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eonh
banner image

연해님의 블로그

글로 남기는 나만의 기록장
전체보기(28)
어여쁜 말을 먹고 싶어요

어떤 일을 진행할 때, 한 번에 주르륵 다 하는 것보다 촘촘히 끊어서 매일 조금씩 반복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 사이사이에 작은 숨구멍을 뚫어 놓으면서 말이다. 숨구멍의 카테고리도 장소와 상황에 따라 여러 갈래로 나뉘는 편인데, 직장에서 고수하고 있는 작은 루틴도 하나 있다. 일명 '주 1회 평일 오전 한 번은 꼭 쉰다'는 루틴이다. 다행히 우리 회사는 탄력근무제라 잘만 사용하면, 1년 동안 매주 오전에 한 번씩은 쉴 수 있다. 그 요일은 대체로 화요일인데, 주중에 한 번의 쉼이 있다는 사실이 주는 안정감이 꽤 크다. 이 루틴을 만든 뒤로는 월요병도 사라졌다. 화요일의 반차를 기대하며 월요일을 보내고, 화요일은 반차가 있어 회사에서의 시간을 금방 보낸다. 그렇게 수요일이 되면 평일의 절반이 시작되니 생각보다 마음이 괜찮다. 그렇게 목요일, 금요일을 차근차근 맞이하면 부드러운 한 주가 완성된다. 마음의 여유가 넉넉하게 자리 잡은 한 주랄까. 거기다 공휴일이라도 있는 주에는 체감상 2일은 쉰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더 편안해진다. 이 루틴을 반복한지도 거의 5년이 되어간다.

이번 주도 마찬가지였다. 감사 준비로 계속 바쁘지만 이 루틴만은 지키고 싶었다. 새벽에 일어나 청소와 운동을 마치고, 이른 점심을 먹기 위해 샐러드 가게로 향했다. 항상 앉았던 창가 자리에 앉아 주문한 메뉴를 기다리고 있는데, 내 뒤에 앉은 손님들의 목소리가 유독 날카로웠다. 다행히 나와 등지고 있어 얼굴을 마주할 일은 없었지만, 매장이 작아 굳이 알고 싶지도 않은 타인들의 사적인 이야기가 낱낱이 내 귀를 파고들었다. 주문한 메뉴를 받고 자리에 앉아 샐러드를 먹으려 하는데도 노부부의 목소리는 잦아들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격양되며 언성을 높여가고 있었다. 포크로 샐러드를 한 입 넣고, 귀를 막았다가 다시 또 한 입, 다시 또 귀를 막는 행위를 반복했지만 소용없었다. 단순히 소리 크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날선 단어들이 문제였다. 이 글에 욕을 쓰고 싶지는 않아서 초성만 살짝 언급하자면 비읍과 시옷이 반복적으로 들렸다. 할머니는 말끝마다 할아버지에게 "으이그, 이 ㅂㅅ아"라고 하셨다. 아무리 귀를 막아도 내 손을 뚫고 들려오는 그분들의 목소리 덕분에 대략적인 상황도 파악됐다. 이곳은 대학 병원 근처에 있는 샐러드 가게인데, 검사를 받으러 오셨다가 할아버지 실수로 검사 일정이 틀어진 게 문제의 발단인 것 같았다.

아니, 그래도 그렇지 저렇게까지 사람을 멸시할 일인가 싶었다. 할아버지가 병원 측과 통화하는 중에도 할머니는 연신 욕을 하거나 할아버지에게 목소리를 낮춰서 통화하라고 고래고래 소리치셨다(할머니 목소리가 훨씬 더 시끄러운데, 누구더러 목소리를 낮추라는 건지 원). 병원 교수님들과도 서로 친분이 있는 것 같았고, 이분들의 지위도 제법 있으신 것 같았는데, 직업이나 학식과는 별개로 타인에 대한 배려와 예절은 어디 다른데 두고 오셨나 보다. 더 소름이 돋았던 건 대화 도중 걸려온 전화를 받는 할머니의 태도 때문이었다. 택배 기사님의 전화인 것 같았는데, 할아버지에게는 차마 입에 담기조차 어려운 온갖 험한 말을 다 쏟아내시더니 "네, 기사님"이라고 세상 부드러운 목소리로 답하시는 게 아닌가. 하도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났다. 주소지를 말씀하실 때도, 청담동에 살고 있다는 걸 이 가게 모든 손님들에게 자랑하고 싶으셨던지 그 세 글자를 또박또박 스타카토처럼 여러 번 반복하셨다. "네, 기사님. 제가 지금 밖에 나와있어서요. 청! 담! 동! OO 앞에 두고 가세요. 네, 청!담!동!이요. 제가 거기 살거든요."

아이고, 머리야. 샐러드의 야채들을 아무리 소분해서 먹어도 얹힌 느낌이 들었다. 애꿎은 샐러드만 우적우적 씹으며 괜찮다고 연신 되뇌었지만 소용없었다. 이대로 계속 먹었다가는 회사로 복귀해서 먹은 음식을 다 게워낼 것 같았다(소화기가 좋지 않은 편이다). 결국 참다못해 숟가락과 포크를 내려놓고 고개를 돌려 그분들을 쳐다봤다. 할머니는 나의 시선 따위는 애초에 눈에 들어오지도 않으셨는지 점점 더 언성을 높이며, 할아버지를 구박하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무슨 말이라도 좀 하려고 하면 그 말을 막으면서 디귿과 치읓까지 반복하셨다. 옷도 곱게 잘 차려 입으시고, 나이도 지긋하신 것 같았는데 존중과 배려는 덜 배우셨나 보다. 가까운 관계일수록 더 조심해야 한다는 것도. 아 아니다. 내가 뭐라고 이런 판단을. 그냥 피하는 게 낫지.

그렇게 체기를 가라앉히며 도망치듯 가게를 나왔다. 예보상으로는 화요일도 기온이 낮다고 했지만 햇살이 강해서 그런가 걷기에 괜찮은 날씨였다. 아니다. 실은 속이 너무 울렁거려서 도저히 걷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는 화가 난 것도, 서글픈 것도 아닌 심정으로 터덜터덜 회사를 향해 걸었다. 시끄러운 사람들을 만나는 건 싫은데, 이건 단순히 시끄러움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할머니에게 다가가 "죄송한데, 조금만 조용히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라고 말하고 싶었다가 나중에는 생각이 달라졌다. 정확히는 이 말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할아버지한테 그렇게 함부로 하지 마세요!"라고. 내가 가장 속상했던 건 할아버지의 태도였다. 할머니가 입에 담기조차 어려운 지독한 말을 해도, 아무런 저항 없이 던져지는 감정을 묵묵히 받아내고 계셨던 그 모습. 맞서 싸우지 않고 주눅 든 채 행여나 상대방을 더 자극하지 않을까 싶어 조심하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나를 더 아프게 했다. 연인에게 이 이야기를 했더니, 그분들의 젊은 날이 궁금하다는 말을 했다. 그러게, 정말 그러네. 젊은 날, 할아버지는 할머니에게 엄청 큰 죄라도 지으셨던 걸까. 그래서 연세가 지긋하신 지금 그 복수를 당하고 계신 걸까.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 자신을 돌아보게 만들었다. 나도 어느 순간 가까운 이들에게 가깝다는 이유로, 편해졌다는 이유로 함부로 대하는 사람이 되면 어쩌나 싶었다. 곁에 있는 이들의 소중함을 다시 돌아보는 계기로 삼자고 마음먹었다. 그분들의 사정을 다 알 수 없지만 알 수 없다는 이유로 더 쉽게 판단하는 것도 이제 그만 멈춰야겠다. 그냥, 그냥 나나 잘하자. 남의 이야기를 엿듣고 싶지 않았는데, 아무리 귀를 막아도 손을 뚫고 들려오는 할머니의 목소리에 애꿎은 남의 사생활을 알아버린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하기도 했다.

아니 그건 그렇고, 제 화요일 루틴은요?

어디 가버린 거죠?

특급호
특급호
다들 알고 있는 고양이 한 마리쯤은 있는 거 아닌가요

아주 어릴 때부터 인형을 좋아했다. 날씬하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사람 모형 인형들 말고, 다양한 종류의 동물 인형들 말이다. 인형에 진심인 막내딸에게 아빠는 늘 관대했다. 멀리 출장을 다녀오거나 손잡고 나들이라도 가는 날이면, 엄마 몰래 내 품에 인형을 쏙 안겨주곤 했다. 그렇게 내 방의 피아노 위에는 곰, 강아지, 병아리, 말, 토끼, 거북이 등 다양한 종류의 동물 인형들이 차곡차곡 쌓여갔다. 나는 애정을 골고루 쏟아부으며 인형 하나하나에 모두 이름을 붙여줬다. 웅돌이, 해피, 삐약이, 끙끙이, 멍구 등 가지각색의 이름들을 붙인 이유는 저마다 달랐다. 그 시기에 떠오른 단어, 관심 있는 주제, 이 인형과 만나게 된 계기, 장소, 느낌, 생김새 등. 치라는 피아노는 안 치고, 각종 인형들이 피아노 위를 무더기로 차지해가는 걸 보면서 엄마는 혀를 끌끌 찼다. 저것들을 언제 다 치우나(버리나) 하는 눈총을 자주 보냈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주기적으로 인형들의 먼지를 털어줬다. 인형을 빨 때도 세탁기에 넣으면 이 아이가 숨이 막힐까 봐(동심이라고 해두겠다) 목욕탕에 물을 받아 어린아이를 씻기듯 세심하게 씻고 꼼꼼히 말려두곤 했다. 물 낭비한다고 엄마는 다시 또 혀를 끌끌 찼다.

동생이 없어서 그런가. 그 인형들이 다 내 동생 같았다(오빠는 나에게 화가 나는 일이 생기면 꼭 내 인형들을 괴롭히곤 했다). 어떤 날은 인형들에게 생명력이 생겨 나와 함께 뛰노는 꿈을 꾸기도 했다. 하지만 나이를 먹고 철이 들면서 한 아이씩 떠나보내거나 낡아서 실밥이 터지거나 사촌 동생들, 조카들에게 나눠주기 시작했고. 이제 남은 건 부모님댁에 있는 곰돌이 인형이 전부다. 9살 때 샀던 인형인데, 그때만 해도 나와 체구가 비슷해 옷도 바꿔 입을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은?

내가 너무 커버렸다. 몸도 마음도.

