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지런히 읽고 흔적을 남깁니다
글로 남기는 나만의 기록장영화계 출신 소설가들이 많아졌다.
장편소설 『고래』를 쓴 천명관 작가, 『아몬드』를 쓴 손원평 작가, 『불편한 편의점』을 쓴 김호연 작가, 『급류』를 쓴 정대건 작가, 『미러볼 아래서』를 쓴 강진아 작가 등 당장 떠오르는 이름만 헤아려 봐도 손가락이 모자란다.
서사가 분명하게 드러나고 영상이 눈앞에 바로 떠오른다는 점에서 영화계 출신 소설가들이 쓴 작품을 좋아한다.
이 앤솔로지는 참여 작가 모두가 영화감독 출신이라는 점에서 독특하다.
영화감독 출신 작가의 작품만을 모은 앤솔로지는 아마도 이 책이 처음이 아닌가 싶다.
정은경 감독이 쓴 「두근두근 꾸륵꾸륵」은 90년대를 배경으로 10대 고등학생 소녀 탁구 선수들을 등장인물로로 내세워 그 시절 사랑의 복잡미묘한 감정을 섬세하게 다룬다. 88올림픽, 드라마 「질투」, 가수 강수지, 탁구선수 현정화 등 그 시절의 아이콘을 매개로 제대로 추억 여행을 했다. '급똥'이 꽤 중요한 소재인데 전혀 더럽지 않다. 몹시 귀엽다.
이동은 감독이 쓴 「여름을 찾아서」는 가상현실 체험이라는 소재를 통해 주인공의 불완전한 기억을 복원하고 상처에서 벗어나는 과정을 그린 SF다. 우라사와 나오키의 「21세기 소년」 후반부에 등장하는 가상현실 체험을 연상케 하는 연출이었는데, 그보다 훨씬 아름답고 애절한 묘사가 돋보였다.
오세연 감독이 쓴 「매실과 짝피구」는 첫사랑의 열병을 앓는 10대의 마음을 간지럽게 표현한 로맨스다. 주인공의 일기장을 몰래 엿보는 기분을 느끼게 하는 구성, 체육 선생님과 짝꿍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주인공의 심리를 따라가다 보면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영화감독들이 쓴 소설인 만큼 작품 하나하나의 질감이 기존 앤솔로지와 꽤 다르다.
마치 하이틴 로맨스 영화 세 편을 옴니버스로 감상한 기분이 들었다(영상화를 염두에 두고 소설을 썼음이 확실하다).
시원한 색감의 표지만큼 상큼하고 동시에 애틋하다.
기분 좋게 책을 덮었다.
간질간질한 기분을 오랜만에 느껴봤다.


춤에는 젬병이다.
내 기억 속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췄던 춤은 대학교 신입생 시절에 뭣도 모르고 운동권 선배들 손에 이끌려 꽃다지의 노래 '바위처럼'에 맞춰 따라 했던 율동이다.
율동을 따라 할 때 무척 부끄러웠던 기억이 난다.
그 시절에 오락실에서 DDR이나 펌프가 대단한 인기를 끌었는데, 쳐다보지도 않았음은 물론이다.
최근에 '스우파'가 화제를 모았을 때도 별 감흥이 없었다.
그래도 궁금하긴 했다.
도대체 무슨 매력 때문에 춤에 열광하는 사람이 많은지 말이다.
이 앤솔로지는 춤 좀 춰봤다는 작가 다섯 명이 쓴 단편소설을 모았다.
다섯 단편 모두 현재의 고민과 결핍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춤을 내세운다는 점은 같지만, 저마다 다른 배경을 가진 작가들이 쓴 작품인 만큼 이야기가 다채롭다.
피아노 연주자를 꿈꾸다가 기연을 만나 댄서를 꿈꾸며 행복을 찾기도 하고(춤추는 동전), 쌍둥이 동생 대신 꿈꾸던 무대에 올라 아슬아슬한 상황을 겪기도 한다(꿈을 꾸며).
발레리나로서 가지지 못한 장점에 좌절하는 대신 자신만의 장점을 살려 한 발 나아가기도 하고(비 플러스), 누군가에겐 평범함에서 벗어나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걸 파이터).
그중에서도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어린 시절과 딸이 탭 댄스를 매개로 조우하는 「유성우가 내리는 날」이 인상적이었다. 유성우라는 배경 아래에서 과거와 현재를 교차시키는 연출이 환상적이었다.
