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을 다녀왔다
2024-08-09 22:02:38생각해 보면 매년 한 번씩은 춘천을 다녀왔던 것 같다. 파주도.
여름이나 가을에 주로 다녀왔는데, 당일치기로 다녀올 때는 남형석 작가님의 '첫서재'를 방문하기도 했고, 하룻밤 자고 와야겠다 싶을 때는 항상 같은 숙소를 찾았다. 얼마 전에도 그 숙소를 검색해 봤는데 다행히 사라지지 않고 굳건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왜 유독 춘천이었을까. 그 시작이 언제였을까를 곰곰이 생각해 보니 26살이던가? 늦었다면 늦은 나이였지만 혼자 떠났던 첫 여행지가 바로 춘천이었다. 그때는 춘천에 아무 연고도 없을 때였는데, 그리 멀지도 가깝지도 않다는 게 그곳을 첫 여행지로 고른 단순한 이유였다. 아마 그렇게 시작됐던 것 같다. 춘천과 파주를 매년 찾는 나만의 루틴이.
그리고 그제, 올해 처음으로 춘천을 다녀왔다. 가장 좋아하는 작가님의 강연이 열린다는 소식을 접하고 마음이 설레었다. 서울에서도 종종 강연 소식을 접하긴 했지만, 회사 교육 기간과 자꾸 겹치는 바람에 갈 수 없어 아쉬웠는데, 이번에는 시간 연차(탄력근무제가 있는 직장이다)를 잘 쓰면 가능할 것 같았다. 그동안은 춘천을 갈 때마다 꼭 지하철을 타곤 했다. 기차보다 시간이 훨씬 더 오래 걸리지만,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천천히 흘러가는 창밖의 초록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는 시간, 종점으로 향할수록 승객들이 열차에서 한 명 한 명 내리며 한산해지는 시간, 그렇게 몇 남지 않은 승객과 몸이 닿을 필요 없이 헐렁한 좌석에 띄엄띄엄 앉아 책을 읽는 시간을 좋아했다. 반복적인 열차의 진동이 마치 요람처럼 느껴져 꾸벅꾸벅 졸기도 했다. 늘 분주한 서울과 달리 춘천으로 향할수록 몸도 마음도 여유롭게 늘어지는 감각이 좋았다.
하지만 이번 여행은 그런 여유를 부릴 시간이 없었다. 목적지와 일정이 명확하게 정해져있었다. 그래서 ITX-청춘열차라는 걸 처음 타봤다. 덕분에 길도 헤맸다(사실 원래도 길치다). 새롭게 알게 된 놀라운(?) 사실은 ITX-청춘열차는 지하철과 같은 홈에서 탄다는 점이다. 촌스러워 보여도 할 수 없다. 나는 이걸 이번에 처음 알았다. 분명 열차가 들어온다는 안내 방송이 들려오는데, 내 눈에 보이는 건 지하철 홈밖에 없어 우왕좌왕하고 있던 찰나, 웬걸. 그곳으로 ITX-청춘열차가 들어오고 있는 게 아닌가. 처음에는 이걸 타도되는 건가 싶어 긴가민가 하다가 '에라 모르겠다' 싶어 열차에 올랐고, 다행히 내가 예매한 좌석을 찾을 수 있었다. 남춘천역까지 가는데 예상 소요시간은 약 1시간, 자리에 앉아 챙겨온 책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다자이 오사무의 단편집 『청춘』과 김기태 작가님의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을 챙겨왔는데, 이번에는 김기태 작가님의 소설을 꺼내 읽었다. 요즘 푹 빠져있는 소설이다(읽을 때마다 혼자 키득거리는 포인트가 있다).
ITX-청춘열차는 확실히 경춘선 지하철보다 빨랐다. 창밖으로 다채롭게 펼쳐진 푸릇푸릇한 여름 풍경을 감상하고 싶었지만, 승객들이 커튼을 내리고 깊은 잠에 빠져있는 것 같아 엄두도 못 냈다. 가만히 책을 읽으며 열차 안의 고요함에 나도 함께 젖어들었다. 똑딱똑딱 잘도 흐르는 시간과 비례한 평온함에 몸이 녹아내리나 싶었는데, 어느새 열차는 남춘천역에 도착해있었다. 1년 만이던가, 반가운 마음을 즐길새도 없이 개찰구를 향해 다다다다 뛰었다. 그때부터 걷고 버스를 타고, 행여나 방송을 놓칠세라 온 신경을 곤두세운 채 경직된 자세로 버스 손잡이를 꼭 잡고, 내리고, 다시 또 다다다다. 그렇게 내 눈앞에 '커먼즈필드 춘천 안녕하우스'가 보였다. 사실 단번에 찾은 건 아니고, 옆 건물에 잘못 들어가는 바람에 혼자 '어떡해 어떡해'를 연발했던 건 (안) 비밀이다. <우리는 타인과 꼭 연결되어야 할까>라는 주제로 춘천문화재단에서 주관하는 인문 아카데미가 이곳에서 곧 진행될 예정이었고, 내가 춘천을 찾은 이유이기도 했다. 강연 제목은 "상상으로 만든 동네, 현수동", 강연자는 장강명 작가님이었다.
