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리님의 블로그
글로 남기는 나만의 기록장[다시 본다, 고전] 미치지 않으려고, 덜 미치려고 시를 쓴다 (naver.com)
'시를 읽는 일은 이상한 일이다. 뚜렷한 메시지를 기대할 수 없고 정보나 지식을 구한다는 보장도 없이 언어를 마주해야 한다. 운이 나쁘면 몇 페이지를 넘기는 동안 마음을 건드리는 문장을 찾지 못할 위험이 있고, 운이 좋다고 해도 ‘아, 좋다!’ 하고 탄식하는 일 외에는 딱히 소용 있는 일이 벌어지지도 않는다. 그런데 이 ‘아 좋다!’고 탄식하는 일이 다른 어떤 독서와도 다른 경험을 준다. 시를 읽는 자는 이 경험(놀람, 영혼의 일렁임, 두근거림)을 찾아 헤매는 사냥꾼으로 살게 된다. 존 버거는 사냥을 “무언가를 소유하는 것과는 반대되는 행위이다. 그것은 무언가를 넘어서는 것이다. 광야로 돌진하는 것. 그것은 고개를 곧추세운 채 여우를 내려다보는 사냥개처럼 자유로운 사람이 된다는 것”('G', 54쪽)이라고 했다. 정확하다. 시를 읽거나 쓰는 일은 우리가 정말 되어야 한다고 믿는 무언가가 될 수 있게 한다. 시 속에서.'
'쓴다는 것은 저항의 시작, 고통의 유예, 유일한 자기 언어의 장을 가지는 일이다. 시 속에서 앤 섹스턴은 폭로하지 않는다. 폭로를 위해 글을 쓰는 시인은 없다. 진실을 세워두고 그걸 보게 하고 싶은 마음이 전부다. 이름 없던 일에 이름을 붙이고 호명하면, 누구도 좌시할 수 없는 사건이 된다. 여성은 존재하는 일이 ‘사건’일 만큼 고단해 왔다. 안 그런가?'
'“나는 사랑 살인자,/ 우리 사이에 다시 또다시 불탔던 음악을/ 그리 특별히 생각했던 그 음악을 살해 중이다”고 노래한 앤 섹스턴은 그가 자조한 것처럼 “홀린 마녀”가 아니다. 홀린 마녀라고 생각한 건 그 시대의 그 사람들. 정상적인 여성상을 만들어놓고 거기에서 비껴서 있는 여성을 나무랄 준비가 되어 있던 자들이다. 지금도 여전히 있다. 여성이 쓰는 시에 ‘여성 시’라는 꼬리표를 붙일 준비가 되어 있는 자들.'





이훤의 <아침일기>
'내가 잘 안 보인다는 감각' : 투비컨티뉴드 (aladin.co.kr)
"... 저한테 일본 사람이냐, 한국 사람이냐 묻는데 저 일본에서 살았으니 일본 사람이라고도 생각하고, 또 지금은 한국에서 살고 있으니까 한국 사람이에요.
저 진짜는 옥천 사람이에요... 피가 뭐 그렇게 중요해요. 저 그냥, 사람이에요."
- 어딘가에는 싸우는 이주여성들이 있다 中
<이슬아 작가의 녹색정의당 마포을 장혜영 의원 지지 선언>
이슬아 작가의 녹색정의당 마포을 장혜영 의원 .. : 네이버블로그 (naver.com)
'미래는 결국 약자의 얼굴을 하고 올 수밖에 없다. 그건 약자들이 옳아서가 아니라,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가장 본질적인 특징이 바로, 연약하게 태어나서, 늘 누군가에게 의존해 살다가, 다시 연약한 존재로 돌봄을 받고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기 때문이다. 약자를 배제해서 얻을 수 있는 미래는 거부하겠다. 그것은 미래가 아니라 너무나 지겹게 반복되온 과거다.'
'그러나 세계는 이야기만으로 바뀌지 않고, 반드시 법과 시스템의 한계 속에서 움직입니다. 우리가 지키고 싶은 소중한 가치를 수호하거나 망칠 힘이 국회의원에게는 있습니다. 그 중요한 힘은 아주 신중하고 사려깊은 사람에게 주어져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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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망치고 고치려는 것에 사랑을 쏟고, 시간을 쏟고, 돈을 썼다. 쏟은 만큼 나를 바라봐주길 바랐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헛된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이제야 제대로 바라본다.
