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해님의 블로그
글로 남기는 나만의 기록장시소의 높이를 수평으로 맞추려는 노력을 자주 한다. 관계가 깊어질수록 그 과정은 더 깊고 섬세해진다. 미세한 균열이라도 생기면 어쩌나 전전긍긍하다 구멍이 하나, 둘 뚫리고 '으악, 망했어. 망했어!'라고 연신 허둥거리다 툭. 관계를 끊어버린다. 의아한 상대가 '너 왜 그래?'라고 물었을 때, 답하기 어려웠다. 한쪽으로 기울어버린 시소를 지켜볼 자신이 없어 내가 먼저 시소에서 훌쩍 (뛰어) 내려와버렸다(고 말하고 싶지만 용기가 부족해 말을 삼킨다). 나의 이 말을 상대가 납득할 수 있을까. 끈기가 없다고 나무라지는 않을까.
관계란 지키는 게 아니라 누리는 거라던 문장이 떠오른다. 그런 마음으로 읽었다. 움츠러든 아름의 모습에서 가장 깊숙한 나를 봤고, 해든과 민아의 모습에서도 골고루 나를 겪었다. "그들이 이루는 삼각형은 각자가 선 자리에 따라 커졌다가 작아지기를 반복했다."라는 문장이 유독 아프게 다가온다. 나는 그 삼각형을 여러 사람과 나눠가지지 않으려 욕심을 부린다. 하나의 꼭짓점도 열어주지 않는 사람. 커졌다가 작아지기를 반복하는 그 선들이 골고루 다 나 같아서 애틋했다. 복잡하게 얽혀있는 그들의 관계에 쓴웃음이 났다. 혼자는 외롭고, 두 명은 찐득하고, 세 명은 미묘하다.
그럼 네 명은? 잘 모르겠다. 그냥 혼자 있자.
김화진 작가가 궁금해졌다. <나주에 대하여>를 읽어봐야겠다.
지난주 금요일, 기다리고 기다리던 Beyond Beer Bookclub 완독파티를 무사히 다녀왔다.
이토록 늦은 귀가라니, 거기다 맥주 파티라니!
그 자리에 함께 했던 도리님의 문장을 빌려 보자면, 여름이었다! 크아.
근데 글의 첫 사진이 모임 사진도 아니고, 대뜸 등장하는 이 사진의 정체는 무엇인고 하니.
바로바로 장 작가님께 받은 초콜릿 선물이다.
누군가가 고작? 이게 뭐라고? 라고 말한다면, 다 따라와. 어서, 당장(불끈).
평소에는 입에도 잘 안 대는 메로나를 만취만 하면 먹겠다고 노래 노래 부른다는 나의 농담(이라 쓰고 진담이라 읽는다)을 기억하시곤 메론맛 초콜릿을 선물로 주신 작가님.
오래오래 간직... 할 수는 없고(먹는 거잖아유), 아껴 먹어야겠다. 냠냠.
한여름 밤의 꿈이었다. 그래 이건 꿈이다.
꿈이 아니고서야 이럴 수가 있나, 이렇게 설레서 붕붕 떠다니는 느낌이 들 수가 있나(취한 건 아니겠지). 사실 살롱드북으로 향하는 길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유독 그랬는데, 꼭 중요한 행사나 시험을 앞두고 당일 아파버릴 때가 많았다. 학예회 때도 한 달 내내 실컷 연습하고 의상까지 맞춰서 학교로 향했지만, 정작 무대에 오르기 직전 아파버리는 바람에 홀로 남아 교실을 지켜야 했던 적도 있다. 긴장이 과해지면 몸이 먼저 반응해버리기 일쑤라 원인을 알 수 없는 어지럼증과 복통으로 골골대곤 했으니. 이번 모임도 사실 걱정이 되긴 했다. 강연은 내가 입을 열 일이라도 없으니 다행이지 독서모임은 말을 해야 하잖아. 그래서 더 떨렸나?
파티(?)의 시작은 7시 30분이었지만 7시 전에 이미 그 근처에 도착해버렸다. 작가님은 인터뷰가 끝나고 그곳에 계속 머무르실 예정이라 일찍 와도 괜찮다고 말씀하셨지만, 으아아아 말도 안 돼. 더 부끄러워. 누구 때문에 떨리는 건ㄷ...(읍) 아무튼, 진정하고. 그래도 30분 전이니까 괜찮지 않을까 싶어 멀찍이서 책방을 봤는데, 세상에나. 아직 인터뷰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놀란 마음에 다시 언덕을 내려가 일단 어디라도 들어가자는 심산으로 두리번거리다 무작정 대형마트로 들어가 버렸다. 과일 코너를 둘러보며 '오, 이 동네 물가가 꽤 괜찮군'이라는 생각을 가만가만 이어가고 있었는데, 나중에서야 알았다. 같은 시각 나처럼 차마 책방에 들어가지 못하고 그 근방을 배회하고 있던 또 다른 영혼이 있었다는 사실을. 도리님은 온라인에서 언급했던 나의 인상착의(?)를 기억하시곤 바로 알아봤다고 하셨다. 그 말씀 덕분에 그때의 내 모습을 가만히 떠올려봤다.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더라... 이를테면 중얼중얼 혼잣말이라던가, 뭐 그런 거.
