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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는 사람의 기록현대문학 (231227~231230)
❝ 별점: ★★★★☆
❝ 한줄평: 악(惡)은 무엇이고, 악인은 누구인가
❝ 키워드: 죄 | 살인 | 사형수 | 호기심 | 이야기 | 죄인 | 죽음 | 의도 | 본성 | 정상 | 욕망 | 기다림 | 미움 | 그리움
❝ 추천: 악(惡)과 악인에 관해 생각해보고 싶은 사람
❝ 존재를 숨겨야 존재할 수 있는 사람. 그게 나였습니다. ‘쁘리즈락’, 그곳에서 저를 부르는 명칭입니다. 여기 말로 ‘유령’이지요. ❞ (p.127)
🌊 첫 문장: 얼음 바다를 보신 적 있으십니까? (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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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년의 마지막 책으로 정용준 작가님의 『유령』을 골라뒀는데, 다 읽고 나니 마음이 너무 복잡해져 버렸다. 그와 별개로 책은 정말 좋았지만.
✦ 죄와 벌, 선과 악의 기준에 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교도소에 있으니까 죄인’(p.25)이고, ‘행동에는 이유가 있기 마련’(p.33)이라는 교도관 윤. 그러나 그의 마음을 들여다봤을 때 그는 악인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신형철 평론가가 ‘우리 모두가 대체로 복잡하게 나쁜 사람’(『정확한 사랑의 실험』)이라고 말했던 게 생각난다.
✦ ‘누군가 몰락하는 풍경을, 누군가의 비밀이 어떤 이유로 인해 탄로 나는 모습을, 후회와 절망으로 무너져 침 흘리며 우는 모습’(p.39)을 우리 또한 매일 같이 호기심을 가지고 지켜본다. 지켜보기만 하는 이도 있지만 비웃고 비난하는 이도있고, 동정하고 연민하는 이도 있다. 속내를 들키지 않았다고 내가 한 생각이 없어지지는 않는다. 악(惡)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 474번이 신해준이 되어 가는 과정에서도 그에게 동정은 가지 않았다. 그러나 ‘두 가지 일이 동시에 일어날 수 있고, 두 가지 생각도 동시에 할 수 있고, 두 가지 감정도 동시에 가질 수 있으며, 한 사람이 두 존재가 될 수 있다’(p.133)는 474번의 말은 깊이 생각해 보게 되었다. 세상이 완벽하게 이분법으로 나뉘는 곳이 아닌 것처럼, 나 자신도 모든 것을 이분법으로 나누어 생각하고 행동할 수 없기에 언제든 두 존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 작품 해설은 재독 후에 읽어보려고 아껴두었다. 이 복잡한 감정을 책을 한 번 읽고 다 써 내려가기엔 아직 나의 생각이 다 정리되지 않았다. 너무나도 겨울 풍경 그 자체인 이 작품. 겨울 하면 이제 정용준 작가님이 떠오를 것 같다. [📝23/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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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일 무서운 사람이 누군지 알아?
(…)
잔인한 놈? 살인자? 사이코? 아냐. 아냐. 속을 모르겠는 놈이야. (p.13-14)
| 그는 의도를 품지 않아요. 죽이고 싶어 하는 욕망이 없고 그로 인해 얻는 쾌감도 원치 않아요. 그는 그냥 죽입니다. 그는ㅍ미워하는 사람이 없고 사랑하는 사람도 없어요. 따라서 복수도 없고 오해도 없지요. 폭우가, 눈덩이가, 번개가, 곰이, 인간에게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있나요? 사자는 사슴의 숨통을 끊고서 자신을 만든 창조자에게 용서를 빌지 않아요. 그냥먹을 뿐입니다. 본성이란 그런 것입니다. (p.28)
| 무표정한 얼굴로 쪼그리고 앉아 생명이 꺼져가는 모습을 차분하게 지켜보는 것. 윤은 그것을 잘했다. 스스로는 좋아하지 않는다고 믿으며, 그것은 선한 일은 아니지만 결코 악한 일도 아니라고 스스로를 정당화하며, 기다리고 지켜봤다. 누군가 몰락하는 풍경을, 누군가의 비밀이 어떤 이유로 인해 탄로 나는 모습을, 후회와 절망으로 무너져 침 흘리며 우는 모습도 지켜봤다. 직접적으로 엮이지 않고, 인과에 참여하지 않고, 그러나 완전히 무관하지도 않은 거리에서 그것을 지켜볼수 있도록 윤은 언제나 적당한 거리를 찾아냈고 선 앞에 서 있었다. (p.39)
| 죽게 되겠지요. 결국은 그렇게 되겠지요. 그런데 이상하네요. 사형 당하러 들어온 사람을 사형 시키는 것이······ 뭐, 그 방법밖에 없겠지만 무력하군요.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모두가 합심하여 살인을 저지른 죄인의 요구를 들어주고 있는 것 같아요. 마치 공범같이 말이죠. 죄를 짓고 그에 합당한 벌을 집행하는 게 법과 교도소의 존재 이유라면 이유일 텐데 이 경우엔 모두가 결국 그가 원하는 대로 돕는 셈이죠. 뭔가 속고 있는 것 같아요. (p.93)
| 부서졌던 시간이 다시 모이고 있습니다. 일그러진 그림. 기괴하게 조립된 얼굴. 한쪽은 웃고 있고 한쪽은 울고 있습니다. 떠나가고 버려지고, 두 가지 일은 동시에 일어날 수 있습니다. 보고 싶고 죽이고 싶고. 두 가지 생각도 동시에 할 수 있어요. 사랑하고 미워하고, 두 가지 감정도 동시에 가질 수 있습니다. 누나와 엄마. 오피스와 무미야. 한 사람이 두 존재가 될 수도 있어요. 이젠 이 혼란을 멈추고 싶습니다. 담당님. 이해하시겠습니까? (p.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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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동네 (e-book, 231225~231229)
❝ 별점: ★★★★☆
❝ 한줄평: 사람을 살게 하는 어떤 마음들, 그리고 이야기
❝ 키워드: 사랑 | 마음 | 가족 | 이야기 | 기억 | 고통 | 슬픔 | 공감 | 그리움 | 후회 | 소중함 | 용서
❝ 추천: 백 년의 시간을 넘나들며 여성들의 삶을 전달하는 이야기가 궁금한 사람
❝ “어떻게 살았어요, 할머니? 그런 일을 겪고 어떻게 살 수 있었어요?”
