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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는 사람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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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7 | 루리, 긴긴밤

문학동네 (e-book, 231218~231218)


❝ 별점: ★★★★

❝ 한줄평: 서로에게 기대어 수없는 기적과 사랑으로 만들어 가는 우리의 삶

❝ 키워드: 사랑 | 연대 | 의지 | 삶 | 죽음 | 세상 | 지평선 | 여정 | 우리 | 기적

❝ 추천: 전혀 다른 존재들의 사랑과 연대를 담은 아름다운 이야기가 궁금한 사람


❝ 두려웠다. 하지만 나는 내가 저 바닷물 속으로 곧 들어갈 것을, 모험을 떠나게 될 것을, 홀로 수많은 긴긴밤을 견뎌 내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긴긴밤 하늘에 반짝이는 별처럼 빛나는 무언가를 찾을 것이다. ❞


🌊 첫 문장: 나에게는 이름이 없다.

  하지만 나는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


📝 (23/12/19) 제21회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 대상을 받은 루리 작가의 그림책 『긴긴밤』을 읽었다.


✦ 그림책을 읽는 건 아주 오랜만인 것 같다. 어린이문학상 수상작이지만 어른이 읽어도 충분히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이야기다. 이야기와 잘 어우러지는 그림의 색채가 정말 좋았다.


✦ 생각했던 것만큼 엄청 슬프진 않았다. 그럼에도 ‘나’와 노든이 오래도록 서로의 눈을 마주 본 후 이별하는 장면, 힘들게 올라간 절벽 위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내’가 노든과 노든에게 들었던 수많은 이야기 속 이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장면, 그리고 두려움을 이겨 내고 모험을 떠나 다시 수많은 긴긴밤을 기약하는 ‘나’의 모습을 그리는 장면에서는 눈가가 촉촉해졌다. 


✦ 나만의 것이 아닌 나의 삶. 많은 이들의 긴긴밤과, 그리고 수없는 기적과 사랑으로 우리는 성장하고, 서로에게 기대고, 배려하고 연대하는 법을 배우고, 다시 사랑을 나눠줄 수 있는 존재가 되어 간다. 


✦ 어쩌면 ‘긴긴밤’ 자체가 인생일 지도 모른다. 고통과 슬픔, 두려움이 찾아오는 밤에는 다시 빛이 들 아침까지 잠을 이루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앙가부처럼 기꺼이 나의 이야기를 들어줄, 내 곁에 있어 줄 이가 하나라도 있다면, 혹은 노든처럼 악몽을 꾸지 않도록 오래오래 이야기를 들려줄 이가 하나라도 있다면 ‘긴긴밤’이 그렇게 무섭지만은 않을 것이다. 


✦ 결국 사랑이 사람을 살아가게 만든다는 이야기는 어떤 말로 변주되더라도 나에게 큰 감동과 울림을 준다. 홀로서기를 하게 된 ‘내’가 바다에서 어떤 모험을 하게 될지, 얼마나 많은 긴긴밤을 보내게 될지 모르지만, 언젠가 결국은 다시 사랑할 이를 만나게 될 거라는 걸, 그리고 사랑했던 이들과 재회하게 될 거라는 걸,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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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너에게는 궁금한 것들이 있잖아. 네 눈을 보면 알아. 지금 가지 않으면 영영 못 가. 직접 가서 그 답을 찾아내지 않으면 영영 모를 거야. 더 넓은 세상으로 가. 네가 떠나는 건 슬픈 일이지만 우리는 괜찮을 거야. 우리가 너를 만나서 다행이었던 것처럼, 바깥세상에 있을 또 다른 누군가도 너를 만나서 다행이라고 여기게 될 거야.”


| 노든은 목소리만으로 치쿠가 배가 고픈지 아닌지를 알 수 있게 되었고, 발소리만으로 치쿠가 더 빨리 걷고 싶어하는지 쉬고 싶어 하는지를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우리’라고 불리는 것이 당연한 건지도 몰랐다.


| “그치만 나한테는 노든밖에 없단 말이에요.”

  “나도 그래.”

  눈을 떨구고 있던 노든이 대답했다.

  그때 노든의 대답이 얼마나 기적적인 것이었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것이 다른 우리가 서로밖에 없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그때는 몰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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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긴밤 - 제21회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 대상 수상작
긴긴밤 - 제21회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 대상 수상작
23-076 | 김성중, 이슬라

현대문학 (231215~231215)


❝ 별점: ★★★★

❝ 한줄평: 어쩌면 죽음이 있기에 아름다운 삶

❝ 키워드: 삶 | 죽음 | 시간 | 영원 | 광기 | 공포 | 고통 | 절망 | 권태 | 사랑

❝ 추천: 죽음이 없는 삶을 꿈꿔본 적이 있는 사람


❝ ‘각설탕처럼 네 몸에 녹아들어가면 어떨까. 내가 누군지 알게 되면 너는 나에게 사랑 대신 죽음을 원하게 될까?’ ❞ (p.129)


⏳ 첫 문장: 내일이면 팔십사 세가 된다.

  정확히 말하자면 백팔십사 세가 되는 것이다. 나는 백 년간 열다섯이었으므로. (p.9)


📝 (23/12/17) 최근 읽은 소설집 『겨울 간식집』에서 인상 깊게 읽었던 김성중 작가님의 다른 작품이 궁금해져서 현대문학 핀시리즈 소설선 9 『이슬라』를 읽어보게 되었다.


✦ 올해 읽은 책들을 돌아보니 ‘삶과 죽음’에 관해 이야기하는 책이 참 많았던 것 같다. 우리의 인생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니 어쩌면 너무 당연한 이야기일까.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도 삶과 죽음인데, 독특하게도 이 소설에서는아무도 죽지 않고 또 아무도 태어나지 않는, 시간이 흐르지 않는 세상에서 열다섯 살로 백 년의 세월을 보낸 후 다시 시간이 흐르게 되어 곧 84세가 되고 죽음을 앞둔 ‘나’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 죽음이 없는 삶. 어찌 보면 굉장히 모순적인 말이다. 죽음이 없는 삶이란 존재하지 않으니까. ‘삶을 얻으려면 죽음이 필요했던’ 열다섯의 ‘나’에게 영생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영원한 건 결국 익사하게 되어 있다’는, ‘오직 유한한 인간만이 무한에 대해 상상할 수 있다’는 ‘나’의 말에 여운이 남아 문장들을 오래도록 들여다보게 되었다.


