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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는 사람의 기록고즈넉이엔티 (230616~230705)
❝ 별점 : ★★★★
❝ 한줄평 : 올 여름을 시원하게 만들어 줄 것 같은 여섯 편의 작품
❝ 키워드 : #장르소설
❝ 추천 : 다양한 장르의 글을 한번에 만나고 싶은 사람
<SF>
📝 (23/06/23) 김호야, 「눈밭, 자두 씨」
‘냉동인간’이라는 소재는 종종 찾아볼 수 있지만, 이렇게 어두운 면을 다루는 소설은 꽤나 새로웠다. 아빠를 얼려도 될지는 자신에게 아무도 묻지 않았지만, 아빠를 해동시키는 건 자신의 선택에 달려 있다니. 너무 잔인하다. 죽은 것도, 그렇다고 산 것도 아닌, 있지만, 없는 사람인 아빠. 돈이 없어서 계속 냉동 상태로 둘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암 치료를 계속 할 수도 없는 상황. ‘희망을 선택하는 데도 돈이 든다’는 말이 너무나 씁쓸하게만 느껴졌다.
🖋️ 아빠는 돌멩이가 눈사람의 씨앗이라고 말했다. 느티나무 아래 세워둔 눈사람은 햇살에 허물어져갔고, 발길질에 파였고, 진회색 얼룩으로 사라졌다. 눈사람이 품었던 돌멩이 따위는 까맣게 잊었다. 땅을 파고 씨앗을 심고 흙을 덮고 기다리면 비로소 무언가가 시작된다. 시간은 흘러야 했다. (p.38)
결국 아빠는 돌아가셨고, 장례를 치르고 돌아가는 길, 아빠가 뱉었던 자두 씨앗, 그리고 물컵에 남은 물 얼룩만이 누리 곁에 남아 아빠가 이 세상에 존재했었다는 걸 보여준다. 씨앗을 심어야 새로운 생명이 나오는 것처럼, 새로운 생명도 열매를 맺고 또다시 다른 씨앗을 남긴다. 작가의 말에 나온 것처럼 ‘죽음이 영영 이별은 아니라는 것’. 어떤 끝은 또 다른 시작이란 것, 뭐든지 자연스러운 시작과 끝이 좋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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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07/04) 김경락, 「이터널」
죽기 직전까지 젊음을 유지할 수 있는 대신, 백 살이 되는 생일날 법률에 따라 영면에 들어가 내 육체는 소멸되고 내 기억은 디지털 파라다이스로 가게 된다면 당신의 선택은?
젊음을 유지하며 영생을 사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은 있지만, 젊음을 유지하는 대신 죽음을 맞이하는 날이 정해져 있다는 설정은 조금 새롭게 느껴졌다. 이야기 속 세계에선 자연을 거슬러 젊음을 유지할 수 있고, 대신 그 대가로 삶은 백 살 생일에 강제로 중단되고 육체는 소멸되며, 기억은 디지털 데이터화되어 디지털 파라다이스로 가게 된다. 젊음을 선택하는 것이 결국 죽음을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라는 모순적인 상황. 젊음을 선택한 이들은, 결국 자신의 죽음 또한 자신이 선택한 것이라는 걸 인지하고 있었을까?
🖋️ 꿈속에서도 나는 어린 시절의 모든 게 그리워져 눈물을 흘렸다. 자연이 주는 변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어떤 것도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던 시절. 지금 내게는 그 시절의 그 누구도 남아 있지 않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고, 젊음은 영원한 듯했지만 나는 결국 혼자임을 알았다. (p.120)
한 생명이 태어나, 성장하고, 자연스럽게 노화를 맞이해 늙어가며, 결국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영원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 거스른 자연은 그만큼 대가를 요구한다’는 말이 소설이 끝나갈수록 피부로 와닿는 듯했다.
