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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라지면 암흑이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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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녕 장편소설 『붐뱁, 잉글리시, 트랩』(네오픽션)

책을 열 때부터 덮을 때까지 폭주기관차에 탑승한 듯한 기분을 느꼈다.

영어를 배우려고 한국에 있는 영어마을로 유학을 온 청년들이 등장인물이라는 설정부터 어처구니없지 않은가.

영어로 말하지 않으면 굶어야 하고, 반항하면 선생이 단소로 공격하는 모습쯤은 뒤로 넘어가면 아무것도 아니다.

난데없이 스파이를 찾기 위한 미션을 해결해야 하고, 카지노에서 총격전이 벌어지며, 북한에 불시착해 '미제 앞잡이'라는 욕을 듣는 등 시종일관 황당하기 짝이 없는 활극이 펼쳐진다.

이야기가 어디로 튈지 가늠할 수 없고, 온갖 드립이 난무해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실소를 자아내게 한다.


무슨 의미를 찾겠다고 진지하게 페이지를 넘기면 함정에 빠지기 딱 좋은 소설이다.

굳이 의미를 찾자면 대한민국의 영어지상주의를 풍자하는 소설일 테고, 더 넓게 보자면 우리 사회에서 권력화된 모든 것에 태클을 거는 소설일 테다.  

어떻게 읽든 자유지만, 내 생각에는 아무 생각도 없이 청순한 뇌를 유지한 채 다가오는 이미지를 받아들이는 게 편하다.

최근에 읽은 소설 중 가장 시끄럽고 어수선한 장편이었다.

붐뱁, 잉글리시, 트랩
붐뱁, 잉글리시, 트랩
차도하 시집 『미래의 손』(봄날의책)

미리 밝히는데, 이 글은 시집 바깥 이야기가 더 많은 잡설이다.

그리고 나는 시를 잘 모르니 너무 진지하게 읽진 마시라.


시간은 2020년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나는 문학 담당 기자로 신춘문예와 관련한 크고 작은 업무를 맡고 있었다.

다른 신문사의 새해 첫 지면에 실린 당선작을 살피는 건 당연한 일이었고, 그중 한국일보 지면에서 시인의 이름을 처음 봤다.


그땐 그냥 지나쳤던 이름인데, 얼마 후 그 이름이 여러 뉴스에 실려 주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시인은 매년 신춘문예 당선작을 모아 펴내는 『신춘문예 당선시집』에 작품 싣기를 거부했다.

그 모습을 보고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나라면 절대 그렇게 못 했을 테다

당선작을 모아 내는 출판사 측 인사가 미투와 엮여있든 말든 일단 지면에 당선작을 실어 이름을 알리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을 테니까.


나중에 시인은 원고료를 밝히지 않은 원고 청탁도 거절해 화제를 모았다.

자칫하면 까다로운 신인으로 찍혀서 청탁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유명 문학 출판사에서 시집을 출간하기가 어려울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런 용기를 냈던 걸까.

닳고 닳은 나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용기다.


그 이후엔 내 코가 석자여서 시인의 이름을 잊고 살았다.

솔직히 시에는 별 관심이 없기도 했고.

그러다가 지난해 느닷없는 부고로 그 이름을 다시 들었다.

부고라니...

고작 20대 중반인데 세상을 떠나다니.

재능있는 청년이 꽃을 제대로 피워보지도 지는 건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때뿐이었다.

내 코가 석 자인데 무슨.

 

그러다가 또 느닷없이 시인의 이름을 다시 접했다.

시인의 첫 시집이자 유작이 나온다는 소식으로.

그 소식을 듣고 떠올린 건 뜬금없지만 싱어송라이터 유재하의 첫 앨범이자 유작인 <사랑하기 때문에>였다.

시인의 첫 시집도 유재하의 첫 앨범처럼 대단한 작품이 아닐까 하는 기대를 하며 바로 온라인 서점 장바구니에 시집을 넣었다.


이 시집에 관해 평가할 말은 별로 없다.

시도 모르는 놈이 무슨 말을 하겠는가.

다만 "나를 펼쳐주세요 나는 줄줄 흐르고 싶어요 강이 될래요 바다가 될래요 마그마가 될래요"(독서유예), "지옥에는 풀이 없다던데/지옥에는 햇빛이 없으니까/지옥에는 초록이 없으니까/그렇다면 내 방은 이미 지옥이구나"(그러나 풍경은 아름답다) 같은 문장을 읽었을 때 눈물이 머리를 거치지 않고 바로 바깥으로 흘러나왔다는 감상 정도는 남기고 싶다.