읽는 내내 풋풋한 성장 드라마를 보는 기분이 들어서 상큼했다.
작가들이 왜 춤을 추고 왜 소설을 썼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송나라 사신 서긍이 쓴 『고려도경』은 당대 고려의 모습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사료이지만, 왕실 계보 서술이 엉망이고 고구려와 고려의 역사가 뒤섞여있는 등 오류가 적지 않다.
외국인이 외국인의 시각으로 쓴 책의 한계다.
오류 없이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전달할 가장 좋은 방법은, 우리가 직접 외국의 언어로 우리를 설명하는 방법일 테다.
몰랐다.
외국인을 대상으로 출판된 한국 여행 관련 서적 중에 한국인이 쓴 책이 지금까지 단 한 권도 없었다는 사실을.
이 산문집은 '네이티브 코리안'이 외국인 독자를 대상으로 두고 영어로 쓴 첫 번째 한국 여행 서적이다.
어처구니없긴 한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왜 그런지 조금은 이해가 된다.
한국 작가 중에 유창한 영어 문장으로 책을 쓸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한국의 출판사 중에서 영어로 쓰인 책을 출간할 곳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저자는 여러 책을 써서 출간한 작가임과 동시에, 여러 책을 번역한 경력을 가진 번역가이기도 하다.
하지만 외국어를 한국어로 번역하는 작업과 한국어를 외국어로 번역하는 일은 다르지 않은가.
놀랍게도 이 책에는 역자의 이름이 따로 없다.
작가는 번역가를 찾는 대신 딥엘(DeepL)과 챗GPT 등 인공지능의 도움을 받는 새로운 길을 택했다.
기획부터 집필, 번역 과정까지 모두 기념비적인 책이다.
이 책은 꽤 두꺼운 편이어서(647페이지) 집어 들면 무기로 쓰기에 좋을 정도로 묵직한데, 막상 펼치면 읽기에 그리 부담스럽지 않다.
이 책은 한국어로 서술한 부분과 같은 내용을 영어로 서술한 부분을 20여 챕터에 걸쳐 번갈아 배치하는 구성을 취하고 있다.
한국어 부분만 읽으면 분량이 딱 절반으로 줄어드는 데다, 가독성도 매우 훌륭하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방대하고 자세한 여러 음식 설명이다.
작가가 도입부에 삼겹살을 가장 먼처 추천하는 이유와 한국인이 소주를 많이 마시는 이유에 관한 챕터를 배치했다는 것만으로도 이 책의 성격을 알만 하다.
맛집 설명도 구체적이어서 필동면옥, 우래옥, 나리의 집, 연타발, 화해당 등의 상호가 대놓고 나온다.
홍어, 낙지, 깻잎, 골뱅이 등 외국인에게 낯선 음식에 관한 서술 분량도 상당하다.
작가는 음식을 바탕으로 한국의 문화와 한국인의 모습을 입체적으로 설명한다.
예를 들어 치맥과 한국의 야구 응원 문화를 연결해 설명하다가, IMF 외환위기와 한일 월드컵을 엮는 식이다.
물론 한국 최고의 야구 명문 구단은 두산 베어스라고 대놓고 팬심을 드러내는 부분은 그냥 '스킵'하면 된다.
아쉬운 부분이 없진 않다.
서울 바깥 지역에 관한 서술이 많이 부족하다.
심지어 몇몇 광역자치단체는 아예 서술조차 되지 않는다.
지나치게 음식 서술이 많다.
여행보다는 음식 가이드 같다는 인상을 줄 정도로 말이다.
그런데도 이 책을 추천하는 이유를 단 하나만 꼽자면 재미다.
이 책은 대단히 재미있다.
한국인이라면 모두 알만 한 내용인데도 이를 재미있게 서술해 새롭게 바라보게 하는 작가의 유머 감각이 탁월하다.
게다가 한국인이 읽어도 재미있고 새로운 내용이 많다.
한국인이 줄을 설 때 가깝게 붙는 이유를 좁은 국토와 연결 지어 설명하는 부분, 교도소에서 출소한 사람에게 두부를 먹이는 이유에 관한 부분은 읽으며 무릎을 치게 만든 탁월한 분석이었다.
한국인 독자도 외국인 독자도 모두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강력 추천한다.


『삼국지연의』에 등장하는 여러 캐릭터 중 분량에 비해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캐릭터는 '초선' 아닐까.
