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지런히 읽고 흔적을 남깁니다
글로 남기는 나만의 기록장사상, 종교, 경제, 인종 등의 갈등은 혁명과 전쟁 등 인류 역사의 중요한 고비마다 막대한 영향력을 끼쳤다. 거대 담론부터 떠오르는 인류의 역사에서 인간 혹은 인간에게서 나온 것 외의 존재가 역사의 물줄기를 바꿨다고 생각하긴 쉽지 않다. 그것도 우리의 밥상 위에 오르는 물고기가 인류의 역사와 지도에 변화를 줬다고 상상력을 발휘하긴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대구’의 저자 마크 쿨란스키는 그런 일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바이킹의 대이동 시기인 8세기부터 최근까지 1000여년 동안 대구(cod)를 둘러싸고 벌어진 역사를 연대기 형식으로 풀어낸다. 어부 집안 출신으로, 대구잡이 저인망 어선에 승선한 경험이 있는 저자는 자신의 경험을 십분 발휘해 대구의 역할ㆍ생태ㆍ요리법 등을 7년간 밀착 취재해 고증하고 집대성했다. 이를 통해 저자는 ‘세계의 역사와 지도가 대구 어장을 따라 변화해왔다’는 획기적 시각으로 새롭게 세계사를 펼쳐 보인다.
우선 저자는 대구의 생태적 특징부터 밝힌다. 대구는 몸집이 크고 개체 수가 많으며 맛도 담백해 많은 사람이 선호하는 어종이다. 또한 대구는 얕은 물을 좋아해 포획하기 쉽다. 이 때문에 대구는 오래전부터 상업적으로 유용한 생선이었다.
역사상 대구는 유럽인의 주요 식량이자 부를 쌓는 수단이었다. 바이킹은 먼 거리를 항해하는 동안 말린 대구를 주식으로 삼아 콜럼버스보다 훨씬 먼저 신대륙인 미국 북동부의 뉴잉글랜드에 도착했다. 바스크족은 북아메리카 해안의 숨겨둔 황금어장에서 대량의 대구를 낚아올려 유럽인들에게 팔았다. 1620년에 종교 박해를 피해 대서양을 건넌 영국의 신교도들은 대구가 풍부한 매사추세츠주 플리머스에 정착했다.
18세기에 들어서 대구 무역의 중심지였던 뉴잉글랜드는 국제적인 상 업세력으로 부상했다. 이들은 소금에 절인 대구를 지중해 시장에 판매해 큰 이익을 챙겼으며, 저급한 물건을 서인도제도의 설탕 플랜테이션(식민지에서 값싸게 착취한 노동력으로 일군 산업형 농장)에 팔았다. 그곳의 노예들은 질 낮은 절인 대구로 하루 16시간의 중노동을 버텼다. 결과적으로 대구는 노예무역을 더욱 활성화시켰다.
민족 이동과 노예무역에 영향을 미친 대구는 국가 간 어획을 둘러싼 경쟁과 갈등도 부추겼다. 18세기 영국은 식민지인 뉴잉글랜드의 당밀과 차에 세금을 매기고 대구 무역을 제한하는 법을 만들었다. 식민지인들의 반발은 미국 독립혁명으로 이어졌다. 1782년 영국과 미국의 평화 협상에서 가장 해결하기 어려웠던 문제 역시 미국의 대구잡이 권리였다. 아이슬란드는 영국과 1958~1975년 대구 어업권을 둘러싸고 세 차례에 걸쳐 ‘대구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이 전쟁은 아이슬란드의 200마일 영해 요구가 받아들여지면서 끝났고, 국제 해양법상 경제수역이 200마일로 결정되는 계기를 가져왔다.