김기태 작가의 첫 소설집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과 더불어 올해 계속 여러 독자의 입에 오르내릴 책이 되지 않을까 예언한다.

미래의 손
미래의 손
김유태 산문집 『나쁜 책(금서기행)』(글항아리)

국내외(대부분 외서이긴 하지만) 금서 서른 권에 관한 이야기와 작가의 생각을 풀어낸 독서 산문집이다.

이 책이 마지막에 다룬 조지 오웰의 <1984>를 제외하면 읽어 본 책이 한 권도 없다.

일부는 한국에 번역 출간된 일이 없어서 원서로밖에 접할 수 없는 책이다.

그렇지만 읽는 데 별 지장이 없다.

내용이 무척 흥미진진하고 재미있으니 말이다.

다양한 금서를 통해 당대의 정치, 사회, 종교 문제를 현재로 끌어와 어떤 의미가 있는지 돌아보는 분석이 대단하다.

몇몇 책은 찾아서 꼭 읽어보고 싶어졌다.


무엇보다도 필력이 엄청나서 읽는 맛이 장난 아니다.

특히 '안전한 책들의 칵테일파티'라고는 이름을 붙인 서문(이라기에는 장대한)이 압권이다.

현재 출판 시장에 누구의 마음도 긁지 않는 '안전한 책'만 가득한 게 아니냐며, 그런 책이 과연 '좋은 책'인지를 묻는 태도가 날카롭고 도발적이다.

김훈 작가의 장편소설 <칼의 노래> 서문 이후 가장 인상적인 서문이었다.


김훈 작가를 언급해서 하는 말인데, 이 책을 읽고 결은 다르지만 김훈·박래부의 <문학기행>이 떠올랐다.

작가가 기자 출신이라는 공통점을 가진 데다, 결은 달라도 문학을 심층적으로 들여다보고 의미를 찾는 글이니 말이다.

그리고 이 책은 <문학기행>과 비교해도 부족할 게 없는 '좋은 책'이다.


p.s. 다음 쇄에는 149 페이지의 '롤리타'가 '어둠 속의 웃음소리'로 수정되기를. 이 책 아마도 여러 쇄를 찍을 듯하다.

나쁜 책 - 금서기행
나쁜 책 - 금서기행
마영신 만화 『아티스트』(송송책방)

새 장편소설을 출간하고 왠지 모를 현타와 자괴감에 사로잡혀 그 감정을 극대화해 보려고 간만에 이 만화를 다시 읽었다.

곽경수, 신득녕, 천종섭...

아...

이 나잇값 못하고 찌질하기 짝이 없는 예술가 아재들을 어찌할꼬.

그래, 나만 못난 게 아냐.

그들에게서 내 모습을 확인하니 웃음이 났다.

명작은 역시 결말을 알고 봐도 재미있다.

아티스트 1
아티스트 1
김기태 소설집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문학동네)

매년 새해 첫날을 맞으면 습관처럼 포털사이트에서 신춘문예 당선작 소설을 검색해 살핀다.

신춘문예 경쟁률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과 비교될 만큼 치열하지만, 이후 의미 있는 작품 활동을 벌이고 단행본까지 내는 당선자는 그리 많지 않다. 

당선작을 훑어보며 나중에 어떤 작가가 살아남을지 예상해 보곤 하는데, 정말로 살아남아 단행본을 내면 반가운 기분이 든다.


2년 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인 '무겁고 높은'은 지금도 기억에 남는 단편이다.

탄광 폐쇄로 쇠락한 강원도의 소도시에서 역도 선수를 꿈꾸다가 포기하는 여고생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인데, 바벨을 드는 일보다 버리는 데 의미를 두는 주인공의 모습이 인상 깊었다.


앞으로 오래 보겠구나 싶었는데 내 예상을 넘어 젊은작가상, 이상문학상 우수상 등 굵직한 상을 휩쓸어서 깜짝 놀랐다.

불과 등단 2년 만에 말이다.

게다가 한국 문학에서 씨가 말라가는 남성 작가라는 점 때문에 더 눈이 갔다.