나는 참지 못하고 얼굴을 가린 채 눈물을 흘렸다.
“언젠가 이 일이 아무것도 아닌 날이 올 거야. 믿기지 않겠지만······ 정말 그럴 거야.” ❞
🌌 첫 문장: 나는 희령을 여름 냄새로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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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선-영옥-미선-지연으로 이어지는 백 년의 시간 속 4명의 삶과, 그들과 얽힌 이들의 이야기.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주면 그 기억 속에서 그 사람은 그만큼 더 살 수 있다’는 영옥의 말처럼, 정선, 새비 아저씨와 아주머니, 명숙, 그리고 정연까지 생생히 살아 움직이는 인물들을 만날 수 있었다.
✦ 마음. 어떤 마음은 사람을 죽게 하기도 하지만, 어떤 마음은 사람을 살게 한다. 사람을 살게 하는 여러 마음들에 읽으면서 정말 많이 울었다. 서로를 살린 정선과 새비 아주머니의 마음. 영옥을 살린 명숙의 마음. 지연을 살린 지우의 마음. 어깨에 기대는 사람과 어깨를 빌려주는 사람. 나도 누군가의 어깨에 기대 위로받은 것처럼 어깨를 내어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 슬픔과 아픔, 고통을 겪고도 ‘어떻게 살 수 있었냐’는 지연의 질문에 영옥은 ‘언젠가 이 일이 아무것도 아닌 날이 올 거야. 믿기지 않겠지만······ 정말 그럴 거야.’라고 답한다. ‘아무것도 아닌 날’이 될 때까지 얼마나 많은 긴긴밤을 견뎠을까. 또 견뎌야 할까. 그래도 언젠가는 ‘밝은 밤’이 올 수 있을까.
✦ 사람을 살게 하는 어떤 마음들은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모두 사랑이다. [📝23/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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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이라는 것이 꺼내볼 수 있는 몸속 장기라면, 가끔 가슴에 손을 넣어 꺼내서 따뜻한 물로 씻어주고 싶었다. 깨끗하게 씻어서 수건으로 물기를 닦고 해가 잘 들고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널어놓고 싶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마음이 없는 사람으로 살고, 마음이 햇볕에 잘 마르면 부드럽고 좋은 향기가 나는 마음을 다시 가슴에 넣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겠지. 가끔은 그런 상상을 하곤 했다.
| 나는 희자가 높은 하늘에 연을 띄우듯이, 기억이라는 바람으로 잊고 싶지 않은 순간을 마음에 띄워 올리곤 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런 바람을 마음에 품고 살아가는 일이 항상 즐거운 것만은 아니었으리라고 짐작하면서.
잠깐만 앉아 있자고 했으면서도 우리는 말없이 오래도록 바다와 달과 흰 연을 바라봤다.
멀리서 폭죽 터뜨리는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 할머니가 개망초꽃을 손등으로 툭툭 쳤다. 지금 너도 남몰래 울고 있다는 걸 알고 있어. 할머니의 말이 내게 꼭 그렇게 들렸다. 끝나는 것들만 생각하지 마.
| 한 사람의 삶을 한계 없이 담을 수 있는 레코드를 만들면 어떨까. 태어나는 순간부터 어릴 때의 옹알이 소리, 유치의 감촉, 처음 느낀 분노, 좋아하는 것들의 목록과 꿈과 악몽, 사랑, 나이듦과 죽기 직전의 순간까지 모든 것을 담은 레코드가 있다면 어떨까. 처음부터 끝까지 한 사람의 삶의 모든 순간을 오감을 다 동원해 기록할 수 있고 무수한 생각과 감정을 모두 담을 수 있는 레코드가 있다면. 그건 그 사람의 삶의 크기와 같을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비가시권의 우주가 얼마나 큰지, 어떤 모습일지 상상할 수 없는 것처럼 한 사람의 삶 안에도 측량할 수 없는 부분이 존재할 테니까. 나는 할머니를 만나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 사실을 자연스레 이해할 수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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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문학 (231208~231229)
❝ 별점: ★★★★
❝ 한줄평: ‘꿈이 나를 아무리 깊은 바다로 떠밀더라도 나를 붙잡아줄 것 같은’ 시들
❝ 키워드: 이야기 | 사람 | 행복 | 슬픔 | 꿈 | 동물 | 기억 | 진실 | 미래 | 사랑 | 이름
❝ 추천: 언어유희가 재미있는 시집을 좋아하는 사람
❝ 네가 평평하지 않고 공평하다면
세모일 수도 있고
네모일 수도 있고
청설모일 수도 있지 ❞
/ 「평평지구」 (p.5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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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을 읽다 보면 언어유희가 재미있고, 또 재미난 상상도 많이 등장하지만, 진지하고 슬퍼지는 순간들도 있다. 화자는 ‘자신의 그릇을 처음 보게 되었는데, 종이 접시처럼 볼품없어서 마음 아파하며 크림 컬러의 플레이팅 접시나 바로크 엔틱 찻잔이었더라면 꿈을 크게 가질 수 있었을까’ 자조하기도(「그릇」) 하고, ‘걸을수록 나 자신과 멀어지는 게 좋아 멀리 한강공원까지 나가 나를 유기하지만 잘라서 버린 팔다리와 머리가 어김없이 자신에게 붙어 있어 잔소리에 시달려 한숨도 못 자기도’(「걷기 예찬」) 한다.
