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있는 나날
2026-07-04 10:13:53
간단한 소감
1956년 7월, 5박 6일 동안 일종의 장기재직휴가를 떠난 주인공 스티븐스가 대략 1920~1936년에 모시던 전(前) 주인나리(달링턴 경)와 그 집(달링턴 홀)에서의 에피소드를 회상하며, 일생 동안 자신을 지탱해 준 가치인 '품위'와 그 과정에서 인간으로서의 감정을 감추고 외면해 왔던 자신을 되돌아보는 이야기.
장르 전환을 상상(?)하며 재미있게 읽었다.
블랙코미디와 시대적•개인적 비극, 드라마.
내가 생각한 “남아 있는 나날”
프롤로그와 제1장은 ‘위대함’뽕이 가득찬 어느 집사가 김칫국을 마시는 듯한 장면을 보여주며 블랙코미디로서 독자를 잡아끈다.
장(章) 중 가장 많은 면수를 할애한 제2장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 전후 독일 배상금문제를 둘러싼 유럽과 미국의 입장차가 달링턴 홀(저택)에 온 인사들 간 대화의 소재로 쓰인다. 고전 문학과 세계사 지식이 아주 얄팍한 내 입장에선 약간의 벽을 느꼈지만 배경지식을 찾아보며 이 대목을 잘 넘겼더니 소설이 술술 읽혔다. 막상 그 내용이 그렇게 어렵고 복잡한 것도 아니었다.
잠깐 그 내용을 적자면, 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졌으니 전쟁비용을 배상해야하는데 아주 풍비박산난 상황이라 도저히 갚을 능력이 없더라는 것이다. 이에 비록 전쟁으로 다투었지만 같은 유럽 식구들인 영국과 프랑스 등은 신사적인 입장에서 배상금 지급을 동결(유예)해주자는 입장을 취한다. 반면 미국은 ‘어림없는 소리요, 누구 맘대로. 그럼 독일이 배상금을 영국이나 프랑스에 갚는 걸 유예해주고 지연시켜주면 우리가 당신 승전국들 전쟁하는 데 빌려준 전쟁빚은 어쩔거냐? 아마추어같은 소리하고 있네.’하며 단호하게 반대를 한다.
그러다가 제5,6장에 이어지는 흥미진진한 전개와 함께 최종 장ㅡ해가 저무는 저녁 무렵, 전등이 하나씩 켜지는 선창 근처라는 장소가 중요(!)ㅡ에서 느껴지는 회한(다른 사람을 위해 인생 헛산 것 아닌가)과 처연함(이벤트를 즐기는 저 사람들처럼 나도 다시 한번 농담을 연습해서 우리 나으리 웃겨드려야지)의 정서가 독자를 쓸쓸하게 한다.
이 회한과 처연함은 처절한 성찰 이후의 순간에도 다시 자신도 모르게 관성에 따라 고정관념에 따라 행동하는 인간의 어떤 모순된 면을 이미지로 그려낸 것이 아닐까. 이에 따르면 유감스럽게도 남아있는 나날이라고 어제 오늘과 다르진 않을 것이다.
주변인물을 통해 말하는 작가
화자는 스티븐스이지만 정작 작가는 다른 등장인물인 켄턴 양(저택에서 함께 일한 동료), 젊은 카디널 씨(달링턴을 대부로 모시며, 1차 대전 독일 배상금 처리 문제와 그로 인한 파시즘의 기운을 관찰한 기자), 해리 스미스•칼라일 박사 등(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의 입을 빌려 소설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알았지만 반복하는 인간
어떤 독자들은 가즈오 이시구로가 그저 ‘아무것도 알려하지 않음’ 태도로 일관하는 등장인물을 그저 ‘보여주기’만 한다고 비판한다. 이 소설에서만큼은 나는 그렇지 않다고 보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먼저 최근에 시청한 넷플릭스 드라마 《맨 끝줄 소년》에서 나온 대사를 소개한다. 허문오(최민식 역) 교수는 자신의 문학강의에서 “그러니까 일상적으로 발생하는 모든 일들을 전부 다 사건이라고 말하지는 않지, 그렇지? 뭐, 작든 크든. 어, 등장인물의 삶과 행위에 특별히 의미 있는 변곡점을 만들어낼 때 비로소 문학적 사건이라고 우리가 말할 수 있겠지? 그리고 그 사건은 반드시 인간 내면의 복잡한 갈등을 전제로 (한다).” 이렇게 말한다. 내가 이해한 바로는, 문학적 사건이란 모순되고 충돌하는, 복잡한 내면을 가진 화자가 변곡점이라 부를 만한 사건을 가리키는 것이며, 이러한 사건이 어떻게 다른 사람들과 각자의 삶 속에 뻗어나가는지를 편집하여 보여주는 것이 문학이라는 것이다(최근에 시청한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 나온, 내가 소설이든 드라마든 간에 가장 좋아하는 문장인 “인간이 그렇게 한 겹이야?!”와도 같은 맥락이라 함께 소개한다).
이시구로라는 작가이자 문학적 사건의 편집자가 《남아 있는 나날》이라는 작품을 통해 내면의 갈등을 스스로 억누르고, 아무렇지 않아 하는 화자의 삶을 주인공으로 삼고 대립되는 의견을 갖거나, 행위를 하는 다른 인물들과의 관계와 작용을 사건화했다는 것 자체부터가 이미 작가의 메시지다.
결말부에서 주인공 스티븐스가 흘리는 회한의 눈물, 그리고 "선창의 전등" 아래서 다시 농담을 연습하겠다고 다짐하는 모순된 행동은 앞서 언급했듯 단순한 회피가 아니다. 그것은 ‘알려하지 않는’ 인간을 보여준 것이 아니라 ‘알았음 혹은 깨달았음’에도 체화된 습성으로 인해 고정관념으로 회귀하는 인간의 숙명 혹은 한계를 작가는 보여준 것이라 생각한다.
따라서 적어도 그저 보여주기만 하고 독자에게 판단을 맡겼다고 하는 비판에는 동의할 수 없다.
추신: 품위에 대하여
한편, '품위'라는 가치는 직전에 읽은 책 《나의 작은 철학》(장춘익 저)에서 ‘도덕성을 따지지 않는 탁월함’으로 이야기된 바 있어, 탁월함으로서 품위 그 자체(만)를 추구했던 주인공의 이야기인 본작을 읽는 데에 조금 더 깊이 몰입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