첫 소설집 출간 소식을 접한 뒤 바로 주문을 넣고 책을 기다렸다.


역시나 좋았다.

'세상 모든 바다' 등 몇몇 작품은 문예지를 비롯해 이런저런 경로로 접한 구면인데 다시 읽으니 새로웠다.

소설집에 실린 9개의 단편이 다루는 소재는 예능, OTT, 팬덤, 아이돌, 대중음악 등 무척 다채롭다.

작가는 이런 소재들을 교육, 노동, 차별 등 여러 사회 문제와 엮어 전방위로 다루는데 등장인물은 대체로 평범하고 우리 주위에 있을 것 같은 사람이다.

전 세계 여러 도시를 배경으로 다룬 '팍스 아토미카' 같은 단편을 제외하면 거대한 서사도 없다. 


이래서 소설이 될까 싶은데 이 모든 요소가 빌드업해 기가 막히게 소설이 된다.

분명히 '지금' '여기'를 핍진하게 다루는 소설인데 질감이 기존의 '지금' '여기'를 다큐처럼 다룬 소설과 다르다.

현실을 비관이나 낙관으로 일관하지 않는 줄타기가 절묘하다.

사려 깊은데 연약하지 않다.

거대한 콘크리트 빌딩을 지탱하는 H빔처럼 단단하고 힘이 있다.


소설집에 으레 달리는 해설은 진부했지만, '작가의 말'이 없어서 신선했다.

작품으로 말하면 충분하다는 태도일 테다. 

앞으로 작가를 정말 오래 보게 될 것 같다.

좋은 소설집이었다.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박찬일 산문집 『밥 먹다가, 울컥』(웅진지식하우스)

80년대 말 장마가 내리던 어느 날, 나는 밥그릇을 엎었다.

며칠째 장맛비가 추적추적 내려서 밖으로 나가서 놀지 못하는데, 밥상에는 반찬 하나 없이 매끼 간장과 밥만 올라왔다.

처음에는 어머니께서 마가린을 밥에 같이 비벼주셔서 잘 먹었는데, 이틀쯤 지나자 마가린이 떨어졌는지 간장만 밥상에 올라왔다.

나는 반찬 투정을 부리다가 밥그릇을 엎었고, 어머니는 나를 모질게 때렸다.

그날 이후 밥상에 반찬으로 간장만 상에 오르는 일은 없었다.

간장을 보면 문득 떠오르는 오래된 일이다.


바나나킥과 양파깡을 보면 어린 시절 잠결에 봤던 어머니의 뒷모습이 떠오른다.

밤중에 나는 뭔가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깼다.

어머니는 나와 동생의 머리맡에 바나나킥과 양파깡을 두고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잠에서 깨어난 나와 동생은 눈치 없이 좋다고 과자 봉지를 뜯었다.

이후 며칠 동안 어머니는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나중에 들어보니 어머니는 아주 안 들어올 작정이었다더라.


잡곡밥에 섞인 좁쌀을 보면, 시장에서 파는 좁쌀베개를 슬픈 눈으로 바라보던 어머니가 생각난다.

어머니는 어린 나를 먹여야 하는데 집에 먹을 게 아무 것도 없어서 베개를 뜯어 좁쌀을 꺼내 불려 나를 먹였다고 담담히 말했다.

나는 지금도 우는 아들을 달래려고 좁쌀베개를 뜯는 어머니의 마음을 도저히 헤아릴 수가 없다.


이 산문집에 담긴 여러 이야기는 그동안 세월에 묻어두고 살았던 많은 기억을 되살려준다.

작가는 다양한 음식을 매개로 음식에 관한 해박한 지식을 친절하게 풀어놓으며 자신의 오래된 기억을 소환한다.

대체로 가난하고 서글픈 기억이다.

화려한 요리를 만들면서 정작 제대로 끼니를 때우지 못하는 요리사들의 모습, 케첩에 물을 타서 핫도그에 뿌려주던 어린 시절 노점상의 박한 인심, 맛있는 성게알을 먹기 위해 들어가는 해녀의 수고로움, 중식 요리사와 양식 요리사의 서로 다른 흉터, 먹고살기 위해 다른 생명을 빼앗을 수밖에 없는 운명에 관해 고민했던 순간 등.

