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youlove
banner image

bookyoulovearchive

읽고 쓰는 사람의 기록
전체보기(207)
23-047 | 임선우, 초록은 어디에나

자음과모음 (e-book, 231020~231022)


❝ 별점: ★★★★

❝ 한줄평: 파랑의 슬픔에서 초록의 슬픔으로 나아가기

❝ 키워드: 상처, 위로, 치유 | 슬픔, 전염, 이해 | 상실, 기적, 이별

❝ 추천: 슬픔의 색채를 느껴보고 싶은 사람


❝ 나에게 초록은 따뜻한 슬픔의 색. 차고 단단한 파랑의 슬픔에 노란빛이 한 줄기 섞인 푸르름. ❞

/ 에세이 | 초록은 어디에나


📝 (23/10/22) 얼마 전 『유령의 마음으로』를 읽으며 임선우 작가님의 두 번째 소설집이 나왔다는 소식을 접해 바로 찾아 읽게 되었다. 개인적으로는 『유령의 마음으로』 수록작들만큼 작품들을 재미있게 읽었는데, 거기에 작가의 에세이와 박혜진 문학평론가의 해설이 실려 있는 게 독서를 더욱 풍성하게 해 준 것 같아 좋았다.


  세 편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슬픔의 이유는 각기 다르지만 이들은 모두 ‘슬픔의 공동체’에 속해 있다. ‘만남은 우리 삶의 통로이자 출구다.’라는 박혜진 문학평론가의 말처럼, 인연인지, 우연인지, 아니면 기적일지도 모를 만남을 통해 인물들은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변화를 맞이하게 되며, 어쩌면 출구가 될지도 모르는 새로운 통로로 들어가게 된다.


  ‘차고 단단한 파랑의 슬픔에 노란빛이 한 줄기 섞인 따뜻한 슬픔의 색’이라는 초록. 슬픔이 차갑다고만 생각했는데, 이 세 편의 이야기는 슬픔을 나누고 서로의 온기에 위로를 받으며 ‘혹이 말랑말랑해지고’, ‘새파랗고 단단한 돌이 녹으며’, ‘내리던 눈이 그치는’ 것처럼 슬픔도 따뜻한 초록의 빛깔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하다.


  임선우가 그려내는 너무나 비현실적인 상황도 자연스럽게 수용하는 인물들은 때론 안타까우면서도 사랑스럽다. 한 걸음씩, 묵묵히 걸어가다 보면 슬픔에서도 그만큼 훌쩍 멀어질 수 있기를, 새로운 통로를 찾아 출구로 나올 수 있기를. 마음을 다해 바라 본다.


———······———······———


「초록 고래가 있는 방」 ⛤

: 초록 고래와 단봉낙타의 비밀스러운 만남과 위로


| 계속 걸어도 물이 나오지 않는다면요? 조용히 얘기를 듣던 내가 물었다. 그러면 죽게 되겠죠. 예의 그 덤덤한 투로 유미씨가 대답했다. 그렇지만 우리가 살아 있는 한, 최대한 물에 가까워지게 걷는 거죠. (...)

  한 걸음씩 걷다 보면 상처로부터 훌쩍 멀어져 있을 때가 있어요. 이것은 유미 씨의 말. 그 말이 정말일까. 정말이라면 유미 씨와 나는 지금 어디쯤 와 있는 걸까, (...).


———······———


「사려 깊은 밤, 푸른 돌」

: 만약 슬픔이 손에 만져지는 푸른 돌이라면


| 마룻바닥에 남은 동그랗고 옅은 화분의 테. 그것을 가만 들여다보고 있자 오한이 났다. 나는 재빨리 손으로 입을 막은 다음 허리를 앞으로 숙였다. 평소보다 강하게 목구멍이 조여왔고, 몇 번의 구역질 끝에 나는 손바닥 위로 돌 한 덩이를 토해냈다. 갓 태어난 슬픔은 언제나 그렇듯 차갑고도 새파랬다.


———······———


「오키나와에 눈이 내렸어」

: 어쩌면 다시 오지 않을 기적 같은 만남, 그리고 헤어짐


| 우리는 사마귀 무덤 앞에 오랫동안 서 있었다. 작고 평평한 무덤 앞에서 영하 언니는 나에게 좋은 것들은 왜 금방 끝나버리는 걸까, 하고 물었다. 언니에게 좋은 말을 해주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나는 언니가 나에게 너무나 좋은 것이어서, 그래서 금방 끝나버렸다는 말을 끝까지 전하지 못했다.


———······———······———

초록은 어디에나
초록은 어디에나
23-046 | 이근후, 이서원, 어디 인생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던가요

샘터 (231019~231020)


❝ 별점: ★★★★

❝ 한줄평: 간결하면서 깊이 있는 두 지성의 대담

❝ 키워드: 자존 | 관계 | 위기 | 욕망 | 확신 | 비움 | 성장 | 행복

❝ 추천: 인생을 살면서 마주하게 되는 고민거리에 대한 조언을 찾고 있는 사람


📝 (23/10/21) 샘터 물방울서평단 네 번째 서평 도서로 『어디 인생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던가요』를 선택했다. ‘삶을 관통하는 여덟 가지 주제’에 관한 50년 경력의 정신과 전문의와 30년 경력의 상담 전문가가 나누는 대담이라는 문구에 단번에 끌렸기 때문이다.


  이 책은 ‘자존, 관계, 위기, 욕망, 확신, 비움, 성장, 행복’이라는, 인생을 살며 한 번쯤 고민할 법한 여덟 가지 주제로 스승과 제자가 나눈 이야기를 엮은 책이다. 여덟 가지 주제 중 내게 특히 와닿았던 주제 세 가지는 ‘관계’, ‘성장’, 그리고 ‘행복’이었다. 세 가지 모두 평소에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키워드라서 더 와닿았던 것 같기도 하다. 