귀여운 건 여전히 좋아하지만 말랑말랑했던 동심은 나이를 먹으면서 차차 소거해갔다. 지금도 내가 살고 있는 공간에는 선물 받은 인형들이 몇 개 있지만 '딱 여기까지다'라는 생각을 늘 하고 있다. 그러다 이 책을 읽었다. 우선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길고양이의 제대로 된 명칭이 동네고양이라는 것은 작년에 국립민속박물관에서 특별전으로 열었던 <요물, 우리를 홀린 고양이>라는 전시를 통해 알게 됐고. 그곳에서 만난 김하연 작가의 사진에서 "모두 늙어서 죽었으면 좋겠다"라는 말이 시작되었음도 알았다.

강아지와 고양이 중 어떤 동물을 더 좋아하냐는 질문을 종종 받아왔다. 이 두 종은 유독 비교군으로 자주 오르내리는 것 같은데, 오죽하면 이상형을 말할 때도 강아지상과 고양이상 중 어느 쪽을 더 선호하냐는 질문이 있겠냔 말이다. 내 대답은 한결같았다. 단연코 강아지였다. 하지만 연인을 계기로(연인의 집에도 유기묘가 한 마리 있다) 고양이라는 생명체에게 부쩍 더 관심이 생겼고, 그때부터 서서히 인식되기 시작했다. 길에 숨어 있는 고양이가 이렇게나 많았다는 걸 말이다. 인적이 드문 골목길을 혼자 걸을 때면 고개를 빼꼼 내밀고 주변을 조심히 살피는 고양이들의 모습이 있었다. 경계심이 많아 조금이라도 다가가려고 하면 날렵하게 숨어버리곤 하지만. 신기하다, 신기해. 역시 무언가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는 건 이다지도 중요한 거구나. 내 인생에 고양이라니, 고양이라니!

어느덧 단골이 되어버린 다락방 카페가 있다. 서점과 카페를 동시에 운영하고 있는 작고 아늑한 복층 구조의 카페인데, 그곳에 가면 사장님이 임시보호하다가 입양한 '다름이'라는 하얀 고양이가 있다. 사장님 댁에도 두 마리의 고양이가 더 있는데, 모두 동네고양이였던 아이들이다. 이름하여 삼냥이의 집사님이신 건데, 이 카페를 몇 년째 방문하고 있지만 사장님과는 여전히 서로를 조심(?)하고 있다. 둘 다 고양이과인지 먼저 다가가는 법이 없고, 가볍게 인사만 나누는 사이가 됐다. 선뜻 다가오지 않으시는 사장님의 조심스러움이 너무나 감사할 따름이다. 나는 공간에 대한 애착이 많은 편이라 좋은 공간을 만나면 자연스럽게 단골이 되곤 했는데, 그렇게 같은 장소를 여러 번 방문하다 보면 그곳 사장님들도 어느 순간 나를 알아보기 시작하신다. 그리고 친근하게 말을 걸어오시지. 나는 그런 걸 원한 적이 없는데. 더 정확히는 말을 걸지 않아서 계속 단골일 수 있었는데, 선을 넘으신 거다. 결국 사장님들의 과한 텐션이 부담스러워 발길을 끊어버린 곳들도 더러 있었지만, 이곳만큼은 예외였다. 이곳 사장님은 나처럼 먼저 말을 걸지 않으신다. 덕분에 우리는 서로에게 굉장히 소원한 관계다(그래서 아주 편안하다). 간혹 나와 친해지려고 다가오는 사람들에게 우스갯소리처럼 하는 말이 있는데, 말장난 같지만 진심이다. 나와 친해지고 싶다면, 나와 친해지려고 하지 않으면 된다(매우 간단하지 않은가). 시간이 축적돼 어느 순간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다보면 그 안에서 신뢰가 쌓이고, 그게 또 하나의 관계로 자연스레 발전하게 된다는 뜻이다. 꼭 서로에게 밀착되어 친근함을 드러낼 필요 없이 말이다(내 밥 걱정하는 사람들이 어찌나 많은지, 아이고).

앞서 말한 다락방 카페에 가면 조용히 앉아 책을 읽거나 노트북으로 글을 쓰곤 하는데, 집중이 좀 되어간다 싶으면 날렵한 발소리와 함께 어김없이 등장하는 하얀 고양이 다름이가 있다. 노트북 자판 위를 꾹꾹 밟고 다니거나 그 위에 앉아 버리곤 하는데(야아...). 이 행위가 따뜻한 곳을 좋아하는(키보드에서 올라오는 미미한 열기를 포기할 줄 모르는) 고양이의 습성 때문이라는 건 연인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이다. 이 글을 쓰다보니 재작년 강화도에 북스테이를 하러 갔다가 만난 고요도 새록새록 떠오른다. 고요는 내가 묵었던 숙소에서 사장님과 함께 살고 있는 고양이다. 그곳에서 2박 3일을 지냈는데, 나와 발걸음을 맞춰 나란히 걸어(따라) 다니던 고요의 모습이 참 예뻤다. 내가 샤워하러 화장실에 들어가면 문 앞에서 구슬프게 야옹야옹 울다가도, 문을 열고 나오면 나와 보폭을 맞춰 계단을 함께 오르내리곤 했다(좁은 계단이라 가끔 몸통으로 나를 치기도...). 이렇게 아는 고양이가 하나둘 늘어가고 있다. 어제는 오전에 분리수거를 하면서도, 골목길을 걸어가면서도 동네고양이들을 여럿 만났다.

이 책의 제목인 "모두 늙어서 죽었으면 좋겠다"라는 문구를 전시에서 처음 마주했을 때, '오잉? 이게 무슨 말이야?'싶었던 기억이 난다. 다 죽어버리라는 뜻인가 싶어 섬뜩했던 기억도. 근데 그 뜻이 아니었다. 20년 동안 길(동네)고양이 찍사 겸 집사를 자청한 김하연 작가의 간절함이 담긴 문장이었다. 사진첩을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마음이 먹먹해지는 사진이 많았다. 존재 자체만으로 누군가에게 혐오의 대상이 된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감히 상상조차 어려운 마음이다(하지만 해충은...). 김하연 작가는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진행했던 고양이 전시를 통해 알게 된 작가였고, 이 책은 동물을 주제로 한 작은 서점에서 만난 책이다. 부끄럽게도 나는 처음에 이 작가의 이름만 보고 여성 작가인 줄 알았는데, 웬걸. 이 또한 나의 편견이었다. 어릴 때 친했던 동생 중에 하연이라는 이름을 가진 어여쁜 아이가 있었는데...

'그렇
'그렇
해로운 사람은 해로운 사람이 맞다

백온유 작가의 『유원』은 비극적인 사고 속에서 살아남은 열여덟 살 소녀, 유원의 이야기다. 주인공 유원은 12년 전 화재 사고에서 언니의 희생을 통해 살아난다. 위층 할아버지가 피우던 담배꽁초에서 시작된 불길이 아래층까지 옮겨 붙었고, 언니 유예정은 당시 여섯 살이던 유원을 물에 적신 이불로 감싸 11층 베란다에서 던진 것이다. 결국 화재 속에서 언니는 목숨을 잃었고, 떨어지는 유원을 받아낸 아저씨는 의인이 되었지만 한쪽 다리가 망가졌다. 하지만 '용감한 의인'이자 '시민 영웅'이 된 아저씨는 세상이 말하는 의인이 아니었다. '이불 아기'로 기억되는 유원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목숨 값'을 받아낸다.


지난 주말,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연극을 보고 왔다. 『유원』을 읽으면서 아저씨에 대한 지긋한 감정이 여러 번 올라왔는데, 연극을 보면서는 그 감정이 극에 달아 치를 떨었다. 유원이 사고를 겪은 후부터 세상에는 그녀를 모르는 이가 없었다. 모두들 기적처럼 살아난 아이가 어떻게 살고 있는가를 궁금해하고, 살려낸 이를 칭송한다. 하지만 정작 유원의 삶은? 자신을 살린 언니 몫까지 '행복'을 저당 잡힌 채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가라는 '강요'를 받는다.


"나는 나를 살린 우리 언니가 싫어. 나는 나를 구해 준 아저씨를 증오해."


과연 주인공 유원의 마음을 누가 알까. 그녀는 누구에게 이런 속마음을 고백할 수 있었을까. 징그러울 정도로 자신을 따라다니며 돈을 갈취하는 아저씨와 그런 아저씨에게 쩔쩔 매는 부모님의 모습을 보며 그녀는 얼마나 화가 났을까. 목숨을 살려준 것을 온전히 감사할 수 있었을까. 감사를 강요받는 삶은 대체 어떤 삶일까. 이번 사업도 망했다며 잊을만하면 한 번씩 찾아와 자신의 부모님에게 돈을 요구하는 아저씨를 보며 유원은 치를 떤다. 그리고 (속으로) 소리친다. 아저씨가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제발 죽어버리라고. 이 장면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 소설을 쓴 백온유 작가는 '작가의 말'을 통해 이 소설을 쓰게 된 계기를 남겼다. 소설을 쓰고 싶다 생각했던 무렵, 그녀는 누군가를 열렬히 미워하고 있었고, 그래서인지 '아저씨'라는 인물이 자신 안에서 가장 먼저 구체화되었다고 한다. 이야기가 느리지만 분명하게 진전되면서 그보다 중요한 인물들이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했다고. 나는 그녀의 글을 읽으며 '아 이게 바로 소설가의 힘이구나' 싶었다. 누구든 어떤 이를 지독하게 미워할 수 있고, 싫어할 수도 있다. 더 나아가 죽이고 싶을 수도. 그런데 그 미움의 감정을 바탕으로 하나의 스토리가 탄생하는 과정에서 여러 인물들이 줄줄이 뻗어 나온다는 게 정말 놀라웠다. 단순히 한 장면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그 장면을 바탕으로 여러 갈래로 뻗어가는 생각의 고리와 상상력이 말이다.


소설을 읽으면서 어렴풋이 그려왔던 유원의 모습은 단단하고 성숙한 주인공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연극을 통해 만난 유원의 모습은 사뭇 달랐다. 늘 어깨를 움츠리고 다니며 목소리조차 희미한, 연약한 아이였다. 감정을 표출하지 않고, 자칫 어눌할 수 있는 말투로 느릿느릿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아이. 자신의 재능을 아무리 칭찬해도 별거 아니라고 연신 손사래를 치며 자리를 피해버리는 아이. 언니의 몫까지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강박에 바란 적도 없는 목숨 값을 톡톡히 치르며 '너는 행복해야 한다'는 주문을 강요받은 채 묵묵히 살아간다. 아저씨를 향한 역겨운 감정마저 꾸역꾸역 삼킨다.


