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새섬님의 블로그
기고/강연 요청은 본 메일로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kokura@gmeum.com'도서관 대회' 행사장인 ICC 제주에서 내가 머무는 숙소는 걸어서 15분 거리이다.
그 잠깐 걷는 거리의 경치가 이 정도.


한국 사회에서는 스무 살이 넘으면 낯선 사람들과 무작위로 섞이는 기회가 극히 적다. 비슷한 가방 을 들고 비슷한 메뉴를 고르며 비슷한 드라마를 보는 사람끼리 어울린다. 그런데 동류 집단을 벗어나 낯선 배치에 놓이는 기회가 글쓰기 수업에서 주어진다. p.47
혼자 쓰고 혼자 읽고 혼자 덮는 것은 일기다. 글쓰기가 아니다. 비밀이 한 사람에게라도 발언할 때 생겨나는 것이듯 글쓰기라는 것에는 어차피 '공적' 글쓰기라는 괄호가 쳐 있다. 그래서 글쓰기는 곧 남들에게 보여지는 삶, 해석당하는 삶에 대한 두려움을 벗어버리는 일이다. p.60
대다수 사람들이 보는 책, 인구의 사분의 일이 선택하는 영화라는 게 얼마나 자기모순적인가. 대량생산 대량소비는 경제의 법칙이다. 문화의 핵심은 보이지 않는 것의 발견, 감정의 세분화, 다름의 향유다. 모든 감정의 평준화를 양산하는 건 결코 좋은 문화가 아니다. p.106


며칠 뒤 A4지 앞에 다시 앉았다.
이름을 짓는다고 예전에 살던 동네, (아현동, 김아현? 괜찮다. 일단 킵하자) 내가 좋아하는 음식(마라샹궈, 김마라? 김샹궈? 이건 좀...)까지 떠올려 보다가 2년 전 제주의 봄까지 생각이 닿는다.
21년 봄, 퇴사를 하고 우울감에 시달리던 나는 제주도로 여행을 가게 되었다. 무기력증에 걸린 사람이 적극적으로 여행 준비를 했을 리는 만무하고 기력 없이 누워만 있는 나를 보다 못한 남편이 끌고 간 것. 그렇게 사나흘 머무를 숙소만 대충 예약을 하고 서울을 떠났다. 서귀포 시에 위치한 풍경호텔 별관이 제주 여행에서 첫 번째로 머문 곳이다.
숙소 바로 앞에는 4개의 섬이 손에 닿을 듯 있었다. 새섬, 문섬, 섶섬, 범섬.
이 중에 3개의 섬은 육지와 이어져 있지 않아 갈 수 없고 딱 하나의 섬, 새섬만은 새연교라는 다리로 제주도와 연결되어 있다.
새섬을 걸으며 도대체 내 삶은 어디로 흘러가는 건지, 이 끝에 무슨 의미가 있는 건지, 앞으로 무얼 하고 살아야 할지 고민하고 막막해 했다. 그 질문들에는 아직도 뚜렷한 해답이 없다. 그래도 그 고민으로 그믐을 시작했다.
그리하여 나의 새로운 이름은 김새섬이다. 실은 삼매봉이라는 인근 봉우리도 자주 올랐기에 삼매봉도 후보에 있었다. 삼매봉은 매화를 닮은 세 개의 봉우리라는 뜻으로 서정적이고 아름답다. 하지만 김삼매봉이란 이름은 왠지 트로트를 잘 부를 것 같다는 기대감을 부른다. 그래서 김새섬으로 결정.
새섬은 일단 발음이 쉽다.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았는데 아주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이름은 아닌 듯 하다. 예전 이름에서 동그라미가 많이 빠지고 네모가 그 자리를 채웠다. ‘그믐’처럼 기억 하나, 미음 두 개가 나의 새 이름에 들어있다. 시옷은 낯설지만 함께 하다 보면 익숙해 질 것 같다.
참, 새섬은 하늘을 나는 새가 많은 섬이 아니고 억새풀에서 유래된 이름이라 한다. 제주도에는 띠로 엮은 지붕을 많이 볼 수 있는데, 여기에 사용되는 띠풀을 '새 풀'이라고 불렀다고.
억새풀처럼 굳세어라! 새섬아!