초선이 동탁과 여포 사이를 이간질하는 판짜기가 없었다면, 『삼국지연의』는 꽤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 테다.
초선은 남성 호르몬으로 가득 찬 『삼국지연의』의 초반을 주도하는 여성 캐릭터이지만, 이후 행적은 캐릭터의 존재감에 맞지 않게 묘연하다.
박서련 작가는 한국 문학계에서 가장 부지런한 작가다.
등단한 지 10년이 안 됐는데, 그사이에 내놓은 단행본 수가 10개가 넘는다.
무시무시한 생산력이다.
그만큼 쓸 이야기도 많고, 관심사도 다양하다는 방증이다.
작가가 메가 임팩트만 남기고 빠르게 『삼국지연의』에서 퇴장한 초선에 주목한 건 우연이 아닐 테다.
『삼국지연의』에서 초선은 사도 왕윤의 명을 받아 연환계를 펼쳤다고 나온다.
초선이 직접 동탁과 여포 사이를 이간질하긴 해도, 어디까지나 이 계책은 왕윤의 것이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초선이라는 캐릭터를 시대적 한계 속에서도 온전히 자신의 의지로 살기 위해 능동적으로 움직이는 새로운 캐릭터로 새롭게 연출한다.
사극인데도 한반도에 존재했던 왕조가 아닌 중국의 삼국시대를 배경으로 다뤘다는 점도 매우 신선하다.
이런 시도는 학창 시절에 즐겨 읽었던 무협지 이후로 처음 본다.
이 작품 속 초선은 냉정해야 할 땐 망설이지 않고, 어떤 상황에서도 쉽게 마음을 드러내지 않으며, 손에 넣기 어려운 높은 지위를 욕망하고, 성적인 욕망(그게 여자든 남자든)도 숨기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생존 그 자체에 특화된 캐릭터다.
주변인 모두가 추풍낙엽처럼 쓰러지고 사라져도 초선만큼은 끝까지 살아남아 뒷이야기를 전한다.
초선과 더불어 '중국 4대 미녀'로 불리는 서시, 왕소군, 양귀비의 삶은 모두 비극으로 끝났다.
그런데 초선은 나머지 셋과 달리 정사에는 등장하지 않는 가공인물이다.
마침 『삼국지연의』에는 연환계 이후 초선의 삶은 나오지 않으니 작가가 상상력을 더할 여지가 많았을 테다.
작품 마지막에 뒷이야기를 전하는 초선은 예상치 못한 모습이어서 파격적이었다.
그래서 대단히 인간적이었다.
스타일리시한 장편소설이다.


평소 유튜브에서 온갖 괴담을 택시기사가 라디오 청취하듯이 듣는 편이서 공포, 무속, 오컬트 요소에 넓고 얕게 익숙한 편이다.
지금까지 들은 괴담을 종합해 보면 가장 무서운 귀신은 셋으로 압축된다.
바로 물귀신, 웃는 귀신, 무당 귀신이다.
그런데! 이 세 가지 귀신이 몽땅 합쳐진 귀신이 등장하면 얼마나 무서울까.
이 작품 속 귀신이 그런 귀신이다.
무당 귀신이며 물귀신이고, 자주 소름 끼치게 웃는다.
오랜만에 웹툰, 드라마, 영화가 아닌 소설로 공포물을 접했다.
뜬금없는 설정도 있었고, 무리한 설정도 있었고, 갑작스러운 설정도 있었고, 이건 아닌데 싶은 설정도 있었다.
하지만 긴장감과 재미는 확실했다.
영화 <파묘>보다 훨씬 재미있었다.
여름밤에 그거면 충분한 것 아닌가?
일부러 자정이 넘은 고요한 밤에 이 작품을 읽었는데. 정말 등골이 서늘하고 오싹했다.
시각 효과가 아닌 글만 읽고 상상했을 때 느껴지는 순수한 공포를 간만에 경험했다.
소설이 묘사하는 여러 기괴한 상황을 상상하면서 읽으니 어우...
납량특집 영화나 드라마를 보고 싶은데 마땅한 게 없다면 이 작품을 읽어 보자.
한동안 물가에 가까이 가기 싫어질 것이다.
비가 오는 날도 싫어질 것이다.
모르는 사람이 문을 두드리면 더 싫어질 것이다.


오래전에 여자 후배와 술을 마시다가 낯설지만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다.