그녀를 보는 내내 얼마나 화가 나던지. 그녀의 모습에 화가 났다는 게 아니라 행복을 강요하는 주위 사람들의 행동이 지독하게 싫었다. 본인들 인생이나 똑바로 살 것이지, 오지랖들은. 그들은 그게 정말 원이를 위하는 말이라 생각한 것일까. 간혹 자녀를 통해 이루지 못한 자신의 꿈(과 욕심)을 대신 성취하려는 부모들의 모습을 볼 때면 역함 감정이 올라오곤 하는데, 이 작품도 비슷한 마음이 여러 번 올라왔다. "너나 잘 하세요"라는 말이 쏟아져 나올 것만 같았다. 하지만 원이는 나와 달랐다. 지혜롭고 강한 아이였다.


나는 처음으로, 그리고 진심으로, 언니의 용기를 닮고 싶었다. 이 모든 것들을 누리게 해 준 언니를. 나는 새롭게 태어나는 기분이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천천히 지상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벌써부터 아쉬웠다.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서 허탈하지 않았다. 수현이 두 손을 흔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착지할 때도 해변을 10미터 정도 달린 후에야 완전히 멈춰 섰다.


누군가를 지독하게 싫어하는 마음이 소설로 태어날 수 있을까. 이 말을 하면서도 웃음이 나는 건, 나 또한 누군가를 지독하게 싫어하는 마음으로 쓴 소설이 있었기 때문이다. 혼자만 간직하고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백온유 작가는『경우 없는 세계』라는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된 작가다. 작년 봄에는 가온도서관에서 진행했던 백온유 작가의 북토크를 다녀오기도 했다. 다소 여린 듯한 외모에 살짝 당황했던 것도 잠시, 마이크를 통해 울려 퍼지는 그녀의 목소리는 강단 있고 또렷했다. 문창과를 전공한 그녀는 청소년 시절, 어른들을 맹목적으로 믿는 경향이 강한 아이였다고 한다. 단순히 어리고 순진해서였다기 보다는 다소 안일하게 어른들을 의심하려 들지도 않았다고. 이는 성인이 되고서도 마찬가지였는데, 부당한 일을 당해도 되도록 참았고, 그런 태도를 뒤늦게 부끄럽다 생각하면서 좋은 어른이 되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고 한다. 이 책에 등장하는 유원과 수현도 너무 일찍 철이 들어버린 성숙한 아이들이다. 극중 수현은 유원의 유일한 친구이자, 유원을 구한 아저씨의 딸이다. 알고 접근한 건 아니었지만 어쩌다 보니 둘은 친구가 되어버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수현은 원이보다 더 아저씨를 증오하고 있었다. 아저씨에 대한 죄책감이 많았던 원이에게 '아빠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고, 무거운 짐을 이제 그만 내려놓아도 된다 말하는 것도 수현이었다.


"아빠가...... 해로운 사람이라는 걸 인정하는 건 진짜 어려운 일이야. 그러고 싶지 않은데 나도 모르게 아빠의 행동에 이유를 찾아 주게 되거든. 아빠도 아빠다운 아빠의 사랑을 제대로 못 받고 자라서 그런 거라고, 혹은 한 번도 여유를 갖고 살아 보지 않아서 그런 거라고, 살면서 누군가를 도와 본 게 처음이라, 은인이 되어 본 것도 처음이고 그런 식의 대접을 받아 본 것도 처음이라 거기서 아직까지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거라고. 내 머릿속에서 자꾸만 아빠를 가련한 사람으로 만들거든."
수현의 노력이 가상했다.
"이제 알아. 아빠는 해로운 사람이야. 아빠는 이 세상에 해로워. 너한테도, 나한테도. 아빠는 변하지 않을 거야. 포기해야 돼. 나는 아빠랑 다르게 살 거야. 너도 내 노력을 우습게 보지 마."
수현은 아빠의 비겁함, 구질구질함, 위선, 아빠에게 기대는 것이 아니라 아빠를 아이 달래듯 달래 가며 격려하고, 다독이는 것, 아빠에게 또다시 실망하는 일련의 일들에 지쳐 있었다.


좋은 어른이 된다는 것을 얼마나 힘든 일인가. 극장을 나서면서 생각이 깊어졌다. 무거운 공연이었다. 공연 중간중간 관객들의 울음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오기도 했다. 정작 그때는 눈물을 꾹꾹 잘 참다가 뜬금없이 커튼콜에서 눈물이 터지고 말았다. 왜 하필 그 타이밍에 눈물이 터졌던 것일까. 유원 역할을 맡은 배우가 꾸벅 인사를 하는데, 그 모습이 어찌나 원이 같던지. 등을 토닥거리며 꼭 안아주고 싶었다. 이 글을 쓰면서도 자꾸 눈물이 나, 휴. 심지어 이번 연극은 연기를 못하는 배우가 단 한 명도 없었고(어쩌면 이게 당연한 건데, 당연하지 않은 공연을 꽤 많이 봤다) 발성도 좋았다. 생생하게 전달되는 그들의 감정선에 울컥하기도 여러 번, 원작을 읽고 오길 잘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떤 작품은 더 깊이 알아갈수록 농도가 짙어진다. 책으로 한 번, 공연으로 또 한 번. 마음에 꾹 눌러 담았다. 아직도 난 원이와 수현이가 어딘가에서 살아 숨 쉬는 것만 같다. 반듯하고 당찬 그들만의 호흡으로 말이다.

"사람
"사람
엄마를 만났다?

오늘 출근길에 엄마를 만났다. 아니, 만나지 않았다. 아니, 만났다. 아니, 만나지 않았다.

늘 타던 151번 버스를 타고 출근하던 길이었다. 버스 맨 뒷좌석에 앉아 책을 읽다가 피곤함이 몰려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반복적인 버스의 움직임이 요람처럼 편안하게 느껴졌다. 내려야 할 정류소를 지나칠까 싶어 간간이 눈을 떠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기도 했다. 한 번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장소가 달라져있었다. 회사에 다다를수록 습관적으로 몸이 먼저 반응했다. 정신이 서서히 깨어남을 느끼며 다섯 정거장 정도를 앞두고 있던 와중에 하차문 앞에 서 있는 한 여성이 눈에 들어왔다. 엄마와 많이 닮아있었다. 작은 키에 수수한 옷차림, 짧은 단발머리, 두툼한 가방, 머리숱이 많아 핀으로 야무지게 고정한 것까지 하나하나 엄마와 닮아 있... 아니, 엄마였다. 아무리 봐도 엄마가 맞았다. 엄마가 하차벨을 누르고 문 앞에 서 있었다. 그전까지만 해도 비몽사몽했던 정신이 확 맑아지는 게 느껴졌다. 눈을 비비고 다시 봤지만 엄마가 맞았다. 작년 봄 이후로 처음 보는 엄마였다.

'이 시간에 엄마가 왜 여기 있을까' 잠깐 생각하다 하차할 정류장이 조계사인 걸 보고 그럴 수 있겠다 싶었다. 그녀는 손잡이를 잡고 버스가 멈추길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자리에서 스르륵 일어나 그녀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한 걸음, 한 걸음이 느릿하게 감각됐다. "엄마"라는 목소리가 차마 나오지 않아 부드럽게 그녀의 팔을 잡았다. 갑작스러운 누군가의 손길에 깜짝 놀란 그녀는 고개를 돌려 나와 눈을 마주쳤다.

'엄마다'

영화나 드라마를 볼 때마다 종종 의아했던 장면이 하나 있다. 만나기를 간절히 바라던 상대가 눈앞에 나타나면 그 사람이 아닌데도 상대를 착각하는 주인공들의 모습이다. 그런 장면들을 볼 때마다 속으로 들었던 생각은 '에이, 거짓말'이었다. 그리고 지금 내가 그 주인공이 되었다. 우리 두 사람은 몇 초 동안 서로를 가만히 응시했다. 그리고 서서히 정신이 들었다. 엄마가... 아니었다. 엄마가 아니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내가 화들짝 손을 놓으며 "어머, 죄송해요! 착각했어요!"라고 연신 죄송하다는 말을 건네자 그녀는 인자하게 웃으며 괜찮다고 말했다.

때마침 정류장에 다다른 버스의 뒷문이 열렸다. 그녀가 먼저 내렸다. 이 상황이 민망했던 나는 마치 그 정류장에서 내리려고 준비했던 사람처럼, 엉겁결에 그녀를 따라 내렸다. 먼저 내린 그녀는 신호등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멀뚱히 서서 한동안 그 자리를 지켰다. 쉽사리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서서히 멀어져 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멀거니 바라보다 차차 정신이 들었다. 고작 10분도 채 걸리지 않았던 짧은 시간 동안 벌어진 일이었다.

엄마가 보고 싶었다. 엄마가 보고 싶지 않았다. 엄마가 보고 싶었다. 엄마와 닮은 사람이 아니라 진짜 엄마가 보고 싶었다. 나를 다그치며 상처주던 엄마가 아니라, 나를 향해 다정하게 웃어주던 엄마가 보고 싶었다. 하지만 엄마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안다. 징징대지 말라고 속으로 다그쳤다. 눈물을 꾹 참고 입술을 꼭 깨물었다. 주먹도 힘껏 쥐어 보았다. 다시 힘차게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러다 지각한다'

내가
내가
단어를 고르시오

올해 나의 키워드를 계속 고민하고 있다.

작년 한 해 나의 키워드는 '밀도'였다. 더 구체적으로는 '밀도 있게 살아가기'

평소에도 작은 것 하나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편인데, 작년에는 이 키워드 덕분에 그 감각이 한층 더 깊어졌다. 무언가를 느릿하게 바라보는 시간이 삶의 곳곳에 묻어났다. 물끄러미 바라보고, 골똘히 생각하고,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깊이를 담고자 했다.

올해도 키워드를 정하려 했는데, 작년처럼 단번에 정해지지 않는다. 두 가지를 놓고 계속 고민 중인데, 평화와 평온이라는 단어를 이리저리 입으로 굴려보고 있다. 고작 평'화'와 평'온'이라는 한 글자 차이라 언뜻 보기에는 말장난 같지만, 그 한 글자가 일으킬 파장은 꽤나 크다. 어떠한 문제를 맞닥뜨렸을 때, 평화롭고자 마음먹으면 선택지는 비교적 좁아진다. 단순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평온하기로 마음먹으면 선택지는 훨씬 넓어진다. 자세한 예시도 있는데, 연인에게 이 말을 전했더니 '올해 당신의 시선을 외부에 둘 것인가, 내부에 둘 것인가 고민하고 있군요.'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어떤 것을 골라도 내 편이 되어주겠다는 말에 든든한 마음이 차올랐지만, 혹시 둘 다 하면 안 되는 거냐는 질문에는 살짝 웃음이 났다. 으아 더 복잡해졌다. 이러다 전혀 뜬금없는 단어가 툭 하고 튀어나올지도 모르겠지만 뭐 괜찮다. 이제 고작 2일인데 조급할 필요 없지.

새해 첫날에는 작은 서점을 다녀왔다.