존재의 소멸은 소멸이지만, 조금 다른 방식으로 소멸을 맞이하게 된 주인공. 강제가 아니라는 점에서 주인공은 그래도 자유로워졌을까? 아니면 젊음을 선택하고 자연을 거스르려 했던 자신의 처음의 선택을 마지막까지 계속 후회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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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07/05) 국술호, 「이원화」
나의 이름을 달고 나를 대체할 AI를 내가 교육해야 한다면 난 무엇을 알려줄 수 있을까? 내가 누구인지도 잘 모르는데, 내가 또 다른 ‘나’를 만드는 게 가능할까?
🖋️ 대체 불가능함이라는 게 항상 특별한 것에 붙는 단어인 줄 알았는데 자신과 같은 흐지부지한 존재에도 쓰일 수 있는 거구나, 하고 상현은 생각했다. 자신을 완벽히 대신할 수 없다는 이드의 말에 상현은 다행스러움을 느끼면서 동시에 아쉬움을 느꼈다. (p.167)
상현은 왜 다행스러움과 아쉬움을 동시에 느꼈을까? ‘나’라는 존재가 대체 불가능하다는 것, 그 누구도 나를 완벽히 대신할 수 없다는 건 매우 다행스러운 일 아닌가? 아쉬움을 느낀 이유가 궁금하다.
사실 제목은 「이원화」지만, 마지막에 도상현 AI 상담사가 ’끝을 모르고 증식하는 상담 건수‘에 대응하려 무한히 증식되는 상황을 보았을 때 나를 대체할 누군가를 만든다는 것이 단순하게 ‘이원화‘로 끝나는 게 아닐 거란 생각이 드니 섬뜩해졌다.
<미스터리, 호러, 드라마>
📝 (23/06/23) 오아린, 「조던 시카고를 신고 목을 맨 남자」 (미스터리)
제목과 글 설명만 봤을 때는 자살을 하러 간 사람이 준비를 마친 후 잠깐 잠이 들어 눈을 떴을 때 자신이 죽으려고 매달아 둔 올가미에 걸린 여자를 보고 살인자로 몰릴까 봐 어떻게든 시체를 숨기려고 하는 내용을 예상했었다. 그런데 이게 웬걸! 반전의 반전을 거듭하는 이야기였다.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며 평소라면 꿈도 꾸지 못할 조던 시카고 1994를 ‘폼 나는 마지막’을 위해 거액을 주고 구매하면서도, 월세집에서 죽게 되면 내야 할 거액의 청소료는 아까워 돈이 들지 않는 묫자리를 찾는 박철수. 돈이라는 게 대체 뭔지. 죽음을 준비하는 데도, 죽은 후 시신을 수습하는 데도 돈이 든다는 게 어쩌면 당연한 일인데, 돈이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는 게 굉장히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좀 서글퍼지기도 했다. 「눈밭, 자두 씨」에서는 ‘희망을 선택하는 데도 돈이 든다’ 더니, ‘죽음’을 선택하는 데도 돈이 든다는 게.
그가 찾아 둔 죽음을 위한 장소에는 ’낙엽이라는 죽음이 가득‘하고, 바스락거리는 낙엽 소리를 들으며 박철수는 마지막이라도 외롭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한다. 그는 죽음을 눈앞에 둔 순간, 죽음이라는 낙엽 이불을 덮고, 일종의 죽음의 예행연습이라고도 하는 잠에 빠져든다. 그렇게 잠이 들었다 깨어나자 살인자로 몰려 바로 경찰서 행이라니!
