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새섬님의 블로그
기고/강연 요청은 본 메일로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kokura@gmeum.com‘살인곰 책방 MURDER BEAR BOOKSHOP’ 하무라 아키라 탐정 시리즈의 작가 와카타케 나나미의 단편집. 제목이 언뜻 내비치듯 코지 미스터리는 아니다. 모든 단편마다 한 사람 이상씩 사람이 죽는다. 뒤틀린 인물들의 악의가 작중 대놓고 혹은 끝 반전으로 계속 등장한다. 분위기는 조금 어둡고 약간 쓸쓸하다.
작품들은 최고다 라고 하기엔 2%씩 부족하지만 나는 이 작가가 왠지 사랑스럽다. 미스터리 소설가이기 때문에 작가는 이런 말을 들으면 반기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작가 후기도 참으로 귀엽다.
그럴지도 모르지만 아닐 수도 있어요. 세상에는 똥 더미를 파냈더니 밑에서 더 지독한 똥 덩어리가 나오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광취> 중에서


생각이 필요한 일들이 있는데 집에만 있자니 별 다른 아이디어가 없어 밖에 나가 조금 걷기로 했다. 걷기가 생각 정리에 좋다고 어디선가 듣기도 했다.
11월 답지 않게 날이 따뜻해서 가볍게 나셨다.
도림천을 걷고 있는데 이어폰으로 듣고 있던 음악 사이로 들리는 생 음악.
누군가 일렉 기타로 존 메이어의 ‘그래비티’를 연주하고 있었다. 홀린 듯이 기타 소리를 따라 발걸음을 옮기니 어떤 밴드가 음악 공연 리허설 중이었다. 알고 보니 오늘은 ‘청춘관악’이라는 테마 아래 관악구에서 지역 축제를 하는 날이라고. 천변 옆 공터에 플리마켓과 각종 공연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관악구 인디뮤지션 오석환과 도토리 밴드의 연주와 노래를 들었다. 도토리 밴드의 무대 배경에 그믐달도 나와서 반가운 마음에 사진도 찍었다.
별 생각 없이 나왔는데 좋은 음악도 듣고 2시간 정도 걸었다.
특별한 아이디어를 얻진 못했지만 그래도 건강에는 좋은 하루였던 것으로.


운명 같은 13일의 금요일. 진정한 악몽은 뱀파이어도 아니고 귀신도 아니었습니다.
오전에 ‘인스타 해킹’이라는 정말 무서운 일을 겪고 그날 오후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요. 실은 이날 그믐에서 또 다른 북클럽 하나를 야심 차게 시작하려 했는데 유일한 홍보수단인 인스타 계정이 사라지니 북클럽을 알릴 방법이 마땅치 않아 일단은 잠정적으로 연기를 했구요.
그렇지만 그믐밤은 무슨 일이 있어도 계속되어야 합니다. 처음 그믐밤 시작할 때 마음이 그랬어요. 한 사람이 오던, 두 사람이 오던, 그믐밤은 계속 되어야 한다. 비가 오건, 눈이 오건, 그믐달이 뜨는 날엔 함께 책 이야기를 하자.
사계리 서점 근처에 숙소를 잡아놓았기에 숙소 도착 후 바로 짐을 풀고 서점으로 향했습니다. 사계리 서점은 원래 있던 곳에서 이사를 하신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하네요. 도착하자마자 ‘두용’이라는 이름의 검은 개가 반가이 맞아줍니다. 처음부터 반가이 맞지는 않고 컹컹 큰 소리로 짖다가 시간이 조금 지나면 언제 경계했냐 싶게 큰 덩치로 엥기는 녀석이에요.
원래는 케이크를 먹으며 두런두런 담소를 나누는 차분한 밤으로 기획이 되었는데요, 장맥주 님의 급 제안으로 책맥데이로 바뀌었네요. 각자 재미있게 읽은 단편들을 이야기하다가 수다는 흘러 흘러 이 날 소개된 작품들만도 엄청납니다. 영화 <엔젤하트> <셔터> <디 아이> <콘스탄틴> <사바하> <곡성> <추격자> <황해> <무빙> 그 밖에 수많은 책들 (모임 책꽂이에 일부 꽂아놓았습니다.) 술이 약한 저는 맥주 3 캔에 해롱해롱, 모임 후반부는 사실 기억이 잘 나지 않네요. 다만 함께 해 주신 분들의 덕력이 엄청났다는 그 기억만은 취중에도 뚜렷하고요.
7시 29분에 시작해서 밤 12시가 되어 끝난 그믐밤.
13일의 금요일. 우리들은 무엇엔가에 홀린 게 분명합니다.
함께 해 주신 분들 모두 감사합니다.