작년부터 찜해두고 꼭 가봐야겠다고 다짐했던 곳인데, 드디어 어제 방문한 것.

이렇게나 경사진 곳에 서점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게 그저 놀라웠던 해방촌 나들이. 새해라 그런가 손님들이 정말 많았다. 나도 가만가만 그 대열에 합류했지만(혼자 온 손님은 나뿐이었다) 마음에 드는 책이 없었다. 내가 상상했던 서점의 모습과도 거리가 멀어 살짝(아니 많이) 실망한 채 발길을 돌렸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버스에서 책을 읽다 꾸벅꾸벅 졸고 있는 나를 발견하곤 책을 덮었다. 몸이 유독 피곤했던 건 기대와 달랐던 서점의 모습 때문이었을까, 요 근래 고단했던 나의 마음 때문이었을까.


뭐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좋다. 새해니까.

관계나
관계나
2025년을 기다리며

한 달에 한 번씩 만나고 있는 유리(가명)는 만날 때마다 키가 한 뼘씩은 더 자라는 것 같다. 이러다 내 키를 금방 따라잡겠다 싶은데, 뭐 어때. 남자아이라 더 쑥쑥 크면 좋지. 근데 키만 자라는 게 아니라 말수도 함께 자란다. 유리를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낯가림이었던지 뭘 물어도 돌아오는 답이 짧았다. 유리는 말이 없는 아이인가 싶어 덩달아 나도 같이 말을 삼켰다. 꼭 필요한 말이 있을 때는 한 글자 한 글자 단어를 고르고 문장을 구성해서 아이에게 조심스레 건넸다.

그랬던 유리를 만난 지도 이제 1년이 넘었다. 아이는 수다쟁이가 됐고, 우리를 만나는 순간부터 헤어지는 순간까지 입을 쉬지 않는다. 요즘은 부쩍 이런 말도 하는데.

"저 되게 바빠요. 저 만나러 찾아오시는 분들도 많아요. 이번 주 토요일에는 네모님이랑 만나고요. 다음 주 토요일에는 세모님이랑 만나고요. 다음 주에는 동그라미님, 또..."

의기양양하게 말하는 아이에게 나는 이렇게 답한다.

"우와, 유리 되게 바쁘구나, 엄청 인기쟁이네. 너무 좋겠다. 우리랑도 만나줘서 고마워."

나의 질투를 바랐던 걸까. 원하던 반응이 아니었는지 뾰로통한 표정으로 '흥'이라고 말하는 것 같아 그 모습이 퍽 귀엽다. 차 뒷좌석에 나란히 앉아 대화(라 쓰고 말장난이라 읽는)를 나누고 있는 우리 두 사람을 룸미러로 지켜보던 연인은 운전대를 잡고 가만히 웃는다. 기관에서는 우리가 하는 것을 친교 후원 활동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유리는 이 친교 후원 활동이 세 번째인 아이다. 입양과 파양이라는 단어가 위태롭게 존재하듯, 이 활동 또한 마찬가지다. 고작 10살인데, 두 번이나 일방적으로 활동이 종료됐다고 한다. 물론 후원자도 사정이 있을 것이고, 나 또한 유리를 만나면서 마냥 즐겁기만 했던 건 아니니까. (유리에게는 비밀이지만) 그만두고 싶을 때도 많았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이제 유리는 11살이 된다. 지난번에 만났을 때는 빨리 겨울방학이 왔으면 좋겠다고 노래를 부르던데, 이번에 다시 만나면 또 어떤 말을 할까. "인생 뭐 별거예요?"라고 세상 시니컬하게 말할지, "공부가 싫어요."라고 투덜거릴지 알 수 없는 노릇. 그럼에도 이 아이의 목소리를 좀 더 오랫동안 천천히 듣고 싶다. 유리에게 좋은 사람이고 싶은데, 아직 난 모든 게 서툴기만 하다. 유리가 지금보다 더 나이가 들어 우리를 기억할 때, 적어도 미워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그러려면 내가 잘 해야겠지. 바른 사람이 되어야겠지.

한동안 정아은 작가님 소식에 마음이 좋지 않았다. 실감이 나지 않았다. 사고 소식을 알게 된 날 오전에도, 나는 연인에게 정아은 작가님의 이야기를 했었다. 2025년에도 이분의 작품을 더 읽고 싶다고,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분이라고. 지난 주말, 연이은 사고와 차마 입에 담기조차 조심스러운 참사에 할 말을 잃었다. 해가 갈수록 왜 이런 일들이 반복되는 것인지 참담했다. 그래서 어제는 퇴근길에 이곳저곳을 무작정 걸었다. 정처 없이 걷고, 또 걷고. 걷다 보면 생각이 조금 단순해지고, 어떤 감정은 사그라들기도 하니까.

연인은 어린 나이에 아버님을 잃었다. 갑작스러운 사고사였고, 살면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였다고 했다. 장례식장에서 그가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산 사람은 살아야지"였는데, 그는 그 말이 정말 싫었다고 했다. 딴에는 위로랍시고 어른들이 건네는 말인 건 알겠는데 "슬퍼하고만 있지 말라"는 의미로 닿았다고. 슬픔에 빠진 유족에게 필요한 건 충분히 슬퍼할 시간이라고, 당시의 그는 생각했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의 말을 듣고, 나도 혹시 누군가에게 이 말을 생각 없이 건네지 않았나 곰곰이 돌아봤다. 내가 직접 경험한 게 아닌 상황이나 마음을 마주했을 때, 대체로 말을 삼키자 마음 먹었다. 경험자의 말에 무게를 담기로 했다. 사려 깊지 못한 나의 어떠한 말과 행동이 누군가에게 상처로 남을 수 있다 생각해서다. 지금의 이 상황도 마찬가지다. 모든 게 조심스럽고 숙연해지지만, 일상을 지키는 방식으로 애도하려 한다는 장작가님 말씀에 가만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몸도 마음도 유독 차가운 올해의 마지막 날이다.

"무슨
"무슨
찰스 디킨스와 함께한 3개월의 여정

내가 살고 있는 곳은 6평 정도의 작은 집이다. 이 작은 집에도 책장이라는 걸 하나 뒀는데, 맨 위 칸에는 보통 꽃이나 액자, 디퓨저 등을 올려둔다. 근데 지난 토요일부터 새로운 아이(?)가 자리를 잡았다. 이 용도로 가능한가 싶었는데, 상자 뒤편에 적혀 있는 문구를 보니 충분히 가능해 보였다.

"빅토리아 시리즈는 현대인들의 생활 공간에 작은 갤러리를 선물하고자 만들어진 제품으로, (중략) 어디에 두어도 아름다울 수 있도록, 얇은 액자 형태로 디자인했습니다."

이 작품의 본래 용도는 '차'다. 마실 수 있는 차. 여러 종류로 구성되어 있는데, 내가 가장 좋아하는 히비스커스도 있어 어찌나 반가웠던지. 모임에서 받은 선물이라 소중하게 야금야금 아껴 먹겠지만 말이다.

어떤 일이든 시작하기에 앞서 늘 고민이 많다. 이번 모임도 마찬가지였다. 한 달에 한 권이지만 책 자체가 워낙 두껍기도 했고, 거기다 고전. 심지어 찰스 디킨스의 작품은 읽어본 적이 없어 더 그랬다. 그에게 처음 관심을 갖게 된 건《어바웃타임》이라는 영화 덕분이었다. 영화 설정상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는 초능력이 대를 이어가는데, 그중 아들과 아버지의 대사가 인상 깊었다.

"아버지는 이 능력을 어떻게 쓰셨어요?"

"주로 책을 읽었지. 인간이 읽을 수 있는 책이란 책은 모두 다 읽었어. 두 번씩, 디킨스는 세 번. 넌 어떻게 쓰고 싶니?"


스치듯 흘러간 대사였지만, 책을 좋아하는 나에게는 꽤 인상 깊게 남았다. 찾아보니 찰스 디킨스는 셰익스피어와 더불어 영국을 대표하는 최고의 작가로 기억되고 있었다. 그는 소설가로서 현대의 할리우드 최고 스타가 누릴법한 대중적 인기를 누렸고, 톨스토이가 19세기 최고의 문호라 극찬한 작가이기도 했다. 그에게 한창 관심을 가졌을 당시 골라뒀던 작품도 하나 있는데, 바로《두 도시 이야기》다. 이 책은 디킨스의 여러 작품 중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작품 중 하나다. 프랑스 혁명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삶과 귀족의 폭압 정치, 복수의 광기 등을 생생하게 묘사한 역사소설이자, 아름답지만 비극적인 희생과 염원을 담은 숭고한 사랑 이야기라고 했다. 언젠가는 꼭 완독하리라 다짐하고 읽을 책 목록에 고이 넣은지도 어언 5년, 서서히 잊혀져가나 싶었는데 그믐에서 찰스 디킨스 모임을 만난 것이다. 일명 "[박산호의 빅토리아 시대 읽기] 찰스 디킨스"

심지어 마지막 책은《두 도시 이야기》였다. 기회다 싶었다. 차일피일 미루기를 그만두고 이참에 진짜 읽어보자 굳게 마음먹었다. 그럼에도 선택은 늘 조심스럽다. 공지만 몇 번을 읽고, 또 읽으며 갈팡질팡했다. 펀딩 페이지는 또 몇 번을 들락날락했던지. 그렇게 모임 시작일에 거의 임박해서야 조심스레 신청버튼을 누르고, 장장 3개월에 걸친 대장정이 시작되었다.

내가 고른 북클럽 패키지는 오프라인 완독파티가 있는 E였다. 완독파티는 12월 중순이었지만, 그전에도 세 번의 줌미팅이 예정되어 있었다. 첫 작품인《위대한 유산》을 읽으면서 걱정과 달리 술술술 읽히는 그의 필체와 통통 튀는 듯한 주인공들의 생동감에 반해버렸다. 정의롭고, 도덕적이며, 책임감 있는 인물들을 응원했고, 안쓰럽고 눈길이 가는 인물들에게 마음이 닿기도 했다. 보통 소설을 읽을 때, 등장인물 중 꼭 한 명씩은 좋아하는 인물이 있어야 다음 장으로 넘어가기가 한결 수월한데, 다행히 각각의 작품마다 괜찮은 인물들이 꼭 한 명 이상씩은 있었다. 고통을 감내하며 자신의 결핍을 애써 꾹꾹 누르는 인물들에게 유독 마음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는 기질이구나 싶었다.