거의 1년 만이던가. 살롱드북은 그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은은한 조명과 탑처럼 카운터 앞을 지키며 무질서하게 쌓여있는 책들, 잔잔한 음악과 특색 있는 서가의 큐레이션까지. 살롱드북만의 은근한 분위기는 여전했다. 무더운 여름밤 우리의 첫 파티 장소로 더할 나위 없이 아늑한 공간이었다. 인원이 많아 테이블을 붙이고 자리 세팅까지 일사불란하게 이어갔다.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정성스럽게 모임을 준비하는 모습에 괜히 또 혼자 뭉클해졌다. 작은 것 하나도 세심하게 살피며 정성을 다하는 모습들은 여전히 따스하고 사랑스러우니까.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와 다자이 오사무의 청춘 시리즈 모임이었지만, 우리는 두 작가의 책 이야기 외에도 삶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 자리가 아니었다면 평생 몰랐을 영화와 책을 알아갔고, 함께 웃고 술을 마시며 건배를 했다(세상에, 건배 얼마 만이지).
구호는 하나.
"우리가 사라지면 암흑이 찾아온다"
온라인상에서 활자로 외칠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목소리로 뱉으면서도 와 이게 정녕 꿈인가 싶었다. 밤이 깊어갈수록 조금 더 깊은 주제들도 하나둘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독서모임 운영에 대한 현실적인 고충과 고민이랄까. 각자가 경험했던 독서 공동체의 모습을 나누며, 또 그리며 이야기를 엮어가는 진솔한 과정이 좋았다. 사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우리에게 이미 잊힌지 오래였고(나만 그랬나), 모임 장소에 도착하기 전까지 생생하게 감상을 나눴던 다자이 오사무에 대한 의견은 꽤 분분하게 여러 갈래로 뻗어갔다. 온라인에서와 달리 좋았다는 평도 많았다. 아냐아냐, 난 싫었다고요. 목소리를 꾹꾹 참다가 딱 한 마디만 하려고 했던 게 화근이었다. 와르르 쏟아내고 나서야 아, 이게 아닌데 싶었다. 말은 이미 내 입을 떠낸 뒤였다. 허허허.
'처음 뵙는 장작가님께 부담되지 않게 몰래 신기해하기(?)'를 염두에 두셨던 도리님처럼, 실은 나도 같은 마음이었다. 먼발치에서 강연을 들은 횟수는 꽤 여러 번이지만 이렇게 가까이에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자리라니! 조금 멀찍이 앉아 거리를 지키려 했는데, 실패. 어쩌다 보니 대각선 앞에 앉아버렸다. 오들오들 떠는 게 티 나지 않도록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고 싶었지만 이것도 실패. 내가 말할 차례가 되었을 때, 작가님 쪽으로 시선을 돌릴 수가 없어 연신 왼쪽을 향해서만 말했다(아이고 목이야). 평소의 나는 대화할 때 상대의 시선을 피하지 않는 편인데(집중하느라 오히려 빤히 본다), 그 자리에서만큼은 예외였다. 작가님과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속으로 (깜짝) 놀라며 황급히 시선을 피하곤 했다. 다행히 술도 들어가고 적당히 나른한 기분에 취해 긴장이 서서히 풀려가...기는 개뿔(?). 잔뜩 긴장해 횡설수설했던 내 모습이 떠올라 돌아오는 길 내내 마음이 쓰렸다. 그래도 작가님과 서로 대화라는 걸 생생하게 나눌 수 있다는 사실에 마냥 기쁘긴 했다. 모임에서 만난 작가님은 한층 더 인간적이고 재미있는 분이셨다. 뭐 솔직히 그냥 다 좋았다(주먹인사 나도 잘 할 수 있는...).
김새섬 대표님과는 온라인에서 종종 이야기를 나눴지만 오프라인으로 뵙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야말로 걸크러쉬! 청춘이라는 주제에 맞춰 모자를 쓰고 오셨다는 말씀에 귀여움까지 덤. 대표님의 블로그에 그믐과 관련된 글이 올라올 때마다 꼼꼼히 챙겨읽곤 했는데(영상도!), 직접 뵙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 영광이었다.
"그믐 평생해 주실 거죠?"라는 누군가의 질문에 "그럼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역시 우리의 수장님(?)은 멋진 분이셨다. 크...