이 책의 또 다른 묘미는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 에스파냐 브라질 자메이카 등 다양한 나라의 대구 요리법 소개다. 이 책에 소개된 ‘입술을 제거한 대구머리 튀김’ ‘바스크식 대구혀 요리’ ‘대구부레 구이’ ‘소금절임 대구 크로켓’ 등 맛을 짐작하기 어려운 신기한 요리들은 역사 이야기 이상으로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어업의 현대화는 대구 개체 수의 가파른 감소를 불러왔다. 1950년대 들어서 저인망으로 물고기를 쓸어담아 즉시 냉동 처리하는 작업이 가능해지자 대구 어획량은 전 세계적으로 매년 늘어나 생선 가격을 주기적으로 폭락시켰다. 1992년 캐나다 정부는 대구의 상업적 멸종이 자명해지자 뉴펀들랜드 근해, 그랜드뱅크스, 세인트로렌스만 해저 어업을 무기한 금지했다. 이로써 3만여명의 어민이 일자리를 잃었다.
이 책은 지금 우리에게도 적지 않은 시사점을 준다. 과거 서민의 식탁 위에 흔하게 올랐던 명태는 현재 연근해에서 사라진 지 오래다. 일부 지역에서 열리는 명태 축제는 국산 명태가 없어 러시아산 수입 명태를 동원해야 했다. 그러나 명태의 새끼인 노가리는 여전히 주점에서 저렴한 마른안주로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명태는 대구목 대구과에 속하는 한류성 바닷물고기다. 대구를 둘러싼 흥미로운 이야기가 즐겁게만 다가오지 않는 이유다.


이 소설집은 ‘가족’이라는 관계를 주목한다.
표제작인 ‘국수’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주인공이 역시 아이를 낳지 못해 쫓겨나 자신의 집에 재취로 들어온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계모에게 국수를 끓여주며 계모의 삶을 이해하고 화해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작가는 밀가루 반죽으로 한 그릇의 국수를 만드는 과정에서 변화하는 주인공의 심경을 서정적인 필치로 밀도 있게 그려내며 감동을 이끌어내고 있다.
“손님처럼 마루 한쪽에 옹송그리고 앉아 밀가루 반죽을 이겨대던 당신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손바닥 안의 손금이 다 닳아지지나 않을까 염려될 만큼 반족을 꾹꾹 눌러대던 꾹꾹…. 당신이 반죽에 몰래 섞어 넣어 그렇게 꾹 누르고 눌러야만 했던 것…. 그것은 무엇이었을까요.”(53쪽)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식도암으로 혀에 통증을 느끼는 계모를 위해 국수의 면발을 숟가락으로 툭툭 끊는 주인공의 모습은 깊은 여운을 남긴다.
또한 작가는 자칫 진부할 수 있는 ‘가족’이란 주제를 끊임없이 새롭게 바라보고 집요하게 파고들어 진실과 마주하려 노력한다.
‘옥천 가는 날’은 응급차에서 어머니의 주검을 어루만지며 과거를 회상하는 자매를, ‘아무도 돌아오지 않는 밤’은 함께 사는 시아버지와 식사하는 일을 끔찍하게 여기면서도 시아버지가 남편이 날려버린 재산을 돌려달라고 할까봐 불안해하는 며느리를, ‘막차’는 오랜 시간 함께 살아온 남편에 대한 경멸과 멸시를 숨기지 않는 아내를, ‘구덩이’는 하루가 멀다고 어머니와 이혼하라며 전화로 윽박지르는 아들을, ‘명당을 찾아서’는 명당이라는 허상을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소유하려는 부부를 등장시켜 서로에게 짐이 되기도 하고 도피처가 되기도 하는 가족 관계의 심연을 들춰낸다.
작가는 가족의 의미를 진중하게 천착하면서도 현대인이 앓고 있는 분열적 심리를 성찰함으로써 깊은 울림을 선사한다.


자신의 일기를 소재로 쓴 산문집일 줄 알고 펼쳤는데, 정말로 일기 그 자체였다.
2021년 겨울부터 2023년 가을까지 쓴 일기를 엮었는데, 여기에 국내외 여러 작가가 쓴 일기를 짧게 발췌해 절묘하게 곁들이는 구성이 신선했다.
일기 곳곳에 스며들어 있는 다양한 작품의 흔적에서 작가의 어마어마한 독서량이 느껴져 혀를 내두르게 한다.