우리 집엔 TV가 없다. 신혼 초에 ‘프로젝션 TV’ 라 불리던 중고 티브이를 사서 잠시 봤던 기억이 있는데 아무리 중고라지만 화질이 너무 안 좋아서 몇 번 못 보고 다시 버렸다. 그 뒤로는 TV 없이 그냥 컴퓨터로 동영상을 보는데 별로 불편한 점은 없다. 불편한 점이 없다고 방금 썼지만 좀 민망하기도 한 것이 나는 TV 가 있는 곳에 가면 무조건 TV 를 틀어놓는다. 예를 들어 부모님 집, 혹은 호텔 방 등. TV는 나에게는 귀한 물건이라 볼 수 있는 동안은 보고싶다는 마음이 크다. 그렇게 귀하면 좀 사면 되잖아 싶긴 하지만 또 그렇게까지 귀하지는 않다. 흠.
제주 출장 동안 여러 숙소에 묵었다. 대부분이 5,6만원 안팎의 저렴한 곳이었는데 모두 마음에 들었다. 방은 조용했고 필요한 정도로 깔끔했다. (청결에 관한 기준이 높은 편은 아님) 모든 숙소에서 와이파이가 제공되었으며 더 놀라운 것은 넷플릭스가 전부 기본으로 TV 에 연결되어 있었다. 예전엔 몇몇 모텔에서 ‘넷플릭스 룸’이라며 넷플릭스를 마음껏 볼 수 있다는 걸 자랑하기도 했는데 이제는 그런 홍보 문구조차 없었다. 넷플릭스는 어느새 대한민국 숙박업소에서 샴푸린스를 잇는 기본템이 되버린 걸까? 대단하다.
숙소에서 처음 본 영화는 배우 소지섭 주연의 <자백>
스릴러 영화 제목이 <자백>이라니 임팩트가 부족하다. 어쨌든 더 이상 일을 하기엔 너무 피곤해서 노트북을 덮고 기대 없이 TV 리모콘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눈이 소복소복 내리는 겨울, 아름다운 숲 속 산장에 살인자로 몰리고 있는 소지섭이 있고 내가 니 변호사다 라면서 김윤진이 찾아온다. 반전은 많은 이들이 초반부터 이미 눈치채지 않았을까. 영화는 마치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이 그대로 살아나 영상이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딱 일 끝내고 피곤한 밤 호텔에서 보기 좋다라고나 할까. 반전을 알아도 재미있게 봤다. ‘나나’ 라는 아이돌 출신 배우가 소지섭과 불륜을 저지르는 여인으로 나오는데 너무 예뻐서 놀랐다.


커뮤니티는 사람들이 모여 서로 대화를 하고 창작물을 올리며 소통하는 곳이다. 하지만 아무 것도 없는 허허벌판에 처음부터 사람들이 저절로 모이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이 모여야 무엇인가가 나온다. 무언가가 있어야 사람들이 모인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를 잇는 희대의 난제. 이를 '콜드 스타트' 프로블럼이라고 부른다.
내가 유튜브 이야기에서 얻은 중요한 교훈은 모든 네트워크 상품이 가야 하는 여정이다. 처음 시작할 때는 조직이 거의 필요하지 않았지만 네트워크가 커가면서 (처음에는 편집자, 중재자,사용자), 데이터와 알고리즘에 의해 갈수록 만은 구조가 적용되었다. 초기의 반복 작업은 정교하지 않았다. 단지 어떻게든 마무리는 했을 뿐이다. 알고리즘은 나중에 나왔다. 심지어 몇 년이 지난 후에 나왔다. 네트워크를 건강하게 유지하는 것은 여전히 일상적인 싸움이다.
p. 414
제주 전도에서 발견한 나의 새 이름. 새섬.