처음 신청할 때만 해도, 12월이 언제 오나 까마득하다 여겨졌는데, 웬걸.《올리버 트위스트》를 완독하고,《두 도시 이야기》모임이 시작되고 나니 이 모임의 피날레(완독파티)가 점점 가까워져가고 있음이 비로소 실감 났다. 특히《두 도시 이야기》는 찰스 디킨스의 세 작품 중 가장 기대를 많이 했던 작품이라 앞서 읽었던 두 권보다 더 비장한(?) 각오로 한 땀 한 땀 메모하며 정성스럽게 읽어나갔다. 이번에는 등장인물들의 이름과 특징을 모두 기억하고야 말겠다는 다부진 일념으로 말이다. 하지만《두 도시 이야기》는 세 작품 중 배경이 가장 넓었다. 나라 대 나라의 이야기였다(과거와 현재를 오가기도). 프랑스 혁명을 다루고 있었지만, 영국 국적을 가진 인물들 덕분에 '이 사람이 어디서 왔다고 했지?', '이 사람은 또 어디서 왔다고 했지?'라는 도돌이표 질문을 던지며 기억력의 한계를 여러 번 시험당하기도 했다. 역사적 사실과 더불어 이들의 세계관에 적응하는 데만 한참 걸렸다(이때 읽는 속도가 현저히 떨어졌다). 그렇게 인물들 이름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싶을 무렵, 거침없이 휘몰아치는 디킨스의 필력에 책을 놓지 못하고 훌훌 읽어나가다 갑자기 완독. 오잉? 후반부로 갈수록 흥미진진한 전개에 책을 놓을 수가 없었고, 그러다 짠-하고 끝나버린 것.

교과서에서 하나의 사건으로만 접했던 프랑스 혁명을 이야기로 만나니 몰입도가 달랐다. 갑자기 타임슬립을 통해 프랑스 광장 한복판에 놓인 기분이었다. 피가 낭자한 길거리를 터덜터덜 힘없이 걸어가다 누군가의 광기에, 죽일듯한 시선에 화들짝 놀라 황급히 몸을 숨기고, 참았던 숨을 몰아쉬고.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도망치고, 넘어지고, 다시 또 도망치는. 인기척도 느끼지 못했는데, 뒤에 있던 누군가가 "어이, 시민" 하면서 어깨를 톡톡 치고, 싸늘하게 미소 지을 것만 같은 스산함. 읽는 내내 아찔했던 장면이 많았는데, 그 아찔함을 현실에서 마주하는 사건이 이 책을 읽는 도중 생겨나고 말았다.

다름 아닌 비상계엄령. what the...

비상계엄령이라는 걸 살아생전 경험하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시각 나는 잠들어있었고, 일어났을 무렵에는 이미 모든 상황이 종료된 후였다. 다음날 뉴스를 보고 나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알게 됐다. 잠들어있던 나와 달리 당시의 모든 순간을 생생하게 경험했을 수많은 사람들을 생각하니 정신이 아득해졌다.

부모님은 두 분 모두 고향이 전라도다. 심지어 아빠는 광주 토박이다. 1980년 광주에서 비상계엄령과 5·18 민주화운동을 나란히 겪었던 아빠는 당시 대학교 2학년이었다. 집 밖으로 나가는 것조차 살벌했다던 그때 그 시기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들었던 기억이 난다. 마치 하나의 전설처럼 말이다. 근데 21세기 서울 한복판에서 비상계엄령이라니, 나라가 산산조각난 느낌이었다. 연일 기사가 쏟아졌다. 2016년 탄핵을 외칠 때와는 차원이 다른 두려움이었다.

그리고 다시 소설로 돌아가 보자면, 이 혼란한 시기에《두 도시 이야기》를 만날 수 있었던 게 천만다행이었다. 프랑스 혁명의 과정이 지금의 우리와 닮아있다 여겨졌다. 초반에는 프랑스 귀족들의 횡포에 환멸을 느끼고 분노한 시민군의 모습을 응원했지만, 어느 순간 선을 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명했던 구호가 흐릿해지면서 기요틴의 존재가 섬뜩하게 다가왔다. 피로 얼룩져가는 서사에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오히려 다행이다 싶었던 거다. 우리가 저들처럼 되지 않도록, 지금의 혼란한 상황에 다시금 중심을 잡을 수 있게 해준 책이었으니까. 앞으로 내가 이 나라에서 어떤 마음가짐으로, 어떤 시민의식을 가져야 할지 실마리가 보이는 것 같았다.

그믐이 아니었다면 끝까지 완독하지 못했을 책이다. 박산호 작가님이 중간중간 전해주시는 역사적 배경과 찰스 디킨스의 이야기를 통해 모임은 더욱 풍성해졌다. 번역체에 낯설어하던 감각도 조금은 무뎌질 수 있었다. 날짜도 어쩜 이렇게 찰떡같이 들어맞았을까. 모든 게 신기하기만 했다. 뒤숭숭한 분위기에 모임이 가능할까 싶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오히려 반대. 세상은 소란스럽지만 우리는 계속해서 우리의 불을 밝혀야 한다 생각했다. 어딘가에서 책을 읽고 있는 이들이 존재한다는 건 그 자체만으로 힘이 솟는다. '우리가 사라지면 암흑이 찾아온다'는 그믐의 구호처럼, 그믐이 사라지면 내 인생에 암흑이 찾아올 것만 같았다.

약속장소인 솔깃은 신당중앙시장 구석에 위치한 작은 주점이었다. '그럴듯해 보여 마음이 쏠리는 데가 있다'는 '솔깃하다'의 어근에 걸맞게 매력적인 장소였다. 타고난 길치라 그 근처를 빙빙 돌긴 했지만, 도착하고 보니 꼭꼭 숨어있는 비밀 아지트 같았다. 아는 사람만 찾아올 수 있는 우리들만의 비밀 집결지랄까(그믐의 암호를 대시오!). 공간이 협소할 거라 예상했는데, 웬걸. 내부에 화장실도 있고, 옹기종기 모여앉아 책 이야기를 나누기에 안성맞춤인 장소였다(역시 대표님의 안목). 은은한 조명과 색색의 의자들, 부엌과 연결된(?) 뻥 뚫린 벽까지, 인테리어 하나하나가 감각적이었다. 사장님이 인센스 스틱을 피우셨던 건지 모임 중간중간 향이 느껴지기도 했는데(나만 느꼈을까), 그 덕에 살짝 몽롱한 것이 이승이 아닌 저승에 있는 느낌이 들기도(뭐래니...).

그래서 완독파티 모임이 어땠냐면 말이지.

너무 좋았다.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너무너무너무! 그믐이 아니었다면 골방에서 혼자 읽고 덮었을 (아니 어쩌면 시작도 못했을) 책을 서로 진도에 맞춰 착착착 단계별로 올라가 최종 보스(?)를 짜잔하고 만난 느낌이랄까. 세상은 여전히 혼란하지만, 우리는 솔깃에 모여 도란도란 삶을 나눴다. 책과 삶, 책과 사람. 그 모든 목소리가 하나하나 생생하게 울려 퍼졌고, 보물처럼 소중했다. 연말을 이렇게 따스하게 마무리할 수 있어 더없이 기쁘기도 했다. 처음 이 모임에 참여하고자 결심했을 때만 해도 '12월은 언제 오나', 책 진도가 나가지 않을 때는 '내가 이걸 다 읽을 수 있긴 한 걸까' 좌절하기도 했다. 하지만 완독파티에서 소회를 나눌 무렵이 되어서야 '이제 정말 끝났구나' 실감이 났다. 헛헛한 마음도 올라왔다. 헤쳐 모여의 감각에 익숙한 나지만, 모임이 길었던 만큼 여운도 길게 남았다. 모임 말미에 그믐은 내게 생명수 같다고 말했는데, 정말 그러하다. 길잡이별이 되어주신 김새섬 대표님께도, 장강명 작가님께도 늘 감사한 마음이다. 부디 두 분이 오래오래 건강하게 그믐을, 독서 생태계를 잘 지켜주셨으면. 그럼 난 가만가만 두 분의 발자취를 따라가야지.

(자신 있어요!)

연인에게는 이 모임을 시작할 때부터 조잘조잘 재잘재잘 자랑을 워낙 많이 했었다. 줌미팅이 한 번씩 끝난 다음 날이면, "이번 모임은 말이야"로 장광설을 늘어놓았고, 그는 그때마다 활짝 웃으며 내 이야기를 경청했다(나쁜 남자가 아니다, 흥). 그가 계속해서 기다렸던 질문은 세 권을 모두 읽고 어떤 작품이 가장 좋았냐는 질문이었다. "아직은 비밀이야"를 외쳤다가 완독파티가 끝난 다음 날이 되어서야 나의 최애작품을 밝혔다.《위대한 유산》에서《두 도시 이야기》로 옮겨갔다고. 우리 두 사람도 책으로 만난 사이라, 책 이야기를 할 때 가장 신이 난다. 다음 주에는 둘만의 책 파티(?)를 하기로 했다. 경건하게 앉아 올해 읽었던 책 중 가장 좋았던 책과 새롭게 알게 된 좋은 작가님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 그다음 주에는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도서관이나 북카페)에 가 하루 종일 책만 읽자고 다짐했다. 종종 연인에게 농담처럼 하는 말이 있다. 나는 당신이라는 책을 계속해서 읽고 싶다고. 헤어질 때 헤어지더라도, 만나는 동안만큼은 그에 대해 다 안다 자신하지 않고, 하루하루 그라는 책을 읽어가겠다고 말이다.


덧, 완독파티가 끝난 후에는 벽돌책 모임에 몰입하고 있다. 매달 새로운 책이 정해질 때마다 관심은 많았지만 선뜻 시작하지 못했던건, 진입장벽이 높은 모임이라고 지레 겁을 먹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 달에 읽고 있는 책은《노이즈》다. 벽돌책 모임을 꾸준히 이어가고 계신 분들은 이 책 정도(?)면 벽돌책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지만(그래서 용기 내 신청했다), 나는 아니다. 진도에 맞춰 읽으면서 살짝 버거움을 느끼고 있다. 그럼에도 소설을 놓을 수는 없어서 김초엽 작가님의《지구 끝의 온실》이라는 책도 함께 읽고 있다.

나의 랠리는 무엇일까

모임은 29일이 지나면 종료된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과 답변이 이어진다. 머릿속에서만 맴돌던 생각들이 하나하나 문장이 되어 자리를 잡아간다. 그럼에도 어떤 질문은, 또 어떤 대답은 끝끝내 이해하지 못한 채 생각이 닫히기도 한다. 고집스럽게 내 주장을 물고 늘어지겠다는 게 아니라 이렇다 할 정답이 없는 질문과 답이라는 것이다. 살아가는 동안 스스로에게 혹은 다른 이들에게 계속해서 묻고 답을 듣고. 그렇게 차근차근 생각을 정리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나. 모르겠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었을 29일의 모임들이 차곡차곡 쌓여갈 때마다 묘한 고양감이 차오른다.