🖋️ “대체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생긴 건지 이해가 안 가요. 전 그냥, 그냥 죽고 싶었을 뿐입니다.......” (…) "저는 말입니다, 갈 때만이라도 폼 나게 가고 싶었어요. 근데 그것조차 안 될 줄은 정말 몰랐어요.” (p.74-75)
’자신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건 오직 자신의 목숨뿐‘이라 생각했던 박철수는 자신의 바람처럼 ‘폼 나게 가지도 못하고’ 살인자라는 누명까지 쓰게 된다. 그런데 그를 도와주러 기적처럼 나타난 구독자 400만 명에 달하는 진실 TV 채널의 운영자 왕산호. 그가 박철수의 진실을 밝히는데 도움을 줄 것이라 생각했는데, 놀랍게도 진실은 따로 있었다. 문득 애드가 앨런 포의 「검은 고양이」의 주인공이 떠올랐다. 왜 완전범죄를 꿈꾸고 성공을 거의 눈앞에 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범행을 티 내지 못해 안달인 걸까? 나로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자신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건 오직 자신의 목숨뿐‘이라던 박철수의 생각은 두 번의 자살시도 후 바뀌었을까? 사실 첫 번째 자살 시도는 잠이 드는 바람에 해보지도 못했기 때문에 (사실 난 잠도 일종의 죽음이라 했을 때 죽음을 체험한 것과 다름없다 생각하긴 했다) 또다시 자살을 시도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서 제대로 회색 후드 올가미에 목을 매고 어둠이 찾아왔단 구절에 박철수가 죽은 줄 알고 정말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다시 깨어난 박철수의 모습에 그의 미래에도 희망이 있을 거란, 근거 없는 믿음이 생겨났다. 그래서 작가의 말에서 ‘희망을 주는 글을 쓰고 싶었다’는 말과, ‘올가미는 사람을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다’는 말이 참 좋았다. 박철수가 죽음 또한 자신이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것이라는 걸 깨닫고, 죽기 위해 단단히 묶었던 올가미만큼 다시 살아가기 위해 조던 시카고의 신발끈을 단단히 묶고 세상으로 묵묵히 걸어 나가길 바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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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07/04) 정종균, 「13분 27초」
삼촌은 미쳐 버려 환영을 봤던 걸까? 아니면 이미 무간지옥에 갇혀 새로운 13분 27초를 만들어 가고 있지만 그곳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해 주인공에게는 보이지 않는 걸까?
🖋️ 나도 그들이 했던 것처럼 울고, 두려워하고, 웃고, 피하고, 기도하고, 반항하면서 매번 다른 13분 27초를 완성하겠지. 거기는 그저 새로운 무대일 뿐이야. (p.151)
‘우리 역시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죽음을 기다리면서 무수히 많은 13분 27초를 반복하고’ 있으며, ‘결국 지옥이라는 곳은 별것 아닐지도 모르며, 어쩌면 살아 있다는 게 곧 죄이고, 우리는 각자의 지옥 속에서 그 죗값을 치르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는 작가의 말이 가장 섬뜩하게 느껴졌다. 비디오 안에 갇힌 세 명과 그 비디오를 바라보고 있는 삼촌. 인간 세계에 대입해 생각해 보면, 우리 인간은 지구의 많은 생물들과 자연환경을 착취하고 잔인하게 괴롭히고 있는 삼촌 같은 존재일 지도, 그래서 정말 우리가 살아 있는 것이 죄이고, 서서히 이루어지고 있는 지구 파괴의 과정을 온몸으로 느끼며 살아가는 동안 그 죗값을 치르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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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07/05) 백다도, 「그녀의 이중생활」
누군가를 좋아하는 데 꼭 이유가 필요한 건 아니지. 타인이 좋아하는 것을 함부로 폄하하거나 한심하다 여겨선 안 되는데, 무의식적으로 그런 편견을 가졌던 몇몇 기억들이 떠올라 반성하게 되었다. ’좋아하는 마음 그 자체는 모두 소중한 것‘이고, 누군가는 그 마음으로 인해 살아갈 힘을 얻는다는 작가님의 말이 애틋해서 좋았다.
🖋️ 남들이 보기에는 이 사랑이 나를 포기하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난 이 사랑으로 기뻐하고, 순간적으로 흘러갈 행복을 감지하고 누릴 수 있게 됐다. (p.224)
누구나 주변에 ’덕질‘ 중인 친구 한 명쯤은 있지 않을까. 나에겐 누군가가 이상하게, 한심하게 여길까 봐 드러내놓고 자신이 좋아하는 대상을 밝히지 못하는 친구도 있고, 너무나 자랑스럽게 호시탐탐 ‘내 새끼’ 자랑 타임을 노리는 친구도 있다. 모두 너무 귀엽고 또 귀엽다. 사실 누군가를 맹목적으로 좋아하는 일이 이제 쉽지 않다고 느낀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데는 생각보다 많은 에너지가 들기 때문이다. 그 사랑으로 기뻐하고, 그 순간의 행복을 만끽하며 살아갈 힘을 얻는 사람들이 소중하고 또 대단하다 느껴진다. 모두가 당당하게 좋아하는 이를 자랑할 수 있기를 바란다. 좋아하는 데는, 별다른 이유가 필요하지 않으니까!