내 이름은 김혜정. 부모님 아니, 할아버지인가? 위 세대 중 누군가가 지어 주신 이 이름으로 사십 년 넘게 잘 살아왔다.
내 친구들의 이름은 선영, 희진, 미정.
우리 엄마들의 이름은 은숙, 현옥, 영숙.
나와 내 친구들의 이름은 우리의 엄마들이 당시 나름 예쁘고 세련되다고 생각했던 이름을 고르고 고른 것일 터다. 70년대엔 혜정, 미진이 요즘의 서윤, 하율이었다.
‘김혜정’은 무난하기 그지없고 어느 무리에서든 튀기 싫어하는 나에겐 찰떡이었다. 누구도 내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묻어가기 좋은 이 평범한 이름이 마뜩잖아지기 시작한 것은 내가 ‘그믐’이라는 독서모임 플랫폼을 시작하면서부터이다. 인터뷰를 비롯 그믐을 알리고자 하는 모든 활동에서 나의 이름은 실로 존재감이 없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내 이름은 그 어떤 인상도 남기지 못한다. 뒤돌아서면 0.5초안에 까먹게 되는 이름이랄까?
인터넷에 검색하면 수많은 혜정이들이 쏟아져 나오지만 역시나 이름 때문인지 딱히 도드라지게 기억되는 사람도 별로 없다. 전원일기에 오랫동안 출연한 배우 한 분 정도?
나와 같은 고민을 한 게 분명한 김민정 시인은 페이스북에서 자신의 이름을 김민쟁으로 바꿨다. 위트있게 '정'을 '쟁'으로 살짝 바꿈으로써 뇌리에 박히는 이름이 되었고 '쟁이'라는 발음을 통해 전문가 적인 느낌마저 든다.
그렇다면 나도 김혜쟁? 흠. ㅖ와 ㅐ가 발음이 비슷하여 민쟁처럼 귀엽게 들리지 않는다. 이렇게 바꿨다간 그냥 따라’쟁이’라고 놀림만 받을 것 같다.
새하얀 A4지를 앞에 두고 이런저런 이름을 네임펜(!)으로 적어보았다. 유명인의 이름을 흉내도 내보고 어렸을 적에 예쁘다고 동경했던 이름도 떠올려 보았다. 요즘 젊은 세대들이 쓸 법한 힙한 이름들을 적어보니 쇼미더머니 다음 시즌 참가자명 같은 것들이 몇 개 나왔다. 세 글자 이름은 평범하니 외자 이름이나 네 글자 이름은 어떨까? 성이 김이라 너무 흔하니 아예 성을 바꾸고도 싶다.
좋은 이름을 생각해 내기 위한 시작한 브레인스토밍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더니 온갖 잡념으로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정신 차리고 A4지를 보니 이름 후보에 김치와 김밥까지 올랐다.
오늘은 이만 하자.


