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그런 이야기

싫은 게 하나라도 있으면

by 연해2026-03-02 13:50:18
진심으로 고맙기 때문에 굴욕감을 느끼는 마음, 기꺼이 공범이 되고자 하면서 그 주범을 때려눕히고 싶은 마음은 정말로 설명하기 어렵다. 나를 절반으로 딱 잘라서, 한 조각을 팔아넘긴 뒤 그 값으로 다른 조각을 꾸미는 일에 대해서도 설명하기 어렵다. 심지어 엄마 같은 어른들은 자신의 절반을 선뜻 포기하고 좋은 쪽만을 보고 사는 듯한데, 그게 어떻게 가능한지는 정말 오래도록 의문이었다.
캐리커처 단요 지음

하나. 그의 말은 비겁한 변명일까, 한걸음 더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걸까. 나는 그 세계를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이 세계에 여전히 머물러있었다. 그는 나와 다른 생각인 것 같았다. 차마 잡을 수 없고, 잡아서도 안 되고, 언젠가는 벌어질 일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다만 차오르는 실망감을 어떻게 덜어내야 할까. 내가 먼저 이 끈을 끊어버리는 게 어떨까 생각이 깊어진다. 영원을 약속한다는 말은 우습고, 애초에 영원을 약속한 적도 없었지만, 이런 일 앞에서 담담하게 웃을 수 있을 정도로 단단한 마음밭이 아니라서. 거 참 미안하게 됐네. 이건 변한 걸까, 변해가는 중인 걸까. 본심이 드러난 것일까. 변주일까, 변화일까. 성숙해져가는 과정이라고, 그렇게 어른이 되어가는 거라고 중얼거리는 이가 있다면 힘껏 비웃어주고 싶은데, 내가 이상한 건가?


하나. 퇴근길 지하철, 목소리가 큰 여자가 옆자리에 앉았다. 그녀의 목소리가 크다고 느낀 건, 쉬지 않고 들려오는 통화 소음 때문이었다. 그녀가 먼저 내릴까 내가 먼저 내릴까. 부디 전자이길 바랐지만 정거장을 지나칠 때마다 둘 다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나는 읽던 책을 덮었다. 도저히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귓가를 때리는 그녀의 카랑카랑한 음성이 연신 내 신경을 건드렸다. 독서는 일찌감치 포기했고, 잠이라도 청해볼까 싶었지만 이 마저도 실패. 이쯤 되면 이 칸의 승객들 모두에게 본인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 게 아닐까 진지하게 생각했다. 짜증이 올라왔지만 가만히 눈을 감았다. 통화하는 상대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녀는 말끝마다 "미친놈이"라고 덧붙였다. 욕설이 자연스러워보였다.

"아니, 그 미친놈이!"

"아니, 근데 그 미친놈이 진짜!"

점점 귀가 아팠다. 단순히 시끄러워서가 아니었다. 귀가 썩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가 지칭하는 '미친놈'이 다름 아닌, 그녀의 남편이었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알고부터는 더욱 힘주어 눈을 감았다.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건 내쪽이었다.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는 듯 자연스럽게 일어나 출입문 앞에 섰다. 출입문 유리로 그녀의 얼굴이 비쳤다. 선이 곱고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몸을 털었다. 출입문이 열리고 하나의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 생각은 다름 아닌.


하나. 조카를 보고 왔다. 친오빠의 아들이라 그런 건지, 내 눈에 콩깍지가 씌인 건지. 아직 말도 못 하는데 표정이며 몸짓 하나하나 모든 게 사랑스럽기만 했다. 이렇게 순한 아이가 있나 싶을 정도로 생글생글 잘 웃다가도 한 번씩 울먹거릴 때면 어찌나 안쓰럽던지. 온갖 재롱이란 재롱은 내가 다 부리고 왔다. 너무 작아서 만지기도 조심스러운 꼬물꼬물한 손가락으로 내 검지손가락을 꼭 쥐던 감촉이 아직도 생생하다. 아빠가 된 오빠의 모습은 낯설기도 했지만 뭉클한 마음이 더 컸다. 세 사람이 알콩달콩 잘 지냈으면 좋겠다고 말하자 넷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 돌아왔다. 역시 만만치 않은 사람들이다. 그 가족을 보면서 떠오른 한 사람은 다름 아닌 유리였다. 한 달에 한 번씩 만나는 유리와의 만남도 어느새 2년이 넘었다. 10살에 처음 만났는데, 이제 12살이 된 유리는 반항기가 충만해져 모든 게 시큰둥한 아이가 되었다. 조카에게 나는 고모였고, 유리에게 나는 이모였다(선생님이라는 호칭이 싫어 이모로 불러달라고 했다). 지난달에 만났을 때는 태권도 선수가 되고 싶다는 말을 들었다. 그 전달에는 뭐라고 했더라. 그전에는, 또 그전에는... 뭐가 됐든 하고 싶은 게 있다는 사실이 기쁘고 좋았다. 다만 아쉬운 건 집중력. 뭐든 쉽게 질려 하고 조금만 마음에 들지 않으면 온몸으로 거부 반응을 일으키는 유리가 벅차기도 했다. 지난달에는 얼음썰매라는 것도 타봤다. 내 인생에 얼음썰매라니 세상에. 유리가 원해서 갔지만 5분도 채 지나지 않아 유리는 싫증을 냈다. 반대로 나는 신세계에 눈을 뜨고 말았다. 퇴장하라는 외침을 듣고서야 겨우 발길을 돌렸다. 유리 몰래 겨울에는 종종 얼음썰매를 타러 가야겠다.