한겨레출판 (e-book) (230324~230702)
❝ 별점 : ★★★★
❝ 한줄평 : ‘결국 ‘다른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말은 나를 버리지 않는다는 말’ (윤성희)
❝ 키워드 : #여자 #과거 #사과
❝ 추천 : 과거에 받은 상처로부터 앞으로 나아가고 싶은 사람
📝
소설을 읽기 전엔 『다른 사람』이라는 제목의 의미가 정말 궁금했고, ‘other’라는 의미가 아닐까 생각했는데, 다 읽고 난 후에 ‘다른’의 의미에 ‘other’도 있지만, ‘different’도 있었음을 깨달았다. ‘결국 ‘다른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말은 나를 버리지 않는다는 말’이라는 윤성희 소설가의 추천의 말이 이 소설을 잘 설명해 주는 말이란 생각이 든다.
❝ 우리는 여자애들이었다. 해도 되는 것보다 해서는 안 되는 것들을 더 많이 배운 여자애들. 된다는 말보다 안 된다는 말을 더 많이 듣고 자란 여자애들. (p.50)
❝ 처음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이미 많은 시간을 지나왔다. 강승영은 말했다. 우리는 과거에 지배당할 필요가 없다고. 맞는 말이다. 하지만 아직 과거가 끝나지 않았다면 어떨까. 아직 내가 멈춰진 시계 위를 걷고 있는 거라면. (...)
하지만 내가 단추를 잘 잠근 채 살았다고 착각한다면?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알아채지 못하고 그대로 살았다면? 그래서 계속 단추를 어긋난 자리에 맞춰왔던 거라면? 아니면, 단추가 잘못 잠겼다는 걸 모른 척하고 살았던 거라면? (p.256-257)
❝ 이것이 나의 첫 단추다. 그것은 김동희에게서, 그리고 이진섭에게서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것이다. 그들이 나에게 반드시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말. 하지만 한 번도 제대로 듣지 못했던 말. 나 역시 너에게 결코 하지 않았던 말. 언제나 그 말이 마음속에 들어 있었다.
나는 말했다.
“수진아, 그때, 널 그곳에 두고 가서 진짜 미안해.”
정말 미안해. (p.262-263)
❝ “요즘 처음으로 제대로 된 시간을 넘어가고 있다는 기분이 들어.”
그녀가 말했다. 나는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해 듣고만 있었다. 그녀는 또 말했다. 지금까지 항상 무언가를 선택해왔다고 믿었지만, 사실 그건 그냥 열쇠를 들고 있다는 기분을 위해서였을 뿐이라고. 내가 들어온 문이니까, 내가 열 수 있다. 사실은 어느 문도 열 수 없는 가짜 열쇠를 들고 스스로를 위안했을 뿐이라고.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고 했다. 문은 열쇠로만 여는 것이 아니니까. 수진은 말했다. (p.266)
꽤 무거운 내용이라 리뷰를 어떻게 써야 할지 고민하다 보니 완독한 후로 시간이 꽤나 지났다.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겠다. 단아, 수진, 진아, 그리고 유리. 다른 사람이지만 다르지 않은 사람들. 그리고 여자들. 아픈 과거를 완전히 정리하지 못했던 이들이 다시 만나 진실을 마주하려 하고, 어긋난 단추를 제대로 바로잡으려는 노력을 하고, 하지 못했던 사과를 하고, 과거와는 ‘다른 사람’이 되기 위한 노력을 하는 과정. ‘이야기는 마무리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이 시작될 때일지도 모른다’는 말. 섬뜩하면서도 큰 울림을 주는 말이다.
문학동네 (230101~230417)
❝ 별점 : ★★★★
❝ 한줄평 : 다른 모든 색들을 가능하게 하는 색, 흰색.