✦ 사랑하기 때문에 ‘나’를 포함한 세상의 생명들에게 죽음을 돌려주었고, ‘나’의 죽음의 순간에 찾아와 사랑한다고 이별의 인사를 건네는 이슬라. 각자 ‘자기만의 고유한 죽음’의 세상으로 나아가는, 죽어가는 모든 자들 역시 ‘고립되었다’는 뜻을 품고 있는 이슬라라고 할 수 있다는 말 또한 ‘모두가 각자의 고유한 죽음을 누리는 점에서 이슬라에게 인간은 신처럼 보였다’는 문장과 교차되며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해야 한다’는 말은 많은 문학작품에서도 하는 이야기지만 이 소설을 읽으면서 유독 마음 깊이 다가왔다. ‘나’에 대한 이슬라의 사랑은 인간에 대한, 그리고 인류에 대한 사랑으로 확장되었다기보다는 ‘나’라는 고유한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 ‘나’가 영생 대신 택한 죽음이 있는 삶. 어릴 적 맛본 설탕과자처럼 달콤한 기쁨과 달콤한 슬픔의 맛. 그는 절대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죽음이 있기에 삶이 아름다운 것이라는 걸 알고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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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이 놀라운 사건 역시 잊힐 날이 올 것이다. 백 년의 인간들이 전부 죽고 그 위로 두꺼운 시간의 퇴적층이 쌓이면 모든 것이 망각의 늪 속으로 빠져들 것이다. 한 세기 정도야 세월의 원근법을 당해낼 수 없고 백 년의 인간들 모두 소실점너머 사라지는 날이 올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슬프면서 안도감이 든다. 만물이 소멸의 질서 속에 놓여 있다는 것은 얼마나 자비로운 일인지. (p.18)


| “네 몸에서 빼낸 가시들이 도로 자라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다 없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야. 네 마음이 슬픔에 삼켜지지 않도록 조심해라. 실뿌리가 단단한 땅을 으스러뜨리는 것처럼 언제든 너를 파괴할 가시가 자라날 수 있으니까. 슬픔을 좋아하는 것은 나쁜 버릇이란다.” (p.58)


| 무한히 감정을 증폭시키는 폭도들도, 영혼을 파괴시키는 중독자들도, 기존의 사유에 기대 의미를 찾으려 했던 학자들도, 모두 죽지 않는 시간의 권태를 이기지는 못한다. 아무리 달라지려 해도 달라지는 것이 전혀 없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김성중이 그려내는 죽음이 사라진 세계의 모습은 이처럼 재앙에 가깝다. 죽음으로부터 놓여난 완벽한 자유는 사실 무의미라는 더 큰 고통을 가져오는 것이다. 그 무의미한 시간의 공포와 고통과 슬픔을 어떻게 돌파할 수 있을까. 구원은 어떻게 가능할까. 어쩌면 너무나 손쉽고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그 해결책을 김성중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애착과 사랑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p.148-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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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라
이슬라
23-075 | 임유영, 오믈렛

문학동네시인선 203 (231211~231213)


❝ 별점: ★★★☆

❝ 한줄평: 이상하지만 부드러운, 오믈렛 같은 마음

❝ 키워드: 산 | 돌 | 밤 | 마음 | 호수 | 바다 | 천사 | 꿈 | 개 | 죽음 | 버섯

❝ 추천: 죽음을 생각하게 되는 마음을 아는 사람


🫧 시인의 말


  나는 붓을 들어 이 이야기를 종이에 옮겨 적었고, 사람들이 잘 볼 수 있는 벽에 붙여두었다. 후에 그것을 마음에 들어하는 사람이 있어 적당한 값을 받고 팔았다.


2023년 10월

임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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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12/13) 우필사 이벤트로 받은 문학동네시인선 203 임유영 시인의 첫 시집 『오믈렛』을 읽었다.


✦ 제목처럼 몽글몽글 부드럽고 따뜻한 오믈렛 같은 시들이 가득할 줄 알았는데, 예상 밖의 시집이었다. 죽은 사람, 죽고 싶은 사람, 죽지 못하고 다시 깨어나 살아가는 사람 등 죽음 이야기가 꽤나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시체로 발견될 때를 대비해 머리를 하나로 묶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는 마음. (「방랑자」 (p.69) 부분) 죽음을 들키고 싶지 않으면서도 누군가는 나의 죽음을 알아차릴 것이란 것을 알고 있는 마음과 죽은 자의 얼굴을 발견하게 될 이가 누구일지를 궁금해하는 마음. 그러면서도 그 끔찍한 광경을 만나는 이가 아이는 아니었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 (「포노토그래프」 (p.74) 부분) 해가 뜨지 않는 아침을 찾으러 왔지만 호숫가를 따라 걸으며 깨끗하고 예쁜 조약돌을 찾아 주머니에 넣는 마음. (「빗금」 (p.73) 부분)


✦ 죽음을 생각하게 되는 마음을 다루면서도 이 시집은 그렇게 무겁거나 침울하지만은 않다. 오히려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계속 보이지 않게 두어도 될까. 따뜻한 거 먹이고 싶다.’(「만사형통」 (p.55) 부분)라고 말하며 보이지 않는 죽음에 대한 불안함을 따뜻한 음식을 먹여 속을 뜨끈하게 만들어 마음을 달래주는 듯하다. 그래서 이 시집을 읽어 내려가는 마음이 힘들기만 하진 않았다. 오히려 따뜻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 시인과의 미니 인터뷰에서 시인은 제목을 설명하며 오믈렛이 ‘유연하고 부드러운 음식이면서 단순해서 무섭기도 한 메뉴인 한편, 편안하고 만만한 음식’이라고 말한다. 이 시집도 그러한 것 같다. 단순하거나 만만하다는 뜻은 아니고, 유연하고 부드럽고, 때론 무섭지만 어딘가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 


✦ 태어난 이상 우리는 죽음을 맞이하는 그 순간까지 수없이 많이 잠들고 깨어남을 반복하며 살아간다. 해설 ‘이상한 마음’을 따뜻하게 다스리는 ‘완벽한 방법’에서 문학평론가 조연정은 임유영의 시에서 ‘깨어남과 태어남은 결코 기쁘고 충만한 일이 아니고, 갑작스러운 일이기도 하며, 실패한 일 혹은 잘못된 일처럼 그려지기도 한다’(p.108)고 말한다. 우리 인생이 늘 기쁘고 충만하고 성공적이기만 하진 않다. 때로는 아침에 눈 뜨기 두려울 정도로 괴롭고 힘이 들 때도 있다. 그럴때 이 시집은 ‘그런 순간도 있지만, 그래도 따뜻한 오믈렛을 먹고 기운내보자’고 말해줄 것만 같다.


(*문학동네 우필사 특별반 이벤트 당첨자로 선정되어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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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이는 창가의 책상 앞에 홀로 앉아 있었다. 새도 혼자였다. 둘은 서로의 음성을 들었다. 안녕? 어린이가 물었다. 새는 새답게 고개를 앞뒤로 갸웃거리며 짹짹, 소리를 냈다. 어린이는 새의 행동을 오해했다. 어린이는 새가 없는 다리 한쪽이 그리워 운다고 생각해보았다. 헤어진 어미, 아비, 형제, 자매 새들이 그리워 운다고도 생각해보았다. 그러나 새에게는인간의 생각이 없다. 새는 새의 생각을 할 뿐이다.

/ 「생일 기분」 (p.38)


❝ 손잡아. 그냥 한번 꽉 잡아봐.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계속 보이지 않게 두어도 될까. 따뜻한 거 먹이고 싶다.