여기 어디 시간 도둑이 있나. 2시간이 이렇게 짧은 시간이었던가. 어느새 끝날 시간이 되었다는 대표님의 목소리에 다시 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여기저기 2차를 외치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다음 날 일정이 있어 함께하지 못 했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한 채 다시 한마음이 되어 자리를 정리하고 모임원들과 함께 살롱드북을 나왔다. 다행히 내가 가려는 버스 정류장과 모임원들이 가려는 2차 장소의 방향이 같았다. 도리님과 나란히 걸으며 온라인에서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를 잔잔히 이어갔다. 버스 정류장에 다다라 다음을 기약하며 인사를 나눴다. 만남이라는 게 그렇다. 아쉬운 마음이 있어야 다음 만남이 기대되고, 기대하는 마음이 있어야 정성을 다하게 된다(고 생각한다).
영화 <노매드랜드>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대사가 있다.
"이 생활을 하면서 가장 좋은 건 영원한 이별이 없다는 거예요. 늘 ‘언젠가 다시 만나자’라고 하죠. 그리곤 만나요."
이 대사 덕분인지 영화 속에서 펀과 함께 유목생활을 이어가는 공동체의 모습이 좋았다. 모닥불을 피워놓고 자유롭게 헤쳐 모여하는 그들의 관계가 따뜻하고 건강하다 여겨졌다. 나는 느슨한 연대에서 찾아오는 안온함을 여전히 애정한다. 그리고 요즘도 '지속할 수 있는 관계란 무엇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한다. 결론은 늘 비슷하다. (생계유지를 위한 행위를 제외하고) 무언가에 소속되어 있는 걸 견디지 못하는 기질은 타고난 건지. 자꾸 궤도를 이탈하려는 나를 발견한다. 어쩌면 내가 그믐을 좋아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지 않을까. 나에게 그믐은 소중한데 느슨하다(궤변인가).
그믐이 사라지지 않는 한 우리는 다시 또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근데, 이렇게 길게 쓰려던 게 아니었는데 이 글은 왜 이렇게 또 하염없이 길어진 거야. 알 수가 없네, 정말.


생각해 보면 매년 한 번씩은 춘천을 다녀왔던 것 같다. 파주도.
여름이나 가을에 주로 다녀왔는데, 당일치기로 다녀올 때는 남형석 작가님의 '첫서재'를 방문하기도 했고, 하룻밤 자고 와야겠다 싶을 때는 항상 같은 숙소를 찾았다. 얼마 전에도 그 숙소를 검색해 봤는데 다행히 사라지지 않고 굳건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왜 유독 춘천이었을까. 그 시작이 언제였을까를 곰곰이 생각해 보니 26살이던가? 늦었다면 늦은 나이였지만 혼자 떠났던 첫 여행지가 바로 춘천이었다. 그때는 춘천에 아무 연고도 없을 때였는데, 그리 멀지도 가깝지도 않다는 게 그곳을 첫 여행지로 고른 단순한 이유였다. 아마 그렇게 시작됐던 것 같다. 춘천과 파주를 매년 찾는 나만의 루틴이.
그리고 그제, 올해 처음으로 춘천을 다녀왔다. 가장 좋아하는 작가님의 강연이 열린다는 소식을 접하고 마음이 설레었다. 서울에서도 종종 강연 소식을 접하긴 했지만, 회사 교육 기간과 자꾸 겹치는 바람에 갈 수 없어 아쉬웠는데, 이번에는 시간 연차(탄력근무제가 있는 직장이다)를 잘 쓰면 가능할 것 같았다. 그동안은 춘천을 갈 때마다 꼭 지하철을 타곤 했다. 기차보다 시간이 훨씬 더 오래 걸리지만,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천천히 흘러가는 창밖의 초록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는 시간, 종점으로 향할수록 승객들이 열차에서 한 명 한 명 내리며 한산해지는 시간, 그렇게 몇 남지 않은 승객과 몸이 닿을 필요 없이 헐렁한 좌석에 띄엄띄엄 앉아 책을 읽는 시간을 좋아했다. 반복적인 열차의 진동이 마치 요람처럼 느껴져 꾸벅꾸벅 졸기도 했다. 늘 분주한 서울과 달리 춘천으로 향할수록 몸도 마음도 여유롭게 늘어지는 감각이 좋았다.