하지만 나는 그런 일기보다는 작가가 딸에 관해 쓴 일기가 훨씬 좋았다.
문학, 음악, 오디오 등을 다룬 일기보다 훨씬 솔직하고 따뜻해서 마음에 와닿았다.
나는 일기를 쓰지 않는다.
대신 오랫동안 디지털카메라로 찍어온 사진이 일기 역할을 하고 있다.
내가 처음 디카를 구입했던 2002년 10월부터 지금까지 촬영한 모든 사진이 연도별, 월별, 일자별로 분류돼 외장하드에 저장돼 있다.
폴더에는 담긴 사진이 어떤 사진인지 관한 짧은 제목이 적혀 있다.
'준면과 횟집', '영산포 홍어' 등등.
제목과 사진을 보면 까맣게 잊고 살았던 그날 일과 기분이 꽤 많이 복구된다.
이 일기를 읽은 후, 한가해지는 날이 오면 지금까지 찍은 사진을 활용한 '사진 일기' 같은 책을 만들면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생각만이다.
지금 하는 일도 벅찬데 무슨.


시를 잘 모르는 사람의 입까지 벌어지게 하는 시를 쓴다는 건 도대체 무슨 재능일까.
힙합에 전혀 감흥을 못 느꼈던 내가 이센스의 첫 정규앨범 [The Anecdote]를 듣고 뻑갔던 것처럼, 서정주의 시집은 읽을 때마다 이런 게 '악마의 재능'이구나 싶다.
우리들의 사랑을 위하여서는/이별이, 이별이 있어야 하네.(견우의 노래)
이, 우물물같이 고이는 푸름 속에/다수굿이 젖어 있는 붉고 흰 목화꽃은,/누님/누님이 피우셨지요?(목화)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푸르른 날)
뭐라 하느냐/너무 앞에서/아- 미치게/짙푸른 하늘.(소곡)


이런저런 자리에서 여성이 일상에서 겪는 위협에 관해 들을 때가 있다.
그때마다 적잖이 놀라곤 한다.
나는 한 번도 겪어보지 않았고 겪을 일도 없는 위협인데, 한국의 치안이 타국보다 훌륭하다는 통계만 보고 무시하기에는 사례가 구체적이고 들으면 빡친다.
남자라면 시비 걸리는 상황이 올 때 맞다이까자는 마인드로 달려드는 사람이 많겠지만, 여자가 그렇게 행동하긴 쉽지 않다.
특히 상대방이 자신보다 완력이 센 남자라면.
기자 시절에 경제, 산업, 노동 분야를 취재하고 다양한 사람을 만나면서 직간접적으로 자영업자의 현실에 관해 많이 주워들었다.
이미 많은 사람이 알고 있듯이, 자영업자 상당수는 마땅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어쩔 수 없이 개업한다.
인생은 그렇게 공평하지 않다.
아무리 달려도 평생 비포장도로만 뛰는 사람도 있고, 죽어라 달렸는데 그 끝이 낭떠러지인 사람도 있다.
일자리가 없는 건 아니다.
지금도 전국 곳곳의 공단은 인력난으로 시달리고 있다.
문제는 그 일로 벌어들일 수 있는 돈이 많지 않고, 제대로 경력을 쌓을 수 없다는 거다.
그런 일이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은 무책임하다.
그 돈을 받으면 살아는 진다.
그런데 여가 활동, 연애, 자기 계발 등 많은 걸 포기해야 살아진다.
더럽고 치사해서 자영업에 뛰어드는 것이다.
다수의 손님은 평범한데, 미꾸라지 한 마리가 물을 흐리듯 소수의 진상이 문제다.
자영업자는 돈을 지불하면 내가 왕이라는 마인드를 탑재한 진상을 절대 피할 수가 없다.
그리고 진상은 대체로 집요하다.
만약 철저한 준비 없이 자영업에 뛰어든 여성이 진상 손님을 만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궁금하다면 이 작품을 읽으면 된다.
처절한 환장의 콜라보다.
읽는 내내 밤고구마 몇 개를 연속으로 물 없이 삼키는 기분이 들 것이다.
