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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해님의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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싫은 게 하나라도 있으면

하나. 그의 말은 비겁한 변명일까, 한걸음 더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걸까. 나는 그 세계를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이 세계에 여전히 머물러있었다. 그는 나와 다른 생각인 것 같았다. 차마 잡을 수 없고, 잡아서도 안 되고, 언젠가는 벌어질 일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다만 차오르는 실망감을 어떻게 덜어내야 할까. 내가 먼저 이 끈을 끊어버리는 게 어떨까 생각이 깊어진다. 영원을 약속한다는 말은 우습고, 애초에 영원을 약속한 적도 없었지만, 이런 일 앞에서 담담하게 웃을 수 있을 정도로 단단한 마음밭이 아니라서. 거 참 미안하게 됐네. 이건 변한 걸까, 변해가는 중인 걸까. 본심이 드러난 것일까. 변주일까, 변화일까. 성숙해져가는 과정이라고, 그렇게 어른이 되어가는 거라고 중얼거리는 이가 있다면 힘껏 비웃어주고 싶은데, 내가 이상한 건가?


하나. 퇴근길 지하철, 목소리가 큰 여자가 옆자리에 앉았다. 그녀의 목소리가 크다고 느낀 건, 쉬지 않고 들려오는 통화 소음 때문이었다. 그녀가 먼저 내릴까 내가 먼저 내릴까. 부디 전자이길 바랐지만 정거장을 지나칠 때마다 둘 다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나는 읽던 책을 덮었다. 도저히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귓가를 때리는 그녀의 카랑카랑한 음성이 연신 내 신경을 건드렸다. 독서는 일찌감치 포기했고, 잠이라도 청해볼까 싶었지만 이 마저도 실패. 이쯤 되면 이 칸의 승객들 모두에게 본인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 게 아닐까 진지하게 생각했다. 짜증이 올라왔지만 가만히 눈을 감았다. 통화하는 상대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녀는 말끝마다 "미친놈이"라고 덧붙였다. 욕설이 자연스러워보였다.

"아니, 그 미친놈이!"

"아니, 근데 그 미친놈이 진짜!"

점점 귀가 아팠다. 단순히 시끄러워서가 아니었다. 귀가 썩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가 지칭하는 '미친놈'이 다름 아닌, 그녀의 남편이었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알고부터는 더욱 힘주어 눈을 감았다.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건 내쪽이었다.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는 듯 자연스럽게 일어나 출입문 앞에 섰다. 출입문 유리로 그녀의 얼굴이 비쳤다. 선이 곱고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몸을 털었다. 출입문이 열리고 하나의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 생각은 다름 아닌.


하나. 조카를 보고 왔다. 친오빠의 아들이라 그런 건지, 내 눈에 콩깍지가 씌인 건지. 아직 말도 못 하는데 표정이며 몸짓 하나하나 모든 게 사랑스럽기만 했다. 이렇게 순한 아이가 있나 싶을 정도로 생글생글 잘 웃다가도 한 번씩 울먹거릴 때면 어찌나 안쓰럽던지. 온갖 재롱이란 재롱은 내가 다 부리고 왔다. 너무 작아서 만지기도 조심스러운 꼬물꼬물한 손가락으로 내 검지손가락을 꼭 쥐던 감촉이 아직도 생생하다. 아빠가 된 오빠의 모습은 낯설기도 했지만 뭉클한 마음이 더 컸다. 세 사람이 알콩달콩 잘 지냈으면 좋겠다고 말하자 넷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 돌아왔다. 역시 만만치 않은 사람들이다. 그 가족을 보면서 떠오른 한 사람은 다름 아닌 유리였다. 한 달에 한 번씩 만나는 유리와의 만남도 어느새 2년이 넘었다. 10살에 처음 만났는데, 이제 12살이 된 유리는 반항기가 충만해져 모든 게 시큰둥한 아이가 되었다. 조카에게 나는 고모였고, 유리에게 나는 이모였다(선생님이라는 호칭이 싫어 이모로 불러달라고 했다). 지난달에 만났을 때는 태권도 선수가 되고 싶다는 말을 들었다. 그 전달에는 뭐라고 했더라. 그전에는, 또 그전에는... 뭐가 됐든 하고 싶은 게 있다는 사실이 기쁘고 좋았다. 다만 아쉬운 건 집중력. 뭐든 쉽게 질려 하고 조금만 마음에 들지 않으면 온몸으로 거부 반응을 일으키는 유리가 벅차기도 했다. 지난달에는 얼음썰매라는 것도 타봤다. 내 인생에 얼음썰매라니 세상에. 유리가 원해서 갔지만 5분도 채 지나지 않아 유리는 싫증을 냈다. 반대로 나는 신세계에 눈을 뜨고 말았다. 퇴장하라는 외침을 듣고서야 겨우 발길을 돌렸다. 유리 몰래 겨울에는 종종 얼음썰매를 타러 가야겠다.

(와, 진짜 재밌어...)


하나. 올해 초에는 영화 <콘클라베>를 봤다. 작년 봄에 개봉했을 때부터 줄곧 궁금했는데, 이제서야 챙겨 봤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는데, 현실에서 비슷한 일이 생겨버렸다. 현실에서 내가 로렌스가 된 기분이라면 지금 내 입장이 충분히 설명 가능하리라 믿는다. 수평적인 조직 특성상 보직을 맡지 않아도 되는 구조라 제안이 들어와도 번번이 거절해왔던 나였다. (내 입으로 말하기 뭐 하지만) 책임감이 강해 역할이 주어지는 게 싫었다. 직장에서도 가늘고 길게 살겠다는 모토 하나로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지내고 싶었다. 적당히 잘하고 적당히 좋아하는 정도의 마음으로 성실하게 이어가고 싶을 뿐이었다. 그런 내게 갑작스러운 일이 벌어지고 있다. 평소 같았으면 당연히 거절했을 텐데, 이제 더 이상 그럴 수가 없었다. 앞서 언급한 <콘클라베>의 로렌스와 같은 상황이 돼버렸다. 단 한 번도 직책을 맡는 자리를 욕심낸 적이 없는데, 그 자리를 수락하는 것만으로 오해가 생기지 않을까 싶어 속이 쓰렸다. 어느 공동체에서든 자유롭게 떠다니는 사람이고 싶은 내 성정과도 맞지 않아 부담스러웠다. 대안이 없다, 대안이!


하나. 1월 독서모임에서는 장강명 작가님의 <먼저 온 미래>라는 책으로 모임을 진행했다. 내가 가장 애정하는 작가님이고, 오랫동안 출간을 기다려왔던 책이라 모임에 대한 기대와 걱정이 많았는데, 결론만 말하자면 좋았다. 모임분들은 어떠셨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굉장히 의미 있고 깊은 시간이었다. 내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다양한 의견들이 흥미로웠고, 건강하게 토론하는 분위기라 안전한 마음으로 임할 수 있었다. <먼저 온 미래>를 읽고 오랫동안 마음에 담았던 문장은 '가치가 기술을 이끌어야 한다'였는데, 이 문장에는 이런 질문들이 따라온다. '그렇다면 좋은 가치란 무엇일까?', '가치가 기술을 이끌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내가 준비해 간 발제문에도 이 질문들을 담았고 명쾌한 답을 내지 못했던 내게 한줄기 빛 같은 문장을 전해주신 분이 계셨다.

'가치가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과정, 그 자체가 가치다'

이 문장을 받아 적으며 속으로 감탄했다. 내가 자주 생각했던 지향점과 맞닿아있는 문장이었다. 삶은 고통의 연속이지만 그럼에도 낙관하자는 문장처럼. 낙관해봤자 무슨 의미가 있겠어, 라고 자조하기보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외치는 마음의 형태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없다는 게 인간과 AI의 다른 점이기도 하고.


​하나. 올해도 어김없이 키워드를 정했다. 그동안 고수해왔던 삶의 방식과는 조금 다른 방향성이 될지도 모르겠다. 나는 무엇이든 정성스럽고 성실하게 해나가는 편이었다. 다양한 걸 동시에 하는 건 내 방식이 아니었다. 에너지가 많지도 않을뿐더러 한 가지 일에만 몰두하는 걸 좋아했다. 다방면으로 재능을 가지기보다는 작은 조각 하나까지 세심하게 살피고 이어붙여 깊숙이 들여다보는 밀도 있는 삶을 지향했다. 사실 이건 어떤 특별한 노력을 기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따라오는 내 기질이기도 했다. 활자는커녕 긴 영상조차 집중력이 떨어져 몇 배속을 하며 본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외계어처럼 들렸다. 나는 오히려 반대였다. 집중력이 과해 그 상황에 지나치게 몰입하곤 했다. 스스로를 망가뜨리고 있다는 사실조차 망각한 채 나를 욱여넣을 때가 많았다. 나한테는 그게 독이었을까. 생각을 달리해보기로 했다. 밀도, 정성, 몰입, 집중과 같은 키워드를 모조리 걷어내고 판을 새롭게 다시 짜고 싶었다. 그래서 정한 게 '유연'이었다. 일이든 관계든 삶을 바라보는 방식에 선선한 바람이 스며들었으면 했다. 엄마는 어릴 때부터 나에게 나무가 아닌 숲을 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때마다 속으로 반기를 들며 되새겼다. 한 그루의 나무라도 소중히 아껴주는 사람이 되겠다고. 근데 어쩌면 이 다짐이 지금의 나를 계속 방황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2026년의 나는 조금 더 유연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진심으
진심으
고기를 먹으러 가야겠다 (아 물론 돈은 내고)
"늙었으니까 세상 사람들 불편하지 않게 구석에 찌그러져 있다가 그대로 죽으라고?"



언행이 고약한 어르신들을 마주할 때마다 불쑥불쑥 비뚤어진 마음들이 올라오곤 했다. 가끔은 속으로 지독한 말들을 품기도 했다. 내 머릿속에 이런 생각이 존재했다는 사실조차 소름끼치는 불온한 어떤 것들. 다만 이 영화를 보면서 계속 들었던 생각은,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이야기가 있다는 거다. 그게 남들 보기에 보잘것없어 보일지라도. 모두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고, 다 저마다의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 산다는 것. 무서울 것 없는 세 노인의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이 설명만으로는 다소 부족하다. 세 명의 주인공 중 가장 먼저 세상을 떠났던 할아버지의 숨겨온 직업이 여운처럼 남기도 했다. 그 직업을 통해 알게 된 그의 생각과 마음에 대해서도.

인간으로 태어나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게 죽음과 노화가 아닐까. 주어진 생명 시계는 다 다를지언정 필연적으로 찾아오고야 마는 것. 셋은 두런두런 지난 삶의 궤적을 짚어가며 쉬지 않고 이야기를 나누는데, '돌아보니까'라는 말을 연거푸 뱉어대는 할아버지에게 또 다른 할아버지가 말한다. 뭘 자꾸 돌아보냐고, 그만 돌아보라고. 별 볼일 없는 인생이지 않았냐는 자조 섞인 말에 그딴 게 어딨냐는 핀잔을 듣곤 하지만, 정말 그렇지 않나? 별 볼일 없는 인생이라는 게 어디 있고, 별 볼일 있는 인생이라는 건 또 어디 있는데? 그걸 판단하는 건 누구고? 다들 그냥 고만고만하게 적당히들 사는 거지. 삶을 돌아보는 작업은 내가 종종 하는 익숙한 패턴 중 하나다. 반추라고도 하던데, 성찰의 의미라면 조금 더 거창한가. 영화를 보며 요즘 내가 품고 있던 고민들이 한 줌 먼지 같아 보이기도 했다. 역시 인간의 욕심이란 끝도 없구나 싶어,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간 후에도 한동안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그래서 지금 내 고민이 뭐였더라...