  ‘관계’에서는 타인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나를 알아주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나를 알리는 적극적 노력이 필요’하다는 말과 ‘사랑은 스스로 준비된 만큼 받을 수 있다’는 말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나 자신이 준비되고 나를 적극적으로 알리는 것이 관계의 첫걸음이 될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성장’에서는 ‘정답 사회가 다답 사회로 변화해야 하며, 사회의 성장과 발전은 다양한 답과 창조적인 대안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말과 ‘오늘 할 일은 오늘 하고, 하고 싶은 일은 지금 하는 것을 삶의 원칙으로 삼으면 후회와 아쉬움이 줄어든다’는 말이 제일 기억에 남는다. 정답만을 찾으려고 하는 사람이 아니라 다양한 가능성과 대안을 모색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행복’에서는 ‘우리 삶은 고통이 있기 때문에 즐거운 것’이라는 말과 ‘여기가 어디이고, 지금이 어느 때이고, 주변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기만 하면 살아 있는 것이고 온전한 것이며 분수를 아는 것’이라는 말, 그리고 ‘외로움은 혼자라서 생기는 감정이 아니라 혼자일 수 없어서 생기는 감정’이라는 말이 마음에 남았다. ‘나의 분수’를 알면 조금 더 행복에 가까워질 수있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이 두 사람이 말하고 있는 것들이 모두에게 정답은 아닐지라도, 인생을 살며 마주하게 되는 많은 고민거리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이 책은 단번에 읽어 내려가기보다는 오래오래 곁에 두고 힘든 일이 있거나 고민거리가 있을 때 꺼내보면 더 좋은 책일 듯하다. 지금은 나에게 와닿지 않는 문장이 나중에는 큰 깨달음으로 돌아올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


2. 관계 | 공존의 시대에 필요한 고민 ⛤

| 마찬가지로 사랑은 스스로 준비된 만큼 받을 수 있다.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만큼 사람들에게 관심과 호의를 받는 것이 사랑의 본질이다.

/ 좋은 친구가 생기지 않는 이유 | 남이 원인이 아니라 내가 원인일 수 있다 (p.62)


7. 성장 | 무거운 마음을 견디는 일 ⛤

| 정답 사회는 다답 사회로 변화해야 한다. 사회의 성장과 발전은 다양한 답과 창조적인 대안이 있어야 가능하다. 

/ 정답 사회와 다답 사회 | 답이 하나인 사회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p.25)


8. 행복 | 삶의 주인이 되기 위하여 ⛤

| 우리 삶은 즐겁기 때문에 즐거운 것이 아니라 고통이 있기 때문에 즐거운 것이다. 고통이 없으면 즐거움도 존재하지 않는다. 

/ 우리는 왜 사는 게 즐겁지 않을까 | 사는 것 자체가 고통스러운 것이다 (p.228)


(*출판사 서평단으로 선정되어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

어디 인생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던가요
어디 인생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던가요
23-045 | 이유리, 모든 것들의 세계

자음과모음 (e-book, 231017~231018)


❝ 별점: ★★★★

❝ 한줄평: 사랑하기 위해 살고 살기 위해 사랑하는 것

❝ 키워드: 죽음, 기억, 소멸 | 속마음, 사랑, 거짓말 | 복수, 합리화, 믿음

❝ 추천: 사랑에 대한 믿음을 놓고 싶지 않은 사람


❝ 끝내 사랑을 멈추지 않는 마음 ❞

/ 해설 | 마음의 형태학: 귀신, 마음소라 그리고 요정 — 전승민 문학평론가


📝 (23/10/19) 이유리 작가님의 책을 읽어보고 싶어 이 책과 『좋은 곳에서 만나요』 두 권을 먼저 골라왔는데, 이 작품을 먼저 읽었다. 자음과모음의 트리플 시리즈는 처음 읽어보는데, 세 편의 단편과 작가의 에세이, 그리고 작품 해설로 이루어져 있어 만약 처음 읽어보는 작가라면 이 시리즈로 작가의 작품을 시작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작품으로 이유리 작가님의 작품에 입문하게 된 게 굉장히 만족스럽다. 해설에서 『브로콜리 펀치』의 작품 몇 편도 소개되어 이유리의 세계가 더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Q. “세상에 정나미가 떨어지더라도 사람끼리는 사랑하며 살았으면 좋겠다”고 말한 적 있다. 팍팍한 세상에서 본인이 믿는 희망은 여전히 사랑인가?

A. 말로 내뱉자면 낯부끄럽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이 미움을 이긴다고 믿는다. 결국에는 사랑이 이긴다. 내가 중심을 잃고 흔들릴 때도 ‘그치만 결국 사랑이 이길 텐데’라고 되뇌며 논리를 갖추거나 생각의 근육을 키우거나 마음을 다스리곤 한다. 사랑이 이긴다는 명제는 내 삶을 통해 충분히 경험했다. 앞으로도 그렇게 믿고자 한다.


(링크: 아이유와 이지은 | https://www.harpersbazaar.co.kr/article/75198)


  위의 문답은 하퍼스바자에서 진행한 아이유의 인터뷰에서 정말 인상적이어서 따로 기록해 두었던 구절이다. ‘사랑이 미움을 이긴다’, ‘결국 사랑이 이긴다’는 말은 ‘끝내 사랑을 멈추지 않는 마음’으로 이루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책을 읽는 내내 저 구절이 마음에 맴돌았다.


  세 편의 단편은 우리에게 사랑의 다양한 모양을 보여준다. 얼굴도 모르는 이를 그리워하고 기억하는 것도 사랑, 진심을 알면서도 그것을 솔직히 말하기보다 상대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해주는 것도 사랑, 그리고 인간이 아무리 잘못을 저질렀어도 인간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는 것도 사랑이다. 세상살이가 아무리 고되고 힘들어도, 아무리 세상에 나쁜 사람이 많다 하더라도 결국 우리는 타인과 함께 살아가야만 하고, 그렇기에 인간적인 마음과 인간에 대한 믿음을 잃지 말고 끝내 사랑을 포기해선 안된다. ‘모든 것들의 세계’에서 사랑하기 위해 살고, 살기 위해 사랑한다는 것. 그것이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


「모든 것들의 세계」 ⛤

: 사랑하는 이를 충분히 기억하고 그리워한 다음 잘 보내준 후에야 진짜 이별이 찾아오는 것


| 산 사람인 애인은 언젠가는 결국 천주안을 잊을 것이고 천주안은 그 하나하나의 과정을 제 눈으로 직접 보고 느끼게 되겠지만 적어도 그것이 그렇게까지 슬픈 일은 아니기를, 마지막에는 기어이 잊혔음을 기뻐하며 사라질 수 있게 되기를.


———······———


「마음소라」

: 진실을 안다는 게 언제나 좋은 일인가에 대한 고민


| 분명 처음에는 별것 아닌 실금에 불과했을 그것을 만약 제때 알아차리고 메꾸어낼 수 있었다면. 그랬다면 그 아름다운 건물은 영원히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을까.


———······———


「페어리 코인」

: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잃지 않아야 하는 어떤 믿음


| “우진아, 우린 잘못한 거 없어."

  (...)

  “바꿀 수 없다면 우리도 똑같아지면 돼. 이왕 나쁜 놈이 될 거면 확실히, 제대로 나쁜 놈 한번 돼보자."