내가 나로서 살아갈 수 있는 곳에 마음을 쓰고 싶다.
재촉하지 않고 다그치지 않는다.
모자란 나를 알고 모자란 그대로 둔다.
끝내 벗어나지 못한 여기에 내가 있다.
아직도 비틀거리는, 낫지 않은 마음을 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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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리지 않은 마음들이 엉켜 있다.
행간에 둔 아직 설명하지 못한 여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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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선다.
<홍승은의 무해한 말들>
은유 작가님 칼럼을 읽다가 흘러왔다. 읽으면서 와닿는 내용이라 옮긴다. '지금의' 나는 이런 내용에 사로잡혔다는 것. 놓치지 않도록 야금야금 모아야지.
[홍승은의 무해한 말들] 서로의 떨림에 접속하기 | 예스24 채널예스 (yes24.com)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작가의 눈을 바라보았다. 가끔 멈칫하며 당황하는 작가에게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작가님 충분히 좋아요!” 같은 응원을 전하기도 했다. 2부에서는 각자에게 엄마가 어떤 의미인지 돌아가며 나눴다. 나는 엄마 이야기를 하다가 펑펑 울어버렸다. 모두가 내 눈물이 부끄럽지 않도록 품어주었다. 작가에게 정말 좋은 시간이었다고 꾸벅 감사 인사를 전하고 책방을 나섰다. 밤바람이 상쾌했다. 내 처음처럼, 작가에게도 그날이 긴장과 설렘, 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남길 바랐다.
얼마 뒤 내가 두 번째 단행본을 낼 무렵, 출판사에서 사전 서평단을 모집하는 이벤트를 열었다. 서평단 지원서를 쭉 읽다가 익숙한 이름을 발견했다. 김은화 작가였다. ‘제가 처음 북토크를 했을 때, 승은 님은 따뜻한 눈으로 저를 바라봐주었어요. 이번에는 제가 승은 님의 떨림을 응원하고 싶어요.’ 내가 계속 말할 수 있었던 건, 내 약하고 소심한 마음을 알아주는 마음들 덕분이었다. 서로의 품에서 숨지 않고 말할 힘을 무럭무럭 기르던 ‘우리’를 떠올리며, 나는 바란다. 당신의 처음과 떨림에 기꺼이 접속하고 싶다고.'
은유 작가님 칼럼 <은유의 다가오는 것들>
은유 작가님의 칼럼들이 미치게 좋다. 그냥 다 주옥 같다.
하찮은 만남들에 대한 예의 | 예스24 채널예스 (yes24.com)
청첩장을 여러 번 받게 되면서 결혼에 대한 꺼림칙한 마음이 자꾸 들었는데 이 글이 가렵던 내 의문을 긁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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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좋아하는 이성과 맺어지는 것이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 그래서 축복한다. 결국 여기에는 좋아하는 이성과 맺어진 일이 당사자뿐만 아니라 세상 일반에 행복한 일이라는 사고방식이 전제로 깔려 있다. 이러한 사고방식, 어법, 축복의 방식은 동시에 좋아하는 이성과 맺어지지 못한 사람들은 불행하다든가, 아니면 적어도 이 두 사람만큼 행복하지 않다는 의미를 필연적으로 띠고 만다.”(111쪽)
저자는 두 사람의 결혼을 축복한다는 것 자체가 독신이나 동성애자에게는 저주가 된다며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나누는 규범을 모조리 갖다 버려야 한다. 규범이란 반드시 그것에 의해 배제 당하는 사람들을 산출하기 때문이다”(112쪽)라고 일갈한다. 뭔가 후련했다. 좋음과 나쁨의 전복이 아닌 규범의 용도 폐기. 누구도 소외되지 않으니 배려도 필요치 않은 상태. 누가 결혼했든 이혼했든 합격했든 실직했든 발병했든 서툰 연극 배우처럼 구는 짓은 이제 그만이다.'