하지만 이번 여행은 그런 여유를 부릴 시간이 없었다. 목적지와 일정이 명확하게 정해져있었다. 그래서 ITX-청춘열차라는 걸 처음 타봤다. 덕분에 길도 헤맸다(사실 원래도 길치다). 새롭게 알게 된 놀라운(?) 사실은 ITX-청춘열차는 지하철과 같은 홈에서 탄다는 점이다. 촌스러워 보여도 할 수 없다. 나는 이걸 이번에 처음 알았다. 분명 열차가 들어온다는 안내 방송이 들려오는데, 내 눈에 보이는 건 지하철 홈밖에 없어 우왕좌왕하고 있던 찰나, 웬걸. 그곳으로 ITX-청춘열차가 들어오고 있는 게 아닌가. 처음에는 이걸 타도되는 건가 싶어 긴가민가 하다가 '에라 모르겠다' 싶어 열차에 올랐고, 다행히 내가 예매한 좌석을 찾을 수 있었다. 남춘천역까지 가는데 예상 소요시간은 약 1시간, 자리에 앉아 챙겨온 책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다자이 오사무의 단편집 『청춘』과 김기태 작가님의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을 챙겨왔는데, 이번에는 김기태 작가님의 소설을 꺼내 읽었다. 요즘 푹 빠져있는 소설이다(읽을 때마다 혼자 키득거리는 포인트가 있다).
ITX-청춘열차는 확실히 경춘선 지하철보다 빨랐다. 창밖으로 다채롭게 펼쳐진 푸릇푸릇한 여름 풍경을 감상하고 싶었지만, 승객들이 커튼을 내리고 깊은 잠에 빠져있는 것 같아 엄두도 못 냈다. 가만히 책을 읽으며 열차 안의 고요함에 나도 함께 젖어들었다. 똑딱똑딱 잘도 흐르는 시간과 비례한 평온함에 몸이 녹아내리나 싶었는데, 어느새 열차는 남춘천역에 도착해있었다. 1년 만이던가, 반가운 마음을 즐길새도 없이 개찰구를 향해 다다다다 뛰었다. 그때부터 걷고 버스를 타고, 행여나 방송을 놓칠세라 온 신경을 곤두세운 채 경직된 자세로 버스 손잡이를 꼭 잡고, 내리고, 다시 또 다다다다. 그렇게 내 눈앞에 '커먼즈필드 춘천 안녕하우스'가 보였다. 사실 단번에 찾은 건 아니고, 옆 건물에 잘못 들어가는 바람에 혼자 '어떡해 어떡해'를 연발했던 건 (안) 비밀이다. <우리는 타인과 꼭 연결되어야 할까>라는 주제로 춘천문화재단에서 주관하는 인문 아카데미가 이곳에서 곧 진행될 예정이었고, 내가 춘천을 찾은 이유이기도 했다. 강연 제목은 "상상으로 만든 동네, 현수동", 강연자는 장강명 작가님이었다.
정신없이 달려온 보람이 있었다. 강연이 시작되기까지 시간이 꽤 남아 있어 좋은 자리가 많았다. 하지만 자리를 고를 때마다 매번 고민에 빠지곤 했다. 가장 앞자리, 그것도 정중앙에 앉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막상 그렇게 앉으면 작가님과 눈을 마주칠 때마다 부끄러워 강의에 집중하지 못할 나를 알기에. 그래서 작가님의 북토크나 강연을 갈 때마다 욕심을 내려놓고, 애매하게 대각선, 그것도 앞에서 두세 번째 줄 정도? 에 조심스럽게 앉곤 했다. 하지만 앉은키가 작은 편이라(일어서도 작기는 마찬가지) 앞사람의 체격에 따라 복불복으로 시야가 가려질 때가 많았다. 그런 날이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퍽 속상했다. 이번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 큰마음 먹고 춘천까지 시간 연차를 내면서 왔으니 제대로(?) 보고 싶었다. 그래서 용기를 내 나름대로 중앙, 앞에서 두 번째 자리에 앉았는데, 맙소사. 강연이 시작될 때까지 내 앞에 아무도 앉지 않는 바람에, 작가님의 정면에 떡 하니 앉아있는 꼴이 되고 말았다. 강연이 시작되고 작가님을 마주하고 있는 게 쑥스러워 시선을 피할까 잠시 고민했다. 그러다 애써 태연한 척 눈을 마주쳤다. 다행히(?) 작가님은 한자리에 가만히 앉아 계시지 않고, 준비해 오신 PPT 자료를 요리조리 짚어가며 무대를 종횡무진하셨다. 화면에 띄워주시는 지도와 그림, 역사 자료 등이 신기해서 긴장감은 서서히 잦아들었고, 온전히 강연에 몰입하고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강연은, 하... 말해 뭐 해. 너무 좋았다. 현수동이라는 상상의 동네를 말씀하시며, 광흥창역과 현석동뿐만 아니라 한강과 지리, 역사, 인물 등 온갖 시대 배경까지 세세하게 설명하시는 모습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사회자님의 말씀처럼, 동네를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연구하신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아무튼, 현수동』을 읽을 당시 머릿속에 잘 그려지지 않았던 상상의 동네가 눈앞에 현실로 펼쳐지는 기분이었다. 작가님이 꿈꾸는 동네는 단순한 주거지의 형태가 아니었다.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따스한 마을이었다. 끊임없이 새것만을 추구하는, 업데이트에 중독된 세상에 반하는 작가님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다가와 마음을 울렸다. 어릴 적 내가 살았던 동네의 역사를 연구한다는 건, 그 동네를 사랑하는 또 하나의 방식이겠구나 싶었다.
