 뿐이다. 일하다가 사고로 오른손 엄지손톱이 절반 가까이 날아가 통증을 느끼면서도 일을 해야 하고, 500원 더 비싸다는 이유로 매운 짬뽕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니 말이다.
아울러 작가는 우리 주변에서 조금 낯선 사람들에게 시선을 돌려 문제의식을 넓히고 다채로운 서사를 선보인다. ‘희박한 마음’의 주인공인 레즈비언 할머니는 성소수자가 등장하는 문학 작품이 늘어난 요즘에도 낯선 인물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오래전 대학에 다니던 시절에 함께 담배를 피우던 연인이 남학생에게 폭행당하는 모습을 무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과거를 끊임없이 복기하며 성소수자를 억압하는 현실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너머’는 투병 중인 어머니를 둔 기간제 교사가 쪼개기 계약과 계약 연장 등 차별과 배제에 노출되는 모습을 통해 삶이 어디까지 슬퍼질 수 있는지 파고든다. ‘재’의 주인공은 심각한 질환으로 수술을 앞둔 상황에서도 식당 주인에게 담배를 얻어 피우려고 한다. 애잔하고도 안쓰러운 풍경들이다.
작가는 종종 집요해 보일 만큼 현실을 그대로 묘사해 보여주는데, 이런 태도가 역설적으로 따뜻한 위로처럼 다가올 때가 있다.
소설집에 추천사를 보탠 김애란 작가는 “비정해서 공정한 눈이란 이런 걸까”라고 물으며 “소설이 주는 위로란 따뜻함이 아니라 정확함에서 오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한다. 소설집을 덮은 뒤 읽으면 더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추천사다.
소설집 제목은 ‘손톱’의 등장 인물들이 나누는 대화에서 나왔다. 권 작가는 소설집 끝에 실은 ‘작가의 말’에 “모르겠다”고 고백한다. 소설집 제목과 ‘작가의 말’ 사이의 행간은 세상을 이해하는 일의 시작은 세상을 모르겠다고 인정하는 일이 아니냐는 의미로 읽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