울더라도 정확하게 말하는 것 | 예스24 채널예스 (yes24.com)
회사에서 점심 회식 후 오늘(3월 8일) 여성의 날이라고 내가 언급했고, 그 상황에서 여성전용주차장 폐지되었다고 차장님(남성)이 말했다. 그 말이 화두가 되어서 여성들의 의견이 분분해졌다. 이렇게 흘러간 대화 맥락에 이후에도 계속 기분이 나빴는데, 이 글을 읽고 겨우 다잡는다. 지독하고 지겹게 익숙한 흐름이다. 울더라도 정확하게 말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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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낯설고 익숙한 상황, 이야기의 전후 맥락을 살피기보다 자신을 불쑥 내세우는 남성성의 노출에 난 또 찔렸다. 이번엔 정신을 집중해 말했다. 내 몸을 통과한 폭력의 기억에 대한 가치 폄훼를 바로 잡아야 했다. 당신의 발언은 내가 폭력의 당사자여도 문제, 아니어도 문제다. 용기 내어 자기 아픔을 터놓고 그 아픔에 같이 아파하고 감응한 사람들에 대한 결례이자 업신여김이다. 폭력의 피해를 개인의 박복과 불운으로 취급하는 것, 수치심을 심어주어 침묵을 강요하고 사적인 문제로 돌리는 관습이 얼마나 많은 폭력을 양산하고 방치하는지가 오늘 강의 주제라고 정리해주었다.
물론 냉정하고 초연하지 못했다. 맥없이 터진 눈물을 꾹꾹 누르며 말했고 그는 주저 없이 사과했다. 자신이 강의 중간에 들어와서 앞의 이야기를 못 들었고 인문학을 배운 지 얼마 안 돼서 잘 몰라서 그렇다는 말도 덧붙였다. 선량한 눈매를 가진 그의 사과를 의심하진 않지만 그럴수록 그의 언행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강의 내용 파악이 어렵고 공부가 부족하다고 여기면서도 스스로 말하도록 허락했고 기어코 한 수 가르치려 들었으므로.'
슬픔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 | 예스24 채널예스 (yes24.com)
분명 해야할 공부다.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오히려 슬픔을 거세하도록 종용하는 사회가 자주 힘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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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에 간 아이가 휴가를 나왔다가 들어간 다음 날, 빨래를 개키다가 멈칫했다. 아이가 입던 양말이랑 팬티가 손에 잡혔다. 사람은 가고 없는데 옷가지만 남아 있는 게 영 이상했다. 당분간이겠지만 임자 없는 옷들. 그것을 만지작거리다가 나는 ‘최초의 빨래’를 생각했다. 2014년 4월 16일 이후 처음 돌아간 세탁기에서 나왔을 옷들. 아이가 수학여행 가기 전 벗어놓은 허물들. 그것을 빨고 말리고 개켜도 입을 사람이 더는 없음을 알았을 때, 참사 이전의 일상을 완강하게 간직한 그 옷들은 다시 젖어가지 않았을까.'
'『금요일엔 돌아오렴』은 평범한 사람들의 각성과 저항의 서사로 빛난다. “아이랑 함께 했던 공간과 시간을 아이 없이 모두 다 새로 시작해야 한다”(213쪽)는 사실에 인생 초보가 된 사람들.'
우리는 왜 살수록 빚쟁이가 되는가 | 예스24 채널예스 (yes24.com)
'가난은 상대적이나, 한 존재에게 중요한 것들을 뺏어간다. 밥부터 포기시키고 밥이 매개하는 관계와 건강을 무너뜨린다. 가난은 말을 가로챈다. 감추고 싶은 것은 강제로 노출시키고, 말하고 싶은 것은 들어주지 않는다. 먹고살기 바빠 일일이 사정을 말할 기회가 없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 한다는 말. 아마 그건 고생 끝에 낙이 온 사람에게만 발언권이 주어졌기 때문일 거다. “성실한 나라에서 살아남기 위해 성실했다가 개죽음을 당한”(189쪽)이들은 말이 없다. 특정 지역이 사교육 시키기 좋다는 말. 사교육으로 엘리트 코스를 밟아 기득권층이 된 이들의 언어일 것이다. 사교육에 실패했거나 애초에 사교육을 받을 수 없는 이들의 말은 배제됐다. 재개발이 지역 발전에 좋다는 말도 마찬가지. 매매차익으로 부를 축적한 중산층과 그것을 조장한 토건재벌의 말이다. 쫓겨난 원주민의 말은 무음 처리다. 사회적 편견은 그렇게 생산ㆍ유통 된다.'