✦ 그렇지만 ‘결혼을 앞둔 친구에게 축시 부탁을 받고’ 시를 쓰다 ‘재난문자 같은 시에 축시 마감을 한 주만 미룰 수 없을까’란 엉뚱한 상상을 하며 ‘면사포를 써야 상냥한 말이 떠오를 것 같다’(「축시 쓰기」)고 하기도 하고,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더 외로워서’ ‘몸은 두고 다리만 집으로 와서 집정리도 하고, 가볍게 춤을 추기도 하고, 차를 마시기’(「혼자」)도 하는 화자. 꿈을 자주 꿔서 ‘살아 있는 자들의 무덤, 심지어는 나 자신의 무덤을 보기도 하지만 잠에서 깨면 태연하게 모닝커피를 마시고’(「굿모닝」), ‘몇 날 며칠을 바다에 빠지는 꿈을 꾸지만 쌍무지개 휘어지도록 단단하게 자신을 붙잡아주는 이가 있는’(「햇빛」) 화자. 화자는 웃을 줄 알고, 웃음을 만들 줄도 아는 단단한 사람 같다.
✦ 얼마 전 서점 위트 앤 시니컬에서 열린 민구 시인의 낭독회를 유튜브 스트리밍으로 봤는데, 시가 유쾌하고 웃긴 것만큼 민구 시인도 참 유쾌하고 웃긴 분 같았다. 이번 시집의 제목 『세모 네모 청설모』와 시집 표지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셨는데엄청 솔직 담백하게 말씀하시는 게 묘하게 재미있고 유쾌해서 즐겁게 들었다.
✦ 이름과 별명에 관해 이야기하는 시인의 에세이 「별명」도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 맹구부터 민민구, 밍크까지. ‘민민구’ 에피소드에서는 나도 모르게 크게 웃어버렸다. 그러고 보니 별명이라는 걸 마지막으로 가져본 게 언제였는지 기억도 잘안 난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름으로만 불린다는 건 그에 걸맞은 관계를 설정한다는 의미’라는 시인의 말이 확 다가왔다. 어릴 땐 별명이 있다는 게 그렇게 싫었는데, 지금은 별명을 가졌던 때를 그리워한다니. 참 웃기다.
✦ ‘사랑한다면 벼멸구라도 상관없다’고 하며 누구와도 ‘친구가 될 준비가 됐다’는 민구 시인. ‘별명 없이 이제 이름으로 불리는 게 마냥 좋지만은 않다’(p.110)는 시인에게 족제빗과 동물 밍크와 민구를 합친 ‘밍구’라는 귀여운 별명을 지어주고 싶어졌다. ‘좋아하는 일에 치중하면서 살고 싶다’는 그가 멋지고 귀엽다고 말하면 실례일까? 그러나 그건 정말 진심으로 멋지고 귀여운 일이라 생각한다. ‘밍구’의 다음 시집도 벌써 기대된다. [📝 23/12/29]
(*현대문학 핀사단으로 선정되어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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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걷는 걸 좋아한다
걸을수록 나 자신과
멀어지기 때문이다
/ 「걷기 예찬」 (p.18)
❝ 내 그릇을 본 건 처음이었어
청소하다가 우연히 꺼내본 그릇
너무 작아서 웃음이 나왔다
내 거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원형이나 사각형은 아니었고
강박 때문에 금이 갔으며
녹슬어서 보여주기 민망했다
크림 컬러의 플레이팅 접시나
바로크 엔틱 찻잔이었더라면
꿈을 크게 가질 수 있었을까
/ 「그릇」 (p.40)
❝ 만약 네가 백 년 동안 살아 있다면
수조를 준비해야겠지
그땐 이 방이 수조 속에 들어가서
모형 풍차처럼 조그만 기포를 만들며
내가 너의 마리모가 되겠지
그게 마음에 들었다
/ 「마리모」 (p.66)
❝ 별명이 없다. 이별 인사 없이 떠나버렸다. 이젠 이름으로 불린다. 이름으로 불리는 게 마냥 좋지만은 않다. 이름으로만 불린다는 건 그에 걸맞은 관계를 설정한다는 의미이다. 즉, 일하자는 거다. 돈을 벌어야 시를 쓰니까 어쩔 수 없다. 그래도좋아하는 일에 치중하면서 살고 싶다. 별명을 불러도 좋은 친구가 그립다. 나를 뭐라고 불러도 좋은 사람들. 나는 친구가 될 준비가 됐다.
/ 에세이: 「별명」 (p.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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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았던 시
✎ 「한 사람」 ⛤
✎ 「멍」
✎ 「걷기 예찬」
✎ 「축시 쓰기」
✎ 「아무도 모른다」
✎ 「그릇」 ⛤
✎ 「굿모닝」 ⛤
✎ 「평평지구」
✎ 「혼자」 ⛤
✎ 「우리 사이」
✎ 「마리모」 ⛤
✎ 「의미 없는 삶」 ⛤
✎ 「포춘 쿠키」
✎ 「새해」 ⛤
✎ 「비수기」 ⛤
✎ 「간조」 ⛤
✎ 「햇빛」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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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문학 (231219~231228)
❝ 별점: ★★★★☆
❝ 한줄평: 소멸은 슬프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것
❝ 키워드: 마음 | 기다림 | 겨울 | 눈 | 밤 | 죽음 | 슬픔 | 울음 | 기도 | 꿈 | 사랑 | 엄마
❝ 추천: 겨울밤의 슬픔이 가득한 시집을 읽고 싶은 사람
❝ 어떤 슬픔은 머무르는 그대로 우리를 살게 하고,
그대로 내버려두고 싶은 슬픔이 있어, ❞
/ 「소멸하는 밤」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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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 서평을 읽다가 시인이 ‘소멸’에는 ‘사라져 없어짐’이라는 의미뿐 아니라 ‘에너지가 합쳐져 다른 형태의 에너지를 내보내는 의미’도 있다고 말했다기에 사전을 찾아보았다. ‘소멸’에 ‘반입자(反粒子)와 소립자(素粒子)가 합체해서, 그 정지(靜止) 에너지를 다른 입자의 형태로 방출하는 과정’이라는 의미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랑하는 존재가 ‘사라져 없어진다’는 것은 다르게 생각하면 ‘다른 형태로 모습을 바꾸는 것’일 수도 있다는 것. 훗날 상실의 아픔을 겪고 슬픔의 시간을 지나가게 될 때 이 시집을 읽었던 일이 떠오르면 좋겠다.