❝ 키워드 : #애도 #결핍 #필요 #인간
❝ 추천 : 인간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고 싶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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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것들을 준다는 건 많은 의미가 있겠지만 '새것', '깨끗한 것', '순수한 것'의 느낌이 가장 많이 떠오른다. 그걸 다 종합하면 좋은 것만을 주고 싶다는 말과 동일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 그녀는 너무 추워서 바다가 얼어 있는 풍경을 본 적 있다. 수심이 낮고 유난히 잔잔한 바다였는데 해변에서부터 파도들이 눈부시게 얼어 있었다. 켜켜이, 하얀 꽃들이 피다가 멈춘 것 같은 광경을 보며 걷자니 모래펄에 흩어진 얼어붙은 흰 비늘의 물고기들이 보였다. 그 지방의 사람들은 그런 날을 ’바다에 성에가 끼었다'고 한다고 했다. (p.47, ‘성에’)
📝 바다도 얼 수 있구나 깨닫게 해 준 구절. 추운 겨울날 하늘을 올려다보면 눈이 시릴 정도로 빛이 나 눈이 부시다 생각한 적이 있다. 그런 하늘처럼 파도도 눈부시게 얼 수 있구나 생각했다.
❝ 눈송이가 성글게 흩날린다.
가로등의 불빛이 닿지 않는 검은 허공에.
말없는 검은 나뭇가지들 위에.
고개를 수그리고 걷는 행인들의 머리에. (p.54, ‘눈송이들’)
📝 '흰' 것과 '검은' 것들의 대비가 좋았던 문장. 나뭇가지 위에 살포시 쌓인 눈을 예쁘다고만 생각했었는데 ‘말없는 검은 나뭇가지들’이라 표현한 것이 색달랐다. 어쩌면 나뭇가지들에게 아무리 작은 눈송이라 할지라도 그 무게가 무겁게 느껴졌을 수도 있을까?
❝ 도대체 인간이란 무엇인가? 모리스 블랑쇼는 조르주 바타유를 인용하면서 이렇게 썼다. "모든 인간 존재의 근본에 어떤 결핍의 원리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타자를 필요로 한다. 타자를 필요로 하는 존재. 그것이 인간이다. (...) 그러므로 결핍은 충만함의 반대가 아니라 오히려 초과로 이어진다. 이 초과를 위해 인간은 타자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타자와의 만남이 없을 때, 인간은 자기 자신 안에 갇히게 되며 무감각해질 뿐이다. (p.164-165)
📝 아직 읽지 않은 한강 작가의 작품들이 많아 문학평론가의 해설에서 차곡차곡 쌓아가는 질문의 서사는 아쉽게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좋은 문장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고, 작품을 조금 더 이해하는데도 도움이 되었다. 텅 빈 것 같이 보여도 다른 모든 색들을 가능하게 하는 색, 흰색. 근본에 결핍이 있어 타자를 필요로 하는 존재가 인간이지만, 오히려 초과로 이어지는 결핍.


한겨레출판 (e-book) (230313~230323)
❝ 별점 : ★★★
❝ 한줄평 : 이별은 슬프기만 한 것은 아니야
❝ 키워드 : #이별 #사랑 #만남
❝ 추천 : 쟐 이별하고, 잘 사랑하고 싶은 사람
❝ 산다는 건 시간 속을 지나간다는 것이다. 시간 속을 지나간다는 건, 매 순간 우리가 우리를 떠난다는 것, 우리 자신을 지나간다는 것이다. 매 순간 존재하는 단 한 번의 우리와 매 순간 이별하면서 매 순간 다음 순간의 우리로 달라진다는 것, 그것이 시간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산다는 것, 그것은 매 순간 우리 자신과 이별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의 주인이 아니다. 그때 거기에 존재했었던 우리를 우리는 지나가야만 하니까, 떠나가야만 하니까. 그리하여 우리는 본질적으로 허무주의자이다. (p.87)
❝ 우리가 지나간 사랑을 그리워하는 건 그 사람을 여전히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다.