(와, 진짜 재밌어...)


하나. 올해 초에는 영화 <콘클라베>를 봤다. 작년 봄에 개봉했을 때부터 줄곧 궁금했는데, 이제서야 챙겨 봤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는데, 현실에서 비슷한 일이 생겨버렸다. 현실에서 내가 로렌스가 된 기분이라면 지금 내 입장이 충분히 설명 가능하리라 믿는다. 수평적인 조직 특성상 보직을 맡지 않아도 되는 구조라 제안이 들어와도 번번이 거절해왔던 나였다. (내 입으로 말하기 뭐 하지만) 책임감이 강해 역할이 주어지는 게 싫었다. 직장에서도 가늘고 길게 살겠다는 모토 하나로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지내고 싶었다. 적당히 잘하고 적당히 좋아하는 정도의 마음으로 성실하게 이어가고 싶을 뿐이었다. 그런 내게 갑작스러운 일이 벌어지고 있다. 평소 같았으면 당연히 거절했을 텐데, 이제 더 이상 그럴 수가 없었다. 앞서 언급한 <콘클라베>의 로렌스와 같은 상황이 돼버렸다. 단 한 번도 직책을 맡는 자리를 욕심낸 적이 없는데, 그 자리를 수락하는 것만으로 오해가 생기지 않을까 싶어 속이 쓰렸다. 어느 공동체에서든 자유롭게 떠다니는 사람이고 싶은 내 성정과도 맞지 않아 부담스러웠다. 대안이 없다, 대안이!


하나. 1월 독서모임에서는 장강명 작가님의 <먼저 온 미래>라는 책으로 모임을 진행했다. 내가 가장 애정하는 작가님이고, 오랫동안 출간을 기다려왔던 책이라 모임에 대한 기대와 걱정이 많았는데, 결론만 말하자면 좋았다. 모임분들은 어떠셨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굉장히 의미 있고 깊은 시간이었다. 내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다양한 의견들이 흥미로웠고, 건강하게 토론하는 분위기라 안전한 마음으로 임할 수 있었다. <먼저 온 미래>를 읽고 오랫동안 마음에 담았던 문장은 '가치가 기술을 이끌어야 한다'였는데, 이 문장에는 이런 질문들이 따라온다. '그렇다면 좋은 가치란 무엇일까?', '가치가 기술을 이끌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내가 준비해 간 발제문에도 이 질문들을 담았고 명쾌한 답을 내지 못했던 내게 한줄기 빛 같은 문장을 전해주신 분이 계셨다.

'가치가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과정, 그 자체가 가치다'

이 문장을 받아 적으며 속으로 감탄했다. 내가 자주 생각했던 지향점과 맞닿아있는 문장이었다. 삶은 고통의 연속이지만 그럼에도 낙관하자는 문장처럼. 낙관해봤자 무슨 의미가 있겠어, 라고 자조하기보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외치는 마음의 형태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없다는 게 인간과 AI의 다른 점이기도 하고.


​하나. 올해도 어김없이 키워드를 정했다. 그동안 고수해왔던 삶의 방식과는 조금 다른 방향성이 될지도 모르겠다. 나는 무엇이든 정성스럽고 성실하게 해나가는 편이었다. 다양한 걸 동시에 하는 건 내 방식이 아니었다. 에너지가 많지도 않을뿐더러 한 가지 일에만 몰두하는 걸 좋아했다. 다방면으로 재능을 가지기보다는 작은 조각 하나까지 세심하게 살피고 이어붙여 깊숙이 들여다보는 밀도 있는 삶을 지향했다. 사실 이건 어떤 특별한 노력을 기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따라오는 내 기질이기도 했다. 활자는커녕 긴 영상조차 집중력이 떨어져 몇 배속을 하며 본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외계어처럼 들렸다. 나는 오히려 반대였다. 집중력이 과해 그 상황에 지나치게 몰입하곤 했다. 스스로를 망가뜨리고 있다는 사실조차 망각한 채 나를 욱여넣을 때가 많았다. 나한테는 그게 독이었을까. 생각을 달리해보기로 했다. 밀도, 정성, 몰입, 집중과 같은 키워드를 모조리 걷어내고 판을 새롭게 다시 짜고 싶었다. 그래서 정한 게 '유연'이었다. 일이든 관계든 삶을 바라보는 방식에 선선한 바람이 스며들었으면 했다. 엄마는 어릴 때부터 나에게 나무가 아닌 숲을 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때마다 속으로 반기를 들며 되새겼다. 한 그루의 나무라도 소중히 아껴주는 사람이 되겠다고. 근데 어쩌면 이 다짐이 지금의 나를 계속 방황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2026년의 나는 조금 더 유연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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