서로 친구인 여자 세 명이 모였을 때 생기는 미묘한 관계에 관한 이야기였다.
셋이 자주 함께 모여도, 그중 둘이 따로 만나는 경우가 많아서 나머지 하나가 소외감을 느끼는 일이 많다더라.
셋이 만나는 자리인데도 둘이 같이 만나 함께 오고, 둘만 아는 이야기를 웃으며 나누고, 식당에서도 둘이 나란히 앉아 나머지 하나와 마주 보고.
나머지 하나는 따를 당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썩 좋지는 않지만 내색하진 못하고, 그런 상황이 반복되면 서먹서먹해져 멀어지는 일이 많다더라.
나는 주변 사람에 관해 별로 관심이 없고(소설가 자격이 없다), 관계에도 크게 연연하지 않아서 가볍게 흘려들었는데, 그런 미묘한 관계가 여자들 사이에선 대단히 중요하다는 말을 들으니 신기했다.
이 작품을 읽는 동안 오래전에 여자 후배가 해줬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이 작품은 서로 다른 구석이 많은 서른 언저리의 여성 셋이 꼭짓점을 이루는 삼각형이 1년 동안 이등변삼각형, 직각삼각형으로 변형되다가 마침내 정삼각형 모양을 찾아가는 과정을 다룬다.
사랑하고, 서운해하고, 멀어지고, 가까워지고, 동경하고...셋의 관계가 균형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심리 묘사가 집요할 정도로 섬세하다.
여자 후배와 비슷한 경험을 해봤던 여성 독자라면 이 작품을 읽고 "맞아! 맞아!" "그래! 그래!"를 수시로 외치지 않을까 싶다.
작가가 첫 소설집으로 화제를 모았던 이유 역시 그런 여성 독자의 마음을 제대로 건드렸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뜬금없긴 한데, 이 작품을 읽고 최근에 읽은 김이설 작가의 장편소설 『우리가 안도하는 사이』를 떠올렸다.
『동경』의 주인공이 마흔아홉 살까지 나이를 먹으면 『우리가 안도하는 사이』 속 세 주인공과 비슷한 사이가 되지 않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해봤다.
작가의 첫 장편소설이란 점을 고려해야겠지만, 쉽게 읽히는 작품은 아니었다.
세심한 묘사가 길어서 자주 읽는 흐름이 끊겨 전에 무엇을 읽었는지 수시로 확인해야 했다.
비유하자면 숲을 봐야 하는데 특정 나무의 껍질까지 하나하나 살피다 보니 숲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상황이라고나 할까.
중편 정도로 압축했다면 훨씬 나았을 장편이다.
소설 단행본 1만 부가 팔리면 한국 문학의 기대주, 10만 부가 팔리면 올해의 한국 문학, 100만 부가 팔리면 '역사'로 취급받는다.
김훈 장편소설 『칼의 노래』, 신경숙 장편소설 『엄마를 부탁해』, 조남주 장편소설 『82년생 김지영』, 김호연 장편소설 『불편한 편의점』, 손원평 장편소설 『아몬드』 등 21세기 들어 100만 부 이상 팔린 한국 소설을 헤아리는 데에는 열 손가락으로도 남는다.
이미예 작가의 장편소설 『달러구트 꿈 백화점』은 대한민국 출판시장에서 몇 안 되는 '역사' 중 하나다.
그만큼 작가의 후속작에 관한 대중의 관심이 그 어떤 작가의 후속작보다 클 수밖에 없고, 작가 역시 부담이 컸을 테다.
전략은 둘 중 하나일 테다.
히트작의 장점과 강점을 살려 기조를 이어가느냐, 아니면 전작과 다른 새로운 걸 보여주느냐.
작가의 선택은 후자다.
이 작품은 직장에서 함께 탕비실을 쓰기 싫은 사람으로 선정된 이들이 모여 일주일 동안 합숙해 누가 술래인지 찾아내는 리얼리티 쇼를 그린다.
등장인물 모두 직장을 오래 다녔다면 탕비실에서 한 번쯤 마주친 경험이 있을 법한 진상들이다.
공용 얼음 틀에 커피나 콜라를 얼리는 사람, 인기 커피믹스만 몽땅 챙기는 사람, 사용한 종이컵을 그대로 두는 사람, 탕비실에서 혼잣말로 떠드는 사람 등.
호감인 등장인물이 하나도 없다.