작가님의 블로그 대문 사진은 과거의 현석동 모습이다. 좋은 일이 많았던, 소중한 동네라고 하셨다. 나에게 그런 동네는 어디였을까를 곰곰이 생각하다 가장 먼저 떠오른 한곳이 있었다. 사실 작년 장기휴가 때도 몇 년만에 그곳을 다시 찾았었다. 시간이 흘러도 변함없이 소중한 곳, 역시 나는 추억이 가득한 동네가 좋구나, 더 나아가 이야기가 있는 삶을 사랑하는구나 싶어 웃음이 났다.
(내 블로그 대문 사진도 바꿔야지)
그렇게 한참 동안 강연에 푹 빠져있었는데, 이제 질문을 받겠다는 말씀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제야 손목시계를 봤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나 흘렀다니! 아쉬운 마음이 가득했지만 강연이 끝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걸음을 재촉했다. 그곳을 나서기 전, 작가님께 조심스레 인사도 드리고 싶었지만, 괜히 또 그러면 부담스러워하실 것 같아 마음만 고이 간직한 채 안녕하우스를 나왔다. 다시 서울로 돌아갈 길이 까마득했지만 그럼에도 좋았다. 무더운 날씨처럼 마음속에도 온기가 가득 차오르는 기분이었다. 이열치열이라고 하지 않던가(뭐래).
이번에 만난 작가님의 모습은 옛날식으로 치자면 동네에서 가장 유능한 이야기꾼 같았다. 옷차림도 자유분방하고 말이다(하하). 만약 내가 과거에 태어났더라면, 마을에 이 이야기꾼이 온다는 소식이 돌 때마다 와다다다 뛰어가서 가장 앞자리 흙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기다리고 있지는 않았을까, 하는 기분 좋은 상상도 해보았다. 건물 밖에는 연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작년에 경춘선 지하철에서 위험한 일을 당했던 나를 걱정하며, 퇴근하자마자 춘천으로 달려와준 연인이 고마웠다. 그는 저 멀리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오늘 강연이 너무 좋았다고, 행복한 밤이라고 재잘재잘 떠들어대는 나를 보며 연인은 익숙하다는 듯 씩 웃었다. 그리고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역시 화수분"
이 짧은 한 문장에서 이토록 많은 상념이 쏟아져 나온다는 게 가당키나 한가 싶다. 아직은 결혼도 출산도 어느 것 하나 원치 않는 나지만, 이것 하나만은 명확하다. (적어도 나에게는) 출산에 대한 책임감이 결혼보다 훨씬 더 무겁게 느껴진다는 것. 낳지 않는 것에 대한 책임감이 아니라(애국이라는 말 좀 그만, 제발 쫌!), 낳고 난 후를 말하는 것이다.
아이에게 태어나고 싶냐고 물어볼 수조차 없는데, 내가 누군가를 이 세상에 데려올 권리와 자격이 있나?
부모님과 함께 살 때, 엄마에게 유독 자주 들어왔던 말이 있다. 레퍼토리는 대체로 비슷한데, 결론은 늘 이쪽이다.
"너는 내가 낳고 키워준 걸 감사하게 생각해야 한다."
이 대전제가 너무나 절대적이라 나의 의견 하나 말하는 것조차 일일이 검열당했다. 자유롭지 못 했다. 여자애가 조신하지 못하게 감히 토를 단다고, 스스로 생각하지 말고 하라는 대로 그저 가만히 따르라고. 엄마는 내게 사람이 염치가 있어야 한다고 자주 말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다음 말은 "근데 너는 염치가 없다."였다. 그 뒤로 이어지는 말 또한 늘 한결같았다.
"내가 널 낳고 키워준 걸 감사히 여겨야 한다."
하지만 나에게 태어날 거냐고 물어본 적이 없잖아. 그럼 책임지는 것도 당연... 까지는 아닐지언정, 나를 억압하고 굴복시키는 도구로 써서는 안 되는 것 아닐까.