생각 주머니는 제때 비워주지 않으면 머릿속을 비집고 나와 지독한 마음을 품고 나를 병들게 한다. 찰랑찰랑 소리가 날 때 한 번씩 톡톡 털어줘야 하는데, 가끔 그 시기를 놓치곤 부정적인 생각 꼬리를 극단으로 몰고 간다. 그러다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 나면 너무 갔다 싶은 거다. 그게 현실 가능한 욕심이야? 그런 세상이 존재하냐고. 아니, 존재 할 거라고 생각해? 도리어 묻고 싶어진다.


(돈 안 들이고 죽기 위해) 영양실조로 자살해 임종을 맞이하겠다는 친구의 계획을 마주했을 때는 대체 어떤 말을 해줘야 할까("너가 오늘 안 죽으면 기다려야 하나?"라는 자조 섞인 농담이 꽤 아팠다). 고기 값을 계산하지 않고 허겁지겁 도망치고, 낡은 폐지를 서로 갖겠다며 핏발을 세우고 언성을 높이는 모습에 말문이 막히다가도, 그럼 내 인생은 뭐 얼마나 대단한가 싶어 눈물 섞인 웃음이 났다. 염치없는 손자의 모습에 혀를 끌끌 차다가도 보이는 게 다가 아니란걸, 내가 아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다시 한번 깨닫기도 했다. 돈이 뭐길래, 사람이 뭐길래, 그토록 소중하다 외치던 가족들은 다 어디 갔느냔 말이다. 부질없다, 진짜.

얼마 전에 조지 오웰의 『1984』를 읽고 '와 이토록 암담한 세상이라니' 싶어 마음이 울적했는데, 이 영화 덕분에 삶을 바라보는 각도가 달라진 기분. 편협한 시선에서 살짝은 멀어진 것 같기도 하고. 괄괄한 세 노인의 모습에 쓴웃음을 짓다가, 울다가, 다시 또 웃다가. 좋은 영화였는지는 잘 모르겠다만 애틋한 마음이 드는 건 사실이다. 도전을 두려워하지 말고, 끊임없이 삶을 고치고 또 고쳐가며 살고 싶은 마음을 품게 한다. 고장나는 것이 두려워 방어만 한다면 그것 또한 겁쟁이가 아닐까. 이 영화를 많은 사람들이 봤으면 좋겠다. 보고 나서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 함께 감상을 나눠보고 싶다. 그리고 이 질문을 건네고 싶다.


당신이 상상하는 당신의 노년은 어떤 모습입니까?


사람과 고기
사람과 고기
머릿속이 지글지글 자글자글

하나. 새로 이사 간 동네가 어떠냐는 주변인들의 물음에 '하늘이 참 예쁜 동네'라고 답했다. 뜬금없이 웬 하늘 타령이냐고 핀잔을 들었지만 정말 그랬다. 걸을 때마다 하늘을 자주 올려다봤다. 4년 전이던가? 가족들과 차를 타고 파주 아울렛을 갔던 적이 있다. 휴점일인 걸 모르고 즉흥적으로 갔던 거라 허탈한 마음에 차를 돌리려는 오빠에게 "그럼 파주출판단지 갈까?"라고 말했다. 나에게 파주출판단지는 주기적으로 찾게 되는 소중한 장소 중 하나다. 내가 아끼는 책방도 있고, 독서문화공간도 있고, 여러 출판사들도 있고, 푸릇푸릇하게 걷기 좋은 길도 많아서 그 공간에 나를 넣어준다는 사실만으로 마음이 포근해지는 곳. 평소 같았으면 말도 안 꺼냈을 텐데, 마침 바로 옆이 파주출판단지라 용기 내어 건넨 말이었다. 하지만 아빠, 엄마, 오빠의 연이은 질문에 입을 꾹 닫았다. 그냥 파주 쇼핑을 좋아하는 여자 1이나 되자고 마음먹었다. 비슷한 류의 질문들을 엮어보자면 대충 이런 뜻이었다.

'그게 뭐 대단한 거라고'

아마 지금 내가 살고 있는 동네도 가족들의 눈에는 비슷한 느낌이지 않을까.

'도대체 여기에 뭐가 있다는 거야?'

그럼 나는 이렇게 말하겠지.

"자세히 봐봐, 하늘이 정말 아름답지 않아? 시시각각 변하는 색들이 다채로워. 이걸 가만히 올려다보고 있으면......"

그래, 가족들은 내 대답이 미처 다 끝나기도 전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테지. 그래서 말하지 않았다. 가족들은 여전히 내가 어디에 살고 있는지 모른다.

하나. 월요일에는 소설 공모전에 두 편의 단편소설을 보냈다. 마감일이 31일이라 아슬아슬했다. 지난 주말에는 글짓기를 좋아하는 친구와 소설 쓰기에 대한 이야기를 한참 나눴다. 결말을 확정 짓고 글을 쓰기 시작한다는 친구와 결말을 정하지 않고 쓰면서 자꾸만 비틀어버리는 나. 서로가 서로를 신기해했다. '그게 된다고?'의 반응. 친구는 소설을 쓰기 전에 인물들의 대화를 먼저 상상한다고 했다. 이점도 달랐다. 나는 대화보다는 상황과 감정이 먼저 떠오르던데. 결말을 정해놓고 쓰기 시작하면 중간의 서사가 답답하던데. 역시 사람마다 쓰는 방식이 다르구나 싶다가도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쓰는 게 대체 뭘까. 공모전에 제출할 때는 이 생각이 부쩍 더 짙어진다. 내가 그린 소설 속 세계는 날카롭고 공격적일 때가 많았으니까. 심사위원들은 내 글을 읽고 무슨 생각을 할까.

'얘는 이런 걸 글이라고'만 아니면 좋겠는데......

하나. 연인에게 종종 가족들 이야기를 한다. 보통은 가만히 듣기만 하던 그가 얼마 전, 내게 이런 질문을 했다. 혹시 자신의 가족들을 만나보고 싶지 않냐고. 궁금하지 않냐고. 그의 질문에 답하지 않고 역질문을 건넸다. 머뭇거릴 줄 알았는데 단호하고 간결한 답이 돌아왔다. 만나보고 싶다고. 궁금하다고. 말없이 그를 응시하다 힘겹게 한 마디 한 마디 이어갔다. 왜 궁금하냐고, 나는 당신의 가족들이 궁금하지 않은데, 당신은 내 가족들이 왜 궁금하냐고. 우리 둘의 사랑은 우리 둘이서만 했으면 좋겠다고. 나의 가족들은 평가에 익숙한 사람들이다. 더 깊은 대화로 들어가기도 전에 조건부터 따지는 사람들, 그 조건에 합당하지 않으면 말조차 섞지 않는 사람들. 내 모습을 보고 어떤 기대를 한 것이라면 나와는 많이 다를 거라고 말했다. 굳이 그런 걸 감당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이건 우리 둘의 이야기지 모두의 이야기가 아니니까. 가족들에게 허락을 구하거나 설득할 필요도 없다 여겼다. 특히 엄마한테만큼은 절대 그를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나를 함부로 대하듯 나의 연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그에게 함부로 대할 엄마의 모습이 눈에 훤했다. 강제로 교정하려들 엄마의 태도도 분명하게 그려졌다. 얼마 전에도 오랜만에 전화해서는 다짜고짜 나를 교정하려 드는 엄마에게 치를 떨었으니까. 화가 난 엄마는 나를 다그치며 물었다. 정말 가족들과 연을 끊고 싶은 거냐고. 혼자 살 자신 있냐고. 언성이 높아지는 엄마를 두고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자신감이 붙은 건지 공격적으로 재차 물었다. 나는 그때 만약에라는 가정을 빼고 진지하게 생각하던 중이었다. 정말 끝낼까? 영원히. 다시는? 나의 가족 서사를 들은 어떤 이들은 종종 조언이랍시고 자신의 경험 혹은 타인의 경험을 말한다. 너 정도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자신은 더한 것도 봤다고. 그럴 때면 나의 가족을 겪어보지도 않은 주제에 함부로 지껄여대지 말라고 세차게 말하려다 입을 닫는다. 이 말로 알아들을 상대였다면 애초에 그따위 말을 하지도 않았을 테지.

하나. 어릴 때부터 수예를 좋아했고 지금도 여전한데(종종 무언가를 만든다) 근래 들어 부쩍 관심이 더해갔다. 프랑스 자수, 사시코 자수 심지어는 재봉틀까지. 마음에 맞는 공방을 차근차근 경험하는 중이다. 그래서 지난 주말에는 재봉틀로 가방을 하나 만들었다. 선생님은 팔아도 될 정도로 잘 만들었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지만 쑥스러웠다. 나는 그저 내 손으로 직접 만든 가방을 들고 다닐 수 있다는 게 신기할 뿐이었다. 과거 나의 전임자도 취미로 시작한 미싱에 재미가 들려 직장을 그만두기까지 했다. 공방을 이곳저곳 체험하며 사장님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이와 비슷한 사례가 많았다. 본업은 따로 있었는데 재미로 시작했던 자수가 직업이 되어 어느새 공방을 차리고 있었다는 이야기들. 자수를 놓으면서 그 이야기를 가만히 듣다 보면 세상일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싶었다. 하지만 건너건너 들려오는 전임자 소식에 현실을 직시하기도 했다. 그는 다시 돌아와 이 직군에서 일하고 있었다.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 경제적인 것까지 고려하다 보면 결정은 의외로 단순할지도. 그렇게 어른이 되어가는 건가.

하나. <먼저 온 미래>를 읽으며 계속 이 단어가 떠올랐다. '수능'

바둑을 기술로 접근하는 것과 수능으로 명석함의 기준을 세우는 것. 괜찮은 걸까(옳은 건지 그른 건지는 잘 모르겠다만). 교육 제도에 대한 불만은 어릴 때부터 계속 있었다. 다들 주어진 시간 안에 정답을 찾는데 혈안이 된 사람들 같았다. 누가누가 더 빠르고 정확하게 문제를 푸는지 그 기술력을 익힌 사람이 승리자! 이거야말로 교육 시.장. 예술을 기술로 접근하는 것도 다르지 않아 보였다. <킬러 문항 킬러 킬러>라는 책을 읽을 때도 답답한 마음은 비슷했는데, 한국의 교육 제도는 이 나라가 한 번 꺼졌다 켜지지 않는 한 변화는 어렵겠지?

하나. 부당하거나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상대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조리 있게 설명할 수 있는 것도 하나의 능력이란 생각이 든다. 무조건 "억울해!"만 소리칠 게 아니라 무엇이 억울한지. 어떻게 개선되었으면 좋겠는지. 정확히 바라는 바가 무엇인지. 나는 그걸 꽤 잘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이번에는 실패한 것 같다. 요목조목 따지고 들까 하다 마음을 접었다. 어떤 문제는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만 한다. 다만 어떤 문제는 상대에게 인식시키는 과정부터 힘이 빠진다. 이건 상대가 그 문제를 문제라고 인식하지 못해서이기도 하지만 더 맥 빠지는 상황은 대충 이런 거다. 상대가 그 문제를 문제라고 절대 인식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일 때. 그럼 나는 불을 지필까 말까 고민에 빠진다. 그들은 나를 악성 민원인으로 분류할까? 바뀐 시행령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그들의 태만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내가 그 법령과 개정안을 하나하나 짚어줘야 할까? 머릿속이 복잡하다. 새로 이사한 동네는 좋았지만 '구'가 엉망인가. 일처리를 왜 이렇게 힘들게 하는 건지 그저 답답할 뿐이다.