✦ 밤, 그리고 겨울. 뭔가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기나긴 기다림이 떠오르는 시간이다. 시집을 읽으며 겨울밤의 이미지가 계속 떠올랐다. 누군가를 애도하는 과정도 그러하지 않을까.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기나긴 슬픔. 차갑고 매서운 눈바람이 꽁꽁 얼어붙게 만들어 쉽사리 녹을 것 같지 않은 마음. 그리워했던 사랑하는 이를 꿈에서라도 만나게 될 때 영원히 깨어나고 싶지 않은 순간.
✦ 그렇지만 ‘어떤 슬픔은 머무르는 그대로 우리를 살게’(「소멸하는 밤」) 해서 ‘그대로 내버려두고 싶’(「소멸하는 밤」)기도 한 것이다. 프로이트의 애도가 대상의 상실을 받아들이고 떠나보내는 것이라면, 데리다의 애도는 대상을 영원히 기억하고 슬퍼하는 것이라는 문장을 본 적이 있다. 슬픔이 계속 남아 있기 때문에 애도는 끝나지 않고, 또 불가능한 것이 된다. 슬픔이 머무르는 게 꼭 아픈 일이라고 할 수 있을까. 사랑했던, 사랑하는 이를 영원히 기억하고 슬퍼하는 게 애도라면, 그 기억과 슬픔은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이 될 수도 있으니까.
✦ 시인의 에세이 「슬픔의 반려」에서도 할머니께서 “모든 슬픔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지.”라고 말씀하시는 부분이 나온다. 슬픔의 반려(伴侶)는 무엇일까. 언젠가 슬픔을 반려(返戾)하는 날이 오기도 할까.
✦ 당신은 어떤 것이 ‘소멸하는 밤’을 보내게 될까. 겨울 내내 곱씹어 보고 싶은 그런 시집이었다. [📝 23/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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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 가, 라는 말 대신 차오르고 마는 강수, 슬픔이 표정을 지을 수 있다면 네 눈빛을 하고, 빈 의자에 앉아 창가를 보는사람이 너라는 것을 나는 안다. 나열할 수 없는 슬픔은 왜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걸꺄, 모든 비는, 두 눈은,
/ 「스콜」 (p.21-22)
❝ 잘 지내? 너무 먼 그곳,
여기 겨울 볕이 좋아,
이건 나 혼자 오래된 이야기.
/ 「물끄러미」 (p.47)
❝ 마음은 떠나도 언제든 돌아올 수 있는데
마음을 가진 인간은 왜 돌아오지 못하지
/ 「민들레」 (p.65)
❝ 사라지는 것들의 소리를 듣고 있다는 일이 경이롭지 않나요.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지 않나요, 꿈 곁을 들어 올리면 내일 꾸어야 할 꿈들이 빛을 향한다, 꿈속에는 빛이 없으면서, 당신은 이미 죽었을지도 모르면서.
/ 「하모니카」 (p.108-109)
❝ “모든 슬픔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지. 나를 더는 못 보더라도 슬퍼하지 마.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을게.”
모든 슬픔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니. 기억난다. 지금까지도. 모든 슬픔이 사라지는 순간이. 촛불이 더 이상 타들어갈 수 없다는 듯이 흔들리는 심지가. 할머니의 꺼져가는 동공 위에 비치는 울고 있는 엄마의 얼굴과 멈칫거리는 내 모습이. 작아진 할머니의 몸을 엄마와 함께 들었을 때, 이리 가벼울 수 있을까. 죽음이 이리 가벼울 수 있구나. 이미 할머니의 몸에서 마음이 떠나갔음을 엄마와 나는 알았다. 밤의 궁전으로 우리를 데려가고 있음을. 성문을 지키는 문지기가 저어둠의 궁전으로 우리를 들여보내주지 않을 것임을. 다시는 열어보고 싶지 않은 상자들이 쌓였다. 상자 속에 들어가는 죽음이라니, 이토록 간단하다니, 나의 할머니와 반려동물들은 하나같이 상자 속에 들어갔다. 그래. 묻기 쉬우라고.
/ 에세이: 「슬픔의 반려」 (p.136-137)
❝ 꿈에서 깨었을 때 베갯잇이 눈물로 젖어 있었다. 눈물은 신이 인간에게 슬플 때 춥지 말라고 주는 무엇일까. 눈물을 흘리고 나면 두 눈이 따뜻해지니까, 더는 춥지 말라고, 슬픔에 얼어붙어 있지 말라고.
/ 에세이: 「슬픔의 반려」 (p.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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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았던 시
1부
✎ 「너는 모른다」 ⛤
✎ 「스콜」
✎ 「소멸하는 밤」 ⛤
✎ 「피에타」
✎ 「물끄러미」
2부
✎ 「수국」 ⛤
✎ 「기일」
✎ 「빛의 다락」 ⛤
✎ 「민들레」
✎ 「몫」
✎ 「조감도」
✎ 「윈터링」 ⛤
✎ 「광합성」 ⛤
3부
✎ 「오목」
✎ 「하모니카」
✎ 「파종」 ⛤
✎ 「겨울의 연서」 ⛤
✎ 「앵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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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숲 (231225~231227)
❝ 별점: ★★★☆
❝ 한줄평: 내가 나일 수 있도록, 매일 조금씩 나아가기
❝ 키워드: 퇴사 | 나 | 정리 | 도전 | 성장 | 호흡 | 헤엄 | 인생
❝ 추천: 방황을 끝내고 다시 수면 위로 올라와 멀리 헤엄치고 싶은 사람
❝ 멀리 갈 수 있겠지. 지금까지 걸어온 것처럼. 매일을 헤엄치면 돼. ❞
/ 에필로그 나는 더 멀리 갈 거야. | # 매일을 헤엄치는 법
✦ 겨울부터 봄, 여름, 가을, 그리고 다시 겨울. 미술 크리에이터 이연의 인생에서 가장 ‘어둡고 찬란했던 1년’을 담고 있는 그림 에세이다.