작가의 전작을 기대하고 읽는다면 꽤 당황스러울 소재와 설정이다.
등장인물 누구도 자기를 진상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뿐만 아니라 그런 행동을 하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분명히 술술 읽히고 재미는 있는데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마음에 찝찝함이 쌓인다.
그리고 마침내 한 가지 물음에 다다른다.
"나도 누군가에게 진상이 아니었을까?"
다른 사람의 눈에 비친 자기 모습과 자기가 생각하는 자기 모습 사이의 괴리가 남의 일 같지 않다.
직장인 독자라면 읽으며 뜨끔할 만한 구석이 한두 곳이 아닐 테다.
내겐 이 작품이 독자의 반응을 살피는 리트머스 시험지처럼 느껴졌다.
전작처럼 장편이 아니라 중편 분량의 작품이니 말이다.
짧은 분량은 그만큼 작가가 본격적으로 후속작을 내기가 부담스럽고 조심스럽다는 의미로 읽혔다.
작가의 향후 행보가 어떨지는 새로운 장편이 나온 뒤에야 예측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전작과 다른 결의 작품도 쓸 수 있는 작가라는 걸 보여줬다는 점에선 나름대로 의미 있는 작품이 아닌가 싶다.
가볍지만 확실히 읽는 재미가 있었다.


아무런 배경지식 없이 읽어도 그 자체로 흥미롭고 재미있는 장편소설이다.
일제강점기 때 믿었던 사람에게 자기 작품을 빼앗긴 채 비통하게 생을 마감하며 역사 속에 묻힌 여성 작가, 그리고 그 작가의 생애를 추적하고 진실을 밝히는 현재의 여성 작가, 이 둘을 이어주는 퇴마사라는 기묘한 존재와 시공간을 오가는 전개.
설정만으로도 반은 먹고 들어가는 작품이다.
사실 작가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소설은 대단히 많다.
익숙하고 잘 아는 걸 쓰려는 건 작가의 본능이니, 작가가 자기 삶을 모티브로 소설을 쓰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이 작품, 읽다 보면 뭔가 다르다는 걸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다.
단순히 작가를 주인공으로 등장시키는 흔한 설정을 가진 작품이 아니다.
이 작품의 타깃 독자는 작가다.
작가가 작가를 염두에 두고 쓴 소설이라니 신선하고 도발적이지 않은가?
자기 글을 진지하게 써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작품을 읽은 뒤 가슴에 와닿는 느낌이 다른 소설을 읽었을 때와 비교해 매우 다를 테다.
이야기의 시작보다 끝이 중요하고(158페이지), 누구나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지만 끝을 쓰는 사람만이 작가가 된다(217페이지)는 말.
작가가 아니면 진심으로 쓸 수 없고, 작가가 아니면 진심을 느낄 수 없는 말이다.
작가인 독자라면 누구든 이 작품을 읽은 후 자기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게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나는 무엇 때문에 글을 쓰는가?"
이 작품을 읽고 오랜만에 퇴사 후 전업작가로 나섰던 4년 전 봄의 나로 돌아갈 수 있었다.
당시 누구도 내 새로운 작품을 원하지도 않았다.
당연히 그 어떤 청탁도 없었다.
아무런 기약도 없는데 어떻게 나는 소설을 쓰겠다고 멀쩡한 직장을 때려치울 수 있었던 걸까.
좋은 소설을 쓰고 싶었다.
오랫동안 소설을 쓰며 살고 싶었다.
그것만으로 충분할 것 같았다.
열심히 쓴 소설이라고 해서, 잘 쓴 소설이라고 해서 팔리는 세상이 아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나 독재정권 때처럼 쓰고 싶은 글을 쓴다고 목숨을 위협받는 일이 벌어지는 세상도 아니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최소한 무엇이든 쓰고 싶은 바를 쓸 수 있는 세상이다.
이 작품을 읽으며 퇴사 당시 먹었던 마음을 오랜만에 되새길 수 있었다.
가슴이 뭉클해지는 작품이었다.


이 소설집은 청년세대와 주변인 사이의 관계에 주목해 때로는 지적으로, 때로는 집요하게 파고든다.
소설집의 전반적인 톤은 우울하고 권태롭다.