여기에 "구도심은 힘이 없다. 해소 기침하는 노인 같다" 같은 시를 닮은 아름다운 문장이 덤으로 올라가 읽는 맛을 더한다.


그 위에 내 기억도 포개져 가슴이 울렁거린다.

동네에서 친하게 지냈던 또래 아이가 푸세식 화장실에 빠져 똥독으로 죽었다는 말을 듣던 일, 달동네에서 지금 살고 있는 집보다 더 좁은 집으로 이사를 가며 리어카로 이삿짐을 나르던 일, 장마철에 잠을 자다가 다급하게 깨어나 쓰레받기로 방까지 밀려 들어온 빗물을 바깥으로 퍼내던 일, 달동네에 산다고 아랫동네 아이들이 던진 돌을 맞아 코가 내려앉았던 일 등.


기쁜 기억보다 슬픈 기억으로 더 많이 채워져 있는 삶이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글쎄다.

굳이 의미를 찾을 필요가 있을까?

누구도 자신의 선택으로 태어날 수 없다.

살아야 할 이유를 찾는 건 불가능해 보이니 그 시간에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하는 게 낫지 않을까?

그래야 조금이라도 더 행복해지지 않을까?

이 산문집을 덮으며 들었던 생각이다.

밥 먹다가, 울컥 - 기어이 차오른 오래된 이야기
밥 먹다가, 울컥 - 기어이 차오른 오래된 이야기
최정나 소설집 『말 좀 끊지 말아줄래?』(문학동네)

술집 옆 테이블에서 들려오는 직장인들의 회사 이야기, 찜질방에서 들려오는 할머니들의 며느리 뒷담화, 지하철에서 들려오는 누군가의 시시콜콜한 통화소리…. 우리가 일상에서 우연히 듣는 이야기는 특별한 내용도 아닌데 귀를 세우게 한다.


이 소설집은 그런 이야기를 닮았다. 작가는 우리가 일상에서 외면해 온 진실을 끄집어내 흔한 이야기를 흔치 않게 들려주는 데 탁월하다. 그 이야기에 누군가는 고개를 끄덕이고, 누군가는 불편해할지도 모르겠다. 어느 쪽이든 소설을 읽으면 작가가 탁월한 이야기꾼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소설 속 등장 인물들은 모두 자기 말을 하느라 바쁘다. 표제작 ‘말 좀 끊지 말아줄래?’에 등장하는 장례식장 풍경은 그야말로 ‘아사리판’이다. 상대가 고인과 어떤 사이인지도 모른 채 위로를 건네는 건 예사다. 아무 말이나 나오는 대로 떠들다가 냉장고에 보관된 술을 빼돌려 사업을 벌이겠다고 진지하게 의논하는 인물들의 모습에 실소가 절로 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이 시끄럽고 어지러운 말들이 어느 순간 묘하게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간다. 동시에 불편한 감정의 근원이 드러난다. 싫어도 아닌 척, 몰라도 아는 척….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진짜 모습이다. 


작가는 수많은 말을 통해 우리가 가장 친밀하다고 여기는 가족, 친구의 관계가 실은 허상이 아닌가 묻는다. ‘전에도 봐놓고 그래’에선 시아버지 생일에 모인 가족들이 섞이지 않는 불편한 대화를 이어가며 긴장감을 조성한다. ‘사적 하루’ 속 인물은 희소병에 걸린 친구를 위로하기 위해 온천을 찾지만, 친구의 행복한 모습을 질투한다. ‘한밤의 손님들’의 주인공은 ‘엄마는 늘 꽥꽥대고, 동생은 늘 꿀꿀댄다’며 둘을 ‘오리’와 ‘돼지’라고 부른다. 소설 속엔 온통 염치없고 무례한 사람들뿐이라 불편한데 이상하게 낯설지 않다.

말 좀 끊지 말아줄래?
말 좀 끊지 말아줄래?
조남주 장편소설 『사하맨션』(민음사)

이 작품의 배경은 한 거대 기업이 파산한 지방자치단체를 인수해 만든 도시국가 ‘타운’과 그 내부에 자리 잡은 낡은 거주지 ‘사하맨션’이다. ‘타운’은 자본·기술·전문지식을 가진 사람들만 국민으로 받아들이며, 그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은 ‘L2’라고 불리며 2년 기한으로 체류 자격을 인정받아 노동력을 착취당할 뿐이다. 