이 책은 작년에 처음 읽었다. 장작가님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자주 느끼는 감각인데 빨려 들어가듯 읽어나갔다. 주인공이 내 옷자락을 부여잡고 놔주지 않는 느낌, 그의 생각과 말투, 행동 하나하나가 선명하게 와닿는 느낌? 비틀어 말하고 싶은 지점도 있었지만, 그렇게 또 하나의 고통을 느낄 수 있다는 게 이 소설의 매력이지 않을까. 읽으면서 계속 '나의 랠리는 무엇일까'를 생각했다. 신기한 건 이 책을 읽게 된 계기가 되었던 사람이 얼마 전, 모임에 다시 돌아왔다는 것이다. 모든 글을 지우고 사라졌던 이가 아무렇지 않게,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나의 오래전 글에 답을 달았다. 응답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응답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속으로 궁금하긴 했다. 어떻게 지내요? 아니, 어떻게 지냈어요? 왜 말도 없이 도망치듯 사라졌었나요?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머릿속에 떠오르는 질문은 많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의 랠리를 완주하고 돌아온 것일까.

어떻게 지냈든 저떻게(?) 지냈든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 다행이다. 그거면 됐다.

어제는 오랜만에 혼자 영화관을 다녀왔다.《룸 넥스트 도어》라는 영화를 봤다. 보는 내내 떠올랐던 책이 한 권 있었는데, 놀랍게도 그 책을 원작으로 한 영화였다. 위에서 말장난처럼 읊었던《어떻게 지내요》라는 책이다. 영화는 대략적인 줄거리만 알고 갔던 터라 예상치 못한 연결고리가 퍽 신기했다.

그래서 영화는 어땠냐면 말이지... 마음에 묵직한 돌을 얹어놓은 것처럼 벅찼다. 삶과 죽음, 치열한 고뇌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다시금 《열광금지, 에바로드》가 떠올랐다. 엔딩크레딧이 끝까지 올라가고 관객들이 모두 빠져나갈 때까지 멍하니 자리를 지켰다. 작은 영화관이라 사람이 적었고 비켜줄 이가 없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자신이 죽는 순간, 그 옆방에 있어달라는 친구의 부탁을 들어줄 수 있는 이가 과연 몇이나 될까. 존엄한 죽음을 택할 수 있는 자유와 그것은 자유가 아닌 범죄라 말하는 이들의 목소리가 하나의 총성처럼 귓가를 땅땅 때렸다. 친구의 죽음(자살)을 바로 옆에서 지킨 주인공은 과연 그 기억을 안고 멀쩡히 살아갈 수 있을까.

다시 삶의 의미로 돌아가본다. 이건 결국 자신만 알 수 있는 것 아닐까. 요즘은 삶의 형태가 워낙 다양해지기도 했고, 직업과 직장의 유형이랄까, 속성? 도 점점 더 세분화 되어가는 것 같아서. 통속적인 행복의 틀이 산산조각 난 느낌이다. 자신의 가치를 오롯이 알아봐 주고 인정하는 건 결국 다 본인 만족이지 싶은 거다. 그런 의미에서 종현의 완주는 그에게도 나에게도 위안이 됐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지만 혹은 누군가 알아봐 준다 해도 그건 그거고 나는 나야! 라고 당당히 외칠 수 있는 어떠한 가치(달든 쓰든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는 마음가짐으로)를 좇는 건 꽤 매력적인 일이라 생각하니까. 그럼에도 이번 수북탐독 모임에서는 더 깊은 대화가 오갔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는 선에서 내가 하고 싶은 걸 한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장작가님의 말씀, 나는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이 딜레마를 받아들이는 것에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모순의 모순, 내가 뱉었던 말에 '아차'하고 걸려 넘어지는 지점들. 책임져야 하는 지점들. 이런 걸 하나씩 구체화하면서 가치관을 세워간다는 건 단단해짐과 동시에 저릿한 고통이기도 하다.

이어지는 글은 장작가님이 모임에서 하셨던 말씀인데, 너무 인상 깊어서 가만히 옮겨본다.

저는 세계 전체에 적용할 수 있도록, 더 넓게 또 더 촘촘하게 만드는 방향으로 제 가치관을 발전시켜 보려 해요. 불가능한 작업이라는 건 압니다. 그래도 질문들을 던져 보는 일을 멈추지 않으려 하고 있습니다. 그 질문은 때로 ‘저런 행동은 얼마나 가치 있는 걸까’이고, 거기서 더 나아가 ‘저런 인생은 가치가 얼마나 있는 걸까?’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 네, 저는 속으로 다른 사람들의 인생을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런 작업을 하려는 이유는 두 가지(어쩌면 한 가지)입니다. 먼저 제 머리로 가치를 판단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제가 고민하지 않은 사안이 제가 판단하지 않았다고 해서 저한테 중립적으로 다가오지는 않습니다. 이미 다른 사람들이 내린 평가와 함께 옵니다. 제가 제 기준으로 가치를 판단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의 가치 판단을 그대로 따르게 됩니다. 또는 제가 충분히 생각하지 못한 상태에서 머리가 아닌 감성이나 원시적 본능의 영향을 받는 도덕적 직관에 따라 그 대상의 가치를 판단하게 됩니다. 특히 요즘은 윤리의 확장을 둘러싼 도전이 많습니다. 동물권이나 정체성 정치 같은 것들이 그렇지요. 그런 논의에 대해서 저는 지적으로 성실해지고 싶습니다. ‘착한 사람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면 나쁜 것’이라고 넘어가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게 고민을 해야 겨우 중립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둘째로 저는 이미 아주 크고 촘촘한 가치체계 속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가치체계는 바로 시장논리인데, 적어도 논리적 완결성은 갖추고 있습니다. 한국 IT 개발자와 에티오피아 어린이의 삶의 가치는 각각 얼마다, 하고 순식간에 계산해내는 가치체계입니다. 저는 그 가치체계의 의의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거기에만 의존해서 살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그 시장논리는 워낙 촘촘하기 때문에 제가 저항하지 않으면 제 삶의 모든 영역에서 힘을 발휘할 것 같습니다. 제대로 저항하려면 저는 시장논리가 힘을 발휘하는 영역-사실상 모든 영역-에 대해 저만의 가치체계를 마련해야 합니다.


모임에서 여러 의견을 나누면서 계속해서《표백》이 떠올랐다.《재수사》도 여러 번 언급됐는데, 이제 와 고백하자면 안타깝게도 사실 나는 아직《재수사》를 읽지 못했다. 장작가님의 저서를 거의 다 섭렵했음에도 유독 이 작품을 읽지 못한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주변에서 극찬하는 이들이 많았음에도). '미제 살인', '오피스텔', '범죄' 등과 같은 몇몇 키워드 때문이다. 시도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다만 혼자 살고 있는 나와 겹치는 지점이 많았던 여성의 모습에, 읽다가 포기했다. 평소에도 스릴러나 공포물을 질겁하는데, 이 책을 읽고 난 후 지금 살고 있는 공간에서 무서운 상상을 하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그럼에도 이제는 읽고 싶은 이유가 생겼다. 이번 모임 덕분이기도 하고, 최근에 만난 어떤 이 때문이기도 하다. 혼자는 아직 무서우니 내년에는 그믐에서 이 책을 주제로 같이 읽기를 시도해 보면 조금 나으려나. 괜찮으려나. 삶과 죽음에 대한 깊은 고찰과 토론은 두 팔 벌려 환영하지만, 꼬리물기처럼 이어지는 각종 살인 사건들의 서사만 잔뜩 듣게 되면 어쩌지. 시작도 안 해놓고 벌써부터 걱정인형들만 하나하나 데려오는 기분이다.

아버지
아버지
책이 사람의 등대라면서요

내가 처음으로 도서관(이라는 곳을) 갔던 게 언제였더라. 이 책을 읽으며 곰곰이 생각해 봤다. 7살쯤이던가, 창원에 이사간지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다. 영문도 모른 채 엄마 손에 이끌려 향하곤 했는데, 일단 건물이 아니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우리 동네 안에 정차하는 의문의 버스. 바로 이동도서관이었다. 책을 가득 실은 버스가 아파트 단지에 조용히 멈춰 서면, 엄마는 기다렸다는 듯 버스 안으로 들어가 나에게 책을 골라보라고 말했다. 하지만 엄마의 바람과 달리 어렸을 때의 나는 책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밖에 나가서 방방방 뛰어놀고 싶은데 그러지를 못 하니 그저 답답할 뿐. 온통 책으로 둘러싸인 버스 안에서 이 책 저 책 심드렁하게 뒤적거리다 마지못해 한 권을 고르는 식, 이게 나와 도서관의 첫 기억이다. 역사의 한 흐름처럼, 이제는 다 사라진 줄 알았던 이동도서관을 다시 찾아보게 됐다. '찾아가는 도서관'이라는 새로운 명칭으로, 여러 도서관에서 다시금 이런 형태의 도서관을 운영하고 있었다.


잊고 있던 도서관의 추억을 떠올리게 된 건 이번에 읽은 <사서의 일>이라는 책 덕분이다. 어떤 형태로 발현될지는 아직 모호하지만, ‘책과 관련된 일을 하겠다’를 아이-원트-송으로 흥얼거리는 내게 이 책의 제목은 꽤 의미심장했다. 매듭은 천천히 지으려 한다. 1인 출판사나 동네서점도 생각했었고, 글을 쓰는 직업(꼭 작가가 아니더라도)도 여러 가지를 떠올려봤다. 대학원(문예창작과나 국어국문학과)을 진지하게 고민했던 적도 있고, 읽고 쓰는 것과 관련된 편집자, 사서 등 온갖 직업군을 찾아보기도 했다(물론 이 모든 직업군은 기초가 없기 때문에 바닥부터 배워야 할 테지만). 그 모든 과정에서 만난 책이다. '책과이음' 출판사에서 '느린사람' 활동을 하면서 신청했던 두 권의 책 중 마지막 한 권이기도 하다. 이 책은 동두천시 사동초등학교의 도서관이 아닌, 부속으로 있는 '지혜의 집' 도서관에서 근무하는 양지윤 사서의 에세이다. 2021년에 출간된 책인데, 작가의 소개글에는 '어느덧 10년 차 계약직 사서의 소심하고도 치열한 도서관 운영기'라는 문장이 담겨있다. 이 책이 출간된 지도 3년이 지났으니, 그녀는 어느새 지혜의 집 사서로 13년 차가 된 셈이다.