✦ 유튜브 구독자가 아니어서 사실 이연이 어떤 사람인지는 잘 모른다. 하지만 담담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전하며 물 밑에 가라앉아 있는 이들이 바닥을 딛고 다시 떠올라 더 멀리, 꾸준히 헤엄칠 수 있도록 용기를 주는 듯한 글이 좋았다.
✦ 내가 나일 수 있도록, 하나하나 꾸준히 해내다 보면 어느새 내가 있던 자리에서 꽤나 멀리 온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란 믿음. 더뎌 보여도,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 같아도, 매일을 헤엄치다 보면 ”그 안에서 우리는 매일 달라져 있을 것”이라는 응원. ‘껍데기를 벗어던진 가장 약해진 그 순간에 비로소 성장하는’ 우리. 어쩐지 나도 멀리 헤엄쳐갈 용기가 생기는 것 같다. [📝 23/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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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는 데일 카네기가 되어라. 다른 사람의 한계에 신경 쓰지 마라. 너는 자기 자신 이외의 것은 될 수 없다.”
이 문장 속 ‘데일 카네기’에 각자의 이름을 집어넣어도 틀림이 없는 문장이다. 우리는 자기 자신일 뿐이기에 남이 될 수 없고, 그것만으로도 몹시 충분하지만 그 사실을 자주 잊고 산다.
/ 1장 겨울 | 「‘나에게 소속된다는 것’은」
| 내가 된다는 것의 의미는 단순하다. 흉내를 그만두고 내가 나일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다.
/ 1장 겨울 | 「‘나에게 소속된다는 것’은」
| 사실 지우개를 쓸 수 있다는 것은 틀린 선을 그었다는 뜻이 아니고 마음껏 틀려도 된다는 뜻이 아닐까? 영원한 그림을 그리지 않아도 괜찮아. 삶에서 누릴 수 없는 자유를 누리는 것. 이게 지금 내가 그림을 그리는 이유다.
/ 2장 봄 | # 지우개의 의미
| 뭐 어쩌겠어. 겨울이 영영 오지 않는 곳에서 살고 싶지도, 영생하고 싶지도 않다. 겨울이 있기 때문에 계절이 순환하는 것이고, 죽음이 있기 때문에 삶이 빛나는 것이니까. 너무 미리 슬퍼할 필요 없이 지금의 찬란한 녹음과 시간을 감사히 여기면 된다. 그게 삶의 허무를 줄이는 일이다.
/ 4장 가을 | 「허무하지만 아름다운 계절」
| “똑같아 보여도, 그 안에서 우리는 매일 달라져 있어.”
그래, 우리도 매일을 살면서 조금은 달라졌을 것이다.
/ 5장 다시 겨울 | # 수영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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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다 (231125~231226)
❝ 별점: ★★★★☆
❝ 한줄평: 겨울 내내 아껴 읽고 싶었던 글들
❝ 키워드: 산문 | 이야기 | 당신 | 기억 | 삶 | 음식 | 물건 | 사랑 | 밤 | 시선
❝ 추천: 시인의 ‘먹고 사고 사랑하는 일’이 궁금한 사람
❝ 달기만 하거나 쓰기만 한 삶은 없어. 달고도 쓴 삶이 있을 뿐이지. ❞
/ 「시칠리아에서 시나몬 스틱까지의 삶」 (p.28)
✦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고, 그냥 이 책은 겨울에 읽고 싶어서 남겨두었다가 겨울 냄새가 날 무렵 꺼내 들었다. 한 번에 다 읽을 생각이었는데, 글이 좋아서 아끼고 아껴 읽다 보니 완독까지 오래 걸렸다.
✦ 1부에서는 음식, 2부에서는 물건에 얽힌 시인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면 3부에서는 좀 더 내밀한 시인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엄마에 관한 글들. ‘엄마’라는 단어는 이유 없이 자주 사람을 울컥하게 만든다. 보통 아기가 처음 내뱉는 단어는 엄마. 사람과 사랑이라는 두 단어를 연결했을 때 내가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되는 것도 엄마. 영상이나 음성 녹음을 자주자주 해둬야겠다.
✦ 시인이 쓴 산문집을 읽을 때 또 다른 시를 읽는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안희연 시인의 시집도 참 좋았지만, 시인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나 사랑을 말하는 산문들도 참 좋아서 다른 산문집도 찾아 읽어 보려고 한다. 여름에 읽으려고 시집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을 아껴두고 있는데, 그래서인지 여름을 싫어하는 나도 조금은 여름이 기다려진다. [📝 23/12/26]
(*<시인이 사랑하는 시인을 읽는 밤—안희연 시인> 행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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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그날 머그컵 위로 비쭉 솟아오른 시나몬 스틱은 말했다. 양손에 쥘 수는 없겠지만 반드시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게임은 아니란다. 너는 시나몬 스틱의 삶을 위해 시칠리아의 삶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시나몬 스틱에서부터 시칠리아까지의 스펙트럼을 살아가고 있는 거야. 그건 얼마나 드넓고 풍성한 시간이니.
/ 「시칠리아에서 시나몬 스틱까지의 삶」 (p.30-31)
| 나는 헤맴에 최선인 사람이고 싶다. 현실은 빈약한데 이상은 턱없이 높아서가 아니라, 적당히 타협할 줄 모르는 까다로운 성미 때문이 아니라, 더 나은 무언가가 있다는 믿음 자체가 우리를 살아가게 하기 때문에 그렇다.
/ 「신발에 맞는 발을 고르러 나간 언니는 어떻게 되었나」 (p.81)
| 그것은 통신에 관한 이야기였다. 한 명은 지구에, 다른 한 명은 화성에 있는 두 사람이 메시지를 주고받는 장면. 내일 로켓을 타고 당신에게 가겠다, 내 목소리 듣고 있냐, 보고 싶고 사랑한다. 이쪽의 고백은 멀고먼 우주를 가로질러 저쪽으로 날아간다. 하지만 대부분의 말들은 우주의 공허에 잡아먹히고 유성우에 부딪혀 부서지고 흩어진다. 끝까지 살아남은 단어는 오직 이것이었다. ······사랑······
/ 「등뼈를 상상하는 버릇」 (p.136-137)
| 겨울은 오고 있다. 올겨울은 어떻게 쓰일까. 그런 생각이 드는 걸 보면 사실은 겨울을 사랑하고 있는지도. 언젠가 마음이 동해 내 손으로 직접 크리스마스트리를 만드는 날도 올까. 아마 그럴 것이다. 다만 내가 내 몫의 크리스마스트리를 갖게된다면 거기 아무것도 매달지 않으리라. 그저 나무가 오롯이 나무일 수 있게. 사랑이 그저 사랑일 수 있게.