산업재해로 고통받는 청년 근로자가 고통에서 벗어기 위해 펜타닐에 손댔다가 더 큰 고통을 받기도 하고(우리는 깊어서), 엿 같은 근무 환경에서 벗어나고자 선택해서 도달한 곳도 별다를 것 없다(빌어먹는 사람들을 위한 시선집). 차라리 극적인 사건이라도 일어나면 좋을 것 같은데 오늘은 어제와 같고 아무도 박수 쳐주지 않는다(끝없이 이어지는 긴 담배와 하얗게 내려앉은 밤).
가끔은 자기 목표를 위해 남을 도구 취급하는 제정신이 아닌 사람도 있다(문학의 정수).
그런 가운데에서도 현실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조짐은 있다.
항공우주센터 소속 계약직 청년과 불법체류 외국인 근로자가 벌이는 캐치볼의 포물선 운동은 우주왕복선의 포물선 운동으로 확장돼 삶의 목표를 어디에 둬야 하는지 고민하게 한다(포물선).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현상을 과학적으로 이해하려다가 고립된 청년은 사랑 앞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고집스러운 기준이 흔들리고(천체물리학 궤도상의 사랑 좌표), 큰누나의 죽음 때문에 소원해진 작은누나와의 관계는 시소 타기로 변주돼 데면데면하면서도 애틋한 풍경을 자아낸다(시소).
불완전하지만 이젠 다시 볼 수 없는 사람과 화해도 하고, 작지만 소박한 희망도 가슴에 품는다(포튈랑).
교육통계서비스에 따르면 2018년 기준 인서울 4년제 종합대학 전체 정원은 전국 대학 정원의 12%에 불과하다.
KDI 보고서에 따르면 대한민국 대기업(300인 이상) 일자리 비율은 2021년 기준 고작 13.9%다.
뉴스를 보면 대한민국에 서울과 대기업만 존재하는 것 같고, SNS는 인서울 주요대학을 나와 대기업에 다녀야 평균인 것처럼 착시효과를 불러일으킨다.
이 때문에 '평균 올려치기' 바깥에 있는 청년세대 다수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고, 그들의 삶도 잘 보이지 않는다.
이 소설집을 통해 소외된 다수에 속하는 요즘 청년들의 우울과 불안을 다각도로 엿볼 수 있었다.
앉아서 머리로 만든 이야기가 아니어서 세대는 달라도 충분히 와닿았다.
좋은 소설집이다.


이 작품은 94학번 동기 셋이 오랜만에 함께 모여 떠난 여행지인 강릉에서 벌어지는 사건과 등장인물의 심리를 섬세하게 따라간다.
누군가는 20대 중반에 결혼해 장성한 두 아들을 뒀지만 마음은 공허하고, 누군가는 가정이 화목해 보이지만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손에 물이 마를 날이 없고, 누군가는 화려한 싱글처럼 보이지만 끝이 보이지 않는 어머니 간병에 시달리고 있다.
대학 동기 사이가 대개 그렇듯이 셋의 사이는 뜨뜻미지근한 편이고, 서로의 속사정에 대해서도 자세히는 모른다.
이 같은 등장인물 사이의 적당한 거리감은 작품이 끝날 때까지 긴장감을 유지하며 서사를 끌어가는 동력이 된다.
마흔아홉 살은 젊다고 말하긴 어렵지만 늙었다고 말하기는 애매한 나이다.
등장인물의 나이가 나이인 만큼 산전수전을 다 겪어봤을 테니 솔직할 거라고 예상은 했는데, 예상보다 훨씬 솔직한 이야기들이 오고가서 민망하면서도 흥미로웠다.
셋은 오래전에 함께 여행했지만 공유하지 못한 기억을 남겨둔 강릉에서 다시 만나 서로의 심연을 들여다보며 이해하는 시간을 가지고 다시 각자의 위치로 돌아간다.
아마도 셋이 다시 만나 함께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나는 일은 없을 테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됐는데, 서로에게 너무 많이 보여줬다.
그래도 언제든지 서로에게 전화 정도는 걸어 안부를 묻고 고민을 토로할 수 있는 사이임을 확인했다.
20대 청춘도 아니고 그 정도가 딱 적당하다.
작품을 읽는 내내 모르는 누님들의 여행을 몰래 따라다니며 흥신소 직원이라도 된 듯한 기분을 느꼈다.
내가 지금 겪고 있는, 그리고 앞으로 겪게 될 미래를 미리 엿봤다.
쌉싸름한 카카오 99% 다크 초콜릿을 녹여 먹은 기분이 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