지금껏 내가 주변에서 들어온 '사서'에 대한 이미지는 이런 것이었다. 조용하고 정적인 분위기. 안정을 추구하는 성격. 엉덩이가 무거운 편. 다독가. 그리고 종종 한가한 사람. 더러 맞는 점도 있고 완전히 틀린 부분도 있지만, 전반적으로 '모험'과는 거리가 먼 직업이라는 인상이 강한 듯하다. 사서가 되기 전, 내 생각 역시 주변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막상 도서관에서 오래 일하다 보니, 이곳만큼 내 안에 꾹꾹 눌러왔던 모험심을 자극하는 곳도 없었다. 그야말로 온갖 모험을 간접 체험할 수 있는 세상이라고나 할까.


오래전에 참여했던 독서모임에서 사서로 일하시는 분을 만났던 적이 있다. 당시 그 모임은 고정멤버로만 운영되던 곳이었는데, 그때 처음 알았다. 사서라는 직업이 얼마나 고단하고, 다재다능(심지어 힘도 세야 하겠더라는)해야 하는지를 말이다. 양지윤 사서가 책에 남겨놓은 문장처럼, 나 또한 사서라는 직업에 대한 일종의 환상이 있었다. 조용하고, 우아하고, 차분한 사람. 부드러운 목소리로 조곤조곤 대화를 이어갈 것 같은 느낌이랄까. 해박한 지식으로 책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고, 자신만의 책 취향이 꼿꼿할 것 같은 사람. 일도 마찬가지라 생각했다. 도서관에서 하는 일이 책을 만지는 일이라 생각하니, 뭔가 다 정적일 것만 같았다. 하지만 지인의 목소리를 통해 듣게 된 도서관의 모습은 꽤나 생경했다. 그곳 또한 누군가의 철저한 일터였고, 고상하게 앉아 책을 읽을 시간은커녕 각종 행사에 서류 작업에 정리할 것도 많고, 주말 출근까지 더해져 강행군이 따로 없었다. 모든 면에서 만능이 되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심지어 악성 민원도 잦아서 온갖 고충을 다 겪고 있었는데, 평일 퇴근 후 독서모임이었던지라, 지인의 지친 모습이 늘 안쓰러워 보였다.


양지윤 사서가 일하는 지혜의 집 또한 만만치 않은 곳이었다. 우선 도서관 자체가 작아 그곳을 찾는 발길이 거의 없었고, 일도 찾아서 해야 하는 분위기였다. 학교 도서관이 아닌, 학교와 떨어진 부속 도서관이라 더 그랬으려나. 심지어 학교 선생님들조차 지혜의 집 도서관에 큰 기대가 없어 보였다. 가만히 그 자리를 지켜주기만을 바랐다. 양지윤 사서는 그곳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역할이 딱히 없다는 사실에 깊은 자괴감에 빠지기도 하지만 이내 툭툭 털고 일어난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걸 혼자 감당해나간다. 첫날 도서관에 도착해서는 오랫동안 닫혀있던 그곳을 활짝 열고 청소하는 데만 하루 반나절의 시간을 쏟기도 한다. 화장실에서 담배를 피우거나 엉망으로 만들어놓고 도망치는 불량 학생들 때문에 거친 성정을 부러 나타내기도 하고, 쓰레기를 아무렇게나 버리고 온갖 수다를 떨며 도서관을 만남의 광장처럼 여기는 학부모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기도 한다. 교대해 줄 직원도 없이 홀로 그곳을 관리하느라 점심 먹을 시간조차 빠듯하지만, 알뜰하게 도시락을 싸와 자신만의 안온함을 찾아가는 단단한 모습에 잔잔한 미소가 피어오르기도 했다.


그녀는 그렇게 2년의 계약기간을 마치고, 무기계약직으로 전환되어 더 오랫동안 그 공간을 가꿔가게 된다. 적은 예산을 알뜰하게 모아 서가에 들일 책을 정성스레 고르고, 여러 교양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운영해간다. 도서관 사서이자 일본어 번역가이기도 한 그녀는 지혜의 집에서 직접 일본어를 가르치며 수업을 진행하기도 한다. 10년 넘게 도서관을 운영하면서 숱한 어려움을 만났지만 매번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자신의 방식대로 해결책을 찾아가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나도 모르게 "힘내!"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그녀에게 지혜의 집은 단순한 일터가 아니었다. "어릴 적부터 무언가를 기르는 일에는 서툰 나지만, 이 작은 공간만큼은 사라지지 않도록 끝까지 지켜내고 싶다."고 말하는 목소리에는 그녀만의 올곧은 힘이 실려있다. 꼭 자신이 아니더라도, 이 공간에서 '사서의 일'이 계속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을 담았던 에필로그를 읽으며 가만히 책을 덮었다.


이 책을 읽고 문득 지혜의 집이 궁금해졌다. 양지윤 사서의 말처럼, 여전히 그 공간이 잘 지켜지고 있는지, 운영되고 있는지 말이다. 그리고 뜻밖의 소식을 접하게 됐다. 지혜의 집이 강제로 폐관될 위기에 놓여있다는 화가 나는 소식이었다.


https://naver.me/Fy2OskUs



이어지는 건 양지윤 사서의 글이다.


"사동초 지혜의 집 작은도서관 폐관 이슈를 다룬 신문기사가 난 다음날, 폐관에 반대하는 시민 분들이 작은도서관에 모였습니다. 10년 넘게 활동하는 작은도서관 동아리 회원들, 몇 년 전부터 도서관을 애용하고 있다는 분들이 함께 행동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시에서 벌이는 비민주적인 폐관 방식에 맞서, 시민들이 민주적인 방식으로 폐관 철회를 요구하기로 뜻을 모았습니다."


그래서 지금, 지혜의 집은 작은도서관 폐관 반대 서명이 이루어지고 있다. 나 또한 서명했다. 이게 다 무슨 일인지. 이 책을 읽지 않았더라면 몰랐을 사실이었다(이제라도 알아서 다행이다). 이런 일이 벌어지기 시작한 게 고작 한 달도 채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놀랍기도 하고, 기사에도 나와있지만, 2022년에 마포구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어 시민들의 공분을 샀던 기억이 난다. 어떻게 만들어진 곳인데, 어떻게 지켜온 곳인데. 여전히 그 공간을 사랑하는 이들이 많은데. 부디 작고 소중한 이곳이 사라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만약 사라지게 된다 해도 한번은 꼭 방문하려 한다. 하나씩 사라져가는 작은 동네 서점들을 가만히 보고 있자면,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에 종종 무력감을 느낀다. 도서관도 마찬가지일까. 누군가에게는 우주일 수 있는 그 공간이 이렇게 사라져가는 걸 마냥 지켜보고만 있어야 하는 걸까. 다시 또 무언가가 꿈틀대기 시작한다.


나 또한 자주 방문하는 작은도서관이 하나 있다. 회사 근처라 점심시간에 종종 다녀오곤 하는데, 규모가 워낙 작아 서가에 책이 많지는 않다. 그래서 상호대차 서비스를 더 많이 이용하고, 가끔은 희망도서를 신청하기도 한다. 덕분에 꽤 많은 책을 이곳에서 만났다. 카페도 함께 운영하고 있어 점심시간에 가면 직장인들의 쉼터가 되기도 하는데, 그 모든 것들이 차곡차곡 모여 도서관이라는 공간을 채워가는 게 아닐까 싶다. 회사에서 나만 이 도서관을 애용하는 줄 알았는데, 나처럼 몰래몰래 이곳을 다녀가던 동료가 있었다. 하루는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딱 마주치는 바람에 서로 어찌나 놀랐던지. 다행히 그는 작년부터 나와 책으로 소통을 이어가던 몇 안 되는 동료 중 한 명이었다. 비밀아지트가 들킨 기분이었는데, 사서님들과 친근하게 이야기를 엮어가는 동료의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이곳이 비단 나의 아지트만은 아니었구나 싶었다. 작은도서관이 만들어준 또 하나의 연결고리였다.


지혜의
지혜의
건강한 노동 현장을 꿈꿔본다

작년 초『다음 소희』라는 영화를 봤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는 한 사람이 거대한 조직의 부속품이 되어가는 부조리한 과정을 밀도 있게 다루고 있다. 콜센터로 현장 실습을 나가게 된 여고생 소희는 그곳에서 일하며 사회의 냉혹한 현실과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다. 나는 당시에 그 영화를 보며 수치로 평가되는 한 인간의 생과 사에 분노했고, 그저 하나의 사건으로만 치부하며 덮어두기 급급한 사회 이면에 치를 떨어야 했다. 비단 그 영화 속 주인공뿐만 아니라 사회의 고질적인 문제들, 특히 노동과 관련된 부조리함들은 이루다 말할 수 없겠지만 적어도 나만큼은 한 사람의 인생을 수치로 평가하는 이들의 목소리에 동조하고 싶지 않았다.

『콜센터』라는 책을 처음 읽었던 건 30살, 독립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던 때였다. 단순히 제목과 목차에 끌려 집어 들었던 책인데, 읽으면 읽을수록 생각이 깊어졌다. 소설에 등장하는 다섯 명의 주인공들은 아나운서, 공무원, 대기업 입사, 음식점 창업 등 각기 다른 목표를 갖고 콜센터에서 근무하는 스물다섯 살 동갑내기들이다. 그들이 경험한 콜센터의 모습은 그야말로 시궁창 같았다. "평생 콜센터에서 일해라"라는 말이 욕이 되는 곳. 한 인간이, 한 인간에게 이토록 지독할 수 있나, 싶은 면면들이 많았다. 온갖 진상들과 하루하루 고군분투하며 자신의 감정을 꾹꾹 눌러대는 청춘들을 보고 있자니 내가 다 숨이 막혔다. 세상에는 꼬인 사람들이 정말 많구나 싶어 인간혐오가 생길 지경이었다.

그믐의 좋은 점은 (너무나 많지만) 그중 가장 좋았던 건 그 책을 집필하신 작가님과 활자로 직접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점이다. 내가 책을 읽으며 궁금했던 것뿐만 아니라 작가님이 이 책을 쓰시면서 경험하셨던 것을 하나하나 세세히 알아갈 수 있다는 건 독자로서 꽤나 생경한 경험이었다. 이번 모임도 그랬다. 김의경 작가님의 작품은『콜센터』뿐만 아니라, 월급사실주의 동인지『귀하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에 수록된 <순간접착제>도 읽었던 터라 더더욱 이번 모임에 참여하고 싶었다.

모임은 29일 동안 진행됐다. 그리고 역시나, 아니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좋았다. 작가님은 참, 인간적인 분이셨다. 질문 하나하나에 정성스럽게 답변을 이어가시며 콜센터에서 근무했을 당시의 상황들을 진솔하게 풀어주셨다. 유독 눈길이 가는 인물에 대한 애정어린 시선도 담아주셨다. 김혜나 작가님이 모임지기가 되어 질문도 하나씩 올려주셨다. 함께 참여했던 모임분들도 올라오는 질문에 맞춰 각자가 경험했던 이야기들을 솔직하게 풀어주셨다. 이야기 보따리가 차곡차곡 쌓여가는 순간들이 하나하나 다 소중하게 여겨졌다. 그믐이기에 가능했던 게 아닐까 싶었다.