하나. 감당하기 벅찬 일이 생겨도 도움받는 게 낯설어 등짐 지듯 모든 걸 혼자 이고 갈 때가 많았다. 연인 또한 나의 이런 기질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는 '원치 않는 호의'를 건네지 않는다. 그게 사람을 얼마나 불편하게 만드는지 그는 안다. 내 표정에 근심이 생기면 "도와줄까?"라고 묻지 않고 "혹시 내 도움이 필요하다면 참지 말고 꼭 말해줘"라고 한다. 그의 섬세함이 좋다. 좋은 남자 혹은 헌신적인 남자라는 허울 좋은 망상에 취해있지 않은 남자라 좋다. 도움이랍시고 원치도 않는 호의를 강제로 쥐여주며 허세를 부리던 이들의 오만함은 정말이지 지긋지긋하다. <사랑이 한 일>에 이 마음을 대변한 문장이 촘촘히 담겨있어 어찌나 반갑던지.

하나. 추위를 많이 타는 편인데도 이번 여름은 지독하게 덥다. 어딜 가도 에어컨 바람이 한가득이라 더웠다 추웠다 정신이 하나도 없다. 자연 바람은 출퇴근길 산책에서나 가능하다. 나의 출퇴근길 메이트는 <암과 책의 오디세이>, <장강명의 인생책>, <YG와 JYP의 책걸상>, 그리고 자연의 소리다. 가을이 얼른 왔으면 싶다가도 그래, 여름도 여름 나름의 매력이 있지 라고 애써 낙관한다.

머릿속에 생각이 많아 시끌시끌하다. 막상 쓰고 나니 이런 생각이 든다.

'아직도 쓰고 싶은 말이 많아'

상대방
상대방
두근두근 그믐밤

목소리에는 한 사람의 고유함이 담겨있다. 목소리가 닮은 사람은 봤어도, 목소리가 같은 사람은 본 적이 없다. 선천적으로 고운 목소리를 가진 사람도 있겠지만, 후천적으로 발성을 가다듬은 목소리도 있다. 후자의 경우 단순히 듣기 좋은 음성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한 사람의 세월과 흔적이 켜켜이 쌓여 자신만의 소리를 창조하는 과정이라 생각한다. 때로는 고요하고, 때로는 날카로운 그 잔잔한 파동이 아름다운 속삭임을 띄기도 한다. 그만큼 목소리라는 건 납작하게 이렇다 저렇다 말하기 어려운 울림이다. 누군가에게는 꾀꼬리처럼 청아하게 닿는 소리가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귀를 쨍쨍 울리는 불편한 소리로 닿기도 할 테니까.

나는 오감이 골고루 민감한 편인데, 그중에서도 나를 가장 자극하는 건 청각이다. 남들이 듣지 못하는 미세한 소리(오컬트 아니고!)조차 잘 잡아내서 사는 게 괴로울 때도 많지만 좋은 점 또한 못지않게 많다. 우선 섬세한 소리가 주는 아름다운 선율을 삶에서 자주 포착한다. 누군가가 남기고 간 따스한 목소리의 잔상이 온종일 귓가에 맴돌아 마음이 따뜻해지기도 한다. 반복적으로 귀를 긁는 자극과는 또 다른 세상, 소리가 주는 향연. 그 풍요로움 안에 잠겨버리는 안온한 시간.

목소리에 대한 감상을 왜 이토록 길게 늘어놓고 있나 싶은데, 얼마 전에 있었던 낭독모임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다. 모임이 끝난 시간은 대략 밤 10시쯤. 평소라면 이미 잠자리에 누워있을 시간이지만 그날은 달랐다. 모임이 끝난 후에도 그 감상이 잔잔히 남아있어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준비하느라 부산스러웠던 하루가 천천히 저물어가고 있었다.

온라인 모임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거기다 그믐의 '달밤에 낭독' 모임은 지난번 <우리는 언제나 희망하고 있지 않나요> 이후로 처음이었다. 이번 책은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로 진행됐다. 희곡이다보니 순번대로 돌아가면서 낭독하는 게 아니라 역할을 나눠서 연기를 해야 한다는 점이 달랐다. <맥베스>라는 작품은 워낙 명성이 자자해서 대략적인 줄거리는 알고 있었지만 제대로 읽어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참에 제대로 읽고, 진지하게 낭독해보자는 마음으로 신청했다. 모임 날이 다가올수록 두근두근 긴장감이 더해갔다.

얼마 전에는 6년 만에 처음으로 이사를 했다. 전에 살던 곳과 달리 자연을 느낄 수 있는 곳이라 좋았다. 구성원도 가족단위가 많아 길에서 아이들이 등교하는 걸 본 지가 도대체 얼마 만인지. 눈앞에 펼쳐지는 생경한 풍경들이 여전히 낯설다. 물론 좋은 의미로 말이다. 집도 마찬가지다. 고작 한 평수 넓어진 건데 체감되는 차이가 컸다. 그 과정에 이번 모임이 있었다. 모임 당일에는 혹시 늦을까 봐 시간 연차까지 써가며 평소보다 일찍 퇴근하고, 부랴부랴 집으로 향했다. 편안한 자리에서 모임에 참석하고 싶었는데 막상 노트북을 둘 곳을 찾다보니 뭔가가 다 애매했다. 이전에 살던 곳과 가구 위치가 달라져서 한동안 우왕좌왕 갈피를 잡지 못했다.

이렇게 두면 이게 불편하고, 저렇게 두면 저게 불편하고. 머릿속으로 이것저것 구상하다 결국, 집에서 가장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노트북을 올려둔 곳도 책상이 아닌, 간이 사다리였다(화면상으로는 어떻게 보였는지 모르겠지만). 처음에 이 구도를 상상했을 때 '괜찮나?' 싶었는데, 막상 놓고 나니 굉장히 편했다. 사다리 제일 위 칸에는 노트북을, 그 아래에는 책과 마우스를 두니 공간이 딱 맞았다. 모임이 시작되기 전까지 시간이 조금 남았길래 3막과 4막을 다시 훑어봤다. 인물들의 이름은 여전히 입에 붙지 않았지만 괜찮았다(아니,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8시 반 땡! 모임이 시작됐다. 오랜만에 뵙는 반가운 분들이 눈에 쏙쏙 들어왔다. 마음에 잔잔한 파동이 일었지만 티 내지 않고 모임에 집중했다. 즉석에서 역할을 착착착 정해주시는 대표님의 진두지휘 아래 달밤의 낭독은 무르익어갔다. 어쩌다 첫 시작이 내가 되는 바람에 쑥스러워 쭈뼛거리고 대사를 자꾸 더듬었는데, 뒤에서 열연해주시는 분들 덕분에 서서히 자신감이 붙었다(고 생각했다). 극이 절정으로 갈수록 몰입감도 배가 됐다. 중간중간 채팅창에 올라오는 농담들에 웃음 짓기도 했지만, 여러 가지를 동시에 하는 건 여전히 어렵다. 책에 코를 박고 대사를 따라가기 바빴고, 갑작스럽게 호명된 이름에 깜짝 놀라 내 역할인지 확인할 겨를도 없이 대사를 이어가기도 했다. 그야말로 즉흥의 연속, 연속, 연속!

그래서 모임이 좋았다는 거냐, 별로였다는 거냐, 물으신다면 당연히 전자다. 확실한 전자. 그리고 이건 지극히 사적인 욕심이지만, 건강한 새섬 대표님의 모습을 다시 뵐 수 있어 좋았다. 부드러운 발성과 1인 다역, 진행까지! 요즘 <암과 책과 오디세이>를 들으며 대표님을 향한 팬심이 튼튼해져가던 터라 반가운 마음도 배가 됐다. 거기다 맥베스 부인 역할을 능숙하게(과연...?) 소화하신 강명 작가님 덕분에도 많이 웃었다. 사실 작가님은 이번 서울국제도서전 북토크에서 뵐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동아시아에서 주관하는 출간 기념 북토크에 운 좋게 당첨되면서 휴가까지 내고, 기대감을 무럭무럭 키워가고 있었는데, 얼리버드 단계에서 입장권이 매진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는 바람에 초대권은 있지만 입장권이 없는 황당한 일이 생겼다(정작 일요일 표는 예매하고, 나 바보인가...). 결국 북토크는 참석하지 못했고(내 불찰이지 뭐) 그 점이 못내 아쉬웠는데 낭독모임 덕분에 뵐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오매불망 기다렸던 신간 <먼저 온 미래>는 다행히 일요일에 서울국제도서전에서 구입했고 요즘 푹 빠져 읽는 중이다. 읽으면서 이런 생각도 잠깐 들었다. 나는 작가님의 소설도 좋아하지만, 르포르타주를 쓸 때의 작가님은 뭐랄까... 무언가를 마구 휘몰아치는 느낌이랄까? 아껴뒀던 필살기를 짠! 하고 꺼내드는 느낌(표현이 별로다. 정수라고 해두자).

6월 모임이 성황리(?)에 마무리되고 '모집 중' 탭에는 다음 달 그믐밤 공지가 올라왔다. 7월의 그믐밤도 '달밤에 낭독' 모임이었다. 이번에는 셰익스피어의 <리어왕>. 옳다구나! 싶어 날짜를 확인했는데, 아뿔싸. 몇 안 되는 나의 야근과 겹치는 날이었다. 예정된 회사 일정을 바꿀 수는 없어 이번 모임은 참석이 어려웠지만 괜찮다. 꼭 이번만 기회가 있는 건 아닐 테니까. 6월에 좋은 경험을 했고, 종종 이렇게 참여할 수 있다는 사실이 나를 또 설레게 했다. 그때는 이번보다 조금 더 자신감을 갖고 열연을 펼칠 수 있을까. '맥베스와 쪼무래기들'이 자꾸 떠오른다. '맥베스와 풋내기들'도. 생각하니까 또 웃음이 난다(당시에는 폭소했었다).

다음 번에는 쪼무래기, 풋내기가 아닐 수 있을까. 아닐 수 있기를. 부디.

고운
고운
문학은 선을 넘는다

오래 기다려왔던 앤솔러지를 드디어 만났다. 작년 여름 Beyond Beer Bookclub 완독파티에서 장강명 작가님과 소향 작가님을 통해 이 책의 탄생 비화를 먼저 접했던 기억이 난다. 장강명 작가님이 '작가의 말'에 남겨주신 글처럼, 처음 그 주제를 제안했을 때, 자리에 함께 계셨던 출판사 대표님이 펄쩍 뛰어오르셨다는 일화도 담아서. 다만 그 주제가 무엇인지는 알려주지 않으셨고 그래서 더 궁금했다. 대체 어떤 주제이길래, '대표님이 앉은 자세 그대로 30센티미터쯤 공중으로 솟구치셨'을지 말이다.

주제의 비밀이 밝혀진 건 올해 4월이었다. 출간된 책의 제목은 《우리의 연애는 모두의 관심사》. '금지된 사랑'을 주제로 기혼인 네 분의 작가님이 함께 한 앤솔러지다. 네 편의 소설 중 장강명 작가님의 '투란도트의 집'을 읽으면서는 익숙한 이름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반가운 마음이 올라오기도 했다. 소설 속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청춘시리즈가 내가 다녀왔던 BBB 완독파티의 지정도서였기 때문이다.

(어? 근데 우리 갓파스시에서 만나기로 했...)