누구나 삶 속에서 특별한 사람을 만난다. 그 사람은 우리에게 생의 어느 특별한 비의를 가르쳐준다. 그러나 우리는 그 비의의 진실을 그 사람이 떠난 뒤에야 깨닫는다. 우리가 떠난 사람을 다시 그리워하는 건 그 진실을 이번에는 제대로 살아보고 싶기 때문이겠지만 그 사람은 이제 없다. 그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는 없고 그가 가르쳐준 비의의 진실만이 혼자 있다.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는 우리에게 진실을 알려주고 떠나서 절대로 돌아오지 않는 사람이다. 이것이 사랑과 세월 사이의 비극이다. (p.129)
📝
이 책을 마음 깊이 제대로 느낄 수 있는 날이 오게 될까 궁금해졌다. 많은 부분에서 마음 깊이 공감하기는 어려웠지만 참 좋은 문장들이 많았다. 나에게는 단순히 사랑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관계에 대입해서 생각해 봤을 때 공감되는 부분들이 더 많았다.
특히 ‘산다는 것, 그것은 매 순간 우리 자신과 이별한다는 것이다.’라는 구절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살아가면서 늘 새로운 나와의 만남, 타인과의 만남과 이별을 생각했지 살아간다는 것을 나 자신과 이별한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그런데 이 구절을 만난 후 새로운 나 자신과의 만남이 과거의 나 자신과의 이별과 같은 말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에 ‘더 나은 사람이 되자’는 말은 마음에 담아두고 살려고 하는 편인데, 그러기 위해선 나 자신과 잘 이별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느꼈다.
좀 더 많은 관계를 맺고 좀 더 살아간 후에 이 책을 읽게 된다면 인상적인 구절이 또 바뀌겠지? 같은 책을 여러 번 읽으면 과거의 내가 남긴 기록을 미래의 내가 보고 또 다른 생각을 남길 수 있다는 게 묘미인 것 같다.
곰출판 (e-book) (230207~230209)
❝ 별점 : ★★★★★
❝ 한줄평 : 무조건 믿지 말고 모든 것을 의심하라
❝ 키워드 : #과학 #질서 #혼돈 #진실
❝ 추천 : 세상을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보고 싶은 사람
항상 ‘질서’만이 미덕이라고 여겨왔던 나에게 ‘혼돈만이 유일한 지배자’라고 말하는 것은 매우 색다른 관점이었다. 그리고 ‘혼돈’을 거부하고 계속해서 ‘질서’를 세우려는 시도가 번번이 좌절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곧바로 아무렇지 않은 듯 툭툭 털어내고 다시 시작하는 데이비드의 이야기가 계속 알고 싶어졌다.
글쓴이가 파헤쳐 가는 데이비드의 인생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사람은 정말 다양한 면모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가 훌륭한 학자였을지는 몰라도, 훌륭한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질서’를 세우기 위해 그는 얼마나 많은 ‘무질서’들을 만들어냈던 것일까?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데이비드의 폭군 같은 면모에 조금 소름이 돋았다.
결국 질서를 만들려는 노력은 인간이 살아가는데 큰 도움이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돈에서 생명을 살아남게 하는 것은 ‘질서’가 아닌 ‘변이’이기 때문이다.
우생학이 미국에서 그렇게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는지 이 책을 읽으며 처음 알았다. 그리고 그것이 사실은 그렇게 오래전 일이 아니라는 사실도 충격적이었다. 몇몇 인간의 잘못된 확신과 믿음이 대체 얼마나 많은 생명을 앗아간 것일까.
❝ 이제야 나는 나의 아버지에게 할 반박의 말을 찾아냈다. "우리는 중요해요. 우리는 중요하다고요!" 인간이라는 존재는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방식으로 이 지구에게, 이 사회에게, 서로에게 중요하다. 이 말은 거짓말이 아니다.
인간이 아무리 우주의 먼지 한 톨보다도 작은 존재라 할지라도, 그래서 우주에게 있어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존재일지라도, ‘우리는 모두 중요한 존재’ 일 수 있다는 믿음. 서로가 서로에게 하나의 우주가 될 수도 있다는 믿음. 누군가에겐 별 거 아닌 것처럼 여겨질 수도 있는 사실이지만 나에게는 큰 위로가 되는 말이었다. ‘우리는 중요해요.’