엄마와의 관계가 좋지 않다는 말을 주변에 종종 하는데, 그때마다 돌아오는 답변에 숨이 턱 하고 막힐 때가 많았다. 그저 모녀간의 가벼운 투닥거림 정도로 치부하는 것 같아서. 근데, 근데 말이다. 나는 그 정도였으면 그 집을 벗어나려 발버둥치지는 않았을 것 같다. 이제는 사회적 문제로 강력히 자리 잡은 '데이트 폭력'이나 인식개선이 필요하다 여겨지는 '고부간의 갈등'처럼, 가정 안의 불화나 부모의 폭력적 언행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사회적 분위기는 여전히 미미하다. "원래 가족끼리는 다 그렇게 부대끼고 사는 거야"라는 시시한 푸념쯤으로 여겨진다. 쓴웃음이 난다.
엄마는 나의 모든 것 하나하나를 일일이 통제하려 들었고, 그걸 따르지 않으면 나를 굴복시키기 위해 어떠한 행동에도 거리낌이 없었다. 뒤가 없는 사람 같았다. 물러섬도, 어떠한 미안함도 없었다. 나는 철저하게 그 공간에서 엄마의 소유물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밤이고 낮이고 새벽이고 그런 것 따위는 엄마의 안중에 없었다. 내가 새벽에 잠들어 있으면 무작정 불을 켜고 방에 들어와 나를 강제로 일으켜 세웠다. 지금 당장 할 말이 있다고, 일어나라고 소리를 질렀다. 계속 그래왔다. 내가 그 시간에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엄마의 감정이 북받치는 날이면 학교고 회사고, 나의 어느 것 하나 인격적으로 존중받지 못했다.
머리가 자라면서 아는 게 많아지고, 차근차근 나만의 생각을 가치관으로 정립해가면서 엄마와의 부딪힘은 잦아졌다. 더 정확히는 엄마가 나를 억압하려 드는 강도가 세졌다. 어릴 때는 몸을 때리면 내가 아파했지만, 성인이 되고부터는 몸을 때려도 아픈 걸 티 내지 않았다. 티 내면 그걸 약점 삼아 더 때릴 것 같아서 이를 악물고 버텼다. 그리고 그때부터 엄마는 몸이 아닌 얼굴이나 뺨, 머리를 때렸다. 이건 아픈 게 문제가 아니라 모욕감이 드는 행위다.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나를 철저하게 굴복시키는, 인간 대 인간의 대화가 불가능한 폭력적인 행위들. 30살이 되어 그 집을 떠나는 순간까지 엄마는 참지 않았다. 감정이 쏟아지는 날이면 옆에 있는 물건들을 마구잡이로 던졌다. 하루는 그 둔탁한 물건에 맞아 귀 뒤가 찢어져 피가 철철 흘렀다. 오빠가 와서 엄마를 말리지 않았다면, 평생 지우지 못할 흉터를 안고 살아야 했을지도. 그날 그 자리에 함께 있던 내 노트북도 산산이 부서졌다.
'내가 너무 심했나?'라는 생각은 엄마에게 존재하지 않았다. 돌이킬 수 없는 말과 행동을 일삼으면서도 다 내 탓이라고 말했다. 내가 자신을 화나게 해서, 감히 말대꾸를 해서. 그때마다 너는 정말 염치가 없다고 말했다. 키워준 걸 감사히 여길 줄 모른다고 했다.
엄마와의 지난한 관계에 대해서는 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다.
하지만 적당한 선에서 끊어주지 않으면, 엄마가 그토록 외치던 염치라는 것. 그게 없는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만 같다. 자기연민이 과하면 그렇게 별로라고, 주변에서 그러던데 말이다.
그러니까 적당히 하자, 적당히.
엄마가 나를 상처 주기 위해 했던 말들(이를테면 "너 따위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어"와 같은)은 나열하자면 끝이 없지만, 그럼에도 유독 자주 했던 말이 있다.
"니 까짓게"
그냥 농담처럼 하는 말이 아니다. 저 말을 시작으로 이어지는 건, 폭력이었다. 니 까짓게 감히 나를 가르치려 들어? 머리 좀 컸다고 감히 나를? 네가? 보여줄게. 네 위치가 어딘지. 네가 아무리 나이를 먹고 밖에서 인정 좀 받았다고 해서 뭐라도 된 줄 알지? 아니, 틀렸어. 너는 고작 이 따위 인생밖에 살고 있지 못해. 내 말을 듣지 않았으니까, 내 말을 따르지 않았으니까! 라고 소리치면서.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맞으면서 입을 닫고 아무런 반응하지 않는 것. 참는 것. 엄마의 화가 가라앉기를 기다리는 것. 그리고 그 집을 떠날 계획을 세우는 것.
왜냐하면, 사람은 염치가 있어야 하니까.
엄마가 낳고 키워준 걸 감사해야 하니까. 엄마가 그렇게 말했으니까. 태어나고 싶냐고 한 번도 물어본 적 없었으니까. 그러니까 나는, 태어난 걸 감사히 여겨야 한다. 사람이 염치가 있어야지.
