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방정식? 아니, 그냥 내 방식
2025-04-02 09:15:03<사랑의 생애>에서는 사랑의 '자격'에 대한 관념이 여러 번 등장한다. 흔히 말하는 '나는 사랑할 자격이 없어'와 비슷한 맥락. 근데 이 자격이라는 건 실은 이런 게 아니었을까. 나의 자격이 아니라, 실은 너의 자격. 그러니까 '네가 사랑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지 증명해 봐'같은 것 말이다.
나의 지난 연애들을 복기해 보면, 보통 상대(A라고 가정해 본다)가 나를 사랑한다고 말할 때, 나는 이런 말을 하고 싶었다. 'A는 나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나를 사랑하고 있(다 생각하)는 A, 그 자신의 모습을 사랑하는 것이다'라고. 하지만 A들은 늘 말한다. 나의 어떤 모습도 다 사랑할 수 있을 만큼 자신의 사랑은 위대하고 특별하다고, 자신이 나를 얼마나 아끼고 있는지 알고 있냐고. 자꾸 확인받고 싶어 하고('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칭찬받고 싶어 한다('봐봐, 내가 너를 이만큼이나 사랑한다니까? 나는 이런 것도 한다니까?').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다.
'아니, A 네가 사랑하는 건 내가 아니라니까'
로맨티스트를 가장한 자신의 모습에 잔뜩 도취되어 있을 뿐이라는 걸 A들은 모른다. 내가, 자신이 상상(기대)했던 모습과 조금이라도 다른 행동을 취하면 절대 받아들이지 못할 거면서(고작 그 정도면서). 내가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아도 (A 자신이 주는 사랑은 너무나 위대해서), 나를 온전히 다 받아들일 수 있을 것처럼 말한다(그렇다면 A, 네가 과연 나를 어디까지 수용할 수 있는지 내가 한번 보여 줘?). 나는 그게 싫었다. 더 나아가서는 A들이 제발, 그걸 좀 깨닫길 바랐다. A들뿐만 아니라 그 누구였어도, 나에게 호감을 갖기 시작했다면 A만큼의 사랑은 충분히 쏟아낼 수 있을 거라고. A들이 나에게 쏟아붓는 사랑이 특별한 게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래, 나는 여기서 '쏟는다'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건 일종의 과식 같은 것이다. A들은 내가 바란 적도 없는 사랑(이게 과연 사랑이 맞을까 싶다만)을 자기들 감정대로 마음껏 쏟아내고는 '아 이토록 다정한 나'라는 타이틀로 자신을 묶어버린다. 여기서 내가 원하고 말고는 그들에게 중요하지 않다(적어도 내 눈에는 그랬다). 그들은 나를 하나의 인격체가 아닌 소유의 대상으로 보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 A들은 되레 떼를 쓴다(너도 내가 너에게 하는 것만큼 사랑을 줘! 사랑을 달라고!!). 이 굴레가 지긋지긋했다. 내가 남자를 만나는 건지, 애를 키우는 건지. 조금 더 성숙한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는 건지.
그리고 A들이 유독 자주 하는 말이 있다.
"네가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처음에는 그 말을 믿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차차 알게 된다. A들은 내가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말(은)하면서 정작 내가 행복할 만한 걸 하지 않는다는걸. 입으로만 내 행복을 바란다고 잔뜩 떠들어놓고는 앞서 말한 유치한 행동을 반복한다(왜 자꾸 삐지는 건데, 사랑을 구걸하는 건데). 이건 대체 누구를 위한 행복인가? 적어도 나는 아닌 것 같은데 말이다. A들 스스로를 위한 행복이 아니었을까? 나는 그게 나를 기만하는 것이라 여겼다. 마치 부모가 하는 '다 너 잘 되라고 하는 말이야'처럼, 결국은 본인들이 좋아서 했던 행동을 그럴듯하게 포장해 나에게 마구잡이로 던지는 식이었다. 그래 놓고는 '아 이토록 다정한 나'에 또 다시 도취되고(윽). 헤어지자 말하면 "내가 널 얼마나 사랑했는데, 억울해!"를 외치거나 무섭게 돌변한 모습을 보인다. 나를 그렇게나 사랑했다면서 그때는 나에 대한 예의고, 존중이고, 모든 걸 잃어버리면서 말이다(아니, 어쩌면 이게 그들의 진짜 모습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다 이승우 작가의 <사랑의 생애>에서 나의 이 마음을 너무도 잘 설명하는 문장을 만났다.