/ 「만사형통」 (p.55)


❝ 샴페인 잔을 들고 발코니에 나가니 호숫가의 야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재스민 향기와 잔디 깎은 냄새, 물비린내가 섞인 바람이 불어왔다. 검은 호수 위로 잔물결이 부서진 샹들리에처럼 반짝였다. 완벽한 밤이었다. 발코니 난간에 올라가그대로 떨어지고픈 강렬한 충동이 일었다. 충동을 억누르느라 애쓰던 중 내가 취했음을 깨달았다. 옷깃을 여미고, 글라스를 테이블에 올려두고, 종업원들에게 인사를 건넨 뒤 방으로 돌아왔다. 방문을 열자 나의 갈색 트렁크와 푸른 원피스, 잘닦아둔 검은 구두가 그대로 잘 놓여 있었다. 창밖에서는 아직도 호수의 물결이 반짝이고 있었기에 나는 책상 위의 펜을 집어 글을 쓸 뻔했다. “나는 매번 무거운 문을 밀면서 왔습니다······” 지금 내 앞에는 빈 종이가 한 장 있을 따름이다.

/ 「병정들」 (p.71)


❝ 그토록 조용하던 밤이 이토록 많은 사람들을 쏟아내다니. 그래. 나는 해가 뜨지 않는 아침을 찾으려 이곳에 왔지. 숱한, 헛된 밤을 따라온 것이 아니다. 아이들이 웃는 소리를 듣는다. 양산을 쓴 숙녀들의 속삭임도. 호숫가를 따라 천천히 걷는다. 깨끗하고 예쁜 조약돌을 찾아 주머니에 넣는다.

/ 「빗금」 (p.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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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았던 시


1부 | 살아 계신 분을 묻어드릴 수도 없었고

✎ 「부드러운 마음」 (p.32-34)

✎ 「호수관리자들」 ⛤

✎ 「생일 기분」 ⛤


2부 | 가서 돌 주우면 재미있을

✎ 「꿈 이야기」

✎ 「유형성숙」 ⛤

✎ 「만사형통」


3부 | 한데 섞인 흰자와 노른자의 중립적인 맛

✎ 「방랑자」  ⛤

✎ 「오믈렛」

✎ 「병정들」 ⛤

✎ 「빗금」 ⛤

✎ 「포노토그래프」 ⛤


4부 | 어디 가는 어린애와 어디 갔다 오는 개

✎ 「무언가 더욱 중요한 것이 있다는 생각」 ⛤

✎ 「움직이지 않고 달아나기 멈추지 않고 그 자리에 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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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믈렛
오믈렛
23-074 | 이유리, 브로콜리 펀치

문학과지성사 (e-book, 231209~231212)


❝ 별점: ★★★★

❝ 한줄평: 달콤 쌉싸름한, 그래서 더 오래 기억에 남을

❝ 키워드: 죽음, 가족 | 사랑, 소원 | 괴로움, 마음 | 원망, 애도 | 실패, 온기 | 정상성, 이해 | 반투명, 안정 | 부탁, 삶

❝ 추천: 이야기 속 현실과 환상을 오가며 인물들에게 위로받고 힘을 얻고 싶은 사람


❝ 달아서 아리고 써서 저릿한 그 맛을 느끼는 것은 곧 소설을 읽는 기쁨을 누리는 일이기도 하다. ❞

/ 해설 | 소유정, 슈거 하이 Sugar High


📝 (23/12/12) 『모든 것들의 세계』가 ‘끝내 사랑을 멈추지 않는 마음’을, 『좋은 곳에서 만나요』가 ‘결국 사랑은 계속될 것’을 이야기한다고 쓴 적이 있다. 이유리의 첫 번째 소설집 『브로콜리 펀치』도 ‘물음표와 느낌표를 자아내는 기이한 사건들로 가득’(해설)한 와중에도 다양한 모양의 사랑에 관해 말하고 있다.


  화분이 되어 딸의 곁을 지키는 아버지, 이타적 사랑으로 외계 생명체의 연구 대상이 되는 여자, 오른손이 브로콜리로 변해 버린 복싱선수, 죽은 지 오 년 하고도 두 달 후 유령이 되어 전 애인 앞에 나타난 남자, 왜가리의 사냥을 구경하는 모임원들, 돌과 대화하는 남자와 달로 날아가는 남자, 몸이 반투명해져 버린 두 여자, 그리고 멕시코까지 헤엄쳐 가겠다는 이구아나에게 특훈을 하는 여자까지. 때로는 달콤하고 향긋하지만 때로는 씁쓸하고 서글프기도 한 현실과 환상 사이 그 어딘가에서 이유리의 인물들은 태연하게 상황을 받아들이고 다음을 향해 나아간다. 그게 묘하게 위로가 되고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반짝이는 힘’(해설)을 준다. 언제나 사랑의 힘을 믿는 작가, 이유리와 이유리가 그리는 세계를 사랑할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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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열매」 ⛤

: 여러 사람의 사랑이 만들어 낸 몰캉몰캉 향긋하고 달콤한 빨간 열매


| 아주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아버지와 P 어머니를 구분하기 어려웠고 굳이 구분할 필요도 없었으며, 또한 그렇게 말하자면 나와 P도 거의 비슷한 구조의 인간인 데다 나는 아버지를 P는 어머니를 닮았으니 결국 우리 넷은 서로가 서로를 닮아가고 있는 셈이었고 그건 그것대로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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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둥」

: 은탁의 소원은 자신 혹은 타인 중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


| 이미 교각의 불빛은 까마득히 멀어졌다. 꼭 형규와 나의 거리처럼. 나는 멀리 있는 무언가를 바라다볼 때마다 습관적으로 형규를 떠올리곤 했다. 선명하게 반짝거리지만 너무도 멀어, 잡기는커녕 손을 뻗기도 미안한 나의 소년 형규. 그런데누가 잡겠다고 했나, 사실 빠진 순간부터 알고 있었다. 잡을 수도 없고 잡지도 못할 빛이라는 걸. 나는 그냥 여기, 빛이 보이는 곳에 둥둥 떠 있기만 해도 그저 넘치게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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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콜리 펀치」 ⛤

: 괴로움이 브로콜리로 피어나고 꽃을 피우며 해소되듯 우리의 괴로움도 눈에 보인다면


| 나는 어둠 속에서 원준의 브로콜리를 더듬어 잡았다. 두텁고 미지근한 줄기 밑에서 두근두근, 물이 지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이 물은 브로콜리를 한 바퀴 돌아 나와 원준의 어디로 갈까, 미움이나 분노를 만들어내는 그런 곳으로 흘러가서 고일까, 거기에 맑게 섞여들면 조금 묽어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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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톱 그림자」

: 잊어도, 잊혀도 괜찮다는 마음으로


| 수정 씨는 내가 죽었을 때 나를 원망했나요. 

  원망했어요. 그렇지만 곧 원망하지 않게 되었어요. 그냥 보고 싶다고만 생각했어요. 