작가는 조금 희망적인 톤으로 소설을 마무리하는데, 그 마무리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작가의 말을 보니 원래 결말은 꿈도 희망도 없었나 보다.
편집 과정에서 바뀐 모양이다.
작가가 처음에 쓴 대로 마무리를 지었으면 더 일관성 있는 아포칼립스 같은 작품이 나오지 않았을까 싶다.


작가의 전작인 소설집 <앨리스 앨리스 하고 부르면>을 꽤 충격적으로 읽었다.
수록 작품 한 편 한 편을 읽을 때마다 무언가에 홀려 다른 세계를 엿보고 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결은 조금 다르지만 테드 창이 덜 하드하게 따뜻한 SF를 쓰면 이런 느낌이겠다 싶었다.
'신비롭다' 혹은 '환상적이다'라는 수식어가 정말 잘 어울리는 단편들이었다.
특히 신비로운 분위기를 연출하는 필력은 한국 작가 중에선 독보적이지 않을까 싶다.
이 소설집을 사다 놓은 지 꽤 오래됐는데, 소설집과 장편소설 작업을 하느라 뒤늦게 펼쳤다.
내 방을 오갈 때마다 이상하게 자주 눈에 띄어 밀린 숙제를 하듯 읽었다.
시공간과 생의 한계를 초월해 펼쳐내는 환상적인 이야기들...
작가는 이를 통해 우리가 서로를 칼로 무를 베듯 구별할 수 없는 존재라고 역설한다.
어떤 선택으로 어떤 관계를 맺었든 그게 바로 지금 우리라면서.
그런 점에서 이 소설집은 '우주적'이다.
경험한 만큼 밖에 쓰지 못하는 나로서는 작가의 상상력이 어디서 비롯되는 건지 경이로웠다.
뭐라고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좋았다.
전작보다 더 SF스러웠는데, 다섯 단편이 미묘하게 연결된 느낌을 줘서 마치 연작소설을 읽는 듯한 기분도 들었다.
정규앨범을 들을 때 첫 트랙부터 마지막 트랙까지 차례대로 들어야 맛이 나듯이, 이 소설집 또한 수록 작품을 순서대로 읽어야 맛이 난다.


2001년 초겨울, 나는 대학교에서 논술시험을 치렀다.
오른손에 깁스를 한 채 왼손으로 펜을 쥐고.
오른손잡이인 나는 왼손으로 삐뚤빼뚤 천천히 글씨를 쓰며 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내 몸에 붙어있는 내 팔이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게 이렇게 답답한 일인 줄 몰랐다.
주어진 시험지를 반도 채우지 못하고 나오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내 몸도 마음대로 못 하는데, 다른 사람이 내 마음대로 움직여주길 바라는 건 과한 욕심이 아닐까?
오래전 일이지만 지금도 생생할 정도로 인상적이어서, 나는 누군가에게 별 기대를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이 앤솔로지를 읽으며 오래전 경험을 떠올렸다.
여기에 수록된 다섯 작품에는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 몸을 고민하는 청소년들이 있다.
자기가 원하는 몸을 만들고 싶어서 미친 듯이 다이어트를 하고, 헬스장에서 쐬질을 한다.
그런데 어디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는가.
먹다가 토하고, 공부하려 앉으면 졸려 죽겠고...
나이 먹어 돌이켜 보면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오는 추억이지만, 그 시절에는 그 어떤 고민보다도 무거웠던 고민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 몸에 관한 고민 아니던가.
나도 그랬었다.
키는 작은데 머리는 크고 몸은 말라서 츄파춥스 같았던 외모가 싫었다.
무협지에 미쳐있던 시절이어서 내 안에도 무언가 특별한 능력이 있을 줄 알고 지식호흡 흉내를 내며 내공을 쌓으려고 해봤는데 숨만 막히더라.
차라리 빨리 나이가 들면 나을 줄 알았는데, 키는 그대로이고 몸에 살만 덕지덕지 붙어버렸다.
그래도 어찌저찌 잘 살아간다.