/ 「그 겨울의 끝」 (p.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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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플롯 (e-book, 231212~231225)
❝ 별점: ★★★☆
❝ 한줄평: 조금은 아쉬운, 그러나 이슬아를 알아 가긴 충분한
❝ 키워드: 산문 | 우정 | 사랑 | 일 | 글 | 이야기 | 인생
❝ 추천: 가벼운 마음으로 산문집을 읽어보고 싶은 사람
❝ 누군가로부터 유래된 우리의 인생은 또다시 누군가에게로 흐른다. 좋은 이야기는 독자의 삶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짓는다. ‘끝내주는 인생’이 ‘끝나버린 인생’ 혹은 ‘끝장난 인생’과 다른 점은 바로 이것이다. 연결된다는 것, 흐른다는 것, 더좋은 이야기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 ❞
/ 출판사 서평
✦ ‘이슬아’라는 이름에 건 기대가 너무 컸던 걸까? 글은 재미있고 잘 읽혔지만 기대했던 만큼의 좋음은 아니어서 조금 아쉬웠다. 다른 책도 차차 읽어봐야지. [📝 23/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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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반듯하게 개던 수건에 얼굴을 묻고 훌쩍훌쩍 울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찬희가 대신 해주었기 때문이다. 나랑 가장 닮은 너를 생각하면 왜 기쁨이 넘치는지. 왜 마음이 아파오는지. 너는 왜 최고여야만 하는지. 최고를 향해가는 너를 위해 너무 많은 말을 해주고 싶다가도, 왜 말문이 막히게 되는지······ 설명하지 않아도 찬희는 아는 것이다. 닮았기 때문에, 같은 곳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 「나랑 가장 닮은 너를 보면」
| 오직 바다가 느릴 것이라는 사실만이 분명하다. 친구가 옳았다. 우리는 결코 바다보다 천천히 늙을 수 없다. 우리가 사라져도 어떤 식으로든 바다는 남을 것이다.
/ 「8월 이후」
| 나에게 사랑은 기꺼이 귀찮고 싶은 마음이야.
나에게 사랑은 여러 얼굴을 보는 일이야.
사랑한다면 그 모든 얼굴을 볼 수 있도록 부지런해지고 강해져야 해.
/ 「그에게서 최고의 나를 발견한다」
| 그러자 이 책이 끝나도 끝나지 않으리란 걸 알게 되었다. 할머니의 삶이 끝났어도 나를 통해 선생님의 마음속에 살아있듯이, 책이 내 손을 떠난 후에도 누군가에게는 이제 막 시작되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 「에필로그 | 나만은 아닌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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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 (231204~231224)
❝ 별점: ★★★★
❝ 한줄평: ‘사람’에 관해 깊이 성찰하게 하는 단편들
❝ 키워드: 죽음, 진실 | 책임, 권위 | 계급, 의식 | 사랑, 이해 | 애증, 상속 | 사람, 구원 | 회상, 흔적
❝ 추천: ‘최고의 문학적 성취를 이룬 작가에게 상을 수여’하는 이효석문학상의 수상작들이 궁금한 사람
❝ 사람에 대한 말은 어떤 것이든 다 대수롭다. ❞
/ 안보윤, 「애도의 방식」
📝 (23/12/25) 그믐북클럽 10기에 참여해 도서를 제공받아 『이효석문학상 수상작품집 2023』을 읽게 되었다.
✦ 그믐에서 여러 독서모임을 하면서 가장 좋았던 점 중 하나는 작가님과 직접 소통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번 그믐북클럽 10기에서도 작품을 읽으며 인상적이었던 부분이나 궁금했던 점, 작가님께 하고 싶은 말 등을 코멘트로 남기면 작가님들이 직접 답변을 해주셔서 작품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고, 또 궁금증도 해소할 수 있어서 더욱풍성한 독서를 할 수 있었다. 이번 모임에는 작가님들이 남기신 질문도 있어서 작가님들은 독자에게 어떤 점이 궁금한지도 살짝 알게 되어 더 재미있었다.
✦ 이번 책으로 처음 만나게 된 작가님들이 많았는데, 이효석문학상이 ‘최고의 문학적 성취를 이룬 작가에게 상을 수여’하는 만큼 작품들의 깊이나 여운 또한 대단했다. 혼자서 한 번에 다 읽기에는 조금 어렵고 버거웠을 것 같은데, 그믐북클럽에서 작가님들과 멤버들과 소통하며 천천히 읽다 보니 완독 할 수 있었다.
✦ ‘사람’의 다양한 면모를 살펴볼 수 있는 여러 단편들을 한 권의 책에서 만나볼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다. 앞으로는 이효석문학상 수상작품집도 관심을 가지고 읽어봐야겠다.
(*그믐북클럽 10기에 참여하여 북다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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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보윤, 「애도의 방식」 ⛤
: 남겨진 사람들이 견뎌내는 방식
| 나는 진심을 담아 말한다. 알 리가 없다. 이미 으깨진 것을 기어코 한 번 더 으깨놓는 사람의 마음 같은 건. (p.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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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보윤, 「너머의 세계」
: 안과 너머, 그 사이의 헤아릴 수 없는 간격
| 중앙 현관을 넘고 나면 이제 다시는, 어떤 문 안으로도 몸을 들이지 않을 작정이었다. 연수는 너머의 세계에 있기로 했다. 그것은 부끄러운 선택이 아니었다. 적어도 연수에게는 그랬다. (p.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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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보라, 「뱀과 양배추가 있는 풍경」
: ‘뱀과 양배추가 있는 풍경’의 의미를 알아챘을 때의 당신의 기분은
| 아무런 맥락이 느껴지지 않는, 텅 빈, 이해 불가능한 어떤 것. 그림을 받았을 때 아연함보다 불쾌감이 앞섰던 이유를 나는 이제 조금 알 것 같다. (p.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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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운, 「세월은 우리에게 어울려」 ⛤
: 이해보다는 인정이 필요한 때가 있다
| 나를 죽게 한 건 병이 아니고 사람이었다는 걸. 그러니 나를 살게 할 수 있는 것도 약이 아니고 사람이라는 걸. (p.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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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숙, 「자작나무 숲」 ⛤
: 껍질을 벗기고 벗겨도 살아서 다시 하얘지는 자작나무와 쌓고 쌓아도 또다시 쓰레기를 쌓는 할머니
| 아무것도 버릴 수가 없어요. 왜죠?