———······———······———

모든 것들의 세계
모든 것들의 세계
23-044 | 은유, 우리는 순수한 것을 생각했다

읻다 넘나리 1기 (231004~231016)


❝ 별점: ★★★★★

❝ 한줄평: 아낌없이 사랑하고 감탄할 줄 아는 아름다운 이들

❝ 키워드: 시번역 | 번역 | 창작 | 사랑 | 순수 | 열정 | 다양성 | 이미지 | 이해

❝ 추천: 문학 번역에 관심 있는 사람, 시와 친해지고 싶은 사람


📝 (23/10/17) 일곱 명의 한국 시 번역가들의 이야기를 한 자리에서 만나볼 수 있다니! 이 책은 꼭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감사하게도 읻다 서포터즈로 도서를 제공받았다.


  문학 공부를 하며 누가 뭐가 제일 어렵냐 물으면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시라고 대답했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소설을 제일 좋아함에도 소설 수업은 거의 듣지 않았고, 오히려 시 수업을 많이 들었다. 어려워서 무의식 중에 더 알고 싶고, 더 잘 읽고 싶었던 걸지도.


  가장 귀중한 경험 중 하나는 시 번역을 직접 해보고 그렇게 번역한 이유를 설명하는 과제를 해 본 것이다. 그전까지는 그렇게 많은 번역본들을 읽었음에도 번역에 관해서 깊은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냥 뚝딱하면 번역이 된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시 번역을 직접 해보면서 모든 번역이 그렇겠지만 특히 문학 번역은 단순히 언어의 교체가 아니라 ‘창작의 영역’이라는 걸 온몸으로 체감했다. 그리고 정답이 없기 때문에 더 막연하고 불안하고 어렵지 않을까 생각했다. 이 경험 이후로 모든 번역가들을 마음 깊이 존경하게 되었다. 그래서 한국 시 번역가들을 인터뷰한 이 산문집을 꼭 읽어보고 싶었다. 


  역시나 여러 번역가들이 ‘번역은 창조 행위’, ‘번역은 가장 깊게 읽고, 해석하면서 창작하는 일’이라고 말하는 걸 볼 수 있었다. 인상적이었던 점 중 하나는 번역을 통해 ‘다른 사람’이 되어볼 수 있다는 것, 그럼에도 ‘내 해석에 따라 달라지는 걸최소화’하며 ‘내가 너무 드러나선 안 된다는 것’이었다. 번역은 또 다른 창작이지만, 그럼에도 원문이 존재하기에 원문을 존중하고 해치지 않는 선에서 번역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 과정에서 원 작가와 번역가의 소통이 정말 중요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작가와 번역가가 제대로 번역본을 출간하기 위해선 ‘한 몸’이 되어야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시를 읽고 이해하는 것에 정답이 없는 것처럼 시 번역에도 정답이 없다. 그러한 불확실성을 사랑하고 즐기며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이 번역가들이 아름답고 또 사랑스럽다. ‘문학 번역이라는 아름다운 일’에 더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가지기를바라며 이 책을 적극 권하고 싶다.


+ 일곱 명의 인터뷰는 모두 일곱 개의 서점에서 진행되었는데 내가 가본 곳은 딱 두 군데였다. (서점 리스본, 위트 앤 시니컬) 하지만 모두 평소에 가보고 싶었던 곳들이라 이 산문집을 계기로 인터뷰 장소였던 서점들도 차근차근 한 곳씩 방문해 보기로 다짐했다. 책을 읽다 보면 책뿐만 아니라 사람, 공간, 경험 등 다양한 것들이 함께 찾아온다는 점이 참 매력적이다.


———······———······———


🖋️ 시 독해와 번역은 정답이 없다. 이러한 혼돈과 불확실성을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자가 번역의 세계에서 살아남는다. (은유, p.9)


💬 어차피 제가 아무리 원작자의 목소리를 가져본다고 해도 결국에는 제 목소리가 나온다는 걸 알아요. 그렇지만 어쨌든 다른 사람이 되어보고 싶은 마음이 있으니까요. (호영, p.46)


💬 저한테는 번역이란 당연히 창조 행위거든요. (...) 사람들이 저한테 자꾸 물어봐요. 왜 자기 글은 안 쓰냐고. 저한텐 그 질문의 의미가 '번역은 쉽잖아’ ‘번역은 창작이 아니잖아'라는 말로 들리거든요. 그런데 몇몇 작가들의 창작론을 들여다보면 '조용한 곳에서 자기 안의 목소리를 듣는다, 들리는 걸 쓴다'라고 말하죠. 그게 번역하고 똑같아요. (안톤 허, p.81)


💬 시는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읽을 수 있다, 그게 시의 목적이잖아요? 각 언어의 다층적 의미를 허용해요. 그렇지만 제 기준을 없앨 수는 없고, 같은 감정이라도 다르게 표현을 하죠. (소제, p.109)


💬 의미가 아니고 이미지인 것 같아요. 이미지와 리듬을 살릴 수 있으면 최선이라고 생각하면서 번역해요. (승미, p.156)


💬 풀릴 수 없는 번역은 없는 것 같아요. 무슨 언어든, 일치하는 단어나 표현이 있는데 아직 못 찾은 거라는 믿음이 있어요. 저는 그런 믿음이 있어서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알차나, p.185)


💬 번역은 가장 깊게 읽고, 해석하면서 동시에 창작하는 일이죠. (새벽, p.214)


💬 시 번역은 결과물이 시여야 하죠. 결과물이 아름답지 않으면 의미가 없고 오히려 원본보다 아름다워도 돼요. (박술, p.236-237)


(*읻다 출판사 서포터즈로 선정되어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

우리는 순수한 것을 생각했다
우리는 순수한 것을 생각했다
23-043 | 사가와 치카, 계절의 모노클

읻다 넘나리 1기 (230924~231015)


❝ 별점: ★★★★☆

❝ 한줄평: 시들은 생생히 움직이는 하나의 풍경이 되고

❝ 키워드: #계절 : 봄, 여름, 가을, 겨울 | #밤 #바다 #사랑 #삶 #죽음 #순환 #장송곡 

❝ 추천: 시집 한 권에 담긴 사계절 같은 시인의 생애가 궁금한 사람, 밤을 사랑하는 사람


❝ 그것은 계절처럼 흘러가는 인생이었다. ❞

/ 옮긴이의 말 | 바다로 내달려 발광하라 (p.195)


📝 (23/10/16) 시집을 다 읽고 나서 ‘계절의 모노클’이라는 시집의 제목이 정말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시들을 읽는 동안 사계절의 풍경을 두 눈으로 직접 보는 것보다, 한쪽 눈으로 렌즈를 통해 바라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총 4부로 되어 있는 시집은 시인의 생애 첫 시와 마지막 시로 시작하고 끝을 맺으며, I는 봄, II는 여름, III는 가을, 그리고 IV는 겨울을 느낄 수 있는 시들로 구성되어 있어 시집과 함께 사계절의 흐름, 그리고 시인의 삶의 흐름을 느낄 수 있었다.