'금지된 사랑'이라는 주제로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궁금했다. 장강명 작가님을 제외한 세 분의 작가님 글은 처음 읽어보는 터라 더 그랬는지도. 한 편 한 편 작품을 읽을 때마다 '우와'하고 탄성이 터져 나오기도 했고, 지하철에서 읽다가 조용히 책을 덮기도 했다(수위가...). 정작 옆에 앉은 승객들은 내가 무슨 책을 읽는지 관심조차 없는데, 나도 모르게 괜히 눈치를 보게 됐다. 심지어 책 뒤표지에 있는 이 문구 "나는 그녀에게 살아 있는 딜도조차 아니었다."는 자꾸만 손으로 그 부분을 가리게 만들었다. 문장이 부끄러웠다는 게 아니라 누군가가 나를 오해할까 봐, 라고 해명을 해본다.

어떤 이는 자신이 불륜인지도 모르고 불륜을 저지른다. 또 어떤 이는 뒤늦게 찾아온 진실한 사랑에 온몸을 던지며 진심을 다했지만 상대는 다른 마음을 품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의 주제는 불륜이 아닌 금지된 사랑이다. 내가 상상하던 생명체의 사랑이 아닐 수도 있고,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해 배신을 이어가기도 한다. 모든 게 다 사랑이면서 사랑이 아니다. 책을 덮고 생각했다. 사랑이란 게 대체 뭘까. 나에게 사랑이 너에게 사랑이 아니라면? 나는 혼자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그 마음은 또 얼마나 아플까, 슬플까.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일까. 읽으면서 생각했다. 작가님들의 이야기는 저마다의 색이 있구나, 상상을 뛰어넘는구나. 그리고 다들 진지하구나. 그 진지함이 좋았다. 가볍지도 외설스럽지도 않았다(다만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읽을 때는 심장이 다소 쫄깃해진다). 기대했던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좋았다.


김근태도서관에서 북토크가 열린다는 소식에 설레는 마음을 안고 재빠르게 신청버튼을 눌렀다. 책도 좋았지만 오랜만에 장강명 작가님의 북토크에 참여할 수 있다는 사실이 몹시도 나를 설레게 했다. 그러다 갑작스러운 비보를 전해들었다. 벽돌 책 모임방에서 YG님을 통해 소식을 접하자마자 놀란 마음을 꾹꾹 누르며 아이디조차 없던 페이스북에도 부랴부랴 가입했다. 정확한 상황을 알고 싶어 마음이 급했고 읽자마자 화들짝 놀라 억장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며칠 전까지 이 공간에서 대표님의 블로그에 글이 올라오는 걸 봤는데, 세상에 이게 다 무슨 일인가 싶었다. 무엇보다 두 분의 상황이 너무 걱정됐고, 내가 할 수 있는 게 그저 응원하며 기도하는 것뿐이라는 게 마음 아팠다. 평소 하지도 않던 SNS를 주기적으로 살피며 어떤 소식이든 올라오길 기다렸고, 작가님을 통해서도 YG님을 통해서도 조금이나마 희망적인 소식이 전해지고 있었다. 정말 다행이었다. 김근태도서관에서도 문자를 받았다.

'5월 3일 북토크에 함께하기로 했던 장강명 작가님은 불가피한 개인 사정으로 부득이하게 참석하지 못하게 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다만, 다른 참여 작가분들과의 북토크는 기존 일정대로 원활히 진행될 예정이오니 참여자분들의 양해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북토크 당일이 됐다. 비록 장강명 작가님은 함께 하지 못하셨지만, 세 분의 작가님의 이야기를 듣고자 김근태도서관으로 향했다. 도서관으로 향하는 길에는, 처음 이 앤솔러지가 기획된 '막둥이네 만남의 장소'를 직접 눈으로 보고 싶어 요리조리 둘러봤는데, 실패. 역시 한 번 길치는 영원한 길치다?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중요한 건 도서관으로 향하는 길이 꽤 쓸쓸했다는 것이다. 우중충한 날씨도 한몫했겠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두 작가님의 부재 때문이었다. 작년 4월, 김근태도서관에서 북토크를 진행하셨을 장강명 작가님과 정아은 작가님 말이다.

김근태도서관은 아담하지만 구석구석 정성스러운 인테리어 감각이 돋보이는 공간이었다. 가지런히 놓여있는 책상과 은은한 조명, 다양한 큐레이션의 서가 등 이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생길 것만 같았다. 북토크가 진행되는 다목적 강당의 분위기도 좋았다. 들어서는 순간 왠지 모르게 포근한 느낌이 나를 훅 덮쳐왔는데, 너무 포근했던 탓인지 북토크 중간중간 고개를 떨구기도 했다(요 근래 잠을 제대로 못 자서, 라는 핑계를 대본다). 진행은 소향 작가님이 직접 하셨고, 차무진 작가님과 정명섭 작가님은 이번 북토크에서 처음 얼굴을 뵙게 됐다. 이번 앤솔러지를 읽으면서 소향 작가님의 '포틀랜드 오피스텔'은 2인칭 화법이라는 점이 인물과 나의 간격을 좁히는 것 같아 친근했는데, 특별한 이유가 없었다는 점이 더 놀랍기도 했다. 작품을 집필하실 때도 글을 쓰면서 작품을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가 자신을 이끌어간다는 표현을 해주셨는데, 그 말씀도 좋았다. 소설은 창작의 영역이지만, 그 안에서 등장인물들과 함께 호흡하는 느낌이라 더 그랬는지도.

차무진 작가님은, 장작가님이 종종 「여우의 계절」을 극찬하셔서 어떤 분이실지 궁금했다. 아니다. 더 정확히는 '빛 너머로'를 읽으면서 충격을 여러 번 받았던 터라 더 궁금했던 것 같다(이분은 대체...). 원래는 그 작품을 쓰기 전에 다른 작품을 구상하셨는데, 그 이야기가 마치 일본의 야동(이 표현이 맞았나?)같아서 마음을 접었다고 하셨다. 그 말씀 덕분에 한참을 웃었다. 근데 '빛 너머로'도 만만치 않았다. 중반부를 넘어갈수록 '아니, 이걸 대체 어떻게 마무리하시려나'싶어 걱정스러울 정도였다. 하지만 위태로웠던(?) 몇 번의 고비를 지나 매끄러운 결말이 이어졌다. 작가님은 문학에는 경계가 없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선을 넘을 수 있어야 한다고, 아니 선(한계)이 없어야 한다고. 내가 제대로 이해한 게 맞나 싶어 갸우뚱했지만, 여전히 잘 모르겠다. 옳고 그름을 말하는 게 아니라 나의 역치가 어디까지인지 아직 가늠하지 못하겠다. 어서 빨리 『작가와 작품을 분리할 수 있는가?』를 읽어야겠다.

북토크를 마치고는 손을 들고 마지막 질문을 건네기도 했다. 이 책을 쓰시면서 어떤 마음이 드셨을지 궁금했던 것일까. 공통 질문에 대한 세 분의 답변이 조금씩 달랐지만 그 의견들 모두에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나였다면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과연 자신할 수 있을까. 자신할 수 없기 때문에 더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됐다(마음이 하나인 사람이 좋다). 세 분의 작가님께 사인도 받았다. 특히 소향 작가님과는 그믐 아이디를 나누며 추억을 회상하기도 했는데 기억해주셔서 감사했다. 그믐을 통해 책으로만 만났던 작가님들을 이렇게 직접 뵙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건 과분한 행복이 아닐까 종종 생각한다. 그래서 그믐은 소중하고 "우리가 사라지면 암흑이 찾아온다"는 그믐의 구호처럼, 그믐이 사라지면 또 하나의 독서생태계가 내게서 사라질 테지. 생각만으로 아리다. 사라져가는 동네 서점들을 보며 마음이 헛헛했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아픔일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김새섬 대표님과 장강명 작가님이 이 시기를 잘 이겨내셨으면 좋겠다. 시간이 많이 흘러 "저희 두 사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로 시작되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위기와 시련이 있었음에도 그 시기를 묵묵히, 건강하게 잘 이겨내고 지금의 이 자리에 있습니다, 라는 이야기를 꼭 듣고 싶다. 건강한 모습의 대표님을 그믐에서 다시 만날 수 있기를 소망하며, 이 공간이 대표님의 유일무이한 색을 잃지 않도록 잘 지켜내고 싶다.

단 세 사람이라도.

나는
나는
사랑의 방정식? 아니, 그냥 내 방식

<사랑의 생애>에서는 사랑의 '자격'에 대한 관념이 여러 번 등장한다. 흔히 말하는 '나는 사랑할 자격이 없어'와 비슷한 맥락. 근데 이 자격이라는 건 실은 이런 게 아니었을까. 나의 자격이 아니라, 실은 너의 자격. 그러니까 '네가 사랑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지 증명해 봐'같은 것 말이다.


나의 지난 연애들을 복기해 보면, 보통 상대(A라고 가정해 본다)가 나를 사랑한다고 말할 때, 나는 이런 말을 하고 싶었다. 'A는 나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나를 사랑하고 있(다 생각하)는 A, 그 자신의 모습을 사랑하는 것이다'라고. 하지만 A들은 늘 말한다. 나의 어떤 모습도 다 사랑할 수 있을 만큼 자신의 사랑은 위대하고 특별하다고, 자신이 나를 얼마나 아끼고 있는지 알고 있냐고. 자꾸 확인받고 싶어 하고('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칭찬받고 싶어 한다('봐봐, 내가 너를 이만큼이나 사랑한다니까? 나는 이런 것도 한다니까?').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다.

'아니, A 네가 사랑하는 건 내가 아니라니까'

로맨티스트를 가장한 자신의 모습에 잔뜩 도취되어 있을 뿐이라는 걸 A들은 모른다. 내가, 자신이 상상(기대)했던 모습과 조금이라도 다른 행동을 취하면 절대 받아들이지 못할 거면서(고작 그 정도면서). 내가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아도 (A 자신이 주는 사랑은 너무나 위대해서), 나를 온전히 다 받아들일 수 있을 것처럼 말한다(그렇다면 A, 네가 과연 나를 어디까지 수용할 수 있는지 내가 한번 보여 줘?). 나는 그게 싫었다. 더 나아가서는 A들이 제발, 그걸 좀 깨닫길 바랐다. A들뿐만 아니라 그 누구였어도, 나에게 호감을 갖기 시작했다면 A만큼의 사랑은 충분히 쏟아낼 수 있을 거라고. A들이 나에게 쏟아붓는 사랑이 특별한 게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래, 나는 여기서 '쏟는다'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건 일종의 과식 같은 것이다. A들은 내가 바란 적도 없는 사랑(이게 과연 사랑이 맞을까 싶다만)을 자기들 감정대로 마음껏 쏟아내고는 '아 이토록 다정한 나'라는 타이틀로 자신을 묶어버린다. 여기서 내가 원하고 말고는 그들에게 중요하지 않다(적어도 내 눈에는 그랬다). 그들은 나를 하나의 인격체가 아닌 소유의 대상으로 보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 A들은 되레 떼를 쓴다(너도 내가 너에게 하는 것만큼 사랑을 줘! 사랑을 달라고!!). 이 굴레가 지긋지긋했다. 내가 남자를 만나는 건지, 애를 키우는 건지. 조금 더 성숙한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는 건지.

그리고 A들이 유독 자주 하는 말이 있다.