‘타운’의 국민이나 ‘L2’로도 인정받지 못하고 밀려난 이들은 ‘사하’로 불리며 ‘사하맨션’으로 숨어든다. 부유하지만 자유와 언로를 철저하게 통제하는 ‘타운’과 달리, ‘사하맨션’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따뜻한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다. 극단적으로 비교되는 두 공간은 우리 사회의 양극화 문제를 선명하게 드러내는 장치다. 


소설의 등장 인물은 어머니의 추락사를 자살로 위장한 사장을 죽인 도경과 그 누나 진경, 태어날 때부터 오른쪽 눈이 없이 태어난 사라, ‘타운’에서 의료 실험 대상으로 전락한 우미 등 소외되거나 배제된 사람들이다. 총 12장으로 구성된 소설엔 장마다 다른 주인공이 등장해 개별적인 이야기를 이끌며 이들이 ‘사하맨션’으로 숨을 수밖에 없었던 배경을 설명한다. ‘타운’이 끌어안길 거부한 ‘사하’의 모습은 취업절벽에 매달린 청년, 실패한 영세 자영업자 등 우리 사회에서 각자도생의 길로 내몰린 ‘경제 난민’의 모습과 겹친다.


“우리는 누굴까. 본국 사람도 아니고 타운 사람도 아닌 우리는 누굴까. 우리가 이렇게 열심히 성실히 하루하루를 살아가면 뭐가 달라지지? 누가 알지? 누가, 나를, 용서해 주지?”(51페이지)


각 장 위로 최근 대한민국 사회를 뒤흔들었던 여러 사건이 포개져 강력한 기시감을 형성한다. 30년 전 ‘사하맨션’으로 흘러들어온 아이 ‘만’의 이야기를 다룬 장에 등장하는 사라진 배는 ‘세월호 사건’, ‘타운’의 무력 진압은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연상케 한다. 또한 30년 전 ‘사하맨션’에서 살다가 ‘타운’에서 신종 호흡기 전염병으로 사망한 보육원 직원 ‘은진’을 다룬 장에선 지난 2015년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사태 당시 정부의 부실한 대응이 떠오른다. 소설은 변화하기 위해 투쟁하지 않으면 패배의식이 내면화돼 미래로 나아가야 할 동력을 잃는 다고 경고한다. 


소설 마지막 장에서 진경은 주변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혈혈단신으로 ‘타운’의 총리관으로 침입하지만, 그곳에서 마주친 진실은 허상이었다. ‘타운’을 다스리는 총리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고, 총리실 총비서란 정체를 알 수 없는 자만 존재할 뿐이다. 총리실 총비서는 진경에게 주변 사람들의 안위가 걱정된다면 ‘사하맨션’으로 돌아가라고 협박한다. 과거 총리관을 침입했던 이들의 선택도 같았다면서. 진경의 선택은 투쟁을 통한 연대의 복원이다. 파편처럼 흩어져 있던 이야기들은 진경의 선택으로 마침내 하나로 모인다. 


“당신 틀렸어. 사람들은 원래 자리로 돌아가지 않았어. 그리고 나는 우미와 도경이와 끝까지 같이 살 거고.”(368페이지)


‘사하맨션’은 ‘82년생 김지영’만큼이나 주제의식이 큰 부피를 차지하는 작품이다. 읽는 재미보다 주제의식이 앞선다는 인상이 짙은데, 주제의식의 선명도는 ‘82년생 김지영’보다 옅은 편이다. ‘82년생 김지영’의 그림자를 벗어나면서도 그 영향력을 놓치지 않겠다는, 절충적인 선택이 아닐까.

사하맨션
사하맨션
정유정 장편소설 『진이, 지니』(은행나무)

우리는 늘 주어진 여건 아래에서 가능한 한 기회비용을 최소화하고 편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선택을 찾는다. 이 같은 선택을 우리는 합리적 선택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선택은 대개 합리적 선택과 거리가 멀다. 장애 때문에 버려진 아이를 입양하는 부부, 매년 어려운 이웃을 위해 익명으로 거금을 투척하는 독지가, 어린이 백혈병 환자를 위해 기꺼이 골수를 기증하는 간호사 등의 사례처럼 말이다.