그치, 염치가 있어야 한다. 근데 염치 없게도 나는 감히 이 글을 쓰고 있다. 서평이라고 하기에는 고작 한 문장에서 뻗어난 상념들을 활자로 풀어내 이 공간에 올리는 게 과연 옳은가, 염치 없는 거 아닐까, 이 무해한 공간의 흐름을 방해하는 게 아닐까, 걱정이 또 깊어진다.
아빠가 만약 나에게 태어나고 싶냐고 물어봤다면, 나는 과연 어떤 대답을 했을까. "네"라고 자신 있게 답할 수 있었을까. 살아보지도 않은 세상을? 그럼 질문을 조금 바꿔서 누군가 나에게 태어난 걸 후회하냐고 묻는다면?
그럼 나는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
여전히 잘 모르겠다. 그나마 대답할 수 있는 건(대답하고 싶은 건) 태어남은 선택할 수는 없었지만, 죽음만큼은 내가 선택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니까 제발. 그럼에도 가족이잖아, 부모잖아, 라는 말을 함부로 건네지 말기를. 나의 엄마를 겪어보지 않았으면서 가르치려 들지 말기를. 나는 가족을 만들고 싶지 않다. 원가족에서 벗어나기까지 30년이 걸렸다. 혼자 살면서 위험한 일도 많이 겪었다. 늦은 밤 나를 따라오던 남자, 문을 두드리던 남자, 현관의 비밀번호를 누르던 남자, 헤어지고도 집 앞에 찾아와 나올 때가지 집에 가지 않겠다고 겁을 주던 지난 연인들까지. 내가 할 수 있는 건 어둠 속에서 조용히 숨을 죽이고 핸드폰 창에 112를 대기시켜 놓는 것.
하지만 그 모든 위태로운 순간에도 부모님 댁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내가 그곳에 가는 날은 명절과 생일, 그마저도 관계가 괜찮아졌을 때만 유효하다. 다시는 그 누구도 함부로 내 가족으로 허락하고 싶지 않다.
나는 그곳을 빠져나왔고, 다시는 돌아갈 생각이 없다.
회전목마 타는 아이들을
바라본 적 있는가.
땅바닥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에
귀 기울인 적 있는가.
펄럭이며 날아가는 나비를 뒤따라간 적은,
저물어 가는 태양빛을 지켜본 적은.
속도를 늦추라.
너무 빨리 춤추지 말라.
시간은 짧고,
음악은 머지않아 끝날 테니.
하루하루를 바쁘게 뛰어다니는가.
누군가에게 인사를 하고서도
대답조차 듣지 못할 만큼.
하루가 끝나 잠자리에 누워서도
앞으로 할 백 가지 일들이
머릿속을 달려가는가.
속도를 늦추라.
너무 빨리 춤추지 말라.
시간은 짧고,
음악은 머지않아 끝날 테니.
아이에게 말한 적 있는가,
내일로 미루자고.
그토록 바쁜 움직임 속에
아이의 슬픈 얼굴은 보지 못했는가.
어딘가에 이르기 위해 그토록 서둘러 달려갈 때
그곳으로 가는 즐거움의 절반을 놓치는 것이다.
걱정과 조바심으로 보낸 하루는
포장도 뜯지 않은 채 버려지는 선물과 같다.
삶은 달리기 경주가 아니다.
속도를 늦추고,
음악에 귀 기울이라.
노래가 끝나기 전에.
_데이비드 웨더포드, 「더 느리게 춤추라」
습관이 참 무서운 거구나.
29일 동안 꾸준히 해오던 무언가가 일상에서 사라졌다는 느낌이 이토록 헛헛하게 느껴지는 걸 보면 말이다.
'시'라는 장르에 제대로 관심을 가졌던 시기는 2021년 11월이었다. 매일 한 편의 시를 노트에 필사하는 시간이 소중했다. 처음 시를 필사하게 됐던 계기는 의외로 단순했다. 원체 (긴)글 쓰는 것을 좋아하는데 내 글의 어휘폭이 일상에서 자주 쓰는 단어로만 한정되어 있다는 점이 늘 아쉬웠다. 그래서 처음에는 단순히 어휘력을 늘리고 싶다는 생각이었는데, 내가 좋아하는 장르의 책만 읽어서는 늘어날 것 같지가 않았다.
하지만 시는?
시라면 뭔가 길이 보이는 것 같았다. 사실 나에게 시라는 장르는 진입장벽이 꽤나 높은 편이라 알게 모르게 계속 편식하고 있긴 했다. 그런 내가 아름답고 다정한, 다채로운 문장들을 지속적으로 따라 쓰다 보면, 어느 순간 그분들의 언어가 나의 언어로 묻어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이 생긴 것이다. 결과만 놓고 보자면 1년이 넘는 기간 동안 암호해독에 빠질 때가 더 많았지만 그럼에도 좋았다. 좋은 문장을 정성스럽게 쓰는 행위 자체가 주는 또 다른 기쁨이 있었다.