모든 것에 다 기억이 있어서요.
어떤 기억입니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요. (p.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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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주희, 「작은 방주들」
: 어쩌면 각자의 인생과 같은 작은 방주들
| 여자가 석양을 등지고 사막 저편으로 멀어지고 있었다. 마음속에 소용돌이치는 말들 중 어떤 것도 쉽게 꺼낼 수가 없었다. 나는 길게 늘어지는 여자의 그림자를 사진 속에 담았다. 말 대신 꼭 보여주고 싶었다. 진주에게 그리고 허니쿠키에게도. 마지막 실족에서 물러서게 하는 것, 걸음을 멈추고 끝 너머로 눈을 돌리는 것, 그게 최후에는 꼭 자기 자신이었으면 하는 마음을 담아. (p.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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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 「북명 너머에서」
: 돌아갈 수 없는, 되돌아갈 길 없는 오래 전의 북명을 회상하며
| 내가 구덩이라면. 혹은 진흙이라면. 물과 바람을 따라 자유롭게 변한다면, 진득한 몸으로 어디든 달라붙을 수 있다면. 아니 연못이라면. 흐르고 넘쳐 원하는 곳 어디로든 갈 수 있다면. 뛰어들 수 있다면. 녹아서 사라질 수 있다면. 이성자가 아닌 무엇이라면. 내가 조옥이라면. 그런 열망이 예기치 않게 급습할 때면 오한이 나듯 몸이 떨리고추위가 밀려왔다. (p.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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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터 (231217~231220)
❝ 별점: ★★★★
❝ 한줄평: 아름다운 사계절의 풍경과 깊은 사유가 담긴 시집
❝ 키워드: 사계절 | 봄 | 여름 | 가을 | 겨울 | 사랑 | 비 | 무지개 | 자연 | 별 | 달
❝ 추천: 시가 어려워서 피했던 사람, 쉽고 편안하게 읽을 수 있는 시를 만나고 싶은 사람
❝ 인생을 살다 보면 꽃이 필 때도 있고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릴 때도 있습니다. 아니, 언젠가는 낙엽이 되어 떨어지고 폭설에 갇혀 길을 잃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랑하는 이와 함께 한다면 그 모든 날들이 상처의 계절이 아닌 사랑의 계절이 되어 감싸주리라 믿습니다. ❞
/ <시인의 말> 부분
📝 (23/12/21) 샘터 물방울서평단 마지막 서평 도서로 서정 시인 소강석 목사의 『너라는 계절이 내게 왔다』를 골랐다. 최근 시집을 많이 읽는 중인데, 제목이 인상적이라 꼭 읽어보고 싶었다.
✦ 1부는 봄과 여름, 2부는 가을과 겨울을 느낄 수 있는 시들이 실려 있고, 3부는 비와 무지개, 4부는 등대와 별, 달, 바다 등 다양한 시상이 담긴 시들이 실려 있다.
✦ ‘어렵고 난해한 시보다는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고 마음이 따뜻해지는 감성 시들을 써보고 싶었다’는 시인의 말처럼 친근한 어투와 편안하게 읽을 수 있는 문장들에 어렵지 않게 시를 읽어 내려갈 수 있지만 시들에 담긴 시인의 깊은 통찰과 사유는 결코 가볍지 않다. 계절의 변화에 따른 아름다운 풍경을 노래하며 시인은 세상만물의 이치를 독자에게 전한다.
✦ 꽃이 피고 지는 것을 만남과 이별에 빗대거나(「봄 2」), 인고의 세월을 견딘 여름 바다의 절벽이 파도를 기다리는 모습을 그리기도 하고 (「여름 5」), 단풍과 낙엽에서 사랑과 이별을 떠올리게 하며(「가을 9」), 아무도 걷지 않은 길을 발자국이없는 눈송이가 먼저 걸어가는 모습을 상상하게(「겨울 6」) 하는 시인. 사계절을 지나서 시인은 소나기와 비, 무지개를 건너 등대와 별, 달이 보이는 바다로 나아가 흘러 흘러 흙과 공기, 물과 불이라는 지구 만물의 근원에 관해 이야기하며 시집을 마무리한다. 인생이라는 사계절을 지나 태초의 상태로 돌아가는 듯한 느낌. 시집의 완결성이 우리에게도 깊은 사색을 하도록 여운을 남긴다.
✦ ‘슬픔과 절망, 상처를 딛고 다시 사랑과 희망의 마음을 찾기를’ 바라는 사랑이 가득 담긴 시인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듯하다. 매서운 추위로 마음까지 꽁꽁 얼어붙을 것 같은 이 겨울, 『너라는 계절이 내게 왔다』로 모두의 얼어붙은 마음이 조금은 녹아내릴 수 있길 바란다.
(*출판사 서평단으로 선정되어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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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풍 물든다는 것 생각해 보니
다 빼앗기고
더 이상 숨길 수 없어
가장 깊은 사랑 보여주는 것이었네
/ 「가을 9」 (p.48)
❝ 비를 기다려서는 안 된다
비는 길을 걷는 자에게 온다
비는 기다림 끝에 오는 것이 아니라
비를 찾아 떠나는 자에게 내린다.