9월의 마지막 일요일에는 그믐에서 진행했던 모임의 감상을 그대로 이어가고자『콜센터』를 지정도서로 한 오프라인 독서모임도 열어 보았다. 4명이 모일 예정이었지만, 한 명의 갑작스러운 취소로 총 세 명이서 진행됐다. 모임지기는 나였고, 소수라 더 밀도 있는 대화가 가능할 거라는 기대감에 발제문도 열심히 만들었다. 궁금한 걸 풀다 보니 질문이 17개가 됐다. 이렇게 많이 준비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 실은 넘버링을 하지 않았다면 더 많은 질문을 준비했을 (지독한) 나란 인간. 일단은 이 정도만(?) 하자는 생각에 발제문을 마무리했다. A4용지 4장을 꽉 채운 분량이었다. 모임 당일, 인원수에 맞춰 깔끔하게 프린트 한 종이를 챙겨 카페에 모였고, 많은 대화를 나눴다. 3시간이 부족했다. 심지어 발제문에 담긴 질문을 다 나누지도 못 했다. 노동현장과 직업, 일(직업과 일은 다른 것이라 생각한다)에 대한 묵직한 말들이 오갔다. 회원분 중 한 분은 실제로 아나운서를 준비했던 경험이 있어『콜센터』에 등장하는 시현의 입장에 많이 공감했다고. 나는 되레 그분의 생생한 경험담 덕분에 시현이라는 캐릭터를 한층 더 이해할 수 있었다(사실 그전까지만 해도 시현은 내게 비호감이었다). 그날 모인 우리 세 명은 닉네임으로만 대화를 나눴기 때문에 서로의 실명도, 나이도, 사는 곳도, 정확한 직업도 모르는 상태였지만, 그런 건 하나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이 책을 읽고 나눈 각자의 삶이었으니. 상대에 대한 배경지식 없이 한 권의 책만으로도 우리는 얼마든지 속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걸 다시 한 번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나는『콜센터』를 읽을 때마다 나의 스물다섯 살이 생각난다. 첫 직장에 입사했던 게 25살, 3월이었다. 10년이 지난 지금, 그때와 나는 달라졌을까, 라고 질문한다면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라고 답할 수 있다. 삶에서 몇 번의 굵직굵직한 고난이 있었고, 그때마다 나는 과감하게 경로를 틀었다. 키를 잡은 건 온전히 나여야 했고, 책임도 내가 져야 했다. 열악한 근무환경이었다기 보다는 혹독한 근무환경일 때가 많았다. 사방에서 나에게 big엿(표현 왜 이래)을 날리는 기분. 어디 하나 발 딛고 설 수 없을 정도로 낭떠러지에 내몰리는 기분. 새벽 2시가 되어서야 파김치가 되어 터덜터덜 퇴근했던 그때 그 시절. 아빠가 해외 출장을 다녀올 때마다 찬장에 고이고이 진열해뒀던 비싼 양주를 매일 퇴근하고 한 잔, 두 잔, 그렇게 들이켜댔다. 목이 타들어갈 것 같은 독한 술을 마셔야만 그나마 잠들 수 있었다. 그리고 몇 시간 후면 다시 기상이었다. 찬장에 전시해둔 귀한(?) 술병의 액체가 조금씩 줄어드는 게 버젓이 보였지만 아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쟤는 저게 얼만지 알고 저렇게 마셔대나'라는 말도 꺼내지 않았다. 그때는 그 술들이 나에게 하나의 탈출구였다.

비단 콜센터뿐만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열악한 근무환경 속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청년들, 아니 하물며 청소년들까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들은 여전히 힘든 삶을 견뎌내고 있을 것이다.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은커녕 수많은 기계, 그 기계의 부속품 중 하나로 취급받는 노동계의 취약점을 우리는 더 많이 고발하고 들춰내야 하지 않을까. 진상 고객이라는 이유로 떠밀리고 떠밀려 가장 약한 누군가가 그들을 상대하고 정신적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면, 그건 누군가 말려야 하지 않을까. 사람을 정량적 지표로 수치화할 것이 아니라 한 명의 개인으로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또 깊어지기 시작한다. 이럴 때면 한없이 무력해진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생각하게 된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기업들 중에도 열악한 노동환경으로 불매운동이 이어지고 있는 곳이 있다. 굳이 이 글에서 언급하고 싶지 않지만 우리는 너무나 몰지각하게 그 기업의 상품을 소비하고 있다. 그곳에서는 반복해서 유사 재해가 발생하고 있음에도 노동부의 개입은 다소 소극적이다.『다음 소희』에서도 그랬고, 이번에 읽은『콜센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작년에 읽었던『고통 구경하는 사회』라는 책이 떠오른다. 저자는 우리가 고통을 보는 이유는 다른 이의 아픔을 공감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연대를 통해 느슨한 공동체를 일시적으로나마 가동하며 비슷한 아픔을 막아내기 위해서라고도 말한다. 이 일이 왜 일어났는지 살펴보고, 누가 잘못을 저지른 것인지 알아내고, 구조적인 문제점을 파헤쳐 참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감시하는 게 동료 시민의 역할이라고 말이다. 우리의 시선이 어디에, 얼마나, 어느 정도의 섬세함으로 머물러야 하는지, 어느 방향으로 옮아가야 하는지까지 이야기되어야 한다고. 비록 구경으로 시작됐다고 하더라도 그 시선을 멈추지 말기를, 행동만이 절대선은 아니라는 것을 잊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번『콜센터』모임을 통해 다시 한 번 느꼈다. 타인의 아픔과 고통에 조금 더 뾰족한 인권 감수성을 품은 채 살아가고 싶다고. 모두가 행복한 일터는 어려울지라도, 모두에게 건강한 일터만큼은 꿈꿀 수 있기를, 몸도 마음도 다 말이다.

아무런
아무런
[책나눔 이벤트] 지금 모집중!
[다산북스/책 증정] 『모든 계절의 물리학』을 저자 & 편집자와 함께 읽어요![도서 증정] <문제적 여성들의 북클럽> 번역가와 함께 읽기
💡독서모임에 관심있는 출판사들을 위한 안내
출판사 협업 문의 관련 안내[모임] 간편 독서 모임 만들기 매뉴얼 (출판사 용)
그믐 새내기를 위한 가이드
그믐에 처음 오셨나요?[메뉴]를 알려드릴게요. [그믐레터]로 그믐 소식 받으세요
송승환 시인과 함께 시를 읽습니다
[문학실험실/신간] 송승환 시집『파』(문학실험실, 2026) 출간 이벤트. 시집 완독회!송승환 시인. 문학평론가와 함께 보들레르의 『악의 꽃』 읽기.황현산 선생님의 <밤이 선생이다> 읽기 모임보들레르 산문 시집 <파리의 우울> 읽기 1
새벽엔 느낌 좋은 소설로 하루 시작해요
[느낌 좋은 소설 읽기] 1. 모나의 눈[느낌 좋은 소설 읽기] 2. 오버스토리
버지니아 울프의 다섯 가지 빛깔
[그믐밤] 28. 달밤에 낭독, <우리는 언제나 희망하고 있지 않나요>[서울외계인] 버지니아 울프, 《문학은 공유지입니다》 읽기<평론가의 인생책 > 전승민 평론가와 [댈러웨이 부인] 함께 읽기[그믐연뮤클럽] 7. 시대와 성별을 뛰어넘은 진정한 성장, 버지니아 울프의 "올랜도"[아티초크/책증정]버지니아 울프의 가장 도발적인 에세이집 『누가 제인 오스틴을 두려워하랴』
4월 16일, 체호프를 낭독합니다
[그믐밤] 46. 달밤에 낭독, 체호프 4탄 <벚꽃 동산> [그믐밤] 45. 달밤에 낭독, 체호프 3탄 <바냐 아저씨>[그믐밤] 43. 달밤에 낭독, 체호프 2탄 <세 자매>[그믐밤] 40. 달밤에 낭독, 체호프 1탄 <갈매기>
싱글챌린지로 읽었어요
아니 에르노-세월 혼자 읽기 챌린지숨결이 바람 될 때MT 법학 싱글 챌린지밀크맨 독파하기
스토리 탐험단이 시즌 2로 돌아왔어요
스토리탐험단 시즌2 : 장르의 해부학 1. 호러스토리탐험단 10번째 여정 <내 안의 여신을 찾아서>스토리 탐험단 9번째 여정 <여자는 우주를 혼자 여행하지 않는다>스토리 탐험단 8번째 여정 <살아남는 스토리는 무엇이 다른가>
유디테의 자본주의 알아가기
지긋지긋한 자본주의왔다네 정말로 자본주의의종말
제발디언들 여기 주목! 제발트 같이 읽어요.
[아티초크/책증정] 구병모 강력 추천! W.G. 제발트 『기억의 유령』 번역가와 함께해요.(7) [제발트 읽기] 『토성의 고리』 같이 읽어요(6) [제발트 읽기] 『전원에서 머문 날들』 같이 읽어요[제발디언 참가자 모집] 이민자들부터 읽어 봅시다.
🎁 여러분의 활발한 독서 생활을 응원하며 그믐이 선물을 드려요.
[인생책 5문 5답] , [싱글 챌린지] 완수자에게 선물을 드립니다
동구권 SF 읽어보신 적 있나요?
[함께 읽는 SF소설] 10.이욘 티히의 우주 일지 - 스타니스와프 렘[함께 읽는 SF소설] 09.우주 순양함 무적호 - 스타니스와프 렘[함께 읽는 SF소설] 08.솔라리스 - 스타니스와프 렘[함께 읽는 SF소설] 11.노변의 피크닉 - 스트루가츠키 형제
그믐의 흑백요리사, 김경순
브런치와 디저트 제대로 만들어보기ㅡ샌드위치와 수프디저트와 브런치 제대로 만들어보기솥밥 제대로 만들어보기
혼자 읽어서 오히려 깊이 읽은 책들
<인간의 대지> 오랜만에 혼자 읽기 『에도로 가는 길』혼자 읽기천국의 열쇠 혼자 읽기
웰다잉 오디세이 1분기에 이 책들을 읽었어요
[웰다잉 오디세이 2026] 3. 이반 일리치의 죽음[웰다잉 오디세이 2026] 2. 죽음을 인터뷰하다 [웰다잉 오디세이 2026] 1. 죽음이란 무엇인가
독서모임에도 요령이 있나요?
도스토옙스키와 29일을[그믐밤] 7. 북클럽 사용설명서 @시홍서가
모집중밤하늘
내 블로그
내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