마지막 부분에 와서야 왜 이 책의 제목이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인가에 대해 알 수 있었다. 과학은 언제나 이성적이고 옳은 것이라고 믿었던 나에게 이 책은 많은 깨달음을 주었다. 지금 우리가 진실이라고 믿고 있는 과학적 사실들이 미래에는 거짓이라고 밝혀질 수도 있는 것이고, 심지어는 파괴적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그들의 굳건한 믿음을 바꾸는 것을 꺼리는 편이다. ‘편안함을 진실과 맞바꾸지 않을 것’이라는 말처럼 엄청난 노력과 끊임없는 투쟁이 없이는 진실을 바꾸기란 쉽지 않다. 그렇지만 우리는 끊임없이 의심하고, 진실이 정말로 진실인지 의문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잘못된 믿음 안에 매몰되어 거짓된 세상 안에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 물고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이 세계에 관해 아직 모르고 있는 것은 또 뭐가 있을까? 우리가 자연 위에 그은 선들 너머에 또 어떤 진실이 기다리고 있을까? 또 어떤 범주들이 무너질 참일까?
우리는 인간이 자신의 편의를 위해 정리해 놓은 범주와 틀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 ‘질서’를 지키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기준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늘 그 기준이 옳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 세계에 올바른 답이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다. 다만 혼돈을 정리할 그 시대의 기준만이 있을 뿐이다. 과학도 그러하다. 과학이 늘 옳다는 믿음을 버리고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언제나 변화하고 있음을, 단지 혼돈을 정리해 놓은 틀이 있음을, 그 틀은 언제든 진실이 아님이 밝혀질 수 있기에 무조건적으로 믿어서는 안 됨을 늘 기억하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더클래식 (230104~230123)
❝ 별점 : ★★★★
❝ 한줄평 : 영원한 비밀은 없다
❝ 키워드 : #세계문학 #비밀 #두려움 #젊음 #아름다움
❝ 추천 : 영원히 숨기고 싶은 비밀을 간직한 사람
❝ 그는 사람들이 초상화를 봐도 아무것도 못 알아낼 거라는 걸 알았다. 초상화가 추하고 역겨운 얼굴 속에 그의 얼굴과 닮은 구석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렇더라도 사람들이 무엇을 알아낼 수 있을까? (…) 하지만 그래도 그는 두려웠다. (p.46)
📝 (23/01/07) 아름다운 얼굴 뒤에 가려진 추악한 초상화의 비밀을 언제까지나 간직할 수는 없었을 텐데. 역시 나는 죄를 저지르고는 못 살 것 같다. 죄가 밝혀질까 평생을 두려움에 떨며 살다가는 먼저 미쳐버려 내 스스로 죄를 고백해 버리고 말 지도 모르니까. 그 누구도 알지 못하고, 알 수 없다 하더라도 결국 나 자신을 속이고 사는 것은 엄청난 고통이 따르는 일일 것이다.
❝ "맙소사! 내가 숭배한 게 저런 거라니! 저건 악마의 눈이야."
”배질, 사람은 누구나 마음 속에 천국과 지옥을 함께 갖고 있어요."
(…) 추악함과 혐오스러움은 분명히 그림 안에서 나온 것이었다. 내면의 어떤 생명체가 기괴한 모습으로 살아나면서 나병과 같은 죄악이 서서히 그림을 파먹은 것이었다. 물에 잠긴 무덤에서 썩어 버린 시체보다 더 보기 끔찍했다. (p.75)
📝 (23/01/13) 불쌍한 배질! 훌륭한 그림을 그려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추악한 도리언의 초상화의 비밀을 알게 되었단 이유로 무참히 살해당하는 결말을 맞고야 말았다.