지난 금요일은 그믐이었다.
보통 음력 3,4일 경엔 초승달이 뜬다.
하늘에 초승달 이 예쁘게 걸렸다.


'도서관 대회' 행사장인 ICC 제주에서 내가 머무는 숙소는 걸어서 15분 거리이다.
그 잠깐 걷는 거리의 경치가 이 정도.


한국 사회에서는 스무 살이 넘으면 낯선 사람들과 무작위로 섞이는 기회가 극히 적다. 비슷한 가방 을 들고 비슷한 메뉴를 고르며 비슷한 드라마를 보는 사람끼리 어울린다. 그런데 동류 집단을 벗어나 낯선 배치에 놓이는 기회가 글쓰기 수업에서 주어진다. p.47
혼자 쓰고 혼자 읽고 혼자 덮는 것은 일기다. 글쓰기가 아니다. 비밀이 한 사람에게라도 발언할 때 생겨나는 것이듯 글쓰기라는 것에는 어차피 '공적' 글쓰기라는 괄호가 쳐 있다. 그래서 글쓰기는 곧 남들에게 보여지는 삶, 해석당하는 삶에 대한 두려움을 벗어버리는 일이다. p.60
대다수 사람들이 보는 책, 인구의 사분의 일이 선택하는 영화라는 게 얼마나 자기모순적인가. 대량생산 대량소비는 경제의 법칙이다. 문화의 핵심은 보이지 않는 것의 발견, 감정의 세분화, 다름의 향유다. 모든 감정의 평준화를 양산하는 건 결코 좋은 문화가 아니다. p.106


며칠 뒤 A4지 앞에 다시 앉았다.
이름을 짓는다고 예전에 살던 동네, (아현동, 김아현? 괜찮다. 일단 킵하자) 내가 좋아하는 음식(마라샹궈, 김마라? 김샹궈? 이건 좀...)까지 떠올려 보다가 2년 전 제주의 봄까지 생각이 닿는다.
21년 봄, 퇴사를 하고 우울감에 시달리던 나는 제주도로 여행을 가게 되었다. 무기력증에 걸린 사람이 적극적으로 여행 준비를 했을 리는 만무하고 기력 없이 누워만 있는 나를 보다 못한 남편이 끌고 간 것. 그렇게 사나흘 머무를 숙소만 대충 예약을 하고 서울을 떠났다. 서귀포 시에 위치한 풍경호텔 별관이 제주 여행에서 첫 번째로 머문 곳이다.
숙소 바로 앞에는 4개의 섬이 손에 닿을 듯 있었다. 새섬, 문섬, 섶섬, 범섬.
이 중에 3개의 섬은 육지와 이어져 있지 않아 갈 수 없고 딱 하나의 섬, 새섬만은 새연교라는 다리로 제주도와 연결되어 있다.
새섬을 걸으며 도대체 내 삶은 어디로 흘러가는 건지, 이 끝에 무슨 의미가 있는 건지, 앞으로 무얼 하고 살아야 할지 고민하고 막막해 했다. 그 질문들에는 아직도 뚜렷한 해답이 없다. 그래도 그 고민으로 그믐을 시작했다.
그리하여 나의 새로운 이름은 김새섬이다. 실은 삼매봉이라는 인근 봉우리도 자주 올랐기에 삼매봉도 후보에 있었다. 삼매봉은 매화를 닮은 세 개의 봉우리라는 뜻으로 서정적이고 아름답다. 하지만 김삼매봉이란 이름은 왠지 트로트를 잘 부를 것 같다는 기대감을 부른다. 그래서 김새섬으로 결정.
새섬은 일단 발음이 쉽다.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았는데 아주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이름은 아닌 듯 하다. 예전 이름에서 동그라미가 많이 빠지고 네모가 그 자리를 채웠다. ‘그믐’처럼 기억 하나, 미음 두 개가 나의 새 이름에 들어있다. 시옷은 낯설지만 함께 하다 보면 익숙해 질 것 같다.
참, 새섬은 하늘을 나는 새가 많은 섬이 아니고 억새풀에서 유래된 이름이라 한다. 제주도에는 띠로 엮은 지붕을 많이 볼 수 있는데, 여기에 사용되는 띠풀을 '새 풀'이라고 불렀다고.
억새풀처럼 굳세어라! 새섬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