"네가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처음에는 그 말을 믿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차차 알게 된다. A들은 내가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말(은)하면서 정작 내가 행복할 만한 걸 하지 않는다는걸. 입으로만 내 행복을 바란다고 잔뜩 떠들어놓고는 앞서 말한 유치한 행동을 반복한다(왜 자꾸 삐지는 건데, 사랑을 구걸하는 건데). 이건 대체 누구를 위한 행복인가? 적어도 나는 아닌 것 같은데 말이다. A들 스스로를 위한 행복이 아니었을까? 나는 그게 나를 기만하는 것이라 여겼다. 마치 부모가 하는 '다 너 잘 되라고 하는 말이야'처럼, 결국은 본인들이 좋아서 했던 행동을 그럴듯하게 포장해 나에게 마구잡이로 던지는 식이었다. 그래 놓고는 '아 이토록 다정한 나'에 또 다시 도취되고(윽). 헤어지자 말하면 "내가 널 얼마나 사랑했는데, 억울해!"를 외치거나 무섭게 돌변한 모습을 보인다. 나를 그렇게나 사랑했다면서 그때는 나에 대한 예의고, 존중이고, 모든 걸 잃어버리면서 말이다(아니, 어쩌면 이게 그들의 진짜 모습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다 이승우 작가의 <사랑의 생애>에서 나의 이 마음을 너무도 잘 설명하는 문장을 만났다.

우리는 때로 자기의 사랑을 얻거나 지키기 위해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의 (이미지의) 훼손을 감수한다. 그렇게 해서라도 사랑을 내놓지 않으려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사랑의 크기를 보증한다는 관념이 있는 것이 사실이고, 이 관념을 전혀 근거 없다고 할 수도 없다. 이런 관념의 배후에 사랑의 이기심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지. 사랑의 '이기심'이 아니라 '사랑'의 이기심이라는 사실을 아는지. 지키려고 하는 것은 '그, 또는 그녀'의 사랑이 아니라 그, 또는 그녀의 '사랑'이다.
사랑을 내놓더라도 사랑하는 '사람'의 이미지의 훼손만은 막으려는 사람은 사랑의 크기를 묻는 질문 앞에 놓인다. 당신의 사랑은 그 정도인가? 사랑이 그렇게까지 크지는 않기 때문에, 즉 연인의 이미지를 걱정할 여유를 부릴 만한 정도에 불과하기 때문에 사랑을 내놓으려고 하는 것은 아닌가? 사랑이 그래도 되는 것인가? 당신의 큰 배려는 당신의 사랑의 보잘것없음을 감추기 위한 포즈가 아닌가? 배려는 이기심을 넘지 못한다. 배려보다 이기심이 더 큰 사랑의 증거로 간주된다. 사랑하기 때문에 떠난다는 수사가 이 세계에서 위선과 변명의 표현으로 인식되는 이유이다.


어쩌면 이게 과거에 만나왔던 A들과 지금 만나고 있는 연인의 근본적인 차이가 아닐까 싶다. 그는 '무조건 나를 사랑할 수 있다는 공수표를 날리는 게 아니'었고, 내가 갖춘 어떤 자격 '때문에' 나를 사랑하는 게 아니었다. 나라는 인간을 제대로 보고 있다 여겨졌다. 본인의 사랑(만)을 맹목적으로 쏟아내는 자칭 사랑꾼 A들과는 달랐다. A들은 '나라는 존재 자체'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나의 어떠한 행위와 모습'으로 인해 자신들의 감정이 깊어지고 있음조차 구분하지 못했으니까. 그 차이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음에도 말이다. 물론 연인과의 인연 또한 어디까지일지는 알 수 없다. 장담할 수도 없고, 장담해서도 안 된다. 그저 현재에 충실할 뿐이다.

지난 주말에 있었던 독서모임에서 우리의 토론은 활활 타올랐지만 그 누구도 결론을 내리지는 못했다. 현재 진행형 안에서 스스로의 답을 찾고, 또 찾을 뿐이었다. 생소한 직업군 덕분에(이 직업을 가진 사람도 독서모임에 나올 수 있구나) 사랑 이야기에서 범죄자와 피해자, 피의자, 취조 등의 단어들이 시도 때도 없이 등장했지만 덕분에 많이 웃었다. 누군가는 간통죄에 열을 올렸고, 결혼의 흔적이 왜 꼭 남아야 하냐며 격렬하게 외치는 이도 있었다. 그런 건 한 번도 (중요하게) 생각해 본 적 없는데,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 싶어 가만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랑이라는 게 쫓고 쫓기는 관계일 수 있다는 것도. 결국 다 저마다의 이야기가 있구나 싶었다. 그럼 나는?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각자의 삶은 각자가 책임지고, 올곧게 선 두 사람이 만나야(만) 건강한 관계가 가능하다고 말하는 내 목소리에 다소 힘이 빠진다. 내가 그리 건강한 사람이 아닌 것 같아서. 말을 하면 할수록 병든 내가 느껴져서. 과거에 만난 어떤 상대에게는 생각할 시간을 달라 말하고, 돌아가지 않았던 적이 있다. 방심(?) 했던 상대는 나의 일방적인 선택에 불같이 화를 냈지만, 더더욱 돌아갈 수 없었다. 이별을 고하는 자는 왜 자꾸 욕을 먹는 것일까. 합의를 구하는 과정이 아니지 않나? 이해할 수 없었다.

사랑에 관한 책을 이야기할 때, 누군가는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을 말하고, 누군가는 알랭 드 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를 말했다. 양귀자의 <모순>을 말하기도. 그나마 가장 최근에 접한 사랑 소설은 이혁진 작가의 <사랑의 이해>다. 그럼에도 나는 <사랑의 생애>가 가장 좋았다. 재작년에 읽고 이번에 다시 읽었는데, 여전히 좋았다. 말맛이 살아있달까. 한 줄로 충분히 끝낼 수 있는 문장을 몇 장에 걸쳐 풀어내는, 그의 집요하고도 집착스러운 문장들이 너무나 매력적이다. <사랑의 생애>를 읽으면서 형배는 오만했고, 영석은 싫었다. 선희는 답답했고, 준호는... 하, 말을 말자.

누군가
누군가
좋아하는 동네가 생겨도

떠날 준비가 되어가는 것 같다. 조금씩 선명해지기 시작한다. 최종 후보로 두 곳을 정했고, 그중 한곳을 오늘 다시 다녀왔다. 지난번보다 더 꼼꼼하게 동네를 살폈다. 처음으로 독립했던 곳에서 놓쳤던 것들을 이번에는 놓치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중요한 것이 나에게는 걸림돌이 되지 않다는 걸 알았고, 누군가에게는 별것 아닌 것이 나에게는 중요하단 것도 알았다. 나에게 가장 중요한 건 치안이었고, 그다음으로 중요한 건 동네의 분위기였다. 역세권이 중요하다고들 하는데, 오히려 난 반대. 역에서 멀어야 삶의 질이 올라가는 사람이었다. 역세권은 보통 소란스럽기 마련이고, 그 소란이 나에게 미치는 파장이 컸다. 지금 살고 있는 곳도 역세권이고, 지하철 한 번으로 30분 정도면 회사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지만, 내 출근 시간은 1시간 반을 훌쩍 넘긴다. 새벽에 집에서 출발해 이곳저곳을 실컷 산책하다가 여유롭게 회사로 향하기 때문이다. 그런 나에게 역세권이라니, 웃음이 난다.

하염없이 걸어도 좋으니 조용한 곳을 원했다. 안전하고 높은 곳을 원했다. 평수가 넓을수록 좋다고들 하던데, 나는 이것도 반대. 물욕이 없는 편이라 짐도 별로 없었고, 청결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편이라 집이 넓으면 그만큼 내가 신경 쓸 부분이 많아져서 싫었다. 딱 적당한 크기의 쾌적한 공간이면 족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곳도 6평이지만 부족하지 않았다. 이 작은 공간을 쓸고 닦는 일만 해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주변에 이 말을 하면 "아니, 그 공간에 치울 게 어딨냐"고들 하던데, 글쎄다. 나는 이것저것 많던데, 해도 해도 끝이 없던데? 그 덕분일까. 얼마 전에 집을 보러 온 사람들은 공인중개사와 함께 집에 들어왔다가 깜짝 놀랐다. 새집 같다고, 6년을 살았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고. 이 집은 따로 도배를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벽지마저 그대로라고. 정말 그랬다. 남의 것이든 나의 것이든 나는 모든 걸 조심조심 아껴 쓰고 단정하게 정리했다. 청결함이 삶의 질을 올린다고, 그것만 잘 챙겨도 아프지 않을 수 있다고, 내 스스로를 다독일 때가 많았다. 누가 보든 보지 않든 내 손이 닿는 곳은 정갈하게 유지하는 걸 좋아했다. 이 집도 서서히 누군가의 집이 되어갈 준비를 하고 있으니 이제 내 차례였다.

내 마음속 1순위도 지금 살고 있는 곳처럼 서울 끝자락이다. 서울 끝에서 끝으로의 이동이라, 또 웃음이 난다. 그래도 가격은 다르고, 그동안 열심히 모은 돈이 있으니까, 이 정도는 괜찮지 않나 생각했다. 모든 일정이 착착 맞아떨어지면 좋으련만, 임대인이 만만치 않은 사람이라 이래저래 머리가 복잡하다. 돈을 받고 돈을 주고, 계약서대로 이행만 하면 되는 이 단순한 일을 왜 자꾸 안 하려고 할까. 이해할 수 없었다. 약속이 정해졌으면 지키는 게 당연한데, 이상한 꼼수를 부리는 바람에 되레 탈이 난다. 일부러 그러는 건가, 사람들 심보가 왜 이래? 가만히 생각하다 그냥 마음을 비웠다. 집이 없어 서럽지는 않았다. 어차피 나는 혼자 살 사람이라 집을 사고 싶지는 않았다. 계속 이렇게 떠도는 삶이 오히려 나에게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세상에서 정답이라고 외쳐대는 걸 무작정 따라하지 않겠다는 게 아니라 내 삶은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움직이고 싶었다. 무언가를 계속 더하는 것보다 소거하는 삶이 좋았다. 몸은 조금 고단할지라도 마음은 편했다.

이번에도 그랬다. 이사를 준비하면서 그동안 차곡차곡 모아둔 재정 상황을 다시 싹 정리하고, 통장을 쪼개고, 씀씀이를 더 줄였다.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돈을 쓰고 싶다는 생각마저 생기지 않았다. 모이는 족족 통장에 넣었고, 쓰는 것에 비해 모으는 것이 많아지니 돈은 더 쌓여갔다. 그래도 불안했다. 늘 대비하고, 대비하고, 또 대비해도 놓치는 게 있을까 봐 전전긍긍하는 성향은 여전하다. 마음에 큰 짐을 빨리 내려놓고 싶다. 그럼에도 나는 괜찮다. 모순적이지만 정말 그렇다. 이 모든 걸 누군가의 도움 없이 오롯이 혼자 해나가는 게 생각보다 즐겁다. 내 스스로가 대견하다고 해야 하나. 여자 혼자 이 모든 걸 해도 괜찮나, 가끔 걱정이 올라오지만 에이 모르겠다. 세상에 이상한 사람도 많지만, 좋은 사람도 많으니까. 큰 계약도 이삿짐을 옮기는 것도 여자 혼자 한다고 뭐 별일 있겠나 싶다(다들 그러고 살지 않나?). 신기한 건 지금 살고 있는 곳과 이사가려는 곳을 한 번에 오갈 수 있는 버스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걸 오늘 처음 알았다. 그 동네에 갔다가 익숙한 버스 번호를 보고 나서야 알았다(오잉? 너가 왜 여기 있니?).