  시를 읽으며 우리는 ‘장미를 흩뿌리는 봄’(「눈을 뜨기 위하여」)을 지나 ‘태양의 뜨거운 시간을 기다리는’(「대화」) 여름을 건너 ‘추억이 버려지듯이, 잎사귀에서 멀어지는 나무’(「잠들어 있다」)들이 가득한 가을을 통과해 마침내 ‘이파리 한 장 없는 마른 나뭇가지가 위로 쭉 뻗어 있는 벌거벗은 숲’에 모두가 ‘천천히, 천천히 점점 더 깊은 잠에 빠지’(「겨울의 초상」)는 겨울에 도달한다. 하지만 겨울의 끝은 봄의 시작이듯, 계절은 돌고 돌아 겨울에 죽어 있던 것들을 다시 되살려내는 봄을 맞이하며 끝없이 순환한다. 


  밤과 달에 관심이 많았던 시인. 밤을 좋아했던 시인. 시인은 산문 <나의 밤>에서 ‘세상 모든 것은 밤의 어둠 속으로 녹아들고, 나의 귓가에는 바늘로 집듯이 시간이 흘러갈 뿐’(p.188)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결국 밤의 시간도 영원하지는 않고, 태양이 뜨고 낮이 찾아오기 마련이다. 


  사계절, 밤과 낮, 그리고 죽음과 삶에 있어서 시작과 끝의 구분은 무의미하지 않을까. ‘계절처럼 흘러가는 인생’에 우리는 결국 죽음이라는 마지막을 맞이하게 되겠지만, 우리 또한 자연의 일부가 되어 끝없이 순환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생생히 살아 움직이는 듯한 하나의 풍경이 되는 시들을 읽으며 삶과 죽음, 계절과 순환에 관해 사유해 볼 수 있었다. 원문이 함께 실려 있으나 일본어를 알지 못해 원문과 함께 번역을 음미할 수 없어서 아쉽다. 이 아름다운 시집, 그리고 아름다운 시인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기를 바란다.


———······———······———


❝ 체중이 나를 떠나   망각의 구멍 속에 되돌려 놓는다 이곳 사람들은 미쳐 있다   슬퍼하는 것도 말을 거는 것도 의미가없다   눈은 녹색으로 물들었다 믿음은   불확실해지고 앞을 보는 일은 나를 초조하게 한다


  내 뒤에서 눈을 가리는 것은 누구인가?   나를 잠에 빠뜨려다오.

/ 「녹색 불꽃」 (p.65)


 —무거운 리듬 아래 깔려 있는 계절을 위해 신은 손을 들리라. 일렁이는 파도가 기어 나오는 해안선에는 소금 꽃이 피었다. 세상 모든 생명의 율동을 갈망하는 고풍스러운 건반은 먼지투성이 손가락으로 태양의 뜨거운 시간을 기다리고 있다.

/ 「대화」 (p.99)


❝ 붉은 소요가 인다


   저녁이면 태양은 바다와 함께 죽는다. 그 뒤를 따라 옷이 흐르지만 파도는 잡을 수 없다.

/ 「낙하하는 바다」 (p.117)


❝ 밤눈에도 하얗게 떠오른 눈길, 그곳을 지나간 사람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 같다. 눈은 금세 몇몇 사람들의 발자국을 지워버린다. 죽음이 그 근처에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몰래 다가와 하얀 손을 흔든다. 죽음은 짙은 발자국을 남기고 지나쳐 갔다. 상냥했던 사람의 시체는 어디에 묻혔을까. 우리의 잃어버린 행복도 어딘가에 숨겨져 있다. 아침, 눈 덮인 지상이 아름다운 것은 그 때문이었다. 우리의 꿈을 파내는 것만 같은 삽 소리가 들린다.

/ 「겨울의 초상」 (p.151)


 그날,

   하늘은 소년의 살결처럼 슬프다.

   영원은 우리 사이를 갈라놓는다.

   저 너머에서 나는 여러 개의 영상을 놓쳐버린다.

/ 「순환로」 (p.171)


———······———······———


🗒️ 좋았던 시


I

✎ 「푸른 말」

✎ 「아침의 빵」

✎ 「오월의 리본」

✎ 「초록」

✎ 「눈을 뜨기 위하여」 ⛤

✎ 「꽃 피는 드넓은 하늘에」

✎ 「봄」 ⛤

✎ 「별자리」

✎ 「전주곡」 ⛤


II

✎ 「기억의 바다」

✎ 「녹색 불꽃」 ⛤

✎ 「The street fair」

✎ 「꿈」 ⛤

✎ 「대화」 ⛤

✎ 「단편」

✎ 「여름의 끝」

✎ 「구름의 형태」

✎ 「Finale」


III

✎ 「잠들어 있다」

✎ 「낙하하는 바다」 ⛤

✎ 「태양의 딸」

✎ 「계절의 모노클」

✎ 「종이 울리는 날」 ⛤

✎ 「검은 공기」

✎ 「녹슨 나이프」 ⛤


IV

✎ 「산맥」

✎ 「겨울의 초상」 ⛤

✎ 「순환로」 ⛤

✎ 「계절」


(*읻다 출판사 서포터즈로 선정되어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

계절의 모노클
계절의 모노클
23-042 | 천선란, 어떤 물질의 사랑

아작 (e-book, 231013~231014)


❝ 별점: ★★★★

❝ 한줄평: ‘우리 모두는 서로에게 외계인’일 수 있다는 것

❝ 키워드: 사막, 우주 | 인공자궁, 서약 | 사해(死海), 생명체 | 외계인, 사랑 | 공감, 재회 | 전쟁, 좀비 | 구멍, 욕망 | 기술, 감정

❝ 추천: 다양한 모양의 감정이 궁금한 사람


❝ 나 하나가 방향을 잡고 노를 젓는다고 해서 바뀔까? 내가 가는 방향은 옳은 방향일까? 이런 생각들을 언제나 하고 있지만, 결론은 하나다. 저어야 한다. 내가 옳다고 믿는 방향으로. ❞

/ 작가의 말


📝 (23/10/15) 표제작 「어떤 물질의 사랑」이 제일 좋았지만 좋았던 작품을 하나만 뽑기는 어려울 정도로 단편들의 여운이 짙었다. 특히나 소설집의 마지막 단편 「마지막 드라이브」가 인상적이었다. 