연휴가 끝나간다.
한 일도 없는데 5일이라는 시간이 사라졌다.
나는 낙담하고 나의 무능력에 실망 감보다는 지겨움을 느낀다.
우울감이 커져 나의 바이블 <인생의 모든 의미>를 다시 펼쳐 들고 읽어본다.
보물섬을 발견하리라는 기대 없이, 승전보를 울리며 항구에 도착한 나를 맞아주는 사람들의 환호성과 헹가래에 대한 설레임 없이 계속해서 배를 탈 수 있을까? 카잔차키스와 율리시스는 그렇다고 한다. 결국 삶이란 항구가 아니라 배 위의 여정 그 자체이므로. 하지만 칠흑같은 바다의 밤은 무섭다. 나는 배가 어디로 가는지 몰라 불안하고 마실 물이 떨어졌을까 신경이 곤두선다. 그래도 계속 가야 한다. 따스한 햇빛과 무서운 천둥을 모두 환영하면서.
장군님, 싸움이 끝나가니 제 사정을 보고하겠습니다. 저는 여기서 이렇게 싸웠습니다. 부상당했고, 상심했지만, 달아나지 않았습니다. 공포로 턱이 떨렸지만, 붉은 손수건으로 이마를 동여매 혈흔을 감추고 돌격했습니다.
열 네 번째 그믐밤은 부산에서 열게 되었어요. 작년 9월 이후 1년만에 다시 찾은 부산의 그믐밤. 여름 더위가 가신 9월은 참 좋은 계절이어야 하는데 이 날은 아침부터 하늘이 꾸물꾸물. 부산으로 향하는 KTX 기차의 창문에 빗방울이 빗금을 긋습니다. 거 참, 파시스트 이야기하기 좋은 날이네요.
그믐밤에 우리들이 모이는 곳은 크레타 서점입니다. 부산 멋쟁이들이 모두 모인다는 서면에 위치하고 있네요. 크레타는 강동훈 책방지기님의 인생책 <그리스인 조르바> 의 배경이 되는 섬인데요, 그래서 특별히 이번 그믐밤의 책갈피 뒷면에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명 문구를 삽입하였어요.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눈으로는 많이 읽었는데 막상 그믐밤 때 발음하려니 혀가 꼬이더라고요. 태어나서 한 번도 소리 내어 이 작가의 이름을 발음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믐밤 1부는 이번 책을 번역하신 장현정 출판사 대표님께서 슬라이드까지 준비하셔서 이야기를 나눠주셨습니다. 6개월 생각하고 번역 작업에 들어갔는데 2년이 훨씬 넘게 걸렸다며 당분간 번역 활동은 예정에 없다 하시네요. ^^
1부 강연이 끝나고 2부는 참가자들과의 질의 응답이었습니다. 이 어렵고 무거운 주제로 과연 누가 질문을! 싶었지만 막상 2부는 끊이지 않는 질문으로 가득찼습니다. 프로 MC와도 같은 노하우를 보여주신 강동훈 책방지기님의 유려한 진행 덕분이 아닌가 싶었어요.
그래서 우리들은 파시즘을 막기 위해 지금 무엇을 할 수 있나요?
결국 고민의 끝이 향하는 것은 이 지점이었을텐데요, 책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장현정 대표님 강연에서 힌트를 얻어봅니다.
철학자 안토니오 그람시는 헤게모니 투쟁 전략으로 진지전과 기동전을 이야기했습니다. 기동전은 촛불연맹, 데모 등의 활동으로 예를 들 수 있겠네요. 적극적이고 효과가 즉각적이지만 누구나 기지전에 참가하기는 사실상 어렵습니다. 어느 정도 발전한 자유주의 국가에서는 기동전 자체가 어렵기도 하고요.
그렇더라도 우리 모두 작은 진지 정도는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진지전이라고 어렵게 생각할 것 없이 우리들의 독서 모임이야말로 그 진지전의 토대가 될 수 있다. 참호 속에 숨어서 싸우듯 장기전을 펴는 혁명의 '진지전'! 그믐밤이 우리들 진지전의 시작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이번 그믐밤 온라인, 오프라인 참가하여 주신 분들께 감사 인사 올립니다. (미션 끝까지 수행해 주신 @오락가락 님, 큰 감동입니다.)




대한항공 라운지가 생각나는 카페 이름, 모닝캄.
카페 실내에 난데 없이 커다란 바위가 중앙에 자리 잡고 있는데 제법 웅장하면서 힙한 분위기를 만드는데 일조하고 있다.
'크렘드라크렘'이라는 가게의 시그니처 메뉴를 주문했다. 보통 이런 메뉴는 디카페인을 만들어 주지 않는데 이 곳은 주문할 수 있어서 점수를 주고 싶다.
짭짤, 달달, 씁쓸하니 맛도 꽤 괜찮은 편.
오래 있고 싶었는데 다음 행선지로 빨리 떠나야 되서 아쉬웠던 곳.


요즘 재미있는 추리소설 뭐가 있을까요?
혼비 작가님과 맥주를 마시다 다짜고짜 물어본 뒤 추천 받은 책.
일본에서 매년 연말에 방영되는 인기 프로그램 <홍백가합전> <미스터리 아레나> 물론 이건 소설 속에 등장하는 가상의 TV 쇼다. 추리 소설의 일부를 조금씩 공개해가며 스튜디오에 모인 참가자들이 범인을 맞추는 것이 쇼의 내용이다. 문제를 해결한 사람은 큰 돈을 벌 수 있다. 따라서 액자식 구성으로 책 안에 TV 쇼의 질문이 되는 살인 사건이 나오고 스튜디오에 있는 참가자들은 이 사건을 함께 읽으며 문제를 풀어나간다.
쇼를 진행하는 MC 를 비롯 참가자들의 대화가 참으로 경박하고 유치해서 계속 낄낄거리며 읽었다. 하지만 이 사람들, 미스터리에는 혼또니 진심이닷!
역시 주말엔 소설 한 권!
자, 여러분이 세끼 밥보다 더 좋아하시는 밀실입니다. 이 수수께끼를 풀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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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멸망할 세상을 알리는 듯 붉게 물든 하늘.
너무 아름다워 한참을 바라다 보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