내 마음속 1순위 동네는 우선 한적하다. 버스여행을 좋아해서 서울 이곳저곳을 무작정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발견한 곳. 멍하니 창밖을 보다가 내가 상상하던 동네의 모습을 보고 다급하게 하차벨을 눌렀다. 그렇게 무작정 내려서 혼자 가만히 걷다가 부동산을 알아보고 '대박!'이라고 외쳤던 곳. 도로도 넓고, 공원과 산책로도 많다. 역에서 거리가 좀 있는 편이라 상점도 적고, 근처에는 초등학교와 아파트 단지가 띄엄띄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들 표정이 밝다. 편안하고 안정돼 보인다고 해야 할까. 지금 살고 있는 곳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표정들이었다. 이곳은 유흥업소와 모텔이 즐비해있어 퇴근길이 위태로울 때가 많았다. 비틀거리는 취객을 만나는 건 이제 익숙하다. 길거리에 앉아서 행인들(특히 여성들)을 위아래로 하나하나 훑어대는 시선들도. 그 끈적하고 더러운 시선을 탁탁 털어내고 도망치듯 뛰어다닐 때도 많았다. 계속 따라오는 남자 때문에 한 시간 동안 사람이 많은 의자에 멍하니 앉아있다가 집에 들어간 적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내가 괴물로 변했으면 싶었다. 그들의 혼탁한 눈빛이 나를 오염시키는 것 같아 그들을 지나치고 나서도 한동안 불결하게 느껴졌고 온몸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느낌마저 들었다. 그 더러움을 잊고자 집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입고 있던 옷을 탈탈 털어내고 소리치듯 역겨움을 토해내며 온몸을 구석구석 씻어냈다. 그럼에도 가장 소름 끼치는 건, 이 모든 상황에 익숙해져가는 나였다. 그게 지독하게 싫었다. 그래서 환경이 중요했다. 그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집에 오는 길에는 오랜만에 다락방 서점(이자 카페)에 들렀다. 책도 한 권 샀다. "누워 있어도 좋고, 낮잠도 괜찮아요. 오래 머무셔도 괜찮아요."라는 문구가 다락방 벽면에 붙어있는데, 그걸 실천에 옮겨보긴 처음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동네를 탐방하느라 신나게 걸어 다녔더니 몸이 고단했던지 책을 읽다 그대로 잠들어버렸다. 심지어 책을 꼭 안고 누워서 말이다. 내가 앉은 곳은 푹신한 소파처럼 되어있는 좌석이라 충분히 누울 수 있는데(키가 작아요...), 사장님의 인테리어 감각을 잘 활용한 셈이라고 해두겠다. 서점지기 고양이 다름이와 함께 숙면을 취했다(야옹냐옹). 집에 오늘 길에는 버스를 탔다. 버스에서는 <두 번째 아이>를 계속 읽었다. 벽돌 책 모임에서 YG님을 통해 알게 된 책인데, 해리포터 찐팬인 내가 이 책을 놓칠 리가 있나. 다만 어디까지가 실화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 모르겠다. 스토리 자체는 굉장히 흥미로웠다.

어떤 면에서는 각자가 다른 쪽의 인생을 꿈꿨다. 각자 자기에게 없는 것을 원했다. 한쪽의 빛은 다른 쪽의 그림자였다.

요즘도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만약 30살에 집을 나오지 않고 가족들과 계속 함께 살았더라면 나는 어떻게 됐을까. 아마 지금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았을 거다. 그때는 엄마에게 벗어나기만 하면 모든 게 다 괜찮을 줄 알았다. 족쇄를 잘라버리고 싶었다. 도망치고만 싶었다. 하지만 이사 온 한동안은 이곳이 너무 낯설었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곳에서 나 혼자 뭐 하는 건가 싶어, 밤마다 혼자 소리 죽여 울었다. 마음 한구석이 뻥 뚫린 기분이었다. 그래도 후회한 적은 없었다. 그 마음은 지금도 유효하다. 그래서 다시 현실로 돌아와보자면, 아직 정해진 건 아무것도 없다. 아니, 하나 있네. 적어도 이곳을 떠나야 한다는 것. 계약종료를 알렸으니까. 1순위에서 밀리면 2순위로 가야지 뭐. 2순위도 나쁘지 않은데, 문제는 그 동네에서 내 자금 사정을 받아줄지 알 수 없다. 물가도 확 오를 것 같고. 내가 살 수 있는 곳이 맞기는 한 건가, 그래도 강남은 강남인데, 에휴. 그래도 뭐 좋다. 이 모든 걸 스스로 고민하고, 선택하고, 결정하고, 온몸으로 부딪치며 배워가는 과정들이 마냥 싫지만도 않다. 이번에 잘 배워둬야지. 그래서 더 단단해져야지, 안목을 키워야지. 올해의 내 삶은 또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게 될까. 그게 뭐가 됐든 지향점만은 잃어버리지는 않았으면.

양우는
양우는
오르막길인지 내리막길인지

사내 게시판에 경조사와 관련된 글이 생각보다 자주 올라온다. 경사보다 조사가 올라왔을 때, 직원들은 좀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편인데, 재작년 나를 가장 놀라게 했던 건 다름 아닌 동료 아버님의 부고글이었다. 놀랐던 이유가 단순해 부끄럽기도 한데, 동료가 나보다 3살이나 어렸다는 게 그 이유였다. 이른 나이에 돌아가신 동료의 아버님을 생각하며 마음이 복잡했다. 하필 그 무렵, 나는 그 동료를 밀어내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처음 그가 나를 인식했던 건 회사에 종종 올라오는 조회수가 낮은 글과 그 글에 대한 내 댓글 때문이었다. 마음을 울리는 글은 대체로 인기도, 재미도 없고(허허), 나는 그런 고리타분함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그게 눈에 띄었던 건지, 나와 일면식도 없던 그에게 같이 밥을 먹자는 개인적인 연락이 왔다. 근무 중에 인트라넷으로 보낸 거면 그러려니 하겠는데, 퇴근 후 개인 카톡으로 오는 연락이라 더 부담스러웠다. 나는 익숙한 방식으로 그를 거절했지만 출구가 없는 사람 같았다. 제한이 많은 내 식단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그렇다면 이 메뉴는 어떠세요?"라는 질문을 연거푸 던졌다. 마무리 인사를 아무리 건네도, 도통 눈치가 없는 건지 물러설 기미가 보이지 않자 내 대답도 점차 단호해졌다. 이쯤 되면 거의 "아, 저는 그냥 밥이라는 걸 먹지 않는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한 거나 마찬가지.

그렇게 차츰 멀어져가나 싶을 무렵, 부고 소식이 게시판에 턱하니 올라온 것이다. 처음에는 조부상을 잘못 본 줄 알았다. 근데 아니었다. 부친상이 맞았다.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깜짝 놀라 다시 봤는데, 역시나 맞았다. 그때가 겨울이었고, 갑작스러운 공지에 할 말을 잃었다. 차마 그 게시판에 댓글을 달지도 못했다(보통 경조사 공지가 올라가면 직원들이 릴레이처럼 댓글을 이어간다). 그에게 개인적으로 메시지를 보낼까 고민하면서 애꿎은 채팅창만 하염없이 열고 닫았다. 매몰차게 거절을 쏟아낼 때는 언제고, 이제와서 위로랍시고 말을 건넨다는 게, 내가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장례식을 치르고 있어 그의 자리는 며칠째 계속 비어있었고, 그렇게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고. 그는 다시 회사로 돌아왔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서로 층이 달라 그가 복귀한 걸 뒤늦게 알았다. 그럼에도 어떠한 말, 메시지, 무엇 하나 건네기가 조심스러웠다. 이런 경우 대체 어떤 말이 위로가 되는 건지도 알지 못했다. 어린 나이에 사고사로 아버지를 잃은 연인에게 고민을 털어놨더니, 적절한 조언이 돌아왔다. 하지만 나는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에게 먼저 메시지가 왔다. 내가 이러고 있을 것 같아서 자신이 먼저 연락했다고. 그의 말에 웃음이 났다. 힘든 일을 겪었음에도 여전히 장난기가 가득한 사람이라 다행이었다.

그날 나는 그의 지난 과거를 처음으로 알게 됐다. 그에게 20대는 줄곧 영케어러의 삶이나 다름없었다. 그가 대학생 때, 아버님은 두경부암 말기였고, 학교를 휴학하며 아버지를 간병해야만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돌아가시기 3년 전에는 뇌출혈로 중증장애 판정을 받고, 요양병원에서 간병을 이어갔다고 했다. 어머님은 오랜 기간 우울증을 앓고 계셔 소통이 쉽지 않았고, 외동이라 그 모든 걸 혼자 감당해야만 했다. 심지어 두 분 모두 알코올중독이라 모든 게 정말 버거웠다고. 어린 나이에 보호자 역할을 하며, 삶의 무게를 감내했을 그를 생각하니, 마음이 아픈 걸 넘어 어떤 말도 덧댈 수가 없었다.

백온유 작가의『페퍼민트』속 주인공의 속마음을 읽는 것만 같았다. '아빠만 없었다면, 아빠는 나한테 저주만 퍼부었는데, 내가 왜? 저는 해가 지날수록 더 힘겹기만 할 뿐 나아지는 건 없다고 느꼈어요. 짐이 무거워 죽고 싶은 적도 많았지만'. 이어지는 그의 말에 더더욱 말을 삼켰다. 내가 한 번도 상상해 보지 못한 삶의 고통과 무게가 느껴졌다. 그래서 이 책을 읽고 가장 먼저 그가 떠올랐다. 그는 여전히 나와 다른 층에 있고, 여전히 장난기가 가득하다. 애도의 기간은 길지 않았고, 오히려 홀가분해진 것 같은 모습인데, 이건 내 착각일까. 모든 게 조심스럽기만 하다. 첫인상과 달리 알면 알수록 생각이 깊은 사람이었다는 게 지금의 내 결론이다. 나이가 들면서부터 주변 사람들의 생일 선물을 잘 챙기지 않는 편인데, 그에게만큼은 생일이 되면 꼭 선물을 전한다. 사실 생일뿐만이 아니다. 그의 얼굴이 유독 어두워 보이는 날에는 몰래 그의 자리에 시집을 두고 오기도 한다. 이건 그가 먼저 시작한 게임이다.

지난달에는 서촌에 있는 작은 서점을 다녀왔다. 매주 한 권의 책만을 큐레이션 한다는 점이 흥미로워, 다녀오려고 저장해둔 곳이었다. 공교롭게도 내가 방문하려던 날이 전시 기간(그것도 딱 3일만 하는)이기도 해서, 일석이조구나! 싶었다. 전시 제목이 <안녕, 정주>라길래, 가장 따뜻한 전시라길래, 들뜬 마음으로 들어갔다가 숙연해졌다. 알고 보니 이 전시는, 정주라는 아이를 일찍 떠나보낸 젊은 부부가 연 전시였다. 정주는 태어난 순간부터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병원을 떠난 적이 없었던 작고 연약한 아이였다. 고작 3살의 어린 나이에 부모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아이. 정주의 병동 일기에는 간호사님들이 손수 그려주신 정성스러운 그림들이 빼곡히 담겨 있었다(병원에 그림 동호회가 있다고 한다). 나와 연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 전시를 차근차근 눈에 담았다. 지인들만 찾아오는 전시였던 것 같은데, 우리는 그걸 몰랐다. 그분들도 그걸 몰랐던 것 같고. 덕분에 부부도 놀라고, 우리도 놀랐다. 하지만 다시 (서로) 정신을 차리고, 아내분이 정주를 소개시켜주셨다. 애써 눈물을 꾹 참으며 웃어 보이는 모습에 내가 다 먹먹해졌다.