  다양한 모양의 감정들을 담고 있는 이 소설집은 우리가 홀로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임과 동시에 ‘우리 모두가 다 서로에게외계인’일 수 있다는 깨달음을 준다. 그렇기 때문에 공감과 이해, 연민과 연대, 그리고 더 나아가 사랑이라는 가치가 우리에게 다른 무엇보다 중요하지 않을까.


  작가의 말에서 나온 것처럼 나 하나가 세상을 바꿀 수 없을지도 모른다. 아니,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나는 내가 옳다고 믿는 방향으로 가면 된다. 내가 중요하다고 믿는 가치를 믿고 따라가면 된다.


———······———······———


「사막에서」

: 사막 저 너머 밤하늘을 넘어 우주 속으로


| 사랑과 외로움이라는 단어를 만든 것은 인간이다. 이 땅을 외롭게 만든 것은 오롯이 인간의 짓이라는 걸 상기할 때마다나는 그저 이 행성을 떠나야만 그 외로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


「너를 위해서」

: 너를 위해서 ‘뭐든지’ 할 수 있단 서약은


| 그는 둥그런 어항같이 생긴 인공자궁에 똬리를 튼, 쌀알처럼 아주 작은 자신의 ‘씨’를 바라봤다.


———······———


「레시」 ⛤

: 만남과 이별, 그리고 재회


| 때때로 말도 안 되는 직감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를테면 네가 죽지 않고 끊임없이 해수면 밑으로 떨어지고 있을 거라는 예감. 그러다 돌연 언젠가 다시 만날 거라는 불가능의 확신. 우리의 이별이 지구에서만 일어난 일일 거라는, 스스로를 향한 같잖은 위안까지도.


———······———


「어떤 물질의 사랑」 ⛤

: 우주를 가로질러서라도 찾아올, 그런 사랑


| “(...) 이 지구에 같은 인간은 없어요. 모두가 다 서로에게 외계인인 걸, 모두가 같은 사람인 척하고 있을 뿐이라는 걸요.”


———······———


「그림자놀이」 ⛤

: 공감하지 않을 수 있다는 건 축복인가 비극인가


| 오직 그 존재에게 위로받고 공감받기 위해서.

  그거면 충분하다는 것을, 이 주인공은 먼 우주에 나와서야 깨닫는 것이다. 끊임없이 그 존재에게 돌아가는 상상을 한다. 이해할 수 없는 말들로부터, 상처뿐인 언어로부터 멀어진 우주에서 제 숨소리를 유일한 소음으로 삼으면서.


———······———


「두하나」

: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 살아가야 할 이 세상


| 물론 이 상황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다음에는 누군가 손을 내밀어야 한다. 세상이 다 그렇게 잔인하지 않다는 걸 누군가는 반드시 끈질기게 말해주어야 한다. 그리하여 다시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게끔 해야 한다.


———······———


「검은색의 가면을 쓴 새」

: 희망과 두려움, 확신과 불확신, 구멍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 얼른 깨달으셨으면 좋겠어요. 기회가 아니에요. 돌파구인 줄 알았겠지만 결국 또 다른 터널에 지나지 않아요.


———······———


「마지막 드라이브」 ⛤

: 인간의 사랑, 그리고 로봇의 사랑


| “행복하면 인간은 어떻게 되나요?”

  한나는 오래도록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미래를 걱정하지 않게 되는 것 같아. 적어도 그 순간에는 그래.”

  더미가 반짝이는 창밖의 도시를 바라보았다.

  “그게 뭔지 조금은 알 것 같네요.”


———······———······———

어떤 물질의 사랑
어떤 물질의 사랑
23-041 | 연여름, 리시안셔스

황금가지 (231001~231011)


❝ 별점: ★★★★☆

❝ 한줄평: ‘꿈같은 빛깔’의 아름다운 이야기 아홉 편

❝ 키워드: 인간성, 반려 | 상실, 극복 | 세탁, 얼룩 | 효율, 즐거움 | 초능력, 히어로 | 좀비, 사회 복귀 | 평행 세계, 차별 | 의식 불명, 이끼 | 고해성사, 기억

❝ 추천: ‘연여름 작가가 마음에 남기는 발자국’이 궁금한 사람


❝ 꿈같은 빛깔의 칵테일 한 잔이었다고 생각해 주세요. ❞

/ 「오프 더 레코드」 (p.384)


📝 (23/10/12) ‘마음에 발자국을 남기는 작가, 연여름이 던지는 인간에 관한 아홉 개의 질문들’이라는 책 표지의 소개처럼, 아홉 편의 단편은 우리가 인간으로 살아가며 고민해 볼 여러 질문들을 마음 한 구석에 가득 남긴다.


  때론 마음이 뭉클해질 정도로 아련하고 슬프지만, 때론 유쾌하고 발랄하다. 때론 꿈 같이 환상적이고 비현실적이지만, 때론 우리의 현실을 닮아 있다. ‘꿈같은 빛깔의 칵테일’을 마신 듯한 몽환적이고도 환상적인 이야기들의 세계. 연여름 작가님이 그려낼 다른 세계들이 더욱 궁금해진다.


———······———······———


「리시안셔스」 ⛤

: 사랑의 기억만 안고 떠나갈 푸른 길


|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운이 좋다면 조금 더 오래 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앞으로 규희는 없을 것이다. 나에게 꽃의 이름을 알려 주던 규희는. 나에게 새로운 두려움을 알게 한 규희는. 가끔은 밉거나 나를 슬프게 해도 그것들을 기꺼이 덮을 만한 애정을 갖게 한 규희는. 이런 상처마저도 감수하게 하는 규희는. (p.60-61)


———······———


「시금치 소테」 ⛤

: 망각할 수는 있어도 도려낼 수는 없는 소중한 기억


| 옵션은 상처 난 부분을 지울 뿐, 새로운 행복을 가져와 주는 도구는 아니다. 그건 미하도 이미 알고 있었다. (p.89)


———······———


「표백」

: 마음의 얼룩도 흔적 없이 깨끗하게 세탁할 수 있다면


| 의료진은 환자의 고통을, 휴인은 빨래의 오염을, 관리자는 휴인에게 불필요한 데이터를 제거한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세탁조처럼, 병원은 얼룩을 지우는 반복 속에 있다. (p.111)


———······———


「제 오류는 아주 심각한 것 같아요」 ⛤

: 더없이 인간적이어서 슬픈 미레이의 마지막 말


| “즐거움은 효율로 계산할 수 없다고요. 이걸 만들면서 즐거웠잖아요. 미레이 씨도." (p.164)


———······———


「가빙 라이트」

: 세상은 못 구해도 일상은 구할 수 있는 히어로


| 오늘밤 까지의 공포나 불안 같은 건 이 스파클라로 태워 보내기로 했다. 친애하는 트친님이자 존잘님과 함께. 짧고도 길었던 대정전을 끝내며.