우리는 때로 자기의 사랑을 얻거나 지키기 위해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의 (이미지의) 훼손을 감수한다. 그렇게 해서라도 사랑을 내놓지 않으려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사랑의 크기를 보증한다는 관념이 있는 것이 사실이고, 이 관념을 전혀 근거 없다고 할 수도 없다. 이런 관념의 배후에 사랑의 이기심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지. 사랑의 '이기심'이 아니라 '사랑'의 이기심이라는 사실을 아는지. 지키려고 하는 것은 '그, 또는 그녀'의 사랑이 아니라 그, 또는 그녀의 '사랑'이다.
사랑을 내놓더라도 사랑하는 '사람'의 이미지의 훼손만은 막으려는 사람은 사랑의 크기를 묻는 질문 앞에 놓인다. 당신의 사랑은 그 정도인가? 사랑이 그렇게까지 크지는 않기 때문에, 즉 연인의 이미지를 걱정할 여유를 부릴 만한 정도에 불과하기 때문에 사랑을 내놓으려고 하는 것은 아닌가? 사랑이 그래도 되는 것인가? 당신의 큰 배려는 당신의 사랑의 보잘것없음을 감추기 위한 포즈가 아닌가? 배려는 이기심을 넘지 못한다. 배려보다 이기심이 더 큰 사랑의 증거로 간주된다. 사랑하기 때문에 떠난다는 수사가 이 세계에서 위선과 변명의 표현으로 인식되는 이유이다.
어쩌면 이게 과거에 만나왔던 A들과 지금 만나고 있는 연인의 근본적인 차이가 아닐까 싶다. 그는 '무조건 나를 사랑할 수 있다는 공수표를 날리는 게 아니'었고, 내가 갖춘 어떤 자격 '때문에' 나를 사랑하는 게 아니었다. 나라는 인간을 제대로 보고 있다 여겨졌다. 본인의 사랑(만)을 맹목적으로 쏟아내는 자칭 사랑꾼 A들과는 달랐다. A들은 '나라는 존재 자체'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나의 어떠한 행위와 모습'으로 인해 자신들의 감정이 깊어지고 있음조차 구분하지 못했으니까. 그 차이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음에도 말이다. 물론 연인과의 인연 또한 어디까지일지는 알 수 없다. 장담할 수도 없고, 장담해서도 안 된다. 그저 현재에 충실할 뿐이다.
지난 주말에 있었던 독서모임에서 우리의 토론은 활활 타올랐지만 그 누구도 결론을 내리지는 못했다. 현재 진행형 안에서 스스로의 답을 찾고, 또 찾을 뿐이었다. 생소한 직업군 덕분에(이 직업을 가진 사람도 독서모임에 나올 수 있구나) 사랑 이야기에서 범죄자와 피해자, 피의자, 취조 등의 단어들이 시도 때도 없이 등장했지만 덕분에 많이 웃었다. 누군가는 간통죄에 열을 올렸고, 결혼의 흔적이 왜 꼭 남아야 하냐며 격렬하게 외치는 이도 있었다. 그런 건 한 번도 (중요하게) 생각해 본 적 없는데,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 싶어 가만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랑이라는 게 쫓고 쫓기는 관계일 수 있다는 것도. 결국 다 저마다의 이야기가 있구나 싶었다. 그럼 나는?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각자의 삶은 각자가 책임지고, 올곧게 선 두 사람이 만나야(만) 건강한 관계가 가능하다고 말하는 내 목소리에 다소 힘이 빠진다. 내가 그리 건강한 사람이 아닌 것 같아서. 말을 하면 할수록 병든 내가 느껴져서. 과거에 만난 어떤 상대에게는 생각할 시간을 달라 말하고, 돌아가지 않았던 적이 있다. 방심(?) 했던 상대는 나의 일방적인 선택에 불같이 화를 냈지만, 더더욱 돌아갈 수 없었다. 이별을 고하는 자는 왜 자꾸 욕을 먹는 것일까. 합의를 구하는 과정이 아니지 않나? 이해할 수 없었다.
사랑에 관한 책을 이야기할 때, 누군가는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을 말하고, 누군가는 알랭 드 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를 말했다. 양귀자의 <모순>을 말하기도. 그나마 가장 최근에 접한 사랑 소설은 이혁진 작가의 <사랑의 이해>다. 그럼에도 나는 <사랑의 생애>가 가장 좋았다. 재작년에 읽고 이번에 다시 읽었는데, 여전히 좋았다. 말맛이 살아있달까. 한 줄로 충분히 끝낼 수 있는 문장을 몇 장에 걸쳐 풀어내는, 그의 집요하고도 집착스러운 문장들이 너무나 매력적이다. <사랑의 생애>를 읽으면서 형배는 오만했고, 영석은 싫었다. 선희는 답답했고, 준호는... 하, 말을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