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시카와 에이지 1. 도원편 | 유비의 8할은 어머니가 만들었다.
2026-07-06 15:45:02
이문열의 삼국지를 수십 번 읽었던 나로서는 "편역이라고 뭐가 다르겠어?" 하는 마음으로 시작한 재독이었다. 그런데 십여 년 만에 다시 만난 도원편은, 아는 이야기인데도 낯설게 새로웠다.
특히 이번엔 클로드에게 한나라의 지방 편제, 군사 편제, 헷갈리던 관직명들을 하나씩 물어보면서 읽었더니 — 이 사람이 이 상황에서 어느 정도의 위치였는지가 손에 잡히듯 이해가 되었다.
(덕분에 유비가 '현위'라는 말을 그냥 넘기지 않고, 지금으로 치면 군수 밑 치안 부관쯤 되는 자리구나 하고 체감하게 됐다.)
#1 위대한 아들 위에 위대한 엄마
반대로 약한 엄마 밑에 약한 아들
유비가 황건적에게 빼앗긴 칼을 장비가 되찾아주자, 감동한 유비는 아버지의 유품인 칼을 장비에게 선뜻 내어준다. (유품이라면서 이렇게 막 줘도 되나 싶었지만..)
그런데 정작 문제는 이 사실을 어머니가 알게 되면서다. 애써 구해온 차를 정성껏 대접하려던 그 순간, 어머니의 눈에 낯선 칼이 포착되고 어머니는 "내가 네 아버지께 죄를 지었구나" 통곡하며 손에 든 차 항아리를 강 한가운데로 던져버린다.
여기서 잠깐, 2년 동안 돈과 칼자루 옥구슬까지 팔아 겨우 구한 그 귀한 차 말이다. 당시(서기 168년경)엔 차 씨앗이 외국에서 극히 소량만 건너와 후궁의 다원에서나 조금 가꿀 정도로 귀했다고 하니, 지금으로 치면 명품백 하나 사드리려고 적금 깬 격이려나. 그런 귀한 걸 강물에 던져버리다니, 어머니의 화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간다.
이 어머니가 유비에게 알려주는 비밀은 더 크다. 바로 유비가 한나라 중산정왕 유승의 정통 핏줄, 경제의 현손이라는 것. 그러니 때가 오면 칼을 잡고 초려에서 일어서야 한다는 당부한다.
반면 하태후를 보자.
황후 자리까지 올랐지만 아첨하는 간신들의 말에 휘둘려 오라비 하진을 죽음으로 몰았고, 아들 '변'이 황제에 올랐음에도 옥새도, 황제 자리도 지켜내지 못했다.
변은 황제 자리에 오른지 5개월만에 폐위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결국 독약을 먹고 죽게 된다. 유비의 어머니처럼 흔들림 없는 중심이 없었던 거다. 약한 엄마 밑에서 약한 아들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건 아닐지.
동탁이 내세운 '약한 황제'라는 말에 선뜻 반박할 수 없는 것은 그만큼 '소제'가 유약한 황제였기 때문이고, 이 유약한 황제를 만들어낸 건 예쁜 미모외에는 자랑할 게 없었던 하태후였다.
#2. 경영의 중요성
힘만이 전부가 아니야
세가 갑자기 불어나며 돗자리 장수에서 100여명의 부하를 거느리게 된 유비에게 군자금을 내어준 장세평의 조언은 지금 우리들에게도 울림이 크다.
"일군을 꾸리려면 이제 경영을 고려해야 한다. 무력만으로 몸집이 커지면 폭군으로 변하기 쉽다
요시카와 에이지 삼국지 1권 153쪽
무인은 금전을 멀리해야 청렴하다는 생각, 개인의 인격으로는 고상해 보여도 나라의 대계로 보면 불충분하다는 거다.
노식도 비슷한 얘기를 한다. 좌풍에게 뇌물을 주지 않아 억울하게 관직을 박탈당하면서도, "전투를 각오한 전장보다 마음이 해이해지기 쉬운 보통 때가 더 위험하다"는 경고를 유비에게 남긴다(184쪽).
이 대목에서 하진이 유독 대조적으로 다가온다. 미천한 몸으로 신하들 위에 군림했지만, 대단한 야심가도 진정한 악한도 되지 못한 사람. 위계와 관복이 버거워 좌고우면하며 끙끙 앓다가, 결국 원소의 선동에 넘어가 격문을 띄우고 동탁까지 낙양으로 불러들인다.
경영도, 결단도 없이 그냥 자리만 지키고 있던 사람의 최후가 이렇다는 것.
#3. 동탁은 원래부터 이렇게 악한가
악인은 타고난 것인가
이 편에서 가장 오래 생각하게 만든 인물은 역시 동탁이다. 등장부터 강약약강. 생명의 은인인 유비군에게 무직무관이란 걸 알자마자 노골적으로 경멸을 보이는 걸 보면서 — 벌써부터 싹수가 노랗다 싶었는데, 이후 실제로 황제를 폐위하고, 하태후와 폐제를 독주와 단도로 압박해 자결시키고, 잔인한 행위를 서슴없이 이어간다.
지금까지 나온 인물 중 동탁과 이유만큼 악한 인물은 없는 것 같다. 차라리 황건적이 동탁보다 착하다고 해야 할까.
황건적은 적어도 자신에게 반하는 인물만 건드렸는데, 동탁은 눈에 띄는 약자는 다 건드리고 본다.
여포 역시 마찬가지다. 자신을 키워준 양아버지 정원(장원)을, 적토마와 이숙의 말 몇 마디에 넘어가 살해하고 동탁의 편이 된다. 요시카와 에이지는 이를 두고 "한 치 앞의 욕망에 눈이 멀어 결국 청운의 큰 뜻을 헛디디고 말았다"(321쪽)고 적는다.
그리고 요시카와 에이지가 218쪽에서 남긴 이 문장이 이 편 전체를 관통한다.
"천하의 혼란은 천하의 백성 사이에서 의미없이 발생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 화근은 낮은 민토보다도 높은 조정에 있었다. (…) 그러나 썩은 자야말로 자기 몸에서 나는 악취를 맡지 못한다." 요시카와 에이지 삼국지 1권 218쪽
마무리
아는 이야기라 순삭할 게 뻔한데도, 일부러 천천히 나눠서 읽었다. 페이지 넘기는 게 아까워지는 책이 있다면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지 않을까.
결말을 알고 있기에 더 안타까운 선택들과 행보들을 보면서 나라면 이 상황에 어떻게 할까를 고민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