  불붙일 라이터는 따로 필요 없을 것이다. (p.224)


———······———


「좀비 보호 구역」

: 좀비 바이러스가 퍼져도 또다시 어떻게든 돌아가는 세상


| "먹고 먹히는 세상이란 말, 좀비 사태 아닐 때도 있었잖아요. 세상이 변했다고 해도 그렇게까지 많이 변한 건 아닐 거예요. 어쩌면.” (p.262)


———······———


「비아 패스파인더」 ⛤

: 더 나아질 세상을 위해 멈추지 말아야 할 노력


| "그런데도 도와준대?”

  "응."

  “왜?”

  “결국 우린 다 다른 곳에서 왔으니까?" (p.308)


———······———


「면도」

: 기다리겠다던 사람을 기다리는 사람의 일


| 기다리는 건 네가 아닌, 내가 되었다.

  네게 남은 나의 기억이 얼마나 될지, 답을 알 수 없는 나만 여기에 덩그러니 남았다. (p.335)


———······———


「오프 더 레코드」 ⛤

: ‘꿈같은 빛깔의 칵테일 한 잔’과 함께 한 아련한 고해성사


| 맞아요. 아무리 두들겨도 결코 납작해지지 않는, 무뎌질 줄 모르는 추억은 누구에게나 있죠. (p.379)


———······———······———

리시안셔스
리시안셔스
23-040 | 구병모, 파쇄

위즈덤하우스 (e-book, 231010)


❝ 별점: ★★★★

❝ 한줄평: 돌이킬 수 없고, 돌아갈 수 없는

❝ 키워드: #훈련 #생각 #행동 #칼 #피 #킬러 

❝ 추천: 『파과』를 재미있게 읽었거나 읽고 싶었던 사람


❝ 일단 마음먹고 칼을 집었으면 뜸 들이지 마. ❞


🎯 첫 문장: 강선을 통과한 탄환이 일으키는 회전의 감각이 팔꿈치를 타고 나선형으로 흐른다. (p.5)


📝 (23/10/10) 장편소설 『파과』의 외전으로, 조각(爪角)이 어떻게 킬러가 되었는지를 다루고 있는 단편이다. 아직 『파과』를 읽지 않았는데 『파쇄』 -> 『파과』 순으로 읽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아 이 작품을 먼저 읽게 되었다.


  ‘심장 한가운데 도달해보기는커녕 아직 피 한 방울 묻혀본 적도, 무언가를 썰거나 끊어본 적도 없는 깨끗한 칼날’(p.13) 같았던 어린 ‘조각’이 그를 가르치는 스승이 ‘지시하거나 재촉하는 대로 변해가며 그가 바로잡아야 하는 몸이 아니라, 그냥 그대로 그의 몸 자체가 되어’(p.33) 마지막에는 결국 ‘과녁 아닌 생명을 쏘며 약탈과 섬멸의 언어로밖에 표현할 길 없는 삶을 시작’(p.42)하게 되는 과정을 그려내고 있는 이 소설은 『파과』의 60대 킬러 ‘조각’의 삶을 너무나도 궁금하게 만든다. 돌이킬 수 없는 한 번의 총성, 그리고 돌아갈 수 없는 이전의 삶. 『파쇄』와 『파과』 사이 ‘조각’의 삶에는 무수한 파괴가 있었을까? 그 사이 시간의 이야기도 문득 궁금해졌다.


  구병모 작가님의 다른 소설들처럼 이 소설의 문장들 역시 매우 감각적이고 유려하단 생각을 했다. 생생히 만져질 것 같은 문장들. 그건 내가 계속 구병모 작가님의 소설을 읽고 싶은 이유다.


———······———······———


| 아니, 둘 다 아니다. 늘 생각하되, 생각에서 행동까지 시간이 걸리면 안 돼.

  생각은 매 순간 해야 하지만, 생각에 빠지면 죽어. (p.6)


| 앞으로의 일을 하기 위해 그녀가 되어야 하는 몸, 이룩해야 하는 몸을 부단히 주입시키며 존재 자체를 전지(剪枝)하여죽음의 과수원을 가꿀 것이다. (p.16)


| 손에 쥔 금속이 땀으로 미끈거린다. 그리고 어쩌면 기회는 한 번이다. (...)

  그녀는 두 개의 손 안에 한 세상을 움켜쥐고 부숴버린다. 세상은 불과 한 번의 총성으로 인해, 짓무른 과일처럼 간단히 부서진다. 그 파열음이 벼락처럼 귓전을 갈기지만 그녀는 소리에 무너지지 않는다. 눈앞이 맵다. 이걸로 그 무엇도 돌이킬 수 없고 어디로도 돌아갈 수 없다. (...) 손안에 쥔—애당초 쥔 게 있었던 적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과일과 같은 세상은 씨앗조차 남지 않고, 과육은 진작 분해가 끝난 시신과 같이 흔적도 없다. (p.40)


———······———······———

파쇄
파쇄
23-039 | 임선우, 유령의 마음으로

민음사 (230930~231008)


❝ 별점: ★★★★☆ (24.01.02 수정)

❝ 한줄평: 환상과 일상 사이 그 어딘가에서

❝ 키워드: #유령 #해파리 #나무 #믿음 #도마뱀 #동면 #킬러 #영혼 

❝ 추천: 환상적 존재들이 일상에 스며드는 이야기가 궁금한 사람


❝ 그저 마음을 살리려는 데 전념하는 이야기 ❞

/ (황예인(문학평론가) | 작품 해설, p.278)


📝 (23/10/09) ‘나’조차 외면했던 나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이야기, 반짝이고 아름다운 빛을 내기 위해 떠나는 이야기, 물빛처럼 반짝이며 흘러가는 이야기, 믿음으로부터 도망쳐 각자 자신을 구해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는 이야기, 감당할수 있는 만큼의 다정함을 말하는 이야기, 나를 지키기 위해 남을 해치는 일을 용납할 수 없는 이야기, 죽일 만큼 증오했던 존재와도 하나의 풍경이 되어 버리는 이야기, 그리고 지켜 내고 싶은 것이 있는 마음을 지닌 존재에게 힘을 북돋아주는 이야기. 여덟 편의 이야기는 모두 ‘각자의 마음’이 가득 담긴 이야기다.


| 그리고 남은 이야기들을 통해 작가는 이런 마음이 해낼 수 있고 또 해내야 하는 무엇보다 중요한 일을 보여 준다. 나쁜 세계에서 자신마저 나빠지지 않도록 지켜내는 일 말이다. (…) 하지만 한 사람이 확실히 미칠 수 있는 힘의 범위가 바로자기 자신이라는 세계라고 할 때 결코 실패해서는 안 될 위대한 과업이라 할 수 있다. 대체 나조차 좋아할 수 없는 나 자신으로 살면서 이 세계에 어떤 대단한 영향을 끼칠 수 있단 말인가? (작품 해설, p.273-274)


  ‘갑자기 모든 것이 그리워질 것만 같아 그것들을 마지막으로 떠올려 보기 위해서 눈을 감는’(p.259) 장면으로 끝나는이 소설집이 정말 좋았다. ‘나쁜 세계에서 자신마저 나빠지지 않도록 지켜내는 일’(작품 해설, p.273). 나라는 세계를 지키기 위해 우리가 항상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약속이 아닐까.


