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맥주의 블로그
제 독서 메모는 마음대로 퍼 가셔도 괜찮습니다. 상업적으로 이용하셔도 됩니다.태어난 인간은 어떤 경우에 인간성을 잃는가? 만들어진 인간은 어떻게 인간성을 얻는가? 우리는 인간의 여러 특성 중 무엇을 인간성이라 부르며, 그 인간성을 지키기 위해 어떤 일을 해야 하는가? 흥미로운 세계관과 폭력적인 분위기, 그 안에서 폭력 그 자체와 맞서는 인물들의 결단과 희생.


기획이 좋았던 책. 다들 신경 쓰기의 기술을 궁금해 하는 시대이다 보니 다큐멘터리 영화까지 나왔고 작가가 내레이션을 맡았다. 통념에 의문을 제기할 때에는 재치 있고 좋다. 답을 제시할 때에는 그 냥 그렇다. 2017년에 처음 읽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저자 소개의 ‘인플루언서’라는 단어가 낯설어서 저게 무슨 뜻인가 했다.


다음 달이면 독일 인문학자 디트리히 슈바니츠가 세상을 떠난 지 꼭 20년이 된다. 한국 언론에 부고 기사가 실릴 정도의 세계적 작가였는데, 최근 10년 새 그의 이름이나 대표작 『교양』(들녘)을 언급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사실 요즘은 교양이라는 일반명사 자체가 서먹하게 들린다. 다들 젊고 발랄하게 보이는데 골몰하느라 ‘학문, 지식, 사회생활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품위’(국어사전에 나온 교양의 뜻풀이)는 제쳐둔 것 아닌지.
2024년에 슈바니츠의 『교양』을 추천하는데 딱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 표지에 적힌 부제, ‘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이라는 문구다. 이 책을 읽는다고 ‘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을 다 알게 되는 건 당연히 아니다. 독일에서 책이 출간된 1999년에도 그랬다. 번역서 기준 768쪽인 이 책에서 543쪽까지인 1부에는 ‘20세기 유럽 지식인이 알아야 할 모든 것’ 정도의 부제가 적당하다. 물론 이 1부도 읽으면 유익하다. 유럽의 역사와 예술, 철학을 통찰력 있게, 재치까지 곁들여 설명한다.
하지만 핵심은 544쪽부터다. ‘능력’이라는 제목의 2부에 부제를 붙인다면 ‘교양인들이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어떻게 정해지는가’ 정도가 좋겠다. 슈바니츠의 재치는 여기서 신랄함의 경지에 이른다. 교양이란 뭘까? 슈바니츠는 교육받았다는 인상을 풍기기 위해 벌이는 사회적 게임이며 일종의 유희라고 대답한다. 교양은 예능 프로그램에 대해서는 몰라도 되지만 반 고흐에 대해서는 모르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사교 클럽이다. 그 클럽의 회원들 사이에는 복잡하고 부조리한 금기와 규칙이 있고, 그들은 그 규칙에 따라 축구선수가 공을 차듯 대화를 주고받는다.
즉 교양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다. 의사소통 양식이다. 여기에 참여하려면 자신이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정리하고, 현대의 여러 사회적 구조물을 이해하며, 언어를 잘 다룰 줄 알아야 한다. 한쪽에서는 교양을 꼰대들의 낡은 취향으로, 반대편에서는 자신을 치장하는 문화 자본쯤으로 인식하는 시대에 어울리지 않게 이 두툼한 책을 추천해본다.


승부욕, 스트레스, 경쟁본능, 근성, 남녀 차이 등 승부와 관련한 연구 이야기들을 모은 책. 저자들은 그 분야 과학자는 아니고 전문 저술가들이다. 상식이나 직관과 다른 연구 결과들이 많아 흥미롭게 읽힌다. 외동들이 형제가 많은 아이보다 덜 이기적이며, 형제 중에서 동생들이 오랜 투쟁으로 인해 강인한 성격이 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30년 동안 기자로 일한 소설가가 쓴 묵직한 사회파 추리소설. 충실한 취재에서 비롯된 사실감도 좋고, 느리지만 착실한 호흡과 적절하게 독자의 예상을 무너뜨리는 스토리텔링도 좋다. 작가는 마르틴 베크를 좋아하고, 이 소설을 북유럽으로 수출하고 싶다고 한다. 대구 개구리소년 살인사건을 모티브로 했다는 전작도 읽어볼 생각.




건진 대목들도 있지만 도덕성에 대한 질문을 피하거나 노골적으로 부정 하는 부분에서는 한숨이 나왔다. 도덕성이 아니라 트라우마를 중심에 두고 이야기를 펼치는데 저자의 견해가 실제로 그러한지 이 책이 관계에 대한 책이라서 그런 건지 모르겠다. 동물의 고통을 실제로 줄이거나, 그보다 더 큰 선을 실현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어 보이고 ‘비건의 기분이 상처받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는 식. 막상 비건의 대인관계에도 도움을 주지는 못하고, 다만 그들이 대인관계로 고통 받을 때 자신을 합리화할 수 있는 생각들을 제공할 것 같다.


이 재 미있는 주제로는 더 재미있게 써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아쉬움도 들고, 연대의 힘에 대해 좋은 얘기를 하고 싶은 나머지 저자가 다소 무리한다는 느낌도 받았다. 오래 고립된 사람들이 미쳐 가는 과정과 그럼에도 버틴 이들에 대한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다.


추리와 가벼운 SF 중단편집. 제목과 ‘구라치’라는 작가의 성 때문에 엉뚱 황당 발랄하리라는 선입견이 들지만 그렇다기보다는 준수하고 안정감 있게 술술 읽히는 딱 그 정도다. 두부도 얼리면 당연히 아주 무서운 둔기가 될 수 있을 거 같은데.


문장을 음미하며 천천히 읽었다. 어떤 통찰에서는 무릎을 치고, 어떤 대목은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지만 아름답다 느끼고, 전체적으로 는 알쏭달쏭. 『불안의 서』는 소설가 배수아의 번역이고, 『불안의 책』은 오진영의 번역이다. 나는 배수아의 번역으로 읽었는데 배수아는 포르투갈어가 아니라 독일어를 하므로 이 책도 독일어 중역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