  나도 같아요. 그리고 언젠가는, 내가 앞으로도 어딘가에 계속 존재한다면 말이지만, 나도 수정 씨처럼 수정 씨를 잊게 될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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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가리 클럽」 ⛤

: 열심히 해도 안 되는 그런 일이, 그럴 때가 있지, 그래도 함께 웃어요


| 왜가리에게는 그저 매번 잘 노려서 잘 내리꽂는 것만이 중요했고 그 뒤의 일은 성공하든 실패하든 모두 같았다. 그것이 멋있었다고, 가슴이 뻐근하도록 부러웠다고 말하고 싶었다. 인간에게 가능한 일인지조차 알 수 없으나 그저 사는 동안 조금이라도 닮아보고 싶다고, 언젠가는 나도 그렇게 되고 싶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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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즈 달과 비스코티」

: 이해와 오해, 그 사이의 아주 깊은 골


| “치료사님께 얘기 들었어요. 돌이랑 대화할 수 있다면서요? 지금 잃어버린 돌도 당신 친구죠? 정말 미안해요. 난 당신 말 다 믿어요. 정말 미안해요. 당신 친구를 찾을 수 있다면 뭐든지 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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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평한 세계」

: 서로를 미워하면서도 같은 얼굴을 지닌 것을 바라보게 될 때


| 그 증거로 우리는 이렇게 아무렇게나 누워 있었고 그만 일어나고 싶을 때까지, 가고 싶은 곳이 생길 때까지 누워 있을 거였다. 둥글납작하게, 고요하고 반반한 모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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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구아나와 나」 ⛤

: 기어코 가고자 한 곳에 도달한 이구아나처럼 나에게도 희망이 있다는 것


| 밤이면 잠든 이구아나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나는 이구아나가 떠나길 바라는 걸까, 떠나지 않길 바라는 걸까. 그 질문은 곱씹고 곱씹다 보면 어느새 나에 대한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나는 어쩌고 싶은 걸까. 계속하고 싶은 걸까, 그만두고싶은 걸까. 계속하면 어떻게 되고 그만두면 어떻게 되나. 안으로 깊어지지도, 바깥으로 넓어지지도 못한 채 고이고 고여 단단해지는 그런 생각들을 알처럼 품다가 잠들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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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콜리 펀치
브로콜리 펀치
23-073 | 고선경, 샤워젤과 소다수

문학동네시인선 202 (231127~231210)


❝ 별점: ★★★★☆

❝ 한줄평: 힘들고 고단하지만 그래도 웃어보자고 다독여주는

❝ 키워드: 여름 | 상큼 | 씁쓸 | 추억 | 현실 | 내일 | 희망

❝ 추천: 쉴 새 없이 웃음이 터지는 시가 궁금한 사람


🫧 시인의 말


너에게 향기로운 헛것을 보여주고 싶다


2023년 10월

고선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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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12/10) 우필사 이벤트로 받은 시인선 다섯 권 중 고선경의 『샤워젤과 소다수』를 가장 먼저 꺼내 들었다. 우연히 보게 된 시 한 편에 완전 반해서였다. 


✦ 시인은 현실적인 문제들(집 보증금이나 월세, 빚 등의 돈 문제, 고용과 노동 등)로 분위기가 조금 무거워지려 하면 ‘그런데 천국에 가지 못하면 어쩌지? / 괜찮아, 너만 못 가는 거 아니야’(「알프스산맥에 중국집 차리기」, p.52)라든가 ‘여기서 팁 하나 / 장례식에서 하면 안 되는 행동 1위는 부활이라 한다 / 죽었다가 살아나면 모두가 무안해지니까 // 다시 죽어! / 네! (철퍼덕)’(「땅콩다운 땅콩」, p.58) 같은 유쾌하고 웃긴 농담으로 쉴 새 없이 웃음을 유발한다. 특히 이런 재미가 극대화되는 시가 「스트릿 문학 파이터」였다. 


✦ ‘쓰러진 풍경을 사랑하는 재능’(「샤워젤과 소다수」)을 가졌고, ‘희망이 심장의 무게 추라는 것을 기억’(「Come Back Home」)하고 있으며, ‘돈을 많이 벌고 싶고 사랑도 잘하고 싶은’(「돈이 많았으면 좋겠지」) 화자. 어린이는 절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직 어른이 된 것도 아닌 어정쩡한 화자가 어쩐지 나 같다는 생각으로 시집을 읽었다. 가끔은 외롭고 슬프기도 하지만, 힘들고 고단하지만, 그래도 웃으며 내일로 가보자고 다독여주는 듯한 화자. 그런 화자에게 많은 힘을 받았다.


✦ 해설 ‘망할 세상에서 농담하기—스트릿 문학 파이터 분투기’에서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박상수는 고선경을 ‘불가능한 사랑과 함께 새로운 시작을 상상하고 망할 놈의 세상과 싸우는 스트릿 문학 파이터’라고 불러도 좋지 않을까 라며, ‘자본주의 리얼리즘이 지배하는, 체념과 무기력만 남은 것처럼 보이는 이 세상에서 농담을 던지고 깔깔 웃는 방식으로 아무도 지지 않는 게임을 하려는 사람, 설사 지더라도 웃으며 다음으로 넘어가려 애쓰는 사람’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쓰러진 풍경마저 사랑할 줄 아는 사람, 죽을힘으로 죽으면 억울하지 않을 것 같다고 거짓말하면서도 살아남아 뭔가가 되는 사람. 이런 시인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문학동네 우필사 특별반 이벤트 당첨자로 선정되어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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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빗방울은 창문을 깨뜨릴 수 있다

   세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것이 빗방울을 깨뜨리겠지만

   소녀는 희망이 심장의 무게 추라는 것을 기억해낸다

/ 「Come Back Home」 (p.47)


❝ 그래 나는 여전히 술을 좋아하고 제정신일 리가 없다! 친절한 태도로 거절당한 날에는 혼자 맥주를 마시면서 운다 땅콩을 안주 삼아서 운다 나는 왜 이렇게 벗겨지기 쉬운 껍질을 가진 걸까 흑흑거리다가 껴안을 게 없어서 버섯모양 전등을 껴안고 아 뜨거워 욕지거리를 내뱉는다


   친구들은 내게 어른스럽게 굴라고 말했다

   그러나 어른스러운 어른이라는 말은 사랑스러운 사랑이라는 말만큼 이상하다

/ 「땅콩다운 땅콩」 (p.57)


❝ 우리가 궁금한 건 더 재미있게 놀 방법이었는데

   사람들은 우리에게 살 걱정 죽을 걱정을 하라고 한다

   별걱정을

   다

/ 「우주 달팽이 정거장」 (p.84)


❝ 왜

   죽을힘을 다해 살아야 하지 죽을힘으로

   죽으면 억울하지 않을 것 같아


   거짓말


   나는 살아남아

   시인이 됐다

   처음으로

   뭔가가 되어봤다

/ 「숨어 듣는 명곡」 (p.154-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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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았던 시 


1부 | 여름 오후의 슬러시

✎ 「샤워젤과 소다수」 ⛤

✎ 「유통기한이 지난 약은 약국에 버려주시면 됩니다」

✎ 「오! 라일락」

✎ 「내가 가장 귀여웠을 때 나는 땅콩이 없는 자유시간을 먹고 싶었다」

✎ 「밝은 산책」 ⛤

✎ 「Come Back Home」


2부 | 소다맛 설탕맛 돌고래맛 혼잣말

✎ 「알프스산맥에 중국집 차리기」 ⛤

✎ 「돈이 많았으면 좋겠지」

✎ 「땅콩다운 땅콩」

✎ 「스트릿 문학 파이터」 ⛤

✎ 「살아남아라! 개복치—몰라 몰라 내가 죽은 진짜 이유를」

✎ 「사이버 시옷시옷」 ⛤

✎ 「긴 주말」 ⛤


3부 | 진짜로 끝나버렸어 여름!