그믐에서 모임을 열었던 건 이번이 두 번째다. 첫 번째는 장강명 작가님의 『당신이 보고 싶어하는 세상』, 그리고 이번이 약 10개월 만에 여는 두 번째 모임이었다. 작년에 첫 번째 모임을 열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사실 '여유'였다. 심적으로도 육체적으로 여유가 있었는데, 당시에 나는 장기근속 휴가로 한 달의 쉼이 주어진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 한 달 동안 책과 관련된 이곳저곳을 쉬지 않고 찾아다녔다. 직장인의 신분이라 긴 휴가가 아니고는 시도할 수 없었던 지방의 북스테이와 서점, 도서관 등 곳곳을 뚜벅이로 걸어 다니며 책 세계에 폭 빠져 있었던 시기였다. 교정교열이라는 것도 처음 해봤다.
첫 모임도 그때 열었다. 막상 열긴 열었는데, 그믐의 생태계를 잘 모르던 때라 어버버 하면서 (혼자만의) 시행착오도 많았다. 그러던 중에 장 작가님까지 함께해 주셔서 얼마나 기뻤던지! 작가님의 첫 멘트가 아직도 생생하다. 그믐에 들어갔다가 작가님의 댓글을 보고 너무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를 뻔했던 건 안 비밀이다.
그리고 이번 모임이 두 번째였다. 주제는 시와 필사. 내가 필사하고 싶은 시집을 고르고, 직업적으로 여유로운 시기도 맞춰야 해서 운동화 끈을 묶는 시간이 꽤 오래 걸렸다. 할까 말까, 농담이 아니라 이 고민만 100번도 넘게 했다. 에라 모르겠다 싶어 호기롭게 열었고, 예상외로 많은 분들이 함께해 주셨다.
매일 필사를 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하다 보니 매일 필사를 이어가는 나를 발견했다. 중간중간 업무적으로도 개인적으로도 이슈가 있었지만, 그럼에도 필사 하나만큼은 29일을 꾸준히 했다. 내가 이 모임에 이토록 진심을 담을 거라곤 나조차 기대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마치 또 다른 세계에 발을 디딘 것처럼 푹 빠져있을 때가 많았다. 한 분 한 분 정성스럽게 올려주시는 손글씨를 가만히 읽으면서 알 수 없는 감정의 파도가 휘몰아치기도 했다. 내밀한 삶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나눠주실 때는 감동이 밀려왔고, 중간중간 건네는 농담에 혼자 깔깔거리며 웃기도 했다. 대화는 꼬리에 꼬리를 물듯이 이어져 갔고, 시와 소설, 필사를 중심으로 엮어가는 우리들만의 이야기가 정말이지 하나하나 모두 소중했다.
곁에서 이 모든 과정을 지켜봤던 연인은 나의 필사모임을 묵묵히 응원하고 지지하며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했다. 필사모임에서 있었던 일들을 재잘재잘 화수분처럼 떠들어대는 나를 신기하고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눈망울이 좋았다. 나보다 더 문학을 좋아하고 진심을 다하는 그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29일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르겠다. 헛헛한 마음은 아직도 여전하지만, 그럼에도 당장 다음 모임을 기약할 수 없는 건, 또 무언가를 시작하려는 나의 계획 때문이다. 그 메일을 받은 지도 벌써 한 달이 지났다. 이상하게 바쁠 때는 일이 꼭 몰려온다고. 여유 있던 시기를 잘 잡았다 생각했지만 그 시기에 유독 이곳저곳 예상치 못한 제안을 많이 받았다.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해 정중히 거절하고 단 하나만 남겨뒀다. 그리고 이제는 그 일을 시작하려 한다. 나에게 제안을 건넸던 상대에게는 당시에 기다려달라는 부탁을 했었다. 더 중요한 일들이 있다고.
이제는 중요했던 일들을 하나하나 마무리 지었고, 이 필사모임이 그 마지막이었다. 그만큼 소중했고, 소중했기에 이 공간에 처음으로 글을 남겨본다. 그믐의 블로그는 어떻게 활용하면 좋을까를 오랫동안 고민했는데, 앞으로도 이런 방향으로 차근차근 나의 이야기를 엮어가고 싶어졌다.
끝으로 내가 가장 좋아했던 누군가의 필사 한 편을 옮기며 이 글을 마무리 지으려 한다. 팔은 안으로 안으로 굽는 거니까 어쩔 수 없다. 출처는 최승자 시인님과 장강명 작가님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