———······———······———


「유령의 마음으로」 ⛤


| 잠시 뒤에 유령이 나를 끌어안았는데, 그것은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받아 보는,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완전한 이해였다. 여기까지인 것 같아. 안긴 채로 내가 말했을 때 유령은 그래, 라고 대답해 주었다. (p.28)


———······———


「빛이 나지 않아요」 ⛤


| 사람들은 역시 겁이 많다. 어쩌면 해파리들에게 신, 좀비, 세계 멸망 같은 의도 따위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그저 최선을 다해 반짝이고 있을 뿐일지도. 문제는 해파리가 아니라 사람들이다. 누구에게나 어둠은 무서우니까, 자신의 어둠조차 견딜 수 없는 이들이 빛에 다가서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p.60)


———······———


「여름은 물빛처럼」 ⛤


| 어느 순간에는 푸르른 냄새가 방 안을 가득 채웠는데 산을 쳐다봤을 때 산은 울고 있지 않았다. 산은 이제 울지 않고도 푸르른 냄새가 나는구나. 그 냄새를 맡고 있으니 수로 앞에 서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흐르는 물을 보지 않아도 시간이지나가고 있다는 것을 알 것 같은 기분. 산과 나는 이제 슬픈 마음 없이도 누군가를 그리워할 수 있었다. (p.101)


———······———


「낯선 밤에 우리는」


|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우리는 함께 무언가를 지나가고 있었다. 더디지만 분명한 방향으로, 모난 곳 없이 부드럽게 부풀어 오르는 시간을 지나, 우리는 처음으로 우리가 그리는 목적지에 도달하고 있었다. (p.138)


———······———


「집에 가서 자야지」


| 그렇게 잠들려는 순간 누군가 귓가에 대고 집에 가서 자야지,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는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두리번거렸지만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p.132)


———······———


「동면하는 남자」


| 왜 하필이면 동면을 하신다는 거예요? 하룻밤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진다는 말이 있잖아요. 저에게는 하룻밤보다 많은 밤들이 필요합니다. 남자는 의외로 차분하게 대답했다. (p.187)


———······———


「알래스카는 아니지만」


| 복수가 끝나면 나는 알래스카로 떠날 생각이다. 신호등보다 빙하가 많은 곳. 영영 녹지 않는다는 만년설이 반짝이는 곳. 그곳에서 남은 시간을 인간도 아니고 고양이도 아닌 얼음으로 살아가고 싶다. 얼음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무엇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인간에서 고양이도 되었으니 고양이에서 얼음이 되지 못할 것은 무엇이겠어······. (p.213-214)


———······———


「커튼콜, 연장전, 라스트 팡」 ⛤


| 쏟아지는 빛 속에 선 사람들을 바라보며 나는 힘껏 박수를 쳤다. 그러자 이상한 마음이 들었다. 갑자기 모든 것이 그리워질 것만 같았다. 그러니까 수많은 얼굴을, 주말 아침의 영화를, 허공에 포물선을 그리던 야구공을 다시 사랑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 그것들을 마지막으로 떠올려 보기 위해서 나는 눈을 감았다. (p.259)


———······———······———

유령의 마음으로
유령의 마음으로
23-038 | 조예은, 만조를 기다리며

위즈덤하우스 (231006~231006)


❝ 별점: ★★★★

❝ 한줄평: 깊은 산과 검은 바다가 숨긴 비밀

❝ 키워드: #숨바꼭질 #암석 #바다 #죽음 #종교 #재회 #상실 #정성 #열쇠 #비밀 

❝ 추천: 앉은자리에서 몰입해서 완독 할 수 있는 긴장감 넘치는 단편을 찾는 사람


❝ 우리 숨바꼭질 기억해? ❞


🌊 첫 문장: 어둠 속에서 우리는 죽어가고 있었다. (p.5)


📝 (23/10/08) 


🗻 영산: 

| 영험한 산이라 ‘죽은 자의 소지품이나 뼈를 묻으면 그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전설’이 있음.


🪨 바다 위 등껍질바위

| 20년 전 정해가 죽으려고 했던 곳으로 정해를 구하러 온 우영과 함께 구조되었던 기억이 있는 곳.


🙏 영산교: 

| 영산의 주인인 최양희가 교주인 종교. 신자들은 기도와 공양으로 정성을 다하면 죽은 자와 재회할 수 있다고 믿음.


———······———······———


  위픽 시리즈 중에서도 이 작품이 인기가 많아 보여서 읽어 보고 싶었는데 마침 도서관에 들어왔길래 앉은자리에서 한시간 만에 읽었다. 내가 생각하는 위픽 시리즈의 장점 중 하나는 반나절에 완독이 가능한 부담 없는 분량이라는 것! 이 작품도 중간에 멈출 수 없이 이야기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으로 읽어 내려갔다. 


  친구의 미심쩍은 죽음에 대한 진실을 밝혀 내기 위해 미아도에 내려와 영산교 내부에 잠입한 주인공은 우영과의 과거미아도에서의 만남, 성인이 된 후 서울에서의 만남 등을 차례로 떠올리며 우영의 죽음에 대한 진실에 점차 가까워진다. 


  사실 첫 부분에서 어느 정도 이야기의 전개를 예상해서 엄청난 임팩트 같은 걸 느끼진 못했지만, 그래도 마음에 와닿는문장들이 많아 『테디베어는 죽지 않아』만큼 재미있게 읽었다.


  죽은 자에 대한 그리움으로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산 자들의 마음을 이용하는 건 나쁘다고만 생각했는데, 그들이 기꺼이 속고자 한다면 그건 과연 나쁜 것이라 말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이 들었다. 