우리는 그런 비합리적 선택에 ‘인간답다’는 수식어를 붙이곤 한다. ‘인간답다’는 그런 선택을 결정하는 인간의 자유의지와 동의어일지도 모르겠다. 이 작품은 죽음 앞에 선 인간의 자유의지에 따른 선택에 주목해 무엇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지 탐색한다.


이 작품은 인간의 자유의지가 어떻게 죽음의 두려움을 삶의 희망으로 치환하는지를 따뜻하면서도 섬세한 시선으로 따라간다. 이야기를 이끄는 두 가지 축은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유인원의 한 종류인 보노보의 몸속으로 영혼이 빨려 들어간 유인원 사육사 ‘진이’와 취업에 실패한 뒤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노숙자로 전락한 ‘민주’의 선택이다. 진이는 자신의 몸을 되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사흘 동안 보노보 ‘지니’의 감정과 기억을 공유하며 과거 자신의 선택이 지니의 평화로운 삶을 빼앗았음을 알게 된다.


진이는 지니의 삶을 되찾아 줄 선택의 갈림길에 서지만, 치러야 할 대가는 자신의 생명이다. 민주는 공익근무요원으로 근무하던 10년 전 자신을 귀찮게 하는 노인을 외면했다가 죽음에 이르게 한 기억을 트라우마로 가지고 있다. 민주는 절박한 상황에 빠진 진이를 도울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지만, 자칫 경찰로부터 쓸데없는 의심을 받는 처지에 놓일 수도 있다. 작가는 둘의 선택 과정을 좇으며 인간은 자유의지를 통해 죽음이란 절박한 상황 앞에서도 성장할 수 있는 존재라고 웅변한다. 


보노보 지니는 삶과 죽음의 의미를 넘어 모든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매개다. 지니가 느끼는 희로애락은 인간의 감정보다 직설적이고 순수하다. 지니가 이제 막 태어난 자신의 동생을 바라보며 느꼈던 사랑과 기쁨, 쇼를 위해 춤추기를 강요당하며 느끼는 고통과 슬픔 등은 여과 없이 진이에게 전달돼 가슴을 아리게 한다. 진이는 지니를 통해 모든 생명에 저마다의 삶이 존재하고, 그 삶 또한 인간의 삶만큼 소중하다는 깨달음을 얻는다.


작품 후반에 진이가 지니를 가리키는 주어가 ‘나’로 전환하는 순간은 이 같은 깨달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 같은 전환은 진이가 지니의 모습으로 연장하는 삶은 자신의 모습으로 맞이하는 죽음보다 무의미하다는 깨달음과 지니를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돌려보내야 한다는 깨달음으로 이어지며 이야기를 절정으로 이끈다.

진이, 지니
진이, 지니
한병철 『투명사회』(문학과지성사)

투명성은 정치나 경제 영역을 포함한 우리 삶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강조되고 있다. 사람들은 투명함이 서로를 신뢰할 수 있는 사회로 이끌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재독 사회학자 한병철 베를린예술대학 교수는 긍정적인 가치로 여겨져온 투명성 개념에 의문을 제시한다. 그는 이 책을 투명사회를 만인이 만인을 감시하는 새로운 통제사회라는 전복적인 해석을 내놓는다.


저자는 전작 ‘피로사회’를 통해 자유가 오히려 자기 착취를 낳고 스스로를 고갈시키는 현대인의 모순을 파헤쳐 독일에서 큰 논란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현대인들이 자신의 모든 것을 자발적으로 전시해 스스로 디지털 통제사회를 완성해나간다는 내용을 담은 ‘투명사회’는 지난 2012년 독일에서 출간 당시 ‘피로사회’ 이상의 충격을 안겼다.


당시 독일에선 크리스티안 볼프 대통령이 부정 의혹에 휘말려 사임하게 된 상황이어서 정치ㆍ경제 권력의 투명성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컸기 때문이다.


저자는 “신뢰 위에 세워진 사회에서는 투명성에 대한 집요한 요구가 생겨나지 않는다. 투명성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진 것은 사회의 도덕적 기반이 취약해졌다는 것, 진실성이나 정직성과 같은 도덕적 가치가 점점 더 의미를 잃어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며 “믿지 못하는 사회이기 때문에 투명성을 요구하고 있을 뿐이다. 투명성에 대한 요구는 궁극적으로 자발적 노예가 넘쳐나는 통제사회를 만들어낼 것”이라고 주장한다.