사실 여기서는 '마음 속 천국과 지옥'이라는 표현이 인상적이었는데, 나는 인간의 성악설을 믿는 쪽이고, 후천적으로 착해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마음에는 처음부터 지옥이 존재했고, 그 지옥을 밀어낼 천국의 크기를 얼마나, 어떻게 늘려갈 것인가가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 관건이라고 생각한다. 도리언도 분명 본성이 악했는데 헨리의 말로 각성해 그 억눌렀던 것을 초상화라는 수단 뒤에 숨어 표출하는 것뿐이다.
❝ 죄 없는 사람들이 피를 흘렸는데 그것을 무엇으로 보상할 수 있을까? 오, 그것은 절대 속죄할 길이 없었다. 하지만 용서받지 못한다고 해도 망각은 언제든지 가능하다. 결국 그는 잊어버리자고, 과거 일에 대한 기억을 몽땅 없애 버리자고, 사람을 문 살무사를 짓밟듯이 기억을 짓밟자고 다짐했다. (p.124)
📝 (23/01/20) 범죄자들이 뻔뻔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가 망각이 아닐까? 상처를 주거나 범죄 잘못을 저지른 가해자는 용서받지 못해도 피해자가 자신의 상처와 아픔을 쉽게 극복하지 못하는 것과는 달리 자신의 죄를 쉽게 망각할 수 있다. 망각은 자기 위안과 합리화의 효과적인 수단이기도 하다. 많은 범죄자들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며 기억상실과 망각을 핑계로 대기도 한다. 참 불공평한 일이다. 아픔을 준 사람은 그 사실을 쉽게 잊을 수 있는 반면, 아픔을 받은 사람은 그것을 잊고자 해도 잊을 수 없다니.
❝ 방 안으로 들어선 그들은 근사한 초상화 한 점이 벽에 걸린 것을 발견했다. 이 초상화는 그들 주인의 얼굴을 그린 초상화였다. 미모와 젊음을 간직한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바닥에는 야회복 차림의 남자가 가슴에 칼이 꽂힌 채 죽어 있었다. 주름투성이에 야위고 역겨울 뿐만 아니라 흉측한 몰골이었다. 그들은 그 사람의 손에 낀 반지들을 살펴본 다음에야 그 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p.198-199)
📝 (23/01/23) 도리언은 자신의 실체를 아는 모든 것을 없애면 안전해지고 마음 편하게 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나 보다. 하지만 초상화와 자신의 생명의 짐을 나누어 짊어진 순간 그는 초상화와 연결되어 한 배를 타버린 것이다. 결국 초상화를 찌르는 것은 자신을 죽이는 행위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도리언이 초상화를 찌르자 그가 살아 있을 때와는 반대로 초상화가 본래의 모습을 되찾고 도리언의 시체는 그동안 그가 초상화에 떠넘기고 있던 추악함과 늙음, 흉측함을 모두 돌려받은 상태로 변했다.
결국 인간은 자신의 본성의 추악함과 흉측함을 드러내지 않고 꽁꽁 숨길 수 있을 것이라 착각하지만 그 실체는 언젠가 반드시 드러나기 마련인 것이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346 (230117~230119)
❝ 별점 : ★★★
❝ 한줄평 : 아직 내게는 어려운 시인
❝ 키워드 : #시 #모순 #어른 #사랑
❝ 두 줄기의 햇빛 / 두 갈래의 시간 / 두 편의 꿈 / 두 번의 돌아봄 / 두 감정 / 두 사람 / 두 단계 / 두 방향 / 두 가지 사건만이 있다 / 하나는 가능성 / 다른 하나는 무(無)
/ 「둘」
❝ 고독이란 자고로 오직 자신에게만 아름다워 보이는 기괴함이기에
❝ 즐거움과 슬픔만이 나의 도덕 / 사랑과 고백은 절대 금물 / 어떻게 살아왔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에 대해서는 결단코 침묵이다
/ 「구름과 안개의 곡예사」
❝ (…) 삼십대, 다 자랐는데 왜 사나, 사랑은 여전히 오는가, 여전히 아픈가, (…) 창밖, 가을비 내린다, 삼십대, 나 흐르는 빗물 오래오래 바라보며, 사는 둥, 마는 둥, 살아 간다
/ 「삼십대」