✎ 「우주 달팽이 정거장」 ⛤

✎ 「메론 껍질에 남은 향기와 과육을 갉아먹는 벌레들」 ⛤

✎ 「부루마불」 ⛤

✎ 「메론소다와 나폴리탄」 ⛤

✎ 「사랑의 달인」


4부 | 미워서 하는 말이 아니야

✎ 「외계인이 초능력을 쓸 거라는 생각은 누가 처음 했을까?」 ⛤

✎ 「시집 코너」 ⛤⛤

✎ 「세기말을 떠나온 신인류는 종말을 아꼈다」 ⛤

✎ 「숨어 듣는 명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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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워젤과 소다수
샤워젤과 소다수
23-072 | 미즈노 루리코, 헨젤과 그레텔의 섬

읻다 (231207~231209)


❝ 별점: ★★★★

❝ 한줄평: 지금은 떠나온 어린 시절 동화의 섬을 추억하며

❝ 키워드: 동화 | 섬 | 바다 | 하늘 | 동물 | 전쟁 | 꿈 | 죽음 | 나무 | 알 | 달

❝ 추천: 한 편의 아련한 동화 같은 시집이 궁금한 사람


❝ 그것은 작고 투명한 유리잔 같은 여름이었다 그런 여름을 사람들은 사랑이라 부르는 듯했다 ❞

/ 「헨젤과 그레텔의 섬」 (p.21)


📝 (23/12/10) 그림 형제의 동화 『헨젤과 그레텔』을 배경으로 한 산문시와 그에 이어진 여러 편의 연작 산문시들, 짧은 시들과 꿈의 시간을 재현한 시들(<한국어판 서문> 중)이 실린 시집이다. 


✦ 시인이 어린 날 겪은 전쟁의 공포와 두려움, 일찍 숨을 거둔 다섯 살 터울의 오빠와 함께 한 추억을 떠올리며 쓴 시집은 ‘어느 여름날, 기억의 바다 깊은 곳에서 돌연 작은 섬처럼 떠올랐다’는 시인의 말처럼 꿈에서 유영하는 듯한 자유로운 상상력의 나래가 펼쳐진다. ‘그림을 그리는 아이’ 이미지가 시집 곳곳에 등장해 시도 한 편의 그림처럼 눈앞에 생생하게 떠오르는 듯하다. 


✦ 동화 같은 섬은 밤마다 바다로 잠기거나(「헨젤과 그레텔의 섬」) 섬의 마을을 하늘이 숨기기도 하고(「도라의 섬」), 생김새가 그날그날 바뀌기도(「코끼리 나무 섬에서」) 한다. 섬에 사는 코끼리, 거대한 새, 물고기, 나무들은 화자들의 꿈속으로 들어오기도, 그들을 꿈으로 데려가기도 한다. 섬과 바다, 하늘, 꿈의 경계가 구분되지 않는 동화 같은 섬. 그러나 그 섬은 아름답기만 한 곳은 아니다. 발이 없는 코끼리(「나무의 집」)와 날개가 없는 새(「모아가 있던 하늘」), 쌓인 눈 밑에 죽어 있는 커다란 물빛 조개(「그림자」), 열이 나는 아픈 아이의 가슴속 작고 눈먼 물고기들(「물고기의 밤」). 생생하면서도 섬뜩한 이미지들이 가슴을 아리게 한다.


✦ ‘물고기나 사람이나 언젠가 치유될 필요가 있음을 알았다  어른들의 비밀은 거기 있었다’(「헨젤과 그레텔의 섬」)는 구절과 ‘우리도 언젠가는 한 그루 나무가 되는 거라고 오빠가 말했다’(「코끼리 나무 섬에서」)는 구절이 기억에 오래 남을 것 같다. 상처와 아픔, 슬픔과 고통이 언젠가 위로받고 치유된다면 우리는 한 그루의 나무가 될 수 있을까? 그 모든 것이 ‘사랑이라 불리는 작고 투명한 유리잔 같은 여름’으로 기억될 수 있을까? 이 시집이 내게 그런 위안을 주기에 충분하단 것은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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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빠는 말했다   도라는 세계의 미숙한 원형이란다   코끼리에서 새에게로   새에서 도마뱀에게로   도마뱀에서 조개에게로   조개에서 인간에게로 끊임없이 전송되는 나선형 음계가 보인다   도라에게서 발신되어   무한히 이어지는 녹색 모음 계열은 다시금 도라의 귀로 되돌아가고   도라는 듣고 있다   우리 안의 ‘ㅏ’를 수런거리게 하고   표표히 떠도는 우리의 ‘ㅣ’를 끌어들여   느릿한 모음의 리듬이 구형의 하늘을 맴도는 것이다

/ 「도라의 섬」 (p.23, 25)


❝ 깊은 어둠 아래서 지금도 우리를 올려다보는 눈이 없는 악어   우리를 뒤쫓는 발이 없는 코끼리   우리를 부르며 떨어져 내리는 새   우리의 손이 우리도 모르게 그려나간 그 생명체들은 어디서 온 것일까   나무의 집 내부는 그들의 가쁜 숨소리로 가득하다   그들을 빛 속으로 데리고 나오기 위해서는   단 한 줄의 선   단 하나의 점을 더하는 것으로 충분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겐 그만한 시간이 없다

/ 「나무의 집」 (p.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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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았던 시


I

✎ 「헨젤과 그레텔의 섬」 ⛤

✎ 「도라의 섬」

✎ 「모아가 있던 하늘」

✎ 「코끼리 나무 섬에서」 ⛤

✎ 「나무의 집」


II

✎ 「그림자 — 클레의 ‘겨울 이미지’에서」

✎ 「물고기의 밤」

✎ 「회색빛 나무」 ⛤


III

✎ 「봄의 모자이크」

✎ 「알」

✎ 「분주한 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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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젤과 그레텔의 섬
헨젤과 그레텔의 섬
23-071 | 천희란, K의 장례

현대문학 (231207~231207)


❝ 별점: ★★★★☆

❝ 한줄평: 내가 선택한 나의 ‘진짜’ 이름은

❝ 키워드: 죽음 | 인생 | 선택 | 약속 | 비밀 | 속박 | 이름 | 정체성 | 자유

❝ 추천: 이름, 정체성, 그리고 인생에 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는 사람


❝ “우리 둘 다 언제 벗어나고 싶어질지 모르는 이 인생에 새로운 이름을 붙여봅시다.” ❞ (p.41)


⚰️ 첫 문장: 나의 이야기는 K의 죽음에서 시작되었으며 K의 죽음으로 끝난다.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 누구도 두 번 죽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p.9)


📝 (23/12/08) 현대문학의 핀시리즈 소설선과 자음과모음의 트리플 시리즈는 어떤 작가의 작품을 처음 읽어볼 때 단편이나 중편으로 가볍게 입문하기 좋아서 자주 찾게 된다. 천희란 작가님의 어떤 작품을 먼저 읽을지 고민하다가 핀시리즈 소설선 45 『K의 장례』를 읽어보기로 했다.