전시의 정체(?)를 알게 된 순간부터 책은 이미 머릿속을 떠나 있었다. 심지어 이곳이 서점이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렸다. 얼떨결에 작은 선물도 받아버렸다. 전시를 다 보고, 서점을 나서려는데, 아내분이 우리에게 다가와 인사를 건네며 하시는 말씀이 "정주에게 인사하러 와주셔서 감사해요."였다. 나는 그 인사에 쓰게 웃었다. 연인과 서촌 골목을 걸으며 '정주'를 기억하자고 했다. 정주의 이미지가 그려진 귀여운 엽서는 내 서랍장에 얌전히 들어있다. 부모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자녀가 있고, 아직 어린 자녀를 두고 일찍 세상을 떠난 부모가 있다. 생과 사, 그 중간 어디쯤에 우리가 있는 것도 같고.

학창 시절에 만난 친구들과는 성인이 된 후로 차근차근 연을 다 끊었다. 유일하게 남아 있는 친구 한 명은 미국으로 이민을 갔고, 우리는 종종 온라인으로 소통했다. 그 친구가 다시는 한국에 돌아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지난달에 만났다. 6년 만인가. 변함없는 친구의 모습에 다행이다 싶었다(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의 변한 모습에 연을 다 끊어버렸던 나였으니). 마치 어제 만난 사이처럼 스스럼없이 일상을 나누고, 헤어지면서는 포옹도 나눴다. 그 친구가 주고 간 선물 꾸러미를 안고 집으로 돌아왔고, 며칠 후 그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잘 도착했냐고 내가 먼저 연락했어야 했는데, 미안한 마음에 뒤늦게 안부를 물었다. 친구는 잘 도착했다며 나눌수록 좋은 소식을 하나 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실은 이번에 한국에 갔을 때, 병원을 다녀왔다고. 나는 좋은 소식이라길래, 임신이구나! 싶어(이 친구는 식은 올리지 않았지만 남편이 있다) 들뜬 마음을 숨기고 뭐냐고 물었다. 속으로는 온통 축하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친구는 검사 결과, 암이라고 했다. 순간 너무 놀라 말문이 막혔다. 그때가 새벽 5시였고, 한참 책을 읽다가 받은 연락이었는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차마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채팅창에 이것저것 썼다 지웠다만 반복하고 있는 나에게 친구는 말했다. 자신도 자신이 암환자가 될 거라고는 상상해 본 적도 없다고. 그것도 이 나이에 말이다. 같은 마음이었다. 친구는 나보다 한 살이 많아 한국 나이로 치자면 고작 36살이다. 근데 암이라니, 암이라니! 항암치료를 생각해서 한국이 아닌 미국에서 수술을 받을 거라는 친구의 말에 기도하겠다고 말했다. 신앙도 없는 주제에 그런 말을 했다. 누구에게라도 기도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혹시 도움이 필요한 일이 생기면 언제든지 말해달라고 덧붙였다. 그 말만으로도 힘이 난다고 친구는 말했다. 나는 친구의 그 말에 다시 또 할 말을 잃었다.

지금 나는 어디쯤에 서 있을까. 생과 사, 그 중간 어디쯤일까.

"엄마
"엄마
그래서 삶에 여전히 시가 있습니까

3월의 시작을 알리는 눈일까. 오늘의 서울은 지독하다 싶을 만큼 많은 눈이 내렸다. 하필이면 이런 날, 빨래를 하는 나는 도대체 뭐 하는 인간인가. 나의 폐쇄성은 집에서도 티가 나는 편인데, 햇살이 좋은 날에도 블라인드를 잘 걷지 않는다. 그래서 밖의 상황을 잘 모르고 출근했다가 낭패를 본 경험이 여러 번 있다. 이를테면 비가 내린다거나 비가 내린다거나, 아니면 비가 내리고 있다거나(뭐래니). 그런데 오늘은 오전부터 눈이 내렸고, 눈이 내리는 걸 모르고 세탁기를 돌렸고, 세탁기를 다 돌리고, 연인이 보낸 카톡을 확인하면서 알았다. 밖에 눈이 내리고 있다는 사실을. 세탁기는 눈치 없이 띠리리리링- 소리를 내며 '어서 빨리 이것들을 널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이런, 눈치 없는 녀석. 덕분에 내 빨래가 눅눅하지 않을까 걱정도 되지만, 글쎄다. 집이 건조한 편이라 괜찮을 것이라 애써 자조한다.


하나. 출근길에 지하철역 에스컬레이터에서 한 할머니가 배낭을 메고 내 앞에 서 계셨다. 배낭에는 배지가 여러개 달려있었다. 달린 배지에는 이런 문구가 있었다. '대통령을 수호하자', '대통령 국민변호인단', '반드시 돌아옵니다', '국민이 뽑은 대통령' 등. 할머니가 나보다 한 계단 위에 계셨던 터라 배지들은 내 눈 바로 앞에 떡하니 놓이고 말았다. 에스컬레이터 속도가 원래 이렇게 느렸던가. 주렁주렁 달려있는 배지들을 가만히 보다가 문득 할머니 얼굴이 궁금해졌다. 더 정확히는 할머니의 표정과 눈동자가 궁금해졌다. 에스컬레이터가 지상에 도착했지만, 차마 얼굴을 확인할 용기가 나지 않아 고개를 숙이고 걸음을 재촉했다. 알 수 없는 세상이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세상.

하나. 종로 5가에는 약국 성지라 불리는 거리가 있다. 저렴한 가격 때문이라고 하는데, 성지 약국에는 감기약부터 진통제, 영양제까지 일반 의약품을 평균 10%~30%가량 저렴하게 구매할 수 있다고 한다. 찾아보니 종로 5가의 약국 거리는 일제강점기, 이곳에 한의원과 한약방들이 모이기 시작하면서 약국도 점차 늘어났다고 한다. 1957년부터는 현대적인 약국들도 생겨났는데, 그 시작이 보령약국이었다고. 어제 산책하다가 그쪽을 지나는데, 수많은 인파가 몰려있었다. 줄이 너무 길어 걸음을 옮기기 힘들 정도였다. 코로나가 다시 유행하는 건가, 오늘이 새해였던가, 전염병이 다시 창궐하나. 온갖 생각을 하며 그들과 반대 방향을 향해 걸었다(더 정확히는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날카로운 시선이 온몸에 콕콕 박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생각했다. 건강하자, 건강하자. 근데 목이 자꾸 칼칼하다. 새벽에 잔기침을 여러 번 했는데, 왠지 감기에 걸(린)릴 것만 같다.

하나. 드디어 집주인에게 계약을 연장하지 않겠다는 문자를 보냈다. 부동산에도 같은 문자를 전달했다. 나는 이곳을 무사히 정리하고, 새로운 집에 안착할 수 있을까. 이곳을 드디어 떠나긴 떠나는 걸까. 연인에게는 게임이 시작되었다고 전했다. 신발 끈은 충분히 묶은 것 같다. 근데 막상 떠난다고 생각하니 괜스레 애틋한 마음이 올라오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다. 잊지 말자, 이 동네가 나에게 얼마나 폭력적이었는지. 지난한 일 투성이었는지. 애써 미화시킬 필요 없다. 만나서 더러웠고 다시는 만나지 말자는 게 솔직한 내 심정이다. 연고도 없던 곳, 서울에 존재하는 지도 몰랐던 곳이지만 하한선을 맞추다가 여기까지 왔다. 이 동네를 떠나고 나면, 다시는 이 동네를 찾지 않을 것 같다. 추억으로라도 말이다. 그러다 오늘, 옆집 사람과 처음으로 대면하고 말았다. 1인 가구 특성상 한 통로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암묵적인 룰이 하나 있다.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격렬하게 피하기. 아무래도 흉흉한 세상이지 않은가. 그런데 그 격렬함이 조금 느슨해졌던 걸까. 복도를 걸어오던 상대도 놀라고, 문을 열고 집을 나서던 나도 놀랐다. 서로 놀라지 않은 척 각자의 시선에 충실했지만 실패. 나란히 한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까지 동행(?)한 사이가 되었다. 다행히(근데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상대는 나와 같은 성별이었고, 서로의 존재를 철저히 외면했다. 옆집 사람이라 놀란 것도 있지만 사실 더 놀란 건 그녀의 외모 때문이었다. 잠깐이었지만 아이돌이 걸어오는 줄 알았다. 엄청난 미모의 여성이었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정말 그랬다. 하지만 서로의 존재를 철저히 외면하는 게 우리들만의 오랜 룰이었고, 나는 그 룰을 어기고 싶은 생각이 없다. 그건 반칙이다. 근데 지금 옆집과 닿아 있는 벽에서 쿵쿵 소리가 난다. 다시 인사하고 싶어요, 나랑?

하나. 연인과 대화를 하던 중 이 문장에서 서로 의견이 달랐다. 세상은 '아름답다'와 '슬프다' 중 어느 것이 먼저 인가. 나는 "세상은 아름답지만 슬프다"고 말했고, 연인은 "슬프지만 아름답다"고 말했다. 언뜻 같은 문장 같지만 엄연히 다르다. 두 개의 형용사를 놓고, 왜 서로 그렇게 생각했는지 의견을 나눴다. 둘 다 수긍했다. 우리 둘은 오묘하게 닮아 있으면서도 오묘하게 다르다. 그 닮음과 다름이 서로 어우러져 우리의 관계를 형성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슬픔의 정서를 좋아한다는 공통분모가 있다.

오래전 시 낭독 모임에서 나도 모르게 "저는 슬픔의 정서를 가진 사람들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라고 말했던 적이 있다. 모임원 중 누군가가 "왜 슬픔의 정서를 가진 사람들이 좋아요?"라고 물었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한 나머지 두서없는 말들만 어버버하다 집으로 돌아왔고, 마음 한구석이 계속 답답했다.

'그러게, 나는 왜 슬픔의 정서를 가진 사람들을 좋아하지?'

우선 내가 말하는 '슬픔의 정서를 가진 사람들'은 자신의 슬픔을 일방적으로 토로하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감정만 앞세운 채 상대가 무조건적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해주기만을 바라는 류의 사람들은 나도 싫다. 자신이 필요할 때만 찾고, 자신의 징징거림을 받아주지 않는다 싶으면 또 다른 먹잇감을 찾아가는 감정 하이에나 같은 사람들. '나 좀 어떻게 해줘', '나 너무 외로워'만을 토로하는 일방적인 사람들. 자신의 숙제를 자신의 숙제로 인지하지 못하고 남이 무조건적으로 자신을 수용하기만을 바라는 그런 이기적인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사람이니까 누구나 우울하고, 슬프고, 공허하고 그러다가도 또 웃고, 울고, 장난을 치는 그런 다채로운 존재다. 그럼에도 '슬픔의 정서를 가진 사람들'은 내면에 담긴 슬픔이라는 정서에 유독 집중하는 사람들이다. 보여지는 모습은 평온해 보일지라도 그 속에 큰 슬픔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 너무 일찍 철이 들어버린 어린아이처럼. 자신의 슬픔을 꾹꾹 누르며 참아오다 이내 감당하지 못하고 쏟아져내릴 것만 같을 때조차 눈물을 꾹 참고 하루를 버텨가는 이들. 나는 그런 이들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사람이고 싶었다. 슬프다는 말조차 조심스러워 말을 삼키는 이들의 슬픔을 먼저 알아보고, 다가가는 사람이고 싶었다. 나도 그랬으니까. 내 기저에 깔려있는 슬픔과 우울, 불안과 괴로움 등의 복합적인 감정을 차마 토해내지 못해 억지로 꾸역꾸역 삼키다 체하고 마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체한 그 마음을 안고 동굴로 숨어버리는 그런 사람.