그런 몸도 그런대로 잘 사용하면 재미있는 일이 생기더라.
소설 속 청소년들도 나이 들면 그렇게 되겠지.
너무 걱정하지 마시라.
이석원, 참 대단한 작가다.
그가 소설가로서 좋은 작가인지는 의문이지만, 에세이스트로서 좋은 작가라는 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음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음악으로 경지에 오르고, 산문으로도 경지에 오른 사람이 소설까지 잘 쓰면 반칙이지.
감상문을 쓰다가 허접해서 지우고 대신 읽다가 좋았던 문장을 발췌해(일부는 적당히 수정해서) 옮긴다
- 살면서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어쩌면 더 중요하다.
- 나 빼고 다른 사람들은 다 잘 사는 것 같아서. 그게 착각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해서. 그래서 우리는 늘 서로가 서로를 부러워하며 사는 일이 가능하다.
- 왜 어른들이 모든 것에는 다 때가 있느니, 그러니까 젊어서 많은 것들을 경험해 보는 게 좋다느니 하는 지를 알 것 같다. 스무 살의 나와 서른 살의 나는, 또 마흔 살의 나와 쉰 살의 나는 그 모든 순간이 다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흡수하는 감각도, 원하는 종류의 자극도, 그간 쌓아왔던 경험의 종류도 다 달랐으니 말이다.
- 진심이라고 해서 무조건 누구에게나 통하는 건 아니다.
- 아무리 오랜 세월 동안 축적해 온 삶의 경험으로부터 얻은 지혜라도 지키지 않으면 소용이 없는 것이다.
- 관계에 있어서 솔직함이란 결코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그 사실을 모른 채 솔직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아무 때나 내 마음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버리면, 관계는 오히려 종말을 고할 수 있다.
- 누군가와의 관계를 영영 끊어낸다는 의미의 그 '손절'이라는 카드를 너무 간편하게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면 어느 순간, 당신 주위에는 정말로 아무도 남지 않게 되는 사태가 올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 카드를 신중하게 잘 쓰기만 한다면, 인생에서 불필요하게 상처받는 일도 줄이면서 나를 지키고 사랑하는 방식의 하나로 활용할 수 있는 것 아닐까.
- 사람이 세상을 살면서 남을 손가락질하기는 정말 쉽거든? 그런데 중요한 건 내가 그 손가락질을 받는 당사자의 입장이 되었을 때도 같은 태도를 유지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란다.


이 책은 월급사실주의 동인의 두 번째 앤솔러지다.
지난해에 출간된 첫 번째 앤솔러지 <귀하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가 많은 주목을 받았기 때문에, 두 번째 앤솔러지에는 어떤 작가가 참여해 어떤 작품을 선보일지 기대가 많았다.
첫 번째 앤솔러지는 전반적으로 내용이 무거웠고, 참여 작가도 많아(11명) 책도 무거운 편이었다.
그래서 두 번째 앤솔러지는 그보다 조금 가볍게 나오기를 기대했다.
다행히 기대한 대로 첫 번째 앤솔러지에서 느껴졌던 비장함이 줄어들었고, 참여 작가 수도 살짝 줄었다(8명).
덕분에 독자로서 읽는 재미는 더해졌다.
두 번째 앤솔러지 역시 첫 번째 앤솔러지처럼 저마다 다른 형태의 절박한 상황에 놓인 다양한 직업군의 현실과 애환을 실감 나게 보여준다.
겉으로는 화려해 보이지만 불안정하기 짝이 없는 프리랜서 아나운서(오늘도 활기찬 아침입니다), 가맹점주의 이익보다 본사의 이익을 우선해야 하는 프랜차이즈 업체 영업부 직원(인성에 비해 잘 풀린 사람), 풀어서 전달한 내용이 자신의 의도와 다르게 쓰이는 걸 보고 혼란스러워하는 프리랜서 통역사(쓸모 있는 삶)의 일상은 소설이 아니었다면 모르고 지나쳤을 밥벌이의 풍경이다.
남의 돈 벌기가 제일 어렵다는 말처럼 곳곳에서 살풍경을 보여주기도 한다.