  ‘바다 내음을 닮은 슬픔의 냄새’라는 구절도 인상적이었다. 눈물에서 짠맛이 나는 것처럼, 슬픔의 냄새가 바다 내음을 닮았다는 말이 마음에 오래 남을 것 같다.


———······———······———


| ‘하지만 그건 혼자서는 불가능해. 죽은 후에 몸이 산에 묻히는지 바다에 버려지는지 어떻게 알겠어? 내 말을 들어줄 사람이 있어야 하는 거야. 그러니까, 죽어서도 날 기억하고 그리워하는 이가 한 명쯤은 필요한 거야.’ (p.18)


| 오래된 인형, 썩어가는 옷 더미, 곰팡이가 핀 신발과 깨진 그릇들, 이 돌산의 구멍 안쪽을 빼곡히 채운 죽은 자의 흔적과산 자의 그리움. 이룰 수 없는 염원들. 바다 내음을 닮은 슬픔의 냄새. 산지기의 업무는 산 곳곳에 숨은 죽은 자의 물건을찾아내는 것이었다. 그건 아마 영산이 영산인 이래로 아주 오랫동안 이어진 산지기의 업무였을 것이다. 이 물건들은 우영의 아버지가, 우영의 할머니 할아버지와 그들의 증조부가 쌓아 올린 탑이었다. (p.96)


| 그때였다. 등 뒤에서 수풀이 스치는 소리가 났다. 사람이라기엔 가볍고 산짐승이라기엔 분명한 발소리였다. 정해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어떤 전설이 아주 오래 이어진 데에는 이유가 있다고, 정해는 생각했다. (p.128)


———······———······———

만조를 기다리며
만조를 기다리며
[책나눔 이벤트] 지금 모집중!
[김영사/책증정] 내 머릿속 시한폭탄《그래서 지금 기분은 어때요?》 편집자와 함께 읽기[클레이하우스/책 증정] 『축제의 날들』편집자와 함께 읽어요~[한빛비즈/책 증정] 레이 달리오의 《빅 사이클》 함께 읽어요 (+세계 흐름 읽기) [도서 증정] 내일의 고전 <불새> 편집자와 함께 읽어요![📚수북플러스] 2. 귀하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_수림문학상 작가와 함께 읽어요
💡독서모임에 관심있는 출판사들을 위한 안내
출판사 협업 문의 관련 안내
그믐 새내기를 위한 가이드
그믐에 처음 오셨나요?[메뉴]를 알려드릴게요. [그믐레터]로 그믐 소식 받으세요
🧧 두산아트센터 뮤지컬 티켓을 드려요
[초대 이벤트] 뮤지컬 <광장시장> 티켓 드립니다.~6/21
예수와 교회가 궁금하다면...
[함께읽기] 갈증, 예수의 십자가형이 진행되기까지의 이틀간의 이야기이수호 선생님의 교육 에세이 <교사 예수> 함께 읽기[올디너리교회] 2025 수련회 - 소그룹리더
인터뷰 ; 누군가를 알게 되는 가장 좋은 방법
책 증정 [박산호 x 조영주] 인터뷰집 <다르게 걷기>를 함께 읽어요 [그믐북클럽Xsam] 24. <작가란 무엇인가> 읽고 답해요[그믐밤] 33. 나를 기록하는 인터뷰 <음악으로 자유로워지다>
[그믐클래식] 1월1일부터 꾸준히 진행중입니다. 함께 해요!
[그믐클래식 2025] 한해 동안 12권 고전 읽기에 도전해요! [그믐클래식 2025] 1월, 일리아스 [그믐클래식 2025] 2월, 소크라테스의 변명·크리톤·파이돈·향연[그믐클래식 2025] 3월, 군주론 [그믐클래식 2025] 4월, 프랑켄슈타인
6월의 그믐밤도 달밤에 낭독
[그믐밤] 36. 달밤에 낭독, 셰익스피어 2탄 <맥베스>
수북탐독을 사랑하셨던 분들은 놓치지 마세요
[📚수북플러스] 2. 귀하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_수림문학상 작가와 함께 읽어요[📚수북플러스] 1. 두리안의 맛_수림문학상 작가와 함께 읽어요
🧱🧱 벽돌책 같이 격파해요! (ft. YG)
[책걸상 '벽돌 책' 함께 읽기] #23. <냉전>[책걸상 '벽돌 책' 함께 읽기] #22. <어머니의 탄생>[책걸상 '벽돌 책' 함께 읽기] #21. <세계를 향한 의지>[책걸상 '벽돌 책' 함께 읽기] #20. <3월 1일의 밤>
앤솔로지의 매력!
[그믐앤솔러지클럽] 1. [책증정] 무모하고 맹렬한 처음 이야기, 『처음이라는 도파민』[그믐미술클럽 혹은 앤솔러지클럽_베타 버전] [책증정] 마티스와 스릴러의 결합이라니?![책나눔] 어딘가로 훌쩍 떠나고 싶을 때, 시간을 걷는 도시 《소설 목포》 함께 읽어요. [장르적 장르읽기] 5. <로맨스 도파민>으로 연애 세포 깨워보기[박소해의 장르살롱] 20. <고딕X호러X제주>로 혼저 옵서예
반가운 이 사람의 블로그 : )
소란한 세상에서 잠시 벗어나, 책과 함께 조용한 질문 하나씩[n회차 독서기록] 에리히 프롬 '건전한 사회'를 다시 펼치며, 두 번째 읽는 중간 단상
내일의 고전을 우리 손으로
[도서 증정] 내일의 고전 <불새> 편집자와 함께 읽어요![도서 증정]내일의 고전 소설 <냉담> 편집자와 함께 읽어요! [이 계절의 소설_가을] 『냉담』 함께 읽기
제발디언들 여기 주목! 제발트 같이 읽어요.
[아티초크/책증정] 구병모 강력 추천! W.G. 제발트 『기억의 유령』 번역가와 함께해요.(8) [제발트 읽기] 『이민자들』 같이 읽어요(7) [제발트 읽기] 『토성의 고리』 같이 읽어요(6) [제발트 읽기] 『전원에서 머문 날들』 같이 읽어요
🎁 여러분의 활발한 독서 생활을 응원하며 그믐이 선물을 드려요.
[인생책 5문 5답] , [싱글 챌린지] 완수자에게 선물을 드립니다
노예제가 뭐에요?
노예제, 아프리카, 흑인문화를 따라 - 02.어둠의 심장, 조지프 콘래드노예제, 아프리카, 흑인문화를 따라 - 01.노예선, 마커스 레디커[이 계절의 소설_가을] 『이름 없는 여자의 여덟 가지 인생』 함께 읽기
모집중밤하늘
내 블로그
내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