/ 「비 2」 (p.75)
❝ 누군가를 만나 이야기를 듣는다는 건
새로운 세계를 만난다는 것이다
난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듣고 살았나
또 얼마나 많은 이야기에 귀 막고
눈 감고 살았나
/ 「등대 1」 (p.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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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았던 시
1부 | 봄에서 여름으로
✎ 「봄 2」
✎ 「봄 6」
✎ 「여름 1」
✎ 「여름 5」
2부 | 가을 지나 겨울
✎ 「가을 5」
✎ 「가을 6」
✎ 「가을 9」
✎ 「겨울 2」
✎ 「겨울 6」
✎ 「눈송이 1」
3부 | 소나기 끝에 무지개
✎ 「소나기 1」
✎ 「소나기 6」
✎ 「비 2」
✎ 「무지개 1」
4부 | 등대와 별 그리고
✎ 「등대 1」
✎ 「별 4」
✎ 「흘러간다」
✎ 「야간기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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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문학 (231219~231219)
❝ 별점: ★★★★☆
❝ 한줄평: 각자의 종착역에 도달할 날이 온다는 믿음
❝ 키워드: 사랑 | 영원 | 신 | 열차 | 우주 | 삶 | 죽음 | 종착역 | 마음 | 나무 | 꿈 | 영혼 | 믿음
❝ 추천: 우주와 숲을 유영하는 듯한 시들이 궁금한 사람
❝ 산 자도 죽은 자도 모두 다 함께 종착역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
/ 「온다는 믿음 1」 (p.24)
📝 (23/12/20) 정재율 시인의 첫 번째 시집 『몸과 마음을 산뜻하게』를 가지고 있는데 어쩌다 보니 두 번째 시집인 『온다는 믿음』을 먼저 읽게 되었다.
✦ 온다는 것. 어떤 사람이나 물건이 올 수도, 어떤 때나 시점이 올 수도, 새로운 세상이 올 수도, 어떤 사건이나 현상이 올 수도, 차례나 기회가 올 수도, 어떤 느낌이나 생각 혹은 예감이 올 수도 있다. 어떤 것이 되든, ‘온다는 믿음’을 지닌다는건 마음이 충만해지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 시집을 읽으면서 ‘언젠가 종착역에 도달할 때가 온다는 믿음’에 관해 생각해 보았다. 종착역이라는 건 여러 가지가 될 수 있겠지만 우리 모두의 최종 종착역은 아무래도 ‘죽음’이니까, 자연스럽게 죽음에 관해 떠올리게 되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고 마음속에 짐 한 덩어리씩을 넣고 다니는’ 인간들(「모리키 씨는 어디로 갔을까)과, ‘모리키 씨가 죽은 후 그가 앉았던 자리에 앉아 그가 무슨 생각을 했을지 떠올리며 창밖의 별들을 바라보는’(「그래도 열차는 멈추지 않고」) 화자. ‘나무 뒤에는 더 큰 나무들이 있고, 죽음 뒤에는 더 많은 죽음들이’(「숲 2—나무인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정월 대보름날 오랜만에 만난 이와 오래도록 시간을 보내고 집에 갈 시간이 되었는데, 마당 밖에서부터는 배웅하는 이를 뒤로 하고 아주 먼 길을 혼자 가야만 하며(「정월 대보름」), ‘앞으로 얼마나 더 가야 종착역에 도착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모리키 씨와 마냐나를 외치며 아침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마냐나」) ‘나’의 마음.
✦ 모리키 씨를 중심으로 한 시들이 많아서 모리키 씨를 배웅하는 동시에 그리워하고 추억하는 한 편의 이야기를 읽는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마지막 시가 ‘나’와 모리키 씨가 종착역으로 함께 향하며 마냐나를 외치며 아침을 기다리는 시 「마냐나」인 것도 더없이 좋았다.
✦ 사진과 시를 연결 지어 이야기하는 시인의 에세이 「필름 카메라—사진」도 좋았다. 문장들을 따라가다 보면 흐름이나 상황이 보이는 소설이나 극작품과 다르게 시를 읽으면 어느 순간, 어느 감정의 파편만을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어렵다고 느껴 잘 찾아 읽지 않았는데,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상상의 나래를 자유롭게 펼칠 수 있기도 했다. 그래서 시인의 ‘어느 한 순간에 관해 쓰지만 독자들은 페이지 너머에 있는 장면을 상상하고 더 먼 세계까지도 갈 수 있다’는 말이 참 와닿았다.
✦ 이 시집을 읽은, 읽을 사람들이 어떤 ‘온다는 믿음’을 떠올리게 될지 궁금해지는 시집이었다. 가볍게 집어 들었지만 마음에 오래 남을 시집을 만나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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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의 좌석 위로 먼지들이 떠돌아다녔다 창밖의 별들이 우주를 유영하는 것처럼 이곳에는 떠돌아다니는 게 많아 보였다 이젠 모리키 씨도 그들 중 하나겠지 그가 신을 믿는 것처럼 나는 그의 선택을 믿었다 그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지만
/ 「그래도 열차는 멈추지 않고」 (p.20)
❝ 사진은 포착된 순간을 프레임 안에 담아내지만 사진을 보는 우리는 프레임 바깥의 상황까지도 떠올릴 수 있었다. 시 또한 어느 한 순간에 관해 쓰지만 독자들은 페이지 너머에 있는 장면을 상상하고 더 먼 세계까지도 갈 수 있었다.
/ 에세이: 「필름 카메라—사진」 (p.97-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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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았던 시
1부 | 넓고 큰 창을 손바닥으로 쓸어보면 어둠이 흩어졌다
✎ 「해변에서」 ⛤
✎ 「객실」
✎ 「모리키 씨는 어디로 갔을까」 ⛤
✎ 「그래도 열차는 멈추지 않고」 ⛤
✎ 「온다는 믿음 1」 ⛤
✎ 「온다는 믿음 2」
✎ 「컴컴한 것과 캄캄한 것」
✎ 「화가의 일」
✎ 「저수지는 깊고 고요해」
2부 | 여전히 그의 머리 위로 우주를 여행하는 자들이 있었다
✎ 「숲 1」
✎ 「깨진 백자」
✎ 「숲 2—나무인간」 ⛤
✎ 「정월 대보름」 ⛤
✎ 「영원성」
✎ 「마냐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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