✦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죽음’에 관한 이야기다. 그러나 이 죽음은 여러 의미를 담고 있다. 한 ‘사람’의 죽음, 한 ‘인생’의 죽음, 한 ‘정체성’의 죽음, 그리고 한 ‘이름’의 죽음. 어쩌면 죽음이라는 단어보다 소멸이라는 단어가 더 적절할 지도 모르겠다. 하나의 ‘이름’, ‘정체성’, ‘인생’이 소멸한다고 해도 그게 목숨이 끊어진다는 의미는 아니니까. 첫 문장의 강렬함을 오래 기억하게 될 것 같다.


✦ ‘선택할 자유’에 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한 사람의 인생을 훔쳐 사용하는 대신 엄청난 거금을 주겠다고 하며, 언제든 떠날 자유를 준다는 제안. 과연 그게 정말 온전하게 ‘전희정’에게 ‘선택할 자유’가 주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거대한 속임수에 빠져버렸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는 이미 너무 멀리 와버린 게 아닐까.


✦ 또 다른 ‘선택할 자유’는 K의 딸에게도 주어진다. K의 영향 아래 있던, 태어날 때 받은 이름인 ‘강재인’을 버리고 자신이 선택한 이름 ‘손승미’를 사용하며 삶을 꾸리고 관계를 만들어가는 사람. 새로운 이름을 선택하게 된 건 K의 영향이 있었을 수도 있지만, ‘손승미’라는 새 이름은 오롯이 그의 것이고, 그가 ‘선택한 자유’다.


✦ 나의 이름으로 나의 인생을 살아가는 것. 특별한 것 하나 없는 평범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소설을 읽으며 그 또한 누군가에겐 쉬운 일이 아닐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선택한 나의 진짜 이름으로 나의 인생을 살아갈 것. 마지막에 ‘전희정’이 아닌 진짜 이름이 나올 때, 그를 응원할 수밖에 없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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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해서는 안 된다는 금기가 말해질 수 있다는 자유 속에 방목되어 있는 것, 그것이 사람들을 비밀의 함정에 연루시킨다. 나는 가망 없는 비밀의 본색을, 비밀의 유일한 공모자가 사라지고 난 뒤에야 깨닫게 된 것이다. (p.36)


| 그런데도 나는 시간이 흐를수록 거대한 속임수에 빠져버린 기분에 사로잡히고는 했다. 이미 주어진 조건 속에서의 선택이 과연 자유를 전제한 것이었다 할 수 있을까. (p.41-42)


| 아무도 내게 묻지 않으리라. K가 내게 약속했던 것, 그가 내게 준 것, 그것들로 만든 내 15년. 누구도 궁금해 하지 않을, 상상조차 하려 하지 않을 내 인생 이면의 인생, 아니 내 진짜 인생. 그것은 내가 K가 없는 미래를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홀로 온전히 결정해야 한다는 걸 의미했다. (p.45-46)


| 앞으로도 내가 고등학생 시절 옮겨 적었던 그 문장의 시선으로 살아가야만 한다는 게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 나를 사랑에 빠지게 한 대상을 사랑할 수 없는 운명에 순응도 저항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p.84)


| 그것을 받아  직후 나는 분노와 혼란에 휩싸였다그럼에도 끝내 나는 그것이 내게 도달했다는 사실에 안도한다. K의 문장을   있을 만큼 거듭 읽은 후에도 나는 여전히 나로서 K 기억하기 때문이다손승미나는  이름을 선택했고그녀는 K 영향 아래 있지 않다나는 K 떠올리지 않기 위해  감지 않는다. K 그의 자리에 앉아 있고나는 때때로 그 자리를 무심히 스쳐 지나간다. (p.111-112)


| 다만 저는 이 이야기를 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전희정 선생님의 이야기도 아닙니다. 이제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어떤 유령의 목소리일 뿐이죠. 전희정 선생님의 진짜 목소리는 제가 읽은 것의 그것과는 다르리라고 확신합니다. (p.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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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의 장례
K의 장례
23-070 | 박연준 외 5명, 겨울 간식집

읻다 넘나리 1기 (231205~231206)


❝ 별점: ★★★★

❝ 한줄평: 올 겨울엔 겨울 간식집에서 이야기 하나씩 꺼내 먹는 거 어때요?

❝ 키워드: #겨울간식 : 뱅쇼, 귤, 다코야키, 만두, 호떡, 유자차 | 관계 | 문턱 | 용기 | 행복 | 애증 | 영원

❝ 추천: 여섯 명의 작가님이 써 내려간 겨울 간식 관련 이야기가 궁금한 사람


❝ 창밖. 여전히, 고요히, 어쩌면 영원히, 눈이 쏟아지고 있다. ❞

/ 정용준, 「겨울 기도」


📝 (23/12/06) MBTI 테마소설집에 이어 이번엔 겨울 간식 테마소설집! 읻다 넘나리 마지막 소설책은 표지만 봐도 포근하고 귀여운, 겨울 간식 이야기가 가득한 단편소설집이다.


✦ 박연준, 김성중, 정용준, 은모든, 예소연, 김지연 여섯 분의 작가님들이 쓰신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올해만큼 앤솔러지를 많이 읽은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 여러 작가의 다양한 작품을 한 번에 만나볼 수 있다는 점이 나에게는 꽤 매력적이라앞으로도 읻다의 테마소설집은 쭉 찾아 읽어 볼 생각이다. 올여름에는 기담, 겨울에는 간식집으로 계절과 찰떡인 테마소설집들이 출간되었는데, 내년에는 읻다에서 어떤 테마소설집이 나올지도 궁금해진다 ㅎㅎ


✦ 모두 재미있게 읽었는데 개인적으로 Best 3을 뽑으라면 김성중, 정용준, 김지연 작가님의 단편을 고르겠다. 특히 내가 좋아하는 간식들이기도 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따스함이 느껴져서 더더욱 좋았던 단편들이었다. 가장 좋았던 단편 하나만 뽑으라면 김성중 작가님의 「귤락 혹은 귤실」! 🍊 리미널리티, ‘문턱의 시간’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많은 공감을 얻을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 여섯 분의 작가님이 각자 적으신 겨울 레시피가 정말 소중하고 귀여웠다 ㅋㅋㅋ 이번 겨울에는 노라 존스의 <December> 듣기, 겨울잠 준비, 눈이 펑펑 오는 날 창문이 큰 카페에 앉아 바깥 바라보기, 송년회 때 ‘올해의 발견’ 이야기 나누기, 수면 잠옷에 수면 양말을 신고 오래도록 전기장판에 누워 있기, 밤 쪄먹기를 꼭 해봐야겠다!