정신없이 달려온 보람이 있었다. 강연이 시작되기까지 시간이 꽤 남아 있어 좋은 자리가 많았다. 하지만 자리를 고를 때마다 매번 고민에 빠지곤 했다. 가장 앞자리, 그것도 정중앙에 앉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막상 그렇게 앉으면 작가님과 눈을 마주칠 때마다 부끄러워 강의에 집중하지 못할 나를 알기에. 그래서 작가님의 북토크나 강연을 갈 때마다 욕심을 내려놓고, 애매하게 대각선, 그것도 앞에서 두세 번째 줄 정도? 에 조심스럽게 앉곤 했다. 하지만 앉은키가 작은 편이라(일어서도 작기는 마찬가지) 앞사람의 체격에 따라 복불복으로 시야가 가려질 때가 많았다. 그런 날이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퍽 속상했다. 이번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 큰마음 먹고 춘천까지 시간 연차를 내면서 왔으니 제대로(?) 보고 싶었다. 그래서 용기를 내 나름대로 중앙, 앞에서 두 번째 자리에 앉았는데, 맙소사. 강연이 시작될 때까지 내 앞에 아무도 앉지 않는 바람에, 작가님의 정면에 떡 하니 앉아있는 꼴이 되고 말았다. 강연이 시작되고 작가님을 마주하고 있는 게 쑥스러워 시선을 피할까 잠시 고민했다. 그러다 애써 태연한 척 눈을 마주쳤다. 다행히(?) 작가님은 한자리에 가만히 앉아 계시지 않고, 준비해 오신 PPT 자료를 요리조리 짚어가며 무대를 종횡무진하셨다. 화면에 띄워주시는 지도와 그림, 역사 자료 등이 신기해서 긴장감은 서서히 잦아들었고, 온전히 강연에 몰입하고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강연은, 하... 말해 뭐 해. 너무 좋았다. 현수동이라는 상상의 동네를 말씀하시며, 광흥창역과 현석동뿐만 아니라 한강과 지리, 역사, 인물 등 온갖 시대 배경까지 세세하게 설명하시는 모습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사회자님의 말씀처럼, 동네를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연구하신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아무튼, 현수동』을 읽을 당시 머릿속에 잘 그려지지 않았던 상상의 동네가 눈앞에 현실로 펼쳐지는 기분이었다. 작가님이 꿈꾸는 동네는 단순한 주거지의 형태가 아니었다.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따스한 마을이었다. 끊임없이 새것만을 추구하는, 업데이트에 중독된 세상에 반하는 작가님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다가와 마음을 울렸다. 어릴 적 내가 살았던 동네의 역사를 연구한다는 건, 그 동네를 사랑하는 또 하나의 방식이겠구나 싶었다.
작가님의 블로그 대문 사진은 과거의 현석동 모습이다. 좋은 일이 많았던, 소중한 동네라고 하셨다. 나에게 그런 동네는 어디였을까를 곰곰이 생각하다 가장 먼저 떠오른 한곳이 있었다. 사실 작년 장기휴가 때도 몇 년만에 그곳을 다시 찾았었다. 시간이 흘러도 변함없이 소중한 곳, 역시 나는 추억이 가득한 동네가 좋구나, 더 나아가 이야기가 있는 삶을 사랑하는구나 싶어 웃음이 났다.
(내 블로그 대문 사진도 바꿔야지)
그렇게 한참 동안 강연에 푹 빠져있었는데, 이제 질문을 받겠다는 말씀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제야 손목시계를 봤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나 흘렀다니! 아쉬운 마음이 가득했지만 강연이 끝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걸음을 재촉했다. 그곳을 나서기 전, 작가님께 조심스레 인사도 드리고 싶었지만, 괜히 또 그러면 부담스러워하실 것 같아 마음만 고이 간직한 채 안녕하우스를 나왔다. 다시 서울로 돌아갈 길이 까마득했지만 그럼에도 좋았다. 무더운 날씨처럼 마음속에도 온기가 가득 차오르는 기분이었다. 이열치열이라고 하지 않던가(뭐래).
이번에 만난 작가님의 모습은 옛날식으로 치자면 동네에서 가장 유능한 이야기꾼 같았다. 옷차림도 자유분방하고 말이다(하하). 만약 내가 과거에 태어났더라면, 마을에 이 이야기꾼이 온다는 소식이 돌 때마다 와다다다 뛰어가서 가장 앞자리 흙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기다리고 있지는 않았을까, 하는 기분 좋은 상상도 해보았다. 건물 밖에는 연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작년에 경춘선 지하철에서 위험한 일을 당했던 나를 걱정하며, 퇴근하자마자 춘천으로 달려와준 연인이 고마웠다. 그는 저 멀리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오늘 강연이 너무 좋았다고, 행복한 밤이라고 재잘재잘 떠들어대는 나를 보며 연인은 익숙하다는 듯 씩 웃었다. 그리고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역시 화수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