저자가 투명성을 넘어서는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저자는 끊임없이 이 사회가 어떤 곳인지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 같은 저자의 태도는 독일을 비롯한 선진국을 무조건적으로 배우려는 태도에 제동을 걸고 한 발짝 물러서서 생각해보게 만든다.


저자는 “투명성을 요구하다 보면 커뮤니케이션의 공간은 획일화된다”며 “모든 것을 만인이 보는 앞에서 즉각 공개하게 되면 사유의 공간이 없어지고, 정치는 호흡이 짧아져 길게 내다보고 계획을 할 수가 없어진다”고 지적했다.


최근까지만 해도 북유럽의 복지 모델을 배우자는 목소리가 거셌다. 그러나 높은 조세로 실현하는 북유럽의 복지 모델은 사실상 한국의 현실에선 이상에 가깝다는 인식이 확산됨에 따라 북유럽 배우기 열풍은 다소 수그러들었다. 저자의 남다른 인식은 빛이 밝을수록 그림자도 짙다는 사실을 깨달으라는 일종의 경고처럼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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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리어와 나 사이 중심잡기 [김영사] 북클럽
[김영사/책증정] 일과 나 사이에 바로 서는 법 《그대, 스스로를 고용하라》 함께 읽기[김영사/책증정] 천만 직장인의 멘토 신수정의 <커넥팅> 함께 읽어요![김영사/책증정] 구글은 어떻게 월드 클래스 조직을 만들었는가? <모닥불 타임> [김영사/책증정] 《직장인에서 직업인으로》 편집자와 함께 읽기
같이 연극 보고 원작 읽고
[그믐연뮤클럽] 7. 시대와 성별을 뛰어넘은 진정한 성장, 버지니아 울프의 "올랜도"[그믐연뮤클럽] 6. 우리 소중한 기억 속에 간직할 아름다운 청년, "태일"[그믐연뮤클럽] 5. 의심, 균열, 파국 x 추리소설과 연극무대가 함께 하는 "붉은 낙엽"[그믐연뮤클럽] 4. 다시 찾아온 도박사의 세계 x 진실한 사랑과 구원의 "백치"
같이 그믐달 찾아요 🌜
자 다시 그믐달 사냥을 시작해 볼까? <오징어 게임> x <그믐달 사냥 게임> o <전생에 그믐달>
8월에도 셰익스피어의 작품 이어 낭독합니다
[그믐밤] 38. 달밤에 낭독, 셰익스피어 4탄 <오셀로>[그믐밤] 37. 달밤에 낭독, 셰익스피어 3탄 <리어 왕> [그믐밤] 36. 달밤에 낭독, 셰익스피어 2탄 <맥베스> [그믐밤] 35. 달밤에 낭독, 셰익스피어 1탄 <햄릿>
🐷 꿀돼지님의 꿀같은 독서 기록들
은모든 장편소설 『애주가의 결심』(은행나무)최현숙 『할매의 탄생』(글항아리)조영주 소설·윤남윤 그림 『조선 궁궐 일본 요괴』(공출판사)서동원 장편소설 『눈물토끼가 떨어진 날』(한끼)
이디스 워튼의 책들, 지금 읽고 있습니다.
[그믐클래식 2025] 8월, 순수의 시대[휴머니스트 세계문학전집 읽기] 3. 석류의 씨
공 출판사의 '어떤' 시리즈
[도서 증정] 응원이 필요한 분들 모이세요. <어떤, 응원> 함께 읽어요.[꿈꾸는 책들의 특급변소] 차무진 작가와 <어떤, 클래식>을 읽어 보아요.
🎁 여러분의 활발한 독서 생활을 응원하며 그믐이 선물을 드려요.
[인생책 5문 5답] , [싱글 챌린지] 완수자에게 선물을 드립니다
이렇게 더워도 되는 건가요?
[책걸상 '벽돌 책' 함께 읽기] #25. <일인 분의 안락함>기후위기 얘기 좀 해요![책걸상 '벽돌 책' 함께 읽기] #11. <화석 자본>무룡,한여름의 책읽기ㅡ지구를 위한다는 착각
8월 7일(목) 오후 7시 30분 / 저자 배예람X클레이븐 동시 참여 라이브 채팅⭐
[텍스티] 텍스티의 히든카드🔥 『당신의 잘린, 손』같이 읽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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