글쓰기는 나와 친해지는 일 | 예스24 채널예스 (yes24.com)
“지금까지 제 글이 이상하고 못났던 것은 배움이 부족해서라고 생각했어요. 필사를 하지 않아서, 단어를 많이 몰라서, 독서량이 부족해서. 그게 아니더라고요. 나를 생각하지 않아서였어요. 나를 바라볼 수 있을 만큼의 고독과 외로움이 괴로워서. 그럴 때 늘 찾았던 친구들, 드라마, 영화, 책이 문제였어요. 나 자신과 생각보다 서먹한 사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알려주지 않으면 그 이유를 모르시겠어요? | 예스24 채널예스 (yes24.com)
'좀 합리적이 되라고 말하는 변호사, 네 병은 내가 안다고 말하는 의사. 그걸 꼭 알려주지 않으면 하나도 모르고, 알려주어도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 그들은 이 시대의 전문가들이다. 타인의 사정을 헤아리기 위해 진득한 노력을 기울이는 인내심이 부족하고, 한 인간의 복잡한 내면을 자기 지식으로 성급히 단순화해버리는 재주에만 능하다.'
'합리성으로 포획되지 않는 삶, 실패로서만 확인되는 앎이 있다. 그것은 나를 원점으로 돌려놓는다. 아내의 병을 고치겠다는 의지가 확고한 남편이 정작 아내의 말을 듣지 못하듯이, 어떤 목표에 사로잡히면 사람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성실함의 중단, 합리성의 거부를 실천한 바틀비처럼 나도 성실함과 합리성의 스위치를 몸에서 꺼두어야 할까 보다. 그래야 사람이 보일 것 같다.'
성폭력 가해자에게 편지를 보냈다 | 예스24 채널예스 (yes24.com)
'용서는 신이 지급하는 쿠폰이 아니고 인간의 용기를 거름 삼아 자라는 나무라는 것. 그래서 가해자와 피해자, 공동체 구성원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용기 내어 정성스럽게 가꾸어야 한다는 것 말이다. 살아있음 자체가 용기다. “삶은 계속된다. 한껏 이용하라. 네가 가진 게 별로 없다 해도 삶만은 네 것이다.”'
1.그믐
2.은성님
3.하루의 책상 haaru's desk - YouTube / 다락방북클럽
4.아이유, <The Winning>
5.낭독, 송정희 성우님
6.들개이빨, <부르다가 내가 죽을 여자 뮤지션>
7.장일호 작가님
8.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괴물>
9. 김승섭,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공부>
9일날 영화를 처음보고 10일날 바로 한번 더 봤다.
저번 글은 그 당시에 남긴 짧은 글.
내한한 배우들의 무대인사를 보러 어제 영화를 2번 더 보게 됐고
살면서 영화관에서 같은 영화를 4번이나 본 건 처음이다.
하루에 같은 영화를 두 번 봤음에도 좋았다.
알던 장면에서도, 미처 발견하지 못한 낯선 장면에서도 마음이 아팠다.
다시 태어난다는 게 뭐죠.
다시 태어나고 싶은 그 마음이 뭘까요.
나는 그 마음을 안다.
그래서 그 마음을 갖고 속절없이 흔들리는 아이들을 보니
나도 어쩔 도리 없이 마음이 뭉개진다.
뭉개지는 마음을 안고
내가 영화 속 햇살이 되고 싶다고
햇살이 될 수 있다면
햇살이 될 수 있기를
그런 바람을 되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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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뢰하고 애정하는 이동진 영화 평론가님의 한줄평을 적어둔다.
이 한줄평만 읽고서 봐야겠다고 마음 먹고 아무런 정보 없이 보러 간 영화였다.
'오해를 경유해서 이해의 이르는 경험 끝에 관객은 그 햇살 아래서 증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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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본가 사카모토 유지의 말도 같이 남긴다.
'단 한 명의 외로운 사람을 위해 썼다.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하는 누군가에게 응원을 보내는 영화가 되길 바랐다'
덕분에 같은 바람을 나눠 가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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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부츠 - 末長真 (suenagamakoto.com)


자꾸 마음이 쓰인다.
간만에 여운이 깊은 영화여서 이 마음을 남기고 싶은데 마음만 일렁이고 뭐라고 써야할지 모르겠군.
난 역시 아이한테 약하구나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치 명타를 입을 줄 몰랐다)
맨홀 뚜껑에 달라붙어 있던 요리와 미나토의 뒷모습이 자꾸 아른거린다.
다음에 연인이 생긴다면 괴물을 좋아할 줄 아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고 생각했다.
괴물이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은데
사실 이런 말을 할 필요가 없는 세상을 만들어야 할테지.
살아남아버려서
결국 어른이 된 나는 괴물이 아닐 수 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