혐오와 차별을 역으로 사업에 이용하는 현실 앞에서 탄식하는 모습과(식물성 관상), 억울하게 전 직장에서 해고됐는데 또다시 억울한 일에 휘말려 일자리를 잃을 위기에 놓인 상황(등대) 등을 보여주면서 말이다.
소설이 내 안의 어둠을 들여다보는 것 같아 뜨끔해질 때도 있다.
화려해 보이는 유명인의 삶이 실은 텅 비어있는 걸 보며 씁쓸해하는 모습을(두 친구), 부모가 제때 돈을 내지 않는데 자꾸 찾아오는 제자를 미워 하는 모습을(피아노), 지나친 우월감 속에 열등감이 숨어있는 모습을 보면 말이다(빌런).
첫 번째 앤솔러지가 그랬듯이 이번 앤솔러지 역시 할리우드 히어로물 같은 대단한 스케일의 이야기는 없다.
특별한 교훈을 전하지도 않는다.
그저 우리 주위에서 충분히 벌어질 법한 이야기를 들려줄 뿐이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며 빈정대는 사람도 있겠지만,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는 온갖 오해와 미움을 살펴보라.
대부분 상대방을 잘 몰라서 오해하고 미워한다.
적어도 이 책을 읽은 사람은 남의 밥벌이를 존중까진 하지 못해도 '누칼협' 운운하며 빈정대진 못할 테다.


첫 소설집과 새 장편소설 작업을 핑계로 읽기를 미루다가 뒤늦게 펼쳤다.
책을 덮을 때 든 기분은 착잡함과 서글픔 사이의 어딘가였다.
어렸을 때 읽었던 <그림 동화>에서 수위를 살짝 낮추고 배경을 현재로 옮기면 이런 결과물이 나오지 않을까.
문득 오래전 어머니께서 헌책방에서 사 온 <그림 동화>의 종이 삭은 냄새가 느껴졌다.
이 동화집은 다양한 동물(혹은 인간이 아닌 무언가)의 시선으로 민담, SF 등을 차용해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을 들여다본다.
나는 어렸을 때 쥐가 손톱을 먹으면 나로 변한다는 말을 들은 기억 때문에, 지금도 손톱을 아무 데나 버리지 않는다.
당연히 말도 안 되는 미신이지만 말이다.
그런데 만약 내 손톱을 먹은 쥐가 나로 변했다고 치자.
나로 변한 쥐는 나를 대신해 온전히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까?
이 복잡한 세상을 민증도 없이?(손톱)
이 밖에도 꽤 무거운 주제를 가진 이야기가 계속 이어진다.
엄마를 잃은 새끼 고양이에겐 앞으로 어떤 삶이 펼쳐질까(마중), 사람에게도 까다로운 난민 심사를 외계인이 통과할 수 있을까(심사), 최초로 우주선을 타고 지구 밖으로 나갔던 개는 어떤 심정이었을까(라이카), 호랑이를 비롯해 동물원에 있는 동물은 어떤 기분으로 살아가고 있을까(호랑이와 아이).
과거에 잔혹한 민담이 동화로 읽힌 이유는 아이를 교정 대상으로만 바라봤기 때문이라고 들었다.
한마디로 동화는 아이에게 세상의 잔혹함을 미리 알려주는 교재였던 셈이다.
뭐 저 멀리 <그림 동화>까지 갈 필요도 없다.
당장 <콩쥐 팥쥐> 같은 이야기만 살펴봐도 얼마나 잔혹한 이야기인가.
그렇다고 이 동화집 속 이야기가 마냥 잔혹(?)하진 않다.
늙어서 치매에 걸려도 세상을 떠난 주인 할머니를 잊지 못하는 개의 모습과(늙은 개), 세심한 눈으로 학대받는 아이의 사정을 파악하고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어른의 모습은 슬프지만 아름다웠다.
아이들은 이 동화집을 읽고 어떤 기분을 느꼈을까.
나와 비슷한 기분을 느꼈을지, 아니면 다른 기분을 느꼈을지 궁금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