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204 장일호의 연대하는 책 <당신에게도 '단 한 사람' 있나요?>
2025-12-04 13:44:45당신에게도 ‘단 한 사람’ 있나요? [장일호의 ‘연대하는 책’]
‘이상하지, 살아 있다는 건, 참 아슬아슬하게 아름다운 일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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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넷 중 여성 청소년인 두 명은 “멀리서 보면 반짝이는 윤슬 같았으나 손으로 잡으면 날카롭게 베이는 유리 조각 같은 순간들(〈녹색 광선〉 강석희, 돌베개, 2025)”을 각자의 방식으로 복잡하게 지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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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 대의 이야기를 쓸 때, 내가 한 가지 위안 삼을 수 있는 것은 인물들이 아무리 큰 실수를 하고, 큰 고통을 당하고, 누군가에게 상처를 준다고 해도 그것을 만회할 시간이 그들에게는 아직 충분히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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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돌아가고 싶은 시절이 있느냐’라는 질문 앞에서 나는 단호해진다. 그런 시절은 없다. 가난을 배경으로 한 나의 어린 시절은 실수와 불가해한 열망으로 가득했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나’로 얼마만큼 받아들여질 수 있을지 끊임없이 시험했다. 나를 미워했고 벌주고 싶었으며 동시에 칭찬받고 사랑받고 싶었다. 타인의 마음에 들려고 애쓰다 보면 자주 비굴해졌다. 그 미묘한 성장의 시간을 이해하고 스스로를 용서하기 위해 책이 필요했다. ‘내가 이상한 걸까’라고 생각하는 외로운 아이에게 책은 새로운 세계를 열어준다. 보통이나 평범 같은 단어로 수렴되지 않는 삶을 가르친다. 나는 그때의 ‘나 같은’ 아이를 만나고 싶었다.
영국의 아동 독서 지원 비영리단체 ‘북트러스트’의 연구(〈The benefits of reading(독서의 효능)〉)에 따르면 “독서는 불평등을 줄이는 매우 강력한 지렛대”다. 16세 청소년의 어휘력과 수학 능력에 미치는 영향은, 부모의 교육 수준이나 사회경제적 지위의 영향보다도 ‘어린 시절부터 취미로 책을 읽은 경우’ 네 배 더 강력했다. 한부모 가정에서 기초생활수급자로 자란 나는 그 연구 결과를 읽는 동안 내가 그 증거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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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에게 필요한 건 독점할 수 있는 한 명의 어른이에요.” 수녀님은 자신이 아무리 마음을 써도 충분치 않을 거라며, 내게 한 학생과만 시간을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유난히 말이 없고 수줍던 아이, 겨울이와 나는 그렇게 한 달에 한 번 만나는 사이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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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인간이란 참 놀라운 존재다. ACE 생존자로서 부모가 된 사람 중 자신의 학대 경험을 대물림한 경향이 관찰된 비율은 약 61%. 저자의 말마따나 “반대로 생각하면 약 40%는 부정적 연쇄를 끊어낸 것이다.” 저자가 그 40%의 사람에게서 찾아낸 공통점은 ‘단 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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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겨울과 만나면서 겨울이 어떻게 그룹홈에 오게 되었는지 알려주는 것 이상 캐묻지 않았다. 겨울에게는 다섯 명이나 되는 ‘자매’가 있고, 부모와 다름없는 수녀님이 있고, 이제는 나도 있다. 우리는 공부와 상관없는 책을 읽으며 목적 없는 읽기가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지 지켜본다. 함께 읽은 책 제목을 새로 짓고, 이야기의 뒷부분을 상상해 써보기도 한다. 표준국어대사전을 열어 새로 알게 된 단어의 뜻을 받아쓰는 동시에, 내가 생각하는 해당 단어의 정의를 고심해 적어본다. 그렇게 채워나가는 ‘나만의 사전’이 겨울에게 힘이 되어줄 것을, 나는 안다.
‘변화를 믿느냐’라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내 대답은 당연히 “그렇다”이다. 사람이, 세상이, 세계가 변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면 왜 읽고 쓸까. 책을 읽는다는 것은 변화의 편에 서는 일이기도 하다. 세상이 쉽게 바뀌지 않는다 해도, 변화를 향해 움직이는 동안 적어도 ‘내’가 바뀐다. 어쩌면 변화란 믿음이 아니라 희망의 영역이 아닐까. 그때 우리는 우리의 참고문헌이다. 우리는 우리의 각주다. 그렇게 애쓰는 마음이 있는 한 아주 망가지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