✦ 겨울이 되면 즐겨 먹는 나만의 겨울 간식과 추억이 있는 사람이라면, 작가님들이 겨울을 나는 겨울 레시피가 무엇인지 궁금한 사람이라면 이 소설집 강추! 올 겨울에는 따뜻한 겨울 간식들을 잔뜩 쌓아 두고 겨울 간식 테마소설집의 이야기들을 야금야금 꺼내 먹어야지 ☃️


(*읻다 출판사 서포터즈로 선정되어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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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준, 「한두 벌의 다른 옷」

: 멀리서 보면 아름답지만, 가까이서 보면 고통


| 혼자 돌아오는 기차에서 나는 그때 우리가 나누었던 대화들, 가벼운 한숨과 서로에 대한 깊은 애정을 생각했다. 그런 건 아무 때고 이유도 없이 휘발된다. 가까이에서 서로의 삶을 보살피는 사이, 관계가 붉게 엉키는 순간부터 사라진다. 저녁이 되어 빛이 사라지듯이. (p.3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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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중, 「귤락 혹은 귤실」 ⛤

: 리미널리티, 문턱의 시간에서 문턱을 넘을 결심


| 방향 상실의 감각은 언제나 황홀하다. 하지만 그 감각의 모래알 또한 정해져 있는 것이다. (p.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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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준, 「겨울 기도」 ⛤

: 오랜 잠과 꿈 밖으로 빠져나갈 수 있는 용기


| 신경은 맞은편 창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캄캄한 지하 터널 속을 터덜터덜 달리는 기차 유리창에 붙어 흔들흔들 움직이는 여자. 꿈 밖으로 빠져나온 사람 같다. (p.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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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모든, 「모닝 루틴」

: ‘당신이 원하는 만큼’ 행복해질 것


| 어린 시절에 은하는 떡만둣국을 다 비워서가 아니라 할머니의 그 말 덕분에 비로소 한 살 더 나이가 드는 것처럼 느꼈다. 따라서 언젠가부터 나이에 맞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인지 자신할 수 없는 이유는 더 이상 할머니의 그 말을 듣지 못한 데서 연유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p.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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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소연, 「포토 메일」

: 단지 ‘애증’으로 정의내릴 수 없는 복잡한 감정


| “나는 내가 모르는 사이에 아주 많은 기회를 외면했을 거야.”

  (...)

  “호떡에 든 앙금이 팥인 줄 알았던, 그 애처럼 말이야. 호떡이 뭔지도 모르고 호떡을 외면해 온 거잖아.”

  (...)

  “그래도 나는 나름대로 내 자리를 찾아가고 있어. 종종 무언가를 오인하고 거들떠보지 않다가 종국에 무언가를 깨닫고 후회하면서.” (p.162-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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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연, 「유자차를 마시고 나는 쓰네」 ⛤

: 순간을 영원히 담아둘 수는 없을까요


| 누구의 손도 안 타게 밀봉해서 물도 산소도 닿지 않게 하면 영영 썩지 않을 수 있을까. (p.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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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간식집 - 겨울 간식 테마소설집
겨울 간식집 - 겨울 간식 테마소설집
23-069 | 이주혜, 누의 자리

자음과모음 (e-book, 231203~231204)


❝ 별점: ★★★★

❝ 한줄평: 너와 나, 우리가 아닌 ‘누’

❝ 키워드: 너와 나 | 우리 | 언어 | 애도 | 사랑 | 구원

❝ 추천: 너와 나, ‘누’의 이야기가 궁금한 사람


❝ 이주혜의 소설들은 여성성에 근거해 여성에 부여된 자리들에 대한 고발이자 자리 없는 여자들에 대한 구원의 이야기이다. ❞

/ 해설 | 소영현, 자리 없는 여자들


📝 (23/12/05) 이주혜 작가님은 문학과지성사의 『소설 보다 : 가을(2023)』에 실린 「이소 중입니다」로 처음 만나게 된 작가님이다. 소설도 좋았지만 인터뷰가 특히나 인상적이어서 다른 소설도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마침 전자책이 있길래 읽어 보았다.


  「누의 자리」와 「골목의 근태」가 ‘제비 뜨개방’이라는 공간을 공유하며 처음과 끝에서 묵직한 여운을 남긴다면, 「소금의 맛」은 하얗고 빛이 나는 소금 기둥처럼 반짝거리는 두 연인의 만남과 헤어짐, 그리고 재회 이야기가 아름답다. 작가의 에세이도 참 좋았다. 사실과 거짓말, 그리고 그 사이의 ‘이야기’. 산 자와 죽은 자, 그리고 그들의 얼굴. 이주혜라는 작가와 그의 세계를 더 알고 싶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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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의 자리」

: ‘오직 너와 나, 단 두 사람만을 위한 무대’인 ‘누’를 만들어준 이를 위한 자리


| 내게 ‘누’는 ‘누구’가 아니야. ‘누’는 ‘너와 나’야. (…) ‘누’라는 무대에 오직 너와 나, 단 두 사람만 올리고 싶어. 이제 ‘누’는 너와 나만을 위한 단어야. 내가 그렇게 언명했어. 그 자리에서 우리는 함께 아름다운 춤을 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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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의 맛」 ⛤

: 소금의 값과 소금의 맛, 그리고 사랑의 값과 사랑의 맛


| 하이스미스가 소금 기둥이 되어버린 롯의 아내를 떠올렸다면 그것은 소설 속 캐롤과 테레즈의 고통에 집중했기 때문이겠지요. 만약 「마태복음」 구절에서 제목을 따온 거라면 고통보다는 사랑에 초점을 맞췄기 때문이 아닐까요? 소금은 짜야한다. 그게 소금의 값이고 소금의 대가이다. 캐롤과 테레즈의 입을 빌리면 이런 말이 되겠지요. 이 사랑은 고통이다. 그게이 사랑의 값이고 대가이다. 소금은 짜서 소금이고 이 사랑은 고통이지만 끝내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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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의 근태」

: 함께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우리가 되고 위로받을 수 있다는 것


| 누구도 내가 아이를 버린 게 아니라고 말해주지 않았다. 누구도 내가 지은 죄에 비해 너무나 과도한 벌을 받았다고 말해주지 않았다. 나를 낳고 키워준 친정 엄마마저도 이혼 직후 친정에 와 누워 있는 내게 혼잣말인 듯 중얼거렸다. 그러게, 어미가 되어서는 왜 그렇게 일 욕심을 부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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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의 자리
누의 자리
23-068 | 아르튀르 랭보, 랭보 서한집

읻다 넘나리 1기 (231201~231203)


❝ 별점: ★★★★

❝ 한줄평: 불처럼 창작하고, 사랑하고, 미지에 도달한 투시자 랭보

❝ 키워드: 편지 | 시 | 시인 | 낭만주의 | 상징주의 | 투시자 | 인식 | 감각 | 착란 | 미지

❝ 추천: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인 랭보의 편지에 담긴 그의 시에 대한 열망과 생각이 궁금한 사람


❝ 모든 감각의 착란을 통해 미지에 도달해야 합니다. 고통은 어마어마하지만, 강해져야 하고, 시인으로 태어나야 합니다. ❞

/ 1871년 5월 13일, 샤를빌, 조르주 이장바르에게 보낸 편지


❝ 자유와 미지에의 욕구가 현실과 타인을 마주하며 형상을 취하는 순간들이 이 편지들에 담겨 있다. ❞

/ 옮긴이의 말


📝 (23/12/04) 올해 민음북클럽 잡동산이에 실린 랭보의 시 「지옥에서 보낸 한철 — 서시」를 통해 그의 작품을 처음 읽어봤다. 파격적인 시에 놀라 어떤 시인인지 궁금해 찾아봤는데 삶이 굉장히 파란만장했고, 의외로 시인으로 시를 쓴 기간이 길지 않아 남긴 작품도 『지옥에서 보낸 한철 Une saison en enfer』과 『일뤼미나시옹 Les Illuminations』 둘 뿐이라는 것에 또 한 번 놀랐던 기억이 난다. 랭보는 나에게 ‘굉장히 어린 나이에 시에 재능을 보였으나 절필한 후 세상을 떠돌다가 암으로 젊은 나이에 사망한 불운한 천재 시인’이라는 인상으로 남았다. 읻다 넘나리 마지막 선택 도서로 서한집 여러 권 중 『랭보 서한집』을 고른 것은 시에 관한 그의 생각이나 당대에는 파격적이었던 결혼한 시인 폴 베를렌과의 사랑이 조금 더 알고 싶어 졌기 때문이었다.