기쁨도 있고 즐거움도 있는데 유독 슬픔이라는 정서에 내가 더 끌리는 건 슬픔이라는 감정은 대체로 존중받지 못하는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자칫 어두운 사람, 우울한 사람으로 비춰지는 그들의 슬픔에 나는 눈길이 간다. 부정적인 감정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는 것 같은 그 감정에 유독 더 몰입한다. "슬픔은 자랑이 될 수 있다"는 박준 시인의 문장처럼 슬픔의 정서는 자랑이 될 수도 있고 표현해야 할 자유도 있다. 나에게 참 행복이란 무조건 즐겁게 웃는 일만 가득한 삶이 아니라 웃고 싶을 때 웃고, 울고 싶을 때 울 수 있는 감정의 자유가 있는 삶이다. 그래서 나는 슬픔의 정서를 애정하고, 슬픔의 정서를 잘 담아낸 소설 또한 애정한다.

(글이 길었다)


다시 하나.

근무 중에 가끔 바람을 쐬러 회사 옥상에 올라가곤 한다. 중미산 천문대에 다녀온 뒤로부터 부쩍 하늘을 올려다보는 습관이 생겼다. 느릿하게 움직이는 구름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소란했던 마음이 한결 차분해진다. 미세한 꿈틀거림이 잔잔히 퍼져가는 형태는 언뜻 물컵 속 용액의 움직임을 떠올리게 한다. 투명한 컵에 담긴 물에 용액 한 방울을 톡 떨어트렸을 때, 고작 용액 한 방울이 미칠 파장. 가지처럼 사방으로 뻗어가는 모습. 투명했던 물은 어느새 용액의 색으로 변질되고, 그 모든 과정을 천천히 관찰하는 느낌이랄까. 고작 5분이나 지났을까. 길지 않은 시간이 주는 이 안온함이 좋다. 다시 일을 하러 가야겠지만.

마지막 하나. 이 글 제목에 대한 답은, 나를 향한 독촉이다.

시가 있냐고, 없냐고.

하지만 김소연 시인도 말하지 않았던가.

"선명함을 경험한다는 것이 불가능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능함과 불가능함을 계산하지 않는다는 것."


시가 내게 그렇다.

선명함
선명함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

역사적 배경을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는 책. 그럼에도 배경과 거리를 두고 읽으려 노력했다. 집사라는 직업을 가진 한 사람과 그의 진정성, 충실함, '품위'라는 단어에 대해서 말이다. 이 책의 주인공인 스티븐스는 '위대한 집사'란 무엇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고뇌하며, 자신을 가다듬는 인물이다. 35년 동안 모셨던 영국의 신사 달링턴 경의 그릇된 판단에도 침묵을 지키며 충직한 집사로서의 모습을 잃지 않는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까지를 판단하는 건 조금 유보하기로 하자, 일단은.

그는 6일 동안 영국 시골을 홀로 여행하며 자신의 지난 삶을 찬찬히 돌아본다. 그에게 이번 여행은 한때는 옳다고 여겼던 무언가가 실은 옳지 않았음을 인정하는 시간이기도 했고, 종종 비겁해지기도 했다. 직업인으로서의 자신을 숨긴다면, 그는 과연 스스로를 어떤 사람이라고 소개할 수 있을까. 낯선 동네에서 만난 마을 사람들이 자신의 직업을 이것저것 유추해가는 걸 보면서도 그는 시종일관 자신의 직업을 밝히지 않는다. 심지어 달링턴 경과의 관계를 부인하기도 한다. 무엇이 두려웠을까. 무엇이 떳떳하지 못했을까. 그는 한평생 그것을 위해 살았고, 그걸 지키느라 아버지의 임종도 사랑하는 여인도 놓치고 말았다. 그에게 남아 있는 나날은 회한의 반복일까 아니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까. 마지막까지 농담을 연습하려 애쓰던 그의 모습이 안쓰럽기도 했다.

독서모임에서는 스티븐스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많았다. 나 또한 그의 행동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름의 이유는 있었다. 미세하게 갈라지는 구간을 설명하고 싶었는데, 괜히 그걸 설명하려다 누군가가 다칠 것 같아 여러 번 말을 삼켰다. 침묵도 하나의 표현이긴 하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였다면? 이라는 가정을 대입해 봤다. 내가 만약 그 상황이었다면 어떻게 행동했을까. 모임에 참여했던 누군가는 자신은 절대 그런 짓을 하지 않을 거라고 자신했다. 그래, 그럴 수 있다. 나도 같은 마음이긴 한데, 그건 그런데.

이런 예가 하나 떠올랐다. 내가 사랑하는 이가 중범죄를 저질렀을 때, 그에게 자수하라고 말할 수 있는지, 혹은 그를 신고할 수 있는지(억울한 누명이 아닌 명백한 범죄임이 밝혀졌을 때). 내 대답은 언제나 같았다. 자수하라고 말할 거다. 자수하지 않겠다고, 자신을 지켜달라 감정에 호소한다면 나는 단호하게 거절하고 신고할 것이다. 반대의 입장이 된다 해도 마찬가지다. 나를 꼭 그렇게 해줬으면 좋겠다. 지켜주겠다는 미명하에 내 죄를 덮으려 든다면, 건방 떨지 말고 비키라고 말하겠다. 벌을 받아 마땅한 잘못을 했다면 벌을 받고 돌아오라고 속삭여줬으면. 그걸 숨겨주는 건 상대 혹은 나를 지키는 게 아니라 더 구덩이로 몰아넣는 것일 뿐. 그래, 우리 떳떳하게 죗값 치르고 만나자.

그런 의미에서 내가 지금 믿고 있는 여러 사람들, 가치관, 삶의 자세 등을 계속해서 믿을 수 있는 건 그 사람의 목소리라서, 내가 믿기로 결심한 것이라서가 아니다. 그 사람의 목소리와 내가 믿고 있는 가치가 같기 때문에 계속 믿을 수 있는 것이다. 언젠가 그 가치와 본질이 변질되었을 때,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돌아설 사람이란 걸 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두렵다. 변질되어 가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떠나보낼 때마다 티내지 않았지만 마음이 아팠다. 단호하게 끊어냈지만 실은 엉엉 울면서 이 말을 하고 싶었다.

"도대체 왜 그랬어. 그런 사람 아니었잖아. 왜, 대체 왜! 뭐가 중요했던 거야. 대체 뭐가."

슬프고 지난한 과정이었다. 마음 한쪽을 도려내는 것처럼, 인간이란 한없이 나약한 존재라는 걸 온몸으로 증명당하는 것처럼. 고작 그 정도의 사랑, 그 정도의 관계, 눈빛이 달라져 버린 사람들. 그들의 눈동자를 보고 있노라면 맑게 타오르던 불이 어느 순간 꺼져버린 것만 같았다. 정말 그랬다. 한때는 전부라 믿었던 것이 실은 허상이었음을 깨닫는 과정이랄까. 그럴 때마다 인생이 참으로 덧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뢰를 그런 식으로 되갚아줄 수 있나. 눈물이 났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들은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 변한 게 아니라 그게 본질. 하지만 이렇게 말하는 나조차도, 정작 내 말과 행동에 얼마나 많은 모순이 존재하는지 알고 있다. 그러니까 나도 나약한 한낱 인간일 뿐이라는 거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라는 거다.

그래서였을까. 스티븐스와 달링턴 경을 바라보는 내 마음이 복잡했다. 특히 스티븐스의 허망함에 대해서는 유독 더 어질어질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는 일단 차치하고, 순수하게 이 책 자체만으로 다시 돌아가보자면, 좋았다. 오랜만에 손에서 놓고 싶지 않은 진득한 소설을 만난 기분이었다. 출퇴근길에 정신없이 읽기 아까워 잠자리에 들기 전 은은한 조명등을 켜고 야금야금 아껴 읽었다. 이 책의 초반부를 읽으며 연인에게 "오빠, 이 책 진짜 재미있어!"라고 신나게 말했던 기억이 난다. 연인도 나와 함께 그 책을 읽고 있었기에 궁금했다고 한다. 내가 말하는 '재미'가 어떤 포인트였을지, 무엇이 나를 그렇게 재미있게 만들었을지. 연인은 내가 이 책을 다 읽었다고 말하자, 한 편의 글을 전했다. 자신이 생각했던 나의 '재미'에 대한 이야기였다. 나도 몰랐던 나의 모습을 새롭게 알아간 것 같아 연인의 글을 읽으며 연신 웃음이 났다. 입가에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맞네, 그랬네. 나 그래서 재미있었네."

여운이 깊게 남아 영화도 찾아봤다. 러닝타임이 138분이었지만 전혀 길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책에서 생략된 부분이 많아 아쉽기까지 했다. 다만 극초반에는 배우들의 모습이 내가 상상했던 모습과 싱크로율이 맞지 않아 적응할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영화는 또 영화 그 자체로 풍부한 감정선을 담고 있었다. 책에서는 인물들의 표정을 볼 수 없어 눈치채지 못했던 여러 포인트가 영화에서는 꽤 진하게 느껴졌다. 적절히 조화롭구나 싶었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책은 『클라라와 태양』에 이어 이번이 두 번째다. 둘 중 어떤 책이 더 좋았냐고 누군가 물어본다면 망설이지 않고 『남아 있는 나날』이라고 답하겠다.

이어지는 아래의 글은 연인이 내게 전한 글이다.


이 소설은 스토리도 흥미롭고 캐릭터도 매력적이며, 전혀 몰랐던 세상을 보여주어 좋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은데, 유독 이 소설이 더 즐거웠던 이유는 따로 있다.

"이 소설 너무 재미있지 않아?"라고 말하는 네가 궁금했다. 정확히는 그렇게 말하는 이유가. 책에 대한 이야기를 종종 나누는데, 자주 볼 수 없는 텐션의 반응이라 더 궁금해졌다.

그리고 나름의 이유를 찾았다. 네가 인식했을지는 모르겠지만 소설의 주인공이자 화자인 '스티븐스'가 말하는 방식이 평소 네가 말하는 방식과 대단히 흡사하기 때문이리라.

우리의 대화는 너의 장황함으로 인해 한없이 길어질 때가 종종(아니 자주) 있는데, 나는 물론 너의 그 장황함을 아주 좋아한다. 그건 간결하게 말하지 못하는 사람의 장황함이 아니라 최대한 상세하게, 아주 사소한 것도 놓치지 않고 전하고픈 너의 방식임을 알기 때문이다. 다만 이야기를 전개하다 보면 특정 상황에 대한 보충 설명을 위해 처음 시작했던 이야기에서 옆길로 새는 일이 있는데, 그러다가 어느새 다시 제자리를 찾아 온다.

스티븐스의 이야기 역시 그러하다. 하나의 주제로 시작한 그의 이야기는 사람을 깊이 빨아들이는 매력이 있지만, 그 매력에 취해 있다 보면 어느새 곁가지 이야기로 빠져 있다. 때론 그 곁가지에서 또 다른 곁가지로 뻗어가기도 하고, 그러다가 어느새 다시 본래의 자리로 돌아와 있다.

A에서 시작해서 A'로, 거기서 다시 A''로, 그러다가 듣(읽)는 이로 하여금 A가 뭐였는지 기억도 안 날 만큼 멀리 가서야 갑자기 다시 A를 들고 나타나는 이런 식의 이야기 전개는 영락없이 너를 떠올리게 만든다. 자신과 똑같은 방식으로 말하는 사람을 만났는데, 그 이야기가 네게 어찌 즐겁지 않을 수 있으랴.

우리는 둘 다 이 소설을 좋아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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