✦ 『랭보 서한집』은 ‘시에 대한 열망에 사로잡힌 열다섯 시절부터 『지옥에서 보낸 한철』과 『일뤼미나시옹』에 담긴 시를 쓴 스물한 살 무렵까지 랭보의 창작 시기로부터 전해지는 모든 서한과 절필 이후, 평범한 개인으로 돌아간 랭보의 삶을 유추해 볼 수 있는 편지 몇 편을 더해’ (출판사 소개) 묶어낸 책으로, 시에 대한 열정으로 넘쳐흐르는 생명력이 돋보이는 창작 시기의 편지와, 절필 이후 사업 이야기나 근황, 안부 이야기가 담긴 편지부터 죽기 직전 사그라드는 생명력을 보여주는 듯한 편지가 담겨 있어 한 인간의 삶과 죽음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 뒤에 실린 편지 해설과 옮긴이의 말, 그리고 랭보 연보에서 랭보의 삶뿐만 아니라 그의 가족이나 주변의 상황이나 사건, 문단 경향, 시대상 등을 살펴볼 수 있어 더욱 도움이 되었다. 그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나 그림, 편지 원본 이미지 등도매우 흥미로웠다.


✦ 『랭보 서한집』에는 시가 12편 실려 있는데, 그중 6편이 정식 발표되지 않은 시라고 한다. 편지를 찾지 못했다면 영영 공개되지 않았을 미발표 시가 담긴 소중한 기록이다. 서한집에 실린 시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시는 「오필리아」였는데, 존에버렛 밀레이의 그림 ‘오필리아’가 떠올라 찾아보니 이 그림에서 영감을 받아 쓴 시라고 한다.


✦ 랭보가 폴 베를렌과 주고받았을 편지의 대부분은 남아 있지 않고, 이 서한집에 실린 편지는 베를렌이 랭보에게 총을 쏴 두 사람이 조사받을 때 압수된 소지품에 들어 있던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편지에는 랭보가 베를렌에게 제발 돌아와 달라는 말, 진심에 귀를 기울이라는 말, 심지어는 그의 아내가 돌아오지 않을 거란 악담에 그들이 다시 함께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모든 자유를 잃는 것 같은 끔찍한 지긋지긋함에 회한을 느낄 것이라 퍼붓는 저주, 그리고 다시 사랑한다고 돌아와달라는 말까지 담겨 있다. 엄청나게 솔직한 편지여서 절필 후의 아주 담백한 문체와는 아주 대조적이었고, 그게 매우 흥미로웠다.


✦ 랭보는 시인이 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에 대한 전적인 인식’이 필요하며, 시인은 ‘모든 감각의 착란을 통해 미지에 도달’해 투시자가 된다고 말하고 있다. 물론 시대의 차이가 있어 그 당시와 지금의 십 대가 좀 다를 수는 있겠지만, 랭보는그 어린 나이에 어떻게 이런 생각을 확립할 수 있었을까? 특히 ‘투시자의 편지’라고 알려진 폴 드므니에게 보낸 1871년 5월 15일의 편지는 읽는 내내 감탄만 나왔다.


✦ ‘자유로운 자유’를 갈망하고, 시인이 되기 위해 자기 자신을 ‘투시자’로 만들고자 했던 사람. 이른 나이에 절필하고 세상을 방랑하며, 그는 원하던 ‘자유로운 자유’를 찾을 수 있었을까? 이 서한집을 읽고 나니 그의 삶이 불운하지만은 않았을거라는 생각이 든다.


(*읻다 출판사 서포터즈로 선정되어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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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애하는 스승님께,

  우리는 사랑의 계절에 있고, 저는 곧 열일곱 살이 됩니다. 흔히 말하듯이 희망과 몽상의 나이이지요, — 그리하여 여기 저는, 뮤즈의 손가락이 닿은 아이로서, — 진부하다면 죄송합니다 — 제 신실한 믿음, 저의 희망, 저의 감각, 시인들의 것인 이 모든 것들을 말하고자 합니다. — 저는 그걸 봄의 것들이라고 부릅니다.

/ 1870년 5월 24일, 샤를빌, 테오도르 드 방빌에게 보낸 편지


| 제 말은, 투시자여야 하며, 투시자가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시인은 모든 감각의 길고, 거대하며, 조리 있는 착란을 통해 투시자가 됩니다. 온갖 형식의 사랑, 고통, 광기, 그는 자기 자신을 탐색하고, 자기 안에서 온갖 독을 길어내어, 거기서 정수만을 간직합니다. 모든 믿음을, 모든 초인적 힘을 동원해야 할,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문이지요. 거기에서 그는 누구보다도 위대한 환자, 위대한 범죄자, 위대한 저주받은 자가, — 또한 지고의 학자가 됩니다! — 그는 미지에 도달하니까요! (p.68)

/ 1871년 5월 15일, 샤를빌, 폴 드므니에게 보낸 편지


| 이러한 시인들이 나타날 것입니다! 여자의 끝없는 예속 상태가 분쇄될 때, 남자, 여태까지 가증스러웠던 그가 여자를 제자리로 돌려보내고, 여자가 스스로를 위해 스스로에 의해 살게 될 때 여자 역시, 시인이 될 것입니다! 여자는 미지를 발견할 것입니다! 그 사고들의 세계는 우리들의 것과 다를까요? — 여자는 이상한 것들, 불가사의한 것들, 역겨운 것들, 감미로운 것들을 발견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들을 취하고, 그것들을 이해할 것입니다. (p.76)

/ 1871년 5월 15일, 샤를빌, 폴 드므니에게 보낸 편지


| 유일하게 진정한 말은 이거야. 돌아와, 나는 너와 함께 있고 싶어, 너를 사랑해. 이 말을 귀담아 듣는다면, 용기와 진정한 마음을 보여줄 테지.

  아니라면, 널 딱하게 여길 거야. 하지만 나는 너를 사랑해, 네게 입맞춤을 보내고, 우리는 다시 볼 거야. (p.126)

/ 1873년 7월 5일, 런던, 폴 베를렌에게 보낸 편지


| 밤낮으로 갖가지 이동 수단들을 고려해본다. 그게 진짜 고문이야! 이런저런 것을 하고 싶고, 여기 또 저기를 가고 싶고, 보고 싶고, 살고 싶고, 떠나고 싶은데, 불가능해. 오랫동안 불가능할 테지, 영영 불가능한 게 아니라면 말이지만! (p.161-162)

/ 1891년 7월 15일, 마르세유, 누이동생 이